겨울의 기원
최형심
입술을 나누어 휘파람을 불면 뒷모습만 남는다
이제 나는 문밖의 계절,
어둠에 닳은 발자국을 끌고 그리운 것들은 발꿈치를 들고 지나간다
이른 봄, 잔설(殘雪)이 땅 밑으로 제 뿌리를 묻는 것을 보았다
한때 연이파리 또르르 굴러 내게 이르던 어둠,
이제 연잎의 나날은 연잎의 것
더러 너그러워지는 눈썹을 바라보면 나를 이룬 밤과 낮이 밀서(密書)처럼 서러워라
알전구들 여인숙 처마 밑으로 몰려들고 저마다 그늘을 내려놓으며
날이 저문다. 한 줌의 체온으로 밝아오는 거리,
발자국 소리를 들으며 자란 외눈박이 등불의 표정이 환하다
가로등지기별 이역(異域)이 적막한 발음으로 젖어들면
함박눈에 젖은 창밖, 늘 겨울이었던 어머니의 양팔 가득 하얀 나비 떼가 날아든다. 그 품에서
나비가 되고 지붕이 되고 바다가 되어 떠나는 낱장의 파편들
곱은 손으로 바오밥나무 그늘을 접어 날리는 날, 바람 부는 골목의 안쪽을 들여다보면
열두 살 가는 목에 눈발이 닿는다
내가 나의 뒷면으로 옮아가는 기억의 저편
바다의 푸른 등을 굽는 저녁마다 자욱하게 달빛 타는 냄새가 차오르고
맨발이어서 더 간절한 것들, 모국어 없이 꿈을 꾼다
발자국은 겨울을 향해 자란다
—《시와 미학》2012년 봄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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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형심 / 1971년 출생. 서울대학교 외교학과 졸업.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박사 수료. 2008년 《현대시》로 등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