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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주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하다. 1
학교 생활을 30년 넘게 하다보니 슬슬 지치기 시작하면서 은퇴를 생각하게 되었고 은퇴 이후의 삶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되었다. 그러다 우연히 괴산에 있는 북스테이 숲속작은책방을 알게 되었고 친구들과 함께 방문도 해보게 되었다. 숲속작은책방을 운영하시는 분도 직장생활을 하다 은퇴를 해서 괴산으로 내려와 북스테이를 하고 있었다. 숲속작은책방은 넓은 거실 공간을 책방으로 운영을 하고 다락방을 숙소로 제공하는 곳이었는데 자녀들이 어렸을 때부터 사모아 놓은 여러 종류의 그림책들이 인상적이었다. 화려하고 섬세하게 만들어진 해외 팝업북도 여러 종 있었고 책방에서 파는 책 외에도 다락방에 좋은 책을 많이 소장하고 있었다. 그 곳을 방문하기 전에도 그 책방을 소개하는 글을 읽고 동경해왔던 터라 은퇴하면 꼭 북스테이를 해야겠다는 생각을 굳히게 되었다.
어디에 어떤 집을 마련해서 하는 게 좋을까를 긴 시간 고민하게 되었다. 내가 살던 삼산면의 집은 새로 짓지 않고 계속 살 집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곱시면 대중교통이 끊기는 곳이어서 아들이 다니기 불편해 했다. 짜장면이나 치킨 같은 것도 배달이 되지 않는 것도 아들의 불만 중 하나였다. 읍으로 이사하면 어떨까 생각해 봤다. 그런데 해남의 부동산 값이 어느 순간부터 정신없이 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해남에 처음 왔을 당시에 공간아파트를 살 수 있었던 금액의 돈으로는 공간아파트 전세도 얻기 어려운 수준이 되어 버렸다. 10년이 넘게 해남에서 살다보니 새로운 곳에서 살고 싶은 마음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나에게 약간의 방랑 기질이 있는 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러는 중에도 평택에 사는 딸네 집엘 종종 다녀오게 되었다. 애들이 아파서 혹은 애들이 보고 싶어서 등등. 승용차로 다섯 시간이 되는 거리를 다니다보니 좀 더 가까운 곳에 살고 싶어졌다. 어디쯤이 좋을까 생각해보게 되었다. 전주가 맘에 들어왔다. 딸이 전주에서 대학을 다녀 딸 보러 종종 왔던 곳, 친구들이 없어도 재미있는 일이 많은 곳, 평택에서 두 시간 정도 걸리는 곳, 딸 결혼식도 이곳에서 했고 등등의 이유로 전주로 이사하면 좋지 않겠나 생각이 되었다.
그래서 명예퇴직을 하고 해남에서 지내는 동안 종종 전주로 집을 보러 다니게 되었다. 처음 전주에 와서 낭만샘을 만났는데 낭만샘은 완주의 고산면을 추천해 주었다. 낭만샘의 아들이 고산의 고등학교에서 음악 교사를 하고 있는데 고산은 마을 공동체가 잘 되어 있는 동네라고 했다. 낭만샘도 잘 알고 낭만샘의 아들과도 잘 알고 있는 마을의 카페 운영자를 만나 조언을 들으려 했으나 가는 날이 장날이라고 그날따라 자리를 비우고 저녁에나 돌아온다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기다리고 있을 수 없어 다음을 기약하고 그냥 돌아왔다. 돌아와서 전주 인터넷 교차로에 들어가 부동산 정보를 검색해봤다. 그런데 고산의 부동산이 기대만큼 저렴하지 않았다. 게다가 나오는 토지들은 어지간하면 이삼백 평이어서 감당할 엄두가 나지 않았다. 140평도 감당하지 못해 도망친 내가 아니던가. 나는 백평 이하의 땅을 원했지만 그런 땅은 도무지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애초에 내가 생각해 뒀던 서서학동을 검색해 봤다. 서서학동에는 내가 갖고 있는 돈으로 살 수 있는 단독주택 매물이 제법 나와 있었다. 몇 군데를 골라서 부동산에 연락하고 보러 갈 약속을 잡았다. 그런데 막상 가서 보니 내 생각과 많이 달랐다. 다 뜯고 새로 지어야 할 상태인 집, 아들과 살면서 게스트 하우스를 하며 살기에는 좁은 집, 주로 그런 집들이었다. 그런데 그 집을 그 가격을 주고 사서 고치거나 새로 짓거나 할 만한 여유가 없었다. 한 곳은 넓지는 않지만 마당에 부추가 자라고 있고 집 앞에 차를 댈 수 있고 그럭저럭 살 수 있을 것 같았고 처음에 부른 것보다 천오백만원을 깎아 주겠다고까지 했다. 그런데 쓸 수 있는 방이 두 개 밖에 없어 내 살림살이를 갖고 들어가 살기에는 좁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집이라면 게스트 하우스 같은 건 엄두도 낼 수 없었다. 그러다 문득, 이 쪽이 구 도심이라 30평대 아파트도 1억 못 주고 산다는데 일단 아파트를 사서 이사오고 살면서 주택을 천천히 살펴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들어 부동산업자에게 이 동네에 아파트 나온 거 있으면 보여 달라고 했다.
사실 아파트를 사기로 결정한 것은 완전 얼떨결에 한 것이었다. 나도 내가 왜 그랬는지 모르겠다. 두 번도 보지 않고 결정했다. 앞 베란다 창으로 보이는 소나무 때문이었을까? 가격을 깎을 생각도 하지 않았다. 이 근처의 26평 아파트로는 가격이 좀 비싸다는 것도 생각하지 않았다. 장거리 운전의 피로로 머리가 어떻게 되었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초스피드로 아파트 매매 계약을 하고 해남으로 돌아와 같은 동네에 주택 매물 나온 게 있나 살펴봤다. 아파트를 구입하고 남은 돈으로 살 수 있는 집을 찾는 건 쉽지 않았다. 서서학동이 구도심이어서 매물로 나온 주택은 종종 있었지만 일억오천 위아래의 가격이 주를 이루어서 나에게 남은 돈으로 사기에는 저렴하지 않았다. 그러던 중 대지가 68평인 집이 일억이 못되는 가격으로 나온 걸 발견하게 되었다. 아파트를 계약하기 전에 일억 오천에 나온 주택은 대지 43평에 집이 좁아 포기했는데 많이 저렴하게 나온 집을 보니 당장 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작년 여름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이 있었는데 그렇게 엄청나게 비가 쏟아지는데도 다음날까지 기다릴 수가 없어 부동산과 연락하고 그 길로 나서 전주로 달려갔다. 해남이나 광주에서 지금 내가 사는 서서학동으로 네비를 찍으면 88고속도로를 타다가 순창에서부터 국도를 타면서 가게 안내를 한다. 그런데 그날 전주에 가면서 국도 옆 산에서 엄청난 양의 물이 쏟아지는 걸 보고 돌아올 때는 일부러 김제 쪽으로 해서 고속도로를 타고 장성 방향으로 내려올 정도로 많은 비가 오는 날이었다. 그렇게 단김에 달려가서 집을 봤다. 그동안 봤던 집들은 비어있는 집들이 많아 손을 많이 봐야 할 것 같아 그 비용이 겁나 포기한 것도 있었는데 그 집은 사람이 살고 있어 크게 손 볼 것이 없을 것 같았다. 다만 화장실 위치가 거실보다 낮고 그 위에는 다락이 있어 그게 단점이 될 수도 있고 매력있는 부분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방은 여러 개 있어 공유숙박을 하기에는 적당할 것 같았다. 그리고 다른 곳도 아닌 전주 시내에서 1억이 못 되는 집이라니, 내가 이사할 예정인 아파트에서 10분도 안 걸리는 거리인 것도 구매 결정에 영향을 주었다. 여러 가지 생각할 것도 없었다. 게다가 주인은 골목 안 집이라 싸게 파는 거다. 지금 이 집 앞으로 6미터 도로가 계획되어 있다. 한 집만 도장찍으면 곧 길이 날 거다 하며 지금 당장 집 앞에 차가 서지 못 하는 불편이 곧 해소될 것처럼 이야기했다. 그 집도 단박에 계약을 해버렸다. 계약을 하고 내려 오면서 내가 너무 성급하게 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이미 계약을 해부렀는 걸, 이젠 죽이 되든 밥이 되든 밀고 가야제 어쩌겄어 하며 슬며시 드는 불안한 생각을 지워 버렸다.
그 즈음이었을까 8월 무렵에 해남에서 자주 만나고 ‘해남여성의소리’라는 모임에서 같이 활동하기도 하는 은정이라는 친구가 자기 친구를 한 명 나에게 소개해 주었다. 휴대폰 앱 개발 사업을 하고 있으면서 부업으로 주택 리모델링을 하는 친구라 했다. 그리고 책도 몇 개 쓴 친구라고 했다. 내가 전주에 집을 하나 사서 리모델링을 해서 북스테이를 하려고 하는데 그 집의 수리를 맡기고 싶다는 이야기를 했다. 그 친구가 리모델링 했던 건물들 사진을 은정이 몇 개 보여 주었고 그때 찾아갔던 사무실도 그 친구가 직접 리모델링한 것이라고 했다. 그런 것들을 보다 보니 이 친구에게 리모델링을 맡기면 만족스럽게 해 줄 것 같았다. 그런데 이 친구는 단순히 리모델링만 하는 것으로 그치지 않고 나에게 이것 저것 조언을 해주었다. 다양한 경험이 있고 배포도 커서 생각이 사방으로 뻗쳐 나가는 느낌이었고 시원시원하기도 했다. 내가 북스테이를 하면서 작은 책방을 하면 어떨까 생각 중이라고 했더니 책방은 하지 말고 카페를 같이 하라고 했다. 그리고 카페를 하려면 특색있는 디저트를 만들어 파는 게 좋다는 이야기도 해줬다. 카페가 여기저기 많으니 특색있는 디저트가 있어야 입소문 듣고 사람들이 찾아오고 매상도 오른다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듣고 아들에게 카페를 운영하면 좋겠다고 했다. 디저트는 내가 만들겠다고 했다. 언젠가 모실장에서 양갱을 만들어 팔던 게 생각이 났다. 팥양갱, 호박양갱, 녹차양갱 정도 만들면 색깔이 예쁘고 연습을 해서 맛있게 만들어 놓으면 사람들이 찾지 않을까 생각했다. 아들은 나의 이런 계획에 자꾸 찬물을 끼얹는 소리를 했다. 잘 안 될 것이다. 그게 쉬운 일이 아니다. 객실 청소하고 정리하면서 엄마가 디저트를 만드는 시간이 얼마나 나올 것 같으냐 등등. 조금 짜증이 나기도 했다. 화순에서 귀촌해서 사는 언니가 못 생긴 거지만 당근을 많이 캤다고 제법 많이 주는데 이걸 언제 다 먹지 하다가 아, 당근도 즙을 내서 양갱을 만들면 색깔이 예쁘지 않을까? 아니 그것보다 딸기청으로 양갱을 만들면 색깔이 더 예쁠라나? 이런 저런 생각이 많아지면서 불면증이 찾아왔다. 앉아서 책을 읽거나 컴퓨터를 들여다 볼 때는 꾸벅꾸벅 졸다가도 자려고 누우면 이런 저런 오만가지 생각이 찾아와 새벽 세시까지도 잠을 못 자는 날들이 늘어났다. 그렇게 해서는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가 어려워 방법을 찾은 게 그즈음 즐겨 듣기 시작한 ‘송은이 김숙의 비밀보장’이라는 팟캐스트를 틀어놓고 자는 것이었다. 이 두 사람 가벼운 사연도 무거운 사연도 입담으로 재미있게 풀어내는 것을 틀어놓고 듣고 있으니 다른 생각이 별로 끼어들지 않고 그걸 들으면서 잘 잘 수 있게 되었다. 돌아가신 아버지께서 늘 라디오를 틀어놓고 주무시면서 아버지 잠드셨다고 우리가 라디오를 끄면 잠이 깨셔서 다시 틀어놓고 주무시던 일들이 생각나고 나도 늙어가는 거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암튼 카페를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궁리하다가 문득 드는 생각이 있었다. 내가 은퇴하고 한가하게 소일하려고 북스테이를 준비하는데 카페를 하면 일이 많아져 한가로운 생활은 커녕 쉬지도 못 하게 되는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었다. 퇴직하고 글 쓰는 모임을 시작했는데 그 모임 일주년이 돌아와 모임을 제안했고 주도해 이끌어 가는는 태리라는 친구 집에 모여 놀게 된 날이 있었다. 즐겁게 잘 놀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미옥이이라는 친구를 만나야 하는 일이 있어 집으로 가기 전에 아들이랑(아들이 글 쓰는 모임을 같이 하고 있음) 미옥이 집에 들렀다 가게 되었다. 그곳에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미옥이 아는 사람이 아들하고 식당을 하다가 아들과 싸워서 지금 식당을 열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를 하며 ‘가족끼리 같이 일하는 거 아니여’하는 말을 덧붙였다. 그 말을 들으면서 나와 아들은 서로를 쳐다봤다. 그러면서 카페는 하지 말자는 합의(?)를 했다.
첫댓글 와!! 손에 잡힐듯 상세하게 잘 쓰셨네요. 하나의 작은 역사가 될 수도 있으니 잘하셨네요. 2탄을 기대합니다.
하하하 아들과 하지 말자가 아니고 카페를 접자라니!
주변 풍경이 좋아서 카페가 많고, 동네에도 3군데나 되고... 그러다보니 카페를 많이 가보곤 합니다. 혼자 다니다 보니 주인장들과 대화를 하게되는데.. 대부분 구경다닐 때가 좋았다고들 합니다. 어디에 매인다는 것이.... 혈연 가족과 동업을 한 다는 것이....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젊어서 생업으로 이판사판 뛰어든다면 가능하지 않을까 생각을 해보곤하지요. 축하합니다. 전주에 오셨음을 ~~ 정말 전주로 내려온 것을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습니다. 자연환경이 넉넉하고, 아름답고, 먹거리가 신선하고 깨끗하고,... 가끔 '꿈이냐 생시냐' 하면서 살고 있으니깐요. ... 다시 한 번 환영합니다. 격하게!
전주에서의 새 샮을 응원합니다. 카페는 잘 접으셨어요. 가족이랑 너무 많은 걸 안하는 것도 찬성이구요 ㅎ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