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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智異山)
 
 
 
카페 게시글
♡ 사랑방 ♡ 스크랩 우울한 날 ㅠ.ㅠ "씨받이" 강(姜)여사, "비구니" 상아(常娥) 스님.
nolboo 추천 0 조회 246 08.11.23 19:3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씨받이"강(姜)여사. 그리고"비구니"상아(常娥)스님

 

 고등학교를 졸업한 봄에 어렵사리 말단 공무원으로 취직이 되어 P군 소재지 산골 읍으로 초임(初任) 발령을 받았습니다. 그때의 교통 편으로 충주에서 4시간 걸리는 거리이고 하루에 버스가 2번 뿐이 안 다니며, 거리로는 그리 멀지 않지만 태어나서 한번도 가 본적 없는 낯선 고장이었습니다. 이불 보따리만 달랑 둘러메고 첫 직장을 찾아 어른들과 직장 동료들에게 인사를 올렸습니다. 그리고 거처(居處)할 숙소(宿所) 마련을 부탁했습니다. 한 선배님 말씀이 당장은 구하기 힘드니 우선 자기가 안내하는 여관에서 며칠 기거(寄居)하면 알아봐 주겠노라고 했습니다.

 퇴근 길에 선배를 따라 간 곳은 뜻 밖에도 거창(巨創)하게 크고 잘 꾸며진, 그 시절 시골에서는 보기 드문 여관이었습니다. 선배님 말씀이 이 여관에는 타 지역에서 왔다가는 돈 많은 여행객이나, 중앙의 귀빈들이 머무르는 곳이니 며칠 동안 편하게 쉬면서 기다리라고 했습니다.

 나타난 여주인은 현숙(賢淑)하고 교양(敎養) 있어 보이는 30대 후반 정도의 보기 드문 미인이였습니다. 선배님과 나누시는 말씀이며 태도를 보고, 여관을 경영하는 사람답지 않게 사람됨이 얌전하고 조용한, 안존(安存)한 분이라고 생각 했습니다. 여관을 운영하는 여인네들은 대개  험한 세파(世波)에 닳고 닳아 돈만 알고, 악다구니에 능한 그런 부류라고 생각한 편견(偏見)이 사라지고 있었습니다.

 함께 왔던 선배님이 가고 여주인은 내가 있을 방을 안내했습니다. 손님이 많아 시끄러울 때가 더러 있다면서 뒷채에 있는 특실을 안내하고 돌아갔습다.

  내 방으로 배달 된 저녁상을 받고 나는 놀라고 두려웠습니다.

 소 갈비 구이, 소 내장 탕, 조개구이 ---등, 태어나서 지금 까지 이런 음식은 눈으로 본 적도 없고, 먹어 본 적은 더더욱 없었습니다. 나중에 치러야 할 뒷감당이 두려웠습니다. '차라리 내가 직접 나서서 싼 하숙집이나 여인숙을 찾아 내야 했을 걸 그랬구나.' 하는 후회막급(後悔幕及)한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녁을 먹고 나서 쉬고 있있으려니 주인 여자가 심부름 하는 아이를 시켜서 고운 꽃그림을 수(繡)놓은 비단 금침(錦寢)과 책상과 의자를 가져 오고 내가 가져 간 검정 물감을 들여 만든 무명침구는 안채에 가져다 보관 하겠다며 가져 갔습니다. 챙피 하기도 하고 자존심도 상하는 것 같아 극구 말렸지만, 저희 여관에서는 저희가 제공하는 물품만을 사용하도록 돼 있다고 듣기 좋은 말로 달래어 거절(拒切)할 수 없었습니다.

방을 구해 준다던 직장 선배는 조금 더 기다려 보라고 했고, 여관 집 대우는 더욱더 융숭해져서 초조하고 불안해 지기까지 했습니다. 내가 불안해 하는 것은 이 여관에서 기거(寄居)하는 동안 숙박비가 얼마나 될까하는 두려움이었습니다. 그 무렵 시골 말단 공무원의 월급은 쌀 1가마니 값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습니다, 이런 고급 여관에서의 숙박비는 내가 감당할 수 없을 것 같았습니다.

차츰 알아 낸 것이지만 이 큰 여관을 운영하는 사람들 중에 남자라고는 없습니다.

여관 주인 강여사와 고등학교 2학년에 다니는 딸, 중학교 3한년에 다니는 아들

을 제외 하고는 주방에서 일하는 아줌마 둘, 청소 및 잡일을 맡은 아줌마 하나.

그리고 잔 심부름을 맡아 처리하는 처녀 하나 등 모두 7명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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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학교 다닐 때 키가 커서 운동장에 모여 설때는 항상 뒤 꽁무니에서 장난을 쳤고, 몸집도 우람한 편이었습니다. 며칠 전 까지만 해도 철부지 고등학생이었는데 이렇게 사회에 나와서 직장과 사회 생활에 적응하자니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Y셔츠에 넥타이를 매고 정장에 구두를 신고 나서는 게 내가 생각해도 부자연 스럽고 영 불편했습니다.

이렇게 일주일이 지난 토요일 저녁 밥상을 물리고 책을 뒤적이고 있는데, 주인 강여사가 작은 노크 소리를 내며 찻잔을 받쳐들고 들어 왔습니다. 나는 '지금까지의 숙박비를 계산하자는 것이겠지, 첫 월급을 아직 못 탔는데-,'하고 고민을 했습니다.

그런데 강여사는 마주 앉아 차를 나누면서 '소란스럽진 않느냐. 불편한 것은 없느냐,'등 주인으로서의 통상적이고 예의적인 질문 몇마디 하고 입을 다물었습니다. 

강여사는 준비해 온 말씀이 있는 듯 한참을 망설이다가 입을 열었습니다.

" 전번에 선생님을 모시고 오신 선배님께서 무슨 말씀이 없으셨는지요?"하고.      나는 뜻 밖의 질문에 어리둥절 해져 강여사를 바라 보면서 고개만 천천히 가로 저었습니다. 강여사는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오늘 저녁 자기가 하고 싶은 긴 이야기가 있어 나왔는데 들어 줄수 있겠느냐고, 간청하는 태도로 말씀을 하셨습니다.

그리고 밤이 이슥하도록 강여사의 애절(哀絶)한 통한(痛恨)의 이야기가 다음과 같이 이어졌습니다. 참으로 길고도 슬픈 밤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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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여사는 춘천의 어느 고아원(孤兒院)에서 자란 것 외엔 고향도, 부모님도, 형제자매도 전연 알지 못합니다. 원장님 내외분이 부모님이고 원생들 모두가 형제자매로 알고 자랐습니다. 어려서 부터 예쁘고, 똑똑하고, 성실하다고 원장님 내외분 뿐만 아니라 원생들 모두가 귀여워해 주셨습니다. 공부도 뛰어나게 잘 했기 때문에 원장님의 특별 배려(配慮)로 춘천에서 고등학교 까지 졸업을 했습니다. 그리고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그해 가을에 원장님의 주선으로 결혼을 했습니다.

신랑도 그 고아원 출신으로 성격도 좋고 운동과 공부도 돋보이게 잘 했습니다. 고아원에서 함께 자라고 공부할 때 다섯살 위인 그를 오빠라고 부르며 따랐고, 그도 또 친동생 처럼 많이 귀여워 해 주었습니다. 신랑은 고등학교를 졸업하던 해 군(軍)에 자원입대(自願入隊)해 복무(腹務)를 마치고 제대(除隊)했습니다. 그리고 제대를 한 그해 경찰 시험에 합격하여 P경찰서로 발령을 받아 자취방을 얻어 생활하며 근무했습니다. 쉬는 날이면 원생들이 좋아하는 먹을거리를 사 들고 고아원을 찾았습니다.

원장님은 두 사람을 뒷바라지 해 기르면서 부부(夫婦)의 연(緣)을 맺어주면 가장 모범적이고, 더 없이 행복한 가정을 이룰 것이라고 확신(確信) 했던 것입니다.

두 사람은 부러울 것이 없는,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부부(夫婦)가 되었습니다. 비록 방 한간짜리 셋방을 얻어  사는 가난하고 불편한 생활이었지만 서로 지극히 사랑하고 보듬으며 아꼈습니다.

그러는 사이 첫째 딸 상아(常娥)가 태어 나고, 3년 뒤엔 둘째로 아들 민수(旻殊)를 얻었습니다. 아기들도 건강하고 예쁘게 잘 자랐습니다.

하늘이 내리신 이 축복을 한백년 고이 지켜 나가자고 부부는 얼싸 안고 서로 등을 두드리며 격려하고 다짐했습니다. 마귀(魔鬼)가 샘을 낼까봐 두려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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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런데---!

1950년 북한 공산군의 남침이 시작 됐습니다. 사기충천(士氣充天)한 공산군은 파죽지세(破竹之勢)로 밀고 내려왔고, 준비가 부족했던 우리 군은 후퇴를 거듭하다 불과 며칠 사이에 결국 낙동강 이북의 땅을 송두리째 북한 공산군에게 내 주고 말았습니다. 다행이 미국을 비롯한 UN군의 참전(參戰)으로 우리는 실지(失地)를 되찾고 휴전(休戰)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휴전(休戰)후에도 미처 이북으로 되돌아가지 못한 공산군 패잔병(敗殘兵)들은 험하고 깊은 산 속에 아지트를 마련하고, 밤에 마을로 내려와 인명살상(人命殺傷)과 재물약탈(財物掠奪)을 일 삼았습니다. 이들의 토벌(討伐)을 위해 후방에서는 군대는 물론 경찰까지도 동원 되었습니다.

깊은 산속, 굴속에 칩거(蟄擧) 하면서 야음(夜陰)을 틈타 이동하는 잔병(殘兵)을 소탕(掃蕩)하기란 극히 어렵고 위험한 작전이었습니다.

강여사의 남편도 이 공산군 패잔병 토벌작전에 동원되어 밤낮으로 소백산 속을 헤맸습니다. 적을 죽여야만 내가 살아 남는다는 극렬(極烈)한 전투(戰鬪)는 생각 보다 쉽게 끝나지 않아 몇날, 몇달이 계속 됐고 쌍방(雙方)의 사상자(死傷者)는 계속 늘어만 갔습니다. 강여사의 남편도 산에서 달리고, 기고, 구르고, 싸우고---

피와 상처, 그리고 흙먼지로 뒤범벅이 된 처참(悽慘)한 몰골로 며칠에 한번씩 집에들어 와서 대충 씻고 속옷만 갈아 입고 달려 나가곤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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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기를 석달 여(餘)!

성난 파도가 미친듯이 불어대는 노도광풍(怒濤狂風) !

하늘이 놀라 소리치고 땅이 슬퍼 통곡하는 천경지곡(千驚地哭)의 사건에 강여사는 부엌 바닥에 나가 떨어져 버리적 거리다 혼절(魂絶)해 버렸습니다.

온 세상 사람들을 불쌍히 여겨 행복을 베푸신다며 "원수 까지도 사랑하라." 가르치신 '사랑의 신 하느님!  온 세상의 중생(衆生)들을 불쌍히 여겨 복을 빌어 주고 괴로움을 덜어 준다는 자비(慈悲)의 신 부처님!

당신들의 그 말씀을 어리석고 미욱한, 그러나 착한 이 중생들은 믿고 따랐습니다.

잠자리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쪽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눈을 비비며 깨어난 강여사는 남편의 전사통보서(戰死通補書)를 받고 부엌 바닥에 기절해 쓰러졌습니다.

동네 아낙들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깨어 난 강여사가 그들의 부축을 받으며 달려온 경찰서 마당에는 지난 밤 전투에서 전사(戰死)한 아군(我軍)의 시신(屍身) 다섯구(軀)가 거적으로 덮여 있고, 거적 마다에 죽은이의 이름이 적힌 쪽지가 얹혀 있었습니다. 남편 시신을 찾아 거적을 젖혔습니다. 온 몸이 피와 흙과 멍으로 얼룩져 있고, 얼굴이 시커멓고 퉁퉁하게 부어 올라 남편 같지가 않았습니다.

 내복(內服)을 들쳐봐 확인 하고는 남편의 온 몸을 당겨 끌어 안고 얼굴을 부벼대며 단장(斷腸)의 통곡(痛哭)으로 뒹굴다 다시 혼절(魂切)해 쓸어졌습니다.

천애(天涯)의 고아(孤兒)로 태어 났으나, 천생(天生) 배필(配匹)을 만나 아들, 딸 낳고 한오백년 행복하게 살자던 남편은 이렇게 비명(非命)에 갔습니다.

석달여(餘)만에 강여사는 마음을 추스렸습니다. 남편이 남겨 주고 간 어린 남매를 훌륭하게 잘 키우는 일만이, 짧은 기간이지만 남편이 자기에게 베풀어 준 지고지순(至高至純)한 사랑에 대한 보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몸을 추스르고 자리를 털고 일어 났습니다. 전후(戰後) 혼란기(混亂期)라 국가유공자(國家有功者)에 대한 위로금이나 보상금이 전연 없을 때입니다. 막막하기는 했지만 살아 나가야 할 방법을 찾아 내 실천에 옮겨야 했습니다.

마침 자기가 살고 있는 셋집이 학교 바로 옆이라 추녀 밑에 거적을 깔아 놓고, 공책 필통 지우개 연필 같은 학용품에 삶은 고구마와 옥수수 등을 곁들여 펼쳐 놓고 팔았습니다. 아기 둘을 데리고는 다른 방법이 없었습니다.

 1년을 넘겨 해봤지만 악식(惡食)으로도 세 식구 연명(連命) 하기가 어려웠습다,

그때는 모두가 살아남기 힘든 시절이었습니다. '등 뜨시고 배 부른 것'이 가장 큰 소망(所望)이었고, 아침에 꽁 보리 밥, 점심은 건너 뛰고, 저녁에 멀건 나물 죽만 먹는 조반석죽(朝飯夕粥)에도 감사함을 느낄때 였습니다. 상아와 민수를 제대로 먹이지 못해 영양실조와 잦은 병치례로 얼굴이 누렇게 뜨고 쇠약해져 갔습니다.

강여사는 이렇게 힘들게 살바엔 어린 남매와 함께 남편 곁으로 가는게 차라리 낫겠다는 생각도 여러 번 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그토록 사랑했던 남편이 남겨 주고 간, 사랑의 씨앗, 사랑의 열매인 두 아기들이 가엾어서 그도 못할 일인것 같았습니다. 어떻게 든지 살아 남아

남매를 훌륭하게 키워 낸 뒤에 하늘 나라에 가야 남편이 기쁘게 맞아 줄것 같았습니다. 그래야만 이 세상에서 못다 이룬 남편과의 남은 사랑을 완성(完成)할 것 같았습다. 남겨진 남편의 흑백 사진을 벽에 걸어 놓고, 남편에게 약속 했습니다.

"내 몸의 뼈가 가루가 되고 몸이 부서지는,분골쇄신(粉骨碎身)의 경지에 이르더라도 당신과 나의 아들딸은 잘 키우고, 가르쳐 당신 못지 않은 훌륭한 사람으로 키우겠습니다"라고. 그러나 도와 줄 사람 하나 없는 천애의 고아, 강여사로서는 참으로 힘 들고 어려운 일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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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군(郡)은 높은 산맥과 큰 강에 둘러 싸여, 산고수려(山高水麗)한 관광명소(觀光名所)로 이름이 나 있습니다. 또 각종 광석(鑛石)의 매장량(埋藏量)이 풍부하기 때문에 그것을  채굴(採掘)하는 광산업(鑛山業)도 성황(盛況)을 이루고 있었습니다. 비록 작은 고을이었지만 유동인구(流動人口)도 많았습니다.

이 고장에 박흥수(朴興壽)라는 사람이 살았습니다. 박사장은 큰 광산 채굴권을 세개나 가지고 있었고, 양조장(釀造場)과 여관(旅館)도 운영하고 있는 고장 제일의 갑부(甲富)였습니다. 뿐만 아니라 군민(郡民)을 위한 지방의 공익사업(公益事業)과 자선사업(自善事業)에도 적극 투자하여 존경과 칭송을 받는 분이었습니다. 

부창부수(夫唱婦隨)라고 박사장 부인 민여사도 남편 못지 않게 인자(仁慈)하고고 후덕(厚德)하고 교양(敎養) 있어 그 지방 사람들의 칭송(稱頌)이 높았습니다.

특히 그들 부부(夫婦)의 금슬(琴瑟)은 유별나게 좋아 아낙네들의 선망(羨望)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부부에게도 남에게 들어 내 놓고 말할 수 없는 근심과 한이 있습니다.

민 여사가 쉰 살이 다 되도록 슬하에 자식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딸이든 아들이든 생산을 해보지 못 했습니다. 그래도 젊을 때는 덜 했는데 나이가 드니 그렇게 마음이 허전하고 쓸쓸할 수가 없습니다. 민여사는 남편 보기가 민망했습니다. 나도 이렇게 허전한데 들어내 놓고 말하지 않는 남편의 속 마음이 안쓰러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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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저녁, 강여사는 아기들을 재워 놓고,등잔(燈盞)불 아래에서 민수의 구멍 난 양말 뒤꿈치를 헝겊 조각을 덧대어 깁고 있었습니다.

그때 아주 작게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문을 열고 나가 보니 찾아 온 손님은 뜻 밖에도 박흥식 사장 부인 민 여사였습니다. 소문으로만 듣고 멀리서만 바라 보았던 민여사가 분명했습니다. 그런 귀한 분이 갑자기 누추(陋醜)한 자기 집을 찾아 오니 황송하고 민망하기도 해서 몸둘바를 몰랐습니다.

"소문도 없이 밤 늦게 찾아와서 결례(缺禮)를 하는 것 같습니다. 지나가는 길에 잠깐 인사나 나누려고 들렸습니다." 강여사는 듣던대로 교양 있는 분이라고 생각 했습니다. 안내 되어 들어 온 민여사는 방안을 한번 둘러 보고 자는 아기들의 머리를  쓸어 보셨습니다. 그리고 민여사의 삶의 이야기를 듣고 위로와 격려하는 말씀을 주시고 다음에 또 만나자는 이야기를 뒤로하고 돌아 갔습니다.

그 뒤로 강여사와 민여사의 만남은 잦아졌습니다.

주로 민여사가 강여사의 집을 다녀 갔고 가끔은 아이들과 함께 민여사 집으로 불리어 갔습니다. 민여사의 요청에 따라 호칭(呼稱)도 언니와 아우로 부르고 강여사의 자식 남매는 민여사를 이모(姨母)라고 불렀습니다.

민여사는 집에서 부리는 사람을 시켜서 식량(食糧)과 부식(副食) 재료. 그리고 생활에 필요한 물품들을 자주 보내 주어, 강여사의 살림은 한결 윤택(潤澤)해졌습니다. 악식(惡食) 대신 아이들에게 밥을 먹일 수가 있었고, 남루(襤褸)한 옷을 입히지 않아도 되었습니다. 살이 통통하게 찌고  건강하고 귀엽게 자랐습니다.

 그렇게 반년이란 세월이 강여사에겐 달콤한 꿈결 처럽 지나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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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늦은 저녁, 민여사는 강여사 집 쪽문을 살며시 열고, 아이들이 자는 것을 확인 하더니 손짓으로 강여사를 불러 냈습니다. 달 빛이 밝아 나무의 그림자들이 묵화(墨畵)처럼 땅 위에 얼룩지는 밤이었습니다.

 민여사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앞 서 걷고 있습니다. 오늘 따라 고개를 숙여 힘 없이 걷고 있는 민여사의 두 어깨가 슬프도록 아래로 처져 있다고 생각 했습니다.

학교 운동장 벤치에 앉아서도 민여사의 입은 좀처럼 열리지 않았습니다.

 강여사는 민여사의 이런 모습이 처음이었습니다. 본의 아니게 내가 무슨 큰 잘못을 저질러 저토록 서운하게 해 드린 것이 아닌가 하는 두려움도 있었습니다.

민여사의 두 어깨가 가늘게 떨리기 시작 했습니다. 그러더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흐느껴 울기 시작 했습니다.

 강여사는 이 황당한 사태에 어떻게 처신 할지를 몰라 허둥 댔습니다. 한 손으로 민여사의 어깨를 감싸고, 또 한 손으로는 얼굴을 가린 손을 쓰다듬으면서 사태(事態)가 진정(鎭靜) 되기를 기다렸습니다. 차츰 진정되어 감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잠시후 민여사는 힘들게 일어나 강여사의 손을 잡아 이끌었습니다.

"내가 미치던가, 아니면 환장을 했나 보다. 가자." 민여사 답지 않게 다부진 목소리었습니다.

"언니! 안됩니다. 제가 언니에게 본의 아니게 큰 잘못을 저지른 듯 한데, 말씀 안하시고 이대로 일어 서시면 언니도 저도 오늘 밤 잠을 이룰 수 없을 것입니다. 그러고 내일 부터 언니와의 관계가 소원(疏遠)해질 것은 분명합니다. 제게도 해명(解明)이나 변명(辯明)의 기회는 주셔야 하지 않습니까? 말씀해 주셔요."

민여사는 천천히 다시 벤치에 앉았습니다. 긴 한숨을 내 쉬고 입을 열었습니다.

"아우의 잘못은 티끌 만큼도 없다, 나도 너와 평생 친 아우처럼 살기로 작정 했다.

그런데 사귀다 보니 과욕(過慾)이 생겼다. 죄많고 한많은 언니를 용서해 줘라"

그러고 잠시 멈췄다가 다시 입을 열었습니다.

"내가 지금부터 사람으로서 할 수 없는 어떤 막말을 해도, 내 요구나 일의 성사(成事)에 관계 없이,너와 나와의 관계는 지금 처럼 돈독(敦篤)하게 유지 돼야한다. 그렇게 해 줄 수 있다는 확약(確約)이 있어야만 얘기할 수 있다."

'내가 감당하기 힘든 일이구나!' 강여사는 한참을 망설인 끝에 고개를 끄덕였다.

민여사는 아주 천천히 힘들게 입을 열었다.

"네가 보기에 내가 마냥 행복하게 보일지 모르겠다. 재산도 가지고 싶은 만큼은 가졌고, 형부가 좋은 일을 많이 해서 사회의 명성(名聲)도 얻었다. 그리고 우리 부부의 금슬도 이만하면 흡족하다,

다만 한가지, 내가 아기를 생산하지 못한게 하늘에 사무치는 철천지한(徹天之恨)이다. 형부나 내가 이미 포기(抛棄)하고 단념(斷념)한 지 오래지만, 우리 부부 나이가 쉰이 가까와 지면서 참 많이 힘들다. 나도 그렇지만 네 형부가 밖으로 들어 내 놓고 표현은 안하지만 마음을 못잡고 많이 조바심하는 것 같애.-------.

 아우야---, 네가 아직 젊으니까---, 아들 하나 낳아줄 수 없을까?--"

이번엔 강여사가 벤치에서 무너져 내리면서 주저 앉았습니다. 그리고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 안고, 어깨를 들먹이는 애절(哀絶)한 흐느낌만이 있을뿐입니다.

이렇게 곤혹(困惑)스러운 시간이 한동안 흘러간 뒤 민여사는 강여사의 손을 잡아 일으켰습니다. 그리고 서로를 부추기며 걸었습니다.

나도 이대목에서 강여사와 함께 속울음을 울면서 천장을 쳐다 봤습니다.

"이 불쌍한 두 여인은 완전 무죄(無罪)다. 차라리 피해자(被害者)다!

가해자(加害者)가 있다면 인간의 길흉화복(吉凶禍福)을 점지(點指)해 준다는 운명(運命)의 신(神)이다."

강여사의 집 앞에 이르렀습니다.민여사는 강여사의 등에 손을 얹고 도닥 거리면서 "내가 많이 잘못했다. 오늘 저녁 일은 없었던 것으로 하자."하고 갔습니다.

강여사는 참으로 많은 고민을 했습니다. 식욕(食慾)을 완전히 잃고, 잠도 못 잤습니다, 요즈음 상아와 민호는 민여사의 도움으로 잘 먹고, 잘 입어 잔병 없이 잘 뛰놀고 있습니다. 자기의 현재의 처지와 능력으로는 둘을 잘 키우고 공부시켜 훌륭한 사회인으로 길러낼 자신이 없었습니다.

벽에 걸린 경찰복의 죽은 남편 영정 앞에 꿇어 앉아 두손을 모으고 눈을 감았습니다. '당신이 허락하는 길로 가겠습니다. 바르게 인도하여 주세요,'

기도하고 눈을 떠 보니 남펀은 살아 있을때 처럼 너그럽고 인자한 얼굴로 환하게 웃고 있었습니다. 정여사의 마음은 어떤 굴욕적이고 힘든 상황 속에서도 오로지 상아와 민수만을 위한 길을 택하겠다고 마음을 굳혔습니다.

 

일주일이 지났습니다. 민여사에게서 다녀가라는 연락이 왔습니다. 민여사는 댓돌 밑까지 내려와 손을 잡아 맞아 들였습니다. 자기 옆에 앉히고  "고맙다. 나를 용서해 줬구나. 지난 번 내 얘기는 없었던 걸로 하자."하고 환하게 웃었습니다.

강여사가 자리에서 일어났습니다. 앞으로 나가더니 민여사에게 대례청(大禮廳)에서나 하는 큰 절을 살포시 올리고 곱게 꿇어 앉았습니다.

민여사는 화들짝 놀랐습니다. '많이 놀라고 화가 나서 나하고 의절(義絶) 하자는 하직(하直)인사를 하러 왔구나.' 하고 얼굴이 새파랗게 굳어졌습니다.

 강여사는 고개를 숙인채 울음 섞인 가냘픈 목소리로 "언니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하고 어깨를 들먹였습니다. 민여사는 강여사의 말을 잘 알아 듣지 못했습니다.  "뭐라고 했느냐?"하고 재우쳐 물었습니다.

 강여사는 다시 조금더 크고 또렸한 목소리로 "언니께서 지난 번 학교 느티 나무밑에서 하신 말씀을 그대로 따르겠습니다." 하고, 가슴 속 저 밑바닥에 사리를 틀었던 깊은 한을 풀어 내듯 서럽게 소리내어 통곡(痛哭)을 했습니다.

 민여사도 놀란 눈을 부릅 뜨고 무릎 걸음으로 기어가 강여사를  안고 얼굴을 비벼대고 몸부림치며 울었습니다. 불쌍한 두 여인의 통곡은 끝날 줄을 몰랐습니다.

울다 지친 두 여인은 서로 손을 잡아 이끌고 아랫목 보료위에 나란히 앉았습니다

 강여사가 먼저 입을 열었습니다."그런데 사전(事前)에 제게 몇가지 약속해 주실 것이 있습니다". 강여사의 말에 민여사가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제가 지금부터 말씀 드리는 것은 문서로 작성하고 날인해서, 우리 삼인의 당사자가 일부씩 보관하고 지켜야 합니다. 위약시의 벌칙사항은 다음에 함께 합의해서 결정하는 것으로 하겠습니다."

"첫째; 이 집만이 형부와 언니의 집입니다. 형부가 제 집에 드나든다고 해도 때를 가리지 않고 오셔서 머무르시면 안됩니다. 일주일에  한번 정도로 제한합니다.

 둘째: 제가 아기를 가졌다고 확인되면 형부는 저희집 발걸음을 끊으셔야합니다.

 셋째: 아기를 낳으면 백일 되는 날에 데려다 유모를 두고 기르셔야 합니다.

 넷째: 아들을 더 원하시는 것 같은 데 그것은 인간의 능력 밖의 일입니다. 첫째가  아들이면 좋고, 딸이라면 한번에 한해서 더 낳아 드릴 용의가 있습니다.

 이 밖에 언니나 형부가 넣어야 할 사항이 있으시면 저에게 사전에 말씀 하셔서 동의를 받고 삽입하시면 됩니다. 이상입니다."

민여사의 입이 딱 벌어졌습니다. 강여사의 머리가 좋고, 똑똑하고 야무진 건 이미 알고 있었지만 상상(想像) 이상이라고 놀랬습니다.

이 강여사의 치밀(緻密)한 제의는 추가 사항 없이 일사천리(一瀉千里)로 추진, 진행 되었습니다. 우선 서약서는 강여사가 제시한 항목 그대로를 인용(引用)하여 작성하고, 삼자 날인하여 당사자 세 사람에게 각 1부씩 전해졌습니다                  다음 아이 둘이 있는 단간 방에 박사장이 드나들 수는 없습니다. 그리고 생계수단(生計手段)도 함께 마련하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 했습니다. 그래서 박사장 명의로 되어 있는 여관을 지은지 2년 뿐이 안 되지만 다시 도색하고 시설을 보완하여 강여사 명으로 이전등기(移傳登記)도 완료 했습니다. 그리고 이사를 시켰습니다.

강여사의 여관 경험이 없는 점을 감안하여, 민여사가 함께 대행(代行)하며 익숙할때 까지 돌봐 주기로 했습니다.

나머지 사항은 살아 가면서 지킬 것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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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여사, 민여사, 그리고 박사장, 이렇게 세 사람의 약정(約定)은 서약서 대로 한치의 오차(誤差)도 없이 진행(進行) 되었습니다.

강여사는 첫번째로 딸을 낳고, 두번째로 아들을 낳아 돌려 줬습니다. 박사장은 처음의 약속대로 민여사의 여관 근처에는 근접(近接)도 하지 않았고, 어쩌다 거리를 지날 때 만나도 고개를 돌려 외면을 했습니다.

강여사와 민여사 사이는 더욱 더 두터워 졌습니다. 가까운 거리이니까 매일 한번씩 박사장 자식으로 되어 있는 강여사가 낳은 아이 둘을 데려 와서 정담(情談) 을 나누다 갑니다. 혹여 강여사가 병이 났을 때는, 민여사가 약을 지어다 먹이고 간호(看護)까지 하며 병이 다 낳을 때 까지 함께 생활 했습니다. 겉으로 봐서는 별로 못 느끼겠는데 강여사의 말이 혈압이 높고 심장이 좋지 않아 병원에 다니는 횟수가 늘고,  요즈음엔 앓아 누워 있는 날도 많아졌다고 했습니다.

남편이 시앗을 보면 돌부처도 돌아 앉는다는데 강여사와 민여사 사이의 이렇게 아름답고 깨끗한 사랑과 우정과 신의를 감명 깊게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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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여사의 이야기는 긴 과거에서 당면(當面)한 현실로 돌아 왔습니다.

죽은 남편에 대해서는 미안한 얘기지만 이제는 경제적으로는 여유가 생겨 강아와 민수가 공부만 잘해 준다면 대학은 물론 해외 유학까지도 능히 감당할 수 있을 것 같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아이들 둘의 학업 성적이 자기의 뜻을 따라주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고등학교 2학년이 된 딸 상아는 초등학교와 중학교 중반 까지는 엄마의 말도 잘 듣고 성적도 학교에서 최상위권(最上位圈)을 유지 했었습니다. 그런데 중학교 후반 부터는 사춘기가 닥아 와서 그런지 엄마하고의 대화도 피하고, 가끔은 반항도 하며 공부도 전처럼 열심히 하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아들 민수는 몸도 충실하고, 성격도 좋아 엄마를 잘 따르는데 학교의 학업 성적은 항상 하위권을 면하지 못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고민 끝에 선생님을 우리 집에 처음 모시고 온 직장 선배님께 우리 애들의 학습과 생활을 지도해 줄수 있는 분을 모시게 해 달라고 간청을 해 놓았었습니다. 사실은 그래서 선생님이 저희 집에 오시게 된 것입니다.  선배님께서 어제 전화를 직접 주셨는데 자기가 말하기가 어려운 점이 있으니 저에게 직접 말씀을 드려 보라고 하셨습니다." 강여사는 할말을 다 마쳤다는 듯 입을 다물었습니다.

저녁에 아이들을 두세 시간씩 지도해 주고 숙식(宿食)만이라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 나에게는 크게 경제적 부담을 줄여줄 수 있는 일이지만 쉽게 결단을 내릴 수 있는 일은 아니었습니다. 강여사의 간절한 희망을 충족 시킬 자신이 없었습니다.

"힘들게 하신 좋은 말씀 잘 들었습니다. 제 평생을 두고 존경할 수 있는 사람이 한분 더 생겼습니다. 부탁하신 말씀을 제 능력으로 감당 하기는 좀 힘들 것 같습니다. 앞으로 삼일만 여유를 주십시오. 깊이 생각해 보고 결정 하겠습니다."

이렇게 해서 강 여사와의 긴-밤, 강여사가 한평생 배설(排泄)을 못해, 가슴 속에 간직하고 부대끼며 괴로워 하고 있던 긴 밤의 이야기는 끝이 났습니다.

직장에서도 하루 종일 고민을 해 봤으나 결론을 맺지 못 했습니다. 강여사의 간절(懇切)하고도 절실(切實)한 욕구(欲求)를 충족(充足) 시켜 줄 자신이 없었습니다.

퇴근을 하고 집에 돌아와 방문을 열어 보니 세간살이가 하나도 없는 빈 방이었습니다. 그때 강여사가 끌신을 끌고 나와 따라 오라고 손짓을 했습니다.

안채 대청마루 건너편 큰 방으로 안내되어 들어 갔습니다.

그 방에는 내 짐과 책상이 그대로 옮겨져 있고 침대까지 한쪽에 놓여 있었습니다.

사각(四脚)의 탁자와, 의자 세개 까지 마련되어 있었습니다.                        "심각하게 고민하실 필요가 없음니다. 허락해 주시리라 믿고 이렇게 실례를 했습니다." 강여사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웃으면서 말을 했습니다.

그리고 나도 "알겠습니다. 노력해 보겠습니다."라는 말로 답했습니다.

그날 부터 나는 상아와 민수의 학습과 생활지도를 위한 가정 교사가 됐습니다.

나는 배우는 자와 가르치는 자 사이엔 우선(優先) 허심탄회(虛心坦懷)한 대화(對話)의 관계가 이루어져야 한다고 생각 했습니다. 신뢰(神賴)의 교감(交感)이지요.

그래서 강여사에게 학습지도는 평일 저녁 7~9시 사이 하루 2시간씩하고, 매주 일요일에는 아이들을 데리고 가까운 곳으로 등산이나 산책을 하겠다고 했습니다.

상아는 얼굴도 엄마 닮아 예쁘고, 두뇌도 명석하고, 성격도 깔끔 했습니다. 그런데  마음을 열어 내게 닥아와 주지 않아 힘이 들었습니다. 학습 도중에도 가끔  넋나간 아이 처럼 엉뚱한 사색(思索)에 잠겨 골몰(汨沒)하는 태도가 역역(役役)했습니다. 민수는 또래들과 어울려 공놀이, 달리기 등에 여념(餘念)이 없는 전형적인 개구쟁이었습니다. 그래나  몸은  충실하고 성격이 활달 했습니다.

상아는 두뇌(頭腦)가 명석(明晳) 하고 집념(執念)이 강했습니다. 아이 답지 않게 생각이 깊고 고집이 세다고 짐작 했습니다.

상아는 영어, 수학, 과학등 기본 과목의 기초가 조금 모자라는 편이었고 , 문수는

전과목의 기초 학습 능력이 많이 부족 했으며 관심과 열의가 모자랐습니다.

 이렇게 야외(野外)와 실내에서 함께 생활하는 동안 많은 변화가 생겼습니다.

상아가 마음을 차츰 열어 줬습니다. 두달 정도가 지났을 때는 가벼운  농담도 걸어 오고 이쁜 짓도 꽤 늘어 갔습니다. 특별히 변한 것은 지금 까지 내방 청소와 내 시중을 집에서 부리는 처녀가 전담(專擔)했는데, 상아가 직접 하겠다고 선언을 하고 그 처녀는 내방 출입을 못하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지나쳤습니다.상아와 민수, 그리고 나 이렇게 세사람은 함께 열심히 공부를 했습니다.

고2 학년말 평가에서 상아는 전교 석차 2위, 학급 석차 1위를 했고. 민수는 학급의 중위권 까지 도약 할수가 있었습니다.

제일 신이 난 것은 강여사였습니다. 혈압이 높고, 심장이 나빠 병원에도 자주 가고, 앓아 눕는 날이 많았던 사람이 보기에는 건강을 완전히 되 찾은 듯 했습다.

 

민여사네 집에 들어간 다음해 11월, 그러니까 꼭 1년 반이 지났습니다.

나는 육군(陸軍) 입영통지서(入營通知書)를 받았습니다. 시일이 촉박(促迫)하기 때문에 서둘러 휴직원(休職願)을 내고, 사무 인수인계(引受引繼)를 하느라고 바쁘게 며칠이 지났습니다.

민여사네 집은 초상(初喪)집 분위기였습니다. 모두가 침울하여 말도 않고. 특히

아이들이 밥도 잘 먹지 않고 구석을 찾아 속울음으로 어깨를 들먹이는 것은 차마 볼수가 없었습니다. 입대(入隊)를 한다는 것도 두렵고 힘든것인데 그간 정이 담뿍 든 아이들 까지 떨쳐 버리고 나와야 하니 많이  괴로웠습니다.

저녁상을 물리고 혼자 한참을 걸어 냇가로 나왔습니다. 아이들과 함께 자주 나와

달을 보고, 별을 세며 속삭이던 그 자리에 섰습니다. 오늘은 달은 보이지 않고 하늘 가득히 별들만 눈을 반짝이며 속삭이고 있습니다.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철도 덜 든 내가, 낯 설고 물 설은 이 고장에 와서 겪은 1년 반의 짧은 일들을 회상하고, 특히 정이 담뿍 든 불쌍한 강여사, 상아, 민수를 생각하며, 나는 가슴 저 밑바닥에서 울컥 솟아 오르는 슬픔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울었습니다.

 

뒤에서 가벼운 발걸음 발소리가 들립니다.

돌아 보지 않아도 나는 압니다. 저 소리는 상아만의 것입니다.

닥아 온 발소리는 뒤에서 두손을 깍지껴 내 허리를 꼭 껴 안고, 제 머리를 내 등에 기댑니다. 그리고 잠시 뒤 흐느끼는 율동이 가볍게 전해집니다.

나는 그 자세대로 두손으로 깍지 낀 상아의 조그만 손을 잡아 꼭 쥡니다.

"선생님! 선생님을 사랑하면 안 됩니까?" 흐느끼는 전율의 느낌이 더 강해집니다.

나는 돌아서 상아를 안아 등을 가볍게 두드려 줍니다. 그리고 손을 잡고 이끌었습니다. 가끔 찾는 거북바위 등에 앉았습니다. 수 많은 별들의 속삭임이 들립니다.

"상아야, 너 선생님. 많이 사랑하니?" 고개만 아주 크게 끄덕입니다.

"나도 너를 많이 사랑 한단다. 네가 선생님을 사랑하는 것 보다, 내가 너를 더 많이 사랑하고 있는 지도 몰라." 상아가 고개를 들어 샛별 같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의아(疑訝) 하다는 표정을 지었습니다. 그리고 잡고 있던 제 손을 살며시 빼서 내 등뒤로 돌렸고 나는 상아를 당겨 내 가슴에 기대도록 안았습니다.

"상아야. 사람은 영혼(靈魂)과 육체(肉體)로 이루어져 있어. 영혼은 영원하고 육신은 죽어 없어지면 그것으로 끝나는 거지. 어려운 말이지만 너는 머리가 좋고 생각이 깊어 알수도 있을 거야. 영혼은 인간을 활동시키는 근원이 되는 힘이야. 정신 혹은 넋이라는 말로도 표현할 수 있어. 네가 생각하고 말하고, 또 생각과 말에 따라 육체(肉體), 즉 몸뚱이를 움직이는 것은 영혼이 시키는 거야. 나는 사랑도 영혼으로 하는 사랑과, 육신으로 하는 사랑이 있다고 생각해,

육신으로 하는 사랑은 죽음으로 끝나지만, 영혼으로 하는 사랑은 죽어서 하늘 나라에 가서도, 그리고 또 영원히 계속 된다고 생각해.

"독일의 유명한 철학자(哲學者) '임마누엘 칸트'라는 분이 뭐라고 말했는지 알아?" 상아가 내 품속에서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습니다.

"인간이 천국, 즉 하늘 나라에 까지 가져갈 수 있는 선물은 사랑과 우정 뿐이라고 했어. 이분이 말한 사랑이라는 것은 육체의 사랑이 아니라 영혼의 사랑을 말하는 거야."

강바람이 차서 홑옷을 입고 나온 상아가 떨면서 몸을 웅크리고 있었습니다.

나는 겉에 걸치고 나온 점퍼를 벗어서 상아의 몸을 감싸 주었습니다.

"상아야. 사람에 따라서는 영혼의 사랑과 육신의 사랑의 대상을 따로 갖고 평생을 살아가는 사람이 있어. 결혼을 해서 아기를 낳고 살면서도 영혼으로  간절히 사랑하는 사람이 따로 있을 수 있는거야. 엄마와  네 아빠의 사랑은 영혼의 사랑인 것 같아. 아빠와 엄마는 먼 훗날 하늘 나라에서 만나 영혼의 사랑을 다시 할거야.

나도 너를 사랑한다. 너와 일년 반을 함께 생활 하면서, 너의 영혼은 저녁나절의석양(夕陽)처럼 아름답고, 순수하고, 전날밤에 내려 나뭇가지에 소복히 내려 앉은 눈송이 처럼 맑고 깨끗하다는 것을 느꼈어, 나는 너의 영혼을 사랑한다."

 밤하늘에 유성(流星)이 긴 꼬리를 끌며 서쪽 하늘 끝으로 내려 박혔습니다.

"내가 전에 일러 준 대로 북극성을 찾아 보자. 먼저 북쪽 하늘에서 작은 곰자리를 찾아봐. 그중 제일 크게 반짝이는 주성(主星). 가리켜 봐. 그래 그거야. 하루의 시간이 지나고, 계절이 바뀌어도 언제나 제자리에 고정되어 있는. 밤 하늘에서 제일크고 밝게 보이는 별. 나는 저 북극성을 제일 좋아 한다고 했지?"

강아가 나를 안고 있는 팔에 힘을 주면서 고개를 더 크게 끄덕였습니다.

"이 다음에 내가 어디서 어떤 삶을 살더라도, 별이 빛나는 밤이면 집 밖으로 나와 저 별을 바라 보며, 내 사랑하는 상아의 예쁜 영혼을 잘 지키고 보살펴 달라고 기도를 할꺼다. 그리고 너의 영혼과의 대화도 할거야, 네가 원하던 안하던 말이다."

오랫만에 영아가 입을 열었습니다.

"저도 별이 빛나는 밤이면 집 밖으로 나와 북극성을 바라 보면서, 선생님과 대화도 하고, 선생님의 영혼이 평안 하시라고 손 모아 기도 하겠습니다. 그리고 이세상에서 선생님을 모시지 못하면 다음 세상에서는 꼭 모시고 살 수 있게 해 달라고요." 상아를 안은 팔에 힘을 더하는 것으로 화답 했습니다.

참으로 길고 긴 대화는 끝이 나는가 했습니다. 그리고 한참의 시간이 지났습니다.

상아가 어깨를 들먹이며 다시 울기 시작 했습니다.

"선생님, 오늘이 선생님과의 마지막 밤입니다. 선생님과의 영혼의 약속을 제가 깰가봐 두렵습니다. 그 약속이 깨지면 저는 이 세상을 살아야 할 의미를 잃습니다. 나이 어리고 철없는 애라고 꾸중하지 마시고요. 선생님은 저를 어린애 취급 하시는데, 제 나이 열 여덟입니다. 선생님과 네살 차이 뿐이 안 됩니다. 군에 갔다 오셔서 저와 결혼 해 주시겠다는 약속을 해 주시고 떠나실 수는 없으십니까?"

"나도 너와 결혼해서 네 영혼과 육신을 다 갖고 아들 딸 낳고 행복하게 살고싶다. 그러나 내가 처한 지금의 환경은 대단히 좋지 않아. 언제 결혼 할지도 몰라,  결혼은 이상이 아니고 현실이야. 현실의 악조건에 시달리다 보면 삶에 상처를 입고, 네 그 맑고 고운 영혼에도 상처를 입힐 수 있어. 결혼은 내 뜻대로만 되는 것도 아니야. 주변의 환경과 여건이 맞아야 돼, 그리고 무엇 보다도 너와 결혼해서 너를 행복하게 해줄 자신이 없어"

" 행복하지 않아도 좋습니다. 선생님과 함께라면 어떠한 불행도 감수(甘受)할 수 있습니다.

 '참 질기고 무서운 애로구나. 아---.상아야.'

우리 둘은 그렇게 새벽녘까지 강가에 머물다 들어 왔습니다.

 

 나는 군(軍)에 입대(入隊) 했습니다. 충청남도 논산 육군훈련소에서 전후반기 3개월의 훈련을 받고, 강원도 철원군 신서면 대광리에 있는 전방(前方) 부대로 배치((配置)를 받았습니다. 고된 훈련과 초소 경계근무로 밤낮을 가리지 않고 눈코 뜰 새 없이 바빴습니다. 지금은 모르겠는데 그당시 부대에는 사병들이 외부로 소식을 주고 받을 수 있는 일반 전화가 없었습니다. 물론 핸드폰은 생겨나지도 않았을때 입니다. 부대 밖의 소식은 편지로 주고 받았습니다, 텔레비젼과 신문도 없어 부대 외부의 소식은 전혀 알수 없었습니다.

상아는 일주일에 한번씩 사연이 긴 편지를 꼬박꼬박 보내 왔습니다.

그러다가 편지가 뚝 끊겼습니다. 내가 편지를 수십통  보내도 답장이 없었습니다.

'무슨 일이 있는 거로구나' 하고 몹시 궁금해 했지만 방법이 없었습니다.

그로부터 또 4개월 쯤 뒤 한통의  편지를  받았습니다.

발신(發信)인 주소가 없는 '상아' 특유(特有)의 예쁜 글씨였습니다.

나는 연병장(練兵場) 구석 한적한 장소로 가서 봉투를 뜯어 읽기 시작했습니다.

" 저는 고향 집을 떠나 서울에 올라 와, 그리워 하던 대학 생활에 적응하면, 그렇게 질기게 나의 심신(心身)을 괴롭히던 번뇌(煩惱)에서 벗어날 줄 알았습니다.

처음에는 신기(新奇)한 것, 관심 가는 것도 있었으나 차츰 시들해 지고, 다시 모든 것이 싫어졌습니다. 사람들이 싫어지고 학교 생활까지도 무의미해 졌습니다.

몇날 며칠을 학교도 안 나가고 하숙방에 들어 박혀 고민을 해 봤지만 해답을 얻지 못 했습니다. 

 끔찍하게 사랑하는 처자식을 두고 처참하게 죽어 갔다는 불쌍한 우리 아빠, 여자로서의 최후의 자존심을 팽개치고, 각종 수모(受侮)와 치욕(恥辱)을 당하며 몸을 팔아서라도 자식을 잘 키워 보겠다고 발버둥 치는 안쓰러운 우리엄마,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영혼과 육신을  송두리째 바쳐 선생님을  죽도록 사랑 했으나,  끝내는 이루지 못하고 머리와 가슴이 텅빈 허깨비가 되어 ?껍데기만 살아 남아 숨쉬고 있는 나, 상아,-------.

그리고 형편과 상황이 극히 나빠, 지금 결혼 해 힘들게 살면, 우리 둘에게 하늘이 내리신 천부(天賦)의 영혼의 사랑에 흠집이 생긴다며, 별이 빛나는 밤에 북극성을 바라보고 내세(來世)에서의 숭고(崇高)한 사랑의 결합을 영혼의 대화로 기약, 기도 하자던 선생님, 마지막 헤어지기 전날 밤, 강변(江邊) 거북바위 위에서 저를  안은 채 통한(痛恨)의 몸부림을 치시던 불쌍한 내 선생님.-----

선생님.왜 이렇게 사바세계에는 괴로움이 많은 불쌍한 중생(衆生)들이 많습니까.

저는 속세를 떠나 왔습니다.

저는 괴로움이 많은 중생들이 사는 사바세계를 떠나 불가(佛家)에 입문(入門)하였습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인 불도(佛道)를 익히고 불률(佛律)을 지키겠습니다, 중생을 사랑하고 불쌍히 여겨, 복을 주어서, 괴로움을 덜어 주라는 자비(慈悲)의

부처님 말씀을 배우고 익혀 몸소 실천 하겠습니다.

그리고 별이 빛나는 밤엔 북극성을 찾아 바라보고 선생님과 영혼의 대화를 하며 제 간절한 소원을 빌겠습니다.

"내세(來世)엔 선생님의  영혼과 육신의 사랑을 함께 차지할 수 있는 복을 내려 주십시오"라고--------.

아---! 상아의 영혼이 소리 내어 울부짖는 호곡(號哭) 소리가 애절하게 들닙니다

 

군에 입대한 이후의 첫 휴가를 얻어 군복을 입은채로 P시로 달려갔습니다

강여사의 여관을 들렸으나 다른 낯선 사람이 운영하고 있었습니다.

 민여사의 집을 들렸더니, 마침 내외가 함께 있었습니다. 민여사는 내 손을 잡아 안방으로 끌어 드리고 우선 울기 부터 하더니,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했습니다.

 

서울에서 공부하던 상아로 부터 속세(俗世)에서의 모든 연(緣)을 끊고, 불가(佛家)에 귀의(歸依) 하여 비구니가 되겠다는 내용의 편지를 받았다고 했습니다,

평생을 세상 밖으로 나오지 않을 생각이오니 찾지 말라는 당부(當付)도 곁들여 있었습니다. 평소에 혈압이 높고, 심장이 나빠 고생하던 강여사는 편지를 든 두 손을 사시나무(일명 白楊木) 떨듯 하더니 뒤로 넘어지면서 머리 뒷통수가 현관 댓돌에 부딪쳤다고 했습니다. 그대로 민여사는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불귀(不歸)의 객(客)이 되었다고 했습니다. 민여사는 그 대목에서 목 놓아 울었습니다.

"그러면 혼자 남은 민수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이것이 몹시 궁굼했습니다.

아번에는 박사장이 천천히 입을 열었습니다.

"자네가 우리 집 사정을 잘 알고 있으니 자세한 군말은 안하겠네. 결과적으로는 내 과욕(過慾)이 자초(自招)한 악화(惡化)였네. 민수 엄마가 그렇게 한 많은 세상을 살다가 비명(非命)에 갔고, 상아도 속세에 돌아 올 사람이 아닌 것 같아. 현재 형편으로는 민수가 의지할 곳 없는 천애(天涯)의 고아(孤兒)가 된 셈이야.

민수를 달래서 내 집으로 데려 왔네. 민수는 내 큰 아들이 된거야. 민수가 처음에는 많이 방황 하더니만 이제 마음의 평정(平正)을 찾아가고 있는 것 같아. 이왕 찾아온 김에 민수를 만나서 마음을 다잡을 수 있더록 위로와 격려를 좀 해 주게.

그리고 민수는 아직 고등학교 2학년이쟎아. 여관을 운영할 수 없어서 마땅한 사람을 골라 매년 일정 금액을 받고서 대리 운영을 시켰네. 해마다 받는 돈도 민수 통장에 넣어서 우리가 관리해 줘야지. 그리고 여관도 민수 명의로 상속 시켜 놨네. 민수가 공부를 마칠 때까지 드는 학자금과 생활 비용도 추분히 부담 하겠어.

그리고 결혼까지도 우리가 시켜 주고---,"

김사장과 민여사의 인격과 인품은 이미 잘 알고 있기에, 머리 숙여 "고맙습니다.다."하는  말 밖엔 드릴 말씀이 없었습니다.

학교에서 늦게 돌아 온 민수와 많은 이야기를 나누며 한방에서 하룻밤을 지나고 나는 돌아 왔습니다.

 

매년 음력 4월 초파일,

부처님 오신 날엔 발신지주소(發信地住所) 없는

상아(常娥) 스님의 한통의 편지를 받습니다.

그리고 별이 빛나는 밤엔

북극성을 찾아

꼭 같은 소망을 이루게 해 달라도 기도합니다. (-----------------------,)

상아 보살님,

상구보리(上求菩提)의 지혜(智慧)를 얻어 성불(成佛) 하십시오.

 

 그리고 강(姜) 여사님

하늘 나라에서 꿈에서나 그리시던 남편 분 만나

이승에서 못다한사랑 이루시겠지요?

상아와 민수 잘 보살펴 주세요,

 

 초야(草野)에 묻혀 뜻을 이루지 못하고 사는 또 하나의 죄인(罪人) 처사(處士)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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