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0년 4·19혁명에 힘입어 진상규명운동 시발
첫 진상규명 운동은 1960년 4·19혁명에서 비롯됐다. 1954년 한라산 금족령이 해제돼 사건이 종결된지 6년만의 일이었다. 4·19혁명으로 이승만 독재정권이 무너지고 민주화 열기가 무르익던 1960년 5월 23일, 국회는 한국전쟁 당시 거창·함양 등지의 양민학살 사건에 관한 조사단 구성을 결의했다. 그러자 이 소식을 접한 제주도민들 사이에서는 "제주4·3도 진상규명해야 할 것 아니냐"는 여론이 비등했다. 제주대학생 7인은 '4·3사건 진상규명동지회' (고순화·고시홍·박경구·양기섭·이문교·채만화·황대정)를 결성해 자체 조사활동에 나섰고, 모슬포에서는 진상 조사를 촉구하는 궐기대회가 열렸다. 결국 국회 양민학살사건 진상조사 특위는 조사 대상 지역에 제주를 포함시킬 것을 승인, 6월 6일 조사반이 내도했다.
이처럼 갑자기 국회조사단의 제주 방문이 결정되자 {제주신보}는 촉박한 일정에 맞추기 위해 부랴부랴 희생 상황 접수를 받았고, 제주도의회나 제주시의회, 그리고 진상규명동지회도 나름대로 자체 조사 수집에 나섰다.
그러나 경상남도 조사반에 곁다리로 끼어 마지못해 실시된 단 몇 시간의 국회 조사는 부실할 수밖에 없었고, 공교롭게도 조사반장 최천 의원은 4·3 당시 제주경찰감찰청장으로 재직한 토벌대 주역인데다 태도마저 강압적이어서 물의를 빚었다. 조사 과정을 보도한 제주신보는 "질문하는 방법이 마치 죄인 다루는 식"이라고 꼬집었다. 최천 반장이 "10여 년이 경과됐으니 처벌 시효가 지났다"고 말하자 현장에 있던 제주신보의 신두방 전무는 "그러면 뭣하러 왔느냐. 사람 죽인 놈들에게 시효가 문제 되냐"고 따졌다. 분위기가 험악해지자 조사반의 다른 두 의원이 "특별법을 만들어서라도 철저히 처리하겠다"고 다짐해 겨우 일단락 됐다.
또 1960년 6월 21일 재경 제주학우회는 국회 앞에서 4·3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시위를 벌였고, 서울과 제주도의 대학생을 망라하는 '제주도민 학살사건 진상규명 대책위'를 조직하는 등 열기를 더했다.
▶ 1961년 군사쿠데타 발생 진상규명 물거품
5·16 군사쿠데타는 진상규명 운동을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만들었다. 쿠데타 발생 이튿날인 1961년 5월 17일 진상규명동지회원들이 검거돼 고초를 겪었고, 제주신보 신두방 전무는 옥고를 치렀다. 또 대정지역에서 진상규명에 앞장섰던 몇몇 사람들은 군입대 중 체포돼 곤욕을 치렀다. 경찰은 또한 유족들이 세운 위령비를 부숴 파묻기도 했다. 이로써 진상규명 운동은 제대로 싹이 트기도 전에 짓밟혀 원점으로 돌아갔다.
1961년 제주출신 의원 김성숙은 국회에서 '제주도 양민학살 보고서'를 내고 위령탑 건립 등을 제안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누구도 4·3을 입에 담지 못했고, 연좌제(정부는 84년 12월 이를 폐지한다고 발표함)의 억압 속에서 도민들의 상처는 속으로만 더욱 곪아 갔다.
얄궂게도 1962년에는 4·3 당시 제9연대장으로서 초토화작전의 주역이었던 송요찬이 군사정권의 내각수반이 돼 제주를 방문, '4·3상처 치유' 운운하며 이재민 원주지 복귀사업을 실시했다.
▶ 1978년 4·3논의 물꼬 튼 {순이삼촌}
5·16쿠데타 이후 무려 17년간 계속돼 온 강요된 침묵은 한 소설가에 의해 깨어졌다. 엄혹했던 유신 시절인 1978년 잡지 {창작과 비평}에 발표된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은 4·3의 참혹상과 그 후유증을 정면으로 다뤄 충격을 주었고 긴 세월 금기시 됐던 4·3의 물꼬를 트는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했다. 이 소설은 이후 4·3연구를 촉발시켰고 문학은 물론 미술·연극계 등 문화계 전반에 큰 영향을 끼쳤다. 그런데 작가 자신은 군과 경찰에 끌려가 고초를 겪었고 1979년에 출판된 소설집은 한동안 판금조치를 당해야 했다. 그러나 현기영은 지금까지 계속 '4·3 연작'을 발표해 오고 있다.
▶ 1979∼86년 은밀히 읽었던 '4·3책'
{순이삼촌} 이후 누구도 4·3에 대해 이야기하지 못했다. 1984년에 강용삼·이경수가 쓴 {대하실록 제주백년}에 4·3이 많은 부분 할애됐지만, 양민학살극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못한 채 토벌작전의 무용담만 실렸다.
그러나 80년 광주항쟁 이후 제주지역의 학생운동이 활기를 띠면서 학내에서 4·3이 관심사로 등장하기 시작했다. '운동권 학생'들은 그 무렵 전해진 미국학자 존 메릴의 [제주도 반란(The Cheju-do Rebellion)]이나 김봉현·김민주의 {제주도인민들의 4·3무장투쟁사} 등을 은밀히 복사해 읽었고 또한 전파했다. 당시 '운동권'이었던 한 인사는 "4·3을 제주지역 운동의 '역사적 지주'로 삼았었다"고 회고했다.
▶ 1987년 '6월 항쟁' 영향 정치권 이슈화
장기 군부독재를 청산하기 위해 온국민이 들고 일어섰던 1987년 '6월 민주항쟁'은 사회 각 분야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는 4·3진상규명에 있어서도 결정적인 초석을 깔았다. 현기영의 소설 [순이삼촌]이 발표된지 9년만에야 다시 말문이 트인 것이었다.
특히 6월 항쟁으로 쟁취한 대통령 직선제는 정치권에서 4·3을 이슈화하는 계기를 마련했다. 1987년 말 실시된 대통령 선거 때 김대중 후보(당시 평민당)가 처음으로 '4·3 진상규명'을 공약으로 제시한 것이다. 김 후보가 낙선함에 따라 비록 공약이 이뤄지지는 못했지만, 이후 제주지역에서는 총선과 대선 때마다 4·3진상규명이 늘 핫이슈로 등장하는 등 정치권의 논의가 이어지는 계기가 됐다.
이 해 제주대학교 총학생회 등에서는 일제히 '4·3 대자보'를 부착하며 1960년 4·19혁명 직후 제주대학교의 일부 학생들이 벌였던 진상규명 운동의 맥을 27년만에 이어갔다.
▶ 1988년 민주화 열기 속 4·3논의 분출
4·3 발발 40주년이었던 1988년은 진상규명 운동에 있어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1년 전 벌어졌던 '6월 항쟁'으로 조성된 민주화 분위기 속에서 그 동안 저변에 깔려 온 4·3진상규명 운동의 열기가 한꺼번에 폭발적으로 분출하기 시작한 것이다. 제주대학교 학생들은 1988년 3월 28일∼4월 8일까지를 4·3추모기간으로 정해 '4·3위령제 및 진상규명 촉구대회'를 가졌고, 서울에서는 제주사회문제협의회 주최로 4·3 학술세미나가 개최됐다. 또 일본에서는 탐라연구회 주최 추모강연회가 열렸다.
특히 1988년에는 4·3 관련 서적이 봇물처럼 쏟아져 나왔다. 우선 전문연구로서 두 편의 석사학위 논문이 발표됐고, 각종 자료모음집과 증언채록집이 출판돼 진상규명 운동에 불을 지폈다. 이에 앞서 1986년에 발간된 미국학자 브루스 커밍스의 {한국전쟁의 기원}은 현대사 연구의 붐을 일으키면서 4·3 연구의 깊이를 더하게 했다.
문학작품으로는 재일동포 작가 김석범의 소설 {화산도}와 {까마귀의 죽음}이 번역 출판됐고, 1986년 발표됐던 이산하의 4·3서사시 [한라산]이 뒤늦게 필화사건을 일으킴으로써 4·3은 전국적인 논쟁과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이후 강용준, 김명식, 고시홍, 김석희, 김용해, 오경훈, 오성찬, 장일홍, 최길두, 한림화, 현기영, 현길언 등 제주출신 작가들이 소설로 혹은 희곡이나 시로 문학화작업을 이어오고 있다.
또한 [토산리 실상기]나 [조수리 유전서] 등 주민들 스스로 진상을 조사해 정리한 기록물이 알려졌고, 표선면 가시리의 마을지 {가스름}은 사망자 374명을 자체 조사로 밝혀 내는 등 마을별 진상규명 운동도 활발하게 벌어졌다.
한편 6월 문공부가 '공안차원에서 좌익서적을 뿌리뽑는다'는 구실로 {제주민중항쟁} 등을 지목해 경찰에 고발함으로써 4·3논의가 한때 위축되는 듯 했다.
그러나 그해 7월 23일 제주 YMCA회관에서 재경 제주학우회 주최로 열린 '4·3강연회'는 4·3논의를 더욱 촉발시켰다. 이 강연회는 제주에서 열린 첫 공개행사로서 그 동안 억눌려 침묵해 온 도민 의식을 자극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4·3진상규명은 13대 총선의 단골 이슈가 됐다.
아울러 여소야대 정국 속에서 진행된 국회농수산위 제주도 국정감사에서 강보성 의원(당시 민주당)은 4·3진상규명을 촉구했고, 이어 국방위의 제주도 국정감사에서도 황명수 의원(당시 민주당)이 4·3의 역사적 재조명을 촉구했다.
특히 광주민주화운동의 진상규명 차원에서 열린 '광주청문회'는 도민들의 4·3규명 의지를 크게 고무시켰다.
1988년 말에는 미국의 '4·3학자' 존 메릴과 재일동포 소설가 김석범이 각각 제주를 방문해 미군정의 역할을 둘러싼 논쟁을 전개하는 등 1년 내내 4·3논의의 열기가 이어졌다. 또한 이 해 말에는 오성찬의 4·3증언채록집 {한라의 통곡소리}가 출판됐다. 이처럼 4·3진상규명에 있어서 1988년의 움직임은 가히 폭발적이었다.
▶ 1989년 도민들, 진상규명 조사작업에 나서다
1989년에 접어들며 4·3진상규명운동은 또다른 중요한 계기를 마련한다. 이는 그간의 논의가 진상규명을 촉구하던 수준이던 것에 반해 1989년에는 도민들이 본격적으로 진상규명 작업에 나섰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지닌다.
4월 3일을 맞아 제주신문 4·3특별취재반(반장 양조훈)이 1년간의 준비 끝에 기획물 [4·3의 증언]을 신문에 연재하기 시작했고, 5월 10일에는 '제주4·3연구소'(소장 현기영)가 발족됐다. 또 강보성 의원은 '제주도문제연구소'를 설립해 4·3진상규명을 위한 자료조사에 나섰다. 제주4·3연구소는 이후 꾸준히 증언채록집과 자료집을 내고 있고 유적지 순례행사 등을 통해 역사 대중화에도 앞장서고 있다.
제주신문은 [4·3의 증언] 연재 외에도 4·3당시 제주주둔 제9연대 연대장으로서 평화적인 사태 수습을 위해 무장대 총책 김달삼과 평화협상을 전개하다 미군정에 의해 해임됐던 김익렬 장군의 실록유고 [4·3의 진실]을 연재해 미군정 개입의 결정적인 단서를 제시했다.
1989년 처음으로 열린 '4·3추모제'는 특기할 만한 일이다. 제주지역 운동단체들이 합동으로 '사월제 공동준비위원회'를 결성해 처음으로 공개적인 추모제를 개최한 것이다. 이 추모제는 이후 발전적으로 변형될 때까지 5년간 이어졌다. 한편 1988년 10월에 결성된 '반공유족회'는 이후 토벌대에게 희생된 유족까지 포함해 1990년 6월 '제주도4·3사건 민간인희생자 유족회'(회장 송원화)로 개편, 1991년 4월 처음으로 유족들이 주체가 된 4·3위령제를 봉행했다. 그런데 이처럼 추모제와 위령제를 각각 개최한 사월제 공준위와 유족회는 갈등을 빚었고 운동단체들의 추모제가 열리는 장소에는 경찰의 최루탄이 난무했다.
4월 3일을 전후해 제주·서울·일본의 추모 모임이 열렸고 마당극, 노래극, 문학제, 강연회 등이 대대적으로 벌어졌다. 이는 이후 연례 행사로 굳어졌다. 이중에서도 놀이패 '한라산'의 마당극은 1998년까지 연 10회째 이어오고 있는데 1989년 첫 공연 때는 경찰에 연행돼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이처럼 문화예술계의 활동에도 결코 적지 않은 노력과 희생이 뒤따랐다.
1989년 국정감사 때 강보성 의원과 최기선 의원(이상 당시 민주당)이 4·3진상규명을 촉구했고, 국감 사상 처음으로 '4·3증인'을 채택해 증언을 듣기도 했다. 이에 이군보 제주도지사는 "4·3의 올바른 조명을 위해 공신력 있는 기관에 의뢰, 이를 재정립하고 그에 따른 대책을 마련할 것"이라고 답변, 정부차원의 진상규명의 발판을 마련했다.
▶ 1990년 3당합당 찬물…제민일보 탄생 불씨 살려
1990년 벽두에 전격 단행된 3당합당으로 정부의 입장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여소야대 정국 속에서 무르익던 4·3진상규명 움직임은 3당합당 이후 정부의 태도 변화로 또다시 모든 것이 원점으로 돌아갔다.
4월 제주를 방문한 안응모 내무부장관은 "4·3은 이미 법률적으로 다 끝난 사건이며 정부 주도의 재조명은 바람직하지 못하다"라고 밝혀 1989년에 발표된 제주도의 정사 편찬 계획을 백지화했다.
한편 1989년말부터 참언론운동을 벌이던 기자들이 1990년 1월 집단 해고를 당한 '제주신문 사태'로 인해 4·3취재반의 기획물 [4·3의 증언] 연재도 중단됐다. 또 3월 방영 예정이던 KBS의 4·3특집이 경영진의 강압에 의해 불방돼 그 해 'KBS 사태'의 원인이 됐다.
4월 3일에 열린 4·3 제42주년 추모식은 경찰의 원천 봉쇄 속에 강행돼 대량 구속 사태를 빚었고, 7월에는 {제주민중항쟁}을 출판했던 김명식이 뒤늦게 국가보안법 위반혐의(이적표현물 제작)로 구속돼 그해 11월 징역 1년6월을 선고받았다.
이런 가운데서도 제주신문 해직기자들이 중심이 되어 새로 창간한 제민일보는 특별취재반을 재가동, 1990년 6월부터 기획물 [4·3은 말한다]를 연재하기 시작했다. 이는 지금까지 420여회 장기 연재되고 있다. 이 연재물은 진상규명 운동을 선도했고 그 공로로 1993년 '한국기자상'을 수상했다.
9월에는 토벌대의 무차별 총살극에 의해 주민이 집단학살되고 마을이 폐촌된 애월읍 소길리 원동마을의 희생자 유족들이 옛 마을 터에서 사흘간 무혼굿을 열었다.
▶ 1991년 최루탄 난무한 4·3추모제
1991년은 지난해 '3당합당'과 '제주신문 사태'로 인해 위축됐던 4·3진상규명 운동이 다소 활기를 되찾은 해였다.
3월에는 제주4·3연구소가 당시 신문인 {제주신보}(1947. 1. 1∼1948. 4. 20)를 발굴 공개해 4·3의 배경 연구에 큰 기여를 했다.
4월 3일을 맞아 제민일보는 "1949년 4월 현재 인명피해는 15,000명이며 이중 80%이상이 진압군에 의해 희생됐다"는 내용의 미군 비밀문서를 대대적으로 보도, 그 동안 풍설로만 전해져 오던 희생규모와 사건 성격의 일단을 밝혔다. 제민일보는 또한 왜곡된 국사교과서 문제와 관련 집필자들과의 인터뷰 결과를 실어 여론을 환기시켰다. 제민일보는 인터뷰 기사와 함께 왜곡된 국사교과서의 실태를 폭로하며 개정의 당위성을 역설했다.
4월 3일 제주지역 사회단체들이 공동으로 개최한 '4·3추모제' 때는 추모제 장소인 관덕정 앞 광장이 경찰에 의해 원천봉쇄됐고, 최루탄이 난무하는 가운데 시민·학생 등 무려 4백여 명이 연행되는 사태를 빚었다. 특히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산하 전국의 대학들이 '4·3 시위'를 벌여 4·3을 이슈화시켰다. 놀이패 한라산의 공연은 제주시민회관 측이 '4월 내내 보수공사를 한다'는 이유로 대관 신청을 편법으로 기피하는 바람에 무산됐다.
한편 1월에 제주도경찰국이 발간한 {제주경찰사}는 희생자 숫자를 9,345명으로 축소하는 등 기존의 왜곡되고 잘못된 자료를 답습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1992년 '다랑쉬굴 발견'…4·3논의 다시 활성화
1992년 1월에는 인기리에 방영되던 MBC대하드라마 '여명의 눈동자'에서 4·3을 다뤄 큰 관심을 모았다. 특히 이 드라마는 공산폭동이라는 관변의 시각을 극복, 탄압에 의한 생존권 수호 차원의 민중봉기라는 새로운 관점에서 4·3을 재조명해 주목을 끌었다. 이 드라마는 또한 많은 일반 국민들에게 '4·3의 존재'를 처음으로 알리는 계기가 됐다.
4월에는 4·3 당시 토벌대에게 무차별로 학살된 부녀자와 어린이를 포함한 유해 11구가 다랑쉬 굴에서 발견돼 큰 충격을 주며 전국적인 관심을 모았고, 화가 강요배의 '4·3역사 그림전'이 열려 4·3진상규명의 논의를 다시 활성화하는데 기여를 했다. 또 도내외 단체에서는 4·3 제44주기를 맞아 미국과 한국 정부에 메시지를 보내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등 목소리를 높여 나갔다.
4·3추모제 때 진상규명을 요구하며 가두진출을 시도하던 제주대학생들과 이를 저지하는 경찰 사이에 최루탄과 돌멩이가 오고갔다.
그해 말 제14대 대선 때 김대중 후보(민주당)는 제주지역에서 열린 유세에서 "4·3진상규명과 도민 명예회복을 위해 4·3특별법을 제정하겠다"고 공약했다.
▶ 1993년 '문민정부 시대' 맞아 도의회 4·3특위 구성
1993년은 이른바 '문민정부'라는 다소 열린 분위기 속에서 4·3진상규명운동이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다. 3월 20일 제주도의회 4·3특위(위원장 김영훈)가 1년간의 준비 끝에 정식 출범했다. 진상조사·역사정립·명예회복 및 위령사업 등 3단계 사업을 구상, 추진하고 있는 도의회 4·3특위는 공공기관에서 4·3을 공론화 했다는 점만으로도 큰 의미를 갖는다. 도의회 4·3특위는 이후 희생자를 조사·발표하는 등 진상규명에 큰 역할을 담당했다.
4월에 들어서자 인명피해와 역사왜곡의 측면에서 제주4·3과 그 내용이 흡사한 '대만 2·28사건'에 대해 대만 정부가 명예회복 조치와 피해 보상을 했다는 외신 보도가 있었다. 또한 민자당이 '거창양민학살사건' 명예회복과 배상을 위해 특별법을 추진한다는 보도가 이어졌다. 이같은 보도에 도민들은 큰 관심을 보였고 4·3진상규명운동을 더욱 고무시켰다.
한편 거창사건 특별법 추진으로 인해 현대사 재조명 분위기가 일고 있던 가운데 5월 3일 이영권 의원(민주당)은 국회 본회의 대정부질문을 통해 "4·3규명을 위해 '반민족·반민주 행위에 대한 진상규명조사특위를 구성하라"고 촉구했고, 5월 8일 대정부질문에서 김종하 의원(민자당)은 "민주적 정통성을 확보한 문민정부 시대에서 4·3 등 과거의 불행한 역사에 대한 객관적이고 공정한 재평가 작업이 있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5월 {제주도지}의 개정 출판도 빠뜨릴 수 없는 큰 변화이다. 그 동안 좌우 대립적 측면만을 강조하며 4·3을 공산폭동으로 규정해 온 것과는 달리 행정기관의 자료에서 4·3을 본격 재조명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끌었다.
이런 재조명 작업이 기폭제가 되어 1993년 10월에는 4·3특별법 제정과 특위 구성을 요구하는 청원서가 국회에 제출됐다. 제주지역총학생회협의회(의장 오영훈)가 변정일 의원을 대표 소개 의원으로, 제주도의회(의장 장정언)가 양정규 의원을 대표 소개 의원으로 해 각각 청원서를 제출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 청원은 운영위에 회부된 이후 방치됐다가 본회의에 상정되지도 못한 채 사장됐다.
반면에 11월 12일 민자당은 '거창사건 명예회복 특별법' 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에 도민들은 지역의 정치적 역량에 따라 역사 바로세우기가 좌우되는 현실을 보며 씁쓸함을 맛봐야 했다.
11월에는 조천읍 북촌리 주민들이 자체적으로 희생자 조사를 벌인 끝에 이를 발표했다. 북촌원로회의 1차조사 결과, 전체 희생자 412명 중 409명이 토벌대에 의해 학살됐음을 밝혀 충격을 더했다. 이 조사활동은 4·3의 엄청난 충격과 피해의식에 시달려 오랜 침묵을 고집해 오던 경험세대들이 직접 조사에 앞장섰다는 점에서 향후 진상규명 운동의 큰 전환점이 됐다.
한편 한국기자협회는 [4·3은 말한다]를 연재해 오고 있는 제민일보 4·3취재반에게 1993년 제25회 '한국기자상'을 수여했다.
▶ 1994년 여·야 국회의원 75명, 4·3특위 구성안 발의
2월 2일 제주출신 변정일 의원은 지난해인 1993년에 제출된 도민 청원과는 별도로 여·야 의원 75명의 서명을 받아 '제주도 4·3사건 진상규명 특별위원회 구성결의안'을 제출했다. 이로써 4·3특위안이 처음으로 국회에 정식 의안으로 발의됐다.
같은 날인 2월 2일 제주도의회 장정언 의장은 1994년을 '기초조사의 해'로 정하고 4·3피해 조사활동에 착수하겠다고 발표, 도민들의 큰 호응을 받았다. 2월 7일 도의회 내에 '4·3피해 신고실'이 개설돼 주민들의 신고를 접수하기 시작했다.
3월 3일 불교 조계종 제주교구 본사 관음사(주지 지형스님)는 '4·3망혼 위령 천도대재'를 시작해 4월 3일까지 한달간 위령 법회를 열었다.
3월 10일에는 제민일보 4·3취재반이 그간 신문지면을 통해 연재했던 [4·3은 말한다]를 다듬고 보완해 {4·3은 말한다}(전예원 간)라는 제목으로 두권의 책을 펴냈다. {4·3은 말한다}는 연재가 계속됨에 따라 1998년 현재 제5권까지 출판됐다. {4·3은 말한다}는 또한 일본어로 번역됐다. 일어판 제목은 {제주도 4·3사건}(신간사 간)으로 1998년 제4권까지 출판돼 국제적으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한편 1994년은 첫 합동위령제가 열린 해라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그 동안은 제주지역 12개 운동단체들이 모여 결성한 '사월제 공준위'가 1989년부터 5년째 4·3추모제를 열어 왔고, '4·3유족회'는 1991년부터 3년째 위령제를 봉행하는 등 서로 입장을 달리하는 두 단체가 갈등을 빚으며 각각 다른 장소에서 행사를 벌여 왔다. 이에 제주도의회가 중재에 나서 '합동위령제'를 개최케 된 것이다.
4월 3일을 전후한 기간에는 민예총의 첫 '4·3예술제'가 열려 문학·미술·연극 등 다채로운 행사가 벌어졌다.
한편 도민화합의 움직임 속에서도 반공단체 등의 일부 인사들은 제주지역의 일부 일간지에 '4·3 공산폭동론'을 주장하는 기고를 연일 발표하며 진상규명 운동에 찬물을 끼얹으려는 시도를 계속했다. 또한 경찰은 4월 14일 새벽 '국가안전기획부 산하 애국동맹'이라는 정체불명의 단체 명의로 김일성을 찬양하는 문서가 발견됐다고 발표하기도 했다.
3월 18일 '국사교육 내용전개 준거안 연구위'가 발표한 교과서 개편 시안이 전국적으로 일파만파를 일으켰다. 4·3을 '항쟁'으로 규정한 개편 시안에 대해 사학계의 보수적인 학자들과 보수 언론들이 많은 지면을 할애하며 크게 반발한 것이다. 시안을 마련한 서중석 교수(성균관대 사학과)에게 집중타가 가해졌고 결국 교육부가 시안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결정함에 따라 겨우 파문이 일단락됐다.
6월에는 건국청년운동협의회 제주도지부(지부장 김인선)가 주최하고 한국자유총연맹 제주도지회(지회장 강창수)가 후원한 '대한민국 건국과정과 제주비극(4·3)'이라는 주제의 우익단체 모임이 열려 예의 '공산폭동론'을 강조했다.
7월 8일 '정부차원의 진상규명 작업'을 촉구한 변정일 의원의 대정부 질의에 대해 이영덕 총리는 "4·3 진상규명 재평가 작업은 국회나 공인된 단체가 추진하는 게 바람직하다. 이런 작업들이 이뤄질 경우 정부차원의 모든 지원을 아끼지 않겠다"는 정부의 입장을 밝혀 다소 진전된 모습을 보여 주었다.
1995년 제주도의회, {4·3피해조사 1차 보고서} 발간
진상규명 운동에 있어서 1995년이 갖는 의미는 그 동안의 노력들이 서서히 가시적인 성과로 나타났다는 점이다.
5월 제주도의회 4·3특위는 그 동안의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4·3피해조사 1차 보고서}를 발간했다. 14,125명의 희생자 명단을 일일이 기록한 이 책자는 향후 4·3연구의 귀중한 1차사료가 될 것으로 평가되는 성과였다. 희생자 명단 속에는 10살 미만의 어린이 610명, 61세 이상 노인 638명의 이름도 수록돼 충격을 더했다. 도의회 4·3특위는 1차 보고서 발간 즉시 국회를 방문해 보고서를 전달하면서 앞서 1993년에 청원한 '국회특위 구성'이 조속히 실현될 수 있도록 노력해 줄 것을 촉구했다.
한편 제4대 도의회가 마감되고 새로 제5대 도의회가 출범함에 따라 1995년 10월 도의회4·3특위가 재구성됐다. 1998년 4월까지를 시한으로 하는 4·3특위는 4·3피해신고실도 새로 설치해 유족들의 신고를 추가로 접수하는 등 조사활동을 계속해 나갔다(도의회 4·3특위는 제5대 도의회가 끝나는 6월말까지 2개월간을 더 연장해 활동했다).
5월 제주4·3연구소가 개소 6주년 기념으로 개최한 좌담회에서는 할머니·할아버지들이 대거 참여, 그 동안 못 다한 이야기를 봇물처럼 쏟아 놓음으로써 진상규명 운동이 확산되고 있음을 보여줬다.
8월에는 서울의 한 극단이 4·3의 비극을 소재로한 연극 '느영 나영 풀멍살게'를 공연했다. 특히 이 공연에는 제주출신 유명 탤런트 고두심이 주연을 맡아 전국적으로 4·3을 알리는데 기여했다.
9월에는 한국전쟁 중 소위 '좌익부역자 숙청'에 나선 우익세력에게 희생된 경기도 고양시 금정굴 유골이 발굴돼 눈길을 끌었다. 도민들은 1992년 제주도에서 발굴된 '다랑쉬굴 유골'을 떠올리며 큰 관심을 보였다. 그러나 유골의 처리과정에서 보여준 정부의 싸늘한 태도는 도민들에게 '아직도 때가 아니구나'를 느끼게 했다.
한편 1995년에도 지난해에 이어 두 번째로 사월제 공준위와 유족회가 함께 하는 합동위령제가 열렸으나 그 과정이 순탄하지 않았다. 특히 지난해의 첫 합동위령제 때 무장대원의 위패가 올랐다는 구실을 들어 유족회가 거부하는 바람에 합동위령제는 무산될 위기에 놓였다. 그러나 유족회에게 위령제 행사비를 지원하는 제주도와 제주도의회가 적극 중재에 나섰고 도민여론이 빗발쳐 겨우 합동위령제가 성사됐다.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제주지역 지방지인 제주일보와 한라일보의 지면에는 일부 반공단체 인사들의 '공산폭동론'이 연일 투고 형식으로 게재됐다. 이들의 주장인 즉, '공산폭동으로 판명난 사건을 두고 무슨 진상규명을 한다는 말이냐'는 것이다. 이들은 또한 제주도 당국의 4·3위령탑 건립에 대해서도 반대하는 성명을 일부 지방지에 광고 형식으로 발표하기도 했다.
3월에는 '2·28사건'에 대해 대만 정부가 보상법을 통과시켰다는 소식이 전해져 제주도민들의 부러움을 샀다. 12월 18일에는 국회본회의에서 '거창사건 관련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이 통과되자 도민들 사이에서는 '제주4·3은 도대체 어떻게 되는 거냐'는 여론이 비등했다.
1996년 제주도, 4·3진상규명에 참여
1996년 새해 벽두부터 국회에서 낮잠 자고 있는 도민 청원에 대해 조속 처리를 촉구하는 여론이 드높았다. 이는 다가오는 4월 총선으로 제14대 국회가 마감됨에 따라 그간 국회 운영위에 계류중인 두 건의 청원과 의원 75명이 서명한 특위구성안이 '물 건너가는 것이냐'는 회의가 일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제주도의회는 1월 19일 국회를 방문해 청원이 조속히 해결되도록 촉구하는 건의문을 전달했다.
그러나 국회 운영위는 제14대 마지막 임시국회가 끝나는 1월 27일에 가서야 청원심사 소위원회와 운영위원회를 잇따라 연 끝에 '시일 촉박'을 이유로 국회본회의에 부의하지 않기로 결정했다. 그 대신 '오는 15대 국회에서 특위를 구성할 수 있도록 결의한다'며 아직 출범하지도 않은 제15대 국회로 일을 떠넘겼다. 이에 대해 "임시방편의 정치적 수사"라는 비판과 함께 "그래도 국회가 4·3해결 의지를 처음으로 표명한 것"이라는 자위가 엇갈렸다.
도민들이 진상규명을 강력 촉구하는 분위기 속에서 3월에는 신구범 제주도지사가 정부에 대해 진상규명을 공식 요청하기도 했다. 또한 4·11총선 때는 거의 전 후보들이 4·3문제 해결을 공약, 선거의 최대 쟁점으로 부상했다.
제주도의회 박희수 의원은 '제주 4·3알리기와 특별법 제정 촉구를 위한 국토순례단'을 구성, 3월 23일부터 11일간 전국을 순회했다.
4월에는 유족회와 공준위가 합동위령제 개최를 합의하면서 특별법 제정을 촉구해 도민 의지를 진일보시켰다는 평가를 받았다. 합동위령제는 1994년부터 세 번째 열리는 것이어서 새삼스런 일이 아니지만, 유족회가 그간의 입장과 달리 특별법 제정을 촉구한 것은 획기적인 일이었다. '4·3은 공산폭동'이라는 단순논리만 내세우며 진상규명 무용론을 주장하던 유족회가 이렇게 입장을 바꾸게 된 것은 유족회 회장단이 개편됐기 때문이다. 그 동안은 과거 반공유족회 소속 인사들이 수적인 열세에도 불구하고 유족회를 주도했으나, 2월 25일 회장단 개편 때 토벌대에게 희생된 유족으로 회장 및 회장단이 대거 바뀐 것이다.
한편 '4·3 때 학살을 주도했던 군 정보과장은 아편중독자였다'는 제민일보 기사가 4월 2일자로 보도돼 큰 충격을 주면서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여론을 더욱 높였다.
11월에는 만화가 박재동의 4·3 소재 애니메이션 '오돌또기' 작품 설명회가 열려 전국적인 관심을 불러일으키면서 4·3을 알리는데 크게 기여했다. 박재동은 국민적 인기를 한몸에 모으던 {한겨레} 신문 만평까지 그만두고 작품 제작에 매진하고 있다. 그러나 경제적 문제 등으로 인해 4·3 제50주년인 1998년까지 '오돌또기'가 완성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11월 12일에는 제주도의회 4·3특위(위원장 김영훈)가 '국회 4·3특위 구성에 관한 청원'을 국회에 제출했다. 이는 1993년에 이어 두 번째로서 제14대 국회가 이를 접수만한채 방치하다가 마감됨에 따라 제15대 국회 출범 이후 재청원한 것이다.
12월 17일 국회 재적의원 과반수가 넘는 154명의 찬성 서명으로 '제주도 4·3사건 진상규명특별위원회 구성결의안'이 발의됐다. 이는 도민들의 기대를 부풀게 했으나 아직까지는 이렇다 할 결실이 없다.
12월 30일에는 서울 거주 제주도민 단체인 제주사회문제협의회가 '제주4·3특별법 어떻게 제정되어야 할 것인가'라는 주제로 서울 종로성당에서 토론회를 열어 전국적인 관심을 촉구했다. 토론회 때는 자체적으로 마련한 특별법 시안을 발표하기도 했다
▶ 1997년 제주4·3 제50주년 기념사업 범국민위원회 발족
4·3발발 50주년을 1년 남겼다는 시의성 때문에 진상규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어느 때 보다 높게 일었다.
특히 4월 1일 서울의 한국기독교회관에서 결성식을 가진 '제주4·3 제50주년 기념사업 추진 범국민위원회'는 4·3해법찾기를 향한 국민연대였다. 상임대표인 김찬국(상지대 총장) 김중배(참여연대 공동대표) 강만길(고려대 교수) 정윤형(홍익대 법경대학장) 등 우리시대의 양심으로 불리는 각계의 명망있는 지도급 인사들이 대거 참여한 범국민위는 △정부의 양민학살 사실 인정과 자료 공개 △국회 4·3특위 구성 △4·3특별법 제정과 명예회복 조치 등을 촉구해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범국민위는 이후 '4·3역사신문' 과 소식지 '4·3반세기'를 발간해 오고 있으며 1998년에는 인터넷 홈페이지를 개설했다.
4월 {제민일보}는 "대량 학살극을 초래한 '4·3계엄령'은 불법이었다"는 기사를 보도해 진상규명 운동을 더욱 고조시켰다. 보도가 나가자 4·3범국민위원회의 성명과 함께 제주범도민회와 서울의 참여연대를 비롯한 전국 12개 지역 시민운동단체에서도 성명을 내어 진상규명과 특별법 제정을 촉구했다. 7월 8일에는 국회 천정배 의원(국민회의)이 '불법 계엄령'을 추궁하며 4·3특별법 제정을 촉구하기도 했다.
2월 대만 2·28사건 제50주년을 맞아 동아시아 인권위원회가 주최한 '동아시아 냉전과 국가 테러리즘'이라는 주제의 국제심포지엄이 대만에서 열려 큰 관심을 모았다. 그런데 이 행사에 참석키로 했던 제주도의회 4·3특위 의원들이 돌연 불참하게 돼 외압설이 나돌았다.
2월 27일에는 도의회 4·3특위의 {4·3피해조사보고서-수정보완판}이 출판됐다. 이는 1995년 제4대 도의회가 발간한 {1차 보고서}를 토대로 제5대 도의회가 수정 보완한 것으로 14,504명의 희생자명단이 발표됐다. 도의회는 3월 11일 국회의장실과 여야 총무실 등을 방문, 이 보고서를 전달하면서 앞서 1996년 말 국회의원 154명에 의해 발의된 국회4·3특위 구성안이 조속히 실현될 수 있도록 노력해 줄 것을 촉구했다.
10월에는 재일동포 소설가 김석범이 4·3을 다룬 소설 {화산도} 전7권을 집필 21년만에 완간해 화제를 모았다. 이미 이 책으로 1984년 '오사라기지로상(大佛次郞賞)'을 수상한 바 있는 저자는 1998년 1월 '마이니치(每日) 예술상' 마저 수상해 제주4·3에 대한 관심을 더욱 높이는 계기를 마련했다.
1997년은 영상으로 표현된 4·3다큐멘터리가 화제와 관심을 불러일으켜 '영상시대'임을 실감케 한 한해였다. 4·3영상물은 이미 '다랑쉬의 슬픈 노래'(1993년)와 '잠들지 않는 함성, 4·3항쟁'(1996년)이 대학가 등지에 널리 유포돼 4·3을 알리는데 큰 역할을 해 왔다. 그런데 1997년 10월 경찰은 뒤늦게 제작자(김동만·스튜디오21 대표)를 국가보안법 위반 혐의로 연행 조사해 사회적 물의를 빚었다. 이는 각계의 거센 반발을 불러일으키며 오히려 4·3영상물에 대한 관심을 높였다.
한편 부산 하늬영상(대표 조성봉)의 4·3다큐멘터리 '레드헌트'는 1년 내내 화제로 떠오르며 4·3논의를 전국은 물론 국제적으로 확산시켰다. 1997년 초 발표된 레드헌트는 그해 4월 열린 서울다큐멘터리영상제에 출품됐으나 주최측이 돌연 상영취소 결정을 내려 물의를 빚었다. 그러나 9월에 열린 인권영화제와 10월의 부산국제영화제에서는 관객들의 큰 호응을 받았다. 그런데 11월 공안당국에서는 뒤늦게 이 영화를 국가보안법상 이적표현물로 규정, 인권영화제 때 이 영화를 상영했다는 이유로 서준식(인권운동사랑방 대표)을 연행 구속했다. 이에 국제사면위원회가 즉각 항의성명을 냄으로써 오히려 4·3논의를 확산시켰다. 레드헌트는 이듬해인 1998년 2월 베를린영화제에도 초청 상영됐으나, 출국하려는 감독을 경찰이 연행하는 바람에 베를린영화제 측의 항의성명이 나오는 등 국제적 비난까지 받았다.
5월 3일 우익인사들의 모임인 자유수호협의회(상임공동대표 강창수 장영배 한수섭 오균택 고문승)에서는 그간 신문·잡지 등에 기고해 온 글과 세미나 원고 등을 모아 {제주4·3사건 자료집}을 펴내 기존의 '공산폭동론'을 되풀이했다.
6월 6일에는 현충일을 맞아 '자유민주호국동지회'라는 유령단체 명의의 괴유인물이 시내 일원에 뿌려져 경찰이 수사에 나서는 해프닝이 있었다. 이 유인물은 위령사업을 추진해 온 신구범 지사와 도의회4·3특위위원장인 김영훈 의원을 직접 거명해 비난하면서 "제주도 4·3운동 기념행사·위령제 등을 중지하고 북한의 공작선상에서 놀아나지 말고 깨어나라"고 주장했다.
9월 26일에는 제50주년 위령사업을 추진할 '제주 4·3사건 희생자 위령사업 범도민추진위'(위원장 조승옥)가 결성됐다. 그런데 제주도가 중재해 구성한 이 단체는 위원 선정작업에서부터 밀실행정이라는 비난을 받았다. 또한 당초 위령사업을 반대하던 일부 인사들이 대거 참여해 이념논쟁을 시도함으로써 이에 반발한 시민단체가 탈퇴하는 등 물의를 빚었다. 이로써 유족회와 사월제공준위가 4년간 열어 온 화합의 위령제가 따로따로 행사를 치르던 지난날로 돌아갈 위기에 처했으나 막판에 겨우 봉합됐다.
한편 9월 20일 국회의원 회관에서는 '제주4·3 문제, 해법은 무엇인가'라는 주제의 여·야 4당 정책토론회가 열려 연말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4·3문제가 서서히 정치권에서 이슈화되고 있음을 보여줬다.
1998년 '4·3' 발발 50주년 맞아 새 대통령에게 기대
4·3발발 50주년을 맞아 그날을 되새기고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각종 행사가 제주와 서울, 그리고 일본에서 일제히 열렸다.
제주에서는 2월 3일 4·3 유관단체들이 모여 결성한 '4·3 50주년 학술·문화사업회' 주최로 학술심포지엄, 현장조사 보고서 발간, 문학의 밤, 미술전 등 다양한 행사가 치러졌다. 특히 '해원상생굿'과 '방사탑 쌓기'는 도민들이 직접 참여한 행사로서 특기할 만하다. 해원상생굿은 제주의 전통굿을 통해 원혼을 위령하는 행사로서 유족들의 한풀이 한마당이 되었다. 또한 예로부터 제주에서 재앙을 막기 위해 쌓아 온 방사탑을 도민들이 직접 돌멩이 하나하나 쌓아 올림으로써 평화를 기원하며 역사의 교훈을 되새겼다.
서울에서 열린 행사는 지난해 발족한 '제주4·3 제50주년 기념사업 추진 범국민위원회'에서 주관했다. 1월 '4·3역사기행'으로 새해 행사의 문을 연 범국민위는 3월 28일부터 4월 5일까지를 '4·3 기념주간'으로 정해 학술심포지엄, 명예회복 촉구대회, 그림전, 진혼굿, 4·3문화학교 개설 등 다채로운 행사를 벌였다. 범국민위는 이에 앞서 3월 1일 서울 명동 가톨릭회관에서 '제주4·3 명예회복의 해' 선포식을 가졌다. 특히 3월 28일 성균관대에서 범국민위 주최로 열린 '제주4·3 제50주년 기념학술 심포지엄'은 역사·정치학 뿐아니라 사회학, 법학, 인류학, 의학 등 다양한 분야의 학문적 접근을 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었다. 범국민위는 또한 4·3관련 각종 자료들을 모아 놓은 인터넷 홈페이지(www.cheju43.org)를 개설해 역사 대중화에 앞장서고 있다.
일본에서는 4·3 50주년 기념행사를 치르기 위해 도쿄와 오사카에 각각 구성된 기념사업실행위원회 주최로 강연회, 추도콘서트, 학술토론회, 전시회 등이 열렸다. 특히 도쿄에서는 미국의 학자 브루스 커밍스를 초청, 4·3과 미국과의 관계를 조명하는 강연회를 개최했다. 강연회 때는 제민일보 4·3취재반의 {4·3은 말한다}의 일본어 번역판인 {제주도 4·3사건} 제4권 출판기념회도 아울러 열렸다.
이들 행사에 앞서 2월 27일에는 서울 및 일본 거주 제주도민 930여명이 집단으로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촉구하는 성명을 신문 광고를 통해 발표했다.
이런 가운데서도 매년 제주지역 일부 지방지에 투고하며 '공산폭동론'을 주장해 온 한국자유총연맹 등 반공단체들이 3월 17일에는 제주일보 광고를 통해 "공산화 통일운동의 하나로 남로당이 일으킨 제주도 4·3폭동을 '민족의 자주와 통일정부의 건설'이라고 왜곡 주장하는 자들을 정부는 단호히 대응하라"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하면서 위령제 실시를 반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4월 3일 처음으로 정부 대표가 참석한 가운데 제50주년 범도민위령제가 엄수됐다. 이날엔 또한 여야 각당 대표의 추도사도 처음으로 발표됐는데, 한목소리로 4·3진상규명을 다짐해 도민들의 마음을 부풀게 했다.
이에 앞서 4월 2일 천주교 제주교구 정의구현사제단(대표 임문철 신부)은 신제주성당에서 '4·3 위령 및 화해를 위한 미사'를 가졌다. 4월 3일에는 대한불교조계종 제주교구 본사 관음사(주지 중원 스님)에서 '4·3위령 천도재'가, 모슬포교회에서 서남지구 기독교교회협의회(회장 김한병 목사) 주최 '4·3 50주년 기념 강연 및 기도회'가 각각 열렸다. 이밖에 원불교 제주교구(교구장 서위진)도 2월 28일부터 일주일간 특별천도재를 여는 등 종교계의 위령 사업이 활발히 벌어졌다. 6월 22일에는 민족선교연구소(이사장 한도전 목사)가 경기·충청 지역 목회자 및 평신도 1백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민족화해와 통일을 위한 교회의 사명'이란 주제의 학술세미나를 개최했다. 이 세미나에서 참석자들은 "제주4·3을 외면해 온 한국교회는 회개의 신앙고백을 해야 한다"면서 4·3진상규명과 상처 치유에 앞장설 것을 다짐했다.
4·3 50주년을 맞아 전국적인 연대분위기도 무르익고 있다. 제주출신 강요배 화가의 '4·3역사화전 - 동백꽃지다' 순회전이 그 계기가 됐는데, 이 그림전이 서울 광주 대구 부산 등지에서 잇따라 열리는 동안 해당 지역에서 4·3진상규명을 촉구하는 1백만 서명운동이 전개됐다. 특히 부산에서는 6월 20일 그림전 개막식에 맞춰 천주교 부산교구 정의평화위원회와 제주4·3 제50주년 기념사업 추진 범국민위원회의 공동주최로 '4·3토론회'를 가졌고, 이어 '제주4·3항쟁 진실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부산본부 준비위원회'를 결성했다.
한편 4·3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대선 공약으로 내걸었던 국민회의는 그 공약 이행의 첫 신호탄으로 3월 30일 당내에 '제주도 4·3사태 진상조사 특별위원회'(위원장 김진배)를 구성했고, 특위는 5월 7일 제주에서 사상 첫 '4·3공청회'를 개최했다.
동아시아 평화와 인권 한국위원회(대표 강만길)는 8월 21일부터 24일까지 나흘 동안 제주에서 4·3을 집중조명하는 대규모 국제심포지엄을 개최했다. 지난해 2·28사건 50주년을 맞아 열린 대만심포지엄에 이어 두 번째로 열린 이번 제주심포지엄은 96년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동티모르 독립운동가 호세 라모스 오르타 박사를 비롯해 한국과 대만, 일본 본토, 그리고 오키나와의 학자·법조인·예술인 25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대규모로 치러져 4·3을 국제적인 문제로 크게 부각시켰다. 심포지엄에서 참석자들은 2차대전과 이후 동·서 냉전구조 속에서 벌어진 동아시아 각국의 인권침해 사례를 살피고 새로운 21세기의 평화와 인권신장의 방안을 모색했다.
9월 22일 민족선교연구소(이사장 한도전 목사)와 기독교대한감리회제주지방회(감리사 이광민 목사)는 제주에서 '4·3해결의 과제'를 주제로 학술세미나를 개최했다. 이 행사에 참석한 전국에서 모인 목회자 80여명은 성명을 발표, △교회가 그동안 4·3의 아픔을 외면해 온데 대해 회개하고 △앞으로 4·3문제 해결에 앞장 설 것을 다짐하면서 △정부에 대해 근본적인 해결책 마련을 촉구했다.
9월 28일 국민회의 4·3특위는 서울 국회도서관 대강당에서 '제2차 4·3공청회'를 개최해 보다 구체적인 4·3해법을 논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