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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신구약 중간사
1. 페르시아와 알렉산더 대제(大帝) 통치기
이 시기는 유대인들이 전 세계로 흩어진 역사의 장이다. 유대인들은 히브리 사람으로 잘 표현되는데 갈대아 우르를 떠나 가나안으로 이주해가는 역사가 BC 18세기에 시작된다. 요셉을 따라 이집트에 내려갔던 그들은 모세의 영도하에 BC 1300년경 이집트을 탈출한다. 그들은 사사시대를 거쳐 사울왕과 다윗왕 그리고 솔로몬왕의 번영을 뒤로하고 남북으로 나뉜다. 10개 부족의 북이스라엘과 2개 부족의 남유다가 사마리아와 예루살렘을 중심으로 발전하다가 북은 BC 722년 아시리아에, 남은 BC 586년에 신바빌로니아에 의해 멸망한다. 그 후 바벨론에서 귀환하여 유다족 중심으로 뭉쳤던 그들은 페르시아와 알렉산더 제국의 지배하에 들어간다.
먼저 페르시아 통치하의 유대인들의 역사를 살펴보면, 예루살렘 멸망 직후에 이스라엘 자손들은 유대와 갈릴리, 사마리아 주변, 그리고 이집트와 바벨론에 집단적으로 거주하게 된다. 이 현상을 크게 나누어보면 예루살렘 중심지와 Diaspora에 산재한 여러 중심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유대에 많은 사람들이 남아 있으면서 당시 바벨론에서 임명한 그달리야 총독을 살해했고 그 후 이집트로 많은 사람들이 도망한다. 당시 유대에 남아있던 자들 중 일부는 바벨론의 신을 섬기거나 가나안 원주민의 바알신을 숭배하는 자들도 나타났다. 또한 그들 중 조상의 하나님에게 여전히 충성하는 자들도 없지는 않았었다.
한편 갈릴리와 사마리아 주변에 남아 있던 자들 중에서도 새로 정착된 이방의 이민들과 결혼하는 자들이 증가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역사적으로 결정적인 요인은 바벨론으로 끌려간 유랑민 집단이었다. 이들은 정착한 곳에서 조건적 자유를 누리며 대부분 농사를 지었던 것 같다. 그들은 재산을 모으고, 서로 화합할 수도 있었으며, 심지어는 유대 땅에 남아 있던 자들과 서신을 교환하며 가정과 지파별로 이루어진 집단 거주에서도 그들의 본래적인 사회구조를 유지할 수가 있었다.
바벨론이 BC 538년에 페르시아의 왕 사이러스의 손에 들어가면서 사이러스왕은 1년 후에 유대의 유랑민들에게 예루살렘 성전의 재건을 허락한다. 뿐만 아니라 이 일을 위해 느브갓네살에 의해 BC 605년, BC 597년, BC 587년에 강제로 이주하면서 수세기 동안 유대 땅에만 집중되었던 상태에서 근동과 중동, 소아시아, 유럽에까지 확산된 하나의 종교적인 시기가 되는 것이다.
포로 기간을 포함한 페르시아의 통치 기간 동안 북왕조는 타민족과 완전히 합류하고 남왕조는 국제결혼을 거부하고 유대교 신앙 공동체를 형성한다. 그들의 공동체는 지도자인 장로와 율법, 그리고 회당으로 이루어져 발전되며 이 기간동안 사이러스의 화해 정책에 따라 고국으로 귀환한 유대인들은 율법의 교육과 전수에 집중하며 안식일을 지키고 제사를 준행하며 이방인과의 통혼을 금하고 이미 얻어진 이방인 아내들은 돌려보낸다.
결국 이 시대의 유대의 역사는 양극성을 갖게 된다. 그리하여 예루살렘 중심지와 Diaspora에 산재한 여러 중심지로 나누어지는 것이다.
140년 넘게 세계를 제패했던 페르시아 치하에서 유대는 BC 400년까지 138년간 페르시아에 예속된 하나의 주(province)였으며 이때 유대인들은 페르시아 제국 128개주 전역에 분산되어 그들 나름대로 공동체를 형성하고 제한적이지만 자유를 누리며 살게 된다.
그 다음 알렉산더 대제하의 유대인들의 역사에 대해 살펴보면 마케도냐의 립포스왕은 상호분쟁으로 힘을 잃은 그리스의 주변 도시국가들을 하나 둘 정복하면서 그 두각을 나타내다가 페르시아 제국까지 정복하려는 꿈을 실현 시키지도 못하고 암살당한다.
그 뒤를 이어 20세에 왕위에 오른 자가 바로 알렉산더이다. 그는 왕위에 오르기 전에 벌써 군사원정에 참여해 공을 세우기도 하고 용맹성과 부하 사랑을 몸소 보이면서 지도자로서 탁월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부왕이 전쟁에 나갔을 때 부왕을 대신해 국정을 수행하기도 했다. 어려서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를 스승으로 모시고 정치, 철학, 문학, 과학 등 다양한 분야에서 걸쳐 지도자적 소양을 쌓았다. 부친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그는 주변 국가들을 정리한 후 BC 334년 세계정복에 나선다.
당시 서남아시아와 이집트를 포함한 광대한 지역을 통치하던 페르시아 제국의 군대에 비해 알렉산더가 일으킨 정복군은 수적으로 열세였다. 즉 보병 3만 명에 기병이 5천명이었다. 보병 수에 비해 기병이 많았고 그들의 반은 마케도니아인이었고 그 나머지는 그리스의 동맹군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는 해협을 건너 소아시아로 진군해 Granicus강에서 페르시아군과 최초의 접전을 벌여 대승을 거두고 이어 다리우스가 직접 지휘하는 페르시아 대군을 Issus에서 맞아 또다시 대파했다. 다리우스 3세는 겨우 목숨을 건지고 도주했으나 그의 아내와 딸들은 포로로 잡힌다. 알렉산더는 다리우스의 가족들에게 그가 살아 있음을 전하고 그들을 보호하며 왕족으로 대우할 것이라는 약속을 하는 등 인간적인 면을 보여주었다.
알렉산더의 군대는 승승장구하여 에베소, 밀레도, 시돈, 두로, 가사를 지나 예루살렘으로 입성한다. 당시 대제사장이던 야두아가 나아가 절을 하며 다니엘서의 예언을 해석하며 그를 맞이한다. 예언의 해석인즉 알렉산더가 그리스 최초의 왕이 되고 페르시아 제국을 정벌하여 대제국의 맹주가 된다는 내용이었다. 알렉산더는 무혈입성을 했을 뿐만 아니라 유대인들의 친구가 되었고 유대인들에게 아주 호의적인 감정을 갖게 된다. BC 322년 이집트을 공격하던 그에게 자신들의 지배자인 페르시아를 증오하던 이집트인들은 그를 대대적인 환영한다. 이 때 그곳 승려들은 알렉산더를 그들이 섬기는 암몬신의 아들이라고 찬양까지 한다. 이집트에 알렉산드리아라고 하는 도시를 설립하여 그리스 문명을 이식하고 유대인들에게는 자유롭게 이주하며 살 수 있는 특권도 부여한다.
페르시아 왕 다리우스는 후한 조건으로 평화를 제의해 왔으나 이를 단호히 거절한 알렉산더는 동북진하여 Gaugamela 전투에서 승리하고 바벨론을 점령한 후 동진하여 페르시아를 거쳐 박트리아를 점령한다. 알렉산더는 전쟁을 수행하면서 동서양 융합을 시도하며 진군로를 따라 70개 이상의 알렉산드리아라는 도시를 세우면서 도시마다 원주민과 자신의 군대간에 통혼을 시도한다.
그리하여 마케도니아 군인과 아시아 여인간에 결혼을 명령하게 되고 자신이 앞장서 수사궁의 공주와 다리우스의 딸 공주, 그리고 페르시아의 공주와 결혼한다. 유럽과 아시아의 식물 교합을 시도하고 세계를 하나로 통일하려던 그는 BC 323년 33세의 나이로 열병으로 죽고 만다.
그가 죽은 후부터 로마가 그리스 세계를 지배하게 되는 시기까지의 약 300년을 헬레니즘 시대라 한다. 다시 말하면 그의 정복의 결과로 이루어진 그리스와 동방의 여러 요소들이 혼합된 문명이 형성되었는데 이 문명을 고전적인 그리스문화와 구별하여 헬레니즘 문화라고 부른다. 알렉산더는 불과 10여년 만에 유럽과 아프리카 그리고 아시아의 광대한 지역을 정복하고 통합한 위대한 왕이었다.
그의 정복과 꿈의 실현은 정치 군사적인 의미를 넘어 문화사상 큰 의미를 남겼으며 훗날 기독교의 태동과 발전에 큰 영향을 주게 된다. 즉, 그에 의해 이루어진 그리스와 Orient 세계의 통합, 그리고 동서융합 정책은 각기 다른 특성을 가진 두 문화권의 융합을 가져오게 되었고 이로 인해 하나의 문명권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그의 세계정신은 이 지역의 통치권을 이어 받은 로마에 의해 계승되어 지중해를 내해로 한 하나의 세계를 형성케 했다. 또한 그의 원정과 통치를 계기로 이 지역에 광범위하게 퍼져 사용되기 시작한 그리스어는 이 지역의 여러 민족이 사용하는 당시의 세계어가 되었다. 결국, 알렉산더의 정복은 그리스인들이 페르시아제국의 막대한 보화를 소유한 후 도덕적 타락과 동양의 사치 풍조에 물들어 나약해진 단점을 가져왔으나 그리스인과 이방인들 간의 구별을 완화시키고 헬라어가 문화어로 세계 공용어가 되게 함과 동시에 유럽에서 인도에 이르는 해로를 발견케 하는 기여를 하게 된다.
특히, 유대인들에게는 그가 건설한 도시 어느 곳에서나 많은 유대인들이 자유롭게 살도록 호의를 베풀었다. 바벨론 포로에 의한 유대인들의 강제 이주와 페르시아 치하에서의 128개 주에 이르는 자유로운 거주 이전의 호의와 알렉산더 대왕의 유대인에 대한 주거의 자유로운 배려는 훗날 기독교의 신속한 전파에 밑거름이 되었다.
2. 프톨레미와 셀류쿠스 왕조기
알렉산더 대왕의 갑작스런 죽음은 대제국의 붕괴를 초래했다. 그의 이복형제는 저능아였고 그의 유일한 후손은 록산나의 뱃속에 남겨진 유복자였기 때문이다. 제국은 그의 부하 장수들에 의하여 나뉘어졌으나 안티고누스의 후계자들은 마케도냐를, 셀류쿠스의 후계자들은 소아시아와 메소포타미아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프톨레미의 후계자들은 이집트를 지배하게 되었다.
이 중 유대에 직접 큰 영향을 미친 것은 이집트의 프톨레미 왕국과 시리아의 셀류쿠스 왕국이었다. 부하 장수중의 하나였던 프톨레미 소테르(BC 367~282)는 알렉산더가 죽자 이집트 총독으로 임명되었는데 그는 알렉산더의 시신을 입수해 알렉산드리아에 안치했다는 것 때문에 다른 장수들보다 심리적으로 유리한 강점을 지니고 있었던 인물이었다.
팔레스틴 지역은 이집트를 지배하게 된 프톨레미 왕조와 시리아와 메소포타미아 등을 통치하게 된 셀류쿠스 왕조 사이의 세력 각축장이 되었다. 그러다가 BC 301년의 입수스 전투 이후 BC 198년까지 팔레스틴 지역은 프톨레미 왕조의 통치하에 있게 된다. 프톨레미 Ⅰ세는 팔레스틴 지역에서 10만 명을 이집트로 이주시켰으나 프톨레미 치세 중 유대인들은 대체로 그들의 종교와 문화적 전통을 지키면서 평화롭게 사는 것이 허용되었다. 이 왕조의 지배 기간 중 일어난 중요한 사건은 예루살렘 제사 공동체와 사마리아 공동체의 완전한 분리였다.
그 근원은 BC 722년 사마리아가 아시리아에 정복되면서 이주 정책에 의한 혼혈에 기인한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들은 베델이나 길갈, 실로, 세겜 등지를 방문케 되고 토착 사마리아인들은 그리심 산 위에 새로운 성전을 세웠다.
이집트에는 유대인들이 많이 거주했는데 대체적으로 이들의 생활은 자유로웠고 대우 면에서도 마케도니아인이나 그리스인들과 동등한 대우를 받았다. 다만, 치세 기간 중 프톨레미 4세인 필로파테르(BC 221~203)에 의한 박해가 있었다. 프톨레미 4세는 BC 217 년에 셀류쿠스 왕조의 공격을 승리로 이끌고 이를 축하하기 위해 팔레스틴을 포함한 동부 지중해 연안 지방을 여행했다.
그는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 성전에서 감사 제물을 드리고 재물을 헌납한 후 지성소에 대한 관심으로 안에 들어가려다 마비가 되어 쓰러진다.
예루살렘에서 귀환한 그는 수치심 때문에 이집트에 사는 유대인들에게 보복하고자 지금까지 허락했던 모든 특권을 박탈하기로 함으로 유대인들까지 왕을 따라 유대인들을 박해하게 된다.
시리아의 셀류쿠스 왕조는 셀류쿠스 1세(BC 258~280)에 의해 창건되었다. 그는 바벨론 총독으로 세력을 확장하여 이집트와 인도를 제외한 알렉산더 제국의 거의 전부를 지배하게 된다. 팔레스틴 지역은 프톨레미 왕조와 셀류쿠스 왕조의 수많은 쟁탈전을 거친 후 BC 198년 셀류쿠스 왕조의 승리로 그 지배권을 장악하게 된다. 셀류쿠스 왕조하에서 유대인들은 각종 특혜를 부여받게 된다. 그리하여 예루살렘 반입 금지 품목을 지켜주고 세금도 면제해 주고 호의를 누리며 번영을 누리게 된다.
안티오쿠스(BC 222~187)는 수많은 유대인들을 자신이 건설한 성읍들에 정착하게 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러한 호의는 오래 가지 못했고 더욱이 팔레스틴의 통치권이 수리아에 넘어가므로 이집트에 있는 유대인과 팔레스틴의 유인들은 정치적으로 분리가 되었으며 이러한 현실은 유대교에 심각한 결과를 초래하게 된다.
BC 190년 안티오쿠스 3세는 서머나에서 로마군과의 싸움에서 패하고 로마에게 배상금을 지불하는 과정에서 나라 안의 신전과 예루살렘 신전의 재산과 신전이 보유한 금은보화와 재물을 강탈하고, 왕국 남동부의 한 신전에서 재물을 압수하는 도중 살해당한다. 그의 죽음은 셀류쿠스 왕조의 몰락을 알리는 신호가 되었고 유대인들에게는 그의 뒤를 이은 안디오쿠스 4세에 의하여 전무후무한 박해가 서서히 일어나기 시작한다.
안티오쿠스 4세(Antiochus Ⅳ Epiphanes, 175~164 BC)는 안티오쿠스 3세의 사후 사활을 건 왕위 쟁탈전 끝에 왕이 된 인물로 그는 헬레니즘 찬양자로서 자기가 지배하는 지역을 헬레니즘화 시키려고 결심하게 된다. 그는 전형적인 동양의 왕으로 행세했으며 기만술과 가장술에 능통했고 사악한 행위를 일삼고 명예를 추구(하는 인물이었다. 특별히 유대인들은 그리스의 관습을 심어주고자 하는 그에게는 비위가 상하는 민족이었다. 그는 에집트와 로마의 위협에 직면하여 있었고 재정적 필요를 더욱 느끼게 되어 돈이 되는 일이라면 무엇이든 서슴치 않았다. 그리하여 예루살렘의 대제사장직을 돈을 많이 주는 자에게 팔았고 심지어 제사장 가문이 아닌 사람에게까지 팔아넘긴다.
안티오쿠스 4세는 팔레스틴의 대도시들에다 체육관과 신전, 경주용 경기장, 대중목욕탕들을 세웠다. 그리스의 복장과 모자를 쓰고 있는 모습이 자주 눈에 띄었고 성전 제사장들은 그들의 제사장직을 소홀히 하고 운동 경기장의 세속적 쾌락을 탐닉했다. 경건한 유대인들은 우상숭배와 마찬가지로 곳곳에서 펼쳐지는 쾌락과 방종에 대해 강한 반발을 보인다. 곳곳에서 헬레니즘의 관습과 히브리적인 사고와 그들의 율법이 명하는 가르침과 부딪히고 있었다. 안티오쿠스 4세는 네 차례에 걸쳐 이집트에 선전포고를 했으며 이집트를 침공한 후 이집트의 왕으로 선포하게 된다.
그러나 알렉산드리아가 반란을 일으키게 되고 안티오쿠스 4세가 이집트에 대한 제2차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고 있는 동안 유다의 상황이 악화되었다. 예루살렘으로 진군해 들어간 안티오쿠스 4세는 피로 얼룩진 보복을 자행하게 된다.
수리아 군병들은 많은 유대인들을 노예로 잡아 팔아버리고 4만에 이르는 남녀와 어린이들을 대량으로 학살하게 된다. 안티오쿠스는 거룩한 성소에 들어가 약탈을 자행하며 황금 제단과 기명들과 기구들을 다른 보물들과 함께 노략질한다. 그는 유대인들에게 무거운 세금을 부과하여 그의 사치스런 생활비용과 전쟁비용을 충당한다. 전쟁을 치르면서 그의 부하들을 시켜 곡물 창고를 습격하게 하고 무거운 세금을 내지 못하는 마을은 불사르며 주민들은 잡아다가 노예로 팔기도 했다.
또다시 시작된 이집트과의 전쟁에서 이집트의 요청으로 당도한 로마군의 위세에 몰려 퇴각하던 그는 귀환길에 유대인들에게 분노를 풀기로 작정하고 그들의 신앙과 사고를 그리스적인 것으로 개조시키고자 했다. 예루살렘 성읍에 들어간 그는 악랄한 방법으로 수천 명의 시민들을 학살하고 여자와 아이들을 잡아 노예로 팔고 성은 불태운다. 뒤이어 안티오쿠스 4세는 칙령을 발표하여 모든 유대인들은 수리아의 법과 관습 그리고 종교를 받아들이도록 명령한다. 그리스의 신들에게 경배하게 하고 안식일 준수와 할례 의식이 금지 된다.
부정한 음식의 구별과 예루살렘 반입 품목이 없어지고 돼지고기를 먹으며 제단의 제물로 바쳐진다. 만약 이러한 명령을 위반할 때는 가차없이 사형에 처하도록 명령이 내려졌다. 심지어 자기 아들에게 할례를 행한 어머니들은 그들의 아기들을 목에 두른 채 십자가에 달려 처형되는 상황이 많은 사람들의 눈앞에서 벌어졌다. 성전은 돼지고기와 그 피로 얼룩졌으며 술꾼들의 체류지가 되고 흉한 난장판으로 변해 갔다. 불경스런 이방 종교 의식이 유대인들의 거룩한 성전 의식을 대신했고 이러한 행동들은 유대인들의 가슴을 끓게 하고 종교적인 반감으로 넘쳐나게 하고 있었다.
이러한 안티오쿠스 4세의 행동은 오히려 영웅심이 많은 유대인들을 사로잡게 되어 신앙을 위하여 순교하고자 하는 마음을 굳히게 했다. 가는 곳곳마다 우상의 제단들이 설치되어 있고 공공연하게 율법책이 불에 태워지고 많은 유대인들이 처형되는 광경을 보면서도 그들은 야훼의 언약에 충성하고자 맹세하며 죽어 갔다. 이러한 상황을 마카비 1서는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그들은 부정한 음식을 먹어서 몸을 더럽히거나 거룩한 언약을 모독하느니 차라리 죽음을 달게 받기로 결심했고 사실 그들은 그렇게 죽어 갔다.” (마카비 1서 1:62~63)
수리아인들은 계속하여 그들의 잔악함을 드러내어 곳곳에서 그들의 칙령을 따르지 않는다는 죄목으로 유대인들을 죽이고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다 하여 죽였다. 마카비 2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그 때 뛰어난 율법학자들 중에 엘르아살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이미 나이도 많았고 풍채도 당당한 사람이었다. 박해자들은 강제로 그의 입을 열고 돼지고기를 먹이려 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생활을 더럽히고 살아가는 것보다 명예롭게 죽는 것이 낫다고 하여 자진하여 형틀로 가면서 그 돼지고기를 뱉어버렸다. 율법에 어긋나는 이 희생제를 관장하는 사람 중에서 엘르아살과 오랜 친분이 있던 사람들이 그를 따로 불러 그에게 율법에 어긋나지 않은 다른 고기를 준비했다가 그것을 가져오도록 권하면서 왕의 명령대로 희생제에 바쳐진 고기를 먹는 체 하라고 했다. 이렇게 하기만 하면 엘르아살은 오랜 친분으로 맺어진 사람들의 인정을 이용해 목숨을 건질 수도 있었다. 그러나 이 노인은 자기의 나이에 따르는 위엄과 백발이 된 머리를 생각하고 어렸을 적부터 나무랄 데 없이 살아온 자기 생애를 돌이켜보고 무엇보다도 하나님께서 주신 거룩한 율법에 따라야겠다고 생각하여 고결한 결심을 꺾지 않았다. 그래서 그는 빨리 죽여 달라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말을 마치고 그는 형틀로 직행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엘르아살에게 호의를 베풀었던 사람들이 엘르아살이 한 말을 듣고 미친 놈의 소리라고 생각하며 돌변하여 그에게 악의를 품게 되었다. 엘르아살은 모진 매에 못 이겨 거의 죽어가면서 신음하는 소리로 말했다. “주님은 거룩한 지식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니 내가 죽음을 면할 수 있었다는데도 불구하고 육체적으로 매를 맞아 무서운 고통을 당하고 있으나 하나님을 경외하고 있기 때문에 마음으로 이 고통을 달게 받는다는 것을 잘 알고 계십니다.” 이렇게 그는 자기의 죽음으로 젊은이에게 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동포들에게 용기의 모범과 덕행의 본보기를 남기게 되었다. (6:18~31).
그 때에 일곱 형제를 둔 어머니가 있었는데 그들은 모두 왕에게 고기를 먹으라는 강요를 받았다. 그들 중의 하나가 대변자로 나서서 말했다. “우리를 심문해서 무엇을 알아내겠다는 것입니까? 우리 조상의 법을 어기느니 차라리 죽고 말겠습니다.” 왕은 이 말은 듣고 화가 나서 솥과 가마를 불에 달구라고 명령했다. 명령대로 당장에 솥과 가마를 뜨겁게 달구자 남은 형제들과 어머니의 눈앞에서 왕은 그들의 대변자로 나섰던 사람의 혀를 자르고 머리카락을 밀고 사지를 자르라고 명령했다. 완전히 폐인이 되었지만 아직도 생명이 붙어 있는 그를 왕은 뜨겁게 달군 솥에 넣어버리라고 명령했다. 솥에서 연기가 사방으로 멀리 퍼져나갈 때에 나머지 형제들을 어머니와 함께 서로 격려하고 고상하게 죽자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7:1~5)
이러한 순교의 본보기는 그 남은 여섯 형제들을 통해 계속 반복됐고 마침내 그의 어머니도 꼭 같은 길을 걸어가므로 신앙의 절개를 지켰다. 안티오쿠스 4세 때에 자행된 이러한 만행과 신앙을 위하여 목숨을 버렸던 이들의 숭고함에 대해 히브리서 기자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여자들은 자기의 죽은 자를 부활로 받기도 하며 또 어떤 이들은 더 좋은 부활을 얻고자 하여 악형을 받되 구차히 면하지 아니했으며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 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했느니라(히11:35~38).
지금까지 전술된 것을 토대로 하여 볼 때 프톨레미와 셀류쿠스 왕조하의 유대인들은 그들을 지배하고 있던 왕에 따라 좋은 대우를 받기도 했으나 그 기간이 짧았다. 결국, 이 기간은 유대인들을 향한 핍박과 박해의 절정을 향해 걸어간 시기였다. 또한 유대인들의 공동체가 프톨레미 왕조하에서는 팔레스틴과 알렉산드리아를 중심으로 발전했으나 셀류쿠스 왕조하에서는 팔레스틴이 수리아 측으로 넘어가게 됨에 따라 정치적으로 지리적으로 나뉘게 되어 유대인들의 공동체에 큰 변화를 가져온 시기이기도 하다.
3. 마카비가와 하스몬 왕조기
안티오쿠스 4세의 유대교 박해는 많은 순교자를 내었다. 왕은 특별히 천성적으로 잔악한 바키데스에게 병력을 주어 많은 사람들을 박해하고 고문했다.
박해와 핍박에 대해 순교와 무저항으로 소극적이던 저항운동은 점차 적극적인 공격으로 변하기 시작했다. 폭동의 불길은 예루살렘 북서쪽에 있는 모데인이라는 마을에서 타오르기 시작했다. 이 마을에는 하스몬가의 마타디아스라는 제사장이 다섯 아들들과 함께 살고 있었다. 어느날 시리아의 한 관리가 이 마을에 찾아와 이교의 제사를 강요했다. 마타디아스는 거절했으나 배교한 자들을 죽였다.
이것을 계기로 마타디아스는 그의 아들들과 산으로 도망쳐 많은 유대인 열심파들과 합류하게 된다. 저항운동은 마타디아스의 세 아들 즉, 마카비라는 별명을 가진 유다(BC 166-16)와 요나단(BC 160-143) 그리고 시몬(B.C142-134)에 의하여 차례로 주도 되었다. 이들의 저항운동은 계속해서 성공을 거두고 BC 165년 12월 25일 유다의 지휘 아래 성전이 청소되고, 재봉헌되고, 예배를 다시 드리게 된다. 안티오쿠스 4세의 뒤를 이어 당시 8살의 그의 아들인 안티오쿠스 5세가 왕위를 물려받으며 리시아스가 섭정을 하게 된다. 이 때 리시아스는 유다에게 관용을 베풀어 절기를 마음대로 지킬 수 있도록 완전한 종교적인 자유를 허락하게 된다.
핫시딤은 그들의 목표인 종교적인 것의 달성으로 마카비에 대한 후원을 멈추지만 유다는 종교적인 자유를 넘어 정치적 독립을 추구하게 된다. 승승장구하던 유다도 참패를 당한 후 BC 160년 엘랏사에서 살해되고 그 지도권은 요나단에게 넘어가게 된다. 요나단이 민족주의 유대인들의 지지로 지도자로 부상했을 때 시리아는 왕권의 문제로 여러 사람들이 경쟁을 하며 음모를 꾸미던 시기였다.
BC 153년 데메트리우스 1세(BC 162-150)와 알렉산더 발라스의 정쟁에서 두 사람은 요나단을 서로 끌어들이려고 했고 요나단은 발라스를 지원하기로 결정한다. 결국 발라스의 승리가 굳혀지고 요나단의 푸른 계절이 도래한다.
발라스는 요나단을 왕의 친구로 부르게 되고 자주색 옷과 금관을 보내오게 된다. 요나단은 왕과 제사장을 겸하게 된다. 한편 발라스는 왕위에 오르자 술과 여색에 탐닉하게 되고 부도덕한 행실이 잦아지자 백성들은 등을 돌리기 시작한다. 당시 이집트의 왕이던 그의 정적 데메트리우스 2세가 왕위를 주장하며 발라스를 공격하여 전투 중 발라스는 살해된다. 수리아 제국의 통치자로 데메트리우스 2세가 등극하고 그동안 요나단은 힘을 비축하게 되고 외교적 수완으로 권세를 누린다.
수리아는 분쟁을 계속해서 겪으면서 알렉산더 발라스의 아들이 수리아의 왕으로 추대되니 그가 안티오쿠스 6세다. 이 때 실세는 수리아의 장군인 트리포였고 왕위를 노리던 트리포는 수리아 왕좌와 가까운 요나단을 제거할 계획을 세우고 요나단을 초청하게 된다. 아무 의심 없이 성내로 들어오던 요나단과 경호병들은 체포되어 처참하게 살해되고 만다. 요나단의 뒤를 이은 사람은 마타디아스의 둘째 아들인 시몬으로 그 집단의 지도자로 추대될 때 그는 다음과 같은 연설을 했다.
나와 나의 형제들과 그리고 우리 가문이 율법과 성소를 수호하기 위해 모든 힘을 다한 사실과 우리가 치른 전쟁과 고통이 어떠했는가는 여러분 자신이 잘 알고 있습니다. 나의 형제들은 모두 이스라엘을 위해 죽었고 살아남은 사람은 나 하나뿐입니다. 나는 지금 어떠한 어려움을 당한다 하더라도 절대 내 목숨을 아끼지 않을 것입니다. 나는 내 형제에 비해 조금도 나은 점이 없습니다. 나는 내 민족과 성소를 위해 그리고 여러분의 처지를 위해 원수를 갚을 것입니다. 모든 이방인들이 지금 우리를 없애버리려고 중오심에 불타 모여 있습니다.
시몬은 지도자가 되면서 헬라파와 하시딤 그리고 마카비파를 통합했으며 수리아의 합법적인 왕이던 데메트리우스 2세 협정을 체결한다. 데메트리우스는 유대를 독립적 동맹국가로 인정하고 유대인들을 모든 조세에서 면제하여 주고 정치적 독립을 허락한다. 유대인들은 시몬에게 절대군주의 지위를 제공하고 국가 통치자의 직위를 그 가문에서 세습하도록 결정한다. 또한 유대인들은 다른 신실한 예언자가 일어나기까지 시몬이 계속해서 대제사장이 되는 것을 기쁘게 생각했고 그 또한 그를 받아들여 대제사장직에 오른다. 오니아스가에서 세습되어 오던 대제사장직이 그가 파면된 후 이제 하스몬 계통에서 세습되기 시작했다.
여기에서 유대는 독립적인 국가로 세워지고 대제사장이 민간 지도자이면서 동시에 군사 지도자가 된 것을 볼 수 있다. 시몬은 로마와 협정을 체결하고 욥바에서 예루살렘에 이르는 1번 국도를 장악했으며 절대군주의 상징인 자국의 주화도 발행하게 된다. 그는 유대인 배교자와 이교도를 추방시켰으며 술사들을 교수형에 처했다. 시몬이 통치하던 시절에 대하여 바카비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시몬이 다스리는 동안 유대 땅은 평온한 나날이었다. 그가 마음 쓴 것은 자기 민족의 행복 뿐으로 날마다 백성들은 그의 권위와 영광을 환영하고 기뻐했다. 그는 욥바를 취하여 자기 항구로 만들었고 해로를 터놓았으며 영토를 넓혔고 온 나라를 안전하게 다스렸다. 백성들은 평화롭게 자기 땅을 가꾸었고 노인들은 거리에 나와 이야기꽃을 피웠으며 젊은이들은 화려한 군복을 입고 다녔다. 시몬은 여러 도시에 식량을 공급하고 무기를 공급하여 방위를 튼튼히 했다. 그는 나라에 평화를 가져왔고 이스라엘에는 기쁨이 넘쳐흘렀다. 사람마다 자기의 포도나무와 무화과나무 아래 앉았으며 모든 원수들이 그 땅에서 사라졌다. 시몬은 연약한 백성들에게 힘을 북돋아주었고 스스로는 율법을 엄수하면서 율법을 저버린 자들과 악한들을 모두 없애버렸다. 성전을 아름답게 꾸미고 기물들을 많이 갖추어 놓았다.
시몬은 불행하게도 자신의 노력과 계획의 열매들을 즐길 만큼 오랫동안 살지 못하고 그의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비참한 최후를 마친다.
BC 135년 시몬은 그의 아들들과 함께 여리고 평원의 요새를 시찰하던 중 환영 만찬에 참여했다가 왕위를 노리던 사위 프톨레미에 의해 그의 아들들과 함께 살해되고 만다. 그의 부인 또한 인질로 잡혀 있다가 살해된다. 마카비가의 영웅적인 헌신과 희생은 BC 165년부터 BC 135년까지 유대를 살리고 역사에 길이 남게 된다. 유다와 엘르아살은 전쟁터에서 죽었고, 요한과 시몬 그리고 요나단은 반역자에게 살해된다. 이들의 헌신과 희생으로 조그만 도시국가인 예루살렘이 통일왕국으로 성장하고 성전은 이교도로부터 정결케 되고 유대인은 다시금 대제사장과 세습 군주를 갖게 되고 종교적 자유를 누리며 정치적 독립을 구가하게 되었다.
이어서 하스몬 왕조하의 유대인들의 상황을 살펴보면 하스몬이라는 말은 하스몬가에 속했던 마타리아스와 그의 아들들의 가족명에서 유래하게 된다. 프톨레미는 그의 장인과 처남을 죽이고 왕위를 얻고자 했으나 시몬의 셋째 아들인 요한 힐카누스가 도피하여 살해의 음모에 대한 경고를 받으면서도 예루살렘으로 가서 그이 아버지가 담당했던 대제사장의 직임을 받게 된다.
수리아의 공격으로 유대는 위기에 처하나 수리아에서 또다시 왕위 쟁탈전이 벌어지므로 이스라엘은 강세를 유지하게 된다. 힐카누스의 통치는 괄목할만한 것으로 솔로몬 시대의 지역을 확보하며 31년간 통치를 하게 된다. 힐카누스는 주화에 자신의 이름을 새겨 넣은 최초의 유대 군주가 되며 번영을 누리다가 BC 106년에 사망하게 된다. 그의 뒤를 이어 그의 아들 아리스토불루스 1세가 왕위를 계승했다. 그런데 그는 무자비하고 잔인한 야망가로 친헬라적이며 그리스문화를 장려했던 인물이었다. 그는 모친을 투옥하여 아사시켰고 형제를 살해하는 일에 가담했으며 한 형제는 구금했다. 그는 자기 형제의 죽음을 멀리하려는 고뇌 속에서 죽게 된다. 그는 죽기 전에 그의 계승자로 자기 부인을 지명하게 되고 부인인 알렉산드라는 시동생인 알렉산더 얀내우스를 해금하여 대제사장에 임명하고 얼마 후 그와 결혼하여 그를 왕으로 추대하게 된다. 그 또한 인물됨이 잔악했으며 야심가였다. 바리새파 사람들은 이미 힐카누스에게 대제사장직을 내놓으라하여 사이가 좋지 않았고 더욱이 다윗의 후손이 아닌데 왕으로 자칭한 것에 대하여 감정이 좋지 않았었다. 그러던 중 알렉산더 얀내우스가 그 형제의 미망인과 결혼한 것에 대해 대제사장으로서는 해서는 안될 일을 한 것으로 바리새파 사람들의 노여움을 가중시켰다. 얀내우스는 차츰 종교적인 직분보다는 왕권의 강화와 주변국을 치는데 주력했으며 급기야 장막절 제사에서 제주를 땅에 쏟으므로 제의를 의도적으로 모욕하게 된다. 백성들은 분노하여 그에게 항의하고 화가 난 그는 군대에게 명하여 바리새인들을 잔인하게 학살하게 된다. 백성들은 그를 혐오하게 되고 그가 죽은 후 왕권은 그의 부인이었던 알렉산드라에게 넘어가게 된다. 알렉산드라는 남편의 유언에 따라 바리새인들과 함께하며 태평성세를 누리게 된다. 알렉산드라는 9년간 나라를 통치하면서 신하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게 된다. 그녀는 바리새인들을 중용했고 유대교 예식을 회복시키며 성전 유지를 위한 인두세를 부과하고 모든 유대인 자녀들에게 의무 교육을 실시한다. 알렉산드라는 왕좌에 앉으면서 그의 큰 아들 힐카누스 2세를 대제사장에 임명했다. 힐카누스는 바리새파에 호의적인 태도를 보였고 그들의 세력은 차츰 커졌다. 이로 인해 곤란해진 사두개파는 작은 아들인 아리스토불루스 2세를 충돌질하게 된다. 알렉산드라가 죽자 아리스토불루스는 군대를 동원해 여리고 근처에서 그의 형을 격퇴시키고 왕과 대제사장이 되어 BC 66년부터 BC 63년까지 계속 통치하게 된다.
동생으로부터 축출된 힐카누스는 이두매의 안티피터의 후원과 충돌질 속에 재기를 꿈꾸게 되고 결국 형제간의 싸움은 로마를 자연스럽게 팔레스틴에 끌어들이게 된다. 성은 함락되고 왕권은 또다시 힐카누스에게 돌아가고 아리스토불루스는 로마로 압송된다.
지금까지 설명된 마카비가와 하스몬 왕조하에서의 유대인들은 많은 어려움을 극복하고 유대인들의 종교적 자유와 정치적 독립을 얻게 된다. 하지만 종국에 가서는 왕위 다툼으로 인한 외세의 세력을 끌어들임으로 스스로 자멸의 길을 걸어가고 있음을 보게 된다. 다시 말하면 마카비가의 영웅적인 투쟁과 헌신 그리고 희생으로 얻어진 자주권과 독립을 유지하기가 더 어려웠던 것이다. 결정적으로 팔레스틴에 세력을 갖고자 했던 로마의 패권 정책이 유대 자국의 내분으로 인하여 쉽게 연결되게 되고 역사의 한 정점을 향하여 줄달음치게 되었다.
4. 로마 통치기
로마의 세력이 자연스럽게 팔레스틴에 들어오고 주도권을 쥐게 된 안티파터는 폼페이 장군을 지지하다 BC 48년 그의 몰락을 보면서 시저를 지지한다. 그 결과 시저는 안티파터를 유대 총독으로 임명하고 로마 시민권까지 주었다. 유대인들은 로마에 너무 의존하는 안티파터를 싫어했고 열광적인 유대인에 의해 그는 독살당한다. 유대는 그의 큰아들인 당시 유대 군대 사령관이던 파사엘에게 넘겨졌고 작은 아들인 헤롯은 갈릴리 분봉왕으로 있었다. 이 때 아리스토불루스의 아들인 안티고누스는 그의 왕위 계승권을 시인해 주는 파티안스의 지지를 얻게 된다. 그리하여 대제사장으로 있던 힐카누스와 파사엘은 옥에 갇히게 된다. 파사엘은 자결했으나 헤롯은 피신하여 로마로 가게 되고 거기서 유대 왕으로 임명되어 돌아오게 된다. 그러나 이미 유대를 차지하고 있는 안티고누스와 대결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그는 로마의 도움으로 안티고누스를 죽이고 드디어 헤롯 대왕으로의 통치를 시작하게 된다. 헤롯과 그의 아들들이 통치하는 동안 헬라화 정책은 급진적으로 추진되었으며 헤롯은 많은 사람들의 비위를 맞추려고 노력했다. 그리하여 아리스토불루스 3세의 여동생이며 힐카누스 2세의 손녀이며 마카비 왕가의 공주인 마리암네와도 정략적으로 결혼하기로 했다. BC 20년에 시작한 예루살렘의 새 성전 건축도 유대인들을 기쁘게 하고자 의도했던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친헬라적이며 에돔인이었던 그의 생각과 신분은 유대인들을 기쁘게 할 수 없었다. 대제사장이 될 수 없었던 헤롯은 자기의 마음에 드는 사람을 골라 대제사장에 앉혔다. 그것도 세습제도를 철폐했다. 헤롯은 곳곳에 자신의 동상을 세우기도 했다. 헤롯은 정권 때문에 가족내에 암투를 벌여 부인과 아들들까지도 살해했다. 역사에 남는 잔인함은 BC 6~5년으로 추정되는 때에 베들레헴에서 유아 학살 사건이다.
그 잔인하던 헤롯도 34년의 통치를 마감하고 BC 4년에 죽는다. 헤롯이 죽자 갈릴리 지방에서 폭동이 일어났고 이곳은 그 이후 유대 민족주의의 온상이 되었다. 갈릴리의 폭동은 헤롯의 큰 아들 아켈라우스가 학살을 단행함으로써 위축되고 말았다. 그는 헤롯의 뒤를 이어 유대 총독이 되었으나 유대인들과 사마리아인들의 항의로 로마 정부에 의해 추방되고 말았다. 헤롯의 손자 헤롯아그립바 1세가 유대 왕으로 통치한 3년을 제외하고는 이 나라는 로마 총독들에 의해 통치되었다. 헤롯의 둘째 아들인 헤롯 안티파스는 신약성경과 제일 밀접한데 불법으로 결혼했다. 그는 침례 요한을 처형했으며 예수를 심문했던 인물이다. 아랍 공주와 이혼하여 전쟁을 치렀고 왕위를 박탈당하고 추방당했던 사람이다. 헤롯의 셋째 아들인 빌립은 아들 중 최상의 통치자로 예수는 바리새인들의 증오심 때문에 이 지방으로 잠깐 피신한 적이 있다. 총독들은 세금을 징수하고 주둔군을 통솔하며 재판업무까지 장악하고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 활동 시대에 본디오 빌라도 총독이 10년간 총독으로 있었으나 유대인에 대하여 잔인했다 하여 AD 36년 고울 지방으로 추방되었다. 그 뒤에도 헤롯 아그립바 1세와 2세 그리고 여러 명의 총독들이 유대인들을 통치하게 된다. 실제적으로 헤롯의 손자인 아그립바 1세가 유대의 왕으로 통치한 3년을 제외하고는 (AD 41-44) 이 나라는 로마의 총독들에 의하여 통치 되게 된다. (AD 6-66) 이 기간 동안에 유대의 민족주의는 점점 강하게 뻗어 나갔으며, 특히 로마인들의 통치는 절대로 용납할 수 없다는 견해를 가지고 있던 제롯당의 생각과 행동으로 드디어 AD 66-70년 유대인의 반란이 일어난다. 원인은 총독인 플로루스가 성전의 보물창고에서 일부를 탈취하자 유대인들이 격분하여 반란이 일어나게 된다. 아그립바 왕의 자체 진압이 실패하고 수리아 총독의 원정 진압도 실패하자 로마에서 보낸 티루스 장군에 의해 예루살렘은 무너지고 수십만의 유대인들이 살해되거나 포로가 되고 만다. 예루살렘의 멸망은 유대교의 동질성을 상실케 되고 그로 인하여 유대인들의 구심점이던 성전 제사가 멈춰지고 유대교의 영향력있는 계급이던 제사장직이 소멸되고 유대인들의 영향력 있는 기관이던 산헤드린이 잠적하고 만다.
그 뒤 주후 115년에 또다시 독립의 시도가 있었으나 트라얀 황제의 진압으로 살육의 전장으로 팔레스틴에 남아 있던 유대인들은 궤멸되고 로마 제국 전역에 산재한 유대인들은 혹독한 제한 조치를 받게 된다. 팔레스틴은 이교도가 번성하며 유대교의 종식을 맞게 된다. 유대교와 헬레니즘의 싸움은 이로써 끝이 났다. 그리고 모든 면에서 지고 말았다. 그러나 헬레니즘이 강압적인 힘만으로 유지될 수 없었듯이 유대교도 군대의 힘으로 멸절시킬 수는 없었다.
어떤 개인이나 사회 그리고 종교와 사상은 주변 여건과 환경에 따라 큰 영향을 받게 되고 그 흐름을 형성하여 나간다. 로마 통치하에서의 유대인들은 지중해를 내해로 하는 강력한 세계적 국가를 이룬 로마 속의 한 집단으로 그들의 공동체를 형성해 나갔고 사상적으로는 헬라문화의 계속적인 지배하에 있게 된다. 또한 억세게도 자신들의 종교인 유대교를 신봉하고 수호하기 위하여 몸부림 쳤으며 민족주의의 지속적인 유지를 위하여 생명을 내걸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