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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 불자도반 결집불사 *부처님의 도반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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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 정 혜 스크랩 소구산 스님
늘-벗 추천 0 조회 27 06.12.09 02:37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사찰의 대웅전에 가보면 보통 삼존불三尊佛이 모셔져 있다. 왜 세 명의 부처님이 한 조를 이루어 모셔져 있는가? 여기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첫째, 깨달음을 이룬 성자의 인격은 두 가지 면이 있는데, 하나는 자비이고, 또 하나는 지혜다. 자비로운 표정은 대체로 미소를 머금는 경우가 많고, 지혜로운 표정은 냉철한 기색을 띠게 마련이다. 이 상반된 두 가지 표정과 역할을 충돌 없이 나타내기 위해서 양쪽에 두 명의 불상을 조성했다고 보는 설이 있다. 오른쪽 불상이 자비라면 왼쪽 불상은 지혜를 담당하는 식이다.


둘째, 오랫동안 수행에 정진했던 노스님들과 이야기를 나누면서 들은 이야기다. 가운데 계신 본존불이 도를 닦고 있을 때 옆에 있는 두 사람이 시봉侍奉을 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오른쪽 불상은 빨래나 밥을 하거나 불을 때는 일을 담당한다면, 왼쪽 불상은 돈을 벌어 오는 역할을 한다. 도 닦는 도중에도 먹어야 하고, 전기요금도 내야 하는 것이 사바세계의 실상 아닌가. 그러니까 자금 공급책(?)이 필요하다. 좌우 두 사람의 도움을 받아 마침내 가운데 본존불이 도를 통하면, 이번에는 반대로 본존불이 좌우 두 사람이 도통하는 일을 책임져야 한다. 서로 품앗이를 하는 셈이다. 어디를 가나 ‘기브 앤 테이크’ 법칙이 있다.


셋째, 깨달음과 예술의 관계를 상징하고 있다는 설이다. 가운데 자리가 깨달은 도인이 앉는 자리라고 한다면, 좌우의 자리는 예술가가 앉는 자리다. 도인과 예술가, 깨달음과 예술은 이처럼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다. 상호보완적인 관계일 수도 있고, 한 걸음만 움직이면 서로 자리를 바꿔 앉을 수 있는 자리이기도 하다. 바꾸어 말하면, 예술을 통해서 도의 경지에 도달할 수 있다는 말이기도 하다.


   수도가 집중이라면 예술도 집중을 요구한다. 양자 모두 집중이다. 그만큼 예술가는 깨달음에 접근해 있는 셈이다. 일명一明 스님을 만난 이유도 이 세 번째의 관계, 즉 예술을 통해서 도의 세계로 들어가는 노선에 대해 이야기를 나눠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예술도 여러 가지다. 어떤 장르의 예술인가? 바로 소리[音]다. 일명은 지난 27년 동안 소리에 관해 깊이 천착한 스님으로 알려져 있다. 한국 불교계에서 일명이라는 이름을 대면 스피커 도사로 알려져 있기도 하다. 구도의 차원에서 음의 세계에 접근한 인물이다. 별명은 ‘소구산小九山’으로 불린다. 작은 구산이라는 의미다.

 

구산九山(1909~1983)은 전남 송광사松廣寺의 큰스님이었다. 스물일곱 살에 폐병에 걸려 죽을 날만 기다리다가, 어느 거사로부터 천수주千手呪를 외우면 낫는다는 소리를 듣고 지리산 영원사靈源寺에서 백일 동안 천수주를 독송讀訟하고 나서 기적적으로 폐병이 나았다. 그리고 출가했다.

 

구산 스님은 천수주와 깊은 인연이 있었고, 일명도 구산의 문하였으니 자연스럽게 관음보살과 소리에 대해서 관심을 가졌을 법하다. ‘천수주’란 천수천안千手千眼을 가진 관세음보살의 공덕을 찬탄하는 다라니[呪文]를 가리킨다.


그가 머물고 있는 관음포교원은 서울 구로동에 자리 잡고 있다. 구로동 하면 ‘노동’이라는 단어가 떠오르는 지역이다. 치열한 세속 도시의 현장이다. 그 구로동 복판에 그는 있다. ‘비풍류처풍류족非風流處風流足’ 하다는 한시 대목처럼, 그는 노동의 한복판이라는 비풍류처에서 풍류가 넘치는 관음의 소리를 사람들에게 나눠주고 있었다.

 

어떻게 해서 소리에 관심을 갖게 되었는가? 불교에서는 소리를 어떻게 보는가?


기독교의 『성경』을 보면 ‘태초에 말씀이 있었다’라고 나온다. 불교에서는 태초에 소리가 있었다고 한다. 왜냐하면 불교에서는 태초의 부처님을 위음왕불威音王佛이라고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법화경』의 「상불경보살품」에 의하면 위음왕불은 오랜 옛날 공겁空劫 때에 맨 처음 성불한 부처님이라고 한다. 공겁이란 태초를 의미한다. ‘태초에 소리가 있었다’가 된다. 말씀도 결국 소리로 전달하는 것 아닌가. 이렇게 놓고 보면, 기독교나 불교나 공통적으로 소리를 중요시했음을 알 수 있다. 소리라고 하는 것은 그만큼 인간의 각성과 정신세계에서 중요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음을 시사하는 대목이다.

 

사상적으로도 그렇지만, 소리에 관심을 갖게 된 개인적인 계기가 있었다. 구산 스님의 법문을 녹음기에 녹음을 해서 테이프로 신도들에게 들려주다 보니 음질이 좋지 않았다. 음질이 좋아야 구산 스님의 설법을 한층 더 생생하게 들려줄 수 있을 것 아닌가. 다른 사람에게 부탁하곤 했는데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내가 직접 해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어떻게 하면 좋은 음질의 육성을 들려줄 수 있을지  고민하면서 자연스럽게 음향과 인연을 맺었고, 결국 성능 좋은 스피커를 만드는 일에 몰두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음音의 본질은 무엇인가?


지금 이렇게 두 귀로 뚜렷하게 들리지 않는가! 이것은 무엇인가? 이렇게 들리는 것은 무엇인가를 화두로 삼아 참구參究해 볼 일이다.

그렇다면 질문을 다시 하고 싶다. 불교사상의 관점에서 볼 때 소리란 무엇인가? 


소리는 각기 차별이 있는 것 같지만, 결국에는 한 가지 소리로 귀결된다. 결국에는 차별이 없는 것이다. 서양음악은 분석이 강하다.

 

 ‘도레미파솔라시도’ 같은 음계音階의 분류를 중시한다. 서양음악은 모든 소리가 음계로 분류되어 표시된다.

 

반면에 불교를 비롯한 동양음악은 음계의 분류를 넘어선 소리를 추구한다. 예를 들어, 절 집의 범종 소리를 들어보라. 우-웅, 소리 하나로 귀결된다.

 

종소리는 하나다.

 

결국 종소리에는 도레미파솔라시도가 없지 않은가.

 

소리에 대한 일명 스님의 생각을 듣고 보니 공감이 갔다. 그렇다. 서양음악이 분석을 통한 음의 다기화多岐化를 포착하려고 했다면, 동양음악은 직관을 통한 통합화統合化를 추구했다고 볼 수 있다. 마치 화엄철학에서 이야기하는 일즉다一卽多, 다즉일多卽一의 관계라고나 할까. 이렇게 놓고 본다면 다多는 서양음악이고, 일一은 동양음악이다. 하지만 다와 일이 서로 따로 노는 것이 아니고 상즉相卽의 관계로 맞물려 있다고 생각한다.

 

종소리가 하나라고 한다면, 그 한 소리 그 너머에는 어떤 소리가 있는가? 궁극의 소리는 무엇인가?


아주 좋은 질문이다. 바로 이 대목부터 수행에 들어간다. 화두선話頭禪 식으로 표현하면 ‘종소리가 일어나는 곳이 어디인가?’라는 화두가 성립된다.

 

어째서 이 물음이 수행에 해당되는가?


소리를 즐기는 것이 음악이다. 음악은 존재를 소리로 표현한 것이다. 존재 그 자체는 빛이고 기쁨이다. 다시 말해서, 인간이라고 하는 존재 그 자체는 슬픔이 아니라 기쁨이다. 존재 그 자체는 불성佛性이고 신성神性인데, 어찌 슬플 수 있겠는가. 그 근원적인 존재의 기쁨을 기쁨으로 표현하는 전달 매체가 바로 소리다. 존재와 기쁨의 중간에 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소리는 그 중간 매개체라고 보면 된다. 좋은 음악을 들으면 누구나 기쁨을 느낀다. 음악이라는 소리를 통해서 기쁨을 느끼는 것이다. 기쁨을 느끼다 보면 그 기쁨의 근원으로 거슬러 올라가게 되어 있다. 즉 소리라고 하는 줄을 따라 들어가면 자기 존재로 들어올 수 있는 것이다. 이런 게 수행이다.

 

판소리에서는 득음得音을 이야기한다. 도대체 ‘소리를 얻었다’라고 하는 득음이란 어떤 경지를 말하는 것인가?


명창이 되려면 득음의 경지에 들어가야 하고, 득음의 경지를 체득하기 위해서 흔히 폭포 근처에서 연습하는 경우가 많다. 보통 자신의 소리가 더 커서 폭포 소리를 제압하는 것을 득음이라고 생각한다. 그게 아니다. 모든 잡소리를 제거하고 자신의 소리만 듣는 경지다. 폭포 소리가 들리지 않는 가운데 자신의 소리만 듣는 것이 득음의 경지다. 자신의 소리만 듣는다는 것은 비로소 자신의 내면의 미세한 소리를 듣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더 나아가면 자신과 소리가 서로 혼연일체가 된다. 자신이 곧 소리다. 자기는 온데간데없고 소리만 남는다.

 

   득음을 통해서 아상我相(ego)을 털어내게 된다.

 

언젠가 소프라노 조수미 씨의 라디오 인터뷰를 들은 적이 있는데, 자신은 많은 사람 속에서도 자신의 목소리만 들린다는 이야기가 인상 깊었다. 조수미 씨도 득음을 한 것 같다.

 

한 번 득음의 경지에 이르면 영원히 그 경지가 유지되는가. 돈오점수頓悟漸修라고 하듯이, 득음 이후에도 수행이 필요한가?


필요하다. 전라도 명창으로 유명한 인물이 바로 임방울이다. 임방울도 이미 득음을 한 상태에서 세상에 나와 여기저기 활동을 하고 다녔다. 그러다 보니 흐트러진 것 같다. 세상에서 바쁘게 활동하다 보면 흐트러진다. 흐트러지면 다시 산에 들어가 폐관閉關하고 정진해야 한다. 다시 추슬러야 하는 것이다. 임방울도 흐트러지면 산으로 들어가 공부한 것으로 알고 있다.

 

 

   소리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 김에 여기에서 잠깐 필자의 전공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다. 필자는 불교의 『능엄경楞嚴經』을 연구하여 박사 논문을 썼다. 일반적으로 『능엄경』은 어려운 경전으로 알려져 있다. 불교 강원에서는 ‘깜깜 기신起信이요, 차돌 능엄楞嚴이라!’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기신론起信論은 그 논리 전개가 복잡해서 한번 들어가면 깜깜한 미로에 들어간 것 같고, 능엄경은 차돌처럼 단단해서 이빨로 깨물어도 좀처럼 깨어지지 않는다는 의미다.

 

능엄경의 핵심은 이근원통耳根圓通의 수행법이다. 이근耳根이란 귀를 가리킨다. 즉 귀로 소리에 집중하는 수행을 하면 크게 통한다[圓通]고 설파한다. 『법화경』의 「법사공덕품」에 보면 안ㆍ이ㆍ비ㆍ설ㆍ신ㆍ의라고 하는 여섯 가지 감각기관 가운데, 이근이 가장 수승한 감각기관이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눈이라고 하는 안근眼根은 앞에 있는 사물은 볼 수 있지만, 뒤통수 너머에 있는 사물은 볼 수 없다. 그래서 800공덕이라고 한다.

 

그러나 소리를 듣는 이근은 뒤에서 나는 소리도 들을 수 있다. 전후좌우의 모든 소리를 들을 수 있다. 그래서 이근은 1,200공덕이라고 설명한다. 800보다 1,200이 더 크다. 눈보다 귀를 사용하는 것이 전천후 수행법인 것이다.


소리에 집중하는 이 방법은 바로 관음보살이 수행하던 방법이다. 관음觀音이란 글자 자체도 ‘소리를 관觀한다’는 뜻이다. 여기서 말하는 관觀이란 ‘소리를 듣는다’가 아니고, ‘소리를 본다’는 맥락으로 이해해야 한다. 어떻게 소리를 볼 수 있는가. 소리를 보기 위해서는 먼저 듣는 과정을 겪어야 한다. 듣는 소리는 대략 네 가지로 구분된다. 범음梵音, 묘음妙音, 해조음海潮音, 관음觀音이 그것이다.

 

해조음은 바닷가의 파도 소리다. 파도 소리는 항상 들린다. 집중하려면 항상 들리는 소리를 택해야 한다. 필자는 우리 나라의 유명한 관음도량이 공교롭게도 모두 바닷가에 위치하고 있는 이유도 이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해조음을 듣기 위해서다. 동해안에서는 낙산사 홍련암紅蓮庵이 유명하고, 서해안에는 강화도 보문사普門寺, 남해안에는 남해 보리암菩提庵이 있다. 한국의 3대 관음도량으로 꼽힌다. 낮이나 밤이나 해조음을 듣다 보면 귀에 해조음이 쟁쟁해진다.

 

그러다 보면 밤에 잠을 자는 동안에도 해조음이 들리는 경지에 이른다고 한다. 체험자들의 이야기다. 잠을 자면서도 해조음에 집중을 하면 삼매의 경지에 든 것이다.

 

모든 의식이 오직 소리에만 집중하기 때문이다. 다른 잡생각은 나지 않는다. 따라서 소리에 모든 생각이 집중되었는가는 꿈 속에서 파도 소리가 들리는가 안 들리는가로 알 수 있다. 들리면 삼매에 든 것으로 간주한다.

 

마지막 단계에 이르러서는 소리를 듣는 주체가 누구인가, 소리를 듣고 있는 이것은 무엇인가라는 의문을 품어야 하는데, 능엄경에서는 이 도리를 ‘반문문성反問聞性’이라고 표현한다.

 

 

우리 내면의 듣는 성품을 문성聞性이라고 하는데, 이 문성이 무엇인지를 다시 묻는다. 화두로 표현한다면 이 과정은 ‘이 뭐꼬?’가 될 수 있다. 『능엄경』에서 말하는 이근원통의 수행 과정은 대강 이런 식으로 진행된다. 파도 소리를 듣고, 그 다음에는 파도  소리에 의식을 집중하고, 그 다음에는 꿈에도 파도 소리를 듣고, 마지막에는 반문문성하는 순서다.

 

필자는 일명 스님과 대담을 나누면서, 머릿속에서는 『능엄경』의 이러한 반문문성 공식을 깔아놓고 진도를 맞추고 있었다.

 

스님의 소리 수행은 『능엄경』의 반문문성과도 일맥상통하는 것인가?


그렇다. 『능엄경』을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나의 설명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관음이란 소리를 보는 것이다. 소리를 듣고 듣다 보면 있음[有]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있음’이란 결국 자기이고, 자기는 무엇이겠는가. 자기라는 것은 내면의 진심眞心이다.

 

따라서 소리를 본다는 말은 진심을 본다는 말이다.  목표는 진심을 발견하고 여기에 일체가 되는 데 있다.

 

그렇다면 관건은 소리를 많이 듣는 일이 될 것 같다. 보통 사람이 소리를 좋아하려면 좋은 소리, 즉 기쁜 소리를 먼저 들어야 하지 않을까. 그래야 기쁨을 느낄 것 아닌가. 좋은 음악은 이런 측면에서 보통 사람을 끌어들이는 방편으로 작용하지 않겠는가. 그러기 위해서는 좋은 음질, 좋은 소리를 많이 듣는 일이 일차적인 과제일 것 같다.

 

보통 사람에게는 먼저 소리의 즐거움을 느끼게 해주어야 한다. 비유하자면 노다지를 제련하는 일과 같다. 진금眞金을 얻으려면 잡철雜鐵을 떼어내야 한다. 좋은 음악을 듣다 보면 마음이 정화되면서 번뇌망상이 떨어져 나간다. 잡철이 떨어져 나간다. 차茶도 마찬가지라고 본다.

 

차를 마시다 보면 번뇌망상이 떨어져 나간다. 즉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오게 만든다. 좋은 음악과 차는 자기 자신에게 되돌아오게 만든다. 자기 자신이 된다는 의미는 있는 그대로의 자기 자신이 곧 기쁨이 된다는 의미다. 존재 그 자체가 기쁨이다.

 

 

 

 

   일명의 설명에 의하면, 좋은 음악과 소리를 들으려면 스피커가 좋아야 한다.

 

그래야 수준 높은 음질을 접할 수 있다. 음악에서 스피커가 차지하는 비중이 어느 정도냐고 물어봤더니 75퍼센트 정도라고 대답한다.

 

사람에 비유하면 입에 해당한다고 한다. 사람도 입이 좋아야 한다. 머리에 든 것은 적어도 입이 좋으면 말을 잘한다. 수도꼭지 같다. 수도꼭지가 고장나면 물이 나오지 않는다. 수행자가 도를 이루면 표현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표현은 곧 말이다. 말은 곧 소리다.

 

화엄에서 말하는 사무애事無碍도 그 최종적인 실천은 말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우리가 일을 풀어가는 것도 따지고 보면 말로 그 메시지를 전달하는 것이라고 한다. 대통령도 어떤 일을 지시할 때 말로 명령을 내린다. 말을 하면 그 일이 이행된다. 그만큼 말이 중요하고, 소리가 중요하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공덕을 쌓으면 그 공덕의 결과가 말로 온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아무튼 좋은 오디오, 좋은 스피커는 듣는 순간 저절로 소리에 집중하게 만든다.


질이 떨어지는 오디오는 듣는 사람이 억지로 애쓰고 노력을 해야 한다. 좋은 오디오는 들으면 즐겁다. 음악이 왜 기쁜가. 나와 음악이 혼연일체가 될 때 즐겁다. 음악이 왜 싫은가. 음악과 내가 분리되면 그렇다. 분리가 되면 고뇌이다.

 

혼연일체가 되면 기쁘다. 무용, 차, 음악, 명상, 영화가 모두 이 공식에 해당된다. 무용을 하면서 혼연일체가 되면 즐겁다. 오디오의 완성도 시스템이 아니다. 꾸밈없는 자기 자신이다.

 

처음에는 오디오라는 기계 장치, 또는 시스템을 타고 들어오지만 마지막에는 자기 내면의 진심을 발견하고 여기에 하나가 되면서 시스템을 초월하게 된다. 시스템을 초월하면 그것이 소리의 완성이다. 시스템이나 오디오는 하나의 방편일 뿐이다. 뗏목일 뿐이다.


좋은 스피커의 조건은 무엇인가.

 

어떤 소리든지 소화할 수 있어야 한다. 고음에서부터 저음까지 모두 소화하는 스피커가 좋은 스피커다. 그런데 국악은 소화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왜냐하면 아쟁으로 내는 소리는 너무 작다. 바이올린 소리보다 작다. 반면에 나발(호적) 소리는 너무 크다. 스펙트럼이 너무 넓다. 그러다 보니 소화하기가 어렵다.

 

국악을 소화할 수 있는 스피커는 좋은 스피커다. 세계적인 좋은 스피커를 구경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고 물어봤더니, 유명한 ‘오디오 쇼’가 있다고 한다. 미국 서부에서 열리는 CES 쇼, 동부 뉴욕의 하이파이 쇼, 독일 프랑크푸르트의 전자 쇼, 일본에서 열리는 동경 오디요 쇼가 유명하다.

 

이러한 오디오 쇼에 대략 430여 개의 업체가 참여한다고 한다. 일명도 자신이 직접 만든 스피커를 가지고 2003년에 L. A.의 CES 쇼에 참가했다. 구스 나무로 외장을 마감한 스피커였는데, 참가자들의 엄청난 러브콜을 받았다. 세계적인 오디오 쇼에서 그의 존재를 알리는 순간이었다.

 

명품 스피커는 서구의 선진국에서만 만들 수 있다는 기존의 통념을 깨는 사건이기도 했다. 한국 같은 중진국에서도 이런 스피커가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세계의 오디오 마니아들에게 각인시켰음은 물론이다.

 

일명은 스피커의 소리도 중요하지만, 외장을 어떤 재질로 할 것인지 많은 고민을 했다고 한다. 그는 결국 인도네시아산 구스 나무를 선택했다. 구스 나무는 독특한 나무다. 우리 나라에서는 이 나무를 화류목樺榴木이라고 불러왔다. 화류목으로 만든 가구는 화류장樺榴欌이라고 해서 최상급의 가구로 쳤다. 중국의 왕실이나 귀족 집안에서 사용했던 가구가 바로 이 화류장이다.

 

화류장이라고 해도 그 가구를 모두 화류목으로 제작하는 것이 아니라, 가구의 주요 장식 부분만 화류목으로 만들었다. 그만큼 귀한 나무가 구스 나무, 즉 화류목이다. 진홍색의 묵직하면서도 화려한 색깔에 무늬가 독특하다. 호랑이 발자국 같은 무늬가 나오기도 한다. 그리고 아주 단단해 대패질이 잘 안 될 정도다. 한번 만들어놓으면 대를 물릴 정도로 내구성이 강하다.

 

화류목의 산지는 인도네시아와 미얀마 등 동남아시아의 밀림지대로 알려져 있다. 보통 500년에서 1,000년의 수령을 지닌 나무라야 가구에 사용할 수 있다. 화류목은 오랜 수명을 지니는 귀목木나무 과科인데, 나무의 혹 부분이 가치가 있다. 인도네시아 어로 ‘구스’라는 말은 우리말로 ‘혹’이라고 한다. 나무의 혹이 수백 년 된 것을 잘라서 쓰는 것이다. 혹이 자라서 가구에 사용될 정도로 성장하려면 적어도 500년에서 길게는 2,000년 가까이 자라야 한다.

 

일명은 이 화류목을 구하기 위해 인도네시아의 화류목 산지를 여러 번 방문하여 현지 사람들과 접촉했다. 이렇게 구한 나무로 스피커의 외장을 제작해 CES 쇼에 출품했고, 이 스피커를 본 서양 사람들을 경탄하게 만든 것이다.

 

화류목을 구하러 인도네시아를 왔다 갔다 하면서 상인들의 농간에 속아 거액을 사기당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했다. 그러나 최상의 음질과 디자인을 갖춘 스피커를 만들겠다는 일념으로 끝까지 포기하지 않았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쬃마음을 울리는 ‘소리’가 번뇌를 잊게 한다.


좋은 스피커를 만들 수 있는 요건이 있다면 무엇인가? 음질에 대한 남다른 감식력인가? 아니면 예민한 청각인가?


소리를 듣는 사람은 많다. 들을 수 있는 사람도 많다. 그러나 소리를 직접 만드는 사람은 적다. 왜 적은가. 소리를 만드는 과정 또한 무협지에서 말하는 비급을 완성하는 과정과 비슷하다. 처음에는 무림에 나가 잘난 척을 한다. 그러다가 고수를 만나 처참하게 깨진다. 절치부심하고 동굴에 들어가 시행착오를 겪는 과정에서 절대 고수를 만나 사부로 모신다. 사부의 지도를 받으면서 험난한 역경과 수도 생활을 거친다. 마침내 비급을 마스터한다. 무협 시리즈의 전개가 대강 이렇다.

 

내가 스피커를 만들면서 겪은 과정도 이와 비슷했다. 처음에는 조그만 지식에 우쭐해서 스피커를 만들었다. 싸구려 스피커보다는 성능이 좋았지만, 명품 스피커와 견주어보니 족탈불급足脫不及이라는 사실을 처절하게 깨달았다.

 

좋은 스피커와 초식을 겨루는 방법은 비교 청취다. 포도주도 시음회를 하는 것처럼, 오디오도 마찬가지다. 내가 만든 것을 다른 제품보다 못하다고 하면 처음에는 납득이 안 갔다.

 

왜 내 것이 저것보다 못하단 말인가!

 

그래서 갖다 놓고 연구했다. 이때 깨달은 사실이 아래 단계에서는 윗단계의 내공을 모른다는 점이었다. 하수는 고수의 경지를 모르게 마련이다. 바둑 3급이 프로 7, 8단의 경지를 어떻게 알겠는가. 좋은 소리는 낮은 단계에서는 짐작할 수 없다. 스피커 만드는 테크닉은 어느 정도 공개되어 있다. 여기서 치고 나가려면 ‘공덕功德’이 있어야 한다. 공덕이 있어야 좋은 스피커를 만들 수 있다.

 

좋은 스피커 만드는 일과 공덕이 어떻게 서로 연결이 되나. 스피커 만드는 일은 형이하학적이고 기술적인 분야이고, 공덕을 쌓는 일은 형이상학적이고 종교적인 범주 아닌가. 형이하학과 형이상학, 기술적인 분야와 종교적인 범주가 어떤 차원에서 서로 연관이 된단 말인가. 서로 관련이 없는 분야가 연관된다고 하니 납득하기 어려운 말이다.


두 분야가 전혀 관련이 없는 것 같아도 사실은 밀접하게 관련을 맺고 있다. 먼저 좋은 스피커를 만들려면 자본이 있어야 한다. 자본이 없으면 불가능하다. 그런데 이 자본이라고 하는 것도 인연이다. 나하고 인연이 있는 사람이 결국 자본을 댄다. 인연이 없으면 배짱도 맞지 않는다. 배짱이 맞지 않는 사람은 돈을 대지 않는다. 자본도 사람이 가지고 오는 것이다.

 

 자본뿐만 아니라 기술도 마찬가지다. 이 분야의 기술을 가지고 있는 사람과 팀워크를 이루어야 스피커를 만들 수 있다.  공학박사들도 포함된다. 인연이 있어야 사람을 만나게 된다. 나에게 호의적인 사람을 만나려면 평소에 공덕을 쌓아놓아야 한다. 공덕을 쌓아놓으면 스리 쿠션, 파이브 쿠션으로 돌고 돌아 결국 나에게로 돌아온다. 껍데기로 보면 기연奇緣이지만 알고 보면 공덕의 대가다.

 

영감靈感(inspiration)도 같은 이치라고 본다. 적선과 적덕이 축적되면 영감이 열린다. 홀연히 기발한 생각이 떠오르는 경험을 여러 번 겪었다. 예를 들어, 실력이 있는 의사라도 영험하다는 소문이 나야 환자가 몰린다. 같은 약이라도 갑이라는 의사가 쓰면 듣지 않지만, 을이라는 의사가 쓰면 낳는 수가 있다. 같은 약이라도 영험 있는 의사가 쓰면 효험이 있다. 이것은 테크닉이 아니다. 공덕의 힘이다. 평소 주변 사람들에게 봉사하는 일이 중요하다.

 

일명은 공덕을 쌓는 방법으로 세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 단계는 물질로 도와주는 단계다. 가장 초보적인 아래 단계에 속한다.

 

그 다음 단계는 스스로를 정화시키는 것이다. 술, 담배를 적게 하고, 음식도 가능한 한 육식을 적게 먹고, 또 욕심을 줄이고, 하루에 1시간 이상 혼자 있으면서 자기를 성찰하는 과정이 필요하다.

 

마지막 단계는 선정력禪定力이다. 깊은 삼매에 들어가는 과정이다.  이른바 기도발祈禱發이 여기에 해당한다. 기도를 일심으로 하면 정신통일의 상태에 들어가고, 정신이 통일되면 정신세계에서 응답을 한다. 자타불이自他不二의 경지다. 이 응답이 기도발이다. 기도를 제대로 하면 좋은 인연을 만난다.

 

이러한 세 가지 차원의 공덕을 쌓다 보면 관상이 바뀌고, 분위기가 바뀌고, 그 사람의 에너지의 파동이 바뀐다.


일명은 좋은 소리를 재현하는 데 관심이 있었고, 그 다음에는 스피커라고 하는 기계 장치를 만드는 시도를 했으며, 그러다 보니 자본력과 기술력의 필요성을 절감했다. 그 다음에는 자본력과 기술력을 제공하는 인연을 만나야 한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고, 그러기 위해서는 공덕을 쌓아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던 것이다. 이는 세계가 그물코처럼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그가 공덕을 쌓기 위해 실천한 방법은 무엇인가. 먼저 막고 품는 방법이었다. 그것은 보약의 일종인 쌍화탕雙和湯 공양이었다. 1년에 1,000재씩 다려서 전국 선방의 스님들에게 무상으로 공양하곤 했다. 한약 1재는 20첩 분량이다. 1,000재라고 하면 20,000첩이다. 엄청난 분량이다. 약재도 전국에서 생산되는 가장 좋은 약재를 구해 직접 정성스럽게 다렸다.

 

이때 약을 다리는 솥 단지도 본인이 직접 제작했다. 효험이 있으려면 적정 온도에서 약을 끓이고 화학반응을 일으키는 솥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가 특별 제작한 솥의 재료는 구리였다. 구리 300킬로그램을 사용하여 솥을 만들었다. 솥의 밑바닥에는 순금 1000만 원어치를 사서 붙였다. 정성스럽게 방짜로 두들겨 붙였다. 약을 다리면서 금이 자연스럽게 녹아나야 약의 효과가 높아지리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한 번 약을 다리는 데 들어가는 물의 용량은 220리터. 한 드럼분의 물이다. 첫 번째 가열 시간은 수증기가 나온 후 약 1시간 30분. 짜지 않고 물만 낸다. 재탕은 1시간, 삼탕은 30분이다.


그가 설명하는 공양供養에도 여러 범주가 있다. 대중공양은 사람을 가리지 않고 무차별로 제공한다. 한 사찰에 머무르는 모든 스님에게 제공하는 공양이 대중공양이다. 산중공양山中供養은 그 산에 있는 여러 절의 스님 모두에게 공양하는 것이다. 대중공양보다 산중공양이 훨씬 범위가 넓다. 산중공양보다 더 큰 규모의 공양이 만발공양滿鉢供養이다. 전국 선원禪院이나 강원講院의 모든 스님에게 제공하는 공양을 가리킨다.

 

일명은 이제까지 만발공양을 두 차례 했다.

 

전국의 모든 선원, 강원 스님들에게 두 번이나 음식을 제공하는 공양을 올린 것이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는 만발공양을 실천하기 위해 솥 단지와 쌀, 그리고 반찬 일체를 직접 가지고 다니면서 전국을 순회했다. 300킬로그램짜리 솥 단지를 실을 수 있는 트럭과, 솥을 들어 내릴 수 있는 레카차를 포함하여 다섯 대의 차량이 함께 움직였다. 밥을 하는 인원도 여러 명 필요했다. 물론 신도들이었다.

 

또 하나 신경 써야 할 부분은 스님들의 공양 시간을 맞추는 일이었다. 점심이나 저녁 때에 맞추어 공양을 올려야 했던 것이다. 찹쌀을 포함하여 같이 들어가는 호두, 잣, 은행, 참기름, 김, 미역 등의 부식과 반찬거리도 모두 차에 싣고 다녔다. 방문하는 절에 부담을 주면 안 되기 때문이다.

 

또 그 절의 주방기구도 전혀 사용하지 않았다. 모든 장비를 자급자족했다. 만발 공양 한 차례에 찹쌀 120가마가 들었다. 돈으로 환산하면 몇억 원이 들어가는 공양이다. 그가 만든 명품 스피커의 보이지 않는 밑바탕에는 이러한 투자와 정성이 깔려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투자가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투자와는 좀 성격이 다른 투자다. 종교와 기계공학의 이종결합異種結合 아니겠는가.


그는 돈에 대해서도 철학이 있었다.

 

처음에는 돈을 버는 데 주력한다. 먼저 돈을 벌어야 한다. 그 다음에는 ‘쓰자’다. 자신이 사고 싶은 것도 사고, 즐기고 싶은 곳에 쓴다. 쓰려고 버는 것 아닌가. 그 다음에는 ‘베풀자’다. 자기가 아니라 남을 위해서 돈을 쓰는 단계다.

 

그 다음에는 여러 사람이 고루 돈을 가질 수 있도록 정치를 하는 일이다. 고루 분배할 수 있는 제도를 만드는 일을 말한다. 마지막 단계는 자기 자신과 남이 한 몸이 되자는 단계다. 너와 내가 한 몸이 되면 내 돈 네 돈도 없고, 베푼다는 개념도 없어진다. 듣고 보니 명쾌한 정리였지만, 범부는 쉽게 가질 수 없는 철학이기도 하다.


돈 이야기와 함께 나온 이야기가 여행이었다.

 

여행도 그의 돈 철학과 비슷하다. 처음 단계의 여행은 성지순례에 초점을 두었다고 한다. 다음은 선禪 지식을 만나는 게 목표였다. 한 소식 한 고수들을 만나야 깨우침이 있기 때문이다. 그 다음에는 자연 경관을 보러 다녔다. 말없는 자연 경관 그 자체가 인간에게 설법을 한다. 마지막 단계는 내면의 여행이라고 한다. 자신의 내면으로 들어가는 것이 진짜 여행이라는 것이다.

 

스피커는 크게 두 가지 종류로 나뉜다. 콘corn 스피커와 혼horn 스피커가 있다.

 

콘 스피커는 소리를 직접 방사하는 방식이다. 직접 방사한다는 말은 증폭 장치가 달려 있지 않다는 의미다. 보통 가정집에서 사용하는 오디오에 달려 있는 사각형의 네모진 스피커다. 콘형은 바로 말하는 형식이다.

 

그에 비해 혼 스피커는 넓은 공간과 먼 거리에 음을 전달하기 위해 만든 스피커다. 소리를 드라이브시킨다. 증폭시키는 것이다. 마치 입에다 두 손을 모아 말하는 형식이다. 커다란 나팔 모양을 하고 있는 것이 혼 스피커다. 일명이 만드는 스피커는 혼형 스피커다.

 

한국적인 소리를 내는 데는 혼형이 적합하다. 일명이 지난 27년 동안 개발하는 데 몰두했던 스피커가 혼형 스피커였다.

 

음악을 좋아하는 단계라면 라디오로 들어도 충분하다고 한다. 비유하자면 모차르트 음악이 그렇다. 모차르트는 라디오로 들어도 된다.

 

그러나 오디오를 사랑하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때부터는 섬세한 장비가 필요하다. 최고의 소리를 추구하게 된다. 비유하자면 베토벤 음악이 그렇다. 오디오에 빠지면 자식 학비는 주지 못해도 자기 오디오는 산다. 자식 팽개치고 오디오에 매달리는 사람들을 오디오 마니아라 부를 만하다.

 

소리에 미친 마니아들이 ‘high end’를 만든다. 하이 파이를 넘어서는 경지가 하이 엔드인데, 이는 음향박사들이 만들 수 없다. 기계적인 차원을 넘어서는 것이다. 소리에 미친 사람들만이 만들 수 있다. 이 마니아들이 세계적인 명품 오디오를 만들어낸 사람들이다.

 

명품 오디오 시장은 이들이 장악하고 있고, 그들 대부분은 미국과 유럽의 백인이다. 재미있는 사실은 여자 중에는 오디오 마니아가 거의 없다는 점이다. 대부분 남자다. 일명의 속가 부친도 마니아였다고 한다. 주변을 관찰해 보면 여자들이 음악은 좋아하지만 오디오 마니아는 없다.

 

왜 그런가.

 

일명의 분석에 의하면 여자는 아이를 낳는다. 자기 몸 내부에 이미 세계가 완성되어 있는 것이다. 남자는 아이를 낳을 수 없다. 그래서 밖에서 추구하게 된다. 밖에서 소리를 완성하고자 하는 욕망이 남자들을 오디오에 매달리게 만드는 것이다.
 
스피커의 품질을 좌우하는 요소를 정리하면 이렇다.

 

첫째는 음향공학에 밝아야 한다. 공학적인 분야인 동시에 이성적인 분야다.

 

둘째는 소리가 뭔지 알아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예술적인 안목이 있어야 함은 물론이다. 감성이 발달해야 한다. 가슴이 열려야 소리를 알 수 있다.

 

셋째는 자본력이다. 돈이 들어간다.

 

일명은 이 세 가지 조건을 갖추기 위해 팀을 만들었다. 스피커를 개발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형성된 팀이라고 한다. 이름하여 ‘관음음향연구원觀音音響硏究院’. 사장은 관음포교원의 신도 회장이 맡고 있다. 공학박사도 몇 명 포진하고 있고, 오디오 마니아도 들어 있다. 이 연구원은 오디오와 관련된 각 분야의 전문가와 네트워크를 가지고 있다. 수시로 정보를 교환한다.

 

스님이 이 연구원에서 차지하는 역할은 만들어진 스피커로 소리를 들어보는 일이다. 일종의 소믈리에다. 포도주를 감별하는 직업이 소믈리에이듯이, 소리를 감별하는 ‘사운드 소믈리에’라고 할 만하다. 

 

일명이 겨루고 있는 명품 스피커 회사를 물어보니 몇 군데가 있다.

 

미국에는 ‘윌슨 오디오’가 있다. 미국적인 소리를 내는 데 적합하다. 미국적인 소리는 사실적인 소리에 가깝다. 미국인들의 취향이 반영되어 있는 탓이다. 그랜드슬램 스피커다. 스피커 가격은 약 2억 원을 호가한다.

 

유럽에는 ‘포칼’에서 나온 ‘그랜드 유토피아’라는 스피커가 있다. 프랑스 제품인데, 프랑스 제품답게 포도주 냄새가 나는 스피커란다. 이 역시 2억 원 정도 한다.

 

스위스에서는 ‘골드문트’ 스피커가 유명하다. 독일과의 합작 회사인데, 자연에 가까운 투명한 소리를 낸다. 독일 사람들이 자연을 좋아한다. 지극히 독일적인 소리를 내는 스피커다. 가격은 2억 3000만 원 정도.

 

그렇다면, 일명이 추구하는 스피커는 어떤 스타일일까.

 

한국적인 취향과 에너지를 반영할 수 있는 스피커다. 한국적인 정서, 그러니까 우리 민족의 한恨과 흥興을 표현할 수 있는 스피커, 한과 흥을 포착할 수 있는 스피커가 가장 한국적인 스피커라고 생각한다.

 

구로동 관음포교원 옆에 ‘관음문화원’이 있다. 관음문화원에는 그가 직접 설치한 리스닝 룸이 있다. 이곳에는 일명이 제작한 스피커를 비롯하여 음향 시설 일체가 갖추어져 있다.

 

사방 벽에는 단단한 부분과 음을 흡수할 수 있는 스펀지 같은 벽면이 번갈아 설치되어 있다. 실내의 잔향에는 공간에 따라 적정 치수가 있기 때문이다. 일정 부분의 음이 튀지 않고 흡수되어야 한다.

 

스크린이 있어서 영화도 볼 수 있다. 이 공간에서는 한 달에 한 차례씩 ‘2MF’ 모임이 이루어진다. ‘MOVIE and MUSIC FORUM’의 약자다. DVD를 통해서 영화감독과 오디오 애호가가 함께 만나 영화도 보고 음악도 듣는 모임이다. 영상과 소리의 배합을 감상하는 모임이라고 할 수 있다. 잡지 편집장, 가수, 영화감독, 앤틱 수집가, 화가, 경기민요 전수자 등이 모여서 영화 한 편 보고 식사하면서 토론한다.


일명이 제작한 시커먼 색깔의 나팔 모양 혼 스피커와, 일급의 컴포넌트가 완벽하게 설치된 이 리스닝 룸에서 중국 장예모 감독이 만든 영화 <연인>을 관람했다. 인상적인 대목은 영화 도입부에 남자 무사가 콩을 북에다가 튕기면 그 콩이 수십 개의 북에 다시 부딪치면서 내는 소리와, 거기에 맞추어 주인공으로 나오는 눈먼 기녀가 소맷부리로 역시 북을 튕기면서 소리를 내는 대목이다.

 

그 장면에서 보여주는 화려한 색상과 박진감 넘치는 소리의 배합. 영화는 그렇게 봐야 제대로 보는 것 같았다. 혼 스피커에서 나오는 음향은 필자의 시각과 청각을 온통 화면으로 몰고 가버렸다.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지 모를 정도로 보는 사람을 매료시키는 사운드였다.

 

매료당해야 번뇌가 사라진다는 사실을 알았다. 먹고 사는 문제로 생기는 번뇌와 고통을 잠시나마 잊게 해주었다. 범부에게는 바닷가의 해조음보다 DVD를 시청하면서 듣는 박진감 넘치는 음향이 번뇌망상을 떠나게 해주는 효과가 훨씬 컸다.


과연 스님이 만든 스피커의 사운드라 다르다. 명불허전名不虛傳이다. 이런 소리를 듣는 소감은 어떤가?


소리에 대한 나의 느낌을 표현한다면 히말라야 14좌를 완등한 기분이다. 엄홍길의 기분이 이랬는지 모르겠다. 어느 단계까지는 좋은 오디오와 스피커가 기쁨을 준다. 이 과정에서 좋은 기자재를 구입하기 위한 끝없는 경쟁이 시작된다. ‘나는 얼마짜리 가지고 있다’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렇게 되면 피곤하다. 이 단계를 지나면 모든 소리가 음악으로 들린다. 모든 소리가 음악이고 춤이다.

 

더 나아가면 아무리 좋은 소리도 없는 것만 못하다. 한 생각이 일어나지 않으면 만물에 허물이 없다. 하지만 이 말은 한참 진행된 차원의 이야기다. 일상 생활에 지친 생활인들에게는 먼저 좋은 스피커로 좋은 음악을 들으면서 기쁨을 느끼는 일이 필요하다. 삶의 피로를 푸는 데 소리가 그 역할을 한다. 그러면 단순해지고 소박해진다.

 

이 세계가 좁은 것 같다가도 일명 스님 같은 고수를 만나게 되면 세계가 넓고 넓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고수를 만나야 안목이 열린다. 소리에도 한 세계가 있다는 사실을 확실히 알게 된 계기였다.

 

 

『조용헌의 고수기행』 (조용헌 지음, 랜덤하우스중앙 발행)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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