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3년 고종 황제 즉위 40주년에 기념으로 미국 공관을 통해 "포드 A형 리무진" 승용차 1대를 친견식 의전용 어차로 들여온 것이 우리나라 최초로 등장한 자동차였다. 그 후 철도 못지 않은 교통수단으로 인식되어 당시의 거부들이 사업의 일환으로 승용차, 버스 등을 도입하여 한국에 운수업이 시작되었으며, 도입 차량이 늘어나 일본인에 의해서 운영되던 정비공장이 당시 한국자동차 기술의 전부였다.
1905년에 민간 운전자로 제3대 천도교조였던 의암 손병희 선생으로 이미 자동차를 타고 다녔다 한다.
1911년 우리나라 최초의 일본인이 포드 8인승으로 마산-삼천포간을 운행하였다. 요금은 마산-진주간이 3월 80전, 삼천포-진주간이 1원 30전이었다. 당시 쌀 한 가마가 4원 하던 시절이었다.
1913년 우리나라 최초의 택시로 서울의 이봉래씨가 포드차를 2대 구입해 서울에서 시간제로 임대, 영업한 것이 그 시초이며, 당시의 고관이나 기생 등이 주로 이용하였다.
1913년 서울에서 이봉래씨와 일본 청년 곤도 그리고 장사꾼 오리이 3인이 합자해 20만원으로 첫 자동차회사를 세웠다.
그해 최초의 자동차학원을 용산에 설립했고 10명을 교육했다. 이들 중 한국인으로는 유일하게 이봉래씨의 아들 이용문씨가 운전을 배워 우리나라 운전면허 1호가 되었다.
1914년 오리이 자동차 상사라는 승합 자동차 회사가 처음으로 전국 9개 노선을 허가받아 자동차 영업을 시작하면서 우리나라 최초의 자동차번호판으로 검은색 철판에 흰 글씨로 오른쪽에는 등록한 도시이름을 한문으로 위에서 아래로 내려쓰고 왼쪽에는 경찰이 준 두 자리 아라비아 숫자를 기재해 앞에만 달았다.
1914년 영친왕 이강공이 미국제 오버랜드를 들여왔을 때, 1915년 윤권이라는 사람이 이 차를 운전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운전사가 되었다.
1919년 우리나라 최초 여성 운전자로 전주 태생의 최인선씨가 23세 되던 해 경성자동차 강습소에서 면허를 취득하였다.
1928년 우리나라 최초의 시내버스로 경성부 청에서 서울 시민을 위해 20인승 버스 10대를 들여와서 서울 시내 주요 간선도로를 운행하게 하였다.
1930년대 말 일본군국주의를 위한 전쟁 준비의 일환으로 자동차 항공기 부품 생산을 위해 조선 이연, 조선타이어, 조선 베아링, 경성스프링 등의 회사가 설립되었다.
1931년 목탄차가 만주사변을 일으킨 일본 육군성에 의해 부족한 휘발유를 대신하기 위해 개발되었다.
1933년 서울 조선운송주식회사 사장 다케시마가 휘발유엔진 트럭을 목탄차로 개조, 실용화 했다.
1940년 국내에 1,000여대가 넘는 목탄차들이 운행됐다. 이 차는 보일러에다 숯을 가득 채우고 불을 붙인 다음 풀무질을 해야 움직였다. 고개라도 만나면 올라가기 전에 다시 풀무질을 해야 하거나 뒤에서 사람들이 밀어올려야 할 만큼 힘이 약했다.
1950년 정부는 자동차부품 산업을 위해 대책을 마련하였으나 6.25사변으로 시행하지 못하였고, 전쟁 후 미군의 군수용 차량을 망치 하나로 개조하여 버스나 트럭을 만드는 재생자동차 산업이 자연스럽게 수요에 의해 발전하였다.
1955년 2월 설립 된 신진공업(현 대우자동차)은 부산에서 25인승 버스를 만들어 호황을 누렸으며 그때 공장 주위에 모였던 부품가게들은 아직도 부산 서면 일대에 부품상가를 이루어 장사를 계속하고 있다.
당시로서는 기록적인 숫자인 2500대 이상의 버스를 생산했으며, 6.25 직후 부산의 위상을 감안한다면 신진공업이 우리자동차 산업의 시발점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950년 3월 자동차 부품공업 육성을 위해 AID 차관을 들여오는 등 노력했으나 6.25사변으로 거의 실행하지 못하였다.
1955년 5월 서울에서 정비업을 하던 최무성씨가 미군으로 불하받은 지프의 엔진과 변속기, 차축 등을 이용하여 드럼통을 펴서 만든 첫 지프형 승용차인 "시발"을 제작하였다. 우리 최초의 고급 승객을 위한 승용 개념의 자동차이다.
1962년 1월 29일 자본금 1억 원으로 부평에 공장을 세운 새나라 자동차(현 대우자동차)로 일본의 닛산 자동차와 기술 제휴를 해 SKD(부분조립상태) 상태의 블루버드를 도입해 부평공장(현 대우자동차)에서 조립했다. 이차는 비록 조립이었지만 우리 땅에서 생산된 최초의 승용차였다.
63년 7월 부평에 공장을 세운 새나라 자동차 공장은 생산을 중단했다.
1966년 5월 신진 공업사(현 대우자동차)가 일본 도요다의 코로나 승용차를 도입하여 간단한 부품을 국산화하여 완전 조립 방식(CKD)으로 차를 조립 생산하게 되었다.
1967년 4월 국내최초의 자동차정비학원인 한국자동차정비학원 설립.
1967년 7월 현대자동차 설립
1975년 12월 현대자동차는 국내 최초로 설계부터 생산까지 국산기술로 만든 첫 고유 모델 승용차인 포니를 개발하였다. 이 차는 오일 쇼크로 연비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던 당시 가장 큰 승용차 소비자였던 택시시장을 석권함으로써 오늘날 현대자동차의 초석이 되었으며 한국 자동차 역사를 새로 쓰게 하는 많은 기록을 남겼다.
1976년 7월 현대자동차 포니- 에콰도르에 5대 수출
1976년 신진자동차와 미국의GM이 합작하여 GMK를 세웠으나 미국차를 기반으로 한 이 회사의 제품은 연비 때문에 포니에 밀려 빛을 보지 못했다. 후에 새한자동차로 회사명이 변경된 뒤 1983년 대우자동차로 통합되었다.
1981년 2월 28일 당시 재벌의 중복투자 제한방침에 따라 자동차공업 합리화 조치가 발표되었다. 당시 재정 위기에 몰려 있던 기아자동차는 봉고라는 차를 만들어 회사가 위기를 넘기는 전기를 마련하였다.
자동차공업 합리화 조치
- 승용차, 픽업 : 새한, 현대
- 1톤~5톤 트럭 및 라이트버스 : 기아
- 특 장차 : 동아
- 2륜차 : 기아, 대림 합병, 효성(2원화)
- 방산용 차량 : 아시아
1982년 2월 현대자동차는 5도어 해치백 스타일의 전륜구동방식인 "엑셀"을 생산 판매 하였다.
1984년 단일 차종으로서는 처음으로 포니가 50만대 생산을 돌파하였다.
1984년 9월 자동차 등록대수가 90만대를 돌파하였다.
1985년 1월 17일 정부는 자동차공업 합리화조치를 87년 해제키로 결정하였다.
1985년 5월 자동차 등록대수가 100만대를 돌파했다. 이때부터 자동차의 대중화에 따른 안전도에 신경을 쓰는 설계가 준비되고 크고 안전한 중형차 제작도 우리의 기술로 준비하기 시작했다.
1987년 1월 자동차공업 합리화조치를 일부 해제하여 기아의 승용차 생산을 재개할 수 있게 되었다.
1987년 1월 자동차 전면에 이중 안전접합유리 사용이 의무화되었다.
1987년 3월 한국 최초의 자동차 경주가 진부령-용평 구간에서 도로 경기로 열렸다. 곧 이어 영종도에서 그랑프리 코리아 레이스란 트랙 경기가 시작되었다.
1987년 5월 1일부터 안전벨트 착용이 의무화되었다.
1989년 자동차산업 합리화 조치가 해제되어 완전 경쟁체재에 들어갔으며 이 조치는 향후 90년대 우리 자동차가 세계 속의 자동차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1991년 5월 14일 대우조선 (현 대우자동차)는 국민차 개념의 국내최초의 경승용차 티코를 만들어 더욱 많은 국민들이 자동차를 이용할 수 있게 되었다. 한 단계 더 성숙된 자동차문화를 국민들이 체험하게 되었다.
1992년 10월 10일 자동차 보유대수 500만대를 돌파하였다.
1995년 5월(5/4~10) 제1회 서울모터쇼를 개최를 시작으로 한국자동차는 그 역사를 해외에서 기록하기 시작했으며 그 결과 현재 해외의 많은 생산 거점과 미국시장에서 월간 4만대 이상의 판매실적을 올리게 되었다.
1995년 7월 27일 전국 자동차 등록대수가 800만대를 돌파
1996년 6월 24일 전국 자동차 등록대수가 900만대를 돌파
1997년 7월 전국 자동차 등록대수가 1,000만대를 돌파
1999년 10월 전국 자동차 등록대수가 1,100만대를 돌파 (10월말 기준 등록대수 : 11,027,519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