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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예프스키는 의도적으로 연애 소설의 영역을 벗어나기 위한 몸부림을 치곤 했는데, 이 작품은 예외적으로 이성애적 사랑에 약간 의미를 부여한 듯하다. 하지만 이 작품이 비극이 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는, 이성애적 사랑이라는 감정을 습득하지 못한 나스따샤와 그 감정을 부정하는 미쉬낀이 서사의 중심부에 위치한 것에 기인한다. 마찬가지로 그들의 주변부에서 뱅뱅 도는 아글라야와 로고진의 진지함은 각각 다른 대상을 사랑하기 때문에 비극의 의미는 더 심화된다. 어떤 의미에서 아글라야, 심지어 로고진은 가해자라기보다는, 이상을 쫓는 미쉬낀의 욕망 때문에 가장 큰 피해를 입은 인물이라고 할 수 있다. |
"...그 불행한 여인은 자기가 이 세상에서 가장 타락하고, 가장 죄가 많다고 깊이 믿고 있어요. 아, 그 여인을 욕되게 하지 마세요. 그 여인에게 돌을 던지지 마세요. 그녀는 자신이 부당하게 모욕을 받는다는 생각에 몹시 괴로워했어요. 그녀가 무슨 죄를 지었기에! <오, 하느님!> 그녀는 계속 광란적으로 외쳤어요. <나는 내 죄를 인정하지 않아! 나는 세상 사람들의 희생자야, 탕자와 악당의 희생물이야!>라고요. 하지만 그녀가 당신에게 뭐라고 말하든 간에 그녀 자신이 먼저 자신을 믿지 않아요. 반대로 그녀는 자신이 죄인이라고 굳게 믿고 있어요. 내가 그와 같은 암흑을 그녀에게서 몰아내려고 시도했을 때 그녀는 너무나 고통스러워했어요. 그때를 생각할 때마다 내 가슴의 상처는 아물지 않습니다. 내 가슴은 영원히 찢겨져 있는 거나 마찬가지예요. 그 여인이 내게서 떠난 이유를 아시나요? 그녀가 저급한 여인이라는 것을 나에게 증명하기 위해서예요. 무엇보다 끔찍한 것은 그녀 자신도 나에게 증명하기 위해 그런 행동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른다는 겁니다. 나에게서 도망간 것도 치욕스런 행위를 보여 주고 싶은 생각이 내부에서 일어났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하여 자기 스스로에게 <너는 또 수치스런 짓을 했어. 그러니까 너는 결국 비열한 짐승에 불과해!> 라고 말하고 싶었던 거였어요. 아, 어쩌면 당신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할 거예요, 아글라야! 아실지 모르겠지만 그녀가 끊임없이 자신의 수치를 의식하는 배경에는 자연스럽지 못한 무서운 쾌감이 스며 있을 거예요. 누군가에 대한 복수심 같은 것 말이에요. 이따금 나는 그녀가 자기 주변에서 광명을 찾을 수 있게끔 이끌어 주었지만, 그녀는 즉각적으로 분개했어요. 내가 그녀 위에 너무 높이 서 있다고 심하게 반발하기까지 했어요(내 마음속엔 전혀 그런 생각이 없었는데도요). 그러면서 나의 청혼에 대해 그녀는 누구에게도 오만한 연민이나 도움을 구하지 않으며 <자기만큼이나 위대한 인간으로 만들기>따위는 거절한다고 선언했어요......."667p
허리까지 내려뜨린 검은 머리는 흔들지 않고, 주변의 모든 사물을 둘러보는 여자가 있다. 갑충의 더듬이와도 같은 머리칼로 그녀는 세계를 인식한다. 그녀의 두 눈동자는 만물의 아름다움과 추악함을 감각하기 위해 간헐적이고 재빠른 동작으로, 좌우로 두리번거린다. 형상화할 수 없는 아름다움을 가져서 그녀가 위험한 것이 아니다. 그녀는 자신의 아름다움에 대한 가치를 하잘 것 없다고 격하시키는 데 더 큰 위험성을 가지고 있다. 세상의 어두운 형체를 이미 감각한 여자, 또한 그녀는 자신의 욕망에 의해 추동되는 인물이 아니어서 더 위험한 여자다.
한 남자가 있다. 그는 모래 알갱이보다 작은, 보이지 않는 희망에 비해 내면 전체를 뒤덮고 있는 절망감을 가진 여자, 이런 여자를 사랑한다. 욕망이 없는 여자, 자신의 욕망의 실체를 파악하지 못한 여자를 사랑한다. 그는 주변부를 피를 물들이게 하는, 위험한 여자를 사랑한다. 그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네 가지다. 이타적인 살인을 할 것인가, 이기적인 자살을 할 것인가, 아니면 그녀를 죽이고 자신도 죽음을 택할 것인가...그녀의 영향이 미치지 않는 곳으로 도망갈 것인가? 하지만, 어떻게..빠져나오려고 발버둥치면 칠수롤 점점 더 깊이 빠져들어가는 수렁 속으로 이미 잠기고 있는 그에게 마지막 가능성은 보이지 않는다.
" 과연 모든 사람을, 모든 이웃을 사랑할 수 있을까? 나는 혼자서 자주 이런 질문을 던져 봐요. 물론 아닐 거예요. 그렇게 한다는 것은 부자연스럽기까지 해요. 인류애라는 추상적 사랑을 통해 사람들은 거의 자기 자신만을 사랑하지요. 하지만 그것은 우리에게 불가능하나, 당신에게는 별개의 문제예요."-698
당신이라는 의미의 거짓 언술 이외에 남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진리..
자신을 중심으로 세계는 뻗어나간다고 도스토예프스키는 주장한다. 자기애를 기반으로 타인에 대한 애정은 점점 확장되어 간다고...
나스따샤는 좌절감, 모욕감이 외면화되었다.
로고진은 정열, 질투, 이성애적 사랑이 외면화되었다.
미쉬낀은 인간으로서의 성정, 도덕심이 외면화되었다.
세 인물은 이기적이면서도, 가장 이타적인 인물이기도 하다.
진부한 표현이지만, 정말 <<백치>>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내면 세계는 아름답다.
사랑한다면, 로고진처럼...
이 작품은 어느 작품보다 <<까라마조프의 형제들>>의 인물과 1;1 대응이 가능한 인물이다.
로고진:반항적이고 정열적인 드미트리.
이뽈리트:우주의 힘에 대항하는 이반
레베제프:세속적 욕망이 응집된 표도르
나스따샤:그루센카
아글라야:카테리나
가브릴라:라키친
뮈시킨:알료샤
리자베따:그리고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