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방 비라도 쏟아질 듯하면서 올리브색과 은색 황혼이 저물어 갈
무렵 브라운 신부는 스코틀랜드식 회색 망토에 몸을 감싸고 회색으
로 저문 스코틀랜드의 계곡 막바지까지 와서 괴상하게 생긴 글렌가
일 성을 바라보았다. 이 계곡인지 동굴인지가 마치 막다른 골목처럼
되어있고 성은 그 한쪽을 가로막고 서 있었다. 그래서 그건 꼭 세상
의 끝처럼 보였다. 옛날 프랑스계 스코틀랜드의 성곽양식을 따라 지
붕이 가파르고 바다처럼 푸른 빛인 첨탑들이 있어 잉글랜드 사람들은
동화에 나오는 마녀의 끝이 뾰죽한 모자를 연상했다. 그리고 그 푸른
첨탑들을 둘러싸고 흔들리는 소나무 숲은 푸른 색과의 대조때문에 무
수한 까마귀 떼처럼 시꺼멓게 보였다. 이렇게 꿈꾸는, 거의 잠든 악
마와도 같은 인상은 풍경에서 오는 단순한 환상만도 아니었다. 스코
틀랜드 귀족의 성이면 으례 사람이 사는 다른 어떤 집보다도 긍지와
광기와 신비로운 비애의 구름이 무겁게 드리워 있는 법인데 이곳 역
시 그랬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스코틀랜드는 전통이라고 불리는 이중
의 독약을 지니고 있는데 귀족의 혈통의식과 캘빈교도들의 숙명관이
바로 그것이었다.
신부는 글래스고우까지 용무차 왔다가 하루의 틈을 내어 그의 친구
이며 비직업적 탐정인 플램보를 만나러 온 것이었다. 플램보는 글렌
가일 백작의 생사를 조사하기 위해 정식으로 임무를 띠고 온 또 한
사람과 글렌가일성에 머무르고 있었다. 그 백작은 신비스러운 인물로
용기과 광기과 극단적인 교활때문에 16세기의 그 나라의 음흉한 귀족
들 사이에서도 가장 두려움을 받는 가문의 마지막 대표자였다. 스코
틀랜드의 메어리여왕 주위에 세워졌던 미궁과 같은 야심과 허위의 궁
전 뒷방의 또 뒷방까지 이들만큼 깊이 들어간 귀족도 없었다. 이 부
근의 민요가 그들의 책략의 동기과 결과를 똑똑히 증명하는 것이었다.
여름철 나무에는 푸른 물이 돌 듯
오길뷔 집안에는 붉은 황금이 도네
여러 세기를 두고 글렌가일 성에는 한 사람의 얌전한 성주도 없었으나
빅토리아 시대의 종언과 더불어 모든 기행도 끝을 맺은 것으로 생각되
었다. 그러나 글렌가일가의 마지막 성주는 그가 할 수 있는 단 한가지
일을 함으로써 가문의 전통을 지켰다. 그는 깜쪽같이 사라져 버렸던 것
이다. 외국으로 갔다는 말이 아니다. 만약 어디엔가 살아있다면 아무래
도 그 성안에 있었다. 그의 이름은 아직 교회명부와 표지가 붉고 큰 귀
족 명부에 올라 있었지만 태양 아래서 그를 본 사람은 없었다.
단 하나 그를 본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마부도 아니고 정원사도 아닌
홀아비 하인이었다. 그는 심한 귀머거리여서 사무적인 사람은 그를 벙어
리로 알았고 좀 더 통찰력이 있는 사람은 그를 얼간이라고 단언했다. 말
라빠지고 붉은 색 머리에다 턱은 고집스럽게 생겼지만 눈만은 순결하게
푸른 일꾼인 그는 이즈리얼 가우라는 이름으로 통했고 그 쓸쓸한 저택에
단 하나밖에 없는 묵묵한 하인이었다. 그러나 그가 열심히 감자를 캐는
거라든지 규칙적으로 주방으로 사라지는 것으로 보아 그가 주인의 식사
준비를 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었다. 따라서 괴상한 백작이 아직도 성안
에 숨어 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백작이 성내에 있다는 증거를
좀 더 얻어보려는 사람이 있으면 그는 주인은 집에 없다고 완강히 부인
했다. 그런데 어느날 아침에 이곳 촌장과 목사가 (글렌가일 일가는 장로
교 신자였으니까) 성내로 불려갔다. 거기서 그들은 마부와 요리사를 겸한
정원사가 그 많은 직업에 한 가지를 더해서 장의사 일까지도 도맡아 그의
지체높은 주인의 시체를 관 속에 넣고 못질을 해둔 것을 발견했다. 이 기
묘한 사실이 어느 정도의 의심을 받고 그대로 통과되었는지 아니면 별로
조사받지도 않았는지 아직 명확하게 나타나지 않았다. 하여간 2~3일 전에
플램보가 북부에 왔을 때까지는 이 사건은 전혀 법적 조사를 받고 있지
않았다. 그가 왔을 때는 글렌가일 경의 시체는(만약 그것이 시체였다면)
그곳 언덕의 조그만 교회묘지에 묻힌 지 한참 된 후였다.
브라운 신부가 침침한 정원을 지나 성의 그늘까지 왔을 때 구름은 짙고
공기 전체가 눅눅해 곧 우뢰소리라도 들려올 것 같았다. 그 때 푸르스름
한 황금색 황혼의 마지막 한 줄기 햇빛을 등진 검은 사람의 그림자가 보
였다. 그림자는 실크 햇을 쓰고 어깨에 삽을 메고 있었는데 이런 모습이
이상하게 무덤 파는 일꾼을 연상시켰으나 감자를 캐는 귀머거리 하인이
기억나자 그런 모습을 오히려 자연스럽다고도 생각했다. 그는 스코틀랜
드의 농민에 관해 조금은 알고 있었다. 체면을 존중해서 공식 심문에 임
하면서 검은 복장을 입은 것이겠고 그런 일때문에 한 시간이라도 감자
캐는 일을 소홀히 하지 않겠다는 절약 정신을 그는 알고 있었다.
신부가 옆으로 지날 때 그자가 움찔하고 의아스러운 눈초리를 보낸 것
도 그런 성격의 사람들 특유의 경계심과 시기심에 맞는 행동이었다.
커다란 문을 플램보가 손수 열어주었고 그 곁에 철회색 머리에 수척한
남자가 손에 서류를 들고 서 있었는데 그는 스코틀랜드 치안국에서 온
클레이븐 경감이었다. 현관에서 들어간 홀에는 가구의 천이 대부분 찢기
고 덩그랗게 비어 있었으나 창백하고 냉소를 머금은 오길뷔의 선조 한
두사람이 검은 가발을 쓰고 거무스레한 캔버스속에서 내려다 보고 있었
다. 그들을 따라 안쪽 방으로 들어간 브라운 신부는 두 사람이 지금까지
그곳 기다란 참나무 탁자에 앉아 있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 탁자 한쪽
구석에는 메모를 휘갈긴 종이들이 잔뜩 흩어져 있었고 위스키와 여송연
등이 그 옆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나머지 공간 전부에는 따로 구분해서
정리된 듯한 물건들이 수북하게 쌓여있었는데 도무지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알 수 없는 물건뿐이었다. 하나는 번쩍거리는 깨진 유리조각 더미
같았다. 다음은 그저 갈색 가루를 수북하게 쌓아올린 것 같았다. 세번째
더미는 흔해빠진 나무조각 같았다.
"이건 지질학 박물관을 차린 모양이군."
그는 앉으면서 갈색가루와 수정파편들이 있는 쪽으로 잠깐 고갯짓을 했다.
"지질학 박물관이 아니라 심리학 박물관이라고 할까요?" 하고 플램보가
대답했다.
"아이구, 제발 처음부터 그런 어려운 어휘는 쓰지않도록 합시다." 하고
경찰에서 온 형사가 말했다.
"심리학이 무슨 뜻인지 모르시오?" 하고 플램보가 다정한 미소를 머금
고 말했다. "심리학이란 머리가 돌았다는 뜻이오."
"그래도 난 이해가 안 가는데요." 경관이 대답했다.
"글쎄," 플램보가 단정적으로 말했다. "내 말은 글렌가일 경에 관해서
우리가 발견한 것은 한 가지뿐이라는 거요. 그는 미치광이었소."
실크햇을 쓰고 삽을 멘 가우의 검은 그림자가 창앞으로 지나가면서 어
두워지는 하늘을 등지고 희미한 윤곽을 드러내었다. 브라운 신부는 멍하
니 그것을 바라보면서 대답했다.
"그분에게는 어딘지 괴상한 데가 있었음에 틀림없다는 것은 나도 이해
할 수 있어. 그렇지않고서야 산 채로 묻히지는 않았을 것이고 -주욱
누워서 묻히는 것도 그렇게 서둘지는 않았을 테니까. 그러나 무슨 근
거로 그가 정신병자였다고 생각하는건가?"
"글쎄, 클레이븐씨가 이 집안에서 발견한 물건들의 일람표를 한 번 보
세요." 플램보가 말했다.
"촛불을 켜야겠군." 하고 클레이븐이 갑자기 말했다. "비바람이 일 것
같고 어두워서 읽을 수가 없군요."
"그 괴상한 물건들 중에서 양초도 발견했소?" 하고 브라운이 빙그레
웃으면서 물었다.
플램보가 정색을 한 얼굴을 들고 그 검은 눈으로 친구를 응시했다.
"그것도 괴이하단 말이예요. 양초는 스물다섯자루나 있는데 촛대는
흔적조차 없거든요."
바깥에서는 바람과 어둠을 재촉하는데 브라운 신부는 다른 잡동사니
전시품 중에 한 묶음의 양초가 놓여있는 탁자로 걸어갔다. 가는 길에
우연히 갈색 가루 더미위로 몸을 구부리더니 돌연한 재채기가 조용한
분위기를 깨뜨렸다.
"어이쿠, 이건 코담배로군!" 하고 그가 말했다.
그는 양초를 하나 집어서 조심스레 불을 켜들고 돌아와서 위스키병
목에다 꽂았다. 덜커덩거리는 창문틈으로 스며들어 설렁거리는 밤공기
에 흔들린 불꽃이 깃발인양 길게 너울거렸다. 그리고 성밖 사방팔방으로
몇 마일이고 뻗어있는 검은 소나무 숲이 마치 바위에 부딪히는 검은 파
도처럼 설레이는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일람표를 읽지요." 하고 클레이븐이 서류를 집어들면서 말했다.
"이 성안에 흩어져 있던 용도불명의 물건들 일람표입니다. 물건이 발견
된 장소는 대개 어질러져있던 상태였습니다. 그러나 한 두개의 방은
단지 검소하기는 하지만 누추하지는 않은 자가 거처한 것이 분명했습니
다. 하인 가우가 아닌 누군가가 말입니다. 일람표는 다음과 같습니다.
제1품목 - 상당히 많은 양의 보석비장품. 거의 전부가 다이아몬드이고
보석이 끼어있던 대는 없으며 낱낱이 흩어진 채였습니다. 물론 오길뷔일
가에 가보로서의 보석이 있는 것은 당연한거지만 거의 전부가 특수한 세
팅에 끼우게 되어있는 바로 그런 보석이거든요. 그런데 그런 대가 없으니
오길뷔집안 사람들은 이 보석들을 무슨 동전처럼 호주머니에 넣고 다녔던
모양이죠.
제2품목 - 여러 무더기의 코담배 더미. 담뱃갑이나 쌈지에 들어있는 것
이 아니라 벽난로, 식기장, 피아노 등 아무곳에나 무더기로 쌓여 있어요.
아마 노신사는 호주머니를 찾거나 뚜껑을 여는 것조차도 귀찮았던 모양입
니다.
제3품목 - 집안 도처에 정체불명의 금속조각 무더기가 있는데, 강철 용
수철 비슷한 것도 있고 현미경으로나 보일 만한 톱니바퀴 형태도 있습니
다. 자동 장난감을 분해한 것 같아요.
제4품목 - 양초, 빈 병 목에나 꽂아야지 달리 꽂을 만한 촛대가 없습니
다.
이젠 이런 물건들이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기묘하다는 사실에
주의해주셔
야겠어요. 중심 수수께끼에 대해서는 우리도 예측한 것이
있습니다. 우리는 한눈에 죽은 백작에게는 뭔가 잘못된 일이 있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가 여기까지 온 것은 그가 정말 여기서 살았는지,
그가 정말 여기서 죽었는지, 그의 매장을 맡아 한 붉은 머리 허수아비가
그의 죽음과 무슨 관련이 있는지를 알아내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모든
것 중에서 최악의 경우를 가정한다 해도, 얼마든지 처참하고 신파연극같
은 해결을 가정한다 해도 -가령 사실은 하인이 주인을 살해했다거나, 주
인이 정말은 죽지 않았거나, 주인이 하인으로 변장하고 있다거나, 주인을
대신해서 하인이 매장되었다거나, 하여간 무엇이든 윌키 콜린스식의 비극
을 꾸며내 본다고 해도 촛대없는 양초라든지 좋은 가문의 노신사가 왜 피
아노위에다가 줄곧 코담배를 흘리는지 설명할 수 없단 말입니다. 이야기
의 핵심은 우리도 상상할 수 있으나 그 주변이 신비롭기만 해요. 아무리
상상을 해봐도 인간의 두뇌로는 코담배와 다이아몬드와 양초와 분해된 용
수철을 연결할 도리가 없군요."
"내 생각으로는 그 연결을 알 수 있을 것 같소." 신부가 말했다.
"가령 이 글렌가일 일가는 프랑스 대혁명에 대해 무척 분개하고 있었단
말입니다. 그는 <구체제>를 열렬히 지지하는 자로서 최후의 부르봉 왕가
의 가정생활을 문자 그대로 재연하려고 한 것입니다. 그것이 18세기의 사
치품이었기 때문에 코담배를 가지고 있었고 18세기에 불을 밝히던 것이기
때문에 양초도 가졌던 것이죠. 기계부속 금속편들은 루이16세의 자물쇠
만드는 취미를 대표한 것이고, 다이아몬드는 마리 앙뜨와네뜨의 다이아몬
드 목걸이를 만들기 위한 것이지요."
듣고 있던 두 사람은 눈이 휘둥그래져서 그를 바라보았다.
"기상천외한 이야기군요!" 하고 플램보가 소리를 질렀다. "정말 그것이
진실이라고 생각하시나요?"
"진실이 아니라고 확신하지. " 브라운 신부가 대답했다. "단지 아무도
코담배와 다이아몬드와 용수철과 양초를 연결시킬 수 없다고 하니까 말이
야, 내가 즉석에서 연결해 보였을 뿐이지. 내가 확신하는 것은 진정한 진
실은 좀 더 깊은 곳에 있다는 거야."
그는 말을 멈추고 탑 사이를 불며 지나가는 바람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다가 이런 말을 했다.
"죽은 글렌가일 백작은 도둑이었다. 그는 대담한 도둑으로서 또 하나의 어
두운 생활을 하고 있었다. 양초는 그가 가지고 다니는 조그만 초롱에만 쓰
이는 것이기 때문에 촛대는 전혀 가지고 있지 않았다. 코담배는 프랑스의
가장 악질적인 범죄자가 후추를 쓰는 것과 같은 용도에 사용했다 - 즉 체
포하려는 자나 뒤쫓는 자에게 갑자기 한 뭉치를 집어던지는 것이다. 그러
나 결정적 증거는 다이아몬드와 조그만 강철톱니바퀴라는 기묘한 우연의
일치에 있다. 확실히 이것이 모든 것을 명백하게 나타내고 있지않은가? 다
이아몬드와 작은 강철톱니바퀴는 유리를 자를 수 있는 두개밖에 없는 도구
가 아닌가?"
이 때 부러진 소나무가지가 바람의 힘으로 그들 뒤에 있는 창문을 휘갈겨
서 마치 도둑흉내라도 내는 것 같았으나 그들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들
의 눈은 브라운 신부를 주시하고 있었다.
"다이아몬드와 작은 톱니바퀴라," 하고 클레이븐이 깊은 생각을 하는 듯
이 말했다. "그것만으로 진정한 설명이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진정한 설명이라고 생각하지 않소." 신부가 침착하게 말했다. "그러나
당신은 그 네가지 물건을 연결할 수 없다고 했지않소. 물론 진상은 훨씬
평범하지. 글렌가일은 자기 영지 내에서 보석을 발견했거나 아니면 발견
했다고 생각했다. 누군가가 그런 흐트러진 보석을 가지고 와서 성의 동굴
속에서 발견했다고 그를 속였다. 작은 톱니바퀴는 다이아몬드를 끊는 기
구였다. 그는 이 근방 산에 사는 몇몇 목동과 건달의 도움만으로 조잡하
고 소규모로 그 일을 하는 수밖에 없었다. 코담배는 그런 스코틀랜드의
목동들이 대단한 사치품으로 아는 물건이고 그것만 있으면 그들을 매수할
수 있다. 촛대는 그들이 원하지 않았기 때문에 없었던 것이다. 동굴을 탐
험할 때는 손에 촛불을 들었다."
"그 뿐이오?" 하고 플램보가 오랜 침묵끝에 물었다. "마침내 싱거운 진실
에 도달했나요?"
"아니, 천만에" 브라운 신부가 말했다.
바람이 멀리 소나무 숲에서 마치 브라운 신부를 조롱하는 웃음 소리처럼
길게 부르짖다가 멈추자 그는 무표정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그저 코담배와 용수철, 양초와 보석을 그럴듯하게 연결지을 수 없다니까
그런 암시를 했을뿐이지. 우주를 설명하는 거짓 철학이 열가지는 될것이
고 글렌가일 성의 신비를 풀이하는 거짓 이론도 열가지는 될 테지. 그러
나 우리는 성과 우주의 진정한 설명을 필요로 한단 말씀이야. 그런데 이
밖에는 전시품목이 없나?"
클레이븐은 껄껄 웃고 플램보도 미소를 머금고 일어나서 긴 탁자 아래쪽으
로 천천히 걸어갔다.
"제5, 제6, 제7의 품목이 있지요."하고 그는 말했다. "그러나 무슨 단서
가 된다기보다는 종류만 가지각색이란 말입니다. 흑연 연필이 아니라 연
필에서 빼낸 흑연의 수집품. 꼭대기가 약간 쪼개진 무의미한 대나무 막대
기가 하나, 이것이 범죄도구인지도 모르죠. 그저 범죄 그 자체가 없을 뿐
입니다. 그 밖에 있는 것이라고는 아마 중세기부터 오길뷔가에 보관되었
던 옛날 미사책 몇 권하고 가톨릭종교화 정도예요 - 그것도 그들의 가문
에 대한 자랑이 청교주의보다 강했기 때문일테지요. 우리가 이런 것도 박
물관에 넣은 까닭은 이상하게 찢기고 상한데가 있기 때문입니다."
브라운 신부가 이 조그만 그림이 들어있는 책을 조사하려고 집어 들었을 때
바깥이 세찬 비바람이 시꺼먼 구름을 글렌가일 성 상공으로 몰아와서 이 긴
방을 컴컴하게 했다. 그는 미처 구름 그림자가 지나가기도 전에 입을 열었
다.
"클레이븐씨!" 하고 그는 열살이나 젊어진 듯 한 목소리로 말했다. "무덤
을 조사할 수 있는 정식영장을 가졌겠지요?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
이 무시무시한 사건의 밑바닥에 도달하게 되는 거죠. 내가 당신이라면 지
금 당장이라도 시작하겠소."
"당장이요?" 놀란 형사가 되물었다. "왜 지금 당장입니까?"
"중대하니까 그렇죠." 하고 신부가 대답했다. "이건 백가지 이유라도 주
워댈 수 있는 쪼개진 막대기라든가 흩어진 돌 따위의 문제가 아니오. 이
러한 일이 행해졌다는 것을 내가 아는 이유는 단하나 뿐이고 그 이유는
이 세상 밑뿌리까지 닿는 것이오. 이 종교화들은 그저 더럽혀지거나 찢기
거나 긁혀있느넥 아니오 - 그런 짓이야 아이들도 할 수 있고 신교도들의
장난이나 편견이라고 할 수도 있지. 그러나 이건 아주 조심스럽게 그리고
기묘하게 다루어졌단 말이오. 구식 채식을 해서 하느님의 이름을 적은 큰
장식문자는 빼놓지 않고 얌전하게 오려냈거든. 그 밖에 떼어낸 부분은 아
기 그리스도의 머리 둘레에 있던 후광뿐. 그렇개 때문에 우리는 연장과
삽과 도끼를 가지고 올라가서 그 관을 열어보자는 거요."
"그게 대관절 무슨 뜻입니까?" 하고 런던 출신의 관리가 물었다.
"뜻이란!"하고 왜소한 신부는 시끄러운 바람 소리에 약간 높아진 음성으
로 대답했다. "뜻이란 바로 이 순간에 백 마리의 코끼리만큼이나 거대한
우주의 악마가 이 성 꼭대기에 버티고 앉아서 묵시록처럼 부르짖고 있을
지도 모른다는 말이오. 이 문제의 밑바닥 어딘가에는 마법이 있는 것이
오."
"마법이라!" 플램보가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그는 이해가 빠른 사람이
라 그만한 것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밖의 것은 무슨 뜻이 있나요?"
"아아, 무슨 괴상망칙한 것일테지." 하고 브라운 신부는 안타까운 듯이
말했다.
"내가 알게 뭐야? 지옥의 미로를 어떻게 낱낱이 추측하겠나? 아마 코담배
와 대막대기로 고문도구를 만들 수 있는지도 모르지. 미치광이는 양초와
강철부스러기를 탐내는지도 모르고, 흑연연필로 미치게 하는 무슨 약을
만드는지도 모르지. 신비에 도달하는 지름길은 산 위 무덤으로 가보는거
야."
2/2
그의 친구들은 밤바람이 그들을 거의 뜰에 쓰러뜨릴 듯이 후려칠 때에야 신
부의 명령을 따라 그의 뒤를 쫓아가고 있음을 알았다. 하여간 그들은 자동
인형처럼 그에게 복종했던 것이다. 클레이븐은 손에 도끼를 들고 호주머니
에 영장을 준비하고 있었고 플램보는 그 괴상한 정원사의 무거운 삽을 메고
있었다. 브라운 신부는 하느님의 이름을 도려낸 그 작은 도금한 책을 들고
있었다.
언덕을 올라 묘지로 가는 길은 구불구불했으나 거리는 짧았다. 단지 바람이
세차서 힘이 들었고 멀어 보였다. 그들이 비탈길을 자꾸만 올라감에 딸라
눈길이 미치는 소나무바다너머 또 소나무 바다가 있었고 지금은 바람을 받
아 모두 한 쪽으로 쏠려있었다. 그 한결같은 몸짓들이 마치 바람이 사람도
살지않고 목적도 없는 유성을 윙윙거리며 불어가는 것처럼 광막하고도 공허
해보였다. 그 끝없는 푸르스름한 숲 전체를 통해서 모든 이교적인 것의 핵
심에 있는 태고의 슬픔을 날카롭고 소리 높이 노래하고 있었다. 헤아릴 수
없는 잎으로 이루어진 하계에서 들여오는 이런 소리는 길을 잃고 헤매는 이
교신들, 어리석음의 숲속으로 떠돌아갔다가 천국에 돌아가는 길을 영원히
찾지 못할 이교신들의 비명이라고도 생각되었다.
"그런데 말이야" 하고 브라운 신부가 나지막하면서도 가벼운 음성으로 말
했다. "스코틀랜드가 존재하기 이전의 스코틀랜드인은 기묘한 민족이었지
, 사실은 지금도 기묘한 민족이지만. 그러나 유사이전에는 그들이 정말
악마를 숭배했는지도 몰라. 그래서!" 하고 그는 부드럽게 덧붙였다. "금
방 청교주의 신학에 달라붙었던거야."
"이것봐요." 하고 플램보가 화가 난듯이 돌아봤다. "그놈의 코담배는 어
떻게 된겁니까?"
"이것봐요." 하고 브라운 신부도 못지않은 진지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
모든 진정한 종교에는 한가지 특징이 있는데 그건 물질주의야. 그러니까
악마숭배는 완전히 진짜 종교라고 할 수 있지."
그들은 언덕의 풀이 나 있는 꼭대기까지 올라왔다. 소나무 숲이 서로 부딪
히고 윙윙거리는 곳을 벗어난 몇 군데 빈터의 하나였다. 일부는 판자로 되
고 일부는 철사로 둘러친 조잡한 울타리가 바람에 덜커덩거리는 것으로 보
아 묘지경계에 이른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클레이븐 경감이 무덤 언저
리로 올라오고 플램보가 삽날을 땅에 박고 거기 몸을 기댔을 때 그들은 둘
다 마치 흔들리는 판자나 철사처럼 몸을 가누지 못했다. 무덤 발치에는 크
로 키가 큰 엉겅퀴가 서 있었는데 이제는 말라서 은회색이었다. 엉겅퀴 솜
털이 바람에 날려서 한 두번 클레이븐 곁을 날아가자 그는 화살이라도 날아
오는 것처럼 약간 움찔했다.
플램보는 바람소리를 내는 풀 사이로 젖은 진흙땅에 삽날을 박았다. 그리고
는 손을 멈추고 삽을 지팡이 삼아 몸을 기대고 있는 것 같았다.
"계속하라구." 하고 신부가 퍽 부드럽게 말했다. "우리는 진실을 발견하려
는 것 뿐이야, 뭐가 두려운가?"
"진실을 발견하는 것이 두렵군요." 하고 플램보가 말했다.
런던출신 형사가 갑자기 잡담으로라도 기분을 유쾌하게 하려는 듯이 대꼬챙
이 같은 소리를 질렀다.
"그 사람 정말 왜 그렇게 숨어살았을까? 무슨 고약한 이유가 있을거야,
문둥이였을까?"
"그보다 더 나쁜일일 거야." 하고 플램보가 말했다.
"문둥이보다 나쁘다면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하고 상대편이 물었다.
"생각안해." 하고 플램보가 대답했다.
그는 무시무시한 몇 분동안을 소리없이 땅을 파다가 목에 뭐가 걸린 것 같
은 음성으로 말했다.
"제대로 모양을 갖추고 있지 않을까봐 겁이 나는군."
"그 종이조각도 제대로의 모양이 아니었잖은가." 하고 브라운 신부가 조
용히 말했다. " 그 종이조각을 보고도 우리는 살아남았는걸 뭐."
플램보는 맹목적인 힘으로 파내려 갔다. 그러나 연기처럼 언덕에 매달려 감
도는 질식할 듯한 회색 구름을 바람이 몰아가고 어슴푸레 별빛이 비친 희끄
무레한 들판이 드러났을 때쯤 그도 조잡한 나무 관 모양을 들어낼 수 있었
고 하여간 잔디 위에 끌어올려 놓았다. 클레이븐이 도끼를 들고 한 발 다가
섰다. 엉겅퀴 끝이 얼굴을 스치자 그는 움찔했다. 그러나 그는 두 다리를
꽉 버티고 서서 플램보 못지않은 정력으로 도끼질을 하고 비틀어 올리고 해
서 관뚜껑을 쪼갰고 이제는 관속에 든 물건이 희미한 불빛에 드러났다.
"시체야." 하고는 마치 예상했던 것과 다르다는 듯이 클레이븐이 덧붙였
다. "그러나 사람송장이군."
"이상한 데는 없나?" 하고 플램보가 억양이 묘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런 것 같네." 하고 경관은 질린 목소리로 대답하고 관안에 든 썩어가
는 해골 위로 몸을 숙였다.
"잠깐 기다려." 플램보의 거대한 몸집이 크게 숨을 내쉬었다. "지금 생각
해 보면 제대로의 모양을 하고 있지 않을 까닭도 없잖아?" 하고 그는 큰
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처량하고 춥기만 한 산위에서는 뭐가 사람을 홀리는 모양이지?
시커멓고 무의미한 되풀이가 홀리는지도 몰라. 이 숲들, 그리고 태고적부
터의 무의식적 공포감, 무신론자의 꿈같은거야. 소나무에 이은 소나무에
수백만의 또 소나무 -"
"이런!" 하고 관 옆에 있던 자가 소리를 질렀다. "머리가 없어!"
두 사람은 몸이 빳빳해 진 채 서 있는데 신부가 처음으로 놀란 듯한 관심을
보였다.
"머리가 없다!" 그는 같은 말을 되풀이했다. "머리가 없어!" 마치 시체의
다른 부분이 없을 것으로 기대했던 것 같은 말투였다.
글렌가일 성에 태어난 머리 없는 어린 아이, 성속에 숨어사는 머리 없는 청
년, 그 오랜 저택과 호화로운 정원을 거니는 머리 없는 어른의, 백치와 같
은 환상이 파노라마처럼 그들의 머리는 스쳐갔다. 그러나 그렇게 경직되어
있는 순간에도 그런 이야기는 뿌리를 박지 못했고 황당무계한 것 같았다.
그들은 지쳐빠진 동물처럼 소리높은 바람과 하늘이 윙윙거리는 소리를 들으
면서 아주 멍청하게 서 있을 뿐이었다. 생각이란 갑자기 그들이 따라가지
못하는 곳으로 빠져나가버린 무슨 거대한 존재인것만 같았다.
"이 파헤친 무덤가에 머리 없는 사람 셋이 서 있군." 하고 브라운 신부가
말했다.
런던 출신의 얼굴이 창백한 형사가 무슨 말을 하려고 입을 열었으나 촌뜨기
처럼 입을 연 채로 아무말도 못하고 있었고 바람이 길게 하늘을 울리며 지
나갔다. 그제서야 그는 손에 들고 있는 도끼를 자신이 들고 있지 않았던 것
처럼 내려다보며 땅에 떨어뜨렸다.
"신부님." 하고 플램보가 여간해서는 쓰지 않는 무거운, 어린아이같은 목
소리로 말했다. "이젠 어떻게 하지요?"
신부의 대답은 총을 발사하듯 오래 참았다는 듯이 튀어나왔다.
"잠이야!" 하고 브라운 신부는 소리쳤다. "잠. 우리는 막다른 골목까지
온거야. 수면이란 어떤 것인지 아는가? 잠을 자는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
을 믿는다는 사실을 아는가? 잠은 성찬이야. 그건 신앙의 행동이고 음식
이니까. 그런데 우리는 자연의 성찬에 불과한 것이라도 성찬을 필요로 해
. 인간에게 좀처럼 떨어지지 않는 무엇인가가 우리에게 떨어진거야. 아마
떨어질 수 있는 최악의 것인지도 모르지."
클레이븐의 벌려졌던 입술이 닫히면서 중얼거렸다.
"무슨 말씀이신가요?"
신부는 성쪽으로 고개를 돌린채 대답했다.
"우리는 진실을 발견했소. 그런데 그 진실이 무의미하단 말이오."
그는 두 사람의 앞장을 서서 별로 그에게서 본 적이 없는 뛰어드는 듯한 무
모한 걸음걸이로 걸어내려갔다. 그들이 성에 도착하자 그는 마치 개처럼 간
단히 잠들어버렸다.
브라운 신부는 신비스러울만큼 잠을 예찬했음에도 불구하고 말 없는 정원사
말고는 누구보다도 일찍 일어났다. 그리고는 큰 파이프를 피우면서, 채소밭
에서 말없이 일을 하고 있는 그 익숙한 일꾼을 지켜보고 있었다. 동이 트면
서 그렇게 수선스럽던 바람은 한 줄기 세찬 비로 끝을 맺고 이상스러울 만
큼 신선한 아침이 되었다. 정원사는 신부와 이야기도했던 모양인데 형사가
나타나자 시무룩해져서 삽을 밭에 꽂아두고 아침 식사가 어떠니 하면서 배
추밭 골을 넘어 주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쓸모있는 친구야, 저 사람." 하고 브라운 신부가 말했다.
"감자는 놀랄만큼 솜씨있게 캐내거든. 그렇지만!" 하고 그는 냉정한 자비
심을 베풀듯 덧붙였다. "그에게도 결점은 있지. 결점없는 사람이 어디 있
어? 이 부분은 그다지 고루 파내지 않는단 말이야. 가령 여기!" 그는 갑
자기 한 지점을 발로 굴렀다. "그 감자가 도무지 의심스러운데?"
"왜 그렇지요?" 하고 클레이븐은 신부의 취미를 재미있어 하면서 물었다.
"늙은 가우 자신이 의심을 가졌기때문에 나도 의심을 가져보는 것이오."
"그는 여기만 제외하고는 샅샅이 삽을 넣어보더란 말이오. 바로 여기 굉
장한 감자가 있음에 틀림없소."
플램보가 삽을 뽑아서 힘있게 그곳을 찔렀다. 그는 한덩이 흙밑에서 무엇인
지 감자같지는 않고 괴상한 머리만 큰 버섯같은 물건을 파올렸다. 그러나
삽이 닿자 그 물건을 짤깍하는 싸늘한 소리를 내면서 딩굴었고 그것이 히죽
이 웃는 얼굴로 그들을 올려다 보았다.
"글렌가일 백작이오." 브라운 신부는 침울하게 말하고 그 해골을 침통한
표정으로 내려다 보았다. 이윽고 한동안 명상에 잠긴 다음에 그는 플램보
손에서 삽을 빼앗아들고 " 다시 묻어줘야 해." 하면서 해골을 흙 속에 묻
었다. 그리고 난후에는 그의 작은 몸집과 큰 머리를 땅에 꽃힌 커다란 삽
손잡이에 기대고 서 있었는데 그의 두눈은 공허하고 이마에는 주름살이
가득했다.
"이 마지막 괴물이 갖는 의미를 알 수만 있다면......" 하고 그는 중얼거
렸다. 그리고는 마치 교회에서 하듯 커다란 삽 손잡이에 기대고 얼굴을
두 손에 묻었다.
하늘은 구석구석까지 푸르고 은빛으로 빛나려하고 있었다. 뜰의 작은 나무
에서는 참새가 지저귀는데 너무 시끄러워서 나무들이 저마다 떠드는 것 같
았다. 그러나 세 사람은 묵묵히 서 있었다.
"자아, 난 전부 포기했어." 하고 마침내 플램보가 떠들썩하게 입을 열었
다. "내 두뇌하고 이 세상하고는 서로 안 맞는 모양이고 이제는 끝장났어
. 코담배, 망가진 기도서, 자동악기 내부기계 - 또 뭔가 -"
브라운이 침울한 이마를 들고 그로서는 보기드물게 안타까운 듯이 삽 손잡
이를 톡톡 쳤다.
"아아, 쯧, 쯧, 쯧!" 하고 그는 혀를 찼다.
"그거야 명명백백하지. 난 오늘 아침에 눈을 뜨면서 그 코담배니 용수철
등에 관해서는 알았어. 그때부터 정원사인 늙은 가우하고 철저하게 이야
기도 했지. 그는 겉보기와는 달리 그렇게 심한 귀머거리도 아니고 바보도
아니야. 그 흩어진 물건들은 조금도 이상할 게 없어. 찢긴 기도책에 관해
서도 난 잘못 생각하고 있었단말이야. 별로 악의가 있어서 한 짓은 아니
지. 그러나 이 마지막 문제 말야. 무덤을 헤치고 시체의 머리를 훔친다 -
여기에는 확실히 악의가 있겠지? 그것만은 코담배와 양초로 된 간단한 이
야기에는 맞지 않거든."
이렇게 말하고는 그는 생각에 잠긴 채 담배를 피우면서 다시 왔다갔다 했
다.
"이것봐요." 하고 플램보가 심술이 난 듯이 말했다. "내가 전에는 범죄자
였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내 말에 주의해 주셔야겠어요. 그 직업의 위대한
장접은 언제나 나 자신이 각본을 꾸며가지고 내 마음대로 얼마든지 빨리
행동에 옮기는 데 있답니다. 이렇게 무작정 기다리기만 하는 탐정일은 나
같은 프랑스인의 인내심으로는 감당하기 어렵군요. 나는 일평생 좋든 나
쁘든 순식간에 일을 해치우는 성미에요. 결투도 바로 그 다음날 아침에
해치웠고 돈을 지불할때는 언제나 현금입니다. 치과에 가는 것 까지도 결
코 - "
브라운 신부의 파이프가 입에서 떨어져 자갈길에서 세 동강이 났다. 그는
눈알을 굴리며 서 있었는데 꼭 바보가 된 것 같은 표정이었다.
"이런, 이런 바보가 있나!" 그는 자꾸만 되뇌었다. "이런 바보가 있나!"
그러고는 몸을 흔들면서 껄껄거리고 웃기 시작했다.
"치과라!" 하고 그는 되풀이 했다. "여섯시간을 정신적 미로에서 헤맨 것
이 치과 생각을 못했기 때문이라니! 그렇게 간단하고, 그렇게 아름답고
그렇게 평화로운 생각을! 친구들, 우리는 지옥에서 하룻밤을 보냈으나 이
제는 해가 떴어. 참새들이 지저귀고 치과의사의 찬란한 자태가 세상을 위
로하고 있단말이야."
"종교 재판에서 하던 고문이라도 해야 무슨 말인지 알아듣겠군." 하고 플
램보가 성큼성큼 걸어나왔다.
브라운 신부는 지금은 햇빛이 찬란한 잔디밭에서 춤이라도 추고 싶은 일시
적 감성을 간신히 누르는 듯 어린아이처럼 가련한 소리를 질렀다.
"아아, 내가 약간 바보짓을 하게 내버려 두라구. 내가 그동안 얼마나 기
분이 우울했는지 당신들은 모를거야. 그런데 이제는 이 사건에 전혀 깊은
죄가 없다는 것을 알았어. 약간의 광기뿐이라고 하겠는데 - 그런 것쯤이
야 아무래도 좋잖아?"
그는 또 한번 빙그르르 돌고나서 엄숙한 얼굴로 그들을 대하고 섰다.
"이건 범죄담이 아니야." 하고 그는 말했다.
"오히려 괴상하고도 비뚤어진 정직성의 이야기지. 우리는 이 세상에 아마
단 하나밖에 없는, 자기 몫만 가지는 사람을 다루고 있는거야. 이 사건
은 이 민족의 종교이기도 했던 야만적 생활의 논리에 관한 하나의 연구
라고 할 수 있지. 글렌가일가에 관한 옛부터 전해지는 민요<여름철 나무
에 푸른 물이 돌듯 오길뷔집안엔 붉은 황금이 도네>라는게 암유적이기도
하지만 문자그대로의 의미도 있었던 거야. 그건 글렌가일 일가가 재산을
모으려고 했다는 의미뿐만 아니라 문자 그대로 황금을 모았다는 사실이거
든. 그들은 황금으로 된 장식품과 기구의 거대한 수집품을 소장하고 있었
던 거야. 사실 그들은 광적으로 그런 취미를 가졌던 인색가들이었지. 이
런 사실에 비춰서 우리가 성안에서 발견한 모든 물건을 생각해 보라구.
황금세팅이 없는 다이아몬드, 황금촛대가 없는 양초, 황금담뱃갑이 없는
코담배, 황금연필대가 없는 연필심, 황금손잡이가 없는 지팡이, 황금괘
종 -또는 팔목시계가 없는 용수철과 톱니바퀴, 그리고 미치광이의 소리
처럼 들리겠지만 미사기도서의 후광과 하느님 이름은 순금이거든. 이 모
든 것이 제거되었던거야."
이런 광적인 진실이 말해짐에 따라 뜰은 빛나는 듯 했고 풀은 더욱 찬란해
지는 태양밑에서 한결 신선해지는 것 같았다. 신부는 이야기를 계속하고 플
램보는 담배에 불을 붙였
다.
"제거된거야." 하고 브라운 신부는 계속했다. "제거된거지 -훔쳐간 것은
아니야. 도둑이라면 결코 이런 신비를 남겨두지 않지. 도둑은 코담배가
든 채로 황금담뱃갑을 가져가고 황금연필대도 연필심째 가져가겠지. 우리
는 독특한 양심 - 그러나 양심임에는 틀림없는 -을 가진 사람을 다루고
있는거야. 나는 오늘 아침에 저 건너 채소밭에서 그 광적인 도덕가를 만
났지. 그래서 모든 이야기를 들었어.
고(故) 아치볼트 오길뷔는 글렌가일 성에서 태어난 사람중에서는 가장 선
인에 가까운 사람이었어. 그러나 그의 엄격한 도덕심은 염세적 경향을 띠
게 되어서 자기 선조들의 부정직을 곰곰히 생각한 나머지 어떻게 된 것인
지는 모든 사람은 부정직하다는 일반론에 도달했던 모양이야. 더구나 그
는 박애정신이라든지 적선을 불신했거든. 그래서 그는 누구든지 정당하게
자기가 권리있는 것만을 취하는 사람을 발견하면 글렌가일 성안에 있는
모든 황금을 그에게 주리라고 맹세했지. 이렇게 인간성에 대한 도전을 해
놓고 그런 일이 있으리라는 기대는 조금도 하지않고 두문불출했지. 그러
나 하루는 멀리 떨어진 마을에서 귀머거리에다 바보같아 보이는 자가 밤
늦게 전보를 가지고 왔는데 글렌가일은 그다운 비웃은 기분에서 그에게
새돈으로 1파싱을 주었던 거야. 적어도 그랬다고 생각을 한 거지. 그런데
나중에 잔돈을 조사해보니까 동전은 그대로 있고 금화하나가 없어진 것을
발견했지. 이 사건은 그에게 조소섞
인 예상을 하도록 했어. 어쨌든 그 청
년은 인간이라는 종족의 탐욕을 나타낼 것이다. 돈을 가진채 자취를 감춰
서 도둑이 되거나 착한 척하고 그것을 가지고 돌아와서 보수를 바랄것이
다 - 이런 생각을 했지. 그날 밤중에 글렌가일경은 문 두드리는 소리에
자리에서 일어났는데 - 그는 혼자 살았으니까 - 그 귀머거리 바보를 위해
서 문을 열어줄 수 밖에 없었지. 그 바보는 아까 그 금화가 아니라 정확
하게 19실링 2펜스 3파싱의 거스름돈을 가지고 왔던거야.
그러자 이 행동의 광적인 정확성이 미치광이 성주의 머리를 불길처럼 사
로잡았던 거야. 그는 자기가 디오게네스처럼 오랫동안 정직한 자를 찾았
는데 마침내 발견했다고 단언했어. 그래서 새로 유언장을 만들었는데 그
걸 내가 읽어봤어. 그는 이 고지식한 젊은이를 데리고 와서 그의 유일한
하인겸 -괴상한 방법에 의해서만 - 상속인으로 훈련했지. 이 괴상한 젊은
이는 얼마나 이해력이 있는지 모르지만 자기 주인의 두가지 고정관념만은
이해할 수 있었는데 그건 첫째, 유언장의 권리는 절대적이라는 것, 둘째
자기가 글렌가일성의 모든 황금을 갖도록 되어있다는 거였어. 여기까지는
그것으로 충분하고 극히 간단하단 말이야. 그는 이 집의 모든 황금을 가
졌으나 금이 아닌 것은 하나도 갖지 않았어. 코담배 한 줌도 안 가졌단
말이야. 옛날 기도서에서도 황금이 있는 면에서만은 금을 오려냈지만 나
머지 부분은 손을 안 댔거든. 그건 다 알
수 있었는데 그 시체 머리만은
이해할 수가 없었어. 감자 밭에 묻힌 사람 머리만은 정말 골치거리였어.
고민중인데 - 플램보가 그 말을 해주더란 말이야. 아무일도 없을거야.
이빨에서 금니를 빼고 나면 머리는 무덤에 갖다 묻을테지."
정말 그날 아침에 플램보가 언덕을 지나가자니까 그 괴상한 인물, 정직한
수전로가 산바람에 목에 두른 망토를 나부끼면서 머리에는 근엄한 실크햇
을 쓴 채 파헤쳐진 무덤을 파고 있는 것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