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 모든 법[종자.사람.물질.품성...]의 나타남에 시작이 있다면 끝이 있을것이다.
그러한 시작은 끝없이 같은 종자,같은 사람,같은 짐승,같은 품성,같은 물질을 끝없이 생성 시킬것이다.
끝없이 생성 시킨다면 그러한 주체자와 장소가 있어야 할것이고 생성하는 시차도 있어야 할것이다.
시작을 했으나 끝이 없으니 도깨비의 홀림에 속아 넘어간 꼴이다.
이러한것은 조금만 사유해도 이치에 맞지 않음을 알수 있습니다.
태초의 시작이 없고 마침이 없으니 중간도 설수 없습니다.
시점과 종점이 없는데 어느곳을 기준삼아 중간이라 할수 있을까요.
만약에 원인[태초]이 되는 무언가가 있다면, 그 결과[종말]는 그 원인에 의해서 정해졌을 것이고,
그렇게 정해진 결과에 의해서 다시 정해진 원인이 될것이니 항상 상주하게 되는 모순을 낳습니다.
무언가 업[業]이 있어서 보[報]가 되어 다시 업을 낳는다면,
그러한 업보는 끝없이 변하지 않고 상주하며, 하나의 객체가 되는 절대성을 가지게 될것이니
우리의 눈에 이토록 변화무쌍하는 색계는 존재할수 없습니다.
만약에 원인이나 업이 없다면 있음과 없음이 애당초부터 없으니 논하는 자체도 성립할수 없습니다.
그러한고로 이세상 모든 유위의 법들은 색으로 보일수가 없으며, 무엇하나 존재할수도 없습니다.
모든 법은 절대 공 입니다.
절대 공의 세계는 글자 그대로 절대 공 입니다.
색도 없으며,소리도 없으며,감촉도 없으며,맛도 없으며,냄새도 없으며,마음지음도 없습니다.
유리컵도 없으며,담배도 없으며,술도 없으며,낙지도 없으며,꽃게도 없습니다.
부귀도 없으며,빈천도 없으며,고하도 없으며,좌우도 없습니다.
모든것이 없으며, 없다는 그것도 없으니 그야말로 절대 공 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이 유위의 법을 나투게 되었을까요.
바로 중도의 성품 입니다.[중도의 성품을 따로 잡으면 어긋납니다.]
무수무량한 절대 공한 성품이 차별된 개별 인연따라 연기되어 무명의 허깨비가 허공꽃처럼 피어납니다. 그러한 허깨비가 지금의 마음 입니다.
제법의 성품이 포섭하고 포섭당하지 않으며[뭉친듯 뭉쳐있지 않음]
간섭하고 간섭당하지 않으며[어떤 성질을 지닌듯 하지만 변하지 않는 절대성이 없음]
물거품처럼 일어나서 물거품처럼 사라지고 연기처럼 일어났다 흩어집니다.
포섭하고 포섭당하며,간섭하고 간섭 당한다는것은 ,
포섭하되 포섭하지 않고 간섭당하되 간섭당하지 않기에 포섭하고 간섭한다 함입니다.
그렇게 차별적으로 변해가며 연기되는 인연의 흐름에 뜬구름처럼 일어나는것이 바로 마음 입니다.
대상[경계]이 마음과 동시에 일어나니 경계가 사라지면 마음도 사라집니다.
그러한 허깨비 마음이 오근을 인연하여 생각을 지어내기에 일체유심조라 말합니다.
제법의 인식은 오근[五根]이 오경[五境]을 인연함으로 비롯 합니다.
중요한것은,
제법을 인식하는 자아가 있느냐 하는 문제 입니다.[변하지 성품]
세존께서 실유[實有]의 자아가 있느냐는 물음에 답을 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러한 이유는 가유[假有]의 자아 마저도 부정하게 될까봐 우려하심 때문 입니다.
또한 가유의 자아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설하지 않은것은,
배움이 이르지 못한 학인의 선근 마저 끊어버릴까 걱정하심 입니다.
또한 가유의 자아가 존재한다고 설하지 않은뜻은.
배움이 극에 이르지 못한 학인에게 참된 공의[眞空] 이치에 이르길을 빼앗을까 염려하였기 때문입니다.
만약 누군가 실유의 변하지 않는 자아를 마음속으로 상정하여,
이것이 옳으니 저것은 그르니 하는것은, 토끼의 뿔을 놓고 길은가 짧은가 하고
싸우는 것이나 다를바 없습니다.
마치 거북의 털을 참빗으로 빗어야 좋은가,긁개로 빗어야 좋은가 하고
생각하는것과 다름 없습니다.
실유의 자아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영혼이 영원히 존재하며 영생을 누리거나,
다른 몸으로 전이되어 변치않는 "나"로 환생하는가 하는 의문들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러한 마음을 가진 의문이나 물음은 이미 토끼뿔과 거북털을 가지고 사량하는
어리석음에 불과 합니다.
그러한 물음에 답하지 아니한뜻은 위와같이 묻는이의 근기를 살피고 알아서
자재한 방편으로 대신 하엿습니다.
절대계의 적멸한 空性은 영원한 불변의 진리 입니다.
차별계를 이룸에 있어서의 진리는 무엇 인가요.
차별계의 성품이 절대 공인 성품 입니다.
차별계 지금 그대로 영원무궁 절대 공하다는 이야기 입니다.
삼계삼세를 뒤집어보아도 절대공의 성품 그대로 입니다.
그렇다면 지금 이시간도 수연성 하는 색[공]의 성품은 무엇 일까요.
무량겁을 수연하며 성주괴공하는 차별계의 세계가 펼쳐지니,
비롯하여 환 같은 마음이 일어나고 그 마음이 꼬리를 물고 오근을 만나 오경을 접합니다.
다섯가지의 감각기관이 다섯가지의 경계를 수연 할때마다 오근이 작용하여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기를 그치지 않습니다.
그렇게 맞아들이는 경계가 6근이며 수연한것이 6식 입니다.
잠이 들면 기억된 육근의 이미지를 기초로 하여 육식[678식]이 나래를 폅니다.
육칠식이 나투면 개꿈처럼 혼몽을 꾸며,칠팔식이 나투면 선명한 이미지를 남기기도 합니다.
무색계의 인연은 상상조차 할수없으니 선몽을 꾸기도 하고 예지를 보이기도 합니다.
이렇게 무명의 한 생각이 기초를 이루어 삼계의 끝없는 탑을 쌓아가니 바로 그것이 화엄법계 입니다.
본각이 적멸한 공의 성품이니 역시 나투인 모든것도 공함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근본 종자가 공성인데 어찌 열매가 공하지 않겠습니까.
우리가 사는 세상은 백년도 못됩니다.
공한 성품이 차별을 나타내어 백년이라는 시간을 만들어 냈습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시간 관념도 근본적으로 잡을수가 없습니다.
종자의 시간을 잡을수 없듯이 열매의 시간 또한 세우지 못합니다.
하지만 우리는 버젓이 시간을 세우고 날짜를 세웠습니다.
그러한 시간속에 공간을 세우고 제각각 나투입니다.
유정 무정 모두가 제 각각의 형상을 취하고 끊임없이 다른 모습으로 변해 갑니다.
이러한 현상계가 바로 무량겁을 이어온 업력의 과보 입니다.
그러한 과보는 알수없는 인연을 따라서 차별을 나투어 변하며 수연해 갑니다.
그렇게 수연한 과보는 무량수의 화신불이 될것인즉 알길이 없습니다.
현재를 잡을수 있다면 과거를 거슬러 올라 알수있고, 미래를 미리 탐색하여 알것이지만
기준되는 현재를 잡을수가 없습니다.
그러하기에 현재가 있다는 견해는 옳지 않습니다.
찰라찰라 닥쳐오는 현금[現今]이 있으니 미래가 있습니다.
시시각각 다가오는 현재지금이 있으니 지나간 과거도 있음 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가 없다는 견해도 옳지 않습니다.[간략하여 유무 양단의 견해만 밝힘]
이러한 경계에 안주함은 모두가 분별된 마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중도는 무분별지이자 무차별지 입니다.
위의 두가지 견해를 여읜 마음으로 보는것을 중도로 본다고 합니다.
부처님과 조사들께서 "있다, 없다,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있지도 없지도 않다,"[사구]는 등의 잘못된 견해를 밝힌 이유는 모두가 중도의 옳바른 견해를 밝혀서 마음으로 증득하라는 뜻 입니다.
연기의 이치는 아주 단순하고 명쾌하면서도,파고들면 깊고 깊어서 헤아리기 조차 힘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전문적인 논객의 직업을 가진사람이나 입씨름하며 할 일 입니다.
세속과 함께하며 삶을 영위하는 일반의 공부인은 일도양단하듯 단칼에 베어버리면 그만 입니다.
내 앞에 요금 고지서가 한장 있습니다.
아마도 지구상 어느곳의 흙에서 물을 머금고 햇빛을 받아가며 공기중의 많은 원소들과
교류작용을 하였을 것입니다.
그러다가 어느날 톱날의 인연에 의해서 베어져 제지공장으로 들어와 죽처럼 갈아진후
표백작업을 거쳐서 종이로 변하였을 것입니다.
그런후 인쇄소로 운반되어 잉크로 인쇄되어 내 눈 앞으로 까지 왔습니다.
수없이 윤전되어 다시 재활용 되기도 할것이며 또는 태워지기도 할것이며 일부는 닳아서 허공처럼 될 것입니다.
생명력이 없는 물질의 성품이 무량무변하게 차별로[다름] 흐르며 변하여 갑니다.
그러다가 생명력있는 인연과 인연하게 되면, 그러한 인연과 상응하고 차별적으로 변하면서
유정의 인연 과[果]를 맺기도 합니다.
때로는 한량없는 시간을 무정의 과[果]로서 유전하기도 합니다.
찰라의 과를 맺은 성품은 다시금 과가 인[因]이 되어 한량없이 흐르게 됩니다.
이러한 인의 성품과 과의 성품이 둘이 아닌 하나도 아닌 모습으로 인과를 상속하며
서로 차별을 나투고 유전하여 변해 갑니다.
여기에 유리컵이 있습니다.
눈으로 보기에는 항상 그대로를 유지하는것 같습니다.
하지만 겁의 세월을 거친후 유리컵을 바라보면 흔적도 없이 허공으로 사라졌을 것입니다.
눈앞에 있는 유리컵의 내면을 들여다 봅니다.
유리컵에는 셀수도 없고 알수도 없는 수많은 성품이 무더기를 이루고 있습니다.
유리컵은 임시로 만든 가명이지 상존할수 없는 이름 입니다.
과연 유리컵은 어떤 상태로 존재하길래 긴시간을 그렇게 뭉쳐 있을까요.
만약 유리컵 안의 수많은 성품이 인연따라 화합하여 뭉쳤다고 한다면,[像見]
이 유리컵은 영원무궁하게 변하지 않아야 하며 "영원히 변하지 않는 自性"을 가지게 되었을것 입니다.
만약 유리컵 안의 수많은 성품이 인연따라 뭉치지 않았다고 한다면,[斷見]
눈앞에 있는 유리컵은 이미 볼수도 없을것이며 유리컵이라는 가명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그런 연유로 위의 두가지 견해에 집착하면 시방법계는 눈앞에 현전할수 없음 입니다.
위와같이 양변에 집착함이 없이 보는것을 중도의 눈으로 본다고 하는 것입니다.
첫댓글 돗때기 시장바닥 처럼 왁자지껄 떠들썩 해야 구경하는 사람이 살맛나는거 아닌감요.! 도인처럼 궁뎅이 뒤로 빼고 꿍허니 말도 안허고 그라믄 자미가 없질않것시유.??
환(幻)을 알면 환에서 벗어나 방편을 쓰지 않는다는 것은 환에는 결정된 모습이 없어 자성이 항상 이것을 벗어나 있으니, 벗어나 있는 그 자체가 공하다는 것이다. 곧 일체 범부와 성인의 더럽고 깨끗한 온갖 법이 모두 환과 같고 공과 같은 것인데, 어찌 여기에 다시 방편을 만들어서 벗어나려 할 것인가. 환을 벗어난 것 자체가 깨달음으로, 또한 여기에 방편 점차가 없다는 것은 환을 벗어날 때에 완전한 대각을 성취했다는 것이다. 환을 벗어난 그 자체가 깨달음으로 평등하게 한 빛으로 비추어 이미 전후가 없는데, 어찌 여기에 방편 점차가 있겠는가. 『명추회요』 돌여인이 털난 거북을 타고 용궁으로 들어간 뒤에 소식이 없더라...()()()
풍각은 풍각쟁이 거사님만 울리는줄 알았더니, 제현 거사님은 풍악을 잘도 울리시는 군요...그럼 바람잡이는 바다가 해볼까요? 아니야 아니야, 야바위꾼들이라 오해받을꺼야...그쵸 ^^
환이 색이니... 그 이름이 환임을.....다시 살아야 비로소 허공속에 몸을 감출수 있으니 세번은 죽고 세번은 살아야 넉넉할것입니다..찍.! 바다님의 화두를 물엇으니 내 대신 화두좀 풀어주시우~~아고 머리 아퍼요.! 이제보니 바다가 바다가 아니고 순 풍악꾼일세나 그려~
(푸른바다님) "『명추회요』 돌여인이 털난 거북을 타고 용궁으로 들어간 뒤에 소식이 없더라..." ---> 백주백혜암야암(白晝白兮暗夜暗, 흰 대낮은 희고 어둔 밤은 어둡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