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명은 항상 제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다. 문명은 발전하지 않으면 퇴보한다. 보수우익은 항상 새 시대를 개척하여 왔다. 일찌기 우리 민족 개화의 선봉에 섰으며 조국 근대화와 산업혁명과 민족 증흥을 위해 전진하며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헌신하는 분들이 보수우익 진영에 속한다. 이와 반대로 한국 좌익은 늘 퇴보를 지향해 왔다. 좌익이 진보라고 내세우는 두가지는 반미주의와 주체사상 즉 김정일 수령 숭배주의이다. 그 어느 나라에서도 이러한 가치관들을 진보라고 여기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 좌익은 그것을 진보라고 주장해 왔다.
경제에 무지한 노무현 좌파 정권의 특징도 반미주의와 중국 공산당 사대주의이다. 노무현 정권은 자존심을 위해 미국과 헤어지고 중공 밑에 기어들어가자고 한다. 한국은 미국에 수출하여 먹고 사는 나라이다. 대미 교역 연 백 억불의 흑자가 한국을 풍요로운 나라가 되게 하였다. 미국은 박정희 대통령 시대에 한국에 아부하고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 핵심 기술을 우리나라에 갖다 바쳤다. 그러나 노무현이 미국을 떠나 중공 밑으로 기어들어가면 어떤 일이 생기는가. 중국 떼놈들은 관계 발전의 댓가로 핵심산업기술 상납을 요구할 것이다.
중국은 언제나 우리나라를 속국으로 여기고 조공을 상납해 달라고 하는 나라였다. 우리 민족이 그것을 수천년간 경험해 왔다. 그들은 언제나 조선에서 제일 좋은 것을 조공으로 바칠 것을 요구하였기에 우리나라에는 좋은 것이 남아있지 않았었다. 그러나 리영희 교수처럼 그 시절로 되돌아가는 것이 진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노사모는 개화 이전의 인식론, 즉 주관적 관념론으로 후퇴하는 것이 진보라고 주장한다. 이처럼 퇴보주의를 진보라고 여기는 이들이 있는 것은 대원군의 쇄국정치와 중국 사대주의가 본래 한국인의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근자에(2005년 4월) 윤정웅 국방장관은 한중군사동맹을 추진하고 있음을 밝힌 바 있다. 그러면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고 중공군을 불러들일 때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제철이나 중화학공업 등 박정희 대통령이 일본과 미국에서 이전해 온 핵심 기술은 조공으로 바치라고 할 것이다. 왜냐하면 지금 그 기술들을 몹시 탐내지만 일본과 미국이 이전해 주지 않기 때문에 한국에서 빼앗는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요즘 1975년의 인혁당 사건 이야기가 다시 나오지만 월남과 똑같은 공산주의와의 싸움에서 월남과 한국이 서로 딴 길로 갔던 케이스였다. 당시 월남은 아시아의 경제 부국이었으며, 그 경제 성장의 잠재력이 엄청나던 때였다. 그러에도 공산화와 민주화라는 용어가 일부 몰지각하던 이들에 의해 동의어로 사용되어 마침내 월남이 패망하고 공산화되었다. 그러나 같은 해에 한국은 빨치산 잔족 세력도 완전 토벌하고 남로당 잔존 세력과의 싸움도 매듭지어졌으며, 조국 번영과 국가발전에 전념할 수 있는 시대가 열렸다. 그러나, 1980년대에 다시 좌익의 반미 퇴보주의가 고개를 들게 된 배경에는 광주사태가 있었다.
무엇이 광주사태였던가. 광주사태는 사실 김대중의 정치 스타일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무엇이 김대중의 정치 스타일이던가. 김대중은 해방정국 때 좌익 여운형씨 밑에서 공산주의를 배운 것 외에는 민주주의를 배운 적이 없다. 그러나 일제시대 때 목포상고에서 흥정술을 배웠는지 그는 흥정의 명수였다. 김대중의 정치는 공천장사로 특징지어지는데, 대통령 되기 전에 평생을 실업자로 지냈던 그는 공천장사로 웬만한 기업인 부럽지 않은 재산가가 되었다. 그런데, 1980년에 김영삼씨가 더 인기가 많았음에도 순식간에 김대중씨기 대학가 운동권을 그의 홍위병들로 만든데도 그의 흥정술이 있었다.
이해찬 국무총리가 강원도 양양과 고성의 대형 산불이 한창인 지난 5일 오후 조영택 국무조정실장을 포함한 총리실 비서진과 함께 경기도 한 골프장에서 골프를 쳤던 것으로 드러났다고 노컷뉴스가 8일 보도했다. 그날 식목일이 무슨 날이던가. 1960년대의 우리나라 산은 나무가 없는 민둥산이었다. 그런데 박정희 대통령이 효과적으로 수목 재배 기술을 전국에 보급시켜 녹색 혁명을 일으키셨다. 그러나 박정희 죽이기를 하는 노무현 정권은 식목일에 대형산불이 일어나게 하는 실수를 저지렀을 뿐만 아니라, 산불이 한창일 때 골프에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런데, 우리가 그에게 더욱 궁굼한 것은 1980년 봄에 최규하 대통령이 직선제 선거로 정권을 인수해 달라고 호소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무엇 때문에 김대중의 쿠데타를 도왔느냐 하는 것이다.
광주사태 당시 흥정으로 인맥이 얽혀져 있었던 이들은 이해찬 등 당시 학생 운동권 뿐만 아니었다. 광주사태 당시 서남부지역 에서 나도는 말 중 하나가 광주 민중봉기가 성공하면 김대중 씨를 추종하던 사람들은 시장 군수를 할수있다는 소문이었는데, 이 소문을 뒷받침하는 것이 최규하 대통령 정부 해산 후 김대중이 임명할 내각 명단이 적힌 문서였다. 대체로 김대중은 그런 흥정 약속을 지키려고 노력하기에 전혀 신용이 없는 장사군은 아니었다. 그러나 입으로 하는 약속은 일방적으로 깨뜨리기도 한다. 김대중이 덕이 있어서 김종필씨가 1997년 대선 때 그를 지원하였는가? 아니다. 그러나 김대중은 자민련과 공동집권의 약속을 일방적으로 깨버렸다. 그후 김대중이 덕이 있어서 이인제 의원이 김대중과 손을 잡았는가? 아니다. 그러나 김대중은 이인제 의원을 대선 후보로 내세우기로 했던 약속을 일방적으로 깨버리고 노무현을 자기 후보자로 삼았다. 그러나 예비군 무기고에서 무기를 탈취하여 함부로 사격한 이들에 대하여는 그가 대통령이 된 후 철저히 보상해 주었다.
그런데, 김대중은 개인만 속인 것이 아니라, 국민과 국가도 속였다. 김대중이 김정일에게 핵무기 개발 자금으로 5억불 혹은 그 이상을 보냈을 때 그는 한국 국민을 속인 것뿐만 아니라, 미국을 속였다. 오늘날 미국이 북핵 문제 고민은 김대중이 핵무기 개발 자금을 김정일에게 보냈기 때문에 생긴 것이었다. 이렇듯 김대중은 자기를 지원해 준 미국에 대한 반미주의자였으며, 미국 입장에서는 한국에 속은 것이다. 미국은 한국인에게 외삼촌과도 같은 나라였다. 그러나 김대중이 깨기 시작한 한미관계를 노무현이 와장창 깨고 있다. 그런데, 한국 좌익 혹은 좌파 운동권의 이런 반미주의는 그 기원이 광주사태 때 한 김대중 홍위병이 퍼뜨렸던 거짓말로 거슬로 올라간다.
광주사태의 수수께끼 중 하나는 최규하 대통령 정부가 언론이 보도하지 못하게 한 비밀, 즉 미 항공모함이 내항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점이다. 당시 최규하 대통령 정부는 북한이 5월 22일 남한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일으키는 동시에 남침하려 하기에 항공모함을 급히 내항시킨다는 사실을 한국 정부에 알렸으나 정부는 가뜩이나 어려운 경제에 치명타를 줄 것을 우려해 언론사들이 그 특종 뉴스를 일체 보도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는 국민 동요및 경제지표 폭락에 따른 나라공동화상황을 모면하려 함이었다. 그런데 미정보부와 미 군당국과 한국 정부와 북한 당국과 일본 언론만 알고 있었던, 그리고 한국 국민들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던 미 항공모함의 내항 사실을 광주 시민들은 알고 있었다.
이즈음 윤상원을 비롯한 투쟁 지도부는 미국의 개입, 즉 미 항공모함의 내항, 미국의 동향에 대해서도 심각하게 논의했다. 윤상원 등 과격파는 광주 주재 미국인들의 소재를 파악하고, 그들을 체포하여 인질로 삼자고 요구하였으며, 바로 여기에 윤상원이 자생 간첩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그런데 윤상원 추종자들 중에서도 온건파는 당시의 "시민 대중들은 친 미 반공 의식에 젖어 있어 반미의 문제를 섣불리 제기하면" 광주시민의 지지를 얻기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간신히 윤상원의 외국인 납치를 막았다. 그리고 윤상원 추종자들은 그 날의 그의 위선을 기억한다. 지도자 회의 때 반미를 주장하던 윤상원이 그날 도청 궐기대회 때 "미 항공모함이 광주 해방구를 돕기 위해 부산항에 입항하였다"고 외쳤으며, 그 날 두 차례의 외신기자 회견에서 외신 기자들을 홀려 속였다.
미 제7함대, 미드웨이호는 요코스카에서 출항했으며 인민군 10만은 개성과 해주에 집결했던 상황이다. 때는 1980년 5월 17일 아침, 조선일보 일본특파원과 동경T일보의 기자간의 대화가 당시의 급박한 상황을 말해 준다:
"李특파원댁이지요? 아, 직접 나오셨군요. 토요일 아침 일찍 죄송합니다. 긴급히 확인할 일이 있어 무릅쓰고 주말 아침 일찍 전화드렸습니다. 혹시 미7함대가 한반도 근해로 긴급출동했다는 소식 못들으셨는지요?" 이 대화가 있은 후, [일본 방위청내 통합참모회의실]에 9시쯤 정보확인을 부탁한 후, 특파원은 " 확인된 내용을 보고 드리겠습니다. 요코스카의 미7함대 사령부 작전처 00대령에 따르면 항모 미드웨이와 기함블루릿지 등이 특수임무부대(Task Force)를 편성, 17일 04시 요코스카를 출항했다고 합니다."는 정보의 사실 확인을 한 후 출동목적이 "정보에 따르면 북위 38도, 동경 126도(해주)부근에 병력 10만이 집결해 있으며 지원포와 탱크 등의 배치상태로 미루어 대남공격이 임박했음을 징표하는 것이라 합니다. 미7함대의 출동은 이와 관련이 있어 보입니다만 함대사령부 측은 곧 우리 통합막료회의에 정식 통보할 것이라고 합니다."
이렇듯 미 제7함대의 부산긴급출동으로 인민무력부장 오진우를 전시사령부 총사령관으로 임명하며 때를 보던 김일성은 다시 본인 말대로 4.19이후에 남조선 혁명의 기회를 또 한 번 놓치고 땅을 치게되었다. 1975년에 월남 시민군을 이용하면 미군이 참전하지 못한다는 호지명의 이론이 적중하여 중부지방 민중봉기로 월남을 공산화시킬 수 있었다. 그러나, 김일성의 그 전략이 한국에서는 먹혀들어가지 않았다. 왜냐하면, 북한군의 남침이 시작되기 전에 미 항공모함이 출동하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당시 광주에 침투했던 북한군이 도청에 폭파 장치를 한 것은 북한군 남침시 미 항공모함을 무력화시키기 위해 광주시민을 인질로 삼으려던 작전이었던 듯하다. 그러나 용감한 계엄군이 5월 26일 도청 폭파장치 뇌관을 분리하는 작전에 성공했기 때문에 북한군의 그러한 전략도 먹혀들어가지 않았다.
이렇듯, 미 항공모함 출동으로 미국은 한국을 구했으며, 북한군이 도청에 설치한 폭파 장치를 용감한 계엄군이 제거함으로 광주 시민을 구했다. 그럼에도 당시의 미 항공모함 출동을 전혀 다른 시각으로 보는 이들이 있다. 그들은 그날 북한군이 남침을 미 항공모함이 저지한데 대한 원한을 품고 있다. 그래서, 광주 사태를 민주화 운동이라고 규정하면 북한군의 남침을 막은 미국이 악의 괴수가 되는 좌익의 반미 논리의 근거가 생긴다. 미국이 단지 제2의 한국 전쟁을 막아주었다는 이유로 이토록 반미감정이 생긴다면 이후 다시 북한군이 남침할 때 어떻게 국제사회가 우리나라를 도와줄 것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광주사태가 민주화운동이라고 주장하는 이들이 아직 한번도 그들의 민주주의 철학에 대하여 말한 적이 없다. 그러나 그들이 해마다 주장하는 반미주의의 논리는 이러하다:
1) 광주민중봉기는 미국이 한국민의 벗도, 우방도 아니며 철두철미 파쇼독재의 조종자, 살인원흉이라는 것을 보여주었다.
2) 광주시민봉기군중에 대한 무차별살육전은 미국의 지지와 명령에 따른 것이었다. 또한 항공모함 「코럴시」호와 「미드웨이」호를 비롯해 함정들과 공중경보통제기까지 남해수역에 들이밀어 전두환군사파쇼집단을 무력으로 고무해 주었다.
3) 미국의 조종과 비호아래 유신독재의 파멸후 우리 민중의 가슴속에 한껏 부풀어 올랐던 민주화의 꿈은 여지없이 짓밟혔고 전두환군사파쇼정권이 생겨나게 되었다.
4) 한국민중의 의식구조에서는 미국이 민주화의 최대의 적이며 따라서 반미자주화없이는 사회의 민주화도, 조국통일도 없다는 의식변화가 생겨났고 곳곳에서 반미열풍이 일기 시작했다.
5) 1982년 부산「미국문화원」방화투쟁은 대표적인 반미감정의 표출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반미투쟁은 오늘도 계속되고 있다. 주한미군야수들에 의한 여성살해사건들이 잇따르고 있는 현실은 반미구국투쟁을 더욱 과감히 거족적 항전으로 벌일 것을 요구하고 있다.
6) 광주에서의 미국과 전두환군사파쇼일당의 대살육만행을 돌이켜 보며 각 계층 애국민중은 살인원흉인 미국침략자들을 이 땅에서 하루빨리 몰아내기 위해 힘차게 싸워야 할 것이다.
바로 위의 여섯 가지가 좌익 운동권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바로 여기에 그 가증스러운 거짓이 있다. 당시 최규하 대통령은 김대중에게 직선제 선거로 정권을 승계하라고 호소하였다. 그러나, 선거로는 김영삼씨를 이길 승산이 없어 보이니깐 김대중이 쿠데타를 일으켰기에 직선제 대통령 선거를 할 수 있는 기회가 7년 늦어졌던 것뿐이다. 시민군 그들이 최규하 대통령 정부가 직선제 선거 관리를 못하게 방해해 놓고서 그 책임을 미국에 뒤집어 씌우는 것은 가증스러운 일이다. 광주사태가 민주화운동이라고 주장하는 원희룡 의원은 바로 이러한 의혹에 대하여 국민에게 설명해 주어야 할 것이다.
지난 달 원희룡 의원은 광주사태와 주사파는 무관한 듯 주장하였으나 그렇지 않다. 1980년대 운동권 노선은 세 갈래로 나뉘어지는바, 바로 NL, PD, CA계열이다. 이 중 NL이 주체사상계열이며, 현재 이 주사파가 열우당에서 득세하고 있다. 민족해방, 민중민주주의혁명론을 주장한 NL 그룹은 민족해방(National Liberation)을 강조한다는 점 때문에 NL로 통칭된다. 광주사태와 더불어 등장한 좌파이론으로 미국을 ‘제국주의’로, 남한 사회를 ‘미국의 식민지’로 규정하고 이에 저항해야 한다는 논리를 폈다.
이렇듯 열우당 다수 의원들의 뿌리는 주사파, 즉 NL이며, NL의 뿌리는 5월 22일 광주 광천동 한 서민아파트의 윤상원 자취방이었다. 그 엄청난 광주사태라는 산불은 이 작은 자취방에서 점화되었으며, 5월 22일 아침 미 항공모함 부산항 입항 소식과 더불어 광주의 미국인들을 인질로 체포하자는 모의가 있었으며, 광주시민들이 반미에 등을 돌릴 것 같자, 그날 도청 궐기 대회 때 "미국이 광주 시민을 도우러 항공모함을 보냈다"는 말을 했으며, 단지 계엄군의 폭동진압을 미국이 막아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반미운동을 위한 NL이 시작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열우당 다수 의원들이 과거에 몸을 담았던 주사파의 반미주의 세계관이 얼마나 과격하고 위험한지를 보았다. 그들의 논리에서 미국은 주적이요, 김정일은 미국을 내쫓아 줄 민족 해방자이다. 그들은 그 신념을 위해 투쟁해 왔으며 정권을 잡았다. 그러나, 본래 그 신념은 거짓말에 그 뿌리가 있었다. 5월 22일 도청 궐기대회 때 윤상원이 "미국이 광주시민을 돕기 위해 미 항공모함을 보냈다"는 것은 거짓말이었다. 진실은 북한군의 남침을 막기 위해 미 항공모함이 입항해 있었던 것이다. 이렇듯 주사파의 신념은 그 뿌리가 윤상원의 거짓말에 있었다. 그리고 주사파의 이런 거짓된 신념에 국민이 더 이상 침묵할 수 없음은 거짓에 뿌리를 둔 주사파 출신 정치인들의 지나친 반미 외교정책이 나라를 망국의 길에 들어서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 5.18 군인 희생자 보상 문제 챙기기로 약속하신 원희룡 의원 을 클릭하시면 광주사태를 주제로 한 지만원 박사와 원희룡 의원의 팽팽한 토론을 들으실 수 있습니다.
* 북한의 공개총살 동영상 을 클릭하시면 지난 3월 16일 N-TV에 방영된 동영상 링크가 있습니다.
http://cafe.daum.net/issue21 a
첫댓글 입으로만 진실하지 못하고 입으로만 의리없는 자들이 없다고 했읍니다 그 목적이 정권 탈취에 있었던 것입니다
http://cafe.daum.net/issue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