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고대 등산사
산은 지반의 융기, 습곡, 단층작용에 의하여 지표가 변동된 형태 중에서 높이 솟은 부분이다. 이렇게 생긴 산은 태고적 부터 인간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변모해왔다. 적어도 251만년 전 고대인들은 야수들에 대한 공포와 대자연에 저항하면서 걷기 시작한 것이 등산 운동의 시초일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등반에 대한 뚜렷한 목적의식이 없이 단순한 생존경쟁에 승리하기 위한 방편으로 산을 오르내렸을 것이다. 그 뒤 인간이 산을 오른 기록을 살펴보면 B.C. 328년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대왕이 힌두쿠시 산맥을, B.C 218년 칼타코의 한니발 장군이 로마제국의 공격을 위해 알프스산맥을 넘었으나 이 행동은 순수한 등산의식을 가지고 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등산운동 이라고는 볼 수 없다.
기원후의 등산운동을 살펴보면, 1492년에 프랑스 왕샤를 8세의 시종인 앙트완느드가 비유몽테규우(2097m)를 올랐다. 이 산은 그리노볼 근처 드피네 알프스에 있는 등반 불가능한 산으로 정평이 난 산으로 3일간 정상에 머물렀고 산꼭대기 끝까지 가는 것을 목적으로 한 등산은 등산 사상 처음이며 완전하고도 정확, 상세한 기록을 남긴 최초의 등반이다.
2, 알프스 등산사
1)근대 등산의 여명(1760 ∼ 1800)
1760년경 스위스 박물학자 소슈르가 몽블랑 첫 등정자에 상금을 걸었으나 26년 동안 등정자가 나타나지 않고 있다가 1786년 8월 8일 샤모니의 수정 채취인 잭 발마와 내과의사 미셀 G 파갈 두 사람이 정상 등반에 성공하여 상금을 받았다. 1787년 드 소슈르 자신도 발마를 리더로 한 등반대를 꾸려 18명의 가이드를 데리고 등반을 하였다. 모든 등산가는 근대등산에 있어서 최초의 그리고 진정한 후원자라고 보고 있으며 이것이 근대 등반의 효시라고 본다.
이렇게 시작된 등반은 몽블랑 등반이후 열기가 냉각되었다
2).개척시대 (1800 ∼ 1845)
순수 등반론에 입각하여 유럽 알프스의 각 처녀봉을 초 등반하기위한 과도기 로서 황금시대에 영광의 초등반자 및 1급의 가이드들이 이 시기에 태어났다. 또한 마터호른 등반으로 이름난 19세기 최고의 등반가인 에드워드 윔퍼 등 쟁쟁한 등산가가 탄생했다. 또, 산악계의 종주국인 영국에서 암벽등반이 시작되었으며 암장은 영국내 피레내 산맥의 Pillar-Rock 이다. 이것이 암벽등반의 효시가 되었다. 이 암벽등반의 출현은 머메리즘의 예언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등반의 근거가 확실한 개척자들 중에 뛰어난 사람들은 스위스의 Meuer 형제이다.
Meuer 형제는 융푸라우를 처음으로 등반하였으며 이때부터 등반은 과학적인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여 눈과 빙하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3).알프스 등반의 황금시대(릿지등반 1845 ∼ 1865 )
1854년 신혼여행중의 영국인 서어 알프레드 월스가 등반이 어려운 마터호른을 등정하자(4,505m) 많은 영국인이 잇달아 도전, 등반의 황금시대가 열렸다. 그 후 16년 동안 유럽의 주봉을 등정하여 등산열을 스위스, 프랑스, 이탈리아 가이드에 전파하였다. 1865 에드워드 윔퍼가 26세 때 마터호른 (4505m)을 등반 (스위스 이탈리아 국경 펜진 알프스쪽)을 등반한 이래 약 10만 명 정도의 사람이 등정하였으며, 1854년부터 1865년의 짧은 기간동안 140좌의 알프스 고봉들이 인간에게 자연의 신비로움을 드러냈다. 또 1857년 세계 최초의 산악회인 알파인 클럽이 런던에 창립되어 체계적인 탐사를 시작하였으며 이후 오스트리아, 이탈리아, 스위스산악회가 탄생하였다.
4) 알프스 은의시대(벽등반 1865 ∼ 1900)
머매리즘 운동이 일어나서 일반적인 등산 루트보다 좀 더 어려운 루트를 선택하여 보다 어렵게 등반하는 등반시조가 일어났으며, 머메리가 재창한 머메리즘은 현대의 알피니즘에 이르기까지 영향을 미쳐 암벽 및 빙·설벽 등반사조의 기본을 형성하고있다. 또 이때 세계 최초의 여성 등산가가 탄생하였으며 여성 최초로 마터호른을 등반하였다. 그리고 이때 극지법 등반이 1897년 이탈리아 에브리지공에 의해 알라스카에서 처음 시도하여 이후 히말라야 8,000m 급 성공에 지대한 공헌을 하였다. 은의시대에는 머매리즘이 더 발전한 아코로바티즘이 발생하였다. 그러나 너무 곡예적인 등반으로 전통파 등산가에게는 환영받지 못하였다.
5) 알프스 철의시대(3대 북벽 등정 1900 ∼ 현재)
철의 시대를 대표할만한 등반사조는 직등주의이다. 머매리즘이 극에 도달한 형태의 일종이다. 이 시대의 경쟁무대가 알프스에서 히말라야로 옮겨져 제3의 극치에도 피헌팅 시대가 시작되었다. 이 때의 등반을 살펴보면 암벽등반의 명인인 벨쯔 바하가 암벽의 등급을 난이도에 따라 6등급으로 분류하였으며, 한스 둘퍼가 안자일렌을 고안하였으며, 에밀 솔랫터의 직등주의(디럿티시마) 등산시조가 만연하였다. 이때 하켄, 카라비너, 햄머, 아이젠, 아이스바일, 빙벽용 특수 픽켈이 등장하였으며 이러한 장비를 이용하여 1931년 슈미트형제(독일)가 마터호른(4,478m)을, 1938년 Meuer 형제는 융푸라우를 처음으로 등반하였으며 이때부터 등반은 과학적인 면모를 갖추기 시작하여 눈과 빙하에 대한 연구를 시작했다.
하인리히 하러(독일)와 카스파레커가 아이거 북벽을, 1938년 리카르도 캐신(이탈리아)이 그랑드조라스를 오름므로써 난적의 3대 북벽은 인간에게 자신의 모습을 보여주었다. 이때 등반사조는 자유등반에서 다시 변화하여 공등반의 기술이 탄생시켰다. 2차 대전의 발발로 등반운동은 다소 주춤하였으나 대전이 끝나자 알프스 3대북벽 등반으로 철의시대가 다시 문을 열게되었으며, 1950년 프랑스 등반대의 새로운 제품인 나일론을 이용한 장비 경량화에 힘입어 1950년 6월 3일 안나푸르나를 등정하게된다. 또 K2가 이탈리아의 아디토 데시오대에 의해 마나슬루가 일본의 3차에 걸친 원정에 의해 초등정되었다. 고산에서의 최초의 벽 등반은 프랑스대의 아콩카쿠아 남벽 등반이었다.
1) 히말라야 개척기
초기의 히말라야 등반은 1885년 전 후부터 시작한 것으로 생각된다. 등산 자체만을 목적으로 한 등산은 1883년 영국의 그레이함에 의해서 이며 그 이전은 포교, 측량, 과학적 연구, 정치등 무엇인가 다른 목적으로 행해졌다. 그레이함은 1882년 8월 알프스 은의시대의 종말을 고하게 한 몽불랑 산군의 일봉인 당제앙의 초등정을 이룬 사람으로 처음 캉첸중가를 계획하였으나 가이드의 죽음으로 계획을 포기하고 다시 스위스 가이드인 에밀, 포스, 빌릿하, 카우프만과 가르왈 히말라야에 원정 다울라기리, 난다데비 등을 시등하였고 다시 시킴 히말라야의 봉우리 카브르(7,316m)에 올랐는데 그 후 50년간 이 보다 더 높은 산에 오른 사람은 없었다.
그는 이어서 크레뽕을 비롯하여 알프스의 어려운 여러 처녀봉을 초등정하여 대륙 산악계에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여 등반 사상에 큰 영향을 끼쳤으며, 1888년 머메리, 헤이스 탱크스, 콜리와 함께 낭가파르밧를 답사하며 등반을 시도했으나 불행하게도 실패로 돌아가고(다아미르벽을 등로로 선택) 목숨마저 잃었다(1895년), 이것이 히말라야 등반 사상 최초의 희생자가 되었다. 한편, 1892년 영국의 마틴 콘웨이를 대장으로 한 대규모 탐험대의 카라코름 히말라야 등산과 탐험을 하였다.,
2)히말라야 철의시대
1950년대 들어 모리스 엘소그를 리더로 하는 프랑스대가 안나푸르나 정상을 등정(8,078m)하였다. 22회의 도전을 물리친 이 산은 8,000m급 최초로 정복된 산으로 대장 앨소그와 루이 라슈날이 등정에 성공하였다. 그러나 앨소그는 장갑 분실로 인한 동상으로 손과 발가락을 절단하여야만 했다.
1953년 헤르리히 코퍼(독)를 대장으로 낭가파르밧을 도전하게 된다. 이 산은 머메리가 처음 도전한(1895년) 58년만인 1953년 7월 8일 헤르 만볼에 의해 초등정된다. 등정 후 헤르만볼은`아침에 젊음으로 떠났다가 저녁에 늙은이로 내려왔다'고 할만큼 힘든 산이라 했다. 1895년 머메리의 첫 희생 후 초등정에 이르기까지 33명에 달한 희생자로 인해 낭가파르밧은 마의 산으로 불리우게 되었다. 또한 이탈리아의 아브롯치공이 이끈 K2 원정대, 미국 원정대의 K2 도전 등 여러 나라의 등산가들은 히말라야의 처녀봉을 벗기기 위하여 부단한 노력을 경주해 왔다. 모든 등산가들의 염원이던 8,000m급 고봉의 등정이 1950년 프랑스의 에르조그가 이끈 등산대가 안나푸르나를 등정함으로써 히말라야 황금시대가 문을 열었으며, 1953년 5월 29일 영국의 존 헌트대장이 이끄는 원정대원인 힐라리와 텐징에 의해 에베레스트(8,848m)가 초등정되었다. 이렇게 해서 8,000m가 넘는 히말라야의 봉우리 14좌는 이탈리아, 스위스, 미국, 일본, 중국 등 각국 등산대에 차례로 등정되어 갔으며, 1964년 허경(중)이 이끈 중국 등산대가 시샤팡마(=고사인탄(8,027m) 등정을 마지막으로 히말라야 황금의 시대가 주춤하게 된다. 중국과 네팔의 정치적 이유로 인해 히말리야 산군에 대한 입산이 금지되었기 때문이다.
1968년 네팔 정부의 입산 해금령으로 다시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7,000m급 초등정과 8,000m봉우리에 대한 등정이 활발히 이루어졌으며, 1977년 9월 15일 12시 10분 김영도 대장이 이끄는 등반대가 에베레스트 정상에 고상돈 대원을 올림으로서 우리 나라도 에베레스트 등정국에 끼이게 되었다.
2. 국내등반사
1) 고대 등반기 (고대 ∼ 1920)
고대인들은 산을 신격화하여 높은 산에는 잘 오르려 하지 않았다. 신라의 화랑은 학문적 탐구의 대상으로 산에 올랐으며, 특히 삼국시대에 산은 종교적 활동의 산실이었다. 조선시대에는 명산 순례 같은 유람등산이 주된 등산 사조였다.
역사에 나타난 기록들을 살펴보면 1735년 박종의 백두산 유록, 1830년 영 허즈밴드, 죠가스마 백두산 등정, 1861년 철종 시절 고산 김정호의 대동여지도 등 우리 나라의 고대 등산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등산이 단순한 생활 수단의 형태에서 보다 적극적으로 이해되고 개척되어 이조말기에 이르러 서양 문물의 전래와 실학 사상의 보급으로 더욱 발전하였다.
2) 근대 등반의 태동기 (1920 ∼ 1930)
일제의 유화정책으로 탐승과 유람등산이 활발하게 전개된 시기였다. 자료에 나타난 기록을 살펴보면 1925년 미국인 언더우드(원한경)의 인수봉 암벽등반, 1926년 조선 교육회의 백두산 등산 기록, 1926년 한국인 임무와 영국인 아처(공사관)의 인수봉과 도봉산 암벽등반이 있었으며, 1925년 전후하여 서구적인 알파니즘과 순수한 등산운동 기록들이 영화와 서적으로 보급되었다. 동시에 서울에 살고 있던 서양인들에 의해 북한산과 도봉산 일대에서 암벽등반이 시작되었으며, 이 같은 외국인들의 근교 암벽등반은 한국 근대 사악운동의 태동에 직, 간접 많은 영향을 미쳤다.
3) 근대 등반의 형성기 (1930 ∼ 1945)
이 시기는 외국의 근대화 등산운동을 도입한 시기라고 볼 수 있다. 이때의 등반 기록은 1931년 1월 일본인 반산달웅과 반소에 의해 금강산 비로봉에서 스키 등산이 있었는데, 이것이 우리 나라 최초의 동계 등반이다.
1931년 조선 산악회의 창립이 일본인을 중심으로 있었다. 일본인 중심이지만 순수산악회라는 점에서 의의가 크며 회지로 조선 산악을 창간하였다. 1935년 1월 경도제대 산악부의 백두산 동계등반, 1936년 1월 경성제대 산악부가 한라산 등반을 하였으나 등반 중에 전천 대원이 조난을 당하였다. 이 조난 사고가 우리나라 최초의 조난 사고 기록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산악회는 1937년 창립된 백령회로 순수한 한국인들만으로 조직되었다. 1938년 조선 산악회에 의해 금강산 접선봉 암벽 슬라브 초등, 1942년 백령회에서 적설기 백두산 마천령 산맥 연봉경유 종주 등반이 있었다. 암벽등반은 서울 근교의 북한산 인수봉과 백운대를 중심으로 많은 코스가 개척되었고, 금강산에는 접선봉을 위시하여 많은 암벽이 초등 되었으며, 답사 위주의 방식에서 탈피 근대적 등반 운동이 전역에 싹트기 시작하였으며 한국적인 알파니즘이 형성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했다고 할 수 있다.
4) 근대 등반의 발전기 (1945 ∼ 1960)
해방과 더불어 이 땅은 새로운 희망으로 충만할 때 1945년 9월 15일 백령회 맴버들이 주축이 되어 한국산악회가 사회단체 2호로 창립되었다. 그 후 1946년에 부산지부, 경북지부가 창립되었으며 1947년에는 서울대, 세브란스의대, 한양공대를 주축으로 학생산악연맹이 창립되었다. 또 학생스키연맹이 발족되어 본격적인 근대 등산 운동이 전개되었다. 1946년 3월 제 1차 제주도 종합 학술 조사등산, 태백산맥 학술 조사 등반, 1947년 8월 제 1차 울릉도 독도 학술조사 등산, 1956년 1차 동계 한라산 극지 등반이 한국산악회에 의해 이루어졌고, 1962년 대한산악연맹이 창립되외 산악계는 양대 산맥 체계로 운영되기 시작했다.
특히 1955년 서울 문리대 산악부의 설악산 천불동 최초등반, 슈타이맨 클럽의 동계 설악산 최초등반 등 적설기 등반과 초등정의 사조를 국내 산악계에 심게 되었다.
히말리즘과 현대등반 (1960 ∼ 현재)
이때의 주요한 변천은 해외등반에 눈을 뜨게 된 것이다. 1960년 하켄클럽의 대만 옥산 원정을 시작으로 1963년 경희대 산악부의 히말라야 정찰 등반, 1964년 동국대와 한국산악회의 일본 북알프스 등반이 이루어 졌으며, 암벽등반은 프리클라이밍과 인공등반의 조화 속에 선우중옥씨에 의해 선인봉 박쥐 코스와 인수봉 귀바위 A, B코스가 개척되었으며 설악산 공룡능선 역시 선우중옥씨 파트에 의해 개척되었다.
해외로 뻗으려던 국내 산악 운동이 1965년 3월 네팔의 입산 금지령으로 주춤했으나, 1969년 해금령에 따라 다시 히말라야로 눈을 돌리게 되었으며, 1962년 박철암의 다울라기 II 봉 정찰, 1969년 7월 한국산악회의 츄렌히말 정찰대 파견, 1970년 김정섭 원정대의 츄렌히말 등정, 1971년 김정섭 대의 마나슬루 원정(실패), 1971년 대한산악연맹의 로체샬 원정이 고소장애 및 대원의 조난으로 실패, 1972년 김정섭 원정대가 마나슬루에 재도전하였으나 히말라야 사상 두 번째로 큰 조난사를 당하고 퇴각하였다. 그러나 1977년 9월 15일 12시50분 김영도 대장이 이끈 등반대가 세계최고봉인 에베레스트 등반을 준비한지 6년만에 정상에 태극기를 꽂아 한국인의 의지를 높일 수 있었다. (등정자: 고상돈)이와 같은 해외 등반 추세와 함께 60년 초에는 서구에서 들어 온 극지법 등반방식과 종주 및 횡단 등의 방식을 사용한 등반이 대학산악부 및 지방의 몇몇 단체에 의해 설악산, 한라산, 지리산 등을 중심으로 행해졌다. 60년대 이 후 내적으로는 각 산악단체의 활발한 등반 활동이 근대등산을 이 땅에 토착화 시켰으며, 외적으로는 서구의 등반 사조에 적극적으로 부응하면서 과학적이고 체계적인 훈련을 통하여 히말라야 및 전세계 곳곳에서 좋은 등반 기록을 갱신하면서 한국의 등반 기술을 한 단계 높은 곳으로 이끌어 가고 있다.
1. 알피니즘(Alpinism)의 정의
알프스에서 유래된 산악운동으로 등산행위이며 등산정신운동을 추구하며 종전의 고전적 등산형 태를 지양하고 보다 새롭고 창의적인 등산활동을 구현하려고 하며, 등정자체의 가치보다 등반루트 와 그 내용자체에 그리고 곤란성을 스스로 추구하여 인간능력의 한계에 도전하는 행위이다.
2. 알피니즘의 본질
행동성 - 관념적 사고보다는 행동적 실천성에 가치를 둔다.
전진성(전위성) - 항상 새로운 형태, 새로운 사고, 곤란성을 추구한다.
유동성 - 시대의 흐름에 따라 변해옴
3. 알피니즘의 역사
1) 근대 알피니즘의 시작과 초등반(황금) 시대
알피니즘의 시작은 1786년 스위스의 학자인 소쉬르가 알프스의 최고봉 몽블랑(4,870m)을 오르는 사람에게 상금을 내걸면서 팍카아르와 쟉팔마가 오르게 되는데, 이 때를 근대 알피니즘의 시작으 로 보며, 이어서 스위스의 최고봉인 융프라우(Jung frau. 4,158m)가 등정이 되었다. 그리고 1857년 산악국가가 아닌 영국에서 세계 최초의 산악회인 The Alpine Club이 창립되었다. 1865년에는 영국 의 에드워드 웜퍼(A. E Whymper)가 마테호른(Matterhorn. 4,478m)을 8번의 시도 끝에 오르게 되 는데 이들은 하산 중 안자일렌을 하다가 추락, 자일절단으로 사고를 내게 되었다. 이때까지는 대부 분이 영국의 지식층이 주를 이루고 스위스 지방의 가이드 등이 동반을 하는 스타일이었으며, 등반 의 목적은 오로지 새로운 처녀봉의 등정이 이 시대의 알피니즘이었다.
2) 은(銀)의 시대(1865∼1882년)
에귀유두 제앙(4,013m)의 쌍두봉이 쎄라형제에 의해서 초등이 되는데 등반의 스타일이 등정주의 에서 등로주의로 변화하게 된다. 이때 영국의 머메리는 현대 알피니즘에 가장 영향을 많이 끼친 등반가인데, 이른바 머메리즘으로 일컬어지는 "More difficult variation route"를 주장하며 그 자신 도 낭가파르밧에서 직등루트를 시도하다가 눈사태로 34세의 나이에 만년설 속에서 잠들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사상은 현재까지 영향을 끼치고 있다. 이때는 젊고 용기있는 등산가들에 의해 바리안 테가 추구되며 해머, 하켄, 카라비너, 레더 등의 장비가 사용되게 된다
3) 철(鐵)의 시대
1930년대는 알프스 북벽의 황금기를 맞는다. 알프스의 3대북벽으로 일컬어지는 마테호른, 그랑드 조라스, 아이거 북벽이 이때 초등이 되게 된다. 1931년에 수직표고차가 1,100m인 마테호른(4,478m) 북벽이 슈미트 형제에 의해 초등이 되고, 1935년에는 표고차 1,200m인 그랑드 조라스(4,208m)가 이 탈리아의 리카르도 캐신에 의해, 1938년에 표고차 1,800m인 난벽 아이거(Eiger. 3,970m)가 독일의 하인리히 하러와 오스트리아의 카스 파레크에 의해 초등이 되었다. 이때부터는 하켄, 카라비너, 해 머, 크램폰, 아이스 바일 등이 사용이 되었다. 1934년에는 벨첸바흐에 의해 6급까지의 등급을 나누 는 암벽등급이 창시되며 암벽등반 스타일이 자유 등반에서 바위에 확보물이나 등반 보조물을 사용 하고 설치하는 인공등반으로 변해가게 되었다.
4) 히말라야 등반시대
히말라야는 등반의 초기에는 등정이 목적이 아닌 학술이나 답사가 주목적이었는데, 1883년 영국 의 그레이함이 난다데버, 도우나키리를 시도하고 시킴히말라야 가불봉을 등정하게 되었다. 1895년 에는 머메리가 파키스탄의 카라코람을 거쳐 낭가파르밧을 시도하던 중 눈사태로 사망하게 되고, 1899년에는 후렛슈필드가 1905년에는 크로리가 칸첸중가를 시도하게 되나 등반이 목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등정에는 실패하게 된다.
5) 히말라야의 초등시대(1950∼1964)
알프스의 봉우리들이 모두 등정이 되고 북벽들도 등정이 이루어지자 등반의 대상이 자연스럽게 히말라야로 옮겨지게 되는데, 이 시기는 주로 유럽의 열강들이 국가의 명예를 걸고 대규모의 인원, 물량과 셀파를 동원하며 국가의 지원으로 등반이 이루어지는 시기였다. 1950년 6월 3일에 헤르만 불, 모리스 엘조그에 의해 히말라야의 8,000m급 봉우리의 하나인 안나푸 르나(8,091m)가 초등이 되는데 이 원정대는 모든 제품에 나일론을 사용해 장비의 경량화를 이룩했 다. 1953년 5월 29일에는 존 헌트대장이 이끄는 영국원정대가 힐라리와 텐징에의해 에베레스트(사 가르마타. 초모랑마. 8,848m)가 초등이 되고, 같은 해 7월 3일에는 독일 원정대원이며 수퍼알피니즘 의 기수로 지칭되는 헤르만 불에 17시간의 사투 끝에 낭가파르밧이 초등이 되며, 1954년 7월 31일 에는 2위봉 K2(8,610m)가 이탈리아 원정대에 의해 초등이 된다. 그 후 영국은 칸첸중가를, 오스트 리아는 초오유, 가셔브롬, 브로드피크를 , 미국은 히든피크를, 스위스는 로체와 다울라기리를, 일본 이 마나슬루를, 프랑스가 마칼루를 초등을 하며, 1964년에는 중국이 시샤팡마(인도명 : 고사인탄. 8,046m)를 마지막으로 히말라야의 8,000m의 고봉들이 초등이 되게 된다.
6) 알프스 3대 북벽 단독과 동계등반시대(1960년대)
알프스와 히말라야의 고봉들이 전부 등정이 되면서 보다 더 어려운 등반방식을 추구하게 되면서 알프스의 북벽이 그 대상이 되었다. 1960년에 알프스 6대북벽의 하나인 드류서벽에서 처음으로 볼 트가 사용되었고, 미국의 John Harlin에 의해서 헬멧이 사용되었으며 등강기가 이때부터 사용되었 다. 1961년에 Toni Hiberer에 의해 아이거 북벽이 등정되게 되는데 이때 처음으로 바닥에 징이 박 힌 이중화가 사용되었고, 1962년에는 Michel Darbelly와 Armen이 마테호른 북벽을 동계등정에 성 공하고, 1963년에 이탈리아의 월터 보내티에 의해 그랑드 조라스 북벽이 동계초등되었다.
7) 직등주의 시대(Direttissima. 1970년대)
등반의 기준이 산중심에서 인간중심으로 바뀌어 가는 시기로 보다 더 어려운 벽등반을 위해 쉬 운 루트를 골라서 오르지 않고 바로 아래에서 정상까지 오르는 시도들이 행해지게 된다. 1966년에 John Harrin과 Dougal Haston이 아이거를 직등, 1969년에 일본의 Jecc가 아이거를 보다 더 완벽하 게(New Direttissima)초등, 1973년에는 르네 드메종이 그랑드 조라스를 직등, 일본의 長谷川恒男이 1977년에 마테호른, 1978년 아이거, 1979년에 그랑드 조라스 등 동계에 3대북벽을 오르게 된다.
8) Clean Climbing시대
미국의 요세미테에서 "장비를 사용하되 암벽을 손상시키지 말아야 한다"고 주창하며 볼트나 하 켄등의 사용을 거부하고 티톤, 후렌드 등의 재밍기구 등을 이용한 등반을 하게 되었으며 순수 요세 미테파들은 초크사용도 거부하는 등반을 함.
9) 히말라야의 벽시대
⑴ 1970년 영국의 크리스 보닝턴대가 안나푸르나 남벽 초등
⑵ 1970년 최초의 8,000m급 14좌 완등자인 라인홀트 메스너의 낭가바르밧 루팔남벽 초등
⑶ 1972년 라인홀트 메스너의 마나슬루 남벽 단독등정
⑷ 1975년 크리스 보닝턴대의 에베레스트 남서벽 등정
⑸ 1975년 메스너와 Peter Halbler의 알파인스타일에 의한 히든피크 남북벽의 등정
⑹ 1975년 Joe Brown일행의 트랑고 타워 등정 및 Joe Tasker와 Len Show의 다울라기리벽 등정
10) 히말라야의 무산소 등반(구급용, 의료용으로만 사용)
알피니즘의 변천은 등정주의 - 등로주의로 - 직등주의로, 국가적인 대규모 원정대에서 소수의 인원으로 그리고 단독등반으로, Free에서 하드프리로, 극지법에서 알파인 스타일로, 유산소에서 무 산소 등반으로, 남성위주에서 여성의 참여로, 단체주의 정신에서 개인의 특성, 능력을 중심으로 변8) Clean Climbing시대
미국의 요세미테에서 "장비를 사용하되 암벽을 손상시키지 말아야 한다"고 주창하며 볼트나 하 켄등의 사용을 거부하고 티톤, 후렌드 등의 재밍기구 등을 이용한 등반을 하게 되었으며 순수 요세 미테파들은 초크사용도 거부하는 등반을 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