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姓名) |
박지윤(朴遲胤) |
본관(本貫) |
평산(平山), 평주(平州) |
시대(時代) |
|
자(字) |
|
호(號) |
|
이력(履歷) |
박지윤(朴遲胤) 생몰년 미상.
고려 태조 때 문신. 지윤(智胤)으로 쓰기도 한다.
본관은 평주(平州: 平山).
신라에서 북경도위 찰산후(北京都尉察山侯)를 지낸
적오(赤烏: 積古)의 손자이며,
대모달읍장(大毛達邑長) 직윤(直胤)의 아들이다.
아버지 직윤이 평주에서 십곡성(十谷城:谷山) 등 13개성을 설치하고
궁예(弓裔)에게 귀부한 뒤로 이 지역의 대호족이 되었다.
이러한 재지적 기반을 바탕으로
왕건의 후삼국통일에 협력하여 벼슬은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오르고,
딸이 태조에게 출가하여 성무부인(聖茂夫人)이 되었다.
아들 수문(守文)과 수경(守卿)이 삼중대광에 이르렀다.
후손인 박경인(朴景仁)과
박경산(朴景山)의 묘지가 남아 있어 세계(世系)가 확인된다.
참고문헌
高麗史, 朝鮮金石總覽, 韓國金石文追補. 〈李益柱〉
평산 박씨
중조 박지윤(朴智胤)은 시조왕 혁거세(赫居世)의 30세손이요,
벼슬은 삼중대광 문하시중을 지냈다고 한다.
본관을 평산으로 하게 된 연유는 알수 없으나
그의 아들 수경(守卿)의 딸이 고려 태조의 비가 되었다는 것으로 보아
그 지방 토착한 호족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으며,
따라서 조상의 세거지를 본관으로 삼은 것으로 여겨진다. |
묘(墓) |
|
부(父) |
|
모(母) |
|
배(配) |
|
자(子) |
|
녀(女) |
|
형제(兄弟) |
|
문헌(文獻) |
|
기타(其他) |
|
*朴赤烏: 朴景仁 誌文. 1122년 朝鮮金石總覽 上. p303
朴積古: 朴景山 誌文. 1158년 韓國金石文追補. p143
*朴遲胤: 朴景山 誌文, 高麗史 卷92 朴守卿傳
朴智胤: 高麗史 卷66 后妃1 太祖 聖茂夫人
평주(평산) 평주자치→태봉→고려
===================================================================================================
박직윤(朴直胤) 평주 육전(A)수전(A)정치(S)모략(A)명성(A)축성(S)
본시 박직윤의 아버지 적오(赤烏/積古)는
본시 경주박씨로 왕족출신이며 북경도위 찰산후(北京都尉察山侯)를 지냈다.
박직윤대에 이르러 명주,죽주의 지방관을 역임하다가 평주(平州/평산)의 군관직에 제수되어
평주에 정착한후 해상무역을 통해 막대한 부를 축적하고,
평주에 십곡성(十谷城:谷山)등 13개성을 쌓아
패강진 지역의 최대 군사세력으로 성장했다.
박직윤은 스스로 고구려의 장군직인 대모달읍장(大毛達邑長)을 자처하며
고구려를 계승하고 신라의 지배권에서 벗어난 독립세력임을 만방에 표했다.
박지윤(朴遲胤/朴智胤) 고려 육전(B)수전(B)정치(B)모략(A)명성(A)축성(A)
생몰년 미상. 고려 태조 때 문신. 지윤(智胤)으로 쓰기도 한다.
본관은 평주(平州: 平山).
신라에서 북경도위 찰산후(北京都尉察山侯)를 지낸 적오(赤烏: 積古)의 손자이며,
대모달읍장(大毛達邑長) 직윤(直胤)의 아들이다.
아버지 직윤이 평주에서 십곡성(十谷城:谷山) 등 13개성을 설치하고
궁예(弓裔)에게 귀부한 뒤로 이 지역의 대호족이 되었다.
이러한 재지적 기반을 바탕으로 왕건의 후삼국통일에 협력하여
벼슬은 삼중대광(三重大匡)에 오르고,
딸이 태조에게 출가하여 성무부인(聖茂夫人)이 되었다.
아들 수문(守文)과 수경(守卿)이 삼중대광에 이르렀다.
후손인 박경인(朴景仁)과 박경산(朴景山)의 묘지가 남아 있어 세계(世系)가 확인된다.
왕건인 조부인
작제건 때부터 왕건의 가문과는 연결을 가진 사람이며
왕건의 후삼국 통일에 협력하여 삼중대광에 오르고, 딸을 태조에게 출가시켜 고려 왕실과의 유대를 굳혔다.
박수문(朴守文) 고려 육전(B)수전(B)정치(B)모략(C)명성(B)축성(A)
생몰년 미상. 고려 초기의 공신.
본관은 평주(平州). 대광위(大匡尉) 지윤(遲胤)의 아들이며,
태조의 제27비 월경원부인(月鏡院夫人)의 아버지이다.
또한 같은 태조공신이고
태조의 제28비 몽량원부인(夢良院夫人)의
아버지인 박수경(朴守卿)의 형이기도 하다.
그는 아우 수경의 전공(戰功)의 덕을 입어
925년에 원윤(元尹)에서 원보(元甫)가 되었으며,
936년(태조 19)에는 대상(大相)에 올랐다.
947년(정종 2)에는 대광(大匡)이 되어 덕창진(德昌鎭)에 성을 쌓은 바 있고
서경왕성(西京王城) 및 철옹(鐵甕:지금의 맹산)
·박릉(博陵:지금의 박천)·삼척(三陟)·통덕(通德:지금의 숙천) 등에 성을 쌓은 바 있다.
뒤에 벼슬이 태위삼중대광(太尉三重大匡)에 이르렀다.
박수경(朴守卿) 고려 육전(A)수전(B)정치(C)모략(C)명성(A)축성(B)
?∼964(광종 15). 고려의 공신.
본관은 평산(平山).
대광(大匡) 위지윤(尉遲胤)의 아들이며,
태조의 비 몽량원부인(夢良院夫人)의 아버지이다.
용맹하고 지혜가 많았으며,
태조를 섬겨 원윤(元尹)이 되었다.
후백제가 자주 신라를 공격하자 태조의 명으로 장군이 되어
이에 대비하다가 기계(奇計)로 견훤의 군대를 무찔렀다.
925년(태조 8)의 조물군전투(曹物郡戰鬪)때에
태조는 상군·중군·하군의 3군으로 나누어 싸웠는데
상군과 중군은 패하였으나, 그는 하군을 지휘하여 승리를 거두었다.
그 공으로 원보(元甫)로 승진하였다.
발성(勃城)싸움에서는 태조가 포위당했으나 그의 역전(力戰)으로 무사하였다.
936년 후백제 신검(神劒)군대와의 최후 결전 때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다.
940년 태조가 역분전(役分田)을 정할 때 특별히 전(田) 200결(結)을 하사받았다.
945년에는 정종을 도와 큰 공을 세우고 대광에 올랐다.
964년(광종 15)에 아들 승위(承位)·승경(承景)·승례(承禮) 등이 참소로 옥에 갇히자 화병으로 죽었다.
뒤에 여러 차례 추증되어 사도 삼중대광(司徒三重大匡)에 이르렀다.
박승위(朴承位) 고려 육전(B)수전(C)정치(B)모략(C)명성(C)축성(C)
평주호족 박수경의 맏아들로
박수경과 함께 삼한공신에 책봉되었다.
964년 호족억압정책을 펴던 4대 황제 광종때 참소를 입어 옥에 갖히였고,
부 박수경은 화병으로 졸하였다.
박승경(朴承景) 고려 육전(C)수전(C)정치(C)모략(C)명성(C)축성(C)
평주호족 박수경의 둘째아들로
아버지와 형에 이어 조정에 출사하였으나 4대 황제 광종때 참소를 입어 옥에 갖히고,
부 박수경은 화병으로 졸하였다.
박승례(朴承禮) 고려 육전(C)수전(B)정치(C)모략(C)명성(C)축성(C)
평주호족 박수경의 셋째아들로
아버지와 형에 이어 조정에 출사하였으나 4대 황제 광종때 참소를 입어 옥에 갖히고,
부 박수경은 화병으로 졸하였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 > 역사 > 고려시대사
박경인 [ 朴景仁 ]
정의
1057(문종 11)∼1121(예종 16). 고려 중기의 문신.
개설
본관은 평산(平山). 초명은 경작(景綽), 자는 영유(令裕).
할아버지는 태자태보(太子太保)를 지낸 충후(忠厚)이고,
아버지는 참지정사(參知政事)를 지낸 인량(寅亮)이다.
어려서부터 학문에 힘써 경적(經籍)에 두루 통달하였으며,
과거에 급제한 뒤 주로 간쟁(諫諍)과 문한(文翰)의 직을 맡아 이름을 떨쳤다.
생애와 활동사항
1108년 병마부사(兵馬副使)로서 윤관(尹瓘)을 따라
여진정벌군에 나갔다가 말에서 떨어져 정주(定州)에 머무르고 있을 때
윤관이 9성을 쌓는다는 말을 듣고 지키기 어렵다는 이유를 들어 이를 반대하고,
또 전중감(殿中監)·직문하(直門下)로서 송나라와의 국교를 재개하려는 것을 중지시켰다.
1113년 국자좨주(國子祭酒)가 되고,
1115년 서북면병마사가 되어 떠날 때 예종(睿宗)은 ‘경인(景仁)’이라는 이름과 차와 약을 하사하였다.
이로써 이름을 ‘경인’이라 개명하였다.
이듬해 한림학사승지로 청연각(淸讌閣)에서 『서경(書經)』을 강하였으며,
김연(金緣) 등 여러 학사들과 『정관정요(貞觀政要)』를 주석하였다.
형부·이부·호부·예부의 상서(尙書)를 거쳐
1119년 지추밀원사에 오르고 나중에는 수사공(守司空)·상서좌복야(尙書佐僕射)·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었다.
상훈과 추모
동생인 경백(景伯)·경산(景山)과 더불어 삼형제가 모두 등과하여
그의 어머니는 매년 대창미(大倉米) 30석이 하사되는 은전을 누렸다.
시호는 장간(章簡)이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박경인묘지(朴景仁墓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