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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영조] 사도세자의 일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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질문자인사 자세하게 설명해주셨네요 ^^ , 감사합니다 .
비극적인 사도세자의 죽음.
당파싸움으로 인해 죽을번한 위기를 넘긴 연잉군은 왕위에 오르자 당파싸움 근절을 위한 탕평책을 쓰기시작했습니다.탕평책은 초기에는 재능에 관계 없이 탕평론자를 중심으로 노론과 소론만 등용하다가 탕평 정국이 본 궤도 에 오르자 이 정책을 제도적으로 정착시키게 되었습니다. 영조는 이러한 정국 구도에 따라 노론, 소론, 남인, 소북 등 사색 당파를 고르게 등용하여 탕평 정국을 더욱 확대시켜 나갔습니다. 1749년 영조는 건강상의 이유로 사도세자로 하여금 대리청정을 하게 합니다. 그런데 세자가 대리청정을 하게 되자 남인, 소론, 소북 세력 등은 그를 등에 업고 정권을 장악하려는 움직임을 보였고 이에 노론 세력과 그들에 동조하던 계비 정순왕후 김씨, 숙의 문씨 등이 세자와 영조 사이를 이간질 하였습니다. 세자에 대한 정순왕후, 숙의 문씨 등의 무고에 따라 영조는 자주 세자를 불러 질책하였으며 이 때문에 세자는 정신 적 압박으로 인해 심한 고통을 받게 되었습니다.그래서 세자는 돌발적인 행동들을 하였고 세자에 대한 영조의 불신 은 더욱 격화되었는데 계비 김씨의 아버지 김한구와 그 일파인 홍계희, 윤급 등의 사주를 받은 나경언이 세자의 비행 10조목을 상소하여 이때문에 영조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세자에게 자결을 명하였습니다. 하지만 세자가 이에 응하지 않자 그를 폐위하여 서인으로 강등시킨 후 뒤주 속에 가두어 굶어죽게 하였습니다.
그런데 아버지가 아들을 그것도 왕위를 계승할수있는 유일한 자기 아들. 나이 42세에 얻은 귀하고 귀한 아들을 죽일때는 당파싸움만 가지고는 그 죽이는 이유가 설명되지 않습니다. 영조는 평생 맣은 열등감을 안고 살았다고 합니다.영조의 생모 최씨는 미천한 무수리 출신이었기 때문에 자신의 출생에 대한 열등감을 안고 살았고 또 영조는 왕위에 오르기까지 숱한 우여곡절을 겪었고, 왕위에 올라서는 이복형인 경종을 살해했다는 혐의까지 쓰게 되어 영조에 대한 반역모의가 있을때마다 이런사실이 세인의 입에 오르내리기 까지 하였습니다.또 영조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사람의 모든 것을 사랑하고, 미워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그 사람의 모든 것을 미워하는 극심한 애증의 편중현상을 드러냈습니다. 이러한 성격적 결함이 사도세자와의 갈등을 일으킨 하나의 요인이 된것으로 보여지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자를 폐위 키는것으로 끝난게 아니라 굳이 죽여야 했다면 그것은 세자가 부왕의 권력에 도전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권력이란 에로부터 아들과도 형제와도 어느누구와도 같이 공유할수 없는것은 세상이 다아는 이치인데.사도세자는 영조의 왕권을 위협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대리청정을 하며 정무를 보는 아들 사도세자가 자기에게 보고도 안하고 처리하는 국사들을 보며 영조는 사도세자를 불러 야단을 칩니다."너는 어찌하여 이런 중대문제를 나와 상의도 없이 처리하는가?"라고 그래서 사도세자는 이런문제는 어찌하오리까?하면 영조는 다시"너는 아직도 이런문제를 혼자처리하지 못하고 나에게 번거롭게 가져오는가?"이런일이 수없이 반복이 됩니다. 건강해서 조선 국왕들중에 가장 장수한 임금 영조는 아들인 세자가 국정을 자기에게 자주 보고도 안하면서 이끌어나가자 소외와 위기를 느낀 임금의 분노로 인해 죽였을것이라고 생각해 봅니다.아무리 당파싸움의 와중이라지만 자기아들을 죽이기까지 한다는것은 아무래도 그이유가 당파싸움에 의한것 이라기엔 왠지 설명하기가 미약하기 때문 입니다.
출처 : [직접 서술] http://boinp.netian.com/21_01.html 참고 직접서술.
사도세자의 죽음
사도세자를 죽음으로까지 몰고 간 상황에 대해서는 학자들 간에 의견이 분분하다.
이 주제를 선정한 분은 죽음의 본질을 숙종이 세자를 갈치우기로 마음먹은 정유독대로 소급해 본 것 같다.
사실 비천한 어머니를 둔 연잉군에게 노론세력의 지지는 절대적인 배경이었다. 그들의 필요에 의해 선택되기는 했으나 군왕의 자리를 얻기 위한 대결을 대신 치루어 주었으니 말이다. 더구나 형을 살해했다는 오명으로 출발한 영조에게는 그들의 후원은 없어서는 안될 배경인 동시에 족쇄였다.
그러나 이러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장희빈의 죽음을 목격하며 세심하고 영악하게 자라난 영조는 노련했다. 그는 노론을 중용하는 것 같으면서도 동시에 이들을 견제할 소론세력을 탕평이란 이름하에 키웠다. 또한 노론 내에서도 외척당을 키워 자신의 최측근으로 삼았던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못난 아들이었다. 아버지와는 달리 말수가 적고 행동이 민첩하지 못하며 우직했던 사도세자는 이러한 아버지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고 대리청정 기간동안 노론세력을 적으로 만들어 버린다.
이야기를 들어보면 부모와 자식간에도 더 예쁘고 덜 예쁜 자식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영조는 이러한 편애가 특히 심했다고 한다. 사도세자가 비록 다음 왕위를 이어갈 왕세자였지만 영조에게 있어서는 못나고 답답한 아들일 뿐이었다. 다가가기에도 무서운 아버지 때문에 삐뚤어져 간 사도세자는 결국 상심하고 미칠 것 같은 마음을 광기로 나타낸다. 이 때문에 부자 간의 인연은 더욱 멀어지고. 이와 더불어 노론세력과 그들의 딸들은 정계에서, 혹은 구중 궁궐에서 사도세자를 세자의 지위에서 몰아내기에 여념이 없었다.
사도세자가 죽게된 직접적인 원인은 나경언의 고변 때문이다. 이 고변으로 세자의 비행이 영조에게 알려져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그러나 고변의 내용은 몇가지를 제외하고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당사자인 나경언은 배후를 캐내기도 전에 급히 처리돼 버렸고 사건의 공초나 그 밖의 기록도 모두 불태워 없어졌기 때문이다. 이렇게 자료를 모두 소각해 버렸으므로 이 사건은 지금까지도 추측만이 무성한 채 미스테리로 남아 있다.
한 교수는 사도세자의 죽음이 고변 내용에 있는 평안도 여행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사도세자가 삼개월간 머물렀던 평안도행은 단순한 여행이 아닌 아버지를 몰아내려는 쿠테타를 위한 병력시찰이었다는 것이다. 실록 곳곳에 보이는 '생모 영빈의 밀고' , '변란이 호흡에 달려 있다' 는 내용 등이 그 증거라는 것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이는 조선왕조600년사에 다시 없는 참상이고 정말 죽을 일이다.
그러나 이것이 사실이기에는 좀 무리가 있다고 생각된다. 우선 이 시기의 조선사회는 효를 목숨보다 중히 여기는 주자주의가 정착된 시기였다. 과연 아버지를 배반하는 참람한 행동을 통해 왕위에 오른 아들을 민중들이 왕으로 인정할 것인가.
그리고 그는 왕세자이다. 아버지가 밉고 노론 세력이 압박을 가한다해도 아뭏튼 다음 왕위의 계승자이다. 조금만 참고 기다리면 될 것을 그런 억지를 부릴 계제는 아닌 것이다. 더구나 잔꾀를 쓰지못해 이 지경까지 이른 고지식한 사도세자이고 보면 그만한 거사를 벌일 치밀한 계획성과 판단력이 남아있을 것 같지는 않다.
또 다른 교수는 사도세자 죽음의 원인을 영조와 사도세자의 불화, 노론과 소론의 대립, 노론내 외척당과 비외척당간의 알력으로 보았다. 이것들이 그 자신의 광적인 행동들, 예를 들면, 여중과 놀아나거나, 첩을 죽인다거나, 옷 입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 등과 더불어 그를 죽음으로 몰고 갔다는 것이다. 이것이 가장 상식적인 답일 것이다.
그러나 나는 이 문제를 조금 다르게 해석하고 싶다. 물론 사도세자가 죽게 된 원인은 위와 같은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끊임없는 노론 세력의 견제, 아직은 힘이 약해 지지기반이 되어 주지 못했던 소론 세력, 더구나 그 자신의 성격파탄으로 인해 아버지와의 관계는 더욱 멀어지고 이 때문에 결국은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죽을 이유는 많더라도 뒤주에 갇혀 죽을 이유는 아무것도 없다. 윤 오월이면 한여름 더위다. 그 더위에 28살이나 먹은 건장한 청년이 손수 그 아버지가 자물쇠를 채운 쌀 뒤주에 갇혀 서서히 죽어갔던 것이다.
이는 영조의 성품에 기인한다. 성격 파탄자는 아들이 아니라 그 아버지다.
영조의 초상화를 본적이 있는가. 그 날카롭고 매서운 눈매와 얇게 다물린 입술. 이는 연잉군 시절이나 60이 넘어서나 변함이 없다. 이 그림들은 영조의 영민함과 결단력, 그리고 그 무엇으로도 꺾을 수 없는 고집을 보여준다. 다음 왕위에 관계된 중대한 문제라고하나 아들을 뒤주에 가둬 서서히 굶어 죽게, 숨이 막혀 쪄죽게 만든 것은 영조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영조의 잔인함은 그 아들을 신으로 만들었다. 한을 많이 품고 죽은 사람일수록 영험한 귀신이 된다고 하지 않는가. 사도세자는 훗날 무당들이 섬기는 귀신이 되었다.
사도세자, 그는 조선의 국기를 만든 강한 무인이었다 !asteka81 2007.10.22 01:04 |
조회 6,168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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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도세자, 오늘 날 다수의 사람들에게 투영된 그의 이미지는 권력투쟁의 회오리 속에 아버지 영조에게 자결을
강요받은 뒤 끝내 뒤주에 갇혀 죽음을 맞은 비운의 왕세자, 라는 다소간의 연민과 서글픔이 뒤섞인 잔상으로
남아있다. 그러나 실제 역사상의 그는 조선의 무예 십팔기를 완성하고 그 누구보다 강인한 체력과 뛰어난 무예를 소유한 강철 무인이었다.
사도세자는 어릴 적부터 무예를 좋아해 즐겼으며 부단히 노력하여 갈고 닦았다.
그는 생후 100일만에 생모 영빈 이씨의 손을 떠나 보모의 손에서 길러졌다.
어린 세자가 보모로부터 양육된 곳은 저승전으로 이 곳의 후문 바깥에 군수 물자를 보관하던 군물고가 있었다.
저승전에서 그를 모신 사람은 한 상궁과 최 상궁 두 사람으로 한 상궁이 무예를, 최 상궁이 학문을 가르쳤다.
손재주가 뛰어났던 한상궁은 나무를 깍아 칼과 활을 만들어주며 세자로 하여금 나인들과 무예놀이를 하며
성장하도록 뒷밤침했다. 이런 연유로 세자는 청년기에 이르러 누구보다 장대하고 우람한 기골을 갖추었으며
어지간한 장사도 당하기 어려울만큼 힘이 세었을뿐 아니라 활이나 창, 칼 등의 병장기도 능숙하게 잘 다루었다.
이미 열다섯 살 무렵부터 저승전의 기운 센 무사들도 다루기 쉽지않은 청룡도나 쇠몽둥이를 자유자재로 마음껏 휘둘렀으며 그 중에서도 말타기와 활쏘기 실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할만큼 빼어난 실력을 자랑했다. 서적을 읽을 때도 유가의 책보다 병가의 책을 더 즐겨 읽던 그였다.
이 당시 조선의 사대부들은 무예를 천한 것으로 업신여겼으나 세자는 전혀 다른 입장을 보였다.
그는 언제나 웅대한 기상을 가슴에 담고 무인군주의 기개를 품고 있었다.
세자의 무예연마를 곱지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던 이들에게도 다음과 같이 큰소리를 쳤다.
" 우리 조선은 땅이 좁아 군사를 쓸 곳이 없다. 그러나 동으로는 왜를 바라보고, 북으로는 오랑캐와 접하며,
서해와 남해를 건너면 곧 중원에 다다르게 된다 ! "
그는 비좁은 조선에서 아웅다웅 소모전을 벌이지말고 드넓은 만주벌판을 호령하며 영웅의 기개를 펼치고 일신에 익힌 무예를 마음껏 발휘하고 싶어했던 것이다.
세자의 고조부 효종은 " 무관의 말달리기를 포악하다 여기는 사람들이 많으니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다. 오늘 날의 무관은 선비와 다를바 없으니 과연 전장터에서 힘이나 제대로 쓸 수 있겠느냐 " 며 직접 청룡도를 휘두르고 무예연마에 열성을 다하던 군주였다. 세자는 바로 이 고조부의 용모와 성향을 흡사 빼닮았다는 말을 자주 들었고 머리가 매우 비상했다. 이로 인해 일찍이 그의 부왕 영조 역시 소년천자라 부르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부국강병을 꿈꾸며 심신단련에 조금도 게으름을 부리지 않았던 사도세자가 심혈을 기울여 정리하고 완성한 조선의 무예가 바로 십팔기다.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무관들이 연마해오던 각종 기예를 다시 정비하여 이를 하나의 종합무예로 완성한 것이다. 그는 당시 무예에 관해 조선 제일의 전문가라 부르기에 전혀 손색이 없었다. 직접 열과성을 다해 무예를 익혀 굉장히 빼어난 실력을 보유했을뿐 아니라, 군사기밀로 분류되어 엄중히 보관되던 중국과 일본의 수많은 무예서적 역시 내키는대로 열람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사도세자가 완성한 조선 무예의 정수 십팔기의 구성은 다음과 같다.
가장 먼저 창 다섯가지가 포함되어 있다. 장창, 죽장창, 기창, 낭파, 당선이 그것이다.
장창은 문자 그대로 긴 창, 죽장창은 대나무를 깍아 만든 창이며 당파는 흔히 포졸들이 들고 다니던 삼지창이다.
기창은 창 끝에 깃발을 달아 각종 의식에 사용했으며 낭선은 긴 대나무에 여러 갈래의 가지를 엇비슷하게 붙여
제작한 것이다.
그 다음은 단병기인 칼이다. 쌍수도, 예도, 왜검, 교전, 제독검, 본국검, 쌍검, 등패 등 모두 여덟 가지 기예다.
쌍수도는 한 자루의 긴 칼을 양 손으로 사용하는 것이고 쌍검은 두 자루의 칼을 사용하는 것이다.
등패와 방패는 함께 짝을 이루는 칼이며 왜검은 왜구의 검법을 연구.분석하기 위해 실은 것이다.
교전은 왜검을 분석한 후 격검으로 재구성한 것이며 본국검은 신라 화랑으로부터 유래한 검법이다.
이 밖에 칼에 속하면서 자루가 길어 장병기로 분류되는 월도와 협도가 있고, 창이나 칼과 같이 날카로운 날은 없지만 타격용 병기에 속하는 곤봉과 편곤이 있다.
편곤은 긴 봉에 짧은 봉을 고리로 연결한 병기인데 쌍절곤을 연상하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리고 맨손무예 역시 포함되어 있다.
이와 같이 십팔기는 길고 짧고, 날카롭고 둔탁한 것이 씨줄과 날줄처럼 얽혀 하나의 완벽한 진용을 갖추었으며
하나하나의 기예 역시 그 분야에서 당대 제일의 기법들만 모아 놓은 것이다. 십팔기라는 조선 무예의 명칭 자체를 지은 이도 바로 사도세자였다.
정조 14년 (1790년) 완성된 조선의 공식 무술교범 ' 무예도보통지 ' 는 바로 이 십팔기를 보급하기 위해 왕명으로 간행된 책이다. 이덕무, 박제가를 비롯한 당대의 실학자들이 대거 제작에 참여했으며 정조가 직접 서문을 지었다.
' 무예도보통지 ' 는 사도세자 시절 간행된 ' 무예신보 ' 를 바탕으로 새로운 내용들이 추가된 것인데, 바로 이 무예신보에 사도세자가 완성한 십팔기의 원형이 담겨 있다. 아쉽게도 이 책은 현재 전해지지 않고있다.
' 무예도보통지 ' 는 조선 시대 말까지 훈련도감 등에서 장교와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군사교본으로 사용했으며
십팔기는 무과시험의 실기과목이었다. 국왕의 호위를 담당하던 장용영에서는 십팔기만을 전문적으로 훈련하는 십팔기군과 능기군이라는 부대도 있었다.
누구보다 무예를 사랑하고 부단히 연마하여 출중한 고수의 반열에 오른 사도세자, 그 피를 이어받은 정조 역시 문무를 겸비한 군주였다. 특히 정조의 활솜씨는 신기에 가깝다는 평을 들었다.
그는 종종 여러 신료들과 활쏘기를 하여 성적이 뛰어난 자에게는 상을, 부진한 자에게는 벌을 내렸다.
정조는 신료들과 활쏘기를 하면 큰 점수차로 1등을 하는 경우가 많았고, 다산 정약용의 ' 북영벌사기 ' 에는 당시 정조가 활쏘기를 제대로 못하는 신하들을 북영에 잡아놓고 100발씩 연습하도록 지시한 정황이 그려져있다.
- 밤이 깊은 산에서 울부짖으니 큰 바람이 부는구나.
열네 살의 어린 나이에 이와 같이 호쾌하고 담대한 기상의 시를 지을줄 알았던 강철 무인 사도세자.
좁은 조선땅을 넘어 드넓은 만주대륙과 중원대륙까지 꿈꾸었던 웅혼한 심성의 소유자 사도세자.
훗날 집권세력이던 노론에 맞서 개혁적 성향을 드러내다 그들의 정략에 희생되어 젊은 나이에 그 꿈을 접고 고혼이 되고 말았지만 그가 조선의 어느 누구보다 뛰어난 무예와 커다란 이상을 품은 무인군주였다는 사실만큼은 어느 누구도 부정하기 어려울 것이다.
사도세자, 그는 조선의 국기를 만든 진정한 무인이었다.
정조대왕이 무인인가요?
정조 대왕은 흔히 역사상의 가정...
"조금만 더 살았더라면 우리의 역사는 변했을 것이다"라는 말을 가장 많이 듣는 분입니다.
그만큼 뛰어난 역량. 그보다 더 드라마틱한 삶과 죽음.... 그리고 업적을 이룩한 분입니다.
정조대왕 재위당시 조선은 아시아 최고의 문명국임을 자랑하고 있었고 흔히 말하는 태평성대를 구가하였습니다.
그렇다면 정조대왕이 오랜 세월 모든이들에게 회자되며 아직도 그분의 이른 죽음을 안타까워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지금부터 그분의 삶에 대해서 자세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정조는 잘 아시다시피 사도세자의 아들이며 영조의 손자입니다.
왕실의 적통을 이어받았으나 동궁시절부터 수차례의 암살위협에 놓여 있었고 궁내부로 정체불명의 인물들이 담을 넘어 들어와 목숨을 위협하는 초유의 사태가 벌어질 정도로 그의 입지는 불안하였습니다.
이렇게 혼란한 상황속에 살게된 그를 이해하려면 먼저 과거를 거스러 영조의 아버지였던 숙종때로 올라가야합니다.
숙종... 그 유명한 장희빈 사건의 중심 인물인 그는 역사속에서 제대로 주목받진 못했지만 영국의 헨리 8세에 버금갈 만큼 대단한 수완가였습니다.더불어 그 능력만큼이나 여색을 즐기신 분이기도 했습니다만....
당시 숙종은 노론의 여식이었던 인현왕후를 폐위시키고 소론의 지지를 받던 장희빈을 총애하며 당시 정국을 주도하게 됩니다. 숙종대왕은 장희빈과 사이에 낳은 경종을 원자로 책봉하려고 하였고 송시열을 비롯한 노론의 대다수가 원자책봉은 이르다는 핑계로 이를 늦추려하자 대노한 숙종은 이들에게 대대적인 옥사를 단행합니다.
이른바 기사환국.....
기사환국을 겪은 노론의 입장에선 장희빈은 간악한 요녀요, 소론을 비롯한 남인들은 간신이며 적신이었습니다.
허나 정치는 움직이는 파도와 같이 변하는것... 무소불위의 장희빈이 사사되는 사건이 발생하며 노론의 희망이었던 중전 인현왕후가 복권합니다.노론은 이를 기회로 원자인 경종을 몰아내고 소론을 제게하려는 움직임을 보입니다.
영민한 왕이었던 숙종은 비록 장희빈은 사사하였으나 자식인 경종을 총애하여 특단의 조치를 취합니다.
이른바 정유독대....
당시 노론의 거두였던 영의정 이이명을 일부러 밤에 입궐시키게 만들며 사관과 승지는 물론 내관까지 물리친채 이이명을 독대 함으로써 주위의 여론을 집중시키는 고도의 수완을 발휘합니다.
그리고 그날밤 이이명의 동의하에 경종은 세자로 책봉됩니다.
장희빈의 아들이었기에 경종은 태어나면서부터 소론이라는 당적이 붙었있었고, 경종이 왕위에 오르자 노론은 기사환국의 악몽이 되살아 나는듯 했을겁니다. 노론은 정유독대가 불법적이었다는 이유로 경종을 인정 할수 없다며 병약함을 이유로 경종의 배다른 동생인 연잉군(훗날 영조, 숙빈 최씨의 아들.노론의 지지를 받음)를 세자로 책봉하라는 압박을 하기 시작합니다. 엄밀히 따지면 왕위를 내어 놓으라는 협박이었던 것이었습니다.역모와 다름없는 일을 서슴없이 자행하는 노론을 향해 소론의 김일경이란 인물이 나타나 무자비한 철퇴를 휘두르기 시작하면서 노론에게 피바람이 불어닥칩니다.
그것이 신임사화.....
비록 적대관계였던 노론의 지지를 받던 연잉군이지만 경종은 배다른 동생인 연잉군을 굉장히 총애하였고 후사가 없던 경종은 결국 연잉군을 세자로 지목합니다.그리고 얼마후 경종은 후사없이 젊은 나이에 병석에서 갑자기 숨을 거두게 되고 연잉군, 즉 영조가 즉위합니다.
바로 그때 역사속에 유명한 사건중 하나인 "이인좌의 난"이 일어납니다.(이인좌는 소론출신 무장이었다)
당시 소론은 경종이 병석에 있을때 영조가 진상한 게장을 먹고나서 병이 악화되어 죽었다고 보고 영조가 경종을독살했다고 판단했으며 영조의 어머니가 숙종의 후궁이 되기전에 결혼했었던 전력(숙빈 최씨는 후궁이 되기전 궁의 잡일을보는 무수리였다. 숙종은 이런 최씨를 임신시키고 나서 후궁으로 삼았는데 당시 숙빈 최씨는 남편이 갓죽은 청산과부였다.)을 들어 숙종의 아들이 아니라는 주장을 펼치며 난을 일으킵니다...그러나 난은 평정되었으되 여파는 컸습니다.
소론이란 소론은(어사로 유명한 박문수를 제외하고, 박문수는 이인좌의 난을 진압하는 군을 지휘했다.) 모조리 주살되거나 귀양을 가게 되고 노론만이 정치를 농락하는 사태가 벌어집니다.정치의 타락은 피할수 없었으며 영조가 말하고 실행하려던 탕평책은 오히려 노론의 정치공세에 면죄부만을 주게됩니다.
요직에 남인이나 소론을 기용하려하거나 정치적 소신을 펼치려고 할때마다 노론은 "이인좌의 난때의 억울함을밝혀줄 자가 우리 노론말고 누구이겠습니까"(영조가 경종을 독살했다는 주장, 영조가 숙종의 친자가 아니다라는 주장. 영조는 평생동안 이 두가지 루머에 트라우마를 갖고 있었던 걸로 보인다. 어필절목과 영종기사를 보면 상당 부분 그런 흔적이 보인다.)라는 말로 영조를 압박합니다. 이것이 바로 신임의리 라고 말하는 노론의 정치공격이었습니다.
그런 영조를 보고자란 사도세자는 노론에 대해 반감을 갖게 되었고 영조의 흐지부지한 탕평책이 아닌 왕의 소신대로 당에 상관없이 능력위주에 정치를 펼치는... 이른바 "준론탕평"을 주장하게 됩니다.
한중록이나 영조실록에서 미치광이나 안하무인으로 표현했던 사도세자 부분이 신뢰성이 떨어지는것은 바로 이대목입니다. 어린 나이에 영조대신 대리청정을 했던 사도세자는 실무에서 엄청난 능력을 발휘했고 인격적인 부분까지 뛰어나 심지어 노론내에서도 시파라 하여 사도세자를 인정하는 무리가 따로이 생겨날 정도였습니다.
허나 노론을 노골적으로 싫어하던 사도세자를 제거하기 위해 혜경궁 홍씨의 집안을 필두로 (노론의 요구로 영조는 혜경궁 홍씨를 며느리로 맞이했다. 한중록에서 사도세자를 표현한 부분은, 혜경궁 홍씨가 노론중진의 집안이라는것과 사도세자 사후 영조가 다시는 혜경궁을 찾지 않은것, 정조가 즉위 후 사도세자의 죽음에 지대한 공헌을 한 혜경궁 홍씨의 아버지 홍봉한{정조의 외할아버지} 등 제사지낼 사촌 한명만 남기고 외가집 식구들을 도륙한것을 보아도 혜경궁이 분명 사도세자의 죽음에 일조한것으로 보여진다.혜경궁 홍씨는 순조시절 한중록을 집필했는데 사도세자의 손자인 순조에게 자신과 자신의 집안을 보존하기 위해 한중록을 통하여 변명을 한것으로 볼수 있다. 영조실록 역시 당시 노론세력이 편찬 하였던 것으로 그 진위가 변질됐을 가능성이 크다.) 궐내의 대다수가 영조에게 사도세자의 중상모략을 일삼았고 결국 모두 다 아는대로 뒤주에서 죽게됩니다.
바로 임오화변 이었습니다.
결국 노론이 죽음으로 이끈 사도세자의 아들.... 정조의 존재는 노론에게 두려움이 대상이었고 정치적 제거 대상이었을겁니다.그런 상황에서 정조는 왕으로 등극하게 되고 숙종, 영조 시절의 노력이 정조의 천재성과 조우하게 됩니다. 우선 정조는 노론의 손아귀에서 놀던 훈련도감등의 군을 재편하여 장용영을 설립하며 군의 개혁을 만들어 냅니다.(이때 만들어진 것이 무예도보통지)
또한 영의정 채제공의 상소를 받아들여 노론과 담합하며 정치자금의 근원이 된 금난전권을 폐지하는 신행통공을 발표하며 세제의 개혁을 갖고옵니다.(물론 당시 남인 채재공을 영의정에서 끌어내리기 위해 노론이 물품도고현상{매점매석으로 물건의 값을올림}을 발생시키자 정조가 노론에게 정치적 제제를 가한면도 있음)
또한 조선 시대에는 경연이라하여 우수한 양반이나 중신들이 왕을 교육시키는 제도가 있었는데 이것 역시 정조시대에는 그성격이 바뀌어 왕이 중신들을 가르치는 제도가 되어버립니다. 호학군주로 이름높던 세종대왕과 비교했을때 세종대왕이 신하들보다 우수하다고 평가받는것은 고작해야 한학 정도 였다고합니다. 허나 공부에 공부를 거듭해 정사에 등용된 중신들을 가르칠 정도의 정조는 성리학의 기본부터 문학, 예술, 무예 심지어 의학 등 어느하나 신하들이 따라 잡기 힘들었다는 기록이 있을정도 였다합니다. 강하고 똑똑치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던 어린시절의 영향도 없잖아 있기도 하겠지만, 천재라 불리던 정약용과 대등하게 학문을 논할 정도라 하니 정조 역시 천재였었나봅니다.
그리고 노론, 소론, 남인에 상관없이 우수한 젊은 인재를 등용하여 중용하는 기관, 즉 너무나 유명한 규장각을 설치합니다..
당시 노론이 규장각을 심하게 반대했었는데 그 이유는 상소를 검열하는기관인, 사간헌을 통하지않고 바로 상소를 올릴수 있는 유일한 부서였기때문입니다.당시 노론은 숙종조 이후부터 사간헌을 자신들의 손아귀에 넣었고 그것은 바로 언론을 통제하는 역할이었기에 막강한 힘이 있었습니다. 그런 상소문을 통해 탄핵이 이루어 지는 시스템속에서 규장각은 사간헌의 정치적 견제 대상이 되었던 것이죠. 이 규장각을 통해 정조는 왕권강화는 물론 정치의 정화를 꾀했던 것입니다.(현재로 따지면 국회와 정부처럼 견제하며 서로 감시하는 역할)
한편으로는 홍국영을 등용하여 왕권을 강력히 하다 여론의 견제를 받자 아무도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홍국영을 귀양보내는 등 무서울 정도의 정치력을 발휘합니다.
또한 왕권의 열렬한 지지자인 남인들 중 정약용, 채제공을 발탁하여 수원성을 쌓고,(수원성을 정조가 원한 이유는 사도세자의 능이 수원에 있었음으로 당시 사도세자의 기억을 잊지않았다는 것을 노론에게 보여주는 정치적 경고와 웅장한 능행을 통해 왕권의 존재감을 일반 백성들에 심어줌으로서 존경심을 갖게하고, 능행에 동원되는 군사들을 합법적으로 훈련시킬수 있는 방법이었다. 또한 수원성이 완성됨으로서 양반들의 세도권인 한양을 벗어나 군권과 민심을 등에 없고 왕권을 강화시키려던 목적으로 보인다.) 가문은 보잘것 없지만 골수 노론이었던 김조순(그 유명한 안동김씨 세도의 주역)의 딸을 세자빈으로 들이며 노론의 불만을 무마시키는 수완을 발휘합니다.
정조는 당시 시대상으로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던 첩의 자식, 즉 서얼을 신원시켜 관직에 등용할 수있는 길을 열어주며 규장각으로 대거 기용하는 과감함을 보입니다.물론 세도가 넘쳐흐르는 노론이 당연히 첩을 많이 두고 있었기때문에 재산 배분등의 문제로 정조의 조치에 강력히 반대하게 되죠. 훗날 노비마저 신원시키려던 정조의 행보는 여기서 막히게 됩니다. 바로 영조의 계비...정순왕후가 등장하면서 부터입니다.
골수 노론벽파인 김구주의 여동생이었던 정순왕후는 자신 역시 노론이라는 인식을 갖고 정조를 대했으며 내명부의 여인임에도 노론에 적이라 판단되면 왕족이라도 서슴없이 제거하는 무서운 여인이었습니다.훗날 강원도에서 나무 팔던 철종이 왕에 등극한게 된것도 정순왕후의 무자비한 도륙에 왕족이 씨가 말라버렸기 때문입니다.
훗날 남인출신 선비였던 이가환은 정순왕후를 "임진왜란과 맞먹는다"란 표현을 쓸 정도로 조선왕조에 막대한 피해를 입히게 됩니다.(천주교인들 대부분이 남인이었기에 천주교도를 죽인다는 명분으로 남인을 제거하기 시작한 최초의 인물이기도 하다.덕분에 평민임에도 천주교도이기에 죽어야하는 하는 사람들이 넘쳐나게 된다.) 뛰어난 왕이었던 정조도 고작 7살 차이나는 할머니지만 품계상 어른인 정순왕후를 어찌할수 없었습니다.
후에 정조대왕은 등에난 종기로 사망하게 되는데 당시 어의가 노론의 영수인 심환지의 일가 였으며 평소 정조를 경원시 했던 정순왕후가 갑자기 나타나 용태를 살핀 후 정조가 사망하게 됨으로써 숱한 의혹을 불러 일으킵니다.
앞에서 말한 사실과, 현대에 이르러 당시 어의의 처방전을 다시 살펴본 결과 수은중독을 일으킬수 있는 재료가 다량 함유되 있었으며, 정조가 죽기전 "수정전(정순왕후의 거처)을 조심하라" 라는 말을 남긴것, 후에 노론이 얻게되는 막대한 정치적 이익을 보면 암살당했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남인이던 사암 정약용 선생 역시 정조사후 귀양지에서 집필한 저서에서 "전언에 의하면.."이라는 전제로 정조대왕의 암살 의혹을 보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확실한 물증은 전혀 드러난바가 없습니다.
우수한 인재를 고르게 등용하여 관리의 부패를 척결함으로써 백성의 피해를 막고, 균역법으로 세제를 개혁하여 비리를 쇄신하고 나라의 살림을 바르게 했으며, 신해통공을 통해 시장에 다양화를 구축하고, 신문고를 부활시킴으로서 백성의 마음을 보살폈으며, 정치적 보복을 하지않고 아버지였던 사도세자의 "준론탕평"을 받들어 정치적 조화를 이룩하였으며, 군제 개편으로 군을 강성시켰고 학문의 장려로 조선조중 문맹률을 가장 낮춘 시기였으며 예술이 꽃을 피우며 김홍도나 정선같은 당대 최고의 마에스트로를 배출해 냅니다.또한 무역을 장려하여 아시아 각국의 무역상들이 그동안 닫혀있던 조선을 왕래하게 됩니다. 덕분에 젊은 인재들이 자유로이 외국을 드나들면 새로운 세상을 알게 되고, 그렇게 북학파가 탄생 하며 박지원의 "열하일기"같은 문화의 다양성이 생겨나게 됩니다.
조선 시대의 르네상스.....숙종이 시작하여, 영조가 기틀을 다지고, 정조가 꽃피운 최고의 시대 였습니다.
ps~ 기본적으로 노론, 소론, 남인의 차이를 아셔야 합니다. 아마 학교에선 가르치지도 않을테니...
노론 : 주자학의 신봉자들로 우암 송시열을 기조로 삼고 있습니다. 심지어 공자보다 주자를 더욱 높게 평가하며 공자의 말씀이라 전해지는 사서나 삼경보다도 주자의 역학계몽을 우선시 했을정도였습니다. 주자의 이론중 "붕당은 반드시 필요한 것이며 군자는 마땅히 군자의 당을 만들어 군자의 당에 들어야한다. 비록 왕일지라도 군자가 있는 당이면 스스로 그당에 들어야한다."를 바탕으로 "사대부와 군왕에 차이는 없다"라는 관점을 갖고 있습니다. 아이러니 하게도 선조시절 당파 싸움에 중립적인 위치를 고수하며 주자설을 비판했던 율곡 이이의 사상이 노론의 정치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는데 "이와 기는 다른면서도 하나다"라는 이기일원론을 "군신간에 차이는 없다"라고 해석함으로써 왕권보다 사대부의 신권이 더 우월하다는 입장을 취하게 됩니다.
이론적인 성리학보다 현실정치 개혁에 초점을 두었던 노론은 처음에는 왕권의 폭정과 특정인물이나 무리에 의한 독재를 견제한다는 취지를 갖고 있었으나 점차 퇴색하여 기득권을 위한 당이 되어버렸습니다. 또한 주자의 신봉자들이기에 중화사상에 심취하여 극심한 "사대주의 사상"을 갖고 있었으며 청의 여진족 정권이 세워지자 "명,송대의 훌륭한 중화문화는 조선에만 남았다"하여 스스로 "소중화"를 자처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이들의 특징은 예술에서도 드러나는데, 정선의 "진경 산수화"를 으뜸으로치며 "조선이야 말로 주자의 정신을 제대로 계승한 마지막 땅"이라는 믿음을 보입니다.
몇번씩 말하지만 너무나 현실적인 노론인들이 왕권에 그토록 시비를 걸면서도 결국 조선후기 소론, 남인을 몰아내고 정권을 장악할수 있는 이유가 무엇일까요...
바로 "산림을 우대하고 국혼을 놓치지 말라"는 이들 전략덕입니다.
산림이란 현재의 재야인사들로 공적교육기관이 없던 시절 여론을 조성하고 장래 관직에 오를 인재들을 가르치던 세력임다. 사원 같은곳이 예가 되겠죠.
국혼은 말그대로 세자빈이나 왕비가 되는 것입니다. 숙종조 부터, 노론은 대부분의 중전을 배출함으로써 왕권에 안전장치를 걸어두는 치밀함을 보입니다. 조선 역사상 가장 큰 붕당이었습니다.
흔히 잘모르는 분들이 벽파와 시파를 다르다 보시거나 시파가 소론이라고 말씀하시는 오류를 범하시던데....
위에서 말했듯이 사도세자의 등장으로 벽파와 시파로 나눠지는데 벽파는 사도세자를 무조건 죽여야 한다는 강경파 들이었고, 시파는 사도세자에게 감화되어 동정적이었던 온건파로 보시면 됩니다. 그외엔 다같습니다. 당이 갈리거나 다른 노선을 걷지도 않습니다. 사도세자에 대한 견해만 다른겁니다.
(노론내에 아~~ 주 예외적이 경우가 생겨나는데 하나는 바로 홍국영이다. 혜경궁 홍씨와 같은 집안 사람이므로 당연히 태어나면서부터 노론이것만 화완옹주의 양아들이자 노론의 후기지수로 손 꼽히던 정후겸을 비롯하여 자신의 아재비뻘인 홍인한, 정순왕후의 오빠이자 노론벽파의 실세였던 김구주를 축출하는 등, 정조의 왕권강화의 1등공신이 된다. 다른하나는 바로 박지원, 박제가 로 대표되는 북학파다. 노론 세도가 출신임에도 정쟁에 회의적이며 정조의 개혁에 최대한 협조하며 외국의 선진문물은 배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마지막은 북학의 거두였던 박제가의 제자이자 불세출의 기인이던 추사 김정희 이다. 정쟁에 휩쓸려 귀양을 갈 정도로 정치와 무관한 삶을 살지는 않았지만 당대의 기인이였던 추사에겐 당쟁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걸로 보인다. 윤상도의 옥사에서도 자신의 소신을 위해 목숨을 내놓으려 했다. 골수 주자학파였던 노론이라면 까무러칠만한 일도 서슴없이 했는데 바로 구족계를 받고 스님이 된것이었다. 위에서 말한 노론의 산수화에 대한 견해에도 "말짱 개소리"란 태도를 취했다. 재밌는 것은 그가 7세때 "명필이 될것이다"라는 말을 듣게 되는데 그말을 한것은 다름아닌 당시 영의정이자 남인의 지도자였던 채재공이었다.)
소론 : 원래는 노론과 함께 서인이라는 당이었으나, 노론의 기조가 된 송시열과 그 제자였던 윤증이 불화를 일으켜 남구만, 박세채 등이 윤증과 함께 따로 일으킨 붕당입니다. 엄밀히 말하면 노론과 정치적 노선은 비슷하나 그방법론이 다르다 하겠죠. 당시 송시열은 정치적 변화에 따라 적대관계였던 당과 손을 잡고 반대당을 완전히 몰살해버리는 너~~~~~~~~~~~~~~~~~무나 현실적인 정치수단을 썼으며 가혹할 만큼 노론에 반대하는 세력을 처단해 버렸습니다. 그러자 소론은 송시열의 방법이 너무나 비열하며 "붕당의 의미를 정치적 보복으로 퇴색시킨다"고 강력히 비판합니다. 더욱이 당시 정쟁에서 밀려난 남인세력을 몰살시켜야한다는 노론에 주장에 "자신의 생각과 다르다 해서 죽여야만 하는 것이 정치인가"라며 귀양 정도의 처분을 주장하며 끝없는 대립을 펼치게 됩니다.
또한 정치개혁을 주장하던 송시열이 남인을 몰아내기위해 부패의 상징이자 척결대상이던 훈구세력과 손을 잡는 이중적인 태도를 취하자 "사림의 정신을 잊었다"며 노론자체를 부정하게 됩니다. 이념적으로 노론에 가까웠던 소론이 정치적으로 남인에 가까워지게 되는 배경이 됩니다.(예를들면 소론이었던 박문수가 암행어사 시절 노론중진들의 부패에 분노한것 처럼 소론은 현실의 개혁을 추구하면서도 원리원칙을 상당히 중요시 여겼다)
위에서 말했다시피 이인좌의 난 이후 거의 몰살당합니다.
소론 역시 잘 모르는 분들이 남인과 뭉뚱거려서 얘기하거나 같은걸로 아시던데 완전 다릅니다.
남인과는 이념자체가 다른고 심지어 효종, 현종 조에는 남인과 당쟁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남인 : 붕당초기부터 세력이 약했던 남인은 허목과 유성룡을 빼놓고 얘기할수 없을겁니다.
허목은 우암 송시열과 그유명한 예송논쟁을 야기시키며 남인의 세력신장에 지대한 공헌을 하며 영남남인의 기조가되었고, 유성룡 역시 재야에 있던 남인들에게 정계의 문을 열어주는 결정적 기회를 만들며 각당이 평화롭게 공존해야 한다는 기호남인의 기조가 된 인물입니다.
남인의 이념은 정통적인 성리학으로 흔히 덕치로 표현되는 "어질고 덕이있는 군주에게 충성을 다하여 나라를 안정케 한다"라는 공자의 사상을 충실히 따르는 것입니다. 요순시대로 대표되는 태평성대를 이상시 하며 퇴계 이황의 사상을 따르는데 바로 이기이원론입니다. "이와 기는 다르나 서로 의존해야한다"라는 퇴계학파 사상을 바탕으로 "군신간에 의리"를 중요시 하는 모습을 보입니다. 또한 이황의 "강력한 왕권을 통해 훌륭한 인재를 적재적소에 배치해야 한다"라는 정치이념을 펼칩니다.
후에 이황의 이사상은 일본 "메이지유신"의 정치적 기반의 중심이 될 정도로 뛰어난 왕권중심주의 사상입니다.
주로 보수적이고 이론가가 많은 남인세력은 인재는 많았으나 그 학자적인 기질때문인지 노론의 교활한 정치력에 무수히 죽임을 당합니다. 원래 많지않던 숫자의 남인은 정조 사후 급격히 몰락합니다. 일례로 정조사후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던 정약용은 다시는 중앙정계로 돌아오지 못하며 형제모두가 사사당하게 됩니다. 전통적으로 남인이었던 파평윤씨 가문은 살육이라고 할 정도의 피해를 입게 됩니다. 이가환, 이익운, 권철신, 이승훈 등 남인이란 남인은 모조리 죽거나 귀양을 가게 됩니다.
이들 역시 노론처럼 정치적 이념이 그림에서 드러나는데 관념산수화라고 할수 있는 전통적인 화풍을 따릅니다.
즉, 실물이 아닌 상상속의 모습을 그림에 담아내는것인데, 오랜전 성군이 다스렸던 요순시대를 그리워하는 그들의 이념적 사상이 잘 드러나는 것이라 하겠습니다. 남인이 당시 최고로 쳤던 인물은 강세황과 그이름도 유명한 강세황의 제자 김홍도입니다.
왕에 대한 충성을 최고의 덕목으로 삼던 남인의 사상은 정조 사후 그 명맥만 가까스로 유지하다 훗날 시일야 방성대곡의 장지연 선생께 까지 전해지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