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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어가는 말> 약산 김원봉은 민족사를 몸으로 이끌고 나간 비운의 영웅이었다. 약관의 나이에 의열단을 창단, 조선총독부 폭파, 종로경찰서 폭파, 부산경찰서 폭파, 동약척식주식회사 폭파 등 치열한 투쟁을 전개하여 민족의 자긍을 지켰으며 조선의용대를 창설해 일본군과 치열하게 싸웠다. 일제 강점기에 조선 민족은 임시정부의 존재는 몰라도 김약산과 의열단은 모두 알았다. 그는 백범 김구와 쌍벽을 이루는 독립투사였다. 8․15 광복 후 건준 내각 군사부장에 지명됐으며 남북 분단과 단독정부 수립을 몸으로 막아 분투하다가 일신에 위협이 닥쳐오자 월북했다. 북한에서 국가검열상과 노동상을 지내며 민족화합을 부단하게 주창했으나 숙청되었다. 그의 전기는 1947년 박태원에 의하여 「약산과 의열단」이라는 제목으로 한번 쓰여졌다. 이번에 탈고한 평전은 200자 원고지 2000매에 달한다. 이 원고는 [체 게바라 평전]을 낸 실천문학사에서 출판할 예정이다. -------------------------------------------- 제1부 출생과 성장 제1장 애국혼의 고장에서 태어나다 약산 김원봉(若山 金元鳳)은 1898년 8월 13일 경상남도 밀양군 밀양읍 내이동 901번지에서 태어났다. 그 날 오전, 한여름의 뜨거운 해가 한낮을 향해 치달아 올라가는 무렵이었다. 여느 날이면 삽살개가 나른하게 기지개를 펴고 낮닭이 괜히 꼬끼오 하고 우는 한가한 시간이었다. 그러나 새벽부터 이어진 진통에 몸이 약한 산모가 거의 기진한 터라 집 안팎은 아슬아슬한 긴장이 흐르고 있었다. 마침내 길고 긴 진통이 끝나면서 산파 할머니가 “고추를 달았어요!”하고 외치는 소리와 함께 방문을 열었다. 그리고 우렁찬 아기 울음소리가 울려 나왔다. 마당과 대청을 오르내리며 서성거린 젊은 아버지 김주익(金周益)은 혼인 1년 만에 첫아들을 낳은 기쁨에 입이 귓바퀴까지 찢어져서 벙글거렸다. 무더위와 긴장으로 펑하게 젖은 베잠방이의 단추를 풀면서 대문을 밀고 밖으로 나갔다. 감나무 가지에서 매미 여러 마리가 동시에 울기 시작했는데 그것이 축복처럼 느껴졌다. 그는 집 앞을 흐르는, 해천(垓川)이라는 이름을 가진 실개천으로 걸어 내려갔다. 고운 모래 바닥에 맑고 잔잔한 여울을 만들며 흐르는 해천의 물을 손으로 움켜 얼굴과 목을 닦았다. 그러다가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이게 웬일인가. 거무튀튀하고 아이들 팔뚝처럼 큰 뱀장어 하나가 힘차게 꿈틀거리며 기어오르고 있었다. 그것을 잡아 아기를 낳느라 애쓴 아내에게 고아 줄까 생각하다가 그는 마음을 고쳐먹었다. 오늘은 살생을 금해야 한다고 느껴졌던 것이다. “허참, 자네가 아들을 낳았는데 뱀장어가 실개천을 타고 오르다니 좋은 조짐이야.” 언제 물가로 내려왔는지 옆집 윤희규(尹憘圭)가 쥘부채로 부채질을 하며 말했다. 윤희규는 무과 병과에 급제한 후 정3품인 통정대부(通政大夫)로서 시종원(侍從院)의 시종직에까지 올랐다. 나라가 망하면서 물러났지만 관복을 입어보았고, 큰 기와집을 짓고 넉넉하게 살았다. 김주익의 집안과 인척관계이기도 했다. 김주익의 조모가 윤씨 가문에서 시집온 터였다. 김주익은 윤시종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아기 이름을 지어 주세요. 돌림자는 새 봉(鳳)자입지요.” 김주익은 태어난 아들이 윤희규 시종처럼만 산다면 좋겠다고 생각해서 작명을 부탁했다. 윤희규는 손가락으로 년, 월, 시의 음양과 오행을 꼽으며 자기 집으로 들어가서 사랑채에서「주역(周易)」을 꺼내 툇마루에 펼쳤다. 책을 들여다보며 아기의 사주(四柱)를 풀어 본 그는 입을 떡 벌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는 거기까지 따라간 김주익에게 말했다. “이렇게 좋은 사주는 처음 보네. 장상(將相)이 될 팔자를 타고 났어. 장남이기도 하니 으뜸 원(元) 자를 넣어 원봉이라고 하게.” 김주익은 ‘장상’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알고 어깨가 곱사등이처럼 으쓱 올라갔다. 이 때 김주익이나 윤희규나 이 날 태어난 아기가 민족정기를 만천하에 떨치며 한국 독립운동사의 한 획을 긋는 걸출한 인물이 되리라고는 상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이미 3남 1녀를 가진 윤희규에게서 두 해 뒤 넷째 아들이 태어나, 이 날 출생한 김주익의 아들을 도와 함께 이름을 빛내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두 해 뒤 태어난 윤희규의 아들은 뒷날 의열단과 조선의용대의 제2인자가 된 윤세주(尹世冑)이다. 김약산의 가문은 김해김씨 참판공파에 속했다. 김주익은 30마지기의 땅을 가진 젊은 농부였다. 김주익의 부친은 역관으로서 한양 출입이 빈번했다고 한다. 집이 부산에서 가까운 밀양인 것으로 미루어 일본어 역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조선시대에 역관은 중인 계급이었다. 그가 가진 토지는 부친이 역관을 하여 마련한 것이었다. 김주익은 처복이 없는 편이었지만 참으로 많은 자식을 낳았다. 장남 원봉을 낳은 첫 아내는 월성 이씨로 이름이 이경념(李京念)이었는데 세 해 뒤 차남 경봉을 낳고 곧 병사했다. 그는 영양 천씨인 천연이(千蓮伊)와 재혼해서 장녀 복잠과 6남 봉철, 7남 봉기, 8남 덕봉, 9남 구봉, 차녀 학봉을 낳았다. 그런데 밖에서 또 박순남(朴順南)이라는 여자를 보았다. 장녀 복잠 밑으로 3남 춘봉, 4남 용봉, 5남 익봉이 태어났는데 모두 그녀의 소생이다.1) 김약산의 외가는 밀양군 부북면 감내리에 있었다. 그의 생모가 일찍 세상을 떠나고, 부친 김주익이 재혼하고 또다른 여자와 관계를 맺었기 때문에 멀어졌다. 거기다 장남인 약산이 약관의 나이에 망명한 터라 그의 집안과 연결이 끊어졌다. 약산에게는 김주오(金周五)라는 이름을 가진 숙부가 있었는데 밀양읍에서 농사를 지었다. 그리고 아버지보다 손아래인 고모가 하나 있었다. 그녀는 밀양의 대표적 독립운동가인 황상규과 결혼했다. 황상규는 일찍부터 처조카인 약산의 명석함을 보고 총애했고 약산도 그를 몹시 따랐다. 황상규의 애국계몽 운동이나 광복회 투쟁은 약산의 의열단 창단에 큰 영향을 끼쳤다. 실제로 약산이 의열단을 창설할 때 그가 뒤에서 도왔다. 약산에게는 이름이 알려지지 않은 이모할머니가 있었다. 할머니의 언니였던 그녀는 처녀 때 불교에 입문해 승려가 되었는데, 뒷날 동생의 손자인 약산의 교육에 관심과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한반도의 남쪽 내륙에 깊숙이 들어앉은 밀양. 그 곳에 사는 사람들은 늘 품에 안기는 듯한 포근한 느낌을 받았는데 이는 풍부한 강물 때문이었다. 낙동강이 북쪽에서 흘러와 밀양의 서쪽을 감듯이 에워 돌아 흐르고 남천강(南川江)이 밀양의 중심을 관통해 나간 뒤 낙동강으로 합수되었다. 김약산이 태어나서 자란 밀양의 옛 읍 소재지는 남천강의 본류가 시내 중심을 두 번 흐르고 강의 지류가 외곽에서 이리저리 물뱀들처럼 머리를 돌리며 흐르고 있었다. 또 하나 밀양이 사람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것은 아름다운 풍광과 전설과 민요였다. 화악산(華嶽山)의 한 활기인 종남산(宗南山)의 부리가 밀양 중심부까지 뻗쳐와 강 앞에서 멈추었다. 이 산이 아동산(衙東山)인데, 산기슭에는 진주의 촉석루, 평양의 부벽루와 함께 조선의 3대 명루로 일컬어지는 영남루(嶺南樓)가 그림 같은 자태로 앉아 있었다. 목숨을 바쳐 순결을 지킨 ‘아랑의 정절’ 설화와, ‘동지섣달 꽃 본 듯이 날 좀 보소’하는 아름다운 민요의 근원이 되는 누각이었다. 이렇듯 밀양은 평화 시에는 있는 듯 없는 듯 아름답고 고요한 고장이지만 나라가 누란(累卵)의 위기를 맞으면 일어나 힘차게 꿈틀거린 내력을 갖고 있었다. 임진왜란 때 밀양부사 박진(朴晉)이 군민을 이끌고 치열하게 항전한 역사가 있었고 밀양 출신인 사명대사가 승군을 이끌고 연거푸 대승을 거둔 기록이 있었다. 그 징표로 남아 있는 것이 표충사(表忠寺)와 표충비각이었다. 표충사는 승병장 사명대사를 모신, 다분히 유교적 냄새가 짙은 사찰이었다. 왜적과 싸워 승승장구한 사명대사는 왜란이 끝난 뒤 조정의 요청으로 왜국에 건너가 왜왕과 담판해서 포로로 끌려간 동포 3,500명을 데리고 돌아왔다. 대사가 입적하자 조선 조정에서는 그의 공적을 기리기 위해 영정사(靈井寺)라는 사찰 이름을 표충사라 고치게 했다. 그리고 장검과 가사(袈裟) 등 사명대사의 유물 2백여 점, 대사의 스승이자 승병장인 서산(西山)대사와 기허(騎虛)대사의 영정을 모시게 했다. 표충사의 영정들은 사람들에게 엄숙히 묻는 듯했다. 나라가 위기에 빠지면 그대는 어찌하겠는가, 하고. 사명대사의 공적을 기록한 표충비는 나라가 불행한 운명을 맞으면 눈물을 흘렸다. 1905년 을사조약 때도, 1910년 강제 합병 때도 멀쩡하던 비석에서 눈물처럼 줄줄 물이 흘러 내렸다. 그럴 때 사람들은 표충비가 무언으로 하는 말을 알아들었다. 어서 일어나 나라를 구하여라. 그리하여 밀양사람들은 표충사와 표충비를 보며 애국 충절을 늘 가슴에 품고 살았다. 옛날에 밀양 시가지는 고성(古城)의 서문 앞에서 뚫려나간 큰길을 중심으로 둘로 나뉘어져 있었다. 왼쪽을 노하(路下), 오른쪽을 노북(路北)이라 했는데 대체로 노하에는 부자들이, 노북에는 가난한 사람들이 살았다. 약산의 집은 서문에서 가까운 노하에 있었다. 해천 앞에 있는 제법 큰 초가집이었다. 해천은 밀양 고성의 해자(垓字) 구실을 했던 개천이라 붙여진 이름이었다.2) 악산의 가족은 약산이 의열단 투쟁으로 이름이 크게 떠오르던 1925년 경 이 곳 내이동 901 번지를 떠나 4킬로미터쯤 떨어진 부북면 감천리로 이사했다. 약산의 항일투쟁으로 인해 경찰이 핍박을 해서 이사했다는 설이 있으나 그렇지 않다. 생존해 있는 그의 누이 학봉 씨의 말에 의하면 아버지 김주익이 밀양 읍내에서 피륙장사를 벌였다가 실패하여 전답을 팔아 빈털터리가 되고 소작농으로 전락한 때문이었다. 약산이 태어난 1898년은 간지로 임술년, 왕조 연호로 광무(光武) 2년으로 불리던 해였다. 조선 왕조는 지난해 국호를 대한제국으로 고치고 제왕에 대한 호칭도 황제로 바꾸었으나 국운은 기울대로 기울어 일본과 러시아 등 열강의 침탈 야욕 앞에 바람 앞의 등불처럼 아슬아슬하게 명맥을 지키고 있었다. 일본의 무뢰한 낭인들이 왕비를 참혹하게 시해한 해에 산불처럼 일어난 의병도 기세가 꺾여버린 뒤였다. 만민공동회와 독립협회도 강제 해산당하거나 지도자들이 체포당했고 애국단체들과 선각자들은 마치 침몰하는 배처럼 기울어가는 나라를 살리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하고 있었다. 조선반도를 둘러싼 열강의 각축은 극에 달했다. 러시아와 일본은 제멋대로 조선에 대한 이권을 농단하며 로젠 니시 협정3)을 맺었다. 러시아는 한로(韓露)은행을 설립했고 일본은 정부를 협박해 군산과 성진, 마산을 강제 개항하게 했다. 미국은 조정을 위협해 전기와 전차, 수도의 부설권을 손에 넣었으며 독일은 광산 채굴권을 차지했다. 김약산은 유년기에 작은 병치레도 없이 무럭무럭 잘 컸다. 아버지 김주익은 원봉이 여섯 살이 되자 서당에 보냈다. 아이는 총명하여「천자문」과「명심보감」과「소학」을 읽어 나갔다. 이 무렵, 조선 왕조의 국운이 절망적으로 기울었고 밀양 땅에 그 영향이 서서히 미쳐 오고 있었다. 애국과 투혼의 고장 밀양의 정신은 꿈틀거리기 시작했고 선각자들이 몸을 던져 앞장서 나갔다. 윤세용(尹世茸) ․ 윤세복(尹世復) ․ 전홍표(全鴻杓) ․ 손일민(孫逸民) ․ 김대지(金大池) ․ 황상규(黃尙奎) 등이었다. 윤세용과 윤세용은 형제였다. 그들은 천석지기 재산을 정리하여 교육사업과 애국계몽, 그리고 독립투쟁에 앞장섰다. 윤세용은 1918년 길림(吉林)에서 무오독립선언서4)에 서명했으며, 이회영(李會榮) ․ 이시영(李始榮) 6형제들과 신흥무관학교의 전신인 신흥학교의 설립에 참여했다. 윤세복은 대종교에 입문해 시교사(施敎師)가 되고 3세 교주를 지냈으며 대종교의 정신을 항일투쟁으로 밀고 갔다. 전홍표는 사재를 털어 밀양에서 동화(同和)학교를 세워 학동들의 애국심 함양에 진력했다. 손일민은 1912년 만주로 망명하였으며 무오독립선언서에 고향 선배인 윤세용과 함께 서명하였다. 그 뒤 북로군정서에서 참모로 있었다. 그가 길림에 근거지를 잡은 것은 그 뒤 밀양 출신 독립투사들이 그곳으로 진출하는데 큰 힘이 되었다. 김대지는 전홍표가 세운 동화학교에서 교사로 일했으며, 만주로 망명하여 길림과 봉천(奉天)에서 비밀결사를 조직하려다 체포당해 복역했다. 황상규는 청년기에 교육 사업에 힘썼으며「동국사감(東國史鑑)」이라는 역사 교과서를 직접 저술하기도 했다. 1913년 경북 풍기에서 조직된 대한광복단에 참가했고 일제에 쫓기게 되자 만주 길림성으로 망명했다. 북로군정서를 조직에 참여하고 재무총책을 맡아 직접 항일투쟁에 나섰다. 그들의 투쟁은 자라나는 학동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다. 읍 단위 지역이면서 13,000명이나 되는 인원이 참가한 3․1만세 시위나, 약산 김원봉과 윤세주 ․ 김상윤(金相潤) ․ 최수봉(崔壽鳳) ․ 한봉인(韓鳳仁) ․ 한봉근(韓奉根) 등 의열단과 조선의용대의 중심인물들이 밀양에서 배출된 것은 그런 분위기 때문이었다. 실제로 밀양 청년들이 신흥무관학교로 간 것은 윤세용의 영향 때문이었다. 그리고 김대지와 황상규는 의열단 창단을 도왔으며 창단된 뒤에도 고문 역할을 했다. 1) 그의 자녀 11명 중 익봉은 병사했다. 장남 김약산이 점차 좌익으로 기울자 여럿이 거기 가담했고 보도연맹에 가입했다가 봉철, 봉기, 덕봉, 구봉이 처형당했다. 지금은 막내인 학봉 씨만 생존해 밀양에 살고 있다. 2) 김약산의 생가는 헐리고 그 자리에 검정색 원목으로 지은 2층 카페 건물이 앉아 있다. 바로 옆집 내이동 880번지 윤세주 생가는 대지가 약산의 집터보다 3배쯤 넓다. 전면에 2층 주택이 서 있으나 뒤편에 옛 기와집이 남아 있다. 두 집 앞을 흐르던 해천은 복개되어 있다. 3) 1898년 4월에 러시아와 일본이 만주와 조선반도에서의 충돌을 피하기 위해 맺은 조약. 두 나라가 조선에서 갖고 있는 경제·정치적 이해관계를 서로 승인하였다. 4) 1918년 음력 11월 만주와 노령에 망명한 인사들이 참여한 대한독립선언서. 최초의 독립선언이며 무오년에 선포했다 하여 그렇게 부른다. 조소앙이 기초했고 김교현 ․ 김동삼 ․ 신규식 ․ 정재관 ․ 여준 ․ 이범윤 ․ 박은식 ․ 이시영 ․ 윤세복 ․ 이동녕 ․ 신채호 ․ 김좌진 ․ 손일민 ․ 황상규 등 39명이 서명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