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대 교수 124명이 3일 "노무현 전 대통령에 대한 검찰 수사과정은 이전 정권에 대한 정치보복 의혹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며 정부 사죄를 요구했다. 이들은 또 촛불시위 참가자 사법처리, 대운하 변칙 추진, 대북정책 위기, 용산 참사 등으로 민주주의가 위기로 몰리고 있다며 ▲야당과 시민단체를 국정 동반자로 받아들이고 ▲표현·집회·결사 자유를 보장하며 ▲용산 참사 피해자에게 보상하라고 주장하는 시국선언문을 발표했다.
이번 선언을 주도한 교수들 중 상당수는 민주화를위한전국교수협의회 소속으로 지난달 26일 전세버스를 내 봉하마을 노 전 대통령 빈소에도 다녀왔다고 한다. 선언을 주도한 교수들은 5년 전 노무현 대통령 탄핵반대 서울대 교수 시국성명 때도 중심에 섰었다. 현재 서울대 전체 교수는 1786명이다.
선언문에서 보듯 서울대 교수들이 시국 현안에 대한 정치 발언에 나선 직접 계기는 노 전 대통령의 갑작스러운 죽음이다. 노 전 대통령 사건은 두 가지 부분으로 구성돼 있다. 한 부분은 노 전 대통령과 그 가족이 박연차라는 기업인과 가졌던 복잡한 금전거래다. 노 전 대통령 일가는 박 회장에게서 현금으로만 100만달러, 500만달러, 40만달러 등 모두 640만달러를 받았고, 이 돈의 상당 부분은 자녀의 주택 구입 또는 자녀가 대주주로 있는 회사 경영 자금으로 쓰였다. 노 전 대통령측 주장처럼 이 돈거래가 갚을 필요가 없다는 '자연 채무' 또는 '투자'였느냐, 아니면 검찰 주장처럼 '포괄적 뇌물'이냐에는 논란이 있다.
노 전 대통령 사건의 또 다른 부분은 검찰이 노 전 대통령 일가의 이런 돈거래를 밝혀내는 수사 과정이 정상적이었느냐, 무리를 범했느냐 하는 것이다.
세상사를 논리적으로 분석하고 가르치는 것이 본분인 교수들의 선언문이라면 노 전 대통령 사건의 이런 두 가지 구성 요소에 대한 분명한 도덕적 법적 가치판단을 담고 있어야 한다. 노 전 대통령의 금전거래는 전두환 노태우 전 대통령처럼 군부 출신 대통령들의 부패 액수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금액이니 무시하고 넘어가자거나, 아니면 대한민국의 발전 정도나 수준으로 보면 대통령이 그 정도 돈을 만지는 것을 불법이라 할 수 없다고 밝혀야 한다. 그게 아니라면 대한민국이 법치국가인 이상 대통령의 불법적 돈거래는 어떤 경우에도 법의 심판에서 예외가 돼서는 안 된다고 분명한 입장을 밝혀야 마땅하다. 다음으로 검찰 수사 과정의 편법(便法) 탈법(脫法) 무법(無法) 요소가 있다면 그것이 무엇인가를 정확히 지적하고 대통령의 사과나 검찰 수뇌부의 인책을 요구할 일이다.
그러나 대한민국 최고 지성이라는 서울대학 교수들의 선언문이 노 전 대통령 사건의 실체적 진실에 대한 가치판단은 슬쩍 건너뛰면서 수사 절차상의 문제점만 전면에 부각시키고 나왔다. 직업적 운동권의 선언문이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대한민국 지성(知性)을 길러내는 서울대학 교수들조차 죽음은 모든 걸 덮어버리고 만다는 도덕적·법적 허무주의(虛無主義)에 빠져 허우적거려서는 대한민국의 선진화 가능성은 사라진 것이나 다름없다.
한 나라의 최고 지식인이라면 일반인보다 한 단계 위에서 이런 문제들을 고민하고 균형과 역사의식에 기초해 해법을 제시하는 성숙한 모습을 보여야 한다. 사회가 둘로 쪼개져 한 치 앞을 내다보기 어려운 때 일부 대학교수들마저 이를 부채질하고 나선다면 우리 사회는 정말 미래가 없다.
조선 입력 : 2009.06.03 23:17
다음은 서울대 교수들의 시국선언 전문
이명박 대통령과 현 정부는 국민적 화합을 위해 민주주의의 큰 틀을 지켜나가야 한다
우리 국민은 누구나 전직 대통령의 비극적인 죽음 앞에서 큰 아픔을 겪고 있다. 그러나 전국 각지에 길게 늘어선 조문 행렬은 단지 애도와 추모의 물결만은 아니었다. 국민 한 사람 한 사람이 착잡하기 이를 길 없는 심경으로 나라의 앞날을 가슴속 깊이 걱정하는 모습이었다.
서로 다른 정치적 입장을 넘어서서 각계각층의 온 국민이 하나 되어 전직 대통령의 국민장을 치러낸 것을 계기로 우리 모두는 새로운 길을 열고 있으며 또 열어야만 한다.
지난 수십 년간 온갖 희생을 치러가며 이루어낸 민주주의가 어려움에 빠진 현 시국에 대해 우리들은 깊이 염려하고 있다. 작년 ‘촛불집회’에 참여한 일반 시민들에게까지 소환장이 남발되었고 온라인상의 활발한 의견교환과 여론수렴이 가로막혔으며, 이미 개정이 예고된 집회 관련 법안들의 독소조항도 시민사회의 강한 비판에 부딪히고 있다.
현 정부가 출범한 이후 언론의 자유와 독립성 또한 훼손되었다. 주요 방송사가 바람직하지 못한 갈등을 겪는가 하면, 국회에서 폭력사태까지 초래한 미디어 관련 법안들은 원만한 민주적 논의절차를 거쳤다고 말하기 어렵다. 여야의 동의로 지난 3월 미디어발전 국민위원회가 국민적 합의 도출을 위해 출범했지만, 여당 측 위원들이 회의 공개나 국민여론 수렴을 반대함으로써 위원회는 표류하고 있다. 국민 다수가 언론법 처리 강행 방침을 부정적으로 인식하는 최근의 여론조사 결과를 굳이 상기하지 않더라도, 이런 흐름은 민주주의의 기반인 언론의 자유를 허물어뜨리는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 뿐 아니다. 현직 대법관의 ‘촛불집회’ 재판 개입 사건에서 보듯이, 현 정권은 사법부의 권위와 독립성에 대한 국민적 신뢰에 상처를 입혔으며, 그에 따라 재판의 독립을 수호하려는 전국 법관들의 반발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국민여론에 따라 일단 포기했던 ‘한반도 대운하’는 ‘4대강 살리기’로 탈바꿈하여 되살아나고 있으며, 지난 십여 년 동안 대북정책이 거둔 성과도 큰 위험에 처했다. 특수고용직 노동자가 목숨을 끊고 비정규직 노동자가 기본권 보장을 요구할 때 집회의 강제 해산과 노동자 대량연행과 구속으로 맞서는 일 또한 구시대적 대처임이 분명하다.
문제는 정치노선의 차이나 이념의 대립이 아니라 기본적인 인권 존중과 민주적 원칙의 실천이다. 모든 국민의 삶을 넉넉히 포용하는 열린 정치를 구현하는 정부의 노력이 참으로 절실한 시점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전직 대통령 관련 검찰 수사 과정 또한 이전 정권에 대한 정치보복의 의혹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검찰은 국가원수를 지낸 이를 소환조사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후 3주가 지나도록 사건 처리 방침을 명확히 밝히지 못하고 추가 비리 의혹을 언론에 흘림으로써 전직 대통령과 가족에게 견디기 힘든 인격적 모독을 집요하게 가했다. 이는 엄정한 공직자 비리 수사라고 하기 곤란하며 상식에서 벗어난 것이었다.
되돌아보면 지난 1월 용산 철거민 농성에 대한 무모한 진압으로 빚어진 참사는 올해 벌어질 갖가지 퇴행적 사건을 예고했다. 용산 참사의 희생자들은 아직 장례도 치르지 못하고 있으며, 검찰이 수사기록 중 핵심적인 대목의 공개를 거부함으로써 재판도 정상적으로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지난 5월 22일 서울 서부지법 민사12부가 ‘도시 및 주거환경 정비법’이 “세입자의 재산권, 주거권, 인간다운 생활을 할 권리를 침해한다”며 위헌법률심판을 제청한 사실에 주목하면서 현 정부의 근본적인 자기 성찰을 기대한다.
이명박 대통령과 현 정부가 전직 대통령에 대한 범국민적 애도 속에 주어진 국민적 화해의 소중한 기회를 잘 살리고 국민의 뜻에 부응하기를 우리는 간절히 희망하며, 다음의 구체적 요구사항을 제시한다.
1. 이명박 대통령은 국정의 최고 책임자다. 이 대통령이 스스로 나서서 국민 각계각층과 소통하고 연대하는 정치를 선언해야 한다. 더불어 현 정부와 집권 여당은 다른 정당과 시민사회단체를 진심으로 국정의 동반자로서 받아들여야 한다.
1. 현 정부는 민주사회의 기본권인 ‘표현의 자유’, ‘집회와 결사의 자유’, ‘언론의 자유’를 보장해야 한다.
1. 현 정부는 전직 대통령 관련 검찰 수사의 문제점을 인정하고 사죄해야 하며, 정적이나 사회적 약자에게만 엄격한 검찰 수사에 대한 근본적 반성과 개선이 이루어져야 한다.
1. 현 정부는 용산 참사의 피해자에 대해 국민적 화합에 걸맞은 해결책을 제시하고, 경제 위기 하에서 더 큰 어려움에 처한 비정규직 노동자 등 소외계층의 요구에 귀를 기울이고 그들의 기본권을 보장해야 한다.
이명박 대통령과 현 집권층이 우리 국민 모두의 가슴에서 타오르고 있는 민주적 요구에 대해 진지하고 성의있게 대응함으로써 지금의 어려운 상황을 국민적 화합과 연대를 바탕으로 한 민주주의의 큰 길로 나아가는 전환점으로 삼을 것을 간곡히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