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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르비아의 밀로셰비치 대통령은 1992년 4월 27일 신유고슬라비아 연방 공화국을 선포했다. 구유고슬라비는 6개 공화국 2개 자치주로 구성되었지만, 이제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 그리고 세르비아가 직할하는 보이보디나, 코소보 주로 구성된 새 연방 공화국을 선언했다. 서방 언론들은 이때 새 연방이 과거에 비해 축소된 ‘초라한 모습’이라고 대서특필했지만, 이 또한 사태를 주도면밀하게 파악하지 못한 보도 자세였다.
신유고연방은 물론 과거에 비해 많이 축소된 형태지만 그 속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 우선 크로아티아 공화국의 약 3분의 1이 사실상 세르비아측에 넘어가 있는 상태다. 이들은 ‘크로아티아의 세르비아 공화국’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사실상의 통치를 하고 있다.
또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의 60% 가량을 이미 세르비아 민병대측이 장악하고 있다. 이들 또한 ‘보스니아의 세르비아 공화국’ 정부를 표방했다. 이들은 먼저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의 양측 세르비아 공화국들을 통합한 뒤 새 연방에 합류할 것이다.
그렇다면 과거의 유고 연방에서 완전히 떨어져 나간 부분은 슬로베니아와 마케도니아인 셈이다. 특히 마케도니아 내에는 강력한 알바니아 민족 집단이 거주하고 있기 때문에 세르비아 직할 자치주인 코소보에서 ‘사건’이 터질 경우 마케도니아에도 불똥이 튈 가능성이 매우 높다.따라서 마케도니아도 세르비아의 사정권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한다. 결국 새 유고슬라비아 공화국 선포는 밀로셰비치 대통령이나 연방군부가 추진해 왔던 대세르비아주의의 영토가 어느 정도 확보되었다는 자신감의 발로였다.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5월 초 연방군에서는 대대적인 인사 개편이 단행되었다. 그 동안 전쟁을 이끌어 왔던 강경파 블라고예 아지치가 물러나고 보다 젊고 유연한 지보타 파니치(Zivota Panic) 장군이 새 참모총장에 올랐다. 그 외에 핵심 지도자 40명이 교체되거나 자리바꿈했다. 이는 세르비아가 목표로 한 성과가 어느 정도 달성되었다는 확신을 표현한 것이었다. 동시에 세계 여론의 화살을 어느 정도 피하면서도 보스니아에서 실리를 획득하려는 포석이 담겨 있었다.
블라고예 아지치
지보타 파니치
인사 단행 후 베오그라드의 연방군 사령부는 5월 19일 포고령을 통해 새 유고 연방 소속의 군인과 시민은 보스니아로부터 철수하라고 지시했다. 즉 세르비아 공화국, 몬테네그로 공화국, 보이보디나 주, 코소보 주의 거주권을 갖고 있는 모든 군인과 시민(여기에서 시민은 세르비아 민병대를 의미한다)은 보스니아를 떠나라는 지시였다. 연방군의 이 포고령은 다분히 홍보용이었다. 나날히 처절한 살육전이 번져 가고 있는 보스니아 전투에서 새 연방과 연방군의 책임을 호도하기 위한 술책이었던 셈이다.
이 같은 분석이 가능한 이유는 우선 사라예보에 주둔하고 있던 연방군의 성격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주둔 연방군은 병력의 대부분을 세르비아 인이 구성하고 있고 그 세르비아 인의 대부분은 바로 보스니아 공화국 출신들이다. 따라서 엄밀히 보면 5월 19일의 연방군 포고령은 사실상 주둔 연방군의 철수와는 하등 관계가 없었다. 보스니아 주둔 연방군은 이 포고령을 통해 이름만 없어졌으며, 연방군 주력 5만 명이 보스니아의 세르비아 공화국 군대로 둔갑했을 뿐이다. 해체된 연방군 군인들은 새 유고 연방의 시민권자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그 자리에 남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남은 길은 바로 ‘보스니아의 세르비아 공화국’ 군대가 되는 것이었다.
따라서 연방군 철수 명령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내에서의 전쟁 양상에 아무런 영향도 미치지 못했다. 그러나 세르비아 공화국과 베오그라드의 연방군 사령부에게는 면죄부를 발급하는 역할을 했다. 이것이 바로 5.19 연방군 철수 포고령의 의미이다.
물론 이때부터 보스니아 주둔 연방군 병력의 봉급과 지원은 보스니아의 세르비아 공화국 몫이 되었지만 결국 자금원은 베오그라드일 수밖에 없었다. 이때부터 밀로셰비치 대통령은 자신감 넘친 어조로 “보스니아의 세르비아 병력은 유고 연방의 통제 하에 있지 않으며 이들을 명령할 힘이 자신에게 없다.”는 책임 회피론을 계속 되풀이하게 된다. 겉으로 보면 밀로셰비치의 변명은 완벽하게 그 구색을 갖추고 있었다.
밀로셰비치의 말이 얼마나 거짓인지는 곧 드러났다.1992년 10월 31일 보스니아 북부의 세르비아 점령 지역인 프리예도르(Prijedor)에서는 대규모 회의가 열리고 있었다. 이른바 보스니아의 세르비아 공화국 국회의원단과 크로아티아의 세르비아 공화국 국회의원단이 합동회의를 열었다. 보스니아와 크로아티아에 거주하던 세르비아 인이 자칭 공화국을 선언하면서 조직된 국회의원들이 모인 것이다.
프리예도르에는 세르비아에 생포된 보스니아 이슬람군 포로들의 수용소가 있었다. 당시 사진
물론 이 자리에는 보스니아의 세르비아 공화국 대통령인 라도반 카라지치와 크로아티아의 세르비아 공화국 대통령격인 고란 하지치(Goran Hadzic)도 참석했는데 양측이 내건 주 의제는 두 공화국의 통합이었다. 그들은 공동 선언문을 채택해 통합을 의결했는데 그 시기를 1993년 봄으로 한다는 내용이었다.
고란 하지치
카라지치(왼쪽), 믈라디치(가운데), 하지치(오른쪽)
이들 두 단체는 물론 세르비아 민병대 게릴라들로 구성된 단체이다. 이들이 통합의 수순을 밟은 것은 당연히 유고 연방과의 통합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그러나 밀로셰비치 대통령은 1995년 말 데이튼 평화 협정을 계기로 이른바 ‘평화의 사도’로 변신하는 바람에 전투적인 세르비아 민병대와 상당한 의견 차이를 보이기도 했다.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에서의 내전이 살인과 인종 청소에 따른 난민 양산으로 점점 더 격렬히 전개되자, 중재에 나선 유럽 공동체나 유엔 모두 경제 제재를 고려하게 되어 부분적으로 실시하기도 한다. 유럽 공동체는 1992년 5월 27일 의약품, 생필품 등 필요 불가결한 품목을 제외하고는 회원국과 유고 연방과의 무역을 중단하기로 결정해 6월 1일부터 실시키로 했다. 유엔 안보리도 5월 30일 열린 회의에서 이라크에 대히 이미 실시해 보았던 경제 봉쇄를 유고 연방에 실시하기로 최종결정했다.
유엔 안보리가 결정한 내용을 보면 무역 중단, 공중 교통 차단(주로 여객기, 화물기 등), 유고 연방의 해외 자산 동결, 외교 관계 단절, 유고측의 바르셀로나 올림픽 및 유럽컵 축구 대회 등의 국제 대회 참가 불허 등이었다.
유엔 안보리와 유럽 공동체가 채택한 조치에 대해 각국 간에 상당한 논란이 있은 것도 사실이다. 프랑스는 부분적으로 이 경제 봉쇄안에 대해 이의를 제기했다. 프랑스는 유고 사태를 유럽 공동체보다 앞질러 결정해 나가는 독일에 대해 많은 우려를 하고 있었다. 특히 독일이 크로아티아측을 일방적으로 편드는 데 대한 견제로 유고 연방에 취한 제재 조치 중 스포츠 행사 참가 불허는 오히려 역효과를 낼 것이라고 주장했다.
프랑스의 주장은 수용되지 않았는데, 이는 유고 문제에 관한 한 독일과 프랑스의 입장이 다르다는 징표였다. 바르셀로나 올림픽 입장식에서 크로아티아 선수단은 관중들로부터 우레와 같은 박수를 받았다. 특히 재미있는 것은 유럽컵 축구 대회에서는 유고의 참가 불허로 대신 출전한 예선 탈락 팀 덴마크가 최종 우승하는 이변을 낳기도 했다.
1992년 UEFA 챔피언 덴마크팀
유엔 안보리 상임 이사국인 러시아도 이 문제에는 소극적인 태도로 일관했다. 우선 러시아는 세르비아와 막대한 무역 관계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안보리 제재 결정은 러시아에게 경제 손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게다가 러시아는 세르비아와 같은 정교회에 그 뿌리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최종 결정에서 기권하고 말았다.
경제 제재가 취해진 이틀 뒤 세르비아 민병대는 공격을 재개했다. 제재 조치가 실효를 거두지 못하리라는 불길한 조짐이었다. 밀로셰비치 대통령은 보스니아에 있는 세르비아 게릴라와 세르비아 공화국이 아무런 관계가 없으며 자신은 이들을 통제할 아무런 힘이 없다고 강변하였다.
어떻든 경제 제재로 세르비아 공화국의 어려운 경제는 더욱 휘청거렸다. 그러나 세르비아 인의 도전은 수그러들지 않았다. 가장 큰 이유는 경제 제재를 해도 각종 물건이 세르비아로 계속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르비아와의 무역에 목을 매고 있는 루마니아, 그리스, 그리고 구소련 연방의 여러 공화국들은 경제 제재의 대외명분에 공감은 했지만 당장 눈에 보이는 이익을 희생할 의도는 처음부터 전혀 없었다.
이들 국가에서 세르비아로 연결되는 통로는 다뉴브 강이었다. 다뉴브 강을 따라 세르비아로 들어가는 선박을 봉쇄하는 데에는 무엇보다도 유엔 평화 유지군과 비슷한 성격의 또다른 병력이 필요하다는 기술적 문제점이 있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문제점은 바로 국제법이다. 다뉴브 강은 1948년 체결된 협약에 따라 국제 하천으로 규정되어 있다. 어떤 선박도 조사받지 않고 왕래할 권리가 있다. 때문에 이를 무력으로 규제하는 것은 다뉴브 강을 국제 하천으로 규정한 국제법을 위반하게 되는 일이었다.
다뉴브 강
세르비아에 대한 경제 봉쇄 조치는 다뉴브 강을 막지 않고서는 아무런 효과가 없었다. 그렇다고 다뉴브 강을 틀어막을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경제 봉쇄의 어려움은 바로 여기에 있었다.
루마니아의 티미소아라라는 또다른 통로도 역시 마찬가지였다. 루마니아 서부의 트랜실바니아 지역에 위치한 티미소아라는 민주 혁명의 성지로 이름이 높은 곳이다. 1989년 1989년 이곳에서 집회를 가지려던 헝가리계 루마니아 인 라슬로 퇴케시 목사를 당시 차우셰스쿠의 부하이던 비밀경찰 세큐리타테가 연행함으로써 시민들의 시위가 시작되었고 세큐리타테는 시위대에 발포를 명령했다. 루마니아에 새 시대를 연 유혈 혁명이 시작된 곳이 바로 티미소아라였다.
차우셰스쿠
그런데 유고 내전 중 이곳은 세르비아 인들로 문전성시를 이루었다. 그 이유는 생필품난에 허덕이는 세르비아 인이 국경을 넘어 이곳으로 와 필요한 물건을 모두 사가고 있기 때문이었다. ‘탱크를 빼고는 다 살 수 있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모든 제품이 구비되어 있었다. 유엔이나 유럽 공동체가 아무리 경제 봉쇄를 통해 세르비아의 목을 졸라도 이처럼 구멍이 뻥뻥 나 있는 상태에서 효력이 있을 수 없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