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여행, 오래 전부터 꿈꾸던 여행이었다. 여행 좋아하는 내가 해외도 아닌 제주도를 아직까지 남겨둔 것 보면 제주도 여행은 좀 특별나기를 바라는 마음이 강했던 게 분명하다. ‘제주도만큼은 남들 신혼여행 가듯 남자와 가고 싶다.’ 나는 이 유치한 상상에 가끔 혼자 배시시 웃곤 하였다. 올봄, 이러다 제주도 여행을 아예 못하는 거 아닐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던 차에 *숙 씨와 유채꽃 핀 제주 올레를 걸어보자고 의기투합하였다. 그러나 비행기표를 구할 수가 없어서 차일피일 미루다 5월에 접어들었다. 6월 5일은 마침 개교기념일이라 학교장 재량휴업일이니 황금연휴 3일이다. 제주도 여행을 가자, 3주나 남았지만 이번에도 비행기표를 구할 수가 없었다. 포기할 것이냐, 신세를 질 것이냐, 나는 신세지는 쪽을 선택했다. 발 넓은 블로그 친구에게 부탁을 했고 어렵사리 표를 구했다.
변덕 많다는 제주도 날씨는 더없이 좋았다. 제주 특산물 오분자기 뚝배기와 한치물회로 점심을 먹고 한담 바닷가 ‘제주 푸른하늘바다 펜션’에 짐을 풀고 택시를 불러 ‘오 설록’을 향했다. 제주 공항에 첫발을 내딛는 순간부터 마음이 평화로워지더니 제주도 특유의 윤기 반지르르한 가로수길과 구불구불 꼬불꼬불 아기자기한 해안도로와 좁은 시골길을 달리며 만나는 검은 돌담과 낮은 지붕의 집들을 보면서 제주는 이미 내 품에 안기기 시작했다. 이 땅의 기운이 나와 맞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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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 설록! 느낌표 하나만으로 부족하다. 생각 같아서는 한 열 개쯤 붙이고 싶다. 입장료도 없고 차 박물관 내부 시설은 정갈하고 쾌적하고 고급스럽다. 방금 덖은 세작을 시음한 후 밖으로 나오니 초록의 바다 녹차밭이다. 멀리까지 걸었다. 하늘과 맞닿은 지평선을 만난다. 구름 위에 둥실 떠오르는 듯 지상의 번잡함이 아스라이 사라진다. 아침까지 내 생의 터전이었던 의정부에서의 생활이 깡그리 탈색된 텅 빈 마음에 소슬한 바람이 불었다. 이렇게 천진한 마음은 내 생애 어디쯤에 해당할까? 과거로 거슬러가야 할까. 미래로 건너뛰어야 할까.
두 번째 방문지는 ‘생각하는 정원’이다. ‘오, 설록’에서 4Km지만 걸어가려니 좀 난감하다. 그러나 어쩌랴. 시내버스는 언제 올지 모르고 택시를 다시 부르자니 요금이 만만찮다. 걷기 시작하였다. 지나는 차에 손을 흔들어 태워달라는 신호를 보냈다. 다섯 번만에 신혼여행 온 부부 차를 얻어 탔다. 그들은 분홍색 커플룩을 입고 있었다.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 인사를 하고 내렸다.
‘생각하는 정원’은 분재공원이다. 그냥 두면 될 것을 그리 좁은 그릇에 구겨 넣어 길러야 할까, 그런 생각 때문에 분재에는 관심이 없었다. 그러나 이곳을 둘러보며 분재에 대한 내 생각이 피상적인 짧은 소견임을 어렴풋이 알게 되었다. 이곳을 이렇게 가꾼 설립자의 생각을 읽어보니 분재란 철학이었다. 제주도에 반해서 서울 생활 청산하고 내려와 황무지와 같던 이곳을 전 생애를 걸쳐 개척한 열정과 노력의 산물은 그 자체로서 감동이다. 나는 비록 그리 살지 못하지만 그렇게 살아온 사람들을 대하면 숙연해진다. 그 결과물이 내 취향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은 시건방지다. 세상을 바꾸는 힘은 세속적 욕망을 희생하는 사람들의 이상과 열정과 부단한 노력이다. 비록 그 속도가 더디다 해도 이런 사람들이 많을수록 그 사회는 다양한 성공이 공존하며 좀 더 나은 방향으로 진보한다.
샌들을 신은 발이 조금 아프다. 피곤을 풀기에 좋다고 해서 하귤을 사먹었다. 신맛이 조금 강했지만 입안이 상쾌해졌다. 맛은 자몽과 비슷하고 색깔은 연한 주황색이고 모양은 둥글었다. 수형도 멋진 큰 나무에 주렁주렁 하귤이 달린 모습은 참 예뻤다.
사위는 햇빛 속에 활짝 핀 하얀 산딸나무꽃은 서정적이다. 연못을 누비는 비단잉어들도 햇빛을 받을 때마다 화려한 군무를 펼쳤다. 살갗을 파고드는 저물녘 서늘한 기운이 더해져서 그 풍경의 아름다움 앞에서 살짝 떨었다. 미세했지만 가슴에 이는 파문이 느껴졌다.
아, 어떻게 숙소로 간담. 다시 난감하다. 시내버스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다가 허름한 르망이 지나기에 손을 들었다. 청년이었다. 숙소가 있는 한담으로 가지 않지만 택시나 버스 타기 좋은 곳에 내려주겠다고 한다. 오밀조밀 제주 시골길을 즐기며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몽포리에 내려 택시를 탔다. 택시 기사는 외팔이었다. 전화 받으면서도 운전을 잘 했다. 약간 불안했지만 교통량이 워낙 적은 곳이니 그 불안은 금세 사라졌다.
곽지 해수욕장 해넘이는 은은했다. 바닷물을 붉게 물들이여 하루를 장엄하게 마감하는 풍경을 기대했으나 그렇지 않았다 해도 아쉽지는 않았다. 하얗게 핀 띠꽃과 검은 돌들과 은모래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파도소리와 간간이 들리는 새소리, 숙소로 돌아오는 해변길은 산책하기에 더없이 좋았다. 아름다운 갯가길로 등록해서 길이길이 보존하면 좋겠다.
침대에 누워서 오늘 찍은 사진을 보았다. 역시 *숙 씨가 찍은 사진이 구도도 색감도 훨씬 좋았다. 그것이 시간이든 돈이든 노력이든 투자한 만큼 산출되는 게 인생의 진리다. 나는 투자에 소홀하다. 다 게을러터진 성격 탓이다. 하하하하.
첫댓글 내몸과 맞는 땅은 분명 있는것 같아요,,도착하면 왠지 불편한곳이있고 들어서자마자 아늑하고 포근한 곳이있죠,,제경우에는 통영 ^^ 나중에 은퇴하면 통영에서 살겁니다,,아님,,진해도 편하더군요,,바다 근처가 좋은거 같아요,,미루님은 제주에서 사시려나요?
아니요. 너무 멀잖아요. 그래서 제주 가까운 부산이나 통영이나.
잘하면 미루님과 동네 주민될수도 있겠네요,,^^
하하하하 정말 그리 되면 전시회 따라다녀야지이이이이이
통영 좋죠. 살기도 좋다고 하던데요. 몇 년 전에 관광차 갔었는데 아담하고 예쁜 도시였던 기억이. 어쩐지 유럽 같은 느낌이었어요 ㅎㅎ
전 언제나 제주도에 가보게 될지...신혼여행은 제주도라는 등식을 몸소 실천하게 되는 건 아닌지....ㅎ 다음 여행지는 또 어딘가요??
해외 두어 군데밖에 안 가봐서 이 비교가 맞을지 모르지만 제주도만큼 멋진 곳도 그리 많지 않을 것 같아요. 다음 여행지? 글쎄요.
제주도만큼은 남들 신혼여행 가듯남자와 가고싶다. ㅎㅎ 미루님 글에는 항상 한구절 씩 중독성 강한 글귀들이..완전 제 맘을 잡아끄는 글이 있네요. ㅎㅎ 젊음 좋다..처럼 그냥 인상적인 아주 솔직담백해서 그런 것 같아요. ㅎㅎ 아무 생각없이 미루님 여행 따라나서고 싶어요. 강아지마냥 졸졸졸..ㅎㅎ 지도 들고 항상 신경 곤두서는 여행보다 걍..정말 발닿는대로 ,맘 닿는대로 정처없이 가는 여행..하고 싶어져요~!! 지금쯤 제주도의 푸르름은 예술일텐데요..떠나요..둘이서 모든 것 훌훌버리고..ㅋㅋ
하하 그 문장 눈여겨본 페소님 감사! 나도 써놓고 보니 그 문장이 제일 좋더군요.
오설악 좋아요^^ 입구에 커다란 나무 그림이 있는데 것도 좋았어요, 보성차밭하고는 또 다른 느낌이죠, 좋은 여행 하고 계시네요
경사진 보성차밭과 평지 같은 오 설록 차밭은 느낌이 다르지요. 두 군데 모두 차밭이야 이루말할 수 없이 좋고, 보성은 입구의 삼나무길이 보너스고 오 설록은 쾌적한 실내가 보너스였지요.
여행은 남겨둔 현실과 지나온 기억을 반추하기 위한 여로의 과정이라고 합니다. 미루님 글 잘 구경하고 갑니다.
여행은 최대한의 노력으로 최소한의 결과를 얻어도 손해본 느낌이 안 드는, 나 자신에 대한 베풂이지요.
맞는 말씀이십니다. 저도 그래서 여건이 허락하는 한 주말마다 짧게 근교 여행을 다닙니다. ^*^
저도 아직 제주도 남겨두었는데요 ㅋㅋ^^*평온한 한때를 느끼고 갑니다.
남겨둔 제주도, 낭만적인 여행으로 만들어 보세요. 막상 다녀오고 나니 어쩐지 아쉬워요. 소중한 무엇을 하나 잃은 듯한 느낌이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