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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 수학여행기 민문자 첫 수학여행의 기회는 여학교 졸업여행이었다. 행선지가 경주였는데 그 기회를 잃었다. 나의 고향 마을은 남녀칠세부동석 문화가 시퍼렇게 살아있을 무렵이었다. 어떠한 경우라도 외박해서는 안 되었기에 수학여행을 눈물을 머금고 포기해야했다. 성인이 되어서 경주를 갈 때마다 그 아픈 기억이 되살려지곤 했다. 금년 신학기에 3학년으로 편입학하여 뒤늦게 다시 대학생이 되어 저축해놓았던 수학여행을 많은 동문들과 하게 되었다. 문단에 입문해보니 대부분 국문학과 출신들이 좋은 글을 많이 쓴다는 것을 알고 늦었지만 나도 제대로 배워서 글을 써 보자고 용기를 낸 것이다. 나의 딸보다도 더 어린 친구들과 학교생활을 하게 되었지만 나이는 잊고 앳된 소녀의 마음으로 어울려 생활한다. 새벽에 집을 나서 옥천 정지용문학관 개관식행사에 참석하고 곧 바로 경주로 가게 되었다. 경주문학기행도하고 전국 국문학과 동문들의 네트워크 화합의 장을 갖기 위해서이다. 저녁 늦게 청소년수련원보문관에 도착하였다. 각 지역대학별 축하공연과 장기자랑 후 J국문학과 교수님을 모시고 자정이 넘어서 시작된 화합과 토론의 장은 새벽 3시가 훨씬 넘어서야 끝이 났다. 때마침 사월 초파일이라 두 시간도 채 눈을 붙이지 못하고 일찍 일어났다. 불국사를 안내한다던 2학년후배는 아무 연락이 없다. 처음만나 네 사람이 통성명을 하고 뜻이 맞아 6시에 콜택시를 불러서 불국사로 향하였다. 인구 35만 명이라는 천년 역사가 숨쉬는 경주의 이른 아침공기는 동해가 가까워서 그런지 그렇게 빛나고 상큼할 수가 없다. 막 신록으로 병풍을 이룬 스카이라인과 점점이 모내기가 이루어진 들판에 아카시아향기가 향긋하다. 아름다운 도시풍경을 감상하고 있는데 금방 불국사 앞에 다다랐다. 일주문을 지나 우리는 팔뚝만한 비단잉어가 노니는 연못 위 해탈교를 건너 천왕문에 들어섰다. 싸리비 자국이 나서 더욱 청정한 감이 드는 큰 마당에는 오늘 석가탄신 큰 행사준비에 의자들이 배열되고 있었다. 나에게는 불국사 대표 이미지로 각인된 연화교 칠보교와 청운교 백운교의 돌 층층대는 여전히 아름답다. “통행금지”표지가 붙어있어 자하문을 통과하지 못하고 오른쪽으로 우회하여 들어가 다보탑과 석가탑을 바라보고 대웅전으로 들어가 석가탄신 축하 예를 올렸다. 기념으로 우리가족 연꽃등을 하나 달았다. 대웅전 앞마당에 늘여놓은 줄 가운데에 직접 연등을 달아놓으니 부처님이 빙그레 웃으시며 내속을 꿰뚫어 보시는 것 같다. 조반시간에 맞추어 숙소로 돌아오면서 이렇게 좋은 날씨에 석굴암과 일출을 못 본 것이 유감스럽다. 불국사를 나와 일주문 밖에서 만난 후배는 한잠도 아니 자고 토함산에 올라가 아름다운일출을 보았다지 않는가. 조반 후 아홉시에 13대의 버스에 나누어 타고 달리다가 내려서 P교수의 인솔하에 제일먼저 경주문화엑스포공원에 세워진 폭 1.5미터 길이 5.6미터의 처용가비(處容歌碑)를 보았다. 처용가는 신라의 소중한 문학적 유산 향가로 면면히 내려오는 동지팥죽 풍습으로 더 잘 알려졌는데 문화체험장 홍보용 장승 옆에 서있다. 좁은 도로가에 일렬로 죽 세워둔 버스행렬하며 울긋불긋 많은 인파가 이리저리 교수님의 발길 따라 급히 움직이는 모습자체가 장관이다. 첨성대와 반월성사이에 있는 계림으로 들어가는 유채단지는 보리를 베고 난 보리밭처럼 유채를 벤 모습들이 이채롭다. 계림은 “닭이 운 숲”이란 뜻으로 경주김씨의 시조 김알지의 탄생 설화가 있어서인가 고목이 많이 우거진 숲 속은 신성스럽게 느껴진다. 향가비(鄕歌碑)에는 찬기파랑가(讚耆婆郞歌)가 1미터쯤 되는 좌대위에 약 폭2미터 길이 3미터 판석에 새겨져 있다. 일연선사의 자주적 주체적 사관으로 역사를 기술한 삼국유사를 다시 생각해본다. P교수의 열강으로 한동안 고전에 취해 있었다. P교수님의 바람과 같이 빠른 걸음에 칼라풀한 행렬은 삼백 미터도 더되어 구불렁구불렁 오솔길을 따라 이동한다. 반월성 말타기 체험장을 옆으로 스쳐 척척 늘어진 송림 사이에 있는 세 칸 정도의 지하저장고 인 경주 석빙고도 보았다. 버스를 타고 도착한곳은 사적138호인 서출지(書出池)이다. 약 이천 평 정도의 규모인 늪처럼 잡풀이 둘러싸고 있는 연못은 수면위로 해묵은 마른 연잎대궁이, 수면에는 연두빛 새 연잎으로 덮여 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 신라 21대 소지왕때 왕이 천천정(天泉亭)에 거동했을 때 한 노인이 연못에서 나와 편지를 전했다하여 연못이름을 서출지(書出池)라 불렀다한다. 기와지붕을 인 가옥모양의 빈 정자가 못가에 있는데 천천정(天泉亭)을 나타낸 것인가. 다시 버스를 타고 한참을 가다가 선도차를 따라 모두 내려서 걷기 시작하였다. P교수가 어찌나 펄펄 나는지 따라가는 우리는 뛰다시피 해야 겨우 따라 갈수 있었다. 도로에서 산골짜기로 들어서서 이십분쯤 지났는데 가이드가 길을 몰랐던지 뒤돌아서서 걸어야했다. 땀도 나고 점심때도 지났는데 버스는 좁은 2차선 도로가에 늘어서 있고 우리는 도로를 하염없이 걸었다. 탑동주유소를 끼고 올라가보니 사적 제 245호인 나정(蘿井)이 있었다. 신라시조 박혁거세가 태어났다는 전설이 있는 우물터였다. 안내판에는 이렇게 써있다. 『이 우물은 오릉의 동남쪽 소나무 숲이 무성한 언덕에 위치하고 있다. 기원전 69년 어느 날 고허촌장 소벌공이 우물가에 흰말이 무릎을 꿇고 있는 것을 보았다. 이를 이상히 여겨 그곳에 가 보았더니 말은 간곳이 없고 그 자리에 큰 알이 있었다. 그 알에서 사내아이가 태어났는데 13세 되던 해(기원전 57년)에 6부 촌장들이 그를 임금으로 뽑았으며 나라이름을 서라벌이라 하였다. 이곳에는 지금도 우물이 남아 있으며 조선 순조3년(1803)에 시조와의 내력을 기록한 유허비가 있다』 노송이 늘어선 가운데 여기저기 실측한 흔적과 두자정도 깊이의 작은 구덩이를 파 놓고 우물터는 비닐로 덮어 다시 고증 하는 중인 것이 나타나 있다. 구덩이마다 살펴보니 대부분 물끼가 올라와 있다. P교수는 온천이 솟구치는 땅이라고 했다. 나정 솔밭에서 모두 함께 하려던 점심식사는 도시락 배달이 안 되어 배가고파 불만들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행사주관을 하는 집행부의 장소 연락 차질이 있는 모양이다. 주유소 마당까지 내려와 기다리니 도시락이 왔다. 시장이 반찬이라고 군데군데 무리지어 늦은 점심을 먹고 나니 오후 3시 반이다. 김시습이 금오신화를 탄생시켰다는 용장사지를 찾아서 길을 재촉했다. 절반은 귀가 길에 오르고 P교수는 휙휙 날랐다. 나는 낙오되지 않으려고 안간힘을 썼다. 한 사십분 쯤 산중턱까지 올라갔는데 하산하는 등산객을 만났다. 용장사지는 이 골짜기가 아니라 다른 골짜기란다. 우리는 다시 되돌아서 걸었다. 버스를 타고 얼마쯤 지나다가 내려서 산에 다시 오르기 시작했다. 이제 도마뱀의 꼬리가 떨어지듯 다 떨어지고 버스는 두 대만 남았다. 깊은 산속으로 들어가자 맑은 물이 흐르는 계곡 이다. 우리의 산야는 어디를 가나 비슷비슷하다. 마치 포천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듯싶다. 한 시간을 족히 지나고 나니 붉은 현수교가 보인다. 그림같이 예쁘다. 매월당 김시습의 법명인 설잠교다. 폭2미터, 길이 26미터를 건넜다. 아름답기는 한데 어쩐지 이 용장골 계곡에 어울리지 않는 다리이다. 양복에 갓 쓴 꼴이라고나 할까. 하산하는 등산객에게 용장사지가 얼마나 남았느냐고 물으면 5분만 가면 된다는 것을 몇 번이나 속고 오른 용장사지이다. 지금은 수풀만 우거져 있고 안내판만 서 있을 뿐이다. 다시 이번에는 정말 5분을 걸어 오르니 용장사지 삼륜대좌불이 목은 어디로 가고 몸체만 높이 앉아 있다. 대륜에는 쇠붙이가 끼워져 있다. 아름다운 예술품에 누가 심술을 부렸을까. 바로뒤쪽 석벽에 보물 제 913호인 용장사지 마애여래좌상이 조각되어 있다. 여기서 50미터 높이에 삼층 석탑이 보인다. 마지막 힘을 다하여 오른다. 밧줄을 잡고 오르니 세상이 눈 아래에 있다. 어떻게 이 꼭대기에 이렇게 육중한 석탑을 세웠을까. 높이 1미터반에 한면이 2미터의 기단석위에 세워진 보물 제 186호 삼층석탑은 주위의 여러 산봉우리들을 거느린 점잖은 살아있는 신이었다. 눈과 비바람 속 천년을 묵묵히 지킨 웅자한 모습 어찌 세계문화유산이 아니겠는가. 세조의 왕위 찬탈에 김시습은 생육신의 한사람으로 전국을 방랑하다 이곳 금오산에 들어와 금오석실을 차려놓고 금오신화를 창작했다고 한다. 신령스런 이곳 정기를 받아 울분을 승화시켜 신화같은 소설을 썼는가 보다. 꼭대기 까지 오른 사람은 이십 여명, P교수님과 우리 모두는 기념사진을 찍으며 감개무량해 했다. 시계는 5시 40분을 가리킨다. 우리는 서둘러 하산을 했다. 7시가 다 되어서야 버스에 오를 수가 있었다. 버스는 서울로 향해서 달렸다. 힘들었지만 늦깎기 국문학도의 멋진 수학여행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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