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 07. 15 : 제1이동외과병원 창설(서울 창동)
1964. 09. 11 : 부산항 제3부두에서 LST편으로 출발(이동외과병원130명 및 태권도 교관단 10명)
1964. 09. 22 : 남베트남 사이공(Saigon) 도착
1964. 09. 28 : 붕따우(Vung Tau)에서 시무식

이동외과병원과 태권도교관단 창설식(서울 창동, 7후송병원)1964.7.15
1964년 3월 17일 존슨 정부는 베트남사태에 보다 적극적으로
개입할것을 공식적으로 결정했다. 이어서 미국은“베트남사태에
대처하기 위해 보다 많은 우방국을 끌어들여 국제사회의 참여와
지지를 얻어낸다.”는‘More Flags’정책으로 전환했다.
이에따라1964년 5월 9일 한국등 25개 우방국에게 남베트남 지원을
요청했다. 당시 미국 정부가 한국에 보낸 서한(書翰)에는‘1개이동
외과병원’을 파병해 주도록 요청하고 있었다. 그때부터건군 이후
최초의 해외파병을 위한 한국정부의 조치가 공식화되기 시작했다.
존슨 미 대통령으로부터 ‘남베트남 지원’을 요청하는 서한을 접수한
박정희 대통령은 김성은 국방부장관에게 미국의 요청을 검토하도록
지시했다. 그러나 당시 한국 정부는 존슨의 서한을 접수하기 전부터
파병을 기정사실화하고, 파병의 구체적인 방안을 검토해두고 있었다.
따라서 존슨의 서한은 이를 공식화해 명분을 쌓는것에 불과했다.
한편 당시 한국정부의입장에서 볼 때, 미국정부가 요청한‘1개야전
병원’의 파병은 인도적 차원의 파병으로‘전투병력 파병’과는 거리가
먼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 한국 정부는 해외파병에 관한 경험이 전혀
없었으며, 베트남의작전 실태에 대해서도 알고 있는 것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의료지원단 파병은 매우 귀중한 기회였다.
한국군 파병에 대한 당시 정부의 입장은“공산침략을 받고 있는 남베트남
사태는 한국의 안보와 직·간접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국가안전보장의
측면과, “625전쟁시 도와준 자유우방에 보답한다.”는 국제적 신의(信義)의
차원이었다. 따라서 국민은 물론 정치권에서도 공감을 얻고 있었다.
그 같은 분위기에 따라 국방부는 파병을 위한 조치를 구체화해 130명
규모의 이동외과병원과 10명으로 편성된 태권도교관단 등 140명을
파병하기로 결정했다. 이어서 국방부는 1964년 6월 10일 주한 미군
사령관에게“이동외과병원과 태권도 교관단을 파병하겠다.”는 사실을
통보하고, 7월 9일에는 김종오 합참의장이 주한 미군사령관 하워즈
(Hemilton H. Howze)대장을 방문해 구체적인 파병절차를 협의했다.
또한 정부는 1964년 7월 15일 남베트남 정부로부터 한국군 파병을 요청
하는 서한(書翰)을 접수한데 이어 7월 31일에는‘파병동의안’을 국회본회의
에 상정한 결과 만장일치로 가결되었다.
국군을 베트남에 파병하기 위한 정부의 조치에 따라 부대편성과 훈련을 마친
이동외과병원과 태권도교관단은 1964. 7. 15 서울 창동 제7후송병원에서
건군 이래 최초의 해외파병 부대 창설식을 하고 1964. 7 .18 파병지역
에 대한 현지조사 및 실무협상을 위하여 합참군수국차장 이훈섭 준장외
한국군장교2명, 미군장교2명으로 선발대를 편성하였으며 1964. 8. 26
선발대를 월남 사이공으로 파견 하였다.
이어 본대 140명은 1964년 9월11일 해군 LST-815함 편으로 부산항을 출항했으며
10여 일 간의 항해 끝에 9월 22일 남베트남의 수도 사이공 (Saigon)에 도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