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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베소서 제 11강 (이 근호목사, 2008년 5월 9일-a, 서울의존교회)
에베소서 2:15
“원수된 것은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예수 믿는다는 사람들이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이 무슨 뜻인지 잘 모르고 있는 같습니다. ‘나는 십자가 안 믿고 예수 믿는다’고 이야기들을 많이 합니다. 예수 믿는다는 것과 십자가를 믿는다는 것과 분명하게 차이가 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십자가는 몰라도 예수는 안다는 식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내가 누군가를 알면 그 사람이 내 대신 숟가락 들고 밥도 대신 먹어주고 이발도 해주고 목욕도 해 주고 그렇게 하는 겁니까? 내가 누군가를 안다고 해서 그가 내 대신 숙제도 해주고 내 대신 돈도 벌어주고 내 대신 다 살아주는 겁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내가 누군가를 알더라도 일은 내가 해야 되는 겁니다.
교인들이 여기 있고 예수님이 여기 계시다면 교인들이 말합니다. “나는 예수님을 압니다.” 예수님을 안다고 할 때 어떻게 안다는 말입니까? 예수님이 거기 계시면 우리가 필요할 때 마다 호출해서 얻을 것 얻고 챙길 것 챙기는 겁니다. 그냥저냥 살다가 힘들어지면 복이나 따내기 위해서 ‘나는 부처를 안 믿고 예수를 믿습니다’라고 합니다.
그런 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당신이 예수님을 압니까?”
“압니다.”
“그러면 예수님의 인생이 당신속에 들어오면 당신은 좋겠어요? 나쁘겠어요?”
그렇게 물으면 사람들이 상당히 부담스러워 합니다. 그 이유는 성경에 보면 예수님이 가신 길은 가시밭길이고 예수님이 가신 길은 고생길입니다. 고생하신 예수님이 내 속에 들어와 버리면 나도 예수님과 같이 고생할 것이 뻔하고 예수님과 같이 가시밭길로 갈 것이 뻔하다는 겁니다.
예수님이 장가를 안 갔습니다. 그러면 나도 같이 예수님처럼 장가 안갈 가능성이 높습니다. 예수님은 전세방조차 제대로 없어서 ‘머리 둘 곳도 없다’고 했는데 만약에 예수님이 들어와 버리면 나도 전세방도 없이 전전하면서 노숙자 생활 할 것이 아주 농후합니다.
사람들이 예수님을 안다고 할 때 그저 세상사람 누군가를 안다는 것처럼 ‘내가 그 사람을 잘 알지. 내가 어려울 때 도움을 받아봐서 잘 알아’라고 약간 어느 정도는 거리를 두고 필요할 때 아쉬울 때 찾아가서 상담한다는 식으로 안다 하는 사람들이 태반입니다. 이 근호 목사를 안다는 사람들은 많습니다. 대구우리교인들도 이 근호 목사를 다 압니다.
알지만 저 대신 인생을 살아주는 사람, 저 대신 설거지를 해 주는 사람은 없습니다. 필요할 때마다 전화를 해서 상담은 하지만 내 인생을 대신 살아주지는 않습니다. 성경을 읽어보면 그게 무슨 뜻인지 아시겠습니까? 한글로 되어 있지만 의외로 어렵습니다. 한 단어 한 단어가 무엇을 뜻하는지 알아듣기 힘이 듭니다.
예수님을 안다고 할 때 예수님은 그냥 계시고 내가 필요할 때 찾아가서 얻고 싶은 것을 얻어 챙기면 그만이라는 식으로 예수님을 안다고 하는데 성경은 그것이 아니라, 예수님이 하신 일을 알려주면서 우리보고 하는 말이 ‘너희들은 예수님이 하신 일을 아는가’라고 묻습니다.
예수님을 아느냐, 그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어떻게 일을 하셨는가? 그것을 네가 알고 인정하고 신뢰하느냐?’라고 물으시는 겁니다. 예수님이 하신 일을 아는 거예요. 얼마 전에 서해안 해변가에 낚시 하는 사람들이 죽 있었습니다. 해변가에 바위가 있었는데 갑자기 파도가 밀려와서 사람이 사라져 버렸습니다.
여기서 낚시 하던 사람들이 바다를 잘 압니다. ‘저것은 산이고 저것은 바다다’라고 잘 압니다. 그런데 설마 그 바다가 낚시하고 있는 자기 인생을 덮쳐서 완전히 자기를 물고기 밥이 되게 할 줄은 몰랐습니다. 내가 바다에 빠져 죽을 것 까지 알고 바다에 낚시하러 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저 바다는 나에게 즐거움과 유쾌함과 고기 잡는 기쁨을 줄 것이다’라고 하면서 바다에 갔는데 그 다음날 아침에 시체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 바다가 그 사람을 삼켜 버렸습니다. 그 전에 알고 있던 바다는 엉터리 바다였습니다. 나를 삼키는 바다의 무슨 맛을 봤습니다. 맛보자마자 죽는 사태가 일어났습니다만.
예수님은 바다 같습니다. 우리가 평소에 예수님도 알고 성경도 안다, 하는데 막상 예수님이 하시는 일에 바다의 해일처럼 파도처럼 우리를 덮쳤을 때에 제일 먼저 떠오르는 것은 ‘내가 그전에 알았던 예수는 엉터리구나’라는 것입니다.
어떤 점에서 엉터리냐 하면, ‘나도 살고 예수도 삽시다’하는 식의 동업자 의식으로 대하면서 서로 자기 영역을 침범 안하는 그런 식의 예수, 나를 도와주기는 해도 내 것을 빼앗아가지는 않는 예수, 그런 예수를 원했는데 오늘 에베소서 2장에 따르면 그런 예수는 존재하지 않는 예수입니다.
여러분이 그런 예수를 생각했다면 그것은 여러분이 자기 구미에 맞도록 자기 맘대로 지어낸 예수입니다. 집에서 식사를 할 때 음식이 맘에 안들 때는 짜다든지, 싱겁다든지 자기 아내에게 이야기를 합니다. 그런데 식당에 가서 음식을 먹을 경우에 맘에 안들 때는 말하기가 참 곤란한 경우가 있습니다. 그냥 얼른 먹고 나오게 됩니다.
이처럼 ‘나도 어느 정도는 예수님을 안다’고 예수님을 생각했는데 어느날 갑자기 전혀 다른 내가 예상치 못한 예수님이 다가왔을 때 우리는 예수님보고 수정하라고 할 것이 아니라 내가 평소에 다른 예수를 신봉했구나, 라는 자기반성, 자기회개, 자기자신의 문제점을 지적해야 됩니다.
우리가 성경 에베소서 2장 15절을 몰랐다고 했을 경우에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그 예수와 에베소서 2장 15절에 있는 예수하고 제발 틀렸기를 바랍니다. 얼마나 틀리는지 예를 들겠습니다. 히브리서 11장 36절입니다.
히브리서 11:36-38
“또 어떤 이들은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고 양과 염소의 가죽을 입고 유리하여 궁핍과 환난과 학대를 받았으니 (이런 사람은 세상이 감당치 못하도다) 저희가 광야와 산중과 암혈과 토굴에 유리하였느니라.”
우리가 다 같이 예수를 믿는데 ‘희롱과 채찍질뿐 아니라 결박과 옥에 갇히는 시험도 받았으며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하’는 식으로 예수를 믿는다면 과연 그래도 예수를 사랑하시겠습니까? 나에게 이득이 되지 않고 나를 살도록 하는 것이 아니고 반대로 내가 예수님 때문에 죽을 지경인데, 예수님이라는 내 외부의 어떤 분으로 인해서 막상 내가 곤란에 처하게 되는데 그래도 예수 믿겠습니까?
예수와 우리가 언제부터 무슨 아는 사이라고 그렇게 합니까? 그분이 나에게 보증을 서 준일이 있습니까? 내가 그분을 보증 서 준일이 있습니까? 아무 상관도 없는 사람으로 인해서 우리가 이런 수모를 당해도 좋다는 말입니까? 제 전에 시골에서 사역할 때 교인들에게 세례를 줄때 마다 이 히브리서 11:36-38을 펴 놓고 제가 물었습니다.
예수를 믿되 이렇게 ‘돌로 치는 것과 톱으로 켜는 것과 시험 드는 것과 칼에 죽는 것을 당해도 예수를 믿겠습니까? 예수를 사랑하시겠습니까?’ 아니라고 하면 세례 안 줄것 같으니까 억지로라도 대답을 합니다. 아니라고 한다고 해서 세례 안주는 것은 아닌데. 그런데 그분들이 이목사가 사적인 견해를 가지고 이렇게 신앙하라고 하면 그것은 당신 신앙과 내 신앙이 서로 다르다고 나올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제가 히브리서 11장의 성경을 들이대면서 이야기 한 겁니다. 설마 세례를 받으면서 나는 성경을 무시한다고 나올 수는 없을 겁니다. 무시할 수 없는 성경을 펴놓고 무시할 수 없는 성경 구절을 가지고 신앙은 이래야 된다고 할 때 건성으로 대답은 할 수 있습니다. 세례를 꼭 받아야만 구원되는지 알고, 또 세례 안 받는 것보다 받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으로 대답은 합니다.
그런데 그렇게 ‘예’라고 답해놓고 그 뒤로 교회 나온 사람들 못 봤습니다. 대답은 해 놓고 그 사람들이 교회를 안 나왔습니다. 주로 청소년들, 고등학생들이었습니다. 그들에게 바다라는 것은 먼발치의 바다입니다. ‘바다야, 너는 여기이상 올라오지 마라. 나에게 고기나 주고 여기까지는 내 영역이니 침범할 생각하지 마.’ 이러면서 바다가 아름답다는 식으로 생각을 한 거예요.
나의 조건이 유지되는 한에서만 예수를 아는 척 하고 인정하겠다는 말입니다. 그때 바닷물이 내 키를 넘도록 덮쳐 와서 내가 바닷속 물고기의 밥이 되고 나라는 인간이 흔적도 없이 사라질 때 예수를 제대로 알게 됩니다. 여기에 적어 보겠습니다. ‘내 육체가 흔적도 없이 사라질 그때 바다의 맛을 알듯이 예수님도 내가 흙이 되고 없어질 때 그때 제대로 안다.’
‘예수님, 당신은 누구시길래 나를 죽이십니까? 내가 이렇게 당신에게 죽어야 할 그런 존재였다는 말입니까?’라는 물음을 진지하게 하게 될겁니다. ‘나는 지금까지 내 힘으로 살아 왔는데, 그렇게 살아온 것에 대해서 칭찬해 줘야 할 주님께서 내 힘으로 살아온 그것이 그렇게 못마땅해서 모든 것을 빼앗아가고 죽여 버리고 내가 신봉할 만한 내가 없어짐으로 말미암아 비로소 당신이 나보다 더 우선이었고 먼저였군요’라고 고백하게 됩니다.
예수님이 우리보다 먼저였습니다. 세례요한이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분이 나보다 먼저 계시다”고 했습니다. 먼저 있다는 말은 그분으로 인하여 내가 있다는 말입니다. 그분이 먼저 없었으면 나도 없다고 할 때 나보다 그분이 먼저 있다는 말을 할 수 있는 겁니다. 그분이 없었으면 내가 없습니다.
따라서 내가 없어지는 그 순간에 그분은 자신의 모든 것을 비로소 다 드러내시겠죠. 내가 없어지는 순간에 그분은 자신의 전부를 다 드러내고 만약에 내가 있다고 여기는 그 순간은 그만큼 그분의 모습은 삭제되고 그분의 모습은 가리워져서 엉터리 예수를 신봉하게 되는 겁니다.
쉽게 하면 이렇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몸을 인정해 준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그냥 흙일뿐인데 누가 그것을 몸이라고 우겼느냐 하면 내가 자꾸만 우기는 겁니다. ‘나는 몸이 있는데 사지가 있고 코가 있고 입이 있고 다 있다. 나는 하나님이 창조한 피조물이고 따라서 이 몸은 귀한 것이다. 나는 사랑받기 위해서 태어났고 그래서 나는 귀하다’고 자기자신에 대해서 생각하는 겁니다.
일단 내가 살고보자는 욕망이 앞서서 그런 소리가 나오는데 그것은 우리 생각이고 예수님의 십자가 앞에서는 우리를 몸으로 간주한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하나의 사람으로, 인격자로 대한 적이 없습니다. 그냥 죽을 안개로 보지 ‘훌륭하다’는 평가를 내린 적이 없습니다.
하나님의 관심사는 어디에 있습니까? 우리보다 먼저 계신 분이 아무것도 아닌 우리를 자기를 보이는 도구로서 어떻게 사용하느냐, 거기에 관심이 있습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보여주기 위한 관계 때문에 우리가 있는 것이지, 예수님과의 관계를 끊고 단독으로 ‘나도 사람이다. 신이면 다인가?’라고 이렇게 주장하지만 그것은 헛소리입니다.
누가복음 16장에 보면 부자와 거지가 살고 있었는데 둘 다 죽었습니다. 즉으면 그만인줄 알았는데 부자는 죽어서 지옥에 갔습니다. 거지도 죽어서 간곳이 있습니다. 천사들이 받들어서 하늘로 데려갔습니다. 여기서 한가지 흥미를 끄는 것은 부자가 자신이 지옥에 와 있음을 안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거지가 천국에 갔다는 그 사실도 이미 부자가 알고 있더라는 겁니다.
나는 지옥에 와 있고 내가 무시했던 거지가 천국에 갔다면, 우리가 부자인데 지옥에 와 있다고 생각해 봅시다. 부자고 뭐고 지금부터는 없고 주위가 온통 솟구치는 불덩이 뿐이고 물한방울이 아쉽고 영원히 목말라서 고통하는 지옥에 왔습니다. 그렇게 지옥에 왔을때 그때의 예수는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그때의 예수님의 가치는 무엇이겠습니까?
제가 부자라도 알 것입니다. ‘아하, 인생이란 내가 결정하는 것이 나보다 앞선 분의 결정에 따라서 결정되는구나’라는 것을 그 부자는 지옥에 와서야 비로소 알게 되는 겁니다. 거지는 비록 거지였지만 자기가 거지였지 예수님은 거지가 아니었습니다. 나보다 앞선 분이 중요하지 내가 지금 거지냐, 뭐냐, 하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KTX에 달라붙은 열차가 14개나 15개쯤 됩니다. 청소를 좀 안해서 그런지 맨 앞의 기관차는 말끔한데 뒤에 붙어 있는 열차들에는 먼지가 묻었다고 합시다. 그러면 먼지 묻은 객차는 안가고 깨끗한 기관차만 달리는 겁니까? 기관차가 가면 뒤에 달려 있는 객차도 함께 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서울 가면 같이 서울가도록 되어 있습니다.
거지는 내 인생이 전부가 아니라 나보다 앞서신 분의 인생이 전부이고, 단독적으로 끊어서 내가 누구라고 말할 필요가 없고 가치도 없고 항상 나를 당기는 분이 저분이라는 것을 소개하기 위해서 내가 그분에게 붙어 있다는 겁니다. 그게 에베소서 2장 뒷부분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교회가 뭐냐, 성전이 뭐냐 할 때, ‘나도 성전되어야지. 교회 되어어지’, 그런 이야기가 아닙니다. ‘내가 어떻게 되어야지’가 아니라 ‘내가 어떤 자리에 가담되어 있느냐? 동참되어 있느냐? 이끌리고 있느냐?’ 그게 중요하다는 겁니다. 그런데 오늘 본문에서 ‘성전이 되어간다’고 할때 제일 설명하기 힘든 것이 있습니다.
에베소서 3:21,22
“그의 안에서 건물마다 서로 연결하여 주 안에서 성전이 되어가고 너희도 성령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벽돌과 벽돌을 연결할 때 무엇으로 연결합니까? 시멘트로 연결할 수 있습니다. 벽돌도 물질 덩어리고 저쪽 벽돌도 덩어리고 그것을 연결하는 것도 시멘트 덩어리입니다. 다 손에 만질 수 있고 눈에 보이는 것들이 붙어서 됩니다. 그런데 육체와 육체의 결합이 아니고 육에 영이 와서 결합한다고 하면 이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습니까?
신체가 붙지 않더라도 한 몸이라는 것을 인간의 언어로 어떻게 설명합니까? 그 설명이 없다는 것이 아니고 어렵다는 말입니다. 그 설명이 너무나 어렵기에 그 전에 이것부터 하는 겁니다. 사람이라는 것은 예수님을 알 때 ‘예수님이 나보다 먼저 계신 분이고, 먼저 계신다는 것은 그분 때문에 내가 뒤따라 나왔지 그분이 없었으면 나도 없었다. 그분을 위하여 내가 만들어졌고 그분을 위하여 내가 있다는 것, 그분과 연결되어 있다’는 이것을 알게 되면 어렵다는 그것도 이해가 되고 설명이 될 수 있을 겁니다.
거지 나사로 이야기를 다시 해보면 거지 입장에서는 내가 거지라는 것이 별로 대수롭지 않은 일입니다. 나를 구원하신 분이 나에게 중요하지 어떤 형편이든 구원된다는데 내가 왜 중요합니까? 여기 학생들 중에 안경 쓰신 분들이 더러 있습니다. 눈이 나쁘니까 고생은 되는데 안경을 썼다고 해서 ‘너 안경 썼으니 천국 못가고 지옥 간다’고 할 그런 주님입니까?
아닙니다. 고린도전서 15장에 보면 사람을 흙이라고 봅니다. 여기 열사람이 있다면 흙이 몇 덩어리가 있습니까? 흙이 열 덩어리입니다. 열 덩어리인데 그 열덩어리 한군데 합치면 한 덩어리가 된다는 그것이 참 재미있습니다. 성경은 사람을 볼 때 천명이든 만 명이든 그것을 다 한 덩어리의 흙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해서 하나님은 우리를 볼 때, 00아무개, 00아무개 따로 따로 보시는 것이 아니고 흙이라는 형상으로 형상되시는 하나님이 형상으로 다루시는 겁니다. 너무 어렵게 이야기 했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형상을 앞장세워서 사람을 다루기도 하고 사람과 결합하기도 하는데 형상과 형상을 비교해 보니까 하나님의 형상은 하늘에 속한 형상인데 비해서 인간은 흙에 속한 형상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하늘에 속한 형상, 인간은 흙에 속한 형상이 되는 겁니다. 흙에 속한 형상은 흙의 그 본성대로 없어지고 바람에 날려지고 사라집니다. 누구든간에 바람에 날리면 다 없어집니다. 제가 죽었다고 치고 ‘아이고…’ 하는데 바람이 훅, 부니까 바람에 다 날려갔습니다. 그러면 동네방네 날려간 것 찾아서 다 따라가야 합니까? 그럴 수 없잖아요.
어린이들에게는 너무 허무한 이야기가 되겠습니다만 조금만 기다려 보세요. 허무하지 않은 영원한 이야기도 있습니다. 흙이 나이가 먹는다고 해서 더 영적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다시 바다 이야기를 해 봅시다. 바다에 해일이 일어나서 사람이 죽을 때 46살 먹은 사람도 있고 5살 먹은 아이도 나옵니다.
그럴 때 46살 먹은 사람은 안 아까운데 세상에, 5살 먹은 애가 죽었다면 그 애가 아깝다고 합니다. ‘왜 하나님께 다섯 살밖에 안 먹은 애를 죽이십니까?’ 하는데 하나님은 5살, 46살 그런 것을 몰랐어요. 왜? 둘 다 흙이니까. 하나님은 흙을 흙 되게 하시는 재주가 있습니다. 50살 살다가 죽으나 5살 살다가 죽으나 흙으로 돌아갔으면 하나님은 잘못 없습니다.
흙으로 난 자식이 흙이요, 흙으로 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말로만 흙이 아니라 흙답게 결국 우리가 흙일 수밖에 없는 종말을 일깨우는 방법으로 말씀대로 말씀대로 이 세상을 이끌어 가십니다. 이 대목에서 아멘이 나와야 되는데 전부 다 흙으로 사느라고 피곤합니다. 지금 내 생각을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뭘 하시는지 봐야 됩니다.
낚시하는 우리를 생각할 것이 아니라 바다를 생각해야 됩니다. 바다가 낚시하는 사람을 보면서 ‘어? 저 사람이 낚시를 하고 있잖아. 조금 있다가 덮쳐야겠다’라고 하는 그런 바다는 없습니다. 낚시를 하고 있든지 오줌을 누고 있든지 바다는 중력의 힘에 의해서 그냥 밀려와서 덮쳐버립니다. “미안하다. 낚시하고 있는 것, 내가 못 봤다.” 이런 바다는 없습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께서 인간을 흙으로 봤으면 ‘왜 우리 애는 다섯 살 때 죽이십니까?’ 하는데 다섯 살짜리 애는 흙이 아닙니까?
누가복음에 나오는 이야기인데 망대가 무너져서 18명이 죽었지요?(눅 13:4) 만일 “왜 죽이십니까?” 한다면 이것은 질문이 잘못되었지요? 망대에서 죽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고 “회개치 아니하면 이와 같이 망하리라”고 되어 있습니다. 사람은 흙이고 땅에 속한 존재인데 어떻게 하늘에 속한 형상인 예수 그리스도가 결합하는가? 이것이 예수님이 우리를 찾아온 목적입니다.
안 찾아오면 그냥 흙으로 죽으면 됩니다. 다른 사람은 찾아오고 나는 안 찾아오고, 이렇게 섭섭하게 여길 인간 없습니다. 우리는 흙이기에 흙으로 돌아가면 그만인 것이지 거기에 무슨 욕심을 부립니까? 예수 믿겠다고요? 세상에 그런 욕심이 어디 있습니까? 안 믿어지는 예수를 왜 믿습니까? 안 믿어지면 안 믿는 겁니다.
하나님의 일은 아주 깔끔합니다. 5월초가 되면 온 거리와 산을 뒤덮는 매혹적인 냄새가 있습니다. 무슨 냄새입니까? 아카시아 향기입니다. 그 냄새는 코에 이상생긴 사람 빼놓고는 누구나 다 맡을 수 있습니다. 아카시아가 왜 냄새를 피웁니까? 아카시아에게 물어 보세요.
“아카시아 아저씨, 왜 이렇게 향기가 아름다운가요?”
“나? 아카시아거든.”
그러면 끝나는 문제입니다. 아카시아가 향기를 품는 것이 뭐가 이상합니까? 그게 당연한 것 아닙니까? 우리는 흙입니다. 흙이니까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당연한 것이지 그것을 가지고 애달프고 슬프고 통곡할 것이 무엇이 있습니까? 성경에서는 진짜 슬퍼하고 통곡할 일은 지옥에 가서 ‘내가 나밖에 모르는 그 자신을 보고 통곡하라’고 합니다.
앞서가신 분을 모르고 나밖에 몰랐다는 그것을 슬퍼해야 합니다. 이왕 흙으로 태어난 것 인생 성공이 어디 있고 실패가 어디 있습니까? 태어난 것 자체가 이미 실패입니다. 어떤 인생도 실패밖에 없습니다. 거기에 예수님께서 자신의 하늘의 형상과 결합이 되었으면 그것이 바로 성공한 인생이지요. 거지보세요. 성공했잖아요.
끝이 좋아야 다 좋은 겁니다. 중간이 좋은 것은 소용없습니다. 중간시험 칩니까? 기말시험으로, 마지막시험으로 끝내버립니다. 우리가 예수를 생각할 때 자기는 멀쩡하게 있고 예수님에게서 자기 필요한 것을 가지고 오는 것처럼, 기도하면 복이나 주는 그런 예수를 찾으니까 문제가 되는데 예수님이 어떤 시선으로 어떤 안목으로 우리를 쳐다보고 있는지 그것을 눈치 채야 그게 예수님을 제대로 아는 겁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그냥 흙으로, 흙에 속한 형상으로 볼 뿐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나님께 안하셔도 될 수고로운 일을 하셨는데 그게 사람들에게 율법을 준 겁니다. 율법을 주나 안주나 인간의 운명은 바뀌어 질것이 없습니다. 율법 주나 안주나 인간은 죽습니다. 율법이 안주어질 때도 사람은 죽었고, 율법이 주어져도 사람은 죽었습니다. 율법은 사람을 낫게 한다든지 개선하는일에 전혀 보탬이 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율법을 주신 것은 이왕 흙이 되고 이왕 죽어가는 인간이 어떻게든 ‘내가 왜 죽지? 왜 저주받지? 왜 흙이 되어야 하지? 왜 하늘나라 못가지?’ 그런것들을 알게 하기 위해서 율법을 준 겁니다. 그것 없어도 저주 받지만 모든 사람으로 하여금 저주 받도록 하기 위해서 율법을 준 겁니다. ‘아, 이래서 저주를 받는구나’를 알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율법을 준 것은 우리가 하나님과 원수였음을 알리기 위해서 율법을 준 겁니다. 이 성경전체가 다 마찬가지입니다. 성경을 달달 외운다고 구원되는 것 아닙니다. 왜 예수님께서 쳐들어 와서야 우리가 구원되는가를 알려 주기 위해서 성경을 준겁니다. 성경은 이것을 근거로 해서 예수님께서 이런 이유로 인해 왔어야 된다는 것을 알려주기 위해서, 성경책에 준해서 우리를 구원하심을 보여주기 위해서 성경을 준겁니다.
그러니 이 성경을 누가 다루어야 됩니까? 성경책은 예수님이 다루어야 할 책입니다. 우리가 다룰 책이 아니고 우리는 성경책의 혜택을, 성경을 다루시는 예수님의 혜택을 입을 뿐입니다. 에베소서 2장은 우리는 가만히 있는데 예수님께서 이렇게 해서 너희들은 성전이 되어간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가만있는데 저 바닷물이 500미터, 400미터, 300미터, 200미터, 100미터 죽 밀려와서 덮쳐버리니까 구원받는 겁니다. 성경은 예수님의 저벅 저벅하는 발자국 소리, 예수님의 다가오는 소리를 우리로 하여금 크게 들리게 하는 겁니다. 우리는 묻습니다. “왜 우리를 구원하십니까?” 예수님의 답변은 간단합니다. “내가 예수다. 내가 구세주다.”
“왜 우리는 매일같이 죽어야 됩니까?” “너는 흙이잖아.” 성경이 우리에게 붙여준 이름대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붙여준 운명을 어느 누구도 변경하고 수정할 수 있는 권한이 없습니다. 이것이 기쁘지 않습니까? 경주에서 국회의원 출마했다가 교도소에 간 사람이 있는데 그 사람이 옥중에서 단식하고 있습니다.
돈 돌렸다고 선거법위반으로 당선도 무효 되고 교도소에 갔는데 단식하다가 병원으로 이송 했다든가 하는데, 그 사람이 예수님을 안 믿어서 그게 안타까워서 단식하는 겁니까? 무엇 때문에 단식하는 겁니까? 어떻게 따낸 국회의원인데 그것을 날릴 생각하니까 살맛 입맛 다 떨어져서 단식하는 것 아닙니까?
단식하면 흙에서 훌륭한 흙 됩니까? 그 사람은 날 때부터 자기가 국회의원 하기로 하고 태어난 줄 아는 모양인데 그게 아닙니다. 인간은 날 때부터 흙이고 하나님께서 날 어떻게 하시느냐가 중요하지 내가 뭐 되고 싶다는 그것은 별로 안중요합니다. 또 제가 청소년들의 꿈과 비전과 희망을 꺽어 버리는 소리를 했는데, 꿈과 희망과 포부, ‘다른 사람은 저렇게 사는데 나도 빨리 저렇게 따라 붙어야지’라는 꿈과 포부 소망이 누구는 없겠습니까? 다 있습니다.
그런데 지금 제가 하는 말을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된다는 말입니다. 왜? 사람이 언제 즐겁고 기쁜가 하면 모든 해답을 다 알아버렸을 때, 모든 결론을 다 쥘 때 가장 행복합니다. 답이 나와 있을 때 가장 행복합니다. 그 답이란 흙에 속한 나와 하늘에 속한 형상인 예수님이 결합해서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는다는 그것이 결론이고 정답입니다.
다른 정답은 없습니다. 요지부동입니다. 우리가 흔들어 대도 그 정답은 변함이 없습니다. 세숫대야에 담긴 물위에 뜬 달이 밉다고 그 형상을 작대기로 막 흔들어보세요. 처음에는 어그러지는 듯 보여도 한 10초만 기다리면 다시 달은 환하게 웃고 있습니다. 성경을 찢는다고 성경이 달라집니까? 걱정하지 마세요. 내가 못 지키는 성경, 나보다 앞선 분인 주께서 지켜서 우리는 그 뒤에 달린 객차로 붙여 주십니다.
우리가 붙이는 것이 아니고 성령에 의해서 하나님의 그 완성된 의 뒤에 우리가 딱 들어 붙는데, 이게 우리의 육체로 붙인 것이 아니고 성령에 의해서 붙었기에 떨어지지 않고 딱 들어붙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흙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알게 했다는 말은 우리가 이미 하늘에 속한 형상을 입었다는 뜻입니다.
다른 사람 같으면 그 말을 안 믿을 것이 아닙니까? ‘나는 흙이다, 나는 죽을 운명이다’ 하는 것을 이미 안다는 그 자체는 ‘그것을 일러주신 분의 통보, 그것을 일러주신 분의 주장을 다른 이는 몰라도 저는 인정하겠습니다’라고 이미 결합이 되었기에 앞에서 이야기한 것이 뒤에 있는 객차에게 그대로 우리에게 전달되었기에 우리는 기쁜 거예요.
내가 흙이기에 비전도 소망도 없어졌다는 그것을 슬퍼할 것이 아니라 내 소망 같은 것은 다 없어져도 괜찮을 정도로 앞에 계신 예수님이 모든 것을 다 이루었고 그 해답과 결론이 나와 있고 그것이 요지부동이며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기쁜 겁니다. 내가 믿는 분이 변하지 않는다는 사실보다 더 기쁜 것은 없습니다. 가장 큰 행복이 거기에 있습니다.
시집갔는데 구박받고 친정으로 쫓겨 나왔다는 것, 그런 것은 별 문제 거리도 되지 않습니다. 사람이 난처하고 힘든 일을 당할 때 그런 것은 잘 이겨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가장 못 견디는 것은 남들이 나를 힘들게 한 그것이 아니라 내가 남들을 힘들게 한 그 때 참 견디기 힘듭니다. 졸음운전 하다가 신혼부부를 치어서 죽게 했을 때 얼마나 미안합니까?
사람은 자기가 원하든 원치 안든지 상관없이 남에게 피해를 주면서 살게 되어 있고 피해준 것 하나하나 끄집어내서 미안해하려면 이 땅에서 자살을 백번해도 모자랄 정도로 남에게 미안스러워 해야 됩니다. 젊을 때 아무리 자식을 잘 키워 놓아도 늙으면 자식들한테 짐이 되기 마련입니다. 냄새 나죠. 성격 까탈스럽죠. 아침에 전화 드려도 짜증내죠.
심지어 어버이날 같은 날도 짜증을 막 내면서 “그러면 이 부모가 칵 죽었으면 좋겠나?”하고 나옵니다. 옛날 자식들 같으면 “어머니, 죽으시면 안 되지요” 하고 나오지만 요새는 “맘대로 하세요”라고 나옵니다. 자식이 미운 것이 아니고 아무에게도 특히 자식들에게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으면서 아직도 살아 있다는 자신이 원망스럽고 미운 겁니다.
그런데 그런 것까지라도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이 제 이야기입니다. 왜냐하면 혼자 있다면 미안스러워 해도 되는데 내가 살고 싶어서 삽니까? 먼저 계신분이 이 세상 살면서 더 고생하라고 살려주는데, 이 세상 더 살면서 우세 당하고 얼마나 남에게 피해만 안겨주는 나쁜 흙의 본성을 알려주기 위함인 운명을 우리가 어떻게 할 수 없습니다.
빨리 죽는 것이 소망이지만 그런 혜택은 아무에게나 돌아갑니까? 혜택 받는 사람은 빨리 죽겠지요. 정 소원이거든 서해바닷가에 서있든 지요. 제일 좋은 것은 비행기 사고 나서 떨어지면 보험금 타먹으면서 죽으니 제일 좋겠지요? 어쨌든 에베소서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예수님이 다 했다는 겁니다.
왜 예수님이 다 해야 되는가? 우리는 예수님이 하신 것에 대해서 조금도 영향을 줄 수 없습니다. 우리가 무슨 행동을 한다고 해서 주님의 행동이 바뀌어지는 그런 것은 없습니다. 성경을 통해서 해답을 몽땅 삼키고 결론을 몽땅 다 삼켜버리세요. 이미 율법을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를 원수로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습니다. 이유도 모르고 영문도 모릅니다. 일부러 하나님한테 악감정 품고 그러지 않았습니다. 그냥 살다보니 자기밖에 모르는 겁니다. 자기밖에 모른다는 것, 나보다 앞선 분이 있다는 그 사실을 몰랐다는 것, 예수님 때문에, 예수님을 위하여, 예수로 말미암아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내가 몰랐단 말이죠.
몰랐기 때문에 우리는 나만 생각하고 신경 쓰다 보니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다는 말입니다. 율법을 통해서 보니까 하나님의 원수지간이 된 거예요. ‘원수지간이 되었구나’라고 한다고 해서 그것이 구원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원수지간이구나!’라고 한다면 그냥 죽어야죠.
그런데 아무 이유없이 버림을 당해도 마땅한 우리를 우리보다 앞서신 분이 이번에는 무엇으로 바꾸느냐 하면 하나님의 거처할 성전의 벽돌로 삼기 위해서 하나님의 성령의 시멘트로 발라버리기 위해서 그 시멘트가 발릴 하나의 벽돌로서 우리를 채택했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거하시는 거룩한 거처가 되게 하기 위해서 우리를 새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에베소서 2:15,16
“원수된 것 곧 의문에 속한 계명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폐하셨으니 이는 이 둘로 자기의 안에서 한 새 사람을 지어 화평하게 하시고 또 십자가로 이 둘을 한 몸으로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려 하심이라 원수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새사람이 뭔지 우리는 모르지요. 새사람이라고 하니까 우리는 새사람인줄 알지 새사람 되었다고 해서 갑자기 금식하면서 기도한다든지 혹은 성경 세장 읽다가 갑자기 네 장씩 읽는다든지 그러지는 않습니다. 다만 내 마음속에 느끼는 것은 ‘아, 새 사람이구나’ 하는 그것으로 끝입니다.
‘새사람이라면 하나님께서 새사람을 만드신 그 취지가 들어오겠구나. 새사람에 합당한 삶, 새사람이 필요한 곳에 하나님께서 들어서 쓰시겠구나’라는 것만 여러분이 각오하시면 됩니다. KTX를 탔는데 마지막 18번 열차에 탔습니다. 맨 앞에 기관차를 보니까 전라도 쪽으로 가지 않고 서울 쪽으로 가게 되면 ‘아, 서울 쪽으로 가는구나’하고 아는 것처럼, 내가 내 인생을 결정하는 것이 아니고 내 앞에 있는 분이 나를 어디에 쓰시려고 하느냐?
하나님께서 거처할 성전으로 쓰시려고 하나의 벽돌로서 나를 동원시키고 쓰시겠다는 겁니다. 그것을 저 뒤에 달린 18번 열차에다 기내방송 하듯이 통보하는 겁니다. “아아, 서울까지 모시게 된 이 열차의 차장 000입니다. 이 열차는 30분 후에 서울역에 도착합니다.” 이렇게 소개해 주는 겁니다.
따로 내 인생 목표, 따로 내 인생 계획 이것을 안 해도 되도록 짐을 덜어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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