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에서 한 이십분 거리 각금리에는 아버지의 외가집 즉 우리 진외가가 있었다.
집안에 대사가 있거나 할아버지 할머니의 생신때 또는 제사를 지냈을때에 할머니는 새벽에 나를 깨워 심부름을 보내셨다.
친정 부모님이신 외증조 할아버지 할머니께 아침을 드시러 오시라고 기별을 넣는 것이었다.
큰 도랑을 건너 바가지 산을 지나 돌부리에 채이며 언덕길을 오르면 산 그늘에 반쯤 가리어 아직 눈 뜨지 않은 작은 마을이 나타났다. 그 날망에 한아름도 넘는 큰 고염나무가 지키고 있는 사립문이 진 외가였다.
방에 들어갈 새도 없이 마당에 서서 소죽 솥에 불을 지피시던 외삼촌 할아버지께
"할아버지 할매 진지 잡수러 오시래요."
전달만 하고 바쁘게 돌아 나오다 보면 아랫쪽 연숙이네 집에서도 연기가 피어 올랐다.
나는 낮은 돌담을 넘어다 보고 큰 소리로 '연숙아' 불러 놓고 후다닥 뛰어 내려왔다.
연숙이가 일어나 부스스한 얼굴로 내다 볼 즈음에 나는 이미 동네를 빠져 나오며 키득키득 웃었다.
학교에 가면 '너지?' 하며 연숙이가 눈을 흘겼다.
외증조 할아버지 할머니는 두분이 똑같이 검은 머리가 한올도 섞이지 않은 하얀 백발이었다.
어쩌다 할머니를 따라 한번씩 찾아 뵐때에 방 한쪽에 고구마 통가리가 있는 자리가 깔린 어둑한 방에 두분이 마주보고 하얗게앉아서, 나를 보러 더 유난스레 들락거렸던 손녀딸들에게 '가만히 좀 있거라' 시며 교대로 옆에 놓인 긴 담뱃대로 툭 건드리시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나이는 어려도 내게는 고모뻘인 그 손녀들 중에는 경림이도 있었는데, 6.25때 전사한 할아버지 맏아들의 유복녀였다.
며느리 까지 팔자 고치라 떠나 보내고 나니 제 숙부 밑에서 크는 손녀가 애처로워 두분은 각별히 다른 손녀들에게 보다 마음을 쓰셨으나 경림은 생긴 것 까지 얼굴이 갸름하고 여위어 모든 집안 사람들을 안타깝게 하였다.
내가 심부름을 가면 사촌 동생을 등에 업고 마을 저 아래까지 따라 나오며 '가다가 도랑에서 까먹으라'며 손에 닿는 가지에서 쌍으로 달린 풋호두를 따주었다.
말수도 적고 그저 빙그레 웃기나 하던 경림은 나이가 차서 결혼을 하였으나 남편이 병으로 죽고 아이들 데리고 고생한다는 얘기가 있어 '부모복 없더니 서방 복도 없구나'라고들 하였다.
늦은 가을이면 고염나무 아래에 멍석을 펴 놓고 고염을 떨어 큰 장독에다 눌러 담아 익혔다가 겨울에 작은 항아리 하나씩 우리 집으로 보내주셨는데, 고염은 감하고 달리 몸집이 작다보니 상대적으로 씨 치례였지만 한 대접씩 퍼다놓고 오물오물 밝아 먹는 맛도 괜찮았다. 진외가가 그리 넉넉한 살림이 아니라서 우리 할아버지는 처가에 끝도 없이 베풀어야 하는게 부담이 되셨던 모양으로 어떤날은 '뭘 얼마나 어떻게 하라는 거냐?' 며 할머니와 다투시기도 하셨다.
당시에 드물게 여든이 넘도록 장수하시고 두분이 세상을 떠나신 후 무슨 영문인지 잘 키우던 소가 몇 마리나 차례로 죽어 나가자 외삼촌 할아버지는 집을 정리하여 동구정 신작로 옆으로 이사를 나왔다.
그 할아버지가 옛날 증조 할아버지 처럼 하얀 백발 이신 걸 생각하면 핏줄이란 참으로 속일 수가 없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할머니의 막내 동생이시라 맏 조카인 우리 아버지보다는 두살 아래가 되시지만, 그 하얀 머리카락 때문에 어디에서든지 자연스레 윗사람 대접을 받게 되니 다행이라고 해야겠다.
우리 할머니 장례를 치루고 내려 오는 길에 고모들과 진외가에 들러 보았더니, 돌계단 두어개 내려가면 떡 버티고 섰던 늙은 고염나무나 곁에 기대어 서있던 사립문, 돌담을 끼고 길보다 낮은 마당이 있던 옛집은 없어지고 빨간 벽돌집이 낯선 이름의 문패를 걸고 있었다.
지난 가을 우리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고 외삼촌 할아버지도 아들을 따라 도회지로 떠나시니 이제 각금리 진외가는 우리들 추억속으로 묻혔다.
첫댓글 완성된 글은 언제나 될까요,,
이제 다 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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