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목: 본문: 창세기 4장 1-7절
지금도 기억에 남는 예배에 대한 감격을 경험한 적이 있었습니다. 제가 군대에 있었을 때였습니다. 군대에서 졸병 때 교회를 가는 것은 쉽지 않았습니다. 저의 부대에는 주일날 해야될 작업들이 많았습니다. 그렇기에 졸병이 교회를 간다고 말하는 것은 그러한 작업을 고참들에게만 맡기고, 졸병인 나는 그것을 하지 않겠다는 말과 같았습니다. 그래서 고참들에게 예배를 드리러 교회에 간다고 허락을 받는 것은 정말 쉽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예배를 빠진 주가 거의 없었습니다. 교회는 저의 부대에서 걸어서 약 20분 정도의 거리에 있었습니다. 11시 예배이므로 10시 40분에는 떠나야 하는데, 저는 대부분 고참에게 예배 10분 전에 허락을 받고 10분 동안 열심히 뛰어서 교회에 갔습니다. 숨이 차고 땀이 났지만, 그러한 상태에서 교회에 도착해서 기도를 드리면 눈에서 눈물이 저절로 흘러내렸습니다. 예배를 드리지도 않았는데도, 교회에 들어가기만 하면 하나님과 함께 있다는 생각으로 마음에 평안함이 있었고, 하나님의 보호 안에 들어왔다는 생각으로 기쁨이 있었습니다. 그 날 목사님의 설교를 듣기도 전에, 찬양을 부르기도 전에, 저는 감동을 받은 상태에서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러니 예배가 저절로 은혜가 되었습니다.
인간적인 시각으로 보면 군대에서 드리는 예배는 부족한 점이 많이 있습니다. 때로는 목사님도 없이 예배를 드렸고, 성가대도 없었으며, 조율도 잘 되지 않은 피아노로 반주를 하면서 찬양과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에 참석한 대부분의 군인들은 예배를 통해 은혜와 감동을 받았습니다. 왜냐하면 예배를 드리는 군인들에게는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는 간절함과 예수님에 대한 애틋한 사랑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좋은 예배는 좋은 교회당이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예배는 좋은 성가대가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좋은 예배는 좋은 환경이 만드는 것이 아닙니다. 비록 이 모든 것이 좋은 예배를 만드는데 도움을 줄 수는 있지만, 좋은 예배를 만드는 것은 그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입니다. 예배를 인도하는 목사님이 없어도, 아름다운 찬양을 드리는 성가대가 없어도, 좋은 시설의 교회 건물이 없다할지라도, 예배를 드리는 사람들의 마음에 하나님을 만난다는 감격이 있고,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이 있고, 그 가운데 성령님의 임재하심이 있다면 그 예배는 좋은 예배입니다.
본문의 사건은 제사, 즉 예배와 연관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본문은 아담의 자녀들에 대한 이야기요, 에덴을 떠난 후의 이야기입니다.
아담과 그의 아내 하와가 두 명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첫째는 가인이었고, 둘째는 아벨이었습니다.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고, 아벨은 양 치는 자였습니다. 세월이 흐른 후에 가인과 아벨은 각각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습니다. 가인은 농사하는 자였기에 땅의 소산으로 제사를 드렸고, 아벨은 양 치는 자였기에 양의 첫 새끼와 그 기름으로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으시고 아벨의 제사만을 받으셨습니다.
이 사건은 이해하기 힘든 말씀 가운데 하나입니다. 왜 하나님께서 아벨의 제사는 받으시고 가인의 제사는 받지 않았는지 본문을 통하여 발견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그러나 본문을 잘 읽으면 그 이유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이 자신이 갖고 있는 것을 드렸다는 것은 같은데, 아벨은 양의 첫 새끼와 기름을 드렸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여러 양 가운데 첫 새끼를 구별하여 드렸다는 것입니다. 고대 시대에 기름은 매우 귀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아벨은 귀한 것을 구별하여 드렸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자신의 것 가운데 구별하지 않고 그냥 일부를 드렸습니다.
구별한다는 것은 신학적인 용어로 '거룩'이라고 합니다. 아벨은 거룩한 제사를 드렸습니다.
레위기를 보면 하나님께 드려야 할 제물이 가진 재물의 정도에 따라, 또는 지위에 따라 다르게 언급되고 있습니다. 제사장이나 재물이 많은 사람은 소를 드렸고, 그보다 재정이 좋지 않은 사람은 양이나 염소, 그리고 더욱 어려우면 비둘기, 그리고 곡식을 드렸습니다. 이렇게 제물은 사람에 따라 달랐지만, 모든 제물에 공통적으로 있어야 할 모습이 있었는데, 그것은 '흠이 없어야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왜 하나님께서는 흠이 없는 제사를 원하실까요? 그 제물이 탐나서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이 세상을 소유한 부유한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흠이 없는 제사를 요구하신 것은 제물 자체에 관심이 있어서가 아니라, 제물을 드리는 사람에 관심이 있기 때문입니다. 제물을 드리는 자가 아무 것이나 드리는 태도가 아니라, 구별하여 드리는 태도를 보시기 때문입니다.
구별하여 드리는 것, 그것이 거룩입니다. 하나님께서 거룩한 제물을 말씀하신 것은 거룩한 예배자를 원하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분이시기에 우리도 거룩할 것을 요구하십니다.
레위기 19장 2절도 이렇게 말합니다.
"너희는 거룩하라 이는 나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 거룩함이니라."
아벨은 거룩한 제사를 드렸습니다. 제물 자체도 거룩했고, 제물을 드리는 아벨도 거룩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아벨과 그의 제물을 받으셨습니다. 그러나 가인은 거룩하지 않은 제사를 드렸습니다. 제물 자체도 거룩하지 않았고, 제물을 드리는 가인도 거룩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가인과 그의 제물을 받지 않으셨습니다.
거룩하지 않은 자의 모습에 대하여 본문 7절에 이렇게 말합니다.
"네가 선을 행하면 어찌 낯을 들지 못하겠느냐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느니라 죄가 너를 원하나 너는 죄를 다스릴지니라."
하나님께서는 거룩한 제사를 드린 가인에게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문에 엎드려 있다고 말씀합니다. 즉 선을 행하지 아니하면 죄가 네 곁에 가까이에 있게 된다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에는 죄를 다스리는 방법이 나와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죄는 저절로 행치 않게 되지 않습니다. 본문에서도 죄가 너를 원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 안에는 죄의 모습이 있습니다. 죄를 짓고 싶은 속성이 있습니다. 그러한 우리들이 죄를 짓지 않는 것은 죄를 피하는 것보다는, 적극적으로 선을 행하는 것입니다. 선을 행할 때 죄에서 멀어질 수 있습니다. 죄를 다스릴 수 있습니다. 우리가 죄를 다스리지 않으면 죄가 우리를 다스리게 됩니다. 우리가 죄의 종이 됩니다.
그러면 선을 행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할까요? 그것은 예배에 합당한 삶을 살라는 말씀입니다. 가인은 선을 행치 않았습니다. 거룩한 제사를 드리지 않았습니다. 거룩한 제사란 제사를 드리는 자신이 거룩한 것을 의미합니다. 자신이 거룩하다는 것은, 삶이 거룩한 예배다워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예배와 삶이 일치해야 한다는 뜻입니다. 예배를 통하여 우리의 삶이 예배다워질 때, 우리는 죄를 다스리게 됩니다.
2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사람들은 전쟁에 대한 말할 수 없는 충격으로 심히 당황하고 있었습니다. 이때 영국 여왕은 대주교에게 전화를 걸어서 국민들에게 설교를 해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대주교는 전쟁의 소식을 듣고 안절부절 못하고 있는 국민들에게 다음과 같은 메시지를 전했습니다.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 지금 우리는 예배를 시작해야 할 때입니다. 예배란 하나님을 바라보는 것을 의미합니다. 지금 이 순간, 이 시점이야말로 다른 어떤 때보다도 우리가 참으로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할 때입니다. 그 하나님만이 우리의 소망이고 우리의 대답입니다.”
우리도 지금의 상황이 어떠하든지, 아니 힘들기에 더욱 하나님만을 바라보았으면 좋겠습니다. 선으로 악을 이길 수 있는 것처럼,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만을 바라봄으로 현재의 어려움을 이기길 소망합니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닮아가는 자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이 우리들에게 넘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