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광수·염상섭·현진건·김동환·심훈·이육사·주요한·김동인·김기림 등 우리 가슴을 뛰게 하는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들은 모두 조선일보 기자였다. 이상재·신석우·안재홍·조만식·장지영 등 민족주의 독립 운동가들과 박헌영·임원근·김단야·조봉암 등 좌익 활동가들이 조선일보에 몸담으며 자신의 이상을 실현하고자 했다.
조선일보사 사료연구실 대표 정리 : 李漢洙 조선일보 기자〈helee@chosun.com〉
조선일보를 만든 당대 최고 지식인들
<조선일보 견지동 사옥 앞에서 간부진들이 사진을 찍었다. 앞줄 왼쪽에서 첫 번째가 사장 신석우, 오른쪽에서 첫 번째가 편집국장 한기악이다. 뒷줄 왼쪽에서 첫 번째는 홍명희의 동생인 판매부장 홍성희, 두 번째는 상무이사 백관수.>
1920년 3월 5일 창간한 조선일보는 동아일보(1920년 4월 1일 창간)와 더불어 일제시대 양대 민간지로서 우리 민족과 더불어 영욕을 함께했다.
일제의 탄압에 억눌린 좌절과 고통의 시간이 없지 않았지만 조선일보는 국권을 잃은 조선 민중의 대변지로서 일제에 항거하고 민족 문화를 유지, 발전시키는 데 진력했다.
일제의 언론 탄압과 빈약한 자본 속에 사주와 사옥, 기자들이 수없이 바뀌는 생존의 어려움을 겪으면서도 내실과 외형의 성장을 거듭한 조선일보는 1940년 8월 10일 일제에 의해 강제 폐간될 때 발행부수 6만 3000부의 최대 민간지가 돼 있었다. 당시 동아일보는 5만 5000부였다.
일제시대 청년 지식인들은 조선일보를 비롯한 민간 신문사에서 일하기를 소망했다. 의식 있는 젊은이들은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서 근무하는 것조차 매신이라 하여 꺼렸다.
총독부와 동양척식주식회사, 식산은행 등 일제의 수탈 기관을 제외하면 젊은이들이 일할 수 있는 직장은 민간 신문사가 거의 유일했다. 조선일보를 만든 사람들은 당대 최고의 지식인들이었다.
이광수·염상섭·현진건·김동환·심훈·이육사·주요한·김동인·김기림 등 한국 근대문학의 선구자들은 대부분 조선일보 기자였다.
이상재·신석우·안재홍·조만식·장지영 등 민족주의 독립운동가들과 박헌영·임원근·김단야·조봉암 등 좌익 활동가들도 조선일보에 몸담았다.
조선일보 사람들의 역사는 한국 언론사일 뿐만 아니라 오롯이 한국의 근현대사를 형성하고 있다.
이 같은 「조선일보 사람들」(가제·랜덤하우스중앙간)의 이야기가 곧 책으로 출판될 예정이다.
이 책은 조선일보사 사료연구실이 1년 3개월여 동안 자료를 수집하고 관계자들을 취재해 일제시대 조선일보 기자 100여 명(상권)과 광복 후부터 1970년대까지 활약한 조선일보 기자 100여 명(하권)의 삶과 활동상을 복원해 낸 것이다. 이 중 일제시대 기자들의 이야기를 요약·발췌했다.
예종석, 일 벌이기 좋아하는 마당발
총독부로부터 조선일보 발행 허가를 받은 사람은 대정실업친목회 간사 예종석 이었다. 그는 1920년 3월 스스로 부사장에 취임하고 소문난 부자인 조선상업은행장 조진태를 초대 사장으로 추대했다.
대정실업친목회는 1916년 조선의 실업인들이 일본 고위 관리들과 친목을 도모하기 위해 만든 단체이다. 조선일보는 이 단체에 재정적 후원을 기대했으나 창간 자금으로 모인 돈은 당초 20만원 목표에 턱없이 못 미치는 5만원에 그쳤다.
결국 조선일보는 창간 5개월 만인 1920년 8월12일 『본사는 지금부터 대정실업친목회의 관계를 분리하여 주주의 독립경영으로 진행함』이라는 사고를 내고 결별을 선언했다. 조선일보는 창간 첫 해에만 「불온 기사」로 두 차례 정간을 당했다. 조진태와 예종석은 5개월간 재임한 뒤 차례로 조선일보를 떠났다.
총독부가 작성한 비밀문서 「조선출판경찰개요」는 『조선일보는 발간 이래로 같은 해 7월 27일까지 발매반포 금지 및 압수처분을 받은 일이 23회에 이른다』며
『겉으로는 사장, 부사장 등을 교체하고 불량기자를 면직시키는 등 사내의 쇄신을 도모하고 근신하는 뜻을 보이게 꾸몄으나 그 속으로는 여전히 일본을 배척하는 사상을 키우고 그 붓끝을 고치지 않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예종석은 당대인들로 부터 그다지 좋은 평가를 받지 못했다.
『회장 자리가 한두 군데가 아니요, 말썽 많은 일 귀찮은 일에 발 벗고 나서지만 아기를 낳아 놓고 친정으로 간 일이 한두 번이 아니었다』(조선일보 1939년 11월 17일자)는 후대의 평가로 미루어 그는 일 벌이기를 좋아하는 마당발 스타일의 인물이었던 듯하다.
예종석은 광복 후 반민특위에 소환됐다. 손자 예상렬은 『무죄로 석방되긴 했지만 그때부터 의기소침해져 바깥출입을 잘 하지 않으셨다』고 했다. 그는 1955년 타계했다.
총독 암살 기도한 방한민
『일찍이 일본 군마의 발굽에 함부로 짓밟힌 조선민중은 누구누구 할 것 없이 모두 일본 군인을 두려워하였고, 총과 칼을 두려워하였다. (중략) 우는 어린 아이를 달랠 때에 「아이고, 왜놈 온다」 하는 것이 오직 한 가지의 모책이었다. (중략) 일본 사람이 총과 칼로써 조선민족을 쓸어 죽이려 한 것은 밝은 사실이 증명하는 바이다』(조선일보 1920년 6월 9일자)
일제통치에 통렬한 비판을 가하고 있는 이 글은 「조선민중의 민족적 불평!!」이란 제목의 조선일보 연재 기사이다. 기사는 「왜놈」이라는 자극적인 표현까지 서슴지 않았다.
이 기사는 조선일보 창간 때부터 기자로 활동한 방한민이 동료기자 최국현과 번갈아 가며 집필했다. 방한민은 주로 독립운동 관련 취재를 맡았다.
당시 동아일보 기자 유광렬은 『조선일보가 동아일보보다 앞서 발행정지를 당한 것도 방한민이 쓴 기사가 많은 작용을 하였다』고 술회했다(「기자협회보」 1969년 1월 31일자).
방한민은 조선일보가 민간지 최초로 정간당하는 빌미가 된 논설 「자연의 화」(조선일보 1920년 8월 27일자)를 집필하기도 했다. 이 논설로 그는 조선일보를 떠나야 했다.
1923년 7월 그는 조선총독을 암살하려는 거사를 도모하다 사전에 발각돼 1928년 6월까지 5년간 복역했다.
출옥 후 조선일보에 복직했으나 1929년 6월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다시 감옥에 들어가 1937년 10월까지 8년간 수감생활을 했다. 그는 오랜 옥살이와 고문의 후유증으로 정신이상 증세를 보였다고 한다.
방한민은 1·4 후퇴 때 서울에서 실종됐다. 손자 방병건은 할아버지의 행적을 추적해 2∼3년간 모은 자료를 정부에 제출했고, 정부는 1990년 방한민에게 건국훈장 애국장을 추서했다.
방한민과 함께 「조선민중의 민족적 불평!!」을 쓴 최국현은 1920년 5월부터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했다. 그가 입사한 시기는 조선일보가 3호까지 발행하고 재정난으로 두 달간 휴간한 끝에 정상적으로 발행되기 시작한 때였다.
최국현은 일제의 탄압에 맞서 언론 자유 투쟁을 벌였다. 1922년 일제가 「신천지」, 「신생활」 두 잡지의 기사를 문제삼아 관계자를 구속하자 최국현은 『당국의 처치가 크게 가혹하다』며 『우리는 언론의 자유를 옹호하기 위해 협동 노력한다』는 선언문에 조선일보 대표로 서명했다.
그는 1923년 사회부장에 올랐지만 1925년 10월 「신일용 논설 사건」으로 퇴사했다.
「신일용 논설 사건」이란 1925년 9월 8일 논설반 기자 신일용이 쓴 사설 「조선과 노국과의 정치적 관계」로 인해 조선일보가 정간되고 사회주의 및 민족주의 계열 기자들이 대거 퇴사하게 된 사건이다.
사설은 「적로·(붉은 러시아)의 힘을 빌려 독립하자」는 주장을 담고 있었다.
광복 후 최국현은 제헌 국회의원에 당선됐다. 1948년 반민특위가 발족되자 그는 재판부장 김병로 휘하의 특별재판관 15인 중 한 명으로 선임됐다. 그는 『염도 하지 말고 상여도 메지 말라』는 유언을 남기고 1970년 타계했다.
제목 잘 뽑은 현진건, 기자 시절 「빈처」 발표
1920년 12월 스무 살의 무명작가 현진건이 조선일보에 입사했다. 그는 한 달 전 단편 「희생화」를 「개벽」에 발표해 데뷔한 신진 작가였다.
당시 그의 작품은 『하등의 예술 형식을 갖추지 아니한, 소설도 아니요 독백도 아닌 일개 무명의 산문』(「개벽」 1920년 12월호)이란 혹평을 받았다.
현진건은 입사 후 투르게네프의 소설 「첫사랑」을 번안해 「초연」이란 제목으로 조선일보 1920년 12월 2일자부터 이듬해 1월 23일까지 연재했다. 이어 「부운」이라는 번역소설을 4월 27일까지 연재했다.
조선일보 기자로서 문학 습작을 한 것은 그의 필력에 큰 도움이 되었던 듯하다. 출세작 「빈처」는 그가 조선일보 기자로 근무하면서 「개벽」에 발표한 것이었다.
현진건은 기사 제목을 잘 뽑아내는 명 편집자였다. 조선일보 기자를 지낸 이서구는 『붉은 잉크를 붓에 듬뿍 찍어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주옥같은 명제목을 달아 선후배들로 하여금 그 재주에 혀를 내두르게 했다』고 회고했다.
조선일보 사장 이상재가 사망했을 때 사회부장이던 현진건이 단 제목 「무궁한, 부진루, 영구는 만년유택에」는 명제목으로 회자됐다.
그는 미남으로 유명했다. 한기악·이상화와 더불어 현진건은 『경성의 3대 미남』(「인문평론」 1940년 4월호) 중 하나로 꼽히기도 했다. 방인근은 그에 대해 『살결이 희고 맑으며 귀공자 타입으로 예쁘장스러운 미남』이라 회고했다.
현진건은 1943년 폐결핵으로 타계했다. 그의 사돈이 된 소설가 박종화도 창간 초기 기자로 활동했다.
대한민국 국호 발안한 독립운동가 신석우
1924년 9월 신석우는 조선일보의 판권을 인수했다.
당시 조선일보 판권은 송병준이 가지고 있었다. 경영난으로 표류하던 조선일보의 판권을 산 송병준은 이완용과 더불어 당대에도 『매국의 원흉』(조선일보 1926년 2월13일자)으로 불리던 인물이다.
그가 판권을 쥐고 있을 때 조선일보 사장은 황성신문 사장을 지낸 원로 언론인 남궁훈이었다. 송병준은 남궁훈의 견제로 신문 제작에는 전혀 손을 대지 못했다.
신석우가 조선일보를 인수하는 데 들인 돈은 8만 5000원으로 쌀 4300가마를 살 수 있는 큰돈이었다. 신석우는 의정부의 대지주인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재산 대부분을 여기에 쏟아부었다.
그는 「조선 민중의 신문」이라는 기치를 내걸고 민족의 사표로 추앙받은 월남 이상재를 사장으로 추대했다.
신석우는 상해 임시정부에서 교통총장을 지내며 「대한민국」이란 국호를 발안한 독립운동가이다. 그는 1919년 4월10일 임시정부 첫 의정원(국회) 회의에서 「대한」이란 국호를 제안했다.
신석우가 조선일보 경영을 맡은 기간은 모두 6년 6개월이다. 이상재가 사망한 뒤인 1927년 3월부터는 사장에 취임했다.
그는 이 기간에 약 42만원에 달하는 거금을 조선일보에 쏟아부었다. 훗날 그는 『회사를 그만두고 집에서 3년간 재상 중에도 그때의 채무관계로 인하여 지불명령이니 집행명령이니 하는 창피한 꼴을 범 38회나 당하였다』고 회고했다.
광복 후 초대 중화민국(대만) 대사를 지낸 그는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에 추서되었다.
조선일보 판권을 인수한 신석우는 1924년 가을 이상재의 집을 찾았다. 신석우는 지면을 대폭 쇄신해 조선일보를 「조선 민중의 신문」」으로 거듭나게 할 각오를 밝히고 이상재에게 사장 직을 맡아 줄 것을 요청했다.
이상재는 『동아일보와 서로 경쟁하지 말고 합심하여 민족의 계몽육성에 힘써야 한다』는 조건으로 신석우의 제의를 수락했다.
이상재는 좌·우파 양쪽 모두로부터 「민족의 사표」로서 권위를 인정받았다. 그의 한마디 한마디는 무거운 권위를 가지고 있었다. 그의 권위는 올곧으면서도 희생적인 그의 평소 모습에서 나왔다.
어느 해 추석이었다. 이상재가 편집국에 들어와 『자네들 송기떡(송편)이나 먹었나?』고 물었다. 기자들이 『월급이나 받았으면 좋겠습니다』고 대답했다.
이번에는 사장실에 들어가 간부들에게 『자네들 송기떡 먹었나?』고 물었다. 『네』하는 대답이 돌아오자 그의 입에서 벼락이 떨어졌다. 직원들은 월급이 안 나와 끼니도 못 이을 지경인데 어찌 간부들만 송기떡을 먹느냐는 질책이었다.
이상재는 1927년 2월 민족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이 연합하여 창립한 민족협동전선인 신간회의 회장에 만장일치로 추대됐다.
당시 신간회는 이상재·신석우·안재홍·장지영 등 조선일보 사람들이 주축이었다.
총독부가 「조선일보가 신간회인지, 신간회가 조선일보인지 모르겠다」고 할 정도였다.
1927년 병석에 누워 있던 이상재는 3월 25일 조선일보 사장에서 물러났다. 수차 밝혔던 사임의사가 조선일보 간부들의 만류로 번번이 반려되다가 끝내 받아들여진 것이다.
그는 사장을 사임한 나흘 뒤 78세를 일기로 눈을 감았다. 전날 후배들의 손을 잡고 『나는 가오. 일 많이 하오』라고 남긴 한마디가 그대로 유언이 되었다.
이상협, 『불 속에라도 들어가 취재하라』
이상협은 그의 손을 거치지 않은 신문이 없을 정도로 언론계를 풍미한 「신문 귀재」였다.
그는 동아일보 창간 발행인이었고, 조선일보를 혁신시킨 주인공이었으며, 민간신문인 중외일보를 창간하고 매일신보 부사장을 역임했다. 신문의 편집과 경영에 관한 지식과 경험은 당대 최고였다.
그는 기자를 훈련시킬 줄 알았다. 그가 냉정한 표정으로 취재지시를 내리면 누구도 군말을 달지 못했다.
화재 현장에 나간 한 기자가 전화를 걸어와 『불길이 너무 맹렬해 취재할 수 없다』고 하자 이상협은 『취재할 거리가 없으면 불 속에 들어가 찾아보라』고 일갈했다.
이상협은 조선일보에서 부인견학단 모집, 변장기자 탐방, 만화 「멍텅구리」 연재, 무선전화 공개방송 등 기발한 기획을 연이어 터뜨렸고, 독자들의 뜨거운 환호를 이끌어 냈다.
그는 1924년 9월부터 1년 조금 넘는 짧은 기간 조선일보에 재직했지만 후배 언론인들은 그의 황금기를 조선일보 시대라고 일컫는다.
1949년 2월 이상협은 반민특위에 소환됐다가 수감 당일 석방됐다. 이상협과 매일신보에서 함께 일했던 반민특위 재판관 최국현은 『만일 이상협씨를 구금한다면 나도 친일파이니 구금하라』고 했다.
이상협의 며느리 이예원은 『시아버님이 친일파였다면 우리 아버님께서 결혼을 시켰을 리 없다』고 했다.
이예원은 조선일보 영업국장을 지낸 독립운동가 이승복의 장녀로 이문원 독립기념관장의 누나이다.
아홉 번 감옥 간 장강대하의 문장가 안재홍
1926년 12월 의열단 소속의 청년 나석주가 식산은행과 동양척식회사에 폭탄을 던지고 자결했다.
이때 조선일보 주필 안재홍은 경찰조사 대상 제1호였다. 안재홍은 조사를 받으면서도 기개를 꺾지 않았다.
그를 직접 신문했던 종로경찰서장 모리(삼)는 『안재홍은 범 같은 놈이다』고 혀를 내둘렀다. 일본군 헌병 대좌 아리가(유하)는 『도대체 조선의 안씨들은 못마땅하다. 안중근·안명근·안창호·안재홍…』이라 중얼거렸다.
최남선이 창간한 시대일보의 논설위원을 지낸 안재홍은 이상재·신석우 체제로 개편된 「혁신 조선일보」의 주필로 초빙됐다.
그는 이후 발행인·부사장·사장을 거치면서 약 8년간 조선일보에 재직했다. 그는 이 기간에 사설 980여 편, 시평 470편 등 1450여 편에 이르는 글을 쓰면서 네 차례에 걸쳐 1년 이상 옥고를 치렀다. 그는 일제시대 모두 아홉 차례에 걸쳐 7년 3개월을 복역했다.
안재홍은 1928년 5월9일자 사설 「제남사변의 벽상관」에서 일본의 산동 출병을 외국의 사례를 인용해 비판했다.
그는 압수나 정간되는 사태를 막고자 최대한 우회적인 표현을 썼으나 총독부는 『국민으로 하여금 출병의 진의를 오해케 하고 국위를 중외·(나라 안팎)에 훼손케 하려는 비국민적 집필』이라며 그를 구속했다. 조선일보는 무기정간 처분을 받아 133일간 신문을 내지 못했다.
그는 대단한 속필이었다. 마감시간을 넘기는 일이 없었고 손님이 찾아오면 대화는 대화대로 나누면서 글을 써내곤 했다.
광복 후 건국준비위원회 부위원장과 미 군정하 민정장관을 지낸 그는 1950년 국회의원에 당선되었으나 6·25전쟁 중 납북됐다. 정부는 1989년 그에게 대한민국 건국 공로훈장을 추서했다. 시인 안혜초는 그의 장손녀이다.
궂은일 도맡은 언론계의 제갈공명 이승복
1927년 신간회 창립을 전후한 때 조선일보 부사장 신석우는 동아일보와 시대일보에서 영업국장을 지낸 이승복을 삼고초려 끝에 영입했다.
이승복은 전주들의 자금을 유치하는 데 남다른 능력을 발휘했다. 주위 사람들은 자금을 잘 융통해 오는 그를 두고 「난국타개의 1인자」, 「소제갈·(작은 제갈공명)」이라고 부르곤 했다.
이승복은 조선일보와 신간회 양쪽에서 궂은일을 도맡았다. 독립운동가 박중화는 그에 대해 『남달리 스케일이 큰 영웅적 기질을 지녔으나 좋은 자리는 남에게 맡기고, 자기는 늘 후선에서 일만 해 왔다』고 말했다.
조선일보 여기자 최은희는 『그 빼어난 인품과 남다른 인성에 탄복했다』고 했다.
그는 5년여간 영업국장으로 재직하면서 조선일보의 실질적인 경영을 뒷받침했다. 그러나 1932년 3월 「만주동포 구호금」을 유용했다는 혐의를 받고 안재홍과 함께 투옥된 뒤 감옥에서 사직했다.
그는 1945년 3월 예비 검속에 걸려 헌병사령부에 구금되었다가 감옥에서 광복을 맞았다.
그는 광복 직후 건준의 교통부장에 임명됐으나 끝내 고사하고 고향인 충남 예산으로 낙향해 1978년 83세로 타계할 때까지 공식적인 활동을 중단했다. 1980년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았다. 그의 장남 이문원은 독립기념관장을 맡고 있다.
독일에서 유학한 최초의 모스크바 특파원 김준연
1925년 1월5일 김준연은 3년 간의 독일 유학을 마치고 베를린을 떠나 런던과 상해를 거쳐 일본 고베(신호)에 도착했다. 항구에는 뜻밖에도 조선일보 이사 백관수가 마중을 나와 있었다.
백관수는 조선일보가 「조선 민중의 신문」으로 거듭난 과정을 설명하고 『함께 일하자』고 단도직입적으로 말했다.
김준연은 일본 동경제대 유학 시절부터 친형제처럼 지낸 백관수의 요청을 뿌리칠 수 없었다.
백관수와 김준연은 일본 유학시절 2·8 독립선언에도 함께 참여했다. 김준연은 2월21일 경성(서울)을 출발, 하얼빈과 이르쿠츠크를 경유해 50일 만인 4월11일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동아일보는 김준연이 조선일보 모스크바 특파원으로 출발한 다음날 역시 유럽에서 유학한 엘리트 이관용을 급히 모스크바로 보냈다.
그에게 비친 러시아는 결코 바람직한 이상국가의 모습이 아니었다. 소비에트 전체회의에선 의장이 무슨 제의를 하기만 하면 참석자들은 기계적으로 「흐르쇼(옳소)」만 연발했다.
호텔을 옮길 때마다 그의 통역과 안내를 맡았던 현지 조선인 유학생들로부터 『도청장치가 있을 것이니 조심하라』는 말을 들었다.
광복 후 그는 민족진영의 지도자로 정계에 투신했다. 1948년 제헌의원에 당선된 후 3~6대 의원을 지냈다. 1950년 법무장관을 거쳐 1967년 민중당 후보로 대통령 선거에 출마하기도 했다. 1991년 건국훈장 애국장이 추서됐다.
모스크바에서 김준연과 경쟁했던 이관용은 일제시대 손꼽히는 엘리트였다. 그는 20대 초반부터 10년간 영국·프랑스·독일·스위스 등 유럽 여러 나라를 돌아다니며 공부한 화려한 경력의 소유자였다.
1933년 8월 그가 타계했을 때 조선일보의 부음 기사는 그의 학력을 이렇게 썼다.
『이관용씨는 서력 1891년 경성에서 출생하야 1907년에 관립 한성고등학교를 졸업하고 1913년에 전수학교를 마친 다음 영국에 건너가 「억스포-드(옥스포드)」대학에서 정치사를 학습하야 1916년에 이를 마치고 즉시 불란서 「파리」에 건너가 불란서 어학을 배우고 1917년으로부터 동 19년까지 서서·(스위스)로 가서 「쮸리히」 대학에서 철학을 배워 「덕터 어부 필로소피」(철학박사)의 학위를 얻고 1920년에는 다시 「파리」로 와서 당시 「파리」에서 열렸든 강화회의에서 활약하였고 이듬해인 1921년에는 이태리를 거쳐 독일에 가서 백림·(베를린) 「예나」대학과 백림대학에서 철학을 연구하고 백이의·(벨기에)와 화란·(네덜란드)을 시찰한 후 1923년에 북미합중국을 경유하야 귀국(했다)』(조선일보 1933년 8월14일자)
이관용이 조선일보와 관계를 맺은 것은 1927년 2월 그가 신간회 간사로 선출된 무렵인 것으로 보이지만 입사 시점은 분명치 않다.
이 해 9월부터 조선일보 지면에 그의 기사가 등장하기 시작했고, 1929년 초까지 조선일보 특파원 자격으로 몇 차례 중국을 드나들며 국제적 감각을 살린 현장 기사를 많이 썼다.
일제의 조선인 학살현장을 파헤친 이석
1929년 11월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나자 이관용은 민중대회 개최를 모의했다는 혐의로 일제에 의해 체포되었다가 1932년 1월 가석방으로 출감했다.
출옥 후 그는 조선일보에 다시 복귀해 1933년 8월13일 불의의 사고로 타계할 때까지 편집고문으로 재직했다. 그는 함북 청진의 해수욕장에서 물놀이를 하다 불귀의 객이 되고 말았다.
1924년 8월11일 평북 위원군 화창면 산골 마을에 화재가 일어나 여섯 가구가 불타고 주민 28명이 불에 타 숨졌다.
조선일보 기자 이석은 경성의 전체 기자를 대표하는 「무명회 특파원」 자격으로 사건의 진상을 취재하기 위해 현장으로 떠났다.
「쥐도 새도 모르게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취재 길이었다. 4년 전 북간도 동포 학살 사건을 취재하던 동아일보 기자 장덕준이 살해당한 일도 있었다.
이석은 현장 취재를 통해 사건의 전말을 상세하게 보도했다. 그가 쓴 「위원 학살사건 현장답사 실기」는 조선일보 1924년 9월 27일자 사회면의 절반 이상을 차지했다.
사건의 발단은 한 무리의 「독립단」이 산골마을에 은신했다가 주민들이 지어준 점심과 저녁을 먹고 사라진 데서 시작됐다.
며칠 뒤 일제 경찰이 들이닥쳐 주민들을 위협하고 고문하며 이들의 행방을 추궁했다. 그러던 중 8월11일 마을에 화재가 발생했고 주민들이 불에 타 숨졌다.
이석은 일제 경찰이 「불을 질렀다」는 표현을 쓰지 않았지만 기사는 제목부터 「일촌 6호의 전멸, 평북 경찰부장이 인솔한 토벌대가 통과한 이튿날 밤에」라고 해 누가 만행을 저질렀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게 했다.
이석은 1925년 「화요회」 회원으로 활동한 사회주의자이다. 본명이 이봉수인 그는 광복 직후 경주군수를 지내고 1969년 타계했다. 장남 이웅근은 「조선왕조실록 CD-ROM」을 비롯해 학술 언론 관련 서적과 자료를 출간하는 「동방 미디어」의 회장이다.
이상재·신석우 체제의 등장으로 안재홍·백관수·이상협 등 민족주의 계열의 언론인이 대거 조선일보에 입사한 한편, 사회주의 계열의 기자들은 홍증식을 중심으로 조선일보의 한 축을 형성했다.
홍증식은 조선공산당의 모태가 된 화요회의 발기인으로 한국 공산주의 운동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1924년 9월 그가 조선일보의 영업국장에 취임하자 김재봉·신일용·홍남표·손영극·조봉암·김단야·박헌영·임원근 등 좌익 성향의 기자들이 대거 조선일보에 몰려들었다.
당시 좌익 성향의 이들을 「주의자」라 불렀는데 홍증식은 「주의자들의 대부」로 통했다.
그는 조선일보를 근거지로 삼아 좌익조직 확대에 힘을 기울였다. 영업국장으로 취임한 직후인 1924년 11월 그는 공산주의 행동단체인 화요회를 결성하고 본격적인 조직확대에 들어갔다.
그는 탁월한 말솜씨와 폭넓은 대인관계로 유명했다. 재기가 번뜩이고 책략도 풍부해 당시 「주의자」들은 그를 조조에 비유했다.
광복 후 홍증식은 대표적인 좌익지 「조선인민보」의 사장을 맡았다. 이후 월북해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을 지냈다.
글 잘 쓴 불운의 혁명가 김단야
1924년 12월 31일,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 김단야는 중국 상해로 가는 배의 객실에 앉아 있었다. 표면적으로는 취재차 가는 것이었지만 그는 코민테른(국제공산당) 대표와 만나 조선의 독립에 적극적인 지원을 요청했다.
김단야는 1924년 9월부터 이듬해 10월까지 약 1년 1개월간 조선일보 사회부 기자로 활동했다.
입사 당시 그는 이미 「주의자」로 알려져 있었다. 박헌영·임원근과 1900년생 동갑으로 훗날 「화요 3인조」라는 별칭을 얻게 된다.
김단야는 조선일보에 「레닌 회견기」(1925년 1월 22일~2월 3일)를 11회 연재했다. 레닌이 사망한 지 1년이 되는 때였다. 그는 1922년 1월 21일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민족대회에 조선 대표로 참석해 레닌을 만난 적이 있었다.
그는 『내가 만나던 날의 2년 후가 그(레닌)의 별세하던 날』이라면서 레닌의 이름 앞에 『프로공화국의 아버지』, 『인류역사상 위대한 새 기록의 주인공』 등의 수식어를 붙였다. 당시 사회부장 유광렬에 따르면 김단야는 글솜씨가 매우 훌륭했다고 한다.
그는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하면서 1925년 4월 은밀히 조선공산당과 고려공산청년회 결성대회를 준비했다.
그는 1925년 4월 18일 박헌영의 집에서 열린 고려공산청년회 모임에 영업국장 홍증식과 함께 조선일보 대표 자격으로 참석했다. 그는 자신이 직접 작성한 강령을 낭독하고 이를 통과시켰다.
김단야는 모스크바에서 어이없는 죽음을 맞이했다. 1937년 11월 소련 군사법정은 그에게 『일제 첩보기관의 밀정이며 반혁명 폭동과 반혁명 테러활동을 목적으로 한 조직의 지도자로서 1급 범죄자』라는 판결을 내렸다. 1938년 그는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기사보다 조직에 열중했던 박헌영
박헌영은 1925년 5월 말 조선일보에 입사했다.
이때 임원근도 함께 입사해 이미 사회부 기자로 활동하고 있던 김단야와 더불어 「화요 3인조」가 모두 조선일보에 둥지를 틀게 됐다.
박헌영은 셋 중에서도 가장 원칙적이고 급진적인 면모를 가졌다.
하루는 좌익 청년들이 신문사에 들이닥쳤다. 당시 신문사에는 기사에 불만을 품은 좌익 청년들이 쳐들어와 기자들을 폭행 하기도 했다.
김단야는 『신문사는 신문사대로 입장이 있는 것이다』고 흥분한 청년들을 말렸다. 그러나 박헌영은 『무엇 때문에 나서느냐』며 김단야를 만류하고 청년들 편에 섰다.
박헌영은 좌익운동에 열성적 이었지만 기자로서 활동은 미미했다. 그는 기사를 거의 쓰지 않았고 기자로서의 글재주도 뛰어나지 못했다.
당시 사회부장 유광렬에 따르면 그는 『글을 지독히도 못 썼다』고 한다. 박헌영은 조선일보 지면에 단 한 편의 기명 기사도 남기지 않았다.
박헌영은 조선일보를 떠난 후 1925년 12월 제1차 공산당 사건으로 체포 되었을 때 미친 사람 행세를 했다.
자신의 변을 허겁지겁 집어먹을 정도였다. 그의 연극이 얼마나 완벽 했던지 담당 의사도 속았다. 그는 1927년 11월 22일 병 보석으로 풀려 나왔다.
박헌영은 1946년 월북한 뒤 북한에서 남한 좌익들의 활동을 배후에서 조종했으며, 북한 정권 수립 후에는 부수상 겸 외무상을 지냈으나 1955년 「미제의 간첩」으로 몰려 1956년 7월 처형됐다.
영화배우들과 난투극 벌인 염상섭
염상섭은 툭 하면 신문사를 때려치우고 나왔다. 성에 차지 않으면 사표를 던졌지만 그는 이내 기자로 다시 돌아가곤 했다. 그는 조선일보를 비롯해 동아일보·시대일보·매일신보 등에서 근무했다.
당시는 기자가 자신이 근무하는 신문 지면에 문학작품을 발표하는 게 드문 일이 아니었다. 원고가 부족해 어려움을 겪었던 신문사에서는 오히려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염상섭은 조선일보 학예부장으로 근무하던 1931년 1월 1일부터 이듬해 9월 17일까지 자신의 대표작이 되는 장편 「삼대」를 조선일보에 연재했다.
잡지 「동광」(1931년 10월호)은 『조선일보의 소설은 혼자 맡아 놓았다는 듯이 톡톡이 긴 놈을 꾸준히 매일 발표하는 (염상섭)씨의 정력에 먼저 경의를 표치 아니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다혈질의 성격으로 흥분을 잘하는 그는 싸움에 자주 휘말렸다. 「삼대」 연재를 시작하던 날 그는 뜻밖의 봉변을 당했다.
조선일보에 난입한 영화인들과 난투극을 벌인 것이다. 당시 영화계 인사들은 민간지 학예부 기자들에게 극도의 반감을 품고 있었다. 일부 영화담당 기자들은 배우와 제작자를 공개적으로 무시했고, 때로는 기자들 모임에 여배우를 불러내 술을 마시기도 했다.
1930년 12월 31일 송년회를 갖던 영화인들은 이튿날 새벽 조선·동아·중외 등 민간신문사에 난입해 윤전기에 모래를 뿌리는 등 소동을 벌였다.
여배우 복혜숙은 『조선일보의 경우는 학예부장인 염상섭씨를 필두로 한 기자들과 배우가 난투극을 벌이기도 했다』고 증언했다.
광복 후 염상섭은 경향신문 초대 편집국장을 지냈다. 1963년 타계하기 직전까지 술을 즐겼고 만년에 솟기 시작한 이마 위의 혹은 그를 떠올리게 하는 명물이 되었다.
1929년 11월3일 광주학생운동이 일어났다. 조선일보는 11월4일자 석간에서 『광주고보생과 중학생의 충돌로 20명이 중경상을 입었다』고 보도하고 『일본인 중학생이 조선 여학생을 놀린 것』이 사건의 원인이라 짚었다.
조선일보 서무부원 김무삼은 사건을 전해듣고 분노했다. 그는 견지동 조선일보 사옥 골방에서 광주학생운동 지지와 조선독립을 촉구하는 격문을 쓰고 거사를 일으키리라 다짐하고 「삐라(전단)」 1000여 장을 만들었다.
12월13일 인사동 조선극장에선 토월회의 「부활」 공연이 열렸다. 톨스토이 원작의 「부활」은 1000여 명의 관객이 객석을 가득 메울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김무삼은 삐라가 든 가방을 들고 2층 맨 앞자리에 앉았다. 공연은 대성공이었다. 관객들은 여주인공의 비극적인 운명에 눈시울을 적셨다.
공연이 끝나자 객석에 불이 환하게 들어왔다. 이때 김무삼은 2층 객석에서 가슴에 품고 있던 삐라를 꺼내 1층을 향해 뿌렸다. 그리고 무대 위로 뛰어 올라가 『광주학생운동 절대지지』, 『조선 독립 만세』를 힘껏 외쳤다.
아직 눈가에 눈물이 맺혀 있던 관객들은 이 거사에 박수를 보내며 호응했다. 조선일보 사회부장을 지낸 김기진은 『이것이 서울에서의 광주학생 사건의 첫 봉화』였다고 기록한다.
김기진은 당시 영업국장 이승복이 김무삼에게 거사를 지시했다고 했다. 김무삼은 광복 후 서울신문 상무와 주필 겸 편집국장, 합동통신 상무를 역임했다.
잡지 발행인이 된 시인 김동환
토월회 공연에서 거사를 일으킨 김무삼이 일본 경찰에 연행될 때 조선일보 종로경찰서 출입기자는 「국경의 밤」으로 유명한 시인 김동환이었다. 이날 회사에 돌아온 김동환은 편집국이 떠나가라 욕설을 퍼부으며 흥분했다.
『개 끌 듯 끌고 가는 개새끼들』, 『짐승만도 못한 놈들』 사회부장 유광렬은 얼굴이 붉어진 김동환을 달래며 말했다.
『기사는 안 쓰고 왜 그렇게 소리만 지르고 있어? 기자는 본 그대로 기사만 쓰면 되는 거야. 흥분하면 안 돼』
흥분과 감격을 잘하는 성격 때문에 김동환은 사회부 기자로선 적당하지 않다는 평가도 받았다.
사회부 후배 기자 김을한은 『성격이 순수하고 개결하여 적어도 사회부 기자로는 적당하지 못한 듯하였다』면서 『혹시 큰 뉴스를 다른 신문사에 빼앗긴 때에도 어디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이 태연하였다』고 했다.
김동환은 조선일보 기자 시절 잡지 「삼천리」를 창간했다. 「동광」 1931년 8월호는 『김동환씨가 사회부 기자로서의 수완은 어떠한 것이었는지 그렇게 뛰어나는 기록을 들을 길 없는 것이 유감이외다만은 잡지기자로의 또는 경영자로의 솜씨에는 새삼스러이 놀래지 아니할 수 없는 일』이라고 했다.
그는 「삼천리」가 안정권에 접어들자 1929년 12월 조선일보를 퇴사했다.
그는 일제 말기 제호를 「삼천리」에서 「대동아」로 바꾸며 친일 노선을 걸었다.
광복 후 그는 반민특위에서 재판장에게 『그 당시 강압적인 주위 환경으로 불가피한 일이었다』고 말했다. 김동환은 반민족행위 처벌법 위반으로 공민권 정지 5년의 선고를 받았다.
3형제가 조선일보 기자였던 저항시인 이육사
저항 시인 이육사는 1930년 첫 시 「말」을 조선일보에 발표했다.
1월 3일자 7면 하단에 1단으로 실린 10행의 짧은 시에서 그는 「채찍에 지친 말」이지만 새해에는 힘차게 소리칠 것을 다짐하고 있다. 이육사와 조선일보의 인연은 이렇게 시작됐다.
이 시를 발표한 후 중외일보 대구지국에서 기자생활을 시작한 이육사는 1931년 8월 조선일보 대구지국으로 자리를 옮긴다.
이육사가 대구 지국기자로 조선일보 지면에 쓴 첫 기명 기사는 「대구의 자랑 약령시의 유래」이다.
1932년 1월14일부터 네 차례에 걸쳐 쓴 이 기사에서 그는 「육사생」이라는 필명을 사용했다. 육사는 스포츠 관련 기사를 쓰기도 하는 등 활발하게 기사를 썼다.
이육사의 형제는 모두 여섯이다. 첫째가 원기, 둘째가 육사 자신인 원록, 셋째 원일, 넷째 원조, 다섯째 원창, 여섯째 원홍이다.
그의 형제들은 저항정신이 투철해 1927년 대구조선은행 폭탄사건 때 첫째 원기부터 넷째 원조에 이르기까지 4형제가 모두 일제 경찰에 붙잡혀 고초를 당하기도 했다.
지금은 이육사가 가장 잘 알려져 있지만 1930년대엔 넷째 이원조가 더 유명했다. 이원조는 육사가 조선일보에 작품을 발표하기 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2년 연속 시와 소설을 당선시킨 문사로 조선일보 학예부 기자가 되었다.
육사 형제의 맏형 이원기의 장남인 이동영 전 부산대 교수는 『당시 조선일보 기자 이원조가 워낙 유명해서 육사는 그의 중형으로 소개될 정도였다』고 말했다.
다섯째 이원창은 1940년 폐간 때까지 조선일보 인천지국 주재기자로 활동했다. 그는 폐간호인 1940년 8월11일자 석간 3면 지방 특파원 방담기사에서 『저는 기자생활 5년인데 무슨 인연인지 3형제가 본사에 관계한 것은 잊을 수 없는 사실입니다』고 회고했다.
1930년대 접어들면서 조선일보의 경영상태는 더욱 악화되었다. 사원들은 월급을 받지 못하기 일쑤였다. 점심값도 없을 때가 많아 소속 국장 앞으로 밥값을 달아 놓고 식사를 해결했다. 사장 신석우는 부도를 막기 위해 미두상 임경래의 사채를 빌려 썼다. 다급할 때마다 500원, 1000원씩 빌린 돈이 7000원까지 불어났다.
1930년 가을 임경래는 빌린 돈을 전부 갚으라고 요구했다. 돈을 갚지 못하면 조선일보 판권을 저당 잡히라고 요구했다. 신석우는 그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을 수 없었다.
부산 동래 출신의 임경래는 증권취인소·(증권거래소)에서 큰돈을 번 사람으로 사채업을 한다고 알려져 있었다. 사원들은 사장 신석우가 임경래의 돈을 쓴 것을 성토하고 퇴진을 주장했다. 신석우는 이에 책임을 지고 1931년 5월 물러났고 부사장 겸 주필 안재홍이 사장으로 취임했다.
임경래는 자신을 반대하는 사원들이 점거한 견지동 사옥을 떠나 명치정·(현 서울 중구 명동) 동순태 빌딩에 임시사무소를 설치하고 독자적으로 신문을 발행하기 시작했다.
그는 몇몇 기자들과 함께 신문을 발행했다. 이때 견지동 사옥에서도 사원들이 별도의 신문을 발행해 『견지동과 명동에서 두 개의 조선일보가 각각 발행된 때도 있었다』고 유광렬은 회고했다.
임경래는 보름 가량 신문을 내다 발행을 포기했다. 수지타산도 맞지 않았고 비난 여론 속에 실속 없이 신문을 계속 낼 수 없었기 때문이다. 임경래는 1933년 방응모에게 조선일보를 넘겨 준 후 언론계에서 자취를 감췄다.
조선일보를 인수한 금광왕 방응모
1932년 말 경영난과 내부 분란으로 표류하고 있는 조선일보를 평북 정주의 금광왕 방응모가 인수할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 시작했다.
조선일보의 정상화를 위해 노력하고 있던 편집국장 주요한은 여러 차례 방응모를 찾아가 조선일보 인수를 설득하고 있었고, 분란 타개를 위해 1932년 11월 초빙된 사장 조만식도 방응모에게 조선일보의 경영을 맡으라고 종용했다.
당시 신문사는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는 자선사업 정도로 인식되었다. 한 잡지는 이런 상황에서 조선일보를 인수한 방응모에 대해 『부호의 의무를 다할 줄 아는 인격자』라며 『바라건대 금후의 금광왕들은 모두 방응모씨를 본받아 사회와 고락을 같이하여 주기를 바란다』(「삼천리」 1933년 10월호)고 썼다.
방응모의 경영 능력은 비범했다. 1933년 7월 조만식에 이어 제9대 사장으로 취임한 그는 이광수·서춘·함상훈·김동진 등 인재들을 불러 모으고 과단성 있게 사업을 펼쳐 나갔다.
1933년 조선일보의 보급부수는 2만 9341부로 동아일보(4만 9945부)의 절반 가량이었지만 방응모 사장 취임 후 불과 3년 만에 6만 626부로 동아일보(3만1666부)를 두 배 이상 앞서기 시작했다. 조선일보는 1940년 폐간 때까지 조선에서 발행되는 민간 신문 중 최다 부수를 자랑했다.
일제시대 방응모는 드러나지 않게 독립운동가를 후원했다. 그는 안창호와 가곡 「선구자」의 주인공으로 전설적인 독립운동가였던 일송 김동삼의 장례비를 댔다.
그의 손자 김중생은 『1937년 할아버지가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했을 때 만해 한용운 선생이 시신을 수습했고, 계초 방응모 선생이 자금을 내놓아 5일장을 치렀다』고 말했다.
방응모는 일제시대 독립운동가들이 소식지를 찍어내는 데 활자를 제공하기도 했다.
이강훈 전 광복회장은 간도와 만주에서 독립운동하던 때를 회고하면서 『당시 계초 방응모 선생께서 조선일보의 자모활자를 빌려줘 독립운동 소식을 찍어 알리는 데 요긴하게 사용했다』(조선일보 1991년 11월12일자)고 회고했다.
방응모는 일제의 요구로 시국강연에 불려 다니기도 하고 「임전대책협력회」에 이름을 올리기도 했다. 이 단체에는 본인의 의지와 관계없이 조선의 지도급 인사들이 총망라됐다.
1948년 8월 반민특위가 발족했을 때 방응모는 『시국강연 기타에는 (동아일보 사장) 백관수씨와 같이 당시 신문사장으로 부득이 참가한 듯하며, 특히 배일(排日)도 친일(親日)도 할 사람이 아니다』(「친일파 군상」)는 평을 들었다.
6·25 전쟁 발발 후 그는 피란을 가지 않고 서울 중구 신당동 자택에 머무르다 7월6일 납북되었다.
조선 신문계의 무솔리니, 이광수
1933년 8월 동아일보 편집국장 이광수가 조선일보 부사장으로 자리를 옮기자 언론계가 발칵 뒤집혔다.
그는 동아일보에 10년간 재직하면서 논설·사설·소설·횡설수설을 모두 써 『신문의 4說(설)을 도맡았다』는 말을 듣고 있었다. 그런 이광수가 동아일보를 버리고 조선일보로 간다 하니 대단한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이광수는 1919년 2·8 독립선언서를 기초한 후 중국으로 건너가 상해 임시정부의 기관지 「독립신문」의 편집국장을 지낸 경력을 가지고 있는 언론인이었다.
그는 「삼천리」와의 인터뷰에서 『사장 방응모 씨나 편집국장 주요한 군 그밖에 여러 동지의 관계로 보아 조선으로 아니 갈 수 없어서 그리 한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조선일보에 소설 「유정」을 연재했다. 독자를 사로잡는 데 그의 소설은 「보증수표」였다.
그는 조선일보에서 부사장 겸 취체역·편집국장·학예부장·정리부장 등 무려 다섯 개의 직책을 맡았다. 이렇게 수많은 겸무를 맡자 『조선 신문계의 무솔리니』라는 별명이 붙기도 했다.
그는 입사 9개월 만에 조선일보를 떠나게 됐다. 어린 아들의 죽음 때문이었다. 그는 슬픔에 빠져 1934년 5월 조선일보를 퇴사하고 금강산으로 향했다.
이광수는 1935년 다시 조선일보사에 입사, 편집고문으로 취임했다. 갑작스러운 사직으로 중단됐던 「그 여자의 일생」을 다시 연재했고 이어 「이차돈의 사」, 「애욕의 피안」, 「그의 자서전」, 「공민왕」 등의 작품을 조선일보 지면에 연이어 쏟아냈다.
그러나 1937년 수양동우회 사건으로 일제에 검거되면서 조선일보를 떠나게 되고 언론인으로서의 삶도 중단됐다.
이광수는 신문기자라는 직업을 천직으로 생각했다. 그는 「신문기자의 기쁨과 슬픔」(「철필」 1931년 2월호)이란 글에서 신문기자로서 기쁠 때는 『민중이 다 기뻐할 만한 사건을 보도할 수 있는 때, 저녁식사 후에 각 신문을 비교해 볼 때 우리 신문이 남보다 나음을 발견할 때, 때때로 내 천직이 사회의 양심이 되고 대언자가 된다는 프라이드를 느낄 때』 등이라고 했다.
반면 기자로서 슬픈 일은 『게재하기 싫은 것을 게재하지 아니치 못하고 게재하고 싶은 것을 게재하지 못할 때, 사설로나 기타로 하고 싶은 말과 분명히 정당한 말이지만 하지 못할 때, 신문이 압수가 되는 때, 신문이 정간이 되는 때』라고 했다.
그러면서 이광수는 『신문기자가 기쁨이 많은 직업이냐, 슬픔이 많은 직업이냐. 그것은 전자다. 그러기에 박봉을 받고 생명을 깎아 버리는 것이다』고 했다.
김동인, 『기자생활은 수절과부의 서방질』
작가 김동인은 대단한 독설가였다. 특히 기자로 「변절」한 문인들에게 그는 혹독한 비난을 퍼부었다.
그는 동아일보 편집국장 이광수에게 『비상한 노력 끝에 위선적 탈을 썼다』며 『(그의) 작품은 한낱 인도주의를 과장한 문자의 유희에 멈췄을 뿐』이라고 비난했다.
역시 동아일보 기자로 입사한 주요한에게는 신문사를 그만두고 시인으로 돌아가라며 『이것은 나의 권고인 동시에 조선문예 애호가를 대표한 나의 명령이다』고 덧붙였다.
그런 그가 1933년 4월 조선일보 학예부장으로 입사한 것은 그야말로 「사건」이었다. 직장생활을 한 것은 그의 일생을 통틀어 이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그는 훗날 기자생활을 한 것에 대해 『과부의 서방질이나 마찬가지로 나 스스로도 창피하게 생각하는 바이다』(「문단 30년의 자취」)고 했다.
입사 후 김동인은 단편소설 「적막한 저녁」과, 역사소설 「운현궁의 봄」을 동시에 연재했다. 그는 의욕적으로 학예부를 운영했다.
「가정란」과 「어린이란」을 확충하고 학예면에 독자들이 직접 참여할 수 있는 기회의 폭을 넓혔다. 하지만 그는 편집국장 주요한과 소설가 추천 문제로 의견충돌을 빚어 입사 40여 일 만에 퇴사했다.
한 달 후 김동인은 재직 시절에 연재하다 중단했던 소설 「운현궁의 봄」을 다시 연재했다. 이때 사장 조만식이 직접 그의 집에 찾아와 파격적인 원고료를 제시하며 계속 집필해 줄 것을 특별히 부탁했다고 한다. 그는 「운현궁의 봄」을 한꺼번에 완결해서 써 주고 원고료 600원을 일시금으로 받았다.
1930년대 중후반경 그는 극도의 신경증으로 집필이 불가능한 상태에 이르고 마약에까지 손을 댔다. 1938년 그는 정신착란 상태를 겪었다.
약물중독 상태에서 총독부 관리가 옆에 있는 것을 모른 채 한 말이 천황모독죄에 걸려 약 반 년간 헌병대에서 옥살이를 하기도 했다.
김동인은 6·25 전쟁 당시 운신을 전혀 못 하는 상태에서 피란을 떠나지 못하고 홀로 남겨졌다가 아무도 없는 방에서 외로이 생을 마감했다.
독립운동 이끈 최고의 경제전문가 서춘
이광수와 함께 동아일보에서 조선일보로 옮긴 서춘은 당대 최고의 경제전문가로 정평이 나 있었다.
당시에 이미 『그의 경제학상 온축은 아마도 현대 조선에서 첫 자리를 다툴 만하다 해도 크게 망발은 아닐 것』(「동광」 1931년 7월호), 『이미 자기의 경제학상 코-쓰를 완정하고 나앉은 뿔조아(부르주아) 경제학계의 제1인자』(「삼천리」 1932년 8월호)라는 평가를 받았다.
서춘은 일본 경도제대 유학 시절 민족의식이 넘치는 청년이었다. 서춘은 1919년 1월 조선기독교 청년회관에서 열린 시국웅변대회에서 민족자결 원칙에 따라 자주독립하는 것이 마땅하다는 주장을 폈다.
이 모임은 3·1 운동에 영향을 준 2·8 독립선언의 모태가 되었다. 그는 이 사건으로 9개월 금고형을 받았고, 유학 시절 내내 일본 경찰의 미행을 받아야 했다.
그는 1936년까지만 해도 민족적인 색채가 강했다. 그는 조선일보 1936년 8월23일자부터 34회에 걸쳐 연재한 백두산 탐험기에서 『남극탐험과 북극탐험에까지 조선 사람의 족적을 남기고야 말려는 것이 우리의 민족적 일 이상이다』라고 썼다.
그러나 서춘은 1937년 급선회했다. 일제의 경성법원 자료 중 「조선일보의 비국민적 행위에 관한 건」이라는 동향보고서를 보면 서춘은 중일전쟁 발발 직후 열린 긴급 간부회의에서 조선일보의 편집방향을 바꿀 것을 주장했다.
그는 중일전쟁의 중대성을 설명하고 종래 「일본군」 「중국」 등의 용어로 사용하던 것을 「아군」, 「황군」, 「지나」 등으로 바꾸고 일본 국민의 입장에 따라 게재하자고 제안했다.
서춘의 편집방침 변경 제안은 한때 받아들여지기도 했으나 곧 조선일보 기자들의 집중적인 공격을 받았다. 「비국민적 행위」 보고서는 『이때부터 서춘은 팔방에 적이 생겨 무기명 협박문 등 50∼60통의 우편물을 받았다』고 적고 있다.
서춘은 기자들의 공격을 받자 견디지 못하고 1937년 11 월24일 조선일보를 퇴사했다. 이후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 주필을 지냈다.
서춘은 1963년 2·8 독립선언의 공적을 인정받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으나 1996년 재야 사학자들의 이의제기로 서훈이 취소됐다.
서춘의 아들 서인창·서인국 형제는 『기자 출신인 아버지가 일제 때 쓴 기사 5000여 건 중 16건의 기사를 문제삼아 독립유공자에서 배제한 것은 부당하다』며 소송을 제기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꼼꼼한 글쓰기의 전형인 민족사학자 문일평
문일평은 1933년 4월부터 1939년 4월 타계할 때까지 6년간 조선일보의 편집고문으로 재직했다. 이 기간에 그는 주로 「사외이문」, 「화하만필」 등의 역사칼럼과 사설을 집필했다. 조선학을 강조한 그의 칼럼은 현재 이규태 칼럼의 모체가 되었다.
문일평은 박은식·신채호와 더불어 역사논설을 통해 일제시대 민족의식을 고취한 대표적인 민족주의 사학자이다.
그는 당대에도 『역사연구가로 이름』(조선일보 1926년 8월12일자)이 높았고, 『조선의 사가로서 또 평론가로서 우리 학계와 논단에 혜성같은 존재』(조선일보 1939년 4월5일자)로 평가됐다.
그는 일제시대 민족의식을 고취한 공로로 1995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됐다. 2003년 5월에는 「이달의 독립운동가」로 선정되기도 했다.
주로 역사와 문화 방면의 사설을 집필한 문일평은 글을 빨리 쓰는 속필은 아니었다. 문일평은 글 속도가 느린 것에 대해 괴로워했다.
1935년 사회부 기자로 입사한 우승규는 『문일평은 결벽이 남달라 원고를 쓸 때 잘못된 글자가 있으면 손가락에 침칠을 하며 싹싹 지웠다』고 증언했다. 그는 바쁜 와중에서도 『어떤 어휘를 쓰면 좋겠느냐』며 초년 기자에게 묻기도 했다.
문일평은 어린 사동에게도 묻기를 주저하지 않았고, 새파란 신입사원에게도 존대어를 썼다 한다. 하지만 술을 몇 잔 먹으면 「망국의 한」이 폭발했다.
유난히 큰 눈을 부라리며 『두고 보라니까, 왜놈은 망할 테니!』하고 큰 소리를 질렀다. 동료들은 문일평과 함께 술을 먹으러 갈 때면 『제발 왜놈 욕은 하지 말아 달라』고 빌다시피 부탁했다 한다.
그는 1939년 4월 갑작스럽게 사망했다. 사인은 급성단독:( 피부의 다친 곳으로 세균이 들어가서 열이 높아지고 통증을 일으키는 전염병)이었다.
문일평의 큰아들 문동표는 「방응모 장학금」을 받고 동경 유학을 다녀온 뒤 1936년 조선일보에 입사해 1947년 편집국장을 역임했으나 월북했다. 문일평의 외손녀는 방우영 조선일보 명예회장의 부인이다.
조선일보와 깊은 인연인 한용운과 홍명희
만해 한용운과 소설 「임꺽정」의 작가 벽초 홍명희는 모두 조선일보와 각별한 관계를 맺었다. 그들은 계초 방응모와 형제처럼 친밀한 교우관계를 나누며 일제시대 어느 기자들보다도 조선일보 지면에 글을 많이 쓴 문인들이었다.
시인 한용운이 소설가로 데뷔한 것은 조선일보를 통해서였다. 그는 1935년 장편소설 「흑풍」을 조선일보에 연재하며 소설가로 데뷔했다.
「흑풍」은 선풍적인 인기를 끌어 신문 발행부수가 6000부가 늘었고 이 소설을 읽기 위해 조선일보를 본다는 말이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어 소설 「박명」을 1938년 5월 18일부터 1939년 3월 12일까지 223회에 걸쳐 학예면에 연재했다. 1939년 11월 1일부터는 「삼국지」를 번역·연재했다. 한용운의 「삼국지」는 1940년 8월 조선일보가 폐간될 때까지 계속됐다.
홍명희는 옥고와 신병 등으로 몇 차례 중단을 맞으면서도 조선일보에 「임꺽정」을 무려 13년에 걸쳐 연재했다. 홍명희는 1930년대 조선일보 외 다른 신문에는 단 한 편도 글을 발표하지 않을 정도로 조선일보와 각별한 관계였다.
한용운과 홍명희가 조선일보와 긴밀한 관계를 맺은 것은 조선일보 사장 방응모와 깊은 친분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방응모는 이들의 든든한 재정적 후원자이자 지기였다.
방응모는 1933년 벽산스님 등과 함께 성북동 뒷산에 한용운이 거처할 수 있도록 심우장을 지어 주었다.
홍명희의 가족들은 조선일보에 몸담았다. 아들 홍기문과 동생 홍성희는 각각 조선일보 학예부장과 판매부장을 역임했다.
홍기문은 조선일보가 폐간된 후 3년 동안 방응모의 후원으로 조선왕조실록을 연구했고, 이때 연구를 바탕으로 광복 후 월북한 뒤 남한보다 앞서 「리조실록」을 출간하는 데 기여했다.
한용운과 홍명희도 방응모에게 깊은 애정을 나타냈다. 한용운은 방응모의 생일을 축하하는 한시를 써 『한강처럼 장수하기를 기원』하고, 홍명희는 방응모가 병을 앓을 때 쾌유를 비는 한시를 「조광」(1938년 11월호)에 발표하기도 했다.
전보삼 만해기념관장에 따르면 한용운은 방응모와 함께 심우장에서 바둑을 두며 시국을 걱정했고, 홍명희와 셋이서 배천온천에 다녀올 정도로 친밀했다.
손기정을 친동생처럼 돌본 운동기자 고봉오
조선일보가 폐간된 지 5년 만에 광복 후 다시 세상에 나오자 홍명희는 자못 흥분된 어조로 조선일보 복간호(1945년 11월23일자)에 축사를 쓰면서 조선일보 사람들과 맺었던 교우를 회고했다.
『조선총독부 학정 아래 희생되었던 조선일보가 다시 세상에 나온다고 한다. (중략) 내가 아직 이 세상에 살아 있어서 다시 살아 나오는 조선일보에 축사를 부치려고 눈에 익은 조선일보 마아크 박힌 원고지를 앞에 놓고 앉으니 전날 조선일보에 투고하라고 조르던 호암·(문일평), 일성·(이관용), 소설란을 같이 채우던 만해·(한용운) 이런 죽은 친구들의 얼굴이 눈앞에 어른거려서 생각이 감상적으로 흘러나오는 것을 금할 수가 없다』
1936년 8월 손기정이 베를린 올림픽 마라톤을 제패할 당시 조선일보 「운동기자」는 고봉오였다. 1933년 3월 조선일보 운동기자로 입사한 그는 신의주고보를 다닐 때 스케이트 선수로 활약했다.
고봉오는 손기정과 친형제처럼 지냈다. 같은 운동선수 출신인데다 고향도 신의주로 같았다. 나이는 고봉오가 다섯 살이 많았다. 그는 손기정이 돈이 없어 운동을 못 하거나 대회에 출전하지 못할 때면 뒷바라지를 아끼지 않았다.
손기정은 『(고봉오를) 형이라 부르며 가까이 지냈다』면서 『(일본) 메이지 대학에 다닐 때도 방학 때면 경성에 나와 고봉오씨 댁에 머물곤 했다』(「나의 조국 나의 마라톤」)고 회고했다.
손기정의 결혼 상대를 골라 중매를 선 사람도 고봉오였다. 그는 1938년 여름 손기정에게 동덕고녀 체육교사 강복신을 소개해 백년가약을 맺도록 했다.
고봉오는 이들이 사귀는 과정을 지켜보면서 「마라손왕 손군 가연코스로 향주, 반려는 동덕교원 「강선수」〉(조선일보 1938년 11월 8일자)라고 단독 보도했다.
조선일보 기사가 나가자 「아사히(조일)」·「마이니치(매일)」 등 일본 신문들은 손기정이 머물고 있는 동경의 합숙소를 찾아가 사실을 확인했다. 손기정은 처음에는 『결코 그런 일은 없다』고 부인했다. 일본 신문들은 조선일보의 보도를 오보라고 전했다.
그러나 손기정은 고봉오로부터 『벌써 조선일보에 발표되었으니 부정하지 말라』는 전보를 받고 비로소 기자들에게 사실을 발표했다.
1939년 운동부장이 된 고봉오는 광복 직후인 1945년 10월 서울에서 사망했다. 손기정은 직접 그의 시신을 수습해 서울 삼청동 인근에 안장했다.
「귀하신 몸」 사진기자 문치장
1935년 새해 첫날 조선일보 사진기자 문치장은 새로 구입한 조선일보사 전용 비행기에 올랐다.
비행기는 조선일보 촉탁 비행사 신용욱의 조종으로 신축 중인 조선일보 태평로 사옥 상공을 한 바퀴 돈 뒤 명동성당이 있는 명치정 일대와 동대문 상공까지 비행했다.
문치장은 비행기에서 찍은 사진임을 알아볼 수 있도록 프레임 왼쪽에 비행기 날개 일부를 집어넣어 구도를 잡았다. 한국 최초의 공중촬영이었다.
일제시대 사진기자는 사건 현장에 도착하면 우선 삼각대를 세우고 커다란 가방에서 부속을 꺼내 사진기부터 조립하는 게 일이었다. 조립이 끝나면 검은 보자기 안으로 들어가 피사체의 방향과 거리를 조정해야 하는데, 그 사이 현장 상황은 변하기 일쑤였다.
삼각대가 필요 없는 조작이 비교적 간편한 휴대용 사진기가 있었지만, 말이 휴대용이지 두 손으로 껴안아야 할 만큼 부피가 컸다.
문치장은 두루마기 속에 이 큰 휴대용 사진기를 감춰 넣고 다니며 일본 경찰들의 눈을 피해 사진을 찍었다. 그러다가 필름을 압수당하면 찍지 않은 딴 원판을 슬쩍 바꿔치기해서 내줬다.
큰 취재거리가 생겨 각 신문사에서 모두 출동해도 신문기자는 4∼5명 정도뿐이었다. 사진기자들은 특별 대우를 받았다. 1920년대 한 신문사의 사진기자는 편집국장과 똑같은 봉급을 받을 정도였다.
문치장은 민간지를 두루 거친 제1세대 사진기자였다. 문치장은 『모든 악조건 속에서 나를 신문기자로 만들어 준 것은 조선일보였다』(조선일보 1960년 3월 5일자)고 회고했다.
1933년 경성제대 철학부를 졸업한 박치우는 「생계의 길을 찾아」 평양 숭실전문 교수로 취직했다. 그러나 아카데미즘과 저널리즘을 연결하는 글을 쓰고 싶었던 그는 1938년 3월 조선일보 기자가 됐다. 그는 조선일보 지면에 주로 현대철학을 소개하는 기사를 썼다.
빨치산이 된 철학자 박치우
대학 시절 박치우는 일본인 지도교수로부터 『일본에서도 보기 드문 천재』라는 소리를 들었다.
그는 한국 철학계의 거목이 되는 박종홍과 대학 동기로 학문적 입장은 달랐지만 서로 돈독한 우정을 나누었다.
신문사 동료들로부터는 범접하기 어려운 인물이라는 평을 들었다. 잔소리를 잘했던 사회부장 홍종인도 그에게만은 『기사가 뭐 이 따위냐는 말은 못 했다』고 한다.
광복 직후 그는 「현대일보」의 주필을 지냈으나 곧 그의 행적은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김일성대학 초대 부총장을 지낸 재러시아 학자 박일은 『광복 직후 북한에는 학자들이 부족해 김일성대학을 창설하면서 서울의 학자들을 평양으로 비밀리에 입북시켰는데 박치우도 그중 한 명이었다』고 했다.
박치우는 남한내 게릴라부대인 빨치산의 정치교육을 담당한 강동정치학원의 교수로 활동하고 실제 빨치산 부대 정치위원으로 참여했다고 전해진다.
「남부군」의 저자 이태에 따르면 박치우는 『남과 북을 오르내리며 빨치산 정치교육에 종사하다가 오대산 부근에서 사살되었다』고 한다.
1931년 일제 경찰은 경성제대 예과 3학년생 신현중을 찾느라 눈에 불을 켰다. 신현중은 일본의 만주침략에 반대하는 격문을 작성해 시내 곳곳에 뿌리고 있었다.
본정·(현 서울 중구 충무로)경찰서는 조선공산당의 학생조직원들이 이 격문 사건에 연루되어 있다는 사실을 밝혀내고 주동자 신현중 검거에 나섰다.
신현중은 사상범 중에서도 「골수분자」였다. 대학 입학 때부터 계급주의 사상을 키우다 외부 공산당 조직과 연결돼 학생조직을 선동하며 물밑작업을 계속해 온 열성당원이었다.
그는 결국 체포되어 3년의 징역형을 받고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됐다. 형기를 꼬박 채우고 출소한 그는 복학 대신 취업의 길을 선택했다. 조선일보는 옥살이를 한 사상범을 흔쾌히 받아 주었다.
신현중은 기자로서 임무에 충실했다. 그는 신문사에서 주는 공로상을 받기도 했다. 조선일보 사보는 『사회부 기자 신현중 군은 금년(1937년) 1월 중의 공로에 의하여 사장으로부터 금일봉의 상을 받았다』며 『편집국원 상벌규정 실시 후 최초의 영예의 수상자에 선정된 것』이라 밝혔다.
조선일보 기자로 함께 근무하던 당대 최고의 문인들과 함께 직장생활을 한 경험은 그의 인생을 풍부하게 해주었다.
그는 『과거 반평생 내 직업이 일개 기자였기 때문에 김기림, 채만식, 이원조, 안석주, 함대훈, 이헌구, 최정희, 노천명, 이선희, 허준, 백석 등 한 직장에서 비비대고 일하고 낄낄거리고 놀았다』고 회고했다.
호사스럽고 결벽증 심한 백석
그가 광화문 네거리로 걸어오면 거리가 갑자기 훤해진다. 녹두빛 더블 브레스트를 젖히고 검은 물결의 머리를 휘날리며 지나간다. 시인 백석이다.
『그가 지나가는 광화문은 잠시 식민지의 우울한 네거리에서 예술과 지적 교양이 넘쳐나는 낭만의 거리, 파리의 몽파르나스로 변하는 듯하다』고 김기림은 썼다.
백석이 미남에다 멋쟁이였다는 증언은 일일이 열거하기가 숨찰 정도다.
백석은 호사스럽고 결벽증 심한 「사슴」이기도 했다. 동료 기자 신현중의 이야기다.
『그때 우리는 30~40원 정도의 양복을 입고 다녔는데 백석은 200원 들였다는 연두빛깔 「떠블 버튼」을 입고 다녔다. 양말 한 결레 이삼십 전 하던 땐데 백석은 일원 이원짜리 양말을 신고 다녔다』
백석이 방응모 사장 비서실에 근무하던 시절, 안주인은 그가 기거하는 방에 향수를 뿌려 주어야 했고 새 시트를 갈아 주어야 했다.
백석은 1930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소설 「그 모와 아들」이 당선되면서부터 문단에 나왔다. 이 해에 그는 교정부 기자로 조선일보에 입사했지만 곧바로 방응모의 장학금을 받아 일본 아오야마(청산)대학으로 유학을 떠나 영문학을 전공한다.
백석은 1934년 귀국해 조선일보 출판부에서 잡지 「여성」의 편집을 맡았다. 24세 때인 1935년에는 시 「정주성」을 조선일보에 발표해 본격적으로 시단에 등장했다.
백석은 1939년 11월 조선일보를 그만두고 만주로 향한다. 이후 광복의 날까지 그는 만주벌판에서 측량기사 보조원, 소작인, 광부 등 온갖 고생을 겪으며 주옥같은 시들을 토해 낸다.
광복 후 평양에서 조만식의 영어·러시아어 통역비서로 일하기도 했던 백석은, 「재북」 또는 「월북」 시인이 돼 한동안 우리에게 잊혀진 존재가 됐다.
그는 1996년 85세까지 북한 협동농장에서 생존했던 것으로 최근 알려졌다.
공채 1기 시인 학예부장 김기림
1930년대 조선일보에서 문인 기자들의 시대를 화려하게 연 사람은 김기림이다. 김기림의 선배 문인이면서 기자 활동을 했던 염상섭은 기자와 작가는 양립하기 어려운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김기림은 현대생활의 총체를 이루는 직업이 신문기자임을 내세웠다. 이원조, 백석, 함대훈, 이여성, 한설야, 이석훈 등이 조선일보에서 김기림과 함께했다. 그들은 직장 동료이자 친구였으며 내면적 소통이 가능한 문학적 동지들이었다.
김기림은 일본대학 문학예술과를 졸업하고 돌아와 1930년 4월 20일 조선일보 1기 공채 기자로 입사했다.
조선일보 여기자 이선희는 김기림을 한마디로 『모범청년』이라 불렀다. 신문사 동료들은 김기림이 단 한 번의 지각이나 조퇴를 한 적이 없을 정도로 성실한 인물이며, 능력 또한 탁월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는 혼자서 4∼5명의 일을 거뜬히 해치울 정도로 일에 대한 열정이 남달랐다. 회사 간부들의 김기림에 대한 신임도 무척 두터웠다. 김기림은 결혼해서 남매를 두고 있었는데, 사윗감을 찾던 장안의 명문가들이 이 사실을 알고는 한숨을 쉴 정도였다.
김기림은 1936년 4월 조선일보를 휴직하고 동북제대 영문학부에 입학한다. 방응모 사장은 그의 학비를 대주었다. 학업을 마친 김기림은 1940년 1월 조선일보 학예부장이 되었다.
6·25 전쟁 직후 그는 납북되었다. 남한에서 1988년 월북 문인 해금조치가 단행되었을 때 그도 해금되어 「기상도」, 「바다와 나비」 등 주옥같은 그의 시들을 접할 수 있게 되었다.
조선일보 기자 한설야는 1933년 9월 24일 밤 11시 55분 회사로부터 「지급전보」를 받았다. 즉시 간도로 취재를 떠나라는 명령이었다. 간도에서는 전날 공산당이 경찰서를 습격해 적지 않은 사상자가 발생했다는 소식이 들려오고 있었다.
한설야의 기사에 따르면 이 사건은 공산군 측에서 여자대와 소년대까지 동원한 대대적인 습격사건이었다.
『즉사 일명, 납치 오 명, 불에 타 죽은 자로 만주인 오 명, 조선인 이 명, 병원에 입원해 있는 생명이 위독한 자가 삼십사 명에 이르렀다』
한설야는 이 사건의 취재 후기를 「북국기행」이라는 제목의 기행문 형식으로 남긴다. 한설야는 스스로를 「북국인」으로 호칭한 그의 이력이 말해 주듯 함경도, 간도 등지의 북국 기행문을 많이 남겼다.
한설야는 함흥에서 광복을 맞는다. 그런 한설야를 「글쟁이」보다는 「정치인」으로 부른 것은 김일성이었다.
최고인민회의 대의원과 조선문학가총동맹위원장 등을 지내며 김일성의 오른팔 노릇을 하던 한설야는 박헌영을 제거하는 데 누구보다도 앞장을 서게 되지만, 두 사람의 인연은 원래 그런 게 아니었다.
한설야가 경기중학에 입학했을 때 가장 절친했던 친구가 박헌영이었다. 게다가 두 사람 모두 조선일보 기자를 지냈다. 인간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한설야 자신도 1963년 숙청되어 노동교화소로 가게 되었다. 김일성은 미련이 남아 있었는지 그에게 「송아지 고기」를 내려 주었다.
교화소 관리인이 『수령님이 보내 주신 것』이라 하자 그는 『송아지 고기는 풀내 나서 안 먹소』라며 거부했다고 한다. 그는 1976년 사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여류 문인 기자들 최정희·노천명·이선희·조경희
조선일보 출판부 막내 여기자 최정희는 책상 위에 놓인 잉크병을 잡았다. 그리고는 편집주임(출판부장) 안석주를 향해 잉크병을 냅다 집어던졌다. 사무실 분위기는 순식간에 얼어붙었다.
문제는 「문예봉 방문기」란 기사였다. 최정희는 인기 여배우를 인터뷰하는 것 자체가 내키지 않았지만 상관의 지시였기 때문에 문예봉을 만나 방문기를 썼다.
그런데 그렇게 애써 써낸 원고를 아무 말도 없이 싹둑 잘라버린 것이다. 최정희는 속에서 불이 일면서 잉크병을 잡았다.
노천명은 부모의 반대를 무릅쓰고 신문기자 되기를 고집했다. 부모는 『여자가 신문기자를 하면 못 쓴다. 시집을 갈 때도 데려가는 집에서 좋아하지 않는다』며 말렸지만 졸업하자마자 곧바로 신문사에 취직했다.
그가 처녀 시집 「산호림」을 낸 때는 조선일보 출판부 기자로 근무하던 1938년이었다. 『모가지가 길어서 슬픈 짐승이여』로 시작되는 시 「사슴」도 이 시집에 실렸다.
소설가 이선희는 1938년 3월 30일 조선일보에 입사, 1년간 학예부 기자로 활동한 후 이듬해 3월부터 출판부 일을 겸하다 8월에 퇴사했다.
그는 한때 카바레 여급으로 일해 세간을 놀라게 한 적도 있었다. 그는 남편을 따라 월북했으나 극심한 생활고에 시달리다 39세쯤 「괴혈병」으로 사망한 것으로 알려졌다.
1988년 정무 제2장관을 지낸 수필가 협회장 조경희는 1939년부터 폐간때까지 학예부 기자를 지냈다.
『소년 잡지 하나 만들어 보지 않겠나?』 1936년 말 윤석중은 조선일보 출판부 주간 이은상으로 부터 귀가 솔깃한 제안을 받았다. 두 차례 실직하는 시련을 겪고 집에서 쉬고 있던 때였다.
윤석중은 열정적으로 일했다. 그는 매주 소년조선일보를 만들고, 매달 잡지 「소년」을 편집하는 일로 휴일에도 쉬지 않고 출근했다. 애사심도 대단했다. 그는 1938년 9월 사내에서 2주간 실시한 「구독자확장대회」에서 114부로 1위를 차지했다.
휴일에 회사에 나온 방응모 사장이 사무실을 지나다 윤석중이 일하는 모습을 보고 문을 열고 들어왔다. 윤석중이 일어나 인사를 하자 방응모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면서 한마디 던졌다.
『자네, 공부 어디까지 했나? 일본에 가서 공부 좀 더 하고 오지?』 양정고보 중퇴 학력이 전부였던 윤석중은 방응모로부터 장학금을 받아 1939년 4월부터 3년여 간 일본 상지대 신문과에서 공부했다. 1940년 8월 조선일보가 폐간된 뒤에도 장학금은 꼬박꼬박 들어왔다.
윤석중이 광복을 맞은 곳은 방응모의 집이었다. 전쟁 막바지에 징용장이 나오자 동경을 탈출해 방응모의 의정부 별장에 숨어든 것이다.
그는 일왕의 항복소식을 듣고 별장에서 기쁨에 겨워 순식간에 「새 나라의 어린이」를 썼다. 윤석중은 「낮에 나온 반달」, 「퐁당퐁당」 등 평생 1200편이 넘는 동요를 지었다.
윤석중은 1955년 소년조선일보가 부활되자 다시 조선일보에 입사해 15년간 편집고문으로 재직했다. 1959년 사원확장대회에서 126부로 다시 1위를 기록하는 등 의욕적인 생활은 옛날 그대로였다.
2003년 12월 9일 세상을 떠날 때에도 윤석중은 열정을 바쳤던 조선일보 시절을 어제 일처럼 또렷이 기억했다.
기자·화가·시인·소설가·가수·배우·영화감독 안석주
조선일보 학예부장을 역임한 석영 안석주는 그야말로 못 하는 게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신문기자이면서 화가였고 가수이자 연극배우였으며 소설가이자 시인이었고 시나리오 작가 겸 영화감독이었다.
극단 토월회의 배우로 유명했던 안석주는 1927년 조선일보에 입사한 뒤 시를 쓰기도 하고 연재소설을 잇달아 선보이며 소설가로도 이름을 남겼다. 그의 소설 중 「춘풍」은 영화로 만들어져 흥행에 대성공을 거두었다.
이후 안석주는 영화 시나리오를 쓰면서 직접 영화를 제작했다. 「우리의 소원은 통일」의 작사가도 안석주이다. 이 노래는 그가 쓴 가사에 그의 장남 안병원이 곡을 붙였다.
안석주의 진가는 무엇보다 신문에 그린 만화에서 빛을 발했다. 그는 연재소설에 삽화를 그리는 한편, 세태를 풍자하는 글에 만화를 곁들인 「만문만화」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 당대에도 그의 재능은 만화에서 가장 돋보인다는 평이었다.
안석주는 자신의 직업에 자부심과 사명감을 가진 천상 신문기자였다. 그에게 신문기자란 『박사, 학사라도 신문기자의 소질이 없으면 급사로부터 승격이 된 사람에게 설움을 당하지 않으면 안 되는 능력 중심의 직업이며, 각 분야에 상식과 경험, 실력, 민감성 등을 고루 갖추어야 하는 직업』이었다(「별건곤」 1934년 3월호).
광복 후 안석주는 대한영화협회 이사장, 문교부 예술위원 등을 지내고 1950년 2월 4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조용히 혼자 울 곳을 찾아왔다』
1940년 8월10일. 조선일보는 창간된 지 20년 5개월 만에 폐간호를 찍었다. 이날은 조선인의 창씨개명 신청 마지막 날이었다.
일제는 조선인의 이름을 빼앗는 것과 함께 민족의식을 뿌리 뽑기 위해 조선일보와 동아일보를 폐간시킨 것이다.
폐간 당일 조선일보 사람들은 여느 때 처럼 아침 일찍 출근했다.
편집국 벽면엔 일본열도와 사할린, 그리고 한반도 전역이 일본 영토로 표시된 동아시아 지도가 삐딱하게 걸려 있었다.
마지막 신문 제작은 비장한 분위기 속에 이뤄졌다. 기사를 쓰다 눈물을 떨구는 기자도 있었다. 책상 앞에 앉은 50여 명 기자들은 무거운 침묵 속에서 마지막 기념촬영을 했다.
사진부 기자 최희연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사진」을 찍었다. 공무국 직원들은 폐간호를 여느 때처럼 빠르게 찍어내고 있는 「야속한」 윤전기를 붙들고 통곡했다. 조선일보는 퇴직금과 함께 특별히 제작한 사원명부를 직원들에게 나눠 줬다.
총독부 자료에 따르면 폐간 무렵 발행부수는 조선일보가 6만 3000부, 동아일보가 5만5000부였다. 총독부 경무국은 두 신문사의 윤전기 등 시설을 인수한 대금 명목으로 조선일보사에 80만원, 동아일보사에 50만원을 각각 지불했다.
폐간 당시 두 신문사에 근무한 인원은 조선일보 912명, 동아일보 902명으로 총 1814명이었다.
폐간 후 조선일보 사원들은 유일한 조선어 신문이 된 총독부 기관지 「매일신보」에 들어가거나 박흥식이 운영하던 화신백화점에 입사하기도 했고, 고향으로 돌아가거나 세상과 절연한 채 은거하기도 했다.
일부는 조선일보 폐간 전 설립한 조광사에 남았고 일부는 장사를 하기도 했다.
사회부장 홍종인, 비서실 주임 김달진, 편집부 차석 성인기, 편집부 박종수, 학예부 조경희, 삽화가 김규택, 사진부 최영덕 등은 시기의 차이를 두고 매일신보에 들어갔다. 경제부장 이건혁과 정치부 민영성은 화신백화점에 입사했다.
사회부 차석 이종모는 조선일보 사옥에 사무실을 무료로 임대받아 퇴직금을 자본금으로 해 양말장사를 시작했다.
출판부 노자영은 명성출판사를 운영했으며, 학예부 차석 이헌구는 조선영화사로 직장을 옮겼다. 사업부장 홍기문은 방응모의 지원을 받아 폐간 후 3년여 간 조선왕조실록 연구에 몰두했다.
학예부장 김기림은 낙향해 함북 경성중학에서 영어와 수학을 가르쳤다. 어린 학생들의 눈엔 조선일보 학예부장을 지낸 유명한 시인이 시골학교 교사로 온 것이 의아하게 보였던 모양이다.
당시 학생 중에는 훗날 시인이 된 김규동과 영화감독이 된 신상옥이 있었다. 어느 날 김규동이 『저, 선생님 같으신 분이 왜 여기 내려오셨어요?』라고 물었다. 도수 높은 안경을 쓴 시인 선생은 하늘에 허한 눈길을 주며 답했다. 『조용히 혼자 울 곳을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