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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은봉, 김석환, 이승하, 맹문재 엮음, <오늘의 좋은 시>, 푸른사상, 2010. 3. 2.
커다란 나무
김기택
나뭇가지들이 갈라진다
몸통에서 올라오는 몸을 찢으며 갈라진다
찢어진 자리에서 구불구불 기어나오며 갈라진다
이글이글 불꽃 모양으로 휘어지며 갈라진다
나무 위에 자라는 또 다른 나무처럼 갈라진다
팔다리처럼 손가락 발가락처럼
태어나기 이전부터 이미 갈라져 있었다는 듯 갈라진다
오래 전부터 갈라져 있던 길을
거역할 수 없도록 제 몸에 깊이 새겨져 있는 길을
너무 많이 가보아서 훤히 알고 있는 길을
담담하게 걸어가듯이 갈라진다
제 몸통으로 빠져나가는 수많은 구멍들이
다 제 길이라는 듯 갈라진다
갈라지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는 듯
조금 전에 갈라지고 나서 다시 갈라진다
다시 갈라진다 다시 갈라진다 다시 갈라진다
다시다시다시 갈라진다
갈기갈기 찢어지듯 갈라진다
뱀의 혀처럼 날름거리며 쉬지 않고 갈라진다
갈라져 점점 가늘어지는데도 갈라진다
갈라져 점점 뒤틀리는데도 갈라진다
갈라진 힘들이 모인 한 그루 커다란 식물성 불이
둥글게 타오른다 제 몸 안에 난 수많은 불길을
하나도 놓치지 않겠다는 듯
맹렬하게 갈라지고 있다
(창작과비평, 가을호)
<해설>
나무는 잠시도 쉬지 않고 움직이는 존재이다. “갈라지지 않으면 견딜 수 없다는 듯/조금 전에 갈라지고 나서 다시 갈라”질 정도로 나아가는 것이다. 나무는 자신이 처한 운명적인 곳에 단단히 자리 잡기 위해 아래로 아래로 부단하게 움직인다. 뿐만 아니라 창공으로 비상하려고 위로 위로도 움직인다. 그만큼 나무는 온몸을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욕망체인 것이다. 물론 생명력 있는 이 세계의 모든 존재는 자신의 몸에 불길을 낸다. 자신의 생명 보존과 종족 보존을 위해 치열하게 몸부림치는 것이다. 따라서 나무를 비롯한 모든 생명체들의 불길은 아름다움의 차원을 넘는다. 무서움이 들 정도로 역동적이고 지향적인 것이다.
오래전 그날
김사이
주전자에 한가득 물을 끓여
커다란 플라스틱 대야에 담가놓았다
대야의 물이 빨리 뜨거워지기를 기다리며
갈급증에 손을 넣었다 뺐다 방정을 떨다
은빛 몸뚱이에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물안개가
종점다방 마담이 내뱉는 담배연기처럼
교태를 부리듯 아찔해지네
문득 오래전 그날
최루가스가 분가루처럼 뿌옇게 덮은
거리에서 유난히 번쩍이는 하이바
도망가다 넘어진 내게
차마 방망이를 휘두르지 못하던
백골단의 하이바가 눈앞에서 아른거린다
끊임없이 모서리를 내리치는 두려움에
둥글어지지 않는 첫 경험을 어쩌리
뜨거운 것과 찬 것이 만나서
서로에게 스며드는 것은 사랑일까
데일 것 같은 뜨거움보다 표정 없는 차가움보다
뜨뜻미지근한 온도가 더 위험스러워
몸뚱이 안팎으로 등을 맞댄
가장 뜨거웠을 때와 가장 차가웠을 때의
온도가 같아지는 순간
삶은 미끌, 미끌, 또 미끌 저도 모르게
격렬한 몸살을 앓으면서 가는 것을
(시와시, 겨울호)
<해설>
흔히 이분법적 세계관을 지나치게 선택하거나 배척하는 이념으로 간주하고 부정적으로 대한다. 하지만 부정하는 근거가 바르지 않을 때 오히려 더 위험할 수 있다. “데일 것 같은 뜨거움보다 표정 없는 차가움보다/뜨뜻미지근한 온도가 더 위험스러”울 수 있는 것이다. 좋은 것이 좋다는 식으로 세상의 문제들을 얼버무리는 자세가 그 단적인 모습이다. 그것은 진정한 중립도 중도도 결합도 통합도 아니고 단지 눈치 보기이고 야합이다. 신자유주의의 심화에 따라 점점 인간의 가치가 자본의 가치에 의해 침식당하고 있는 상황에서 이분법적 세계관은 분명 유용한 측면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위대한 양파
김상미
아버지의 외박이 일주일째 계속되던 날, 어머니는 양파를 까자고 했다. 양파 중에서도 껍질이 잘 안 벗겨지는 가장 어리고 독한 것들만 골라 양파를 까자고 했다. 나는 어머니와 마주앉아 무엇이든 함께하는 게 좋아 광주리 가득 양파를 담아 왔다. 양파를 까면서 우는 건 아무도 무어라 할 수 없는 당연한 일이므로 눈물콧물 흘려가며 열심히 양파를 깠다. 껍질이 벗겨지면서 드러나는 양파의 눈처럼 희고 예쁜 속살은 언제 봐도 신기했다. 한참 그 미(美)에 빠져 문득 어머니를 올려다보니 어머니도 울고 있었다. 온몸이 울음바다로 변해 있었다. 그러나 어머니의 눈물은 양파 때문이 아니라 일주일째 집을 비운 아버지가 만든 진짜 눈물이었다. 어머니는 진짜 울고 있었다. 어린 눈에도 너무나도 서럽게 느껴지는 소리 없는 통곡이었다. 나는 못 본 척 숨죽이며 양파만 깠다. 너무나도 서러운 어머니의 눈물이 잦아질 때까지 속살이 하얗게 드러나는 앙증맞은 양파에만 시선을 맞추었다. 콧물이 떨어져도 가만히 있었다. 어머니가 왜 우는지, 어머니의 설움이 무엇인지 알기에 나는 꼼짝도 않고 양파만 깠다. 어머니는 저렇듯 남몰래 흘려야 할 눈물이 있을 때, 남몰래 흘려보내야 할 눈물이 필요할 때 양파를 까며 우신 거였다. 나는 내심 양파가 고마웠다. 어머니를 실컷 울게 만들어주고 그 울음으로 어머니의 온 마음을 씻어주는 채소 중의 채소, 엄마 중의 큰엄마인 양파가 정말 고마웠다. 어머니는 그렇게 양파를 까면서 울고 깐 양파를 썰면서 한참을 더 울었다. 그 때문인지 눈물 젖은 하얀 양파가 프라이팬에서 황갈색으로 익어가며 내뿜는 향기는 무어라 말할 수 없이 달달하고 환상적인 맛을 풍겼다. 그동안의 모든 일들이 다 하찮아 보이고 아무 일도 아닌 듯 달콤 상쾌하게 느껴졌다. 양파는 정말 위대했다. 어머니의 마음 속 아픔을 모조리 끌어내 흘려보낸 후 어머니를 다시 평심(平心)의 세계로, 진짜 내 어머니로 되돌려 주고 또 되돌려 놓았다.
(현대시학, 9월호)
<해설>
지금은 여성상위 시대라는 남성들의 농담이 남성들의 동조에 의해 인정받는 것을 주위에서 종종 본다. 그렇지만 그렇게 쉽게 여겨서는 안 된다. 그동안 여성들이 남성들로부터 겪어야 했던 비인격적인 처우를 쉽게 망각하기 때문이고, 사회에서의 여성 위치를 왜곡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에도 여성은 결코 남성들보다 상위에 있지 않다. 그와 같은 원인을 한두 가지로 들기는 힘들지만, 무엇보다도 남성들의 인식이 바뀌지 않고 있는 점을 들 수 있다. 아직도 아내의 동반자가 남편이 아니라 “양파”인 경우가 많다. “양파 중에서도 껍질이 잘 안 벗겨지는 가장 어리고 독한 것들만 골라” 까며 눈물을 흘리는 여성들이 엄연히 존재하는 것이다.
질투
김종미
도로 위에서 먹이를 찾는 비둘기에게
브레이크를 밟지 않고 질주할 때
유리창 앞을 아슬아슬하게 날아오르는 작은 그것
최후의 순간까지 버티다가
우리는 둘 다 살아서
결과는 무승부였다고 생각하지만
내가 진 것이다
나는 오래 너를 기억할 것이고
너는 즉시 나를 잊을 것이기 때문이다
푸드득 날아오르는 것에 대해 질투를 느끼는 하루다
나를 향해 정면으로 질주해 오는 시시비비
멱살을 잡히기 직전 냉큼
그들 지붕 위의 구름이 되고 싶다
그리고 망각
벽에 부딪치는 것은 상당히 로맨틱한 일
이마에서 관자놀이를 타고 흐르는
어떤 탈주의 은밀한 행로를 느끼면서
우리는 들려줘야 할 무엇을 기억하는가
(우리시, 여름호)
<해설>
시인은 기억을 거부하고 있다. 기억을 윤리와 도덕과 관습 같은 사회 규범에 영향받고 형성된 개념으로 인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시인이 “어떤 탈주의 은밀한 행로를 느끼면서” 망각하려는 것은 단순한 일탈이 아니라 사회 규범으로부터 벗어나 자유와 해방을 추구하는 행동으로 볼 수 있다. 그렇지만 그 일은 상상으로나 가능할 뿐이지 현실적으로는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자유롭게 날아오르는 비둘기에게 질투를 느끼는 것은 감정의 분출 차원을 넘는다. 모든 예술의 중요한 동기는 닿을 수 없는 세계에 다가가려는 질투심이다. 질투가 시인의 힘이다.
어진내에 두고 온 나
김해자
지금도 청천동 콘크리트 건물 밖에는 플러그 뽑힌 채
장대비에 젖고 있는 도요타 미파 브라더 싱가 미싱들이 있다
나오다 안 나오다 끝내 끊긴 황달 든 월급봉투들
무짠지와 미역냉국으로 빈 봉지를 우적우적 채우고 있다
얼어붙은 시래기가 걸려 있는 담 끼고 굽이도는 골목 끝
아득하고 고운 옛날 어진내라 불리던 인천 갈산동 그 쪽방에는
연탄보다 번개탄을 더 많이 사는 어린 소녀가 살고 있다
야근 마치고 돌아오면 늘 먼저 잠들어 있는 연탄불과
활활 타오르기 전 곯아떨어지는 등 굽은 한뎃잠이 있다
삼산동 논 가장자리에 앉혀진 그 붉은 벽돌집에는 아직도
비틀대는 깨진 유리창과 미친 칼을 피해 옆방으로 도망친 늙은 아버지
피 묻은 런닝구와 선홍색 유리조각들이 장롱 속에서 오들오들 떨고 있다
쉬는 날이면 배추밭에 배추나비 한가로이 노닐던 가정동 슬레이트 집 문간방에는
사흘 걸러 쥐어터지던 젊은 여인이 살고 있다 지금도 들리는
어린아이 울음소리 듣지 않으려 귀 막고 이불 속에 숨다 저도 몰래
뛰쳐나가 패대기쳐진 여인과 아이와 한 덩어리 된 어린 여자
눈물방울이 아직도 흙바닥에 뒹굴고 있을까
교도소가 마주 보이던 학익동 모퉁이 키 낮은 그 집
흙벽과 아궁이가 있던 옛 부엌에서는 전단지 속 휘어 갈긴
어린 해고자의 메모처럼 ‘배가 고파요 이렇게 살고 싶지 않았어요’
호박 몇 쪽 둥둥 떠다니는 밀가루 죽이 아직도 부글부글 끓고 있다
효성동 송현동 송림동 바람 몰아치던 주안 언덕배기
그 작고 낮은 닭장 집 창문마다 한밤중이면 하나둘 새어나오는
쓸쓸하고도 따스한 불빛
이상하기도 하지 20년 넘어 달려왔는데 그곳에서
벗어나려 도망쳐왔는데 아직도 헤어나지 못하다니
내가 떠나온 그곳에 다른 내가 살고 있다니
나 대신 어린 내가 그 자리에 붙박혀 있다니
푸른 작업복에 떨어지는 핏방울 아직도 머리채 잡혀 끌려가는 내가 있다니
앞으로 달려온 줄만 알았는데 뛰어도 제자리 러닝머신 위에서의 뜀박질이었다니
숨어 살아도 숨고 싶어도 어진내, 수많은 나
산속까지 파고들어와 끝내 놓아주지 않는다니
(작가들, 가을호)
<해설>
시인은 “얼어붙은 시래기가 걸려 있는 담 끼고 굽이도는 골목 끝”에 “어진내”를 푯대로 꽂아두고 있다. 시인이 사회적 존재로서 살아오는 동안에 운명처럼 만들어 놓은 것이다. 그리하여 그 푯대는 시인에게 삶의 거울이 되고 지도가 되고 나침반이 되고 있다. 때로는 그것이 부담스러워 의도적으로 회피하거나 잊으려고 하지만 뜻하는 대로 되지 않는다. 시인 역시 사회적 존재로 그 자장 안에서 삶을 영위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흉터처럼 남아 있는 “어진내”와의 인연을 긍정할 필요가 있다. 그것을 품는 정도에 따라 시인의 세계인식은 깊어지고 넓어지기 때문이다.
무덤 사이에서
박형준
내가 들판의 꽃을 찾으러 나갔을 때는
첫서리가 내렸고, 아직 인간의 언어를 몰랐을 때였다.
추수 끝난 들녘의 목울음이
하늘에서 먼 기러기의 항해로 이어지고 있었고
서리에 얼어붙은 이삭들 그늘 밑에서
별 가득한 하늘 풍경보다 더 반짝이는 경이가
상처에 찔리며 부드러운 잠을 자고 있었다.
나는 거기서 내가 날려 보낸 생의 화살들을 줍곤 했었다.
내가 인간의 언어를 몰랐을 때
영혼의 풍경들은 심연조차도 푸르게 살아서
우물의 지하수에 떠 있는 별빛 같았다.
청춘의 불빛들로 이루어진 은하수를 건지러
자주 우물 밑바닥으로 내려가곤 하였다.
겨울이 되면, 얼어붙은 우물의 얼음 속으로 내려갈수록 피는 뜨거워졌다.
땅 속 깊은 어둠 속에서 뿌리들이
잠에서 깨어나듯이, 얼음 속의 피는
신성함의 꽃다발을 엮을 정신의 꽃씨들로 실핏줄과 같이 흘렀다.
지금 나는 그 징표를 찾기 위해
벌거벗은 들판을 걷고 있다.
논과 밭 사이에 있는 우리나라 무덤들은 매혹적이다.
죽음을 격리시키지 않고 삶을 껴안고 있기에,
둥글고 따스하게 노동에 지친 사람들의 영혼을 껴안고 있다.
그렇기에 우리나라 봉분들은 밥그릇을 닮았다.
조상들은 죽어서 산사람들을 먹여 살릴 밥을 한상 차려놓은 것인가.
내가 찾아 헤매다니는 꽃과 같이 무덤이 있는 들녘,
산 자와 죽은 자가 연결되어 있는
밥공기와 같은 삶의 정신,
푸르고 푸른 무덤이 저 들판에 나 있다.
찬 서리가 내릴수록 그 속에서 잎사귀들이 더 푸르듯이,
내가 아직 인간의 언어를 몰랐을 때 나를 감싸던 신성함이
밭 가운데 숨 쉬고 있다.
어린아이들 부산을 떨며 물가와 같은 기슭에서 놀고
농부들이 밭에서 일하다가 새참을 먹으며
죽은 조상들과 후손의 이야기를 나누던 저 무덤,
그들과 같이 노래하고 탄식하던 그 자취를 따라
내 생이 제 스스로를 삼키는 이 심연 속으로 천천히 걸어 내려간다.
겨울이 되면, 저 밭가의 무덤 사이에 누워
봉분들 사이로 얼마나 밝은 잠이 흘러가는지
아늑한 그 추위들을 엮어 정신의 꽃다발을
무한한 죽음에 바치리라.
나는 심연들을 환하게 밝히는 한순간의 정적 속에서
수많은 영혼들로 이루어진 은하수를 보게 될 것이다.
내가 아직 어린아이였을 때 내려다보던 지하수의 푸른빛을,
추위 속에서 딴딴해진 그 꽃을 캐서
나는 집으로 돌아가리라.
(문학사상, 2월호)
<해설>
인간이 문자를 발명하기 이전에는 사물에 이름을 달지 않았는데도 오늘날보다 대상과 일체를 이루었다. 사물을 비유의 대상이 아니라 그 자체로 인식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죽음에 대해서도 훨씬 순박하고 진실하게 여겼다. 죽음을 무서워하거나 죽은 대상을 그리워하거나 모두 꾸밈없이 대했던 것이다. 그런데 문자가 발명되면서 인간의 순박한 세계는 사라졌다. 이름표를 달아주고 있지만 더 이상 대상과 일체를 이루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시인이 시어를 찾아 헤매는 것은 세계의 본질과 일체를 이루려는 지난한 행동으로 볼 수 있다. 삶의 극지인 “무덤”에서 출발하고 있기에 더욱 관심을 끈다.
모가리*
박홍점
죽은 내가 다니러 가듯 지난 생에 한 번 갈 수 있다면
영영 입맛 잃어버린 여든 네 살 어머니에게
새콤달콤 밑반찬 몇 가지 만들어드리겠다
비린내 없는 낙지나 주꾸미를 데쳐
당신의 흰 고무신을 닦던 추억까지 큼직큼직 썰어
당신 한 입 나 한 입
밥 한 끼 환하게 먹고 오겠다
스무 살이 된 딸에게는 낮잠에 든 머리맡에
장미꽃 스무 송이 놓아두겠다
조금만 더 조금만 더
꿈속에서나마 허기를 채우는 한 여자에게는
운동화 한 켤레 환하게 빨아
베란다 밖 난간에 널어두겠다
한낮의 폭염이 뼛속까지 말릴 것이다
개수대 수챗구멍 락스 풀어 쨍하게 닦아놓고
행주는 맑고 푸르게 삶고
그러고도 시간이 되면 왔다 갔소, 메모 대신에
흰 머리카락 두 올쯤 화장대 위에 남겨두겠다
얼마면 될까?
자고 올 수는 없을 것 같고
욕심이 너무 심하다 싶고
줄잡아 네 시간이면 될까?
죽은 내가 지난 생에 외출하듯 갈 수 있다면
흰동가리처럼 암컷이 되리
세 여자를 위하여
*죽은 사람을 그리워하는 시간 혹은 장소
(문학사상, 5월호)
<해설>
“죽은 내가 지난 생에 외출하듯 갈 수 있다면/흰동가리처럼 암컷이 되리/세 여자를 위하여”라는 데서 볼 수 있듯이 시인의 여성 인식은 숭고하다. 여성으로서 자신의 운명에 기꺼이 긍정하는 모습이기에 숙연함마저 준다. 아울러 모성의 위대함까지 일깨워준다. 모성은 사회 규범을 넘어 근원적인 것이다. 따라서 여성의 모성을 생물학적 편견이라고 폄하해서는 안 된다. 모성에 의해 이 세계의 생명력과 공동체 의식이 창조되는 것이다.
내가 계절이다
백무산
계절이 바뀌면
뱀도 개구리도 숲에 사는 것들은 모두 몸을 바꾼다
보호색으로 변색을 한다
흙빛으로 또는 가랑잎 색깔로
나도 머리가 희어진다 천천히 묽어진다
먼지에도 숨을 수 있도록 나이도 묽어진다
흙에 몸을 감출 수 있도록
가랑잎에 숨어 잠들 수 있도록
몸을 바꾸고 자신을 숨기지만
그러나 긴 고요에 들면 더 이상 숨는 것이 아니다
봄을 기다리는 것도 아니다
죽은 것도 아니다
나는 계절 따라 생멸하지 않는다
내가 계절이다
(창작과비평, 겨울호)
<해설>
자신을 이 세계의 중심으로 내세우지 못하고 있는 시대이다. 인간은 물질문명의 진보를 이루었지만 물화(物化)로 인해 그 문명으로부터도 다른 인간으로부터도 심지어 자기 자신으로부터도 소외되고 있다. 시인이란 이와 같은 상황을 직시하고 그 회복을 지향하는 존재라고 볼 수 있다. 겨울이 되자 고요에 든 “나”의 행동이 그 모습이다. 시인은 봄을 기다린다거나 죽은 것이라는 등 세속적인 차원에서의 의미 이전에 “나는 계절 따라 생멸하지 않는다/내가 계절이다”라고 주체성을 띠고 있다. 계절에 소극적으로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적응해 나가고 있는 것이다. 자신을 이 세계의 중심으로 내세우는 행동은 사회적 약자들에게 특히 필요하다.
냉장고야, 냉장고야
손순미
고물상 한 귀퉁이 냉장고가 처박혀 있다
검은 전선이 탯줄처럼 꼬리달린 냉장고
반쯤 벌어진 냉장고 입 속에
벌레가 알을 까고 잡초가 치아처럼 박혀 있다
죽어서도 소신공양하는 냉장고에
한낮의 햇볕전기가 가동된다
냉장고 사지가 뻐근하게 곤두선다
냉장고 벌떡 일어나 부엌을 쿵쿵 돌아다닌 것인가
냉장고 시절이 생각난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대문보다 냉장고 문을 먼저 열었다
고작 얼음을 얼려먹거나 계란 한 줄과 김치가 전부였지만
전기 나간다고 냉장고 문을 자주 여닫지 말라고 하였지만
우리는 냉장고 문을 타고 성장을 앞당겼다
우리가 마구 꺼내먹고 휙! 내다버린 늙은 냉장고가 저렇게 엎어져 있다
그만 일어나라, 냉장고야! 냉장고 몸뚱이를 후려쳐보지만
나무처럼 뿌리내려 더 이상 일어나지 못하는 냉장고
냉장고에 풀이 자라고 있다 잎이 돋아나고 있다
냉장고는 나무가 되기로 결정한 것이다
냉장고나무가 자라는 고물상 한 귀퉁이 추억이 우거질 것이다
냉장고나무 제 몸에 열매라도 익혀 공양미 한 그릇이라도
내밀고 싶은 것이다
(작가와사회, 겨울호)
<해설>
시인의 존재 가치 중 한 가지는 상식화된 세계인식을 전환하는 데 있다. 상식적인 차원에서 보면 고물상의 한 귀퉁이에 버려져 있는 냉장고는 낡고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물건에 불과하다. 하지만 시인의 눈으로 보면 나무의 나이테 같은 시간을 품고 있는 대상이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대문보다 냉장고 문을 먼저 열었”듯이 함께 삶을 영위해온 인연의 대상인 것이다. 시인의 세계인식에 의해 패자도 승자와 같은 존엄성을 지닌다.
오해
손한옥
한 방울씩 흘러내린 물로 담벼락에 빙벽이 생겼다
날이 풀리자 얼음이 녹는다
자전거를 세워 놓고 툭툭 찼다
서슬 푸르더니 옹골지더니
두꺼운 얼음이 서걱서걱 떨어졌다
차고 들어 갈수록
얼음과 벽 사이 물 한 방울 사이의 고랑이 깊다
얼음이 벽을 단단하게 쥐고 있다
발톱이 아프다
가죽신 껍질이 벗겨진다
소 죽은 귀신 얼음 벽 속에 웅크리고 있다
얼음과 벽 사이
진달래가 할 일이다
산수유가 할 일이다
아지랑이가 할 일이다
(현대시학, 4월호)
<해설>
“오해”는 인간의 지식과 이성만으로는 풀 수 없는 대상이다. 산수유가 오고 진달래가 피고 아지랑이가 피어오르듯이 시간과 함께해야만 가능하다. “오해”가 생기는 과정에 시간이 들어갔듯이 “오해”를 푸는 데도 발이 아픈 시간을 감수해야 한다. 무릇 “오해”뿐만 아니라 이해며 사랑이며 평화며 혁명 등 인간이 만들어낸 모든 개념들에는 무거운 시간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맞서다
손현숙
사진은 움직이는 빛을 붙잡는 거다
순광은 일상처럼 담담하고
역광은 칼로 베는 듯 날카롭다
간혹 사광을 쓰기도 하지만
나는 비명처럼 선연한 역광을 즐긴다
역광으로 사진을 찍을 때
렌즈는 해와 정면으로 맞서야 한다
한 장면을 골똘히 들여다보며
카메라의 눈은 오래 열려 있어야 하는 거다
보이는 것 말고도 햇빛 속으로 숨어버린
저 속의 내막을 뼛속까지 읽어내야 한다
본다는 것은 오래도록 기억하고 싶다는 것
시선은 집요한 애무다
나는 당신을 내 속에 단단히 박아 넣고 싶었다
그러나 당신은 태양을 등진 채 나를 본다
눈부셔라, 총 쏘듯 카메라의 셔터를 슈팅하자
오! 나의 아름다운 당신, 순식간 깜깜하다
(리토피아, 봄호)
<해설>
“당신을 내 속에 단단히 박아 넣”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를 지켜야 한다. 자신을 지키고 있는 사람만이 당신을 품을 수 있다. 따라서 세속적인 가치에 안일하게 따르려는 관습을 아프도록 반성하면서 주체성을 담금질해야 한다. 사랑받기를 기대하는 것보다 사랑하려고 나서야 하는 것이다. 아울러 당신이 유토피아의 대상이므로 소유할 수 없음도 인식해야 한다. 유토피아(utopia)는 누구나 염원하는 것이지만 u(not)와 topos(place)가 결합된 희랍어에서 볼 수 있듯이 어디에도 없는 세계(nowhere)이다. 시인은 “오! 나의 아름다운 당신, 순식간 깜깜하다”라고 토로한 데서 볼 수 있듯이 이미 그것을 체험했다.
내 앞에 비 내리고
신달자
밤새 내리고 아침에 내리고 낮을 거쳐 저녁에 또 내리는 비
내가 적막하다고 한마디 했더니 그래 살아 움직이는 장면을 계속 보여주는구나
고맙다, 너희들 다 안아주다가 나 늙어 버리겠다 몇 줄기는 연 창으로 들어와
반절 내 손을 적신다 손을 적시는데 등이 따스하다
죽죽죽 줄줄줄 비는 엄마 심부름처럼 다른 사람에게는 내리지 않고 내 앞에
춤추듯 노래하듯 긴 영화를 돌리고 있다 엄마 한 잔할 때 부르던 가락 닮았다
큰소리도 아니고 추적추적 혼잣말처럼 오르락내리락하는 비
내가 이젠 됐다라고 말하려다 꿀꺽 삼킨다 저 움직이는 비바람이 뚝 그치는
그 다음의 고요를 나는 무엇이라고 말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 표현이 막막하다.
(현대시학, 3월호)
<해설>
비는 자연스럽게 제 길을 가고 있다. 과거에 묶이지도 않고 미래에 요란을 떨지도 않고 현재의 상황을 안고 가고 있다. 그런데 가만히 귀를 열고 있으면 비의 뜨거운 숨결이 들린다. 원한과 안타까움과 눈물과 희망과 열정 들이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런데도 비는 내색하지 않고 천 개의 발을 가진 것처럼 가볍기만 하다. 그리하여 시인은 비와 함께하려고 한다. 아직은 움직이는 존재가 되어야 한다고 자신을 다독이며 험한 시간들을 헤쳐가려고 하는 것이다.
진수성찬
심인숙
햇빛 진수성찬이
거실 식탁 위에 한 상 가득 차려져 있다
뚜껑도 덮지 않은 밥상이 따끈하다
햇빛 밥 한 그릇
햇빛 미역국
햇빛 나물과 햇빛 겉절이
햇빛 동그랑땡
버무리고 무쳐놓은 햇빛의
황석어젓갈을 쓰고
민들레꽃기름을 쳤구나
누에가루로 간을 맞추었구나
수저 한가득 늦은 햇빛을 뜬다
미역국은 낳아준 사람이 먹는다는 말
잊지 않고
엄마처럼 오래 씹어 먹는다
행운목에게도 한 입
꽃잎벽지에게도 한 입
디저트로 수화기에 따라온 바람을
찻물에 타서 마신다
식탁 위에 한 상 차려진 햇빛을
되새김해
오래 오래 씹어 먹는다
(현대시학, 9월호)
<해설>
집안의 거실로 들어온 “햇빛”을 진수성찬을 차린 밥상으로 착상한 면이 재미있다. 햇빛이 차린 음식의 종류는 밥과 미역국과 나물과 겉절이와 동그랑땡 등 일상적인 것들이다. 그렇지만 황석어젓갈이나 민들레꽃기름이나 누에가루 등으로 간을 맞춘 데서 알 수 있듯이 세심한 손길이 들어 있다. 진수성찬으로 차린 밥상을 혼자 먹지 않고 주위의 행운목이며 꽃잎벽지와 나누는 모습에서도 볼 수 있듯이 여성의 손길이 이 세상을 살린다.
곡우
양문규
청명과 입하 사이
곡비는 제 배설물을 빈 쌀독에 가득 채웠다
찰찰 찰거머리였다
눈과 코와 입이 까만,
몸 없는 바닥과 한 몸을 이루었다
아버지는 다랑이 논을 갈고 있었다
바싹 말라비틀어진 몸
삭은 작대기 같지만
마음은 빗물 따라 회전 중이다
저 뭉클한 땅의 맛
그때 나는 계곡을 휘돌아 나가는
물소리에 귀 기울였다
누가 저 물의 중심에 구멍을 내었을까
어떤 하루가 온몸으로 낸
뜨거운 사랑 또 하나의 길을 본다
누군가 구름 한 차 부려놓고
어디론가 흘러가는 또 다른 봄날이었다
(시로 여는 세상, 여름호)
<해설>
현대인들은 자기가 맡은 일을 언제든지 그만두거나 바꿀 수 있다. 자신이 몸담고 있는 직장과 철저히 계약관계에 있기 때문에 보수며 근무조건 등을 따져 옮길 수 있는 것이다. 그렇지만 그와 같은 자세로 인해 직장뿐만 아니라 인간관계까지 수단화되어 세상으로부터도 자신으로부터도 소외되고 있다. 그에 비해 농사를 짓는 농부는 자신의 삶을 운명적으로 받아들인다. 조상 대대로 살아온 땅을 지키며 농사법을 따르는 것이다. 지겟작대기처럼 마른 몸이지만 곡우(穀雨) 절기에 논을 가는 아버지의 모습이 그 예이다. 농부는 굶어죽는 순간에도 종자를 베고 죽는다는 속담이 소중하기만 한 시대이다.
항하에 와서 울다
이승하
우리 낯빛 같다 이 강
황해만큼 누리끼리한 항하(恒河)*
이 강에 이르러 그대도 하염없이 울었던가
발원지가 저 멀리 히말라야산맥의 남쪽 어느 기슭이라는데
그대와 나의 발원지는 어디일까
한 개의 정자와 한 개의 난자
한 명의 여자와 한 명의 남자
언젠가는 합수하여 바다에 이르는지
그럼 함께 큰 하나를 이루게 되는 것인지
이곳까지 와보았던가 학승 혜초여
그때도 강가에서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지 새끼의, 지 어미의 시체를 태우고 있던가
땔나무를 못 구해 썩어가는 시체에서 풍기는 악취
구역질을 일으키는데
시체에서 흘러내리는 시커먼 추깃물
항하에 흘러들어 정화수 되게 했는지 생명수 되게 했는지
이 물 마시며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구나
그대 그때 여기 와서 항하 물 마셔보았겠지
물 속에 들어 있는 온갖 썩은 것들이
그대 마음 정화시켰으리 그대 몸 장수케 했으리
나 이 강에서 죄업 씻듯 몸 씻고 싶었지만
더럽다는 생각이 석고상 되게 해 들어가 보지도 못했다
스무 살의 혜초여
항시 그런 이 강가에 와서 무엇을 생각했는가
목숨이란 결국 양수에 담겨 있다가 추깃물로 바뀌는 것
빗방울 같은 낱낱의 목숨들 모여 강을 이루고
흐르고 흘러 가장 큰 무덤인 바다로 휩쓸려 들어가는 것
강으로 예배하러 가던 이들
무소나 호랑이들한테 해코지를 당하기도 했던 것처럼
우리 등판 같다 이 강
시간인 양 침묵하며 흐르는 항하
이 강에 이르러 그대도 하염없이 울었으리
* 갠지스 강의 한역 명. 아래는 혜초의 『왕오천축국전』에서 항하가 나오는 부분. “이 탑의 서쪽에 강 하나가 있는데 이라발저(伊羅鉢底, 아이라바티Airvat?) 강이라고 한다. 이 강은 남쪽으로 이천 리를 흘러 항하로 들어간다. 이 탑의 사방 먼 곳까지도 사람이 살지 않으며 숲은 여지없이 거칠어졌다. 그래서 거기로 예배하러 가는 자는 무소나 호랑이에게 해를 입기도 한다.” ―정수일 역주, 『혜초의 왕오천축국전』, 도서출판 학고재, 2004, 129쪽
(문학사상, 6월호)
<해설>
시인은 “시간인 양 침묵하며 흐르는 항하”를 바라보면서 죽음의 문제와 아울러 인간의 실존을 고민하고 있다. 그리하여 혜초를 부른다. 혜초는 일찍이 당나라로 가서 불도를 배웠고 인도를 비롯해 40여 개국을 다녔다고 한다. 시인은 그 혜초가 삶과 죽음에 대한 답을 알려줄 것이라고는 기대하지 않는다. 혜초 역시 한 인간이었기 때문에 항하에 이르러 울었을 것이므로 단지 동반자로 삼고 있는 것이다. 시인은 그와 같은 자세로 죽음은 관념의 세계가 아니라 “지 새끼의, 지 어미의 시체를 태우”는 과정을 겪어야 하는 현실적인 세계이면서 추깃물이 강으로 흘러들어 살아 있는 자들의 생명수가 되는 면을 인식하고 있다.
시절, 불빛
이승희
불빛에 기대고 싶어지는 날, 혼자 늦은 저녁을 먹는다. 냉장고 문을 열고, 불빛 속에 손을 넣어 둥근 반찬통을 꺼내다 말고 저 불빛들, 다 길이다. 중얼거린다. 저녁이 산을 가만히 지우는 동안 나는 아무 소리 없이 밥을 먹었다. 불빛에 기대면 그늘이 된다, 어둠이 된다. 여긴 마치 물속의 방 같아서 애초 바닥 따윈 없는지도 몰라. 그래 그런 시절이 있었지, 두려움 따위는 집어쳤던 시절, 몸에 긴 칼자국을 그리던 겨울. 깜박거리던 불빛 같은 핏방울로 달빛조차 붉어보이던. 창문으로 달이 지난 지 오래. 아무 것도 소곤거리지 않는 참으로 편안했던 불안.
불빛에 부풀려진 영혼은 밤새 공중을 떠다니고
달빛이 얼음처럼 차가웠던 어느 날 붉고 동그랗던 불빛을 기억한다.
그 불빛들
나무들의 손가락 사이에서
물방울처럼 흘러내렸고
아직도 무거운 외투를 걸치고 앉은 시절
남은 반찬을 냉장고 속에 넣고, 불을 켠다. 깨알 같은 글자들로 가득한, 채송화 꽃씨보다 작고 작은 글자들이 무료한 얼굴로 쉴 새 없이 비춘다. 한 시절이 가서 다시 오지 않았다.
(다시올문학, 봄호)
<해설>
시인은 “불빛” 같은 시절을 떠올리고 있다. 그 시절에는 두려움이라고는 없어 “몸에 긴 칼자국을 그리”는 용기가 있었고, “깜박거리던 불빛 같은 핏방울로 달빛조차 붉”게 바라보는 열정이 있었다. 시인이 지나간 시절을 그리워하는 것은 과거에 함몰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의 자아를 보다 갱신시키기 위해서이다. 다시 말해 현재의 삶에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자세를 가지려는 것이다. 그것은 사회적 배분 원칙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기 때문에 쉽지 않다. 그렇지만 패배의식에 갇히기보다는 “불빛”을 품고 나아갈 때 길이 보일 것이다.
무논의 책
이종암
내 어릴 적 아버지 멋진 책을 만드셨다
봄과 여름 사이 오월의 논에 아버지
산골짝 물 들여와 소와 쟁기로 해마다
무논의 책 잘 만드셨다
모내기 전 여기, 밀서(密書)다
물 위는 하늘 아래는 땅 서로 마주보는
밀서 안쪽으로
바람이 오고 구름이 일어나고
꽃향기 새소리도 피어나는 무논의 책
아버지 어머니 책 속으로 걸어가면
연둣빛 어린 모가 따라 들어갔다
그리하여 초록 치마를 펼쳐놓은 책 위로
하늘이 구름을 시켜 햇볕과 비를 뿌리며
한철 또록또록 그 책 다 읽고나면
밥이 나왔다
(포항문학, 2009년 하반기)
<해설>
시인이 쟁기질하는 아버지의 모습을 책 만드는 일로 비유한 이유는 아버지의 농사가 자신의 글쓰기만큼 중요함과 아울러 본보기로 삼기 위해서이다. 농사를 짓는 일이나 글쓰기는 소중한 만큼 힘들다. 특히 자신이 정한 길을 정직하게 가야 하기 때문이다. 농부는 대지와 하늘을 정직하게 품는다. 따라서 시인은 아버지의 그 모습을 본보기로 삼고자 하는 것이다.
동백꽃
이주희
도란거리는 소리에 잠을 깼더니
밤새 일곱 난쟁이들이
새 식구로 들어왔다
빨간 입술을 달싹이며
노란 목젖이 보이도록 낄낄대고
마냥 신바람이 났다
내가 물만밥을 깨작깨작하면
계란을 부치고 김치를 꺼내 잡수시라고
아양을 떤다
종종걸음 치다 숨을 돌리면
알밤만한 손으로 부채질을 해주며
어깨를 주무른다
개키던 빨래를 밀어놓고 등걸잠을 자면
살그머니 무릎담요까지 덮어준다
(차령문학, 창간호)
<해설>
“동백꽃”을 밤새 새로운 식구로 들어온 “일곱 난쟁이들”로 비유한 면이 예쁘다. 색깔로 치면 붉고도 밝다. 붉은색이나 주황색 계통은 사람들의 식욕을 돋우는 데 효과가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따라서 시인이 “동백꽃”을 “빨간 입술”이며 “노란 목젖”을 가진 난쟁이들로 의인화해서 그들이 식탁을 즐겁게 해주는 존재로, “내가 물만밥을 깨작깨작하면/계란을 부치고 김치를 꺼내 잡수시라고/아양을” 떠는 존재로 그린 것은 상황에 적합하다. “동백꽃” 같은 우군을 이 세상에서 많이 발견하고 그의 존재 가치를 적극적으로 알리는 것이 시인의 임무이다.
플라타너스
임곤택
나무에게는 생활이 없다
지각이나 조퇴도 없고 여행도 가지 않는다
다만, 내게 정중해서 저게 나를 위해 서 있다는 생각
온종일 나를 기다렸다는 생각
오늘 아침, 초가을 하늘이 겨울 하늘같고
바람은 차갑고 텅 비어 있어서
계단을 오른 무릎이 다음 계단의 모서리 같이 단단할 때
모서리가 내 숨이고 근육이고 얼굴이라는 생각
누가 나를 기다린다는 생각
누가 나를 기다리고 있다는 생각
그렇게, 내게 한없이 정중한 나무를 보고
울컥 눈물 쏟아지려는데
내 안에는 그늘도 빛도 없어 슬플 이유도 없고
맹장을 떼낸 자국이 가장 큰 상처인, 나를
누가 기다려 주고 있다는 생각
그가 기다린 것은 뻣뻣한 몸이고 단단한 모서리라는 사실
그렇게 계속 기다려 나무가 풍선이 된다면, 나무가 박하사탕이라면
세상은 변하는 것이어서
나도 달라질 수 있겠다는 생각
달라지고 달라져서 문득 나무인 내가 무엇을 기다리고 섰다는 느낌
앉지도 눕지도 않고 생각도 뭣도 아무것도 없이
그냥 단단한 모서리로 꽉 차서는
기다린다는 기다리겠다는
그 한 생각
(다층, 겨울호)
<해설>
시인은 나무로부터 정중함을 배우려고 한다. 나무는 자기 주위의 존재들에게 그늘이며 빛을 베풀면서 생색을 내거나 엄살 부리지 않고 점잖으면서도 넉넉한 자세를 내보이고 있다. 나무의 그 정중함은 “계단의 모서리 같이 단단한” 주체성을 가지고 있을 때 가능하다. 시인은 그와 같은 사실을 자각하고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려고 한다. 지각이나 조퇴를 한 데서 볼 수 있듯이 상실된 주체성을 새롭게 회복해서 다른 존재들을 위해주려고 하는 것이다.
선장
장현숙
어둠의 망망대해에 포장마차 한 채
조금만 바람이 불어도
기울어진 수평으로 절룩거리며
거센 물살을 헤치고 있다
배 안에는 한 때 원양어선을 타고
참치 떼를 쫓아 바다를 누볐을 선장이
펄떡거리는 오징어를 건져 올려
마구 뿜어댄 먹물 같은 어둠을
하얗게 닦아내고 있다
어깨엔 소금기 밴 땀의 흔적
지우지도 못하고 자꾸 무릎이 꺾이는지
등을 보이며 앉아 있다가 일어서곤 했다
이따금 그물을 던지기 위해
팽팽한 불빛으로 지평선처럼 물러나 있는
밤의 언저리를 서성거렸으나
바람만 날을 세우며 지나갔다
목이 타는지 소주를 입안에 털어 넣고는
향로를 바꾸기 시작했다
새벽의 검푸른 파도가 덮쳐오는
골목을 향해 키를 돌리고
낯익은 뱃길을 따라 천천히 언덕을 오르며
그 끝에는 양철대문이 등대처럼
하얗게 빛나고 있다
(다층, 여름호)
<해설>
하루하루를 힘들게 살아가는 한 소시민을 망망대해의 항해를 책임지고 있는 “선장”으로 비유한 창의성이 돋보인다. 시인의 창의성은 기존의 관점을 극복하려는 데서 이루어진다. 그리하여 보잘것없는 한 소시민이 작품에서는 세계를 움직이는 영웅이 되고 있다. 그가 “목이 타는지 소주를 입안에 털어 넣”는 행동은 전쟁터에 나가는 영웅이 출정식에서 술을 마시는 것과 같고, 그가 잠을 자러 가는 “양철대문이” 세워져 있는 집은 영웅이 살고 있는 궁궐이 된다. 영웅이 사라진 시대는 바람직하지만, 새로운 영웅이 필요한 시대이기도 하다. 가난하고 힘없고 배우지 못했지만 인간 가치를 지닌 사람들이 영웅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주름
전숙
개썰매를 몰아 방향을 찾는 이누이트들은
눈의 주름을 보고 길을 찾는다고 한다
설원을 쓸고 간 바람의 발자국이
주름을 만든다는 것이다
나는 머리카락을 추켜올리고
이마의 주름을 활짝 드러내었다
내가 걸어온 바람 같은 길이
생의 설원에 석 줄 깊은 발자국을 찍어놓았다
이 주름을 더듬어 가면
크레바스를 무사히 비켜갈 수 있을 것 같다.
(다층, 여름호)
<해설>
세상의 모든 “주름”에는 시간이 축적되어 있다. “주름”은 본래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무수히 많은 시간들이 지나간 흔적이다. 따라서 그 너비와 깊이만큼 시간이 들어 있으므로 “주름”을 긍정적으로 인식하는 세계관이 요구된다. 자신이 이룬 길이 비록 다른 길보다도 험하고 멀다고 할지라도 운명적으로 품는 자세가 필요한 것이다. 따라서 “머리카락을 추켜올리고/이마의 주름을 활짝 드러내”는 시인의 자세는 바람직하다. 그와 같은 모습으로 나아가면 삶의 “크레바스를 무사히 비켜갈 수 있을 것”이다.
세 권의 미래
정끝별
내 책꽂이 가장 좋은 위치에 나란히 꽂혀 있는 책들. 허름해서 눈에 드는 책들. 오랜 청춘의 도서관에서 빌려 읽은 책들.
1985년의 『바슐라르 硏究』(곽광수‧김현, 민음사, 1976 : 840.9)
운동권 학습서들 사이로 바슐라르를 읽다가 이른 책. 반납의 순간 꼭 갖고 싶어졌던 책. 절판되었다는 말이 거듭될수록 꼭 가져야만 했던 책. 신촌 일대 서점을 돌다 ‘알서점’을 나왔을 때 “저기요”하며 한 남자를 내 등 뒤에 서 있게 했던 책. 한 남자가 “담배 한 대 필 시간만 내달라”며 2층 커피숍을 가리켰던 책.
한 남자가 얘기했다. 가난한 남자가 부잣집 여자를 짝사랑했단다. 신분이 달라 만날 수조차 없었단다. 천우신조로 여자와 맞닥뜨린 남자, “담배 한 대 필 시간만 내달라” 했단다. 담배 한 대가 타들어간 시간은 짧았고, 여자는 떠났고, 남자는 긴- 담배를 만들어 부자가 되었단다. 여전히 여자를 잊지 못해 찾았으나 여자는 문둥병에 걸려 있었단다.
연대 경제학과 복학생이라 소개한 후 담배에 불을 붙였다. 나는 한 남자의 담배 한 대가 타들어갈 때까지를 기다렸다가 “담배 한 대 다 피우셨죠?”라는 말만을 남기며 커피숍을 나왔다. 버스정거장에서 한 남자 “다음 주 월요일 오후 5시 이대 앞 파리다방에서 기다리겠습니다, 올 때까지!”
지금은 파리다방도, 2층 커피숍도, 신촌 일대의 서점도 죄다 없다. 한 남자 이름도 잊었다! 그때 그 시절 그리 책에 빠져 살지 않았더라면 “다음 주 월요일 오후 5시 이대 앞 파리다방”에 나갔을지 모를 일! 월요일 오후 5시에 파리다방이 아닌 도서관에서, 가까스로 구한 헌 “바슐라르 硏究”에 그리 빠져있지 않았더라면!
1990년의 『山海經』(정재서 역, 민음사, 1985 : 915.2)
조교시절 중국시학을 기웃거리다 필 딱 꽂혔던 책. 선 채로 몇 장을 넘기다 입이 딱 벌어졌던 책. 뻥과 구라의 사표로 받들만한 책. 꼴깍꼴깍 침을 삼켰던 책. 역시 절판되었던 책. 딱 훔치고 싶었던 책. 역자가 나 다니던 대학의 교수라는 걸 반납하기 직전 알게 된 책. 이틀을 망설이다 역자 연구실로 전화했던 책. 여분은 없고 개정판 낼 계획만 있었던 책.
자신의 역서를 그리 열렬히 쫓아온 제자뻘 초짜 여성 시인이 가상키도 했을 것이다. 그 역자 국수전골을 사주며 밑그림 중이던 “우리시에 미친 山海經”에 대해 탐문하셨던가? 황지우의 山海經 신작시들을 식은땀 흘리며 주워댔겠으나 한 남자, 황지우 시인과 동기동창이었으니 흘리나마나였던 식은땀! 여차여차 차차차로 구한 초판본, “중앙일보․동양방송 조사자료실”에 꽂혀있던 “일련번호 41898”이다.
그런데 그때 그 역자 삼십대 후반의 노총각 교수였다는 것 나만 몰랐다. 그리고 그 역자, 몇 해 뒤 나 결혼할 즈음 결혼해, 나 첫딸 낳을 즈음 첫딸 낳았다는 것도 나만 몰랐으니, 나 “山海經” 헛읽은 셈이다!
1992년의 『封印된 時間-영화예술의 미학과 시학』(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김창우역, 분도, 1991 : 검색결과가 없습니다)
촌스런 표지 때문에 빌릴까 말까 망설였던 책. 그날 밤을 홀딱 새우게 했던 책. 쿤데라 카프카 루카치 하우저 본느프와 네루다 도스토예프스키 모딜리아니 목록 끝에 타르코프스키도 넣게 했던 책.
분도출판사라니! 동숭동 문예회관 뒤편 2층이었던가. 기독교 전문서점까지 찾아가 기어코 사고야 말았던 책. 근처 커피숍에 들어가 다시 읽었던 책. 책을 보며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있던 그때 그 남자. 수사가 될 신학도여야 마땅했으리. 기독교 서점 근처였고 그 남자의 읽던 책표지에 “성 프란치스꼬” 있었고, 폴라의 흰목이 눈부셔 차라리 슬퍼보였으니.
그 남자 “封印된 時間” 너머로 힐끗힐끗 다 훔쳐 읽은 후 계산하려는 데 없었다. 서점에서 있었던 지갑 커피숍에서 없었다. 우왕좌왕의 내 커피값 계산해주던, 커피값으로 “封印된 時間” 건넸을 때 마다 않던 그 남자. 그러나 연락처까지는 건네지 못했다. 이미 책값이 커피값을 초과했고 이미 나 결혼할 남자까지 있었으니!
연필로 북북 밑줄 치며 읽고는 지우개로 박박 지워 반납한 책. 이 책 지금 검색되지 않는다. 누가 가져갔을까? 난 아니다. 지금 내 책꽂이에 꽂혀 있는 책은 연락처 대신 건넸던, 그때 그 남자가 종신서원할 때 처분했던 내 “封印된 時間”이다, 틀림없다!
(문학사상, 5월호)
<해설>
책을 읽는 바람에 사랑을 이룰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한 시인의 운명은 슬프면서도 다행스럽다. 책(冊)은 멀 경(冂)을 부수로 삼고 있는 데서 볼 수 있듯이 경계선을 가지고 있으므로 안전감을 준다. 변화무쌍한 인간의 마음을 제어하는 것이다. 따라서 책의 영역을 벗어나는 인간은 위험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차원에서 보면 시인이 읽은 “세 권의 미래”는 안타까움보다도 다행스러움을 준다. 토대가 든든하기 때문에 사랑을 이룰 수 있고 노래도 부를 수 있는 것이다.
맨손의 노래
정유화
이제 눈망울이 컸던
그 이름도 지워버리자
여름 한철 지나온
저 매끄러운 바위도
부드럽게 식고 있다
사랑은 식어져야 또다시
뜨거워지는 법이지만
내가 그리워한 것들은
저 무심한 하늘에만 있으니
빈 수레처럼 가을은 그렇게 가도
젊은 날의 이야기는
어느 천둥소리로 곱게 자랄 것이다
내가 노래하지 않아도
오가는 차가운 비가
오래 남은 늙은 잎새를 두들기며
노래하리라
먼 훗날 우리 가슴에
따스한 핏기로 돌리라.
(시와사람, 가을호)
<해설>
“맨손”이라는 말은 실패나 상실감을 상징하기도 하지만 의욕적인 출발을 상징하기도 한다. 이 두 가지 중에서 시인은 후자를 궁극적으로 지향하고 있다. “먼 훗날 우리 가슴에/따스한 핏기로 돌리라”고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시간의 흐름을 되돌릴 수 없는 것이 인간의 운명이지만 최대한 자신의 “핏기”를 돌리며 나아가는 것이야말로 인간 정신의 위대함이다. “맨손”으로 부르는 젊은 날의 노래는 언젠가 “천둥소리로” 들려올 것이다.
돈키호테의 배수진
차주일
나는 최후의 결투를 하러 과거로 가는 중이다
내 여생을 다해도 읽어낼 수 없이 방대한
첫사랑 스친 곳으로 가는 중이다
나는 그곳에서 가장 뜨거웠던 내 피를 찾아 갑옷으로 입고
거대한 냉혈한과 결투할 것이다
나는 보이지 않는 직선의 심장을 향해 돌진할 것이다
1초에 60미터를 달리는 열차는 직선 위에 있다
직선은 속도라는 냉매로 풍경을 뭉그러뜨리고 얼려
내 눈으로 순간 이동시키는 고수이다
시공을 화소 하나쯤으로 바꿔버리는, 이 순간은
곧은길로 밀어닥친 미래가 현재를 몰아내는 중이다
과거는 곧 미래와 직면할 것이다
나는 곧은길에 찔려 죽은 현재를 넘어
한 소녀를 스쳐 지났던 골목굽이에 도착한다
이곳은 내 병참기지
나는 골목굽이에 결승처럼 묶여 있는 1초 앞에 서 있다
내 전설의 증거 앞에서 내 심장박동은 되살아난다
나는 일생 중 가장 뜨거운 나의 온도를 갑옷으로 입는다
내가 원색으로 삼은 소녀의 뺨에 핀 홍조,
나를 지금껏 숨 쉬게 한 소녀의 숨 냄새,
내 잉크가 된 침묵, 모두 담금질하는 칼처럼 뜨겁다
누가 내 영원이 된 1초를 순간이라 말하려는가
나는 내 성지를 사수하는 검투사
나는 첫사랑의 온도로 영하 수백 도의 미래를 찌를 것이다
나는 과거의 1초로 미래와 대적할 것이다
(작가세계, 여름호)
<해설>
오늘날 개인은 자본주의가 내세우는 가치 기준에 종속되어 철저히 부속품으로 취급당하고 있다. 그러므로 거대한 자본주의에 대항할 수 있는 전략이 필요하다. “가장 뜨거웠던 내 피를 찾아 갑옷으로 입고/거대한 냉혈한과 결투할 것이”라고 결심한 돈키호테의 정신을 새길 필요가 있는 것이다. 돈키호테는 주체성을 가지고 정의와 자유와 사랑을 외쳤다. 비록 사회로부터 인정받지 못하고 괴짜 취급을 받았지만, 그가 추구했던 정신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 시인들이 돈키호테처럼 배수진을 쳐야 하는 시대이다.
반구대 향유고래 사랑 노래
최동호
거대한 흰 고래가 향유를 가득 머리에 이고
산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바다 밑에서 삼킨 작은 새우들의 기름을
바보처럼 머리통에 담고 있어
물위에서 인간의 작살에 죽는 것이 그들의 생애이다
향유고래가 살아 움직이고 있는
신석기 시대 반구대 암각화
샤만과 함께 춤추던 옛 사람들이 어떤 이유로
향유고래를 그려 놓았는지는 모르지만
머리통에 향유를 가득 담고
한 눈을 뜨고 잠자는 이 향유고래의 슬픈 전설을
그들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먼 북방에서 들려오는
가냘픈 신호음을 들으려는 것처럼
향유고래 긴 이빨로 만든 피리를 불고
고래 고기를 먹으며 축제를 벌이던
옛 사람들도 그들의 생애가
휘파람으로 멀리 있는 연인을 찾는 향유고래처럼
세상을 사랑하고 살아가기 바라는
깊은 염원이 있어
돌에 그들의 형상을 새기고 그 죽음을
애도하는 노래를 불렀을 것이다
거대한 흰 고래처럼
사랑을 가득 머리에 이고
사람으로 오늘을 산다는 것은 슬픈 일이다
(시와시, 겨울호)
<해설>
고래는 멀고도 먼 북방에서 들려오는 연인의 휘파람 소리를 듣느라고 인간들의 작살에 죽고 만다. 인간 역시 사랑하는 대상을 향하느라고 희생될 수밖에 없다. 사랑을 품고 살아가는 존재들의 운명은 슬프다. 사랑에 눈멀기 때문에 자신의 안위를 방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지만 “세상을 사랑하고 살아가기 바라는/깊은 염원이 있”는 그들에 의해 이 세계는 영위된다. 사랑을 노래하는 존재들은 눈멀지만 “돌에 그들의 형상을 새기”는 역사를 이루는 것이다.
1000일
표성배
작업복 입은 채로 퇴근한다
탈탈거리며 따라 온 기계 소리가
좔좔거리는 수돗물 소리보다 더 시끄럽다
작업복에 묻어온 쇳가루를
현관 문틀과 욕실 바닥에 털어놓고
리모콘을 꾹, 눌러 티브이를 켜자
불쑥 마이크가 튀어 나왔다
1000일이라니요!
1000일,
이게 말이 됩니까?
나는 갑자기 눈앞이 흐려졌다
1000일이 넘게 작업장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며
스스로 목숨을 깃대에 매달아 놓은
기륭전자 여성 노동자들이 티브이 화면을 메우고 있었다
핏기 없는 얼굴들이 느릿하게 지나가고
애틋하게 호소하는 입들이
티브이 속에서 뛰어나와
아무렇게나 벗어 놓은 작업복을 입고
거실을 돌아다니는 것이 아닌가
순간이었다
나는 마이크를 잡고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1000일 1000일 1000일이라니!
(‘88만원 세대’, 객토 7집)
<해설>
사회의 계층에 따라 “1000일”을 바라보는 관점이 다를 것이다. 어떤 계층은 절망하고 분노할 것이고, 그 반대의 계층은 희망으로 기다리거나 계산할 것이다. 물론 아무런 관심을 갖지 않는 계층도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자신이 어느 계층에 속하는지 가늠해볼 수 있다. 따라서 “1000일이 넘게 작업장으로 돌아가게 해 달라며/스스로 목숨을 깃대에 매달아 놓은/기륭전자 여성 노동자들”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지는 않더라도 사회 구성원으로 관심을 가져야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