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집트의 파피루스 항아리
1945년 12월 어느 날, 남부 이집트의 나그 함마디 지역에서 한 농부가 붉은 색의 큰 항아리를 발견했다. 높이가 거의 1미터나 되는 이 항아리에는 13권의 파피루스 뭉치가 들어 있었다, 이 13권의 파피루스에는 모두 52편의 글이 들어 있었는데, 중복된 글을 제외하면 발견한 글은 모두 47편이었다.
그들은 이 파피루스의 가치를 알지 못하고 일부는 부엌에서 불쏘시개로 썼다. 그러나 이것은 당시로부터 1600년 전,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전한 비밀한 가르침이 쓰여 있는 참으로 중요한 문서였다.
후에 「나그 함마디 문서」로 알려지게 된 이 문서를 발견한 무함마드 알리라는 농부는 얼마 후 살인사건으로 조사를 받게 되었다. 그는 조사를 받기 전에 자기가 발견한 고문서로 인해 문제가 생길까봐 사제인 알 마쉬에게 그 책들 중 일부를 맡겼다.
그런데 그 지방의 역사선생인 라지브가 이 중 한 권을 보고서, 그것이 중요한 문서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는 사제에게서 한 권을 달라고 하여 이집트에 있는 친구에게 감정을 의뢰했다.
이 책은 카이로의 골동품상의 통해 암시장에 팔리게 되었고, 이집트 정부는 곧 이 책의 가치를 알게 되었다. 그들은 13권의 파피루스 중 1권을 구입하고 10권 반은 압수하여 카이로의 콥트박물관에 보관했다. 그러나 제13권에 실려 있던 글 중 적지 않은 부분이 미국으로 반출되었다.
네델란드 우트레흐트 대학의 유명한 종교사학자인 힐레스 퀴스펠(Gilles Quispel)은 이 문서에 대한 소문을 듣고 몹시 흥분했다. 그는 취리히에 있는 융(Jung) 재단에 촉구하여 그 책들을 사도록 했다. 그리하여 융 재단은 이 파피루스 중 한 권을 구입하게 되었다. 퀴스펠은 그 글을 보고 더욱 흥분했으며, 없어진 일부를 찿으려고 1955년에 이집트로 갔다.
그는 카이로의 콥트박물관에서 영인본의 일부를 빌려 호텔로 돌아와서는 그것을 해석하기 시작했다. 그가 해석한 것은 나그 함마디에서 발견한 문서 중에 있는 「도마복음」이었다. “이것은 살아 계신 예수께서 가르치신 비밀한 말씀이며, 그의 쌍둥이 형제인 디디모스 유다 도마가 기록한 것이다.”
당시는 이미 「도마복음」의 희랍어판 첫째 줄이 알려져 있었으며, 퀴스펠도 그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 「도마복음」이 그의 손에 있었다. 그러나 그 내용은 지금까지 알려진 예수의 가르침과는 너무도 다른 것이었다.
이 “예수의 비밀한 가르침” 에 들어 있는 첫 번째 말씀은 이러했다. “누구든지 이 말을 이해하는 자는 죽음을 경험하지 않으리라.” 이집트의 한 농부가 우연히 발견한 이 책에는 부활하신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전한 우주의 비밀과 영생에 관한 가르침이 들어 있었다.
▶ 나그 함마디 문서가 세상에 나오기까지「나그 함마디 문서」를 발견하기 전에도 이집트에서 콥트어로 된 영지주의 문서를 발견한 일이 있었다. 콥트어는 이집트의 그리스도교인들이 쓰던 문자였다. 첫 번째 문서는 보통 「브루스 문서」(Bruce Codex), 또는 라틴어로 표기하여 「브루키아누스 문서」(Brucianus Codex)라고 하는데, 1769년에 스코틀랜드인 관관객인 제임스 브루스가 이집트의 테베(지금의 룩소르) 근처에서 구입한 것이다.
이 책은 1892년에야 출판되었는데, 예수께서 그의 제자들에게 전한 비밀한 가르침이 들어 있다. 1773년에는 한 수집가가 런던의 고서점에서 콥트어로 된 고대문서를 발견했는데, 거기에도 예수가 제자들에게 전한 비밀한 가르침이 들어 있었다.
또 1896년에는 이런 문서들에 관심을 가지고 있던 독일인 이집트 학자 한 사람이 카이로에서 고대사본 하나를 구입했는데, 거기에는 「마리아 복음」과 「요한 비밀의 서」 등이 들어 있었다. 이 중에서 「요한 비밀의 서」는 「나그 함마디 문서」에도 들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서들은 일부 학자들을 제외하고는 별로 대중적인 관심을 끌지 못했고, 「나그 함마디 문서」가 세상에 알려지면서 이러한 문서들도 더불어 주목을 받게 되었다. 그런데 나그 함마디에서 발견한 이 놀라운 문서들은 수십 년 간이나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다.
여기에는 정치적인 이유도 있었지만, 무엇보다도 한심한 것은, 이 문서의 가치를 알아 본 몇몇 학자들이 학문적 주도권을 독점하려고 이것을 공개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이 문서들의 가치를 처음 알아본 사람은 프랑스의 학자 쟝 도레스(Jean Doresse)였다. 그는 카이로에 가서 콥트박물관에서 이 문서들을 처음 보고는 그 가치를 알았다. 그에게 이 문서들의 감정을 의뢰한 박물관장 토고 미나는, 그에게 카이로의 벨기에인 골동품 상인인 알베르트 아이트가 가지고 있는 다른 사본들도 감정해 달라고 요청했다.
토고 미나는 도레스를 만난 후 아이트에게 가서 그 사본을 이집트 밖으로 유출하지 말고, 반드시 적당한 가격으로 박물관에 팔으라고 말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문서들은 아직도 숨겨져 있었다. 많은 수의 나그 함마디 문서를 가지고 있던 알카르스 출신의 애꾸눈 바히즈 알리는 그것들을 팔려고 카이로로 갔다. 골동품 상인 포키온 타노는 그가 가져온 것을 전부 산 다음 좀 더 많은 것을 구할 수 있을까 해서 나그 함마디로 갔다.
쟝 도레스가 1948년 카이로에 대한 공습과 폭격 속에서 나그 함마디에서 나온 문서 중 세 번째 파피루스 뭉치를 출판하기 위해 애쓰는 동안, 이집트 문교부장관은 타노의 수집품을 사서 박물관에 소장하려고 그와 만났다. 그러나 타노는 정부의 수색을 방해하기 위해, 카이로에 있는 이탈리아인 수집가인 다따리에게 그것을 팔았다.
1949년 6월 10일, 카이로의 불어판 신문에는 다음과 같은 기사가 실렸다.
“이집트 정부는 이 귀중한 문서들을 찿고자 애쓰고 있다. 전문가의 말에 의하면, 이것은 지금까지 이집트 땅에서 보존되어 오다가 발견된 것 중 가장 귀중한 것 가운데 하나이며, 그 학문적 중요성은 투탄카멘 왕의 무덤을 발견한 것과 같은 극적인 발견보다 더 한 것이라고 한다.”
1952년, 이집트 정부는 이 문서들을 국유화한다고 발표했으며, 다따리는 이것을 옷 가방 속에 넣어 반출하려고 하다가 발각되어 이 문서들은 모두 압수되었다. 다따리는 10만 파운드의 금액을 요구했으나, 정부는 그녀에게 한 푼도 지급하지 않았다. 그녀는 소송을 걸었으나 패소하여, 돈은 한 푼도 받지 못했다. 그러나 이 소송으로 인해 이 문서에 대한 연구는 3년 동안 지연되었다.
그러나 이집트 정부는 아이트가 가지고 있던 문서 I의 일부를 압수하는 데는 실패했다. 아이트는 정부의 수색을 피해 카이로에서 미국으로 도망갔다. 그는 그 문서들을 밀반출하여 고액에 팔려고 했으나 팔지 못하고, 벨기에로 돌아가 그 문서를 비밀한 곳에 숨겨 두었다. 이집트 정부는 아이트를 골동품 밀반출죄로 기소했으나, 그는 판결이 나기 전에 죽었다.
그의 부인은 그 문서들을 경매로 팔려고 비밀리에 협상했는데, 힐레스 퀴스펠 교수는 스위스의 융 재단에게 그것을 사도록 촉구했다. 그런데 그는 당시 이 문서를 반출하고 매각하는 것이 불법인 줄을 몰랐다고 말했다.
1952년에 이르러 소유권이 확실해지자, 열두 권 반의 문서들은 카이로의 콥트박물관에, 그리고 제13권의 대부분은 쮜리히에 있는 비밀상자에 보관되었다. 그리하여 이 문서들은 향후 20년 간 이 문서에 접근하려는 세계적인 학자들 집단 간의 치열한 경쟁의 초점이 되었다.
1952년에 박물관장이 된 파호르 라비브는 이 문서의 출판권을 엄격히 통제하기로 결정했다. 누구든지 이 놀라운 문서들 중 어느 하나만이라도 처음 출판하게 되면, 그는 학자로서 국제적인 명성을 얻을 수 있었던 것이다. 라비브 박사는 극소수으 사람들에게만 그 문서들을 보도록 함으로써 그들의 기득권을 보호해 주었다.
1961년에는 유네스코 사무총장이 나그 함마디 문서 전체를 출판할 것을 촉구하면서, 이를 위한 국제적인 위원회를 조직하자고 제안했다. 스칸디나비아의 고고학자 토르크니 제페-죄더베르크는 학자들을 대변하여 유네스코에 편지를 보냈다. 그는 그 편지에서 그 문서 전체를 영인본으로 출판하라고 촉구했다.
그로부터 10년 뒤인 1972년에야 비로소 영인본 한 권이 출판되었다. 나머지 9권은 1972년과 1974년 사이에 출판되어, 13권의 문서 전체가 출판되었다. 문서를 처음 발견하고 나서 영인본으로 세상에 알려지기까지 장장 27년의 세월이 걸린 것이다.
지금까지 고대문서를 발견하고 나서 세상에 알려지기까지 이렇게 오랜 세월이 걸린 일은 없었다. 그러나 이제 겨우 영인본이 출판된 것이다. 이제 이것을 번역하여 여러 학자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하는 일이 남아 있었다.
유네스코 위원회의 유일한 미국인 위원이며,
‘고대와 그리스도교 연구소’(Institute for Antiquity and Christianity)의 소장이었던 제임스 로빈슨(James Robinson) 교수는 사본을 복사하고 번역하기 위해 국제적인 연구반을 구성했다. 로빈슨과 그의 연구반은 전 세계 학자들에게 이 자료를 보내서 많은 사람들이 연구에 참여하게 함으로써, 그 문서들을 독점하려는 시도를 약화시켰다.
로빈슨과 그의 연구반의 노력에 의해 1977년에 처음으로 영문판 「나그 함마디 문서」가 출판되었다. 그리고 1980년까지는 영인본이 모두 출판되었다. 이리하여 문서를 발견한지 35년이 지난 뒤에야 비로소, 「나그 함마디 문서」는 세상에 완전히 공개되었다.
「나그 함마디 문서」의 독일어판은 영문판이 나온지 20년 뒤인 1997년에 나왔으며, 프랑스어 판은 곧 완역본이 나올 예정이라고 한다. 그러나 「나그 함마디 문서」에 실려 있는 문서들 중 일부는 여러 나라의 연구자들에 의해 여러 나라말로 번역되었다.
▶ 그리스도교 영지주의의 보고(寶庫)
「나그 함마디 문서」는 모두 13권의 파피루스 묶음으로 되어 있다. 여기에는 모두 52편의 글이 실려 있는데, 중복된 7편의 글을 제외하면 모두 45편의 글이 실려 있는 셈이다. 이 중에서 「요한 비밀의 서」는 이미 발견된 것이고, 「복된 자 유그노스토스」는 이미 알려져 있던 「예수 그리스도의 소피아」와 내용이 같으므로, 나그 함마디에서 새로 발견된 문서는 모두 43편이 된다.
그러나 그 전에 발견된 문서들이라 할지라도 사실상 나그 함마디의 발견물로 인해 그 가치를 완전히 새로 평가받게 되었다. 이 문서들이 발견되기 전에, 영지주의는 그리스도교의 이단으로 알려져 있었다. 이런 견해는 물론 이른 바 정통파 교회의 교부(敎父)들이 영지주의자들을 이단으로 단죄하고 그들의 주장을 논박했기 때문이다.
초기의 박해에 의해 영지주의자들이 보던 문서는 모두 자취를 감추었고, 단지 이단비판가들인 교부들이 비판을 위해 기록해 놓은 글들만이 영지주의자들의 주장을 알 수 있는 유일한 자료가 되었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교 영지주의자들의 글을 직접 볼 수 있게 되었다. 「나그 함마디 문서」에는 헤르메스사상에 속하는 문서와 플라톤의 「국가론」 단편이 들어 있기는 하지만, 대부분은 그리스도교 영지주의 문서들이다.
이 문서들을 통해 우리는 비로소 교부들의 글에 인용된 편벽된 자료를 통해서만 접했던 그리스도교 영지주의의 진면목을 알 수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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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아는 한, 지금까지 우리나라에 나온 책들 중 영지주의에 관한 것은 정신세계사에서 나온 일레인 페이젤스의 <성서밖의 예수>(원제는 '영지주의 복음서'인데, 이런 제목으로도 나와 있음)와 김용옥 교수(도올 김용옥 선생이 아님)의 <도마복음서연구>(대한기독교출판사)가 있을 뿐입니다. 나그 함마디 문서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보시려면 <성서밖의 예수>를 보시면 됩니다.
<나그 함마디 문서>는 현재 독일어와 영어로만 완역된 것으로 알고 있고, 프랑스어판도 곧 나올 것이라고 합니다. 아래에 <나그 함마디 문서> 발굴에서부터 그것이 세상에 나오기까지와 그 가치를 간략하게 적어 보았습니다. 우리말 <나그 함마디 문서>는 곧 인터넷 사이트 www.sirius.ne.kr에 전문이 오를 것입니다(현재 작업 중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