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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전형무소 이송과 투옥 생활 대전형무소는 3.1운동 당시 만세시위자들을 수감하기 위해 여러 곳에 신축된 감옥 중에 하나로 1919년 5월에 개소하였다. 1923년에 대전형무소로 이름을 바꾸었고 독립둔동가 등 사상범들을 수감하였다. 1932년 서대문형무소에는 사상범들과 보통범들이 함께 투옥되었다. 도산 안창호 등 독립운동의 지도자들이 투옥되면서 보통범들에게 사상적 영향을 끼친다고 판단한 일제는 “보통 죄수의 사상이 사상범의 사상에 감염되는 사실을 인정하고 사상범을 격리시키어 복역케 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는 형무행정을 하기로 결정”하였다. 그러자 조선총독부는 대전형무소를 사상 수인 전용 감옥으로 지정하고 도산을 비롯해 구연흠, 최익한 등 사상범으로 분류된 독립운동가 32명을 1933년 3월 28일에 대전형무소로 이감 조치하였다. 그 당시 대전 형무소에는 ‘사상범’으로 분류된 복역수가 500여 명 복역 중이었다. 대전형무소는 독립운동가, 사상범 수용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중(重)구금시설을 갖추고 있었다. 감옥 안에 또 하나의 작은 감옥을 만들고, 그 안에 다시 이중벽을 쌓아서 내부로 부터의 탈출을 막을 수 있도록 치밀하게 설계되었다. 대전형무소로 이감한 후 도산은 다소 평안을 되찾는 듯하였다. 모든 편지는 검열받고, 자신의 불편함을 상대에게 알리지 않는 도산의 성품 탓에 감방 생활의 정확한 정황을 알수 없다. 그러나 도산은 대전 형무소에서 가족에게 보낸 편지에 “더욱 평안히 지내오니 나를 위하여 근심하지 마시오. 유숙하는 감방도 매우 정결하고 광선과 공기가 잘 통하며 음식도 비록 간단하나 매우 정결하고 매일 삼시로 더운 햇밥을 주니 위생에 합당하고 구미에도 맞아서 잘 먹습니다. 또는 경성이나 이곳에서 다 아직 괴로운 별 사건을 당함이 없었나이다.”라고 편지하였다. 형무소에서는 사상범이나 정치범들에게 사상전향을 유도하곤 했는데, 도산은 사상미전향자로 분류되었기에 독방에서 생활하였다. 오랜 독방 생활에서 도산의 심신은 점차 쇠약해 지고 위병으로 인해 독거생활을 더 이상 감내하기 곤란한 지경에 이르렀다. 사상범으로 분류된 수인도 형무작업에 동원되었다. 당시 형무작업은 형무소 운영비용의 40%를 충당했다고 한다. 대전형무소에서 도산은 바늘로 옷을 꿰매는 재봉일을 하면서 “기분 상으로도 매우 좋다”고 주변에 얘기하였다. 종이로 노끈을 꼬아 옷칠을 하여 여러 그릇의 수공품을 제작하는 작업을 하였다. 1930년 9월 당시 대전형무소에서 수인생활을 했던 여운형도 그물(網) 뜨는 일과 종이를 꼬아서 치룽(가로 퍼지게 둥긋이 결어 만든 그릇) 만드는 일 두 가지를 했다고 한다. 그러나 오랜 독방 생활로 심신이 쇠약해지자 도산은 “나의 고향은 옻칠의 생산지인 만큼 나를 칠공장에 출역시켜 주면 칠가공기술을 배워 가지고 고향에 돌아가 후진을 지도하면서 여생을 보내고저 하노라.”라는 의사를 표시하자, 칠공장에 출역할 수 있었다. 어떠한 일에 임하여도 격물치지(格物致知), 무실역행(務實力行)의 정신으로 임했던 도산은 형무작업 중에도 정성을 다하여 노끈을 꼬아 화병 등 지승 공예품을 만들었으며 그 위에 옻을 칠하고 전문가처럼 화병을 완성시켰다. 1935년 2월 10일 오후 1시 20분에, 57세 도산은 1년여 형기를 남기고 가출옥하였다. 만기 출소일은 1935년 11월 6일이었다. 일제는 1934년 2월에 ‘은사’로 1년을 감형하여 가출옥하였다. 대전형무소를 출옥할 때 주요한을 비롯해 도산의 가족들이 마중하였다. 대전역 정거장 식당에서 잠깐 휴게한 후 도산 일행은 오후 3시 27분 대전발 열차를 타고 서울로 도착하였고 평양행 기차를 갈아타고 여운형과 조만식을 비롯해 4천 여 군중을 환영을 받으며 평양역에 도착하였다. 도산이 대전형무소에서 복역을 하고 있는 동안에는 김현태 간수장이 음으로 양으로 도산의 신변을 도왔다. 도산이 출옥한 후 김현태 간수는 1936년부터 개성형무소로 전근하였다. 1937년 일제 법무국 행형과에서는 생산한 형무소인사관계철 서류에 「김현태 간수장 행동의 건(CJA0004115 - 0027131799)」이라는 문서가 남아있다. 여운형ㆍ안창호ㆍ조만식, 1935년(대전 감옥에서 출옥 후) 제2차 서대문형무소 투옥 도산은 국외로 나갈 것을 권유받았지만 국내에 남아 동우회와 국외의 흥사단 운동을 연결시켜 민족운동의 힘을 결집시키고자 하였다. 대륙침략을 감행하고 민족주의를 말살하고 황민화로 치달아가고 있던 일제가 절대 용인할 수는 일이었다. 이에 일제는 동우회가 수양단체로 표면 활동을 벌이고 있지만 국외의 독립운동 세력과 연계되어 있는 독립운동 단체임을 증명하기 위한 증거확보에 혈안이 되었다. 일제는 동우회가 국내외의 민족주의자를 총망라하여 광범위한 민족운동을 전개하며, 그 중핵적인 역할을 하고 있다고 판단하고 중일전쟁을 일으키기 한달을 앞두고 사전 예비 구속처럼 민족운동이 증가할 것을 사전에 예방하고자 하였다. 황민화를 강화해가는 시점에서 “동우회는 원래 하나의 수양단체로 간주되어 왔으나, 이번 동단은 북미 로스엔젤레스에 그 본거를 가지고 있는 흥사단과 이명동체로서 표면상 수양단체를 표방하는 교활한 계책으로 당국의 단속를 면하고, 이면에 있어서는 조선의 독립을 목적으로 하여 집요한 운동을 계속하여 왔다”며 흥사단운동이 임시정부나 기타 민족주의 단체와 같이 급진적인 운동보다도 더 위험하다고 보았다. 그리고 국내외를 망라하여 회원이 600명을 넘었다”는 사실도 일제를 위협하는 요인이었다. 1937년 6월 6일 새벽 서울 종로경찰서 고등계는 동우회 간부들의 가택을 수색하고 이광수, 김윤경, 박현환, 신윤국 등 10여 명을 검거하면서 검거선풍이 시작되었다. 도산은 평양 대보산장에서 6월 28일에 체포되어 서울로 압송되고 경기도 경찰부에 유치되었다. 대전감옥에서 가출옥한 지 28개월만에 다시 수감되었다. 1937년부터 1938년에 이르기까지 총 181명(기소 49명, 기소 유예 57명, 기소 중지 75명)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종로경찰서로 송치했다. 1937년 10월 28일 부산에서 도시빈민사업을 하고 있던 송창근 목사가 체포되었고 취조 과정에서 고문이 자행되었다. 7월 25일에 종로경찰서(지금의 신신백화점 자리) 10개의 유치실 중 도산은 제 1호실에 투옥되었다. 도산을 비롯해 50여 명이 투옥되어 취조를 받았지만 서로 만날 수는 없었다. 취조를 받는 동안 송창근목사가 말했듯이 “더럽고 질퍽하고 냄새 나는 지하실 시멘트 바닥은 짐승도 못 살 곳이었고, 꼭대기 작은 들창에서는 눈보라가 쳐들어 왔는데 그렇게 추울 수가 없었다”고 했듯이 종로경찰서의 불결하고 추운 환경으로 말마암아 도산의 건강은 쇠약대로 쇠약해졌다. 치아와 위장, 폐 모두가 좋지 않은 상황에서 3,4일간씩 계속해서 편을 통하지 못하는 고통과 기침소리, 폭발시키는 트림, 또 요란한 방귀 소리, 이모두는 도산의 건강에 적신호가 켜졌음을 대변해준다. 이렇게 건강이 악화되는 가운데 도산은 거의 매일 형사 심문을 당했다. 같이 심문받던 김여제를 보고 도산은 刑事에게“저 사람은 뭣하러 붙들어 왔지? 저 사람은 흥사단에 다니지 아니하는지 벌써 오래 되었는데…”라고 말해주어 풀려날 수 있었다고 한다. 동우회회원들은 가혹한 고문을 받았는데, 종로경찰서에서 신문받을 때, 도산이 고문을 당했는지의 여부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혹독한 고문으로 인해 최윤호와 이기윤 두 분이 옥중에서 사망했고, 김성업은 불구가 되었다. 모진 취조과정이 끝에 공판에 회부된 사람 중에는 “늙은이가 세계 정국이 어떻게 돌아가는 것을 미리 살피지 못해서 우리 일을 이렇게 까지 악화시켰다”고 원망하는 이들도 있었다. 도산과 동우회 회원들은 1937년 11월 1일 오후 5시 반경 수갑을 채워 몇 대의 버스에 분승되어 서대문 형무소로 넘어 갔다. 6월 17일 일경에게 피체되어 종로경찰서 유치장에서 135일간을 조서를 보낸 후, 이 일어난 여름부터 종로경찰서에서 취조받기 시작한 이래 경기도 경찰부로 이송되어 경찰부에서 수사를 끝내고 서대문형무소에 입감하였다. 미결수로 투옥된 도산과 동우회 회원들은 치안법 위반의 정치범으로 분류되어 일체 면회가 두절된 가운데 서대문 형무소 독방에 각각 투옥되었다. 제5동 16호실 독방에 구금되었던 장리욱은 당시를 서대문 형무소에서의 도산을 다음과 같이 기억하였다. “식사란 말 뿐이요. 그것은 이루 형용할 수 없었다. 잡곡밥에 소금뿌린 주먹밥. 그것도 식사라고 삼키고 나면 온종일 배고픈 창자를 부둥켜안고 역경에 몸부림쳐야 하는 것이다. 그래도 당시 일제는 한국의 죄수들을 잘 대우해 준다고 어쩌다 외국인들이 간방 시찰을 오면 모범 간방이라고 허위 선전을 하는 데는 정말 우스워 죽을 지경이었다.” ......“길게 줄을 지어선 우리들은 저마다 저녁 식사(양철반자위에 콩밥 한덩이와 소금 한줌)를 손에 들고 ‘앞으로 갓’하는 간수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30여개의 감방이 연달아 있고 또 으스럼하게 조명된 긴 복도를 한 사람씩 걸어가는 것이다. 그러면 맞은 편 끝에서 기다리고 있는 간수가 이미 지정된 감방문을 열어 제친다. 동지 한 사람의 모습은 사라져 버리고 이어 「철컥」하는 소리와 아울러 그 문은 굳게 닫아 진다. 저마다 제 차례를 기다리고 섰는 우리들은 무거운 침묵 속에서 음울한 심정에 사로잡혀 있을 뿐이었다. 도산의 차례가 왔다. 콩밥 한 덩이를 정중하게 들고 그 앙상한 몸을 움직여 걸었다. 나는 그의 뒷모습이 멀리 복도 저 끝에서 사라져 버릴 때까지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는 내 차례를 기다렸다. 내가 이 세상에서 도산을 마지막으로 본 것이 바로 이 때다.”
서대문 형무소 측에서는 도산의 건강이 악자, 옥사할 우려가 있다고 판단하여 1937년 12월 24일자로 도산을 급히 보석출소시키고 경성제국대학 의학부 부속의원 암정내과에 입원시키고 전문치료를 받게하였다. 도산의 지병인 위장병 및 폐결핵증 병세가 위독해지자 친형 안치호에게 급히 통보하였다. 도산이 임종하기까지 병실을 찾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동우회사건의 수사와 재판이 진행 중이었으며 일제가 위협을 가했기 때문이다. 병실에는 김순원과 이정희(이갑의 딸)가 간호를 맡아 병실을 지켰다. 3월 9일 오후 3시쯤 혼수상태에 빠졌다가 간신히 정신이 들자 주치의 김용필은 도산에게 최후를 준비할 것을 말해주었다. 3월 9일 오후 7시 경에 이선행이 병실을 방문했을 때, 도산은 이미 의식을 잃고 방문자를 알아보지 못했다. 이선행이 사가지고 간 두 송이 장미를 머리맡에 꽂아 놓았을 때, 도산은 무의식 상태에서 “너무 안 와”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사람들과 어울리며 언제나 주변에 사람들로 가득했으나 무의식 속에서도 외로움을 느꼈던 것 같다. 밤 11시쯤. 의식을 잃고 맥박과 호흡이 어렵게 되자 마지막 호흡 곤란을 덜어주고자 산소 흡입기가 장치되었다. 병실에는 안치호, 생질 김순원과 김려순 부녀와 이선행, 장회근, 이응준의 부인 이정희 등이 도산의 임종을 지키며 숨소리조차 죽이며 앉아 있었다. 그리고 송진우와 백관수, 동아일보 기자 채정근이 병실로 들어와 도산의 마지막 길을 지켰다. 1938년 3월 10일 0시 5분, 숨을 거둔 도산의 사인은 폐결핵, 장결핵, 복막염, 늑막염으로 진단되었다. - 글 :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책임연구위원 이명화 - 사진 : 1937년 동우회 사건으로 입소된 도산은 1938년 보석으로 출소된다. 사진은 재소자신분카드의 도산의 모습.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