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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수원길을 가다
하나.
평택사람들에게 특산물을 말하라고 하면 열에 아홉은 '평택배'와 '평택쌀을 듭니다.
하지만 평택쌀과 배가 특산물로 자리 잡은 것은 100년이 채 안 됩니다.
그 이전만 해도 평택지역의 특산물은 대부분 강다리, 숭어, 소금 같은 해산물이었습니다.
얼마 전 평택시사신문 '평택의 토종'이라는 코너에서 평택지역 최초의 배 시배지가
옛 등기소 자리의 농원이었다는 설을 내놓았습니다.
어쩌면 그 말이 맞을지는 모르지만,
대단위 농장이 조성된 곳은 평택시 죽백3동 재빼기 근처의 일본인 농원이라는 주장이 가장 많습니다.
일제 말에는 한국인 지주, 자본가들을 중심으로 배과수원 조성 붐이 일어나 조일농원, 영풍농원, 꽃밭재 농원 같은 과수원이 조성되었습니다.
재빼기 근처에 대단위 농원이 조성되자. 사람들은 그곳을 '이곡' 다시말해서 '뱃골'이라고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해방 후에는 농원의 수가 점점 늘어났습니다.
일본인농원에서 일했던 조선인들이 해방이 되고 농지개혁으로 자기 땅을 갖게 되자 너도 나도 배나무를 심어 과수농업을 시작한 것이지요.
1980년대를 넘어서면서 배과수원은 더욱 많아졌습니다.
당시만 해도 '배'는 고급과일이었고 사과나 감은 값싼 과일에 불과했기 때문입니다.
저도 어릴 적 배를 먹어본 기억이 거의 없습니다.
장날 할머니의 기분이 좋아지시면 떨이로 썩은 사과 한꾸러미를 사오던 것이 고작이었던 시절이지요.
배 과수원이 점점 늘어나자 비전동 끝자락에서 시작해서 죽백동, 용이동, 청룡동, 월곡동 일대는 온통 배밭으로 변했습니다.
이른 봄,
다른 지역에서는 동백꽃 몇 그루, 매와 한 두 그루를 놓고 봄을 예찬할 때
평택람들은 끝없는 배꽃바다에서 밥도 먹고, 차도 마시며 밤 배꽃놀이를 즐겼습니다.
평택의 섶길에서
도일동에서 칠원동을 거쳐 죽백동, 월곡동, 용이동을 지나 소사동에 이르는 새길을 개척했습니다.
새로운 길을 만들어 놓고 명패를 무엇으로 달까 고심했습니다.
장순범 국장은 '과수원길'이라고 부르자고 하였고,
이상권 선생님은 정체성을 살려 '배꽃길', '이곡길' 로 하자는 의견을 내놓았습니다.
의견이 대립 될 때는 중간 위치에 있는 사람의 의견이 중요하지요.
저는 과수원길에 한 표를 던졌습니다.
과수원길은 정체성에서도 크게 어긋나지 않을 뿐더러 동요의 영향으로 정감이 가기 때문입니다.
대기업에서는 기업 마케틍을 위해 수 백 억을 쏟아 부어대는 데 기와 있는 노래의 정감과 이미지를 활용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라는 판단도 작용했습니다.
둘.
이번이 2차 답사여서
우리는 필요한 구간만 정말 답사를 실시하였습니다.
칠원동~도일동 구간은 생략하고 곧바로 칠원2동 마을 입구 삼거리에서 옛 삼남대로를 따라 새물뿌리 마을을 돌아가는 길로 접어들었습니다.
새물뿌리에서 새말로 나온 뒤에는 월곡동에서 칠원동으로 연결되는 길이 마땅치 않다는 말이 있어
월곡동 입구에서 차를 돌려 청룡동으로 들어갔습니다.
청룡동에서 칠원3동 수촌마을로 접어드는데 할아버지 한 분이 빈 리어커를 끌고 지났습니다.
할아버지(72)는 42년 전 용인 이동에서 이사왔다고 했습니다.
42년이면 만만치 않은 세월이어서 그럼 '평택사람 다 되었네요'라고 말했더니 그렇다며 허허 웃었습니다.
수촌을 답사하며 과수원길은 칠원1동에서 새물뿌리를 거쳐 새말, 수촌, 청룡말로 잇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청룡동에서 나오면 월곡2동 입구입니다.
백운산 줄기에 자리 잡은 월곡2동은 깊은 산골짜기 마을입니다.
그래서 한국전쟁 때에도 피난민들이 숨어든 피난곶이였다고 하더군요.
월곡낚시터를 지나 관동마을을 넘어서면 월구리입니다.
관동에는 고려 때쯤(?) 관아가 있었던 흔적이 있고, 월구리는 정월 대보름에 망월놀이를 하던 '망월대(달보는 산)'가 자리 잡았던 마을입니다.
월구리에서 큰길 쪽으로 내려오면 둥구나무가 한 그루 있는데 그곳을 지나 좌회전하면 죽백3동 방아다리 마을로 가는 좁은 옛길이 나옵니다.
길을 따라 작은 거렁뱅이들을 건너면 이곳에서부터 본격적으로 과숴원이 펼쳐집니다.
과수원길은 봄이면 하얀 배꽃잔치가 벌어집니다.
지금은 가을녘
배나무에는 까치밥만 몇 개 달려있고,
수확한 배는 냉동창고 앞에서 선별작업을 거쳐 상자에 담기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호젓하고 아름다운 죽백3동 과수원길을 걸어 경부고속도로 안성휴게소 부근까지 갔다가 다시 우회전하여 꽃밭재와 갈매골을 지났습니다.
꽃밭재는 용이동 신흥마을에서 죽백3동 방앗다리로 넘어 가는 낮은 고개입니다.
이 길을 따라 용이동 신흥, 구룡동 아이들은 죽백초등학교 또는 원곡초등학교를 다녔습니다.
꽃밭재 넘어 갈매골을 지나는 길은 환상적입니다.
저는 지난 봄 용이초등학교에서 강의를 한 뒤 죽백초등학교까지 갈매골 길을 따라 환상적인 봄나들이를 하였습니다.
셋.
용이동의 자연마을은 재개발로 몸살을 앓고 있습니다.
유서 깊은 연주 현씨들의 동족마을 현촌이 최근 사라졌고, 용이초등학교 뒤 신흥마을도 재개발을 코앞에 두고 있습니다.
다행스런 것은 그나마 가장 깊은 역사를 간직한 구룡동 마을만은 주민들의 반대로 개발이 무산된 것입니다.
신흥마을 입구는 용이푸르지오아파트이고, 좌회전하여 조금만 걸으면 삼천리 도시가스가 있는 사거리입니다.
과수원길은 사거리에서 38번 국도를 앞에 두고 막막해집니다.
이곳에서 삼천리 도시가스를 바라보고 길을 건너면 다시 호젓한 2차선 도로가 나타납니다.
이 지역은 행정구역으로 안성시 공도면입니다.
우리가 진사리라고 부르는 마을이지요.
몸은 안성에 있으되 마음만은 평택에 붙어 있는 마을.
진사리는 용이동, 죽백동, 청룡동, 소사동과 함께 조선시대 양성현 구룡동면 지역입니다.
양성현의 사창육고 가운데 4고가 이곳에 있었지요.
길을 따라 조금 갔더니 진사리성당과 리베아트가 나왔습니다.
토요일 정기음악회를 끝낸 리베아트는 굳게 잡겨 있었습니다.
조정묵 대표와 이상권 선생님은 진사리성당에 들어가 허리춤을 풀고 오줌을 눴습니다.
그 틈을 타서 장국장과 저는 마당에서 고구마를 안주삼아 막걸리를 마시고 있는 사람들에게 작업을 걸었습니다.
세상 참 좁은 것이,
어울려 고구마와 막걸리를 얻어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다보니 그들도 우리와 가까운 이웃이라는 사실을 금세 알 수 있었습니다.
함참 수다를 떨다가 리베아트센터를 끼고 내려가 진사리 마을로 내려갔다가 길을 잃고 헤멨습니다.
길은 여러 갈래인데 마땅하지가 않았던 것이지요.
이리저리 헤메다가 진촌마을을 지나 건천리로 넘어오면서 깨달은 것이,
양진중학교 못미처에서 양진초등학교 방면으로 건너가서 맑은샘 사우나에서 우회전하여 진사리방향으로 내려가는 길이 가장 좋겠다는 판단을 했습니다.
우리는 건천교 못미처에서 소사1동으로 연결된 소사천 둑방길로 접어들었습니다.
둑방에는 코스모스와 갈대가 푸른 하늘을 하늘거리고,
둑방 건너 소사벌에서는 트랙터가 추수를 하느라 가쁜 굉음을 울리고 있었습니다.
황금빛 소사벌은 추수가 반쯤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1백 여 년 전까지만 해도 서울을 오가던 나그네들은 소사들을 가로질러 오르내렸습니다.
그러다보니 전쟁의 참화도 자주 겪어서 정유재란의 소사벌 전투, 이인좌의 난, 청일전쟁의 소용돌이 속에 소사동의 민중들은 하늘을 보며 원망해야 했습니다.
춘향이와 이도령의 사랑의 여운이 남아 있는 소사교를 건너 양성유천 방향으로 들판길을 달렸습니다.
들판을 가로질러 양성유천을 지나면 안성천 둑방 평택정수장입니다.
우리의 행로는 그곳까지였지만 들판 곳곳에서 추수하는 트랙터와 트럭이 길을 막습니다.
하지만 들판의 주인은 우리가 아니라 농부들입니다.
서녁 하늘에는 석양이 붉고
우리는 조용히 발걸음을 돌렸습니다. (2012.10.15)
*칠원3동 수촌(물방아거리마을)
2.현촌 입구에서 내려다본 구룡동마을과 용이 푸르지오아파트
3.재개발 중인 현촌마을
4.재개발 예정인 용이동 신흥마을
5.6. 갈매골
*진사리성당과 리베아트센터
*소사벌의 풍경들
첫댓글 동편제마을 다녀오시고 쉼없이 또 답사를 다녀오셨네요. 대단하십니다.
선생님이 고생 많았지요. 답사도 때를 놓치면 어려워져서 ... 좀 무리를 했지요.
대단하십니다
답사에 참여는 안했지만 조목조목 집어 글로 표현해 주시니 평택에 대해 조금이라로 알아가겟습니다
아무 생각 없이 한30십년 넘게 살기만 했으니 무심하기도 했다는반성입니다
해박하시고 상세하시고 아낌없는박수를 보냅니다
열심히 공부해야겠어요 감사!
더욱 분발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