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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황후 생가,기념관
목아박물관을 구경한 후 박물관 가까이에 위치하고 있는 신륵사는 예전에 방문한 적이 있기 때문에 시간 상 그냥 지나쳤답니다. 대신 여주 I.C.로 진입하기 전에 위치해 있는 명성황후생가,기념관을 방문하기로 했습니다.
목아박물관에서 나와 자동차 전용도로로 진입 -> 이호교를 지나 -> 명성황후생가라는 표지판만을 따라 가니 잠시 후 막다른 길에 명성황후 생가가 보였습니다.
명성황후 생가 전방 약 800m 지점부터 도착지점까지 한국적 멋을 살린 커다란 청사초롱 모양의 멋진 가로등이 도로 양편에 세워져 있어 더욱 의미있었습니다.
이곳은 여주군에서 운영하는 곳이라 어른은 입장료가 500원이고 경로우대가 적용되었습니다. 다만 주차료는 1,000원을 지불하셔야 합니다. 명성황후 기념관에 가시면 유모차와 휠체어(무료)를 빌리실 수 있습니다.
사실 역사적 인물들의 생가를 방문하면 조금 실망스러운 때가 많았는데 명성황후 생가,기념관은 기대 이상이었습니다.
가장 먼저 보이는 '명성황후 추모비'도 누구의 작품인지 멋지지요. 태양을 상징하는 듯합니다.
길이 잘 닦여 있는 것이 무엇보다 기뻤답니다.
명성황후 기념관으로 가는 길 오른편으로는 2층 정자를 사이에 두고 여러개의 초가지붕의 쉼터들이 있었습니다.
명성황후 기념관 앞에 세워 진 명성황후 동상은 너무도 훌륭한 작품으로 명성황후의 기품과 당당함을 진하게 느낄 수 있었습니다.
그 앞에 서니 시대의 아픔을 온 몸으로 안고 일본의 칼날에 의해 운명을 달리해야 했던 그 분의 모습이 연상되어 가슴 뭉클하였답니다.
명성황후는 16세에 친척이었던 흥선대원군 부인의 추천을 받아 조선 26대 고종황제의 왕비로 책봉되었다고 합니다.
그 후 대궐안의 수 많은 서적들을 탐독하면서 탁월한 식견을 갖추게 되었고, 마침내 시아버지 대원군의 10년 섭정이 끝나자 고종임금을 내조하면서 본격적인 조선왕조의 근대화 작업에 착수하셨다고 합니다.
1894년 동학농민전쟁을 계기로 일어난 청일전쟁에서 승리한 일본이 경복궁을 점령하면서 개혁을 구실로 우리나라의 왕권과 국권을 침해하기 위해 혈안이 되어있었습니다.
이 때 나라의 근본인 백성이 굳건해야 나라가 편안할 수 있다고 믿었던 명성황후는 뛰어난 인재를 고루 등용했으며, 외교적으로는 외국의 침략 세력끼리 견제하고 싸우게 하는'이이제이(以夷制夷 :외세의 침략은 외세의 힘을 이용해서 막는다)'라는 이론을 펼쳐 뛰어난 외교술을 발휘하셨습니다.
그러나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외교력으로 대 러시아 외교관계가 급진전을 보이자 당황한 일본은 마침내 1895년 10월 8일 (음력 8월 20일) 새벽, 경복궁내 건청궁(옥호루)에서 명성황후를 무참히 시해하는 을미사변을 일으켰습니다. 그 때 명성황후의 나이 45세 였다고 합니다.
소프라노 조수미가 부르는 'If I leave'와 배우 이미연씨의 연기가 빚어내는 그 때의 비극적 장면은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었지요 -.-;;;;;
저 멀리 사진 오른쪽에 보이는 비석이 향토유적 제5호인 구부와 옥계를 갖춘 신도비라고 합니다.
명성황후 생가는 높은 턱이 있어 휠체어가 들어갈 수 없어 저희는 먼저 생가의 왼쪽길로 접어들었답니다.
명성황후 생가, 기념관 곳곳에는 다양한 조각상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작품 하나 하나가 모두 가슴 뭉클하게 하는 민족의 혼이 담겨져 있는 작품들이었답니다.
어느 야외 조각공원 보다도 훌륭한 곳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조선 지도를 내려다 보고 있는 조선인의 자세와 표정도 인상적이었지만 '조선아, 아! 조선아' 라는 제목이 더욱 가슴에 와 닿았답니다.
명성황후 생가 입구는 돌계단으로 되어 있어 휠체어로 어머니를 모시고 들어갈 수 없어 저도 포기할까 하다가 빠른 속도로 휙 둘러보고 나오기로 하였답니다. 사진으로라도 보실 수 있도록....
명성황후 생가 출입문을 들어서면 자그마한 안 마당이 나옵니다.
중앙 저 뒤로 보이는 곳에 명성황후의 초상화가 보이는군요...
안채의 뒤로 돌아 왼쪽으로 가니 우물과 만개한 꽃나무가 있었는데 분홍빛 꽃나무 아래에서 사진을 찍는 분이 많더군요.
우물 앞 쪽으로는 장독대와 곳간인 듯한 작은 건물이 있었는데 잠겨져 있어 내부 구경은 못했답니다.
이 곳[윗 사진의 오른쪽]은 명성황후가 어렸을 때 공부했던 방이 있던 자리로 고종황제가 직접 썼다는 '명성황후탄강구리비'(경기도 유형문화재 제41호)가 있습니다.
그것은 '명성황후가 태어나신 옛마을'이란 뜻이라고 합니다.
한옥의 아름다움을 그대로 느낄 수 있는 아담하면서도 기품있는 가옥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이곳에도 봄이 되면 어김없이 목련이 피어나고 있더군요...
명성황후 생가를 보고 입구쪽으로 향해 왼쪽에 있는 명성황후 기념관을 들렀습니다. 계단 왼쪽으로는 유모차나 휠체어가 오르내릴 수 있도록 길이 닦여져 있었습니다. 특히 이 곳은 화장실까지 원목 창살의 출입문과 고풍스러운 한국적 멋을 살린 인테리어로 지어졌습니다. 세심한 곳까지 심혈을 기울여 만든 기념관임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이 기념관은 지금까지 일본인에 의해 쓰여진 '조선근대사'를 근거로 명성황후에 대해 사치가 심하고 시아버지인 대원군과의 정쟁만을 일삼는 등 부정적인 시각과 명성황후 반대파세력이나 친일파들로 하여금 중상모략토록 함으로써 일제강점기 36년 동안 비하시켜 전해진 명성황후에 대한 왜곡된 역사를 바로 세워 올바른 역사관을 정립하고자 건립하였다고 합니다.
명성황후 기념관을 들어서자마자 대형 유리 안 쪽에 동강 권오창 화백의 고종황제와 명성황후의 대형 초상화가 걸려 있습니다.
그 모습이 매우 기품있고 우아한데 사실 명성황후의 사진의 진위성에 대한 논란은 아직도 계속되고 있기에실제 명성황후의 모습으로 보기는 힘들다고 합니다. 참고로 명성황후의 회고록에는 이렇게 명성황후를 묘사하고 있다합니다.
[왕비의 눈은 날카롭고 냉정한 빛을 띄고 있어서 기밀한 두뇌 회전이 느껴졌다. 왕비의 생활은 투쟁의 연속이었기 때문에 당연한 일일 것이다. 그러나 왕비는 친절했고 또한 상냥했다. 또한 왕비는 가냘픈 몸매를 지녔으며 태도는 우아했다. 늘 아름다운 의상을 입었고 머리는 칠흙과 같았으며 진주가루를 사용해 화장한 얼굴은 아름다우나 창백해 보였다 그리고 조선 여인치고는 작지 않은 키였다.]
명성황후 기념관 전시실에는 명성황후와 고종의 영정 등을 비롯한 관련 자료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특히 작은 인형들로 재현해 놓은 국장으로 거행된 명성황후의 장례식 장면이 매우 인상 깊었습니다.
명성황후를 무참히 시해한 일본군들 수십명이 무장을 한 채 상복을 입고 상여 뒤를 따르고 있는 조선인들 양옆과 뒤를 에워싸고 있는 모습이 너무도 충격적이었습니다.
참고로 기념관 내에서는 사진 촬영이 금지되어 있답니다.
그리고 기념관 왼쪽으로는 관람석 161석 규모의 '문예관'이 있는데 이곳에서는 명성황후와 관련된 영상자료의 상영 및 공연등 문화시설로 이용되고 있다고 합니다.
기념관에서 나오자 마자 오른쪽으로 보이는 '깃발' 돌조각
연못 위에 세워져 있는 조각상이 멋있죠? 오른쪽은 고기를 낚는 멋진 포즈의 어부 조각상인데 크게 찍지 못해 아쉽네요.
사진 왼쪽으로 보이는 한복 조형물이 너무도 이 곳 분위기와 잘 어울리는 듯 합니다.
명성황후 생가,기념관 가시는 길 :
경부고속도로 신갈 I.C. / 중부고속도로 호법 I.C. / 중부내륙고속도로 여주 Jct.에서 영동고속도로로 진입 -> 강릉방면 여주 I.C.에서 나와 -> 여주방향으로 우회전 -> 150m 지점에서 다시 우회전 -. 800m 직진
관람시간 : 하절기 - 3~10월 / 09:00-18:00 동절기 - 11~2월 / 09:00-17:00 휴관일 - 1월 1일, 설날, 추석
명성황후 추모제 : 매년 10월 8일 (양력)
문의처 : 031) 887-357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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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늘수고 하시는구먼 건강행복^^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