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천 문창갑)
살색
강영환
유년이 그린 그림 속에는 살색이 산다 나무색이 놀고 흙색이 숨 쉰다 숨 쉬는 색들이 어울려 풍경을 만들고 어린 교실을 채운다 그때 나는 하늘색으로 새를 날려 보내기도 했다
지금 나는 몸에서 살색을 떼 내 버리고 광장으로 걸어 간다 하늘색을 버려서 새는 날아오지 않는다 나무색이 사라져 숲이 자라지 못한다 흙색도 떠나서 집이 언덕이 무너진다
복사꽃 여린 미소를 담고 내게 오던 살색이 어느 틈에 하얗고 까맣고 노래진다 그것들을 섞어 나는 다시 하늘색을 만든다 꽃을 켜 든 풀색이 거리 위에서 하늘색에게 손을 흔들어 보인다
―《시와소금》, 2025년 가을호
■ 시 읽기
멋진 수사(修辭)나 화려한 기교가 없어도 독자에게 큰 감동을 주는 시가 있다. 시의 숨결에서 뿜어져 나오는 진정성 때문이다. 한국 문단의 큰 시인이 이번에 발표한 「살색」이 그런 시이다. 주목되는 점은 「살색」엔 시 읽기를 방해하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언어들이 없다는 것이다. 지나친 수사(修辭)의 폭식(暴食)으로 배불뚝이가 되어버린 우스꽝스러운 모습도 없다. 머리를 통한 배려가 아닌 가슴을 통한 그런 배려 때문에 더 편안하게 소통이 이루어져 좋았다. 이 시의 핵심 언어는 살색이다. 자못 궁금했다. 시인의 유년이 그린 그림 속에도 산다는 색, ‘복사꽃 여린 미소를 담고 내게 오던’ 살색은 어떤 상징성을 띠는 것인지. 내게 살색은 훼손되거나 변질되지 않은, 순수한 사물의 원형을 말하는 것쯤으로 읽혔다. 이런 관점의 돋보기로 시인이 그려 놓은 사물들의 색을 다시 살피니 한층 명확하게 보였다. 같은 정서적 등가물인 노는 나무색은 나무의 살색이고, 숨 쉬는 흙색은 흙의 살색이었다. 또 보였다. 어린 시절의 시인이 새를 날려 보내기도 했던 하늘색은 하늘의 살색이었다. 현재의 시인이 등장하는 둘째 연엔 총체적 난국이 펼쳐져 있다. 안타깝게도 시적 자아가 사는 주변 환경은 매우 황폐하고 삭막하다. 어울려 풍경을 만들고, 어린 교실을 가득 채웠던 숨 쉬는 색들은 이제 존재하지 않는다. 시인은 진술한다. ‘지금 나는 몸에서 살색을 떼 내 버리고’ 눈곱만큼도 살색이 없는 살벌한 삶의 현장인 광장으로 걸어가는 중이라고. 하늘색을 버리면 새가 날아오지 않는 걸 모를 리 없을 텐데 시인은 왜 하늘색을 버렸을까? 버린 게 아니라 빼앗긴 걸까? 광장으로 가는 길 주위를 둘러보면 죄다 절망을 극대화하는 암울한 정경뿐이다. 나무색이 사라져 숲은 자라지 못하고, 흙색이 떠나서 집과 언덕은 속절없이 무너지고 있다. 더구나 시인은 하늘색도 버려서 새도 날아오지 않는다. 간절한 소망을 하늘에 전해줄 전령사마저 날아오지 않으니 이제 이냥 그대로 파멸? 그럼 그렇지, 시인은 어떠한 경우라도 절망하지 않는다. 무릎 꿇지 않는다. 보란 듯이 절망의 소용돌이를 빠져나와 ‘어느 틈에 하얗고 까맣고 노래진’ 변질된 살색들을 섞어 기어이 다시 만든다. 유년의 하늘색을! 저 거리 위를 보라, 시인의 변주인 꽃을 켜 든 풀색이 복원된 하늘색에게 손을 흔들고 있다. 나 함부로 시들어버리는 좀생이가 아니라고, 이렇게 내 생의 결과물인 꽃도 피워낸 풀색이라고 소리치면서. 이래 봬도 광장에서의 어떤 싸움에도 지지 않고 다 이겨낸 풀색이라고 소리치면서. 내 몸의 살색은 지금도 여전히 어린 시절의 교실에서 뛰놀던 때의 살색이라고 소리치면서. (추천 문창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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