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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때당시 지원팀은 지금처럼 설영팀과 산행(도보)지원이 크게 나누어져 있지 않았습니다. |
아마 그때 받은 교사 교육이 지금까지도 오지체험이나 기타 여하 많은 캠프를 참여하고 진행하는데 있어
신념이나 이념같은 것으로 삼고 있는 중입니다. 저렇게 어렸을때는 그 신념에 따라 행동하긴 했지만 그것이 정확히 뭘 의미하는지
잘 몰랐던 경우도 있었지만 이제는 시간이 흘러 캠프도 여러번 겪으면서 몸으로 느껴지더군요
나중에 여러분들이 조금 더 자라서 교사가 되고 또는 갈매기가 되어서 이 이야기가 궁금하다면 물어보세요 ㅋ
그럼 정신교육 삼아 가르쳐 드리도록 하죠 ㅋ
고등학교 1학년 첫 교사를 시작하고 나서 진행팀의 지원을 하던 1999년도에 |
1999년도는 정말 잊을수 없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바로 태풍과 정면으로 맞닥뜨리게 된 것이죠
물론 중학교 2학년때 태풍과 한번 만난적은 있으나 밤 늦은시간 자는도중에 지나가 버렸고 이번에는 사정이 좀 틀렸습니다.
교사회의를 마치고 다음날 태풍이 올 것이란 예보를 들은 후 새벽부터 비와 심상치 않은 바람이 불기 시작하더군요
그래서 아이들은 모두 초등학교 건물로 대피를 시켰습니다.
그리고 지원팀은 운동장에 쳐 놓은 텐트가 아까워서 그냥 그곳에서 잠을.. ㅋ
덕분에 1인당 한개의 텐트를 차지하고 잘 수 있었죠, 그러나 자다가 축축함에 잠에서 깨보니
제 몸은 이미 물위에서 자고 있었고 ㅋ 바깥으로 나가보니 초등학교 운동장이 쏟아붓는 비를 못견디고 물바다가 되어있더군요
온 교사들이 전부 달려들어서 텐트를 걷으려고 땅에 박아놓은 팩을 뽑으면 15킬로가 넘는 텐트가 데굴데굴 굴러다니기 일쑤였죠
저희는 그걸 잡으려고 쫓아다니고 -_- 무튼 가까스로 숙영지를 정리하고 나오니 다음 숙영지인 목포 해양대학교 체육관이
문이 전부 박살나서 우리를 재워줄수 없다는 통보를 해왔습니다.
그때 속으로 '아 처음으로 중간에 돌아가게 되나보다.'라고 생각했습니다만 결국 다음 행선지를 백방으로 섭외한 끝에
겨우 모 대학교 체육관을 잡아 들어간게 기억이 나네요 그 곳까지 가는것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중간중간 나무는 부러져 대고 주유소 간판도 바람에 떨어져서 날라다니고 차는 내리려고 문을 열면 문짝이 꺾여져 버리는 상황..
무튼 살아나온것만도 다행인 그때였네요 ㅋ
채석강이라는 곳에서 부장님과 한컷, 저때가 2000년, 그러니까 제가 고등학교 2학년때 였네요 |
고등학교 2학년인 2000년에는 기러기 구대의 구대장님의 부관을 맡았습니다.
뭐 그래도 지원은 지원이죠, 다만 설영에서는 조금 더 자유로워 졌다고나 할수 있겠죠
뭐 개인적인 소견입니다만 남학생들은 특히 교사가 되면서 부터는 산만을 고집하기 보다는
본인의 후배들을 위한 설영이나 물품관리등도 경험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교사가 되면서 부터는 산을 꼭 올라가서 뭘 하는것만이 캠프를 참가한 목표달성을 하는건 아니니까요
생각보다 2000년 여름은 재미도 있었고 보람도 있었던 해였습니다.
그때당시 기러기조 였던 중학생들(현재는 나이가 벌써 스물넷이나 된 아이들)과도 지금까지도 연락을 하면서 지낼 정도니까요
역시 광화문 도보를 하기전 모여있는 기러기 구대 교사분들
기러기 구대의 여자조 아이들과 함께, 지금도 저중에서 몇몇 꼬마들 |
2001년도에는 저도 수능을 맞이하게 되는 고3 수험생이 되었습니다. 하지만 국토순례는 아직 끝나지 않았죠
정확하게 10개년 계획의 마지막 구간인 제10구간만을 남겨놓고 있었습니다.
수험생과 캠프의 사이에서 엄청나게 많은 고민을 했죠, 그러다가 부모님의 허락을 받고
방학에 학교에서 하는 자율학습을 모두 참가한 후, 자율학습이 끝나면 가도 좋다는 허락을 받아내게 되었습니다.
참고로 캠프 일정상 자율학습이 끝나는 날에는 3일차 일정이 진행중이었죠, 그동안 동해안 남해안을 거쳐서
서해안의 가장 북쪽 코스를 돌는 일정이었으므로 장소도 강화도로 매우 가까웠습니다.
그래서 자율학습이 끝나는 날 저는 무작정 집에 뛰어들어가서 옷을 갈아입고 짐을 챙겨서 강화도로 가서
국토순례단과 합류하게 됩니다. 그렇게 마지막 해 국토순례까지 모두 끝마치니 이제 뭘 하나 싶더군요
2001년 국토순례 마지막날, 캠프파이어를 위한 무대를 설치하고 나서, 가장 오른쪽 |
물론 이제 뭘 하느냐 보다는 일단 대학입시가 중요했으므로 2002년도까지 공부를 하게 됩니다.
(사실 대학을 한번 떨어져서 재수를 했어요, 여러분들도 아마 고등학교 올라가시면
대학가는것이 마냥 쉽지만은 않다는걸 절감하실겁니다. ㅎㅎ)
그때당시 부장님은 강서청소년회관에서 오지캠프를 진행하고 계셨죠, 덕유산으로, 동강으로 오지캠프를 다니셨고
그때부터 원용택, 이종원, 서민재, 강석곤 등의 이름들이 슬슬 캠프 전면에 등장하게 됩니다.
저도 대학생이 된 후, 국토순례 캠프를 마무리 하고 난 이후부터는 부장님을 따라 오지캠프로 오게 되었고
그 시작이 5기 낙동강 때였습니다.
2003년 여름, '낙동강 발원지를 찾아서'라는 주제를 가지고 갔던 오지캠프는
이아이도 마찬가지 -_-;; 다리 초입에서 이미 다리가 굳어버렸.. |
2003년 낙동강 때는 조만간 제가 클럽에 올리겠지만 KBS에 방송이 되기도 했었죠
'제3지대'라는 현장르포 프로그램에, 그래서 계속 카메라맨 아저씨와 PD분이 함께 다니셨던걸로 기억을 합니다.
5기때는 첫날 밤부터 비가 쏟아져 내리기 시작했죠, 덕분에 학생들은 교실 안으로 대피해야 했고
지원팀들은 삽을 들고 배수로를 파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녔죠, 그 덕분에 다음날 개천에 물이 불기 시작해서
저 위에 있는 사진과 같은 스토리가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때당시 산을 넘어 저기까지 가는데 인솔을 한 덕분에
신발벗고 물에 들어가게 되었구요.. 저 물에 잠긴 다리의 비하인드 스토리가 궁금하신 분은 살짝 저에게만 ㅋㅋ
그때 그렇게 4일차까지 모든 일정을 마치고 해병대 면접을 보기 위해 먼저 서울로 상경했었죠
물론 합격을 했고 2년이 지나고 제가 다시 오지캠프를 찾은건 11기 2차 겨울 캠프였죠
사실 국토순례 다니면서 여름에만 오던것이 습관화 되어있고 겨울에는 추운게 너무 싫어서 잘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어찌어찌 하다보니 제가 이미 캠프에 와있더군요 -_-;;
11기 백두대간부터 제가 하고 있는 역할은 거의 비슷비슷 하네요
12기 백두대간 덕산재에서, 덕산재에는 왠 도인같은 분이 살고계셨었죠 |
11기 백두대간에 컴백하고 나서 지금에 이르기까지 총 6번의 백두대간 캠프를 거쳐왔네요
많은 기억들이 머릿속을 주마등처럼 스치고 지나갑니다. 화장실이 없어 쩔쩔 맸던 덕산재나
여러분들이 집어넣은 휴지로 막히고 그 위에다가 ♡을 또 싸놔서 아주 진상이었던 작년여름 청화산 농원 화장실이나
또는 100명분의 파란봉다리를 나르고 또 날라야만 했던 이번 연풍 별당이나
제가 해야 했던 일때문에 또다시 혼자 버스를 타고 와야만 했던 13기 겨울 김천의 한 목장이나
참 지나온 시간과 함께 했던 캠프만큼이나 여러가지 기억들이 나네요,
한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밑에 있어 여러분들과 함께 할 시간이 좀 적었다는거??
13기때 한 목장에서 텐트를 치고 잔 여러분들을 깨우고 아침 식사를 위해 버너와 코펠을 조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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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원팀을 하게 되면서 가장 먼저 생각하게 되는것은 여러분들이 '오늘은 어디서 어떻게 자야하나'
'밥은 뭘 어떻게 해 먹어야 하나'라는 생각을 가지지 않고 산에 올라가 목표를 이루고 내려올수 있도록 하는것인것 같네요
앞에서도 말했지만 참가자에서 갈매기로(참가자에서 교사가 아닌 갈매기를 중간에 넣은 것은
저 역시도 고등학교 때부터 책임감을 느끼고 어쩌면 100%는 아닐지 몰라도 교사와 같은 마인드를 가지기 시작한 것이
그 시절 부터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갈매기에서 교사로 올라가게 되면서 자신에게 조금씩 책임감이 부여되고
그 책임감이 부여되는것은 자신이 이제껏 해야 했던 일들이 그저 산에 올라가고 매년 그 구간을 정복하기만 하면 되는것에서
조금씩 자신에게 다른 일들이 주어지는것을 보면서 느낄 수 있을 것입니다.
그렇게 다른 일들이 부여되면서 내 자신이 캠프에서 한단계 성장했다는 것을 느끼게 된다면
단순히 캠프의 목표가 '구간의 정복'이 아닌 좀 더 넓은 숲이 보일것입니다.
새재수옥펜션에서 문경새재 3관문까지 오르는 그 짧은 길에서도 |
'왜 지금까지도 캠프에 계속 매년 그렇게 오십니까?'라고 물어보신다면
국토순례 뿐만이 아니라 이 캠프를 참가하는 여러분 역시도 저의 후배입니다.
후배들이 5박 6일동안 제가 어렸을때 느꼈던 그 느낌들, 또는 그 생각들을 해볼수 있도록
그리고 그것들이 좋은 영향을 줄수 있도록 조그마한 역할을 해서 그 후배들이 또 그 밑의 후배들을 위해
그 밑의 후배들은 또 그 밑의 후배들을 위해, 자신이 가지고 있는 경험과 선배들로 부터 전수받은 경험을
지속적으로 물려주고 전수해줄 수 있게 하는데 보탬이 되기 위해서 라고 생각합니다.
여기서 17년의 수기는 잠시 덮어 둡니다. 아직까지는 끝난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기때문이죠
지금 현재 대학생인 제가 언제까지 계속 여러분들과 함께 할 수 있을지는 정확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중요한건 언제가 마지막이 되던지간에 항상 마음가짐은 처음과 똑같아서
여러분들이 텐트나 깔판이나 매년 매고 오는 그 무거운 짐들을 가지고 산에 올라가게 하지는 않을거란 겁니다.
첫댓글 5기때 맨발로 물길을 파시던 거랑 도보할때 독수리 오형제 노래 부르시던거는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ㅋㅋㅋ 슈파~ 슈파슈파슈파~ ㅋㅋㅋㅋ
지구를 지켜라~독수리 오형제..................저로써는 부러운 추억일듯 ㅋㅋ
핡기억나요 2003년ㅋㅋㅋㅋㅋㅋ대장님이 제가방을 들쳐보시고는 야너이걸다어떻게들고갈래 하시는 말씀에 제가 몸을비꼬며 글쎄요......라고대답하던 그 모습이 방송에 그대로 나갔지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하아아아아아....^*^
나는... 추적놀이 할때... "저기 길 있는데요" 하면서 가리키는 장면 하나랑.... (나레이션 : 그때 한 중학생이 길을 발견했다) 물이 불어서 기차길 위로 건너가기 전에 "못 건너. 절대 못 건너" 한마디 한거..... 나왔음 ㅋ
그리고 저 PD님 샌들신고오셔서 따라다니는내내 엄청 고생하셨던 기억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엄청난 경험이시군요 ㅋㅋ
저기 중간에 "저요" 한애가 나라는......ㅠㅠ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난기억하고있음^*^
..........어쨰서 그런것만....ㅠㅠ
1기때 걷다가 우리조에서 소똥밟은애가 너였지않나?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커험........그,그건 기억 안나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