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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찾는 신비여행(1) 은영선 (youngsuneun@naver.com)
*행복은 무엇일까?
사람들은 저마다 다른 삶의 무게를 가지고 태어나지만 힘든 것은 같다고 한다. 삶의 문턱에 죽음이 찾아오면 회한(悔恨)의 무게는 부자나 가난한 자나 똑같다고 한다. 또한 세월에 쫒기고 안쫒기고는 지위의 높고 낮음에 상관이 없다고도 한다. 그러고 보면 태어나면서 운명 지워진 삶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삶에도 어렵고 힘든 무게가 찾아 오는 건 같은가 보다.
그렇다면 힘겨운 삶을 편하게 보내는 방법은 없더라도 힘든 무게를 이길 수 있는 무엇을 키울 수는 있겠다. 힘든 삶의 무게를 잠시 받혀 주는 무엇을 우리는 행복이라 부른다.
세상의 삶 속에 흩어져 있는 행복이란 어떤 모습일까? 이런 의문은 연령, 학력에 상관없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삶을 살면서 한번쯤은 갖게 되는 질문이다. 그런데 유명한 철학자, 심리학자, 인류역사학자들이 행복이라 부르는 무엇을 찾기 위해 노력했어도 지구상 어디에도 행복의 실체는 없었다. 그저 어떤 사례를 들어가며 행복이 이런 것 일거라 추축할 뿐 똑 부러지게 내놓지 못했다.
행복의 형태, 행복의 색, 행복의 소리가 세계적으로 동일하게 정해졌다면 삶이 좀더 평온해졌을까? 실체를 찾기 어렵고 무엇인지도 모르는 존재이기에 모든 이가 가질 수 있는 '행복'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가난, 짧은 지식, 불편한 신체를 가리 않고 누구에게나 다가가고 잡을 수 있는 행복의 존재는 진정 무엇인가! 죽음을 앞둔 이들은 흔히 '삶이란 여정 속에서 시간이 가고 세월이 흐르는 것을 느낄 수 있는 마음'이 행복이라고 한다. 젊음에 묻혀 삶이 지겨운 이들에게는 어려운 말이지만 병마에 시달리며 죽음을 맞이하는 분들에겐 실감나는 행복의 의미이다. 평범한 이들에게도 밝은 햇살의 꽃봉오리나 붉은 단풍의 변화하는 계절로도 새로운 기대가 스미는걸 보면 세월이란 삶에서 중요한 요인이기도 한다. 그래도 세월의 흐름, 계절의 변화, 새로운 기대만으론 행복을 말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복된 좋은 운수, 心身의 욕구가 충족되어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상태"
국어사전에는 "행복"에 대해 이렇게 적어놓았다. 정말 국어사전에서처럼 심신의 욕구가 충족되면 행복해지는 것일까? 그럴지도 모르겠다. 원하는 직업, 일류학벌, 좀더 나은 외모, 넓은 주택, 이상형과의 사랑...... 살면서 만나게 되는 탐나는 것들을 모두 얻을 수 있다면 우리의 인생살이가 무슨 불만이 있겠는가? 그렇다면 심신의 욕구를 충족하는데 가장 기본이 되는 돈과 권력이 갖춰지면 행복해 질 수 있을까? 당연이 '그렇지 않다' 라는 것은 이것저것 설명없이 과거의 역사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또한 삶에서 풍요보다는 행복이란 의미를 잃었을 때 더 방황하게 되는걸 보더라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혹시 재물, 권력, 예술, 여유가 행복은 아니더라도 행복에게 가까이 접근할 수 있는 통로는 아닐까? 진정 물질이 행복은 아니더라도 행복과 가까운 그 무엇이라면 인생을 설계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세속적이지만 이런 의문을 가지고 행복과 가까워 질 수 있는 재, 권, 예술, 여유를 찾아 신비여행을떠나보기로 한다. 세월, 계절, 기대, 젊음, 물질 속에 끼어 있을지 모르는 행복을 찾아 '영혼과 자연'을 추구하는 이가 조금은 세속적인 신비여행을 안내해본다.
*자연이 주는 신비여행을 떠나며
나무나 풀들이 햇볕을 많이 받기 위해 치열하게 경쟁하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식물을 비록하여 다른 형태로 존재하는 바위, 흙, 강, 바다가 자연으로 묶여지면 길지를 만들기 위해 함께 협력하는 것을 사람들은 알고 있을까? 그리고 나무, 바위, 흙, 강, 바다가 생명체를 키워 내며 행복을 느낀다면 사람들은 믿지 않을 것이다.
생명체를 키워내는 자연의 행복은 거부하더라도 별 생각없이 주말마다 찾는 산하(山河)가 생활의 활력을 준다는 것은 인정할 것이다. 여러 조사에서 등산, 숲, 바다바람이 장수의 중요한 요인으로 밝혀졌듯 자연은 우리에게 정신적, 육체적 건강을 안겨 준다. 그런데 건강 외에 자연이 우리에게
부족한 부분들을 채워 준다면 어떨까? 가령 부족했던 재운(財運), 관운(官運), 부부금실 등이 등산, 나무심기, 무심코 만진 돌에서 충족된다면 믿겠는가? 화성에서 물의 흔적을 밝히는 과학적세상에 놀부 제비다리 부러뜨리는 논리라며 실소를 터트릴 수 있겠다.
1970년대엔 과학이 발전하는 2000년쯤에는 영국의 네시호 괴물, 루마니아의 드라큐라 같은 황당한 일은 샅샅이 밝혀져서 이야기거리가 되지 않으리라 확신했다. 그런데 괴물이 없다는 과학조사단의 발표에도 네시호에는 수만은 인파가 몰리고 드라큐라는 아직도 영화의 단골 주제가 되고있다. 흙집, 칡 감을 재료로 한 염색, 숯처럼 비과학적이라며 몰아냈던 전통들이 원적외선 황토방,
자연염색, 숯가마라는 건강품으로 변신하여 인기를 끌고 있다. 바위에 앉아 도를 닦는다는 호랑이 담배 피던 시절의 이야기는 명상과 선이라 불리며 외국인들까지 추종자가 생겨나고 있다.
과학이라 믿었던 사료, 제초제, 물고기양식 등이 먹을게 넘치는 2000년대의 우리에게 광우병, 중금속 물고기, 유전자 변형으로 돌변하여 공포가 될 줄 누가 알았던가?
정확한 분석과 실험의 결과인 과학이 현대를 지배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인간관계, 애정,노력의 대가를 비롯하여 인생에서 벌어지는 수많은 행복과 불행이 과학으로만 진행되진 않는다. 조금은 유치하고 이론과는 동떨어지게 엮어지면서도 세월은 대부분 설명 가능한 방향으로 흘러간
다. 세월을 과학의 바탕에 놓는 것은 옳지만 가끔은 생명체를 키워 내는 자연의 행복에 선택을 맡겨 보는 것은 어떨까?
서구에서는 '자연의 기운과 인간생활의 조화'로 여기며 과학적으로 분석하여 실생활에 많이 응용되고 있다. 동양에서는 부족한 기(氣)를 보충해주는 풍수지리로 알려져 있는데 지나친 욕심의 도구로 변질된 것이 아쉬운 부분이다. 자연이 길흉을 좌우하는 우상이 되는 것은 금해야 하지만 과학의 틀에 자연을 조금만 끼워 놓으면 자신도 모르는 휴식공간이 생겨난다. 과학에 끼워진 휴식공간에서 잠시라도 눈을 돌려보면 자연과 국토의 신비를 부르짖는 지구촌 곳곳을 발견하게 된다.
일본, 대만, 거만한 중국까지 전설의 고장, 소원을 비는 장소, 기가 충족되는 지역이라 부르며 포장해간다. 다행이 우리도 임꺽정의 고향, 뽕할머니축제, 지기(地氣)가 넘치는 지역 등을 알리며 군수, 도지사까지 나서고 있다. 과학, 자연, 신비주의, 전설이 공존하는 요즘 재운, 관운, 부부금실 등을 채우러 자연으로 떠난다고 누가 웃을 수 있겠는가? 빠듯한 봉급으로 내일을 충전하는 분들, 대박을 쫒는 분들까지 주말마다 자연으로 떠나는 신비여행에 참여해보자. 신비여행을 다니며 자연이 키우는 행복을 담아와 가까운 분들에게 나누어 주다면 얼마나 신나는 일이겠는가?
행복을 찾는 신비여행(2)
1) 마니산
"태백산은 멀어서 자주 못 가면 강화도 마니산에라도 올라 봐요. 나약한 몸에는 관운이 힘이 되지"
열악한 작업실에서 건강을 잃어 가는 나에게 역학적 친구인 이선생님은 안스러움을 담곤 했다.
이선생님의 강요로 찾은 마니산은 반지하 음습한 공간에서 그림을 그리던 나에게 산바람과 바다 내음을 동시에 주고 입맛 당기는 음식도 즐길 수 있는 휴식처가 되었다.
예로부터 마니산은 소백산, 태백산, 백두산 등과 더불어 관운을 얻을 수 있는 대표적인 산이다. 일반인에게 관운은 공무원시험의 합격, 관직등용, 좋은 남편을 얻는 운 정도로 인식할 것이다. 그러나 관운은 직장, 도덕과 재능을 발휘하는 명성, 어질고 총명한 자식, 자상하고 능력있는 남편을 얻는 힘을 말한다. 반면 과도한 관운에는 소송, 피살, 감옥, 도박, 밀부(密夫)의 의미가 숨어 있어 욕심을 절제하지 못하는 이들을 언제라도 파멸로 유혹하고 있다. 현실에서도 무리한 세력확장, 끝없는 권력욕으로 말년을 소송과 구속으로 보내는 분들을 신문과 TV를 통해 뻔질나게 볼 수 있다.
"감옥은 잠시고 뭔 특사로 금방 풀려 날 걸. 말년에 소송당하고 감옥가도 좋으니 젊은 시절 권력
에 앉아 검은 돈을 주물러 봤으면..."
검찰을 드나드는 분들의 근황이 듣기 싫으면서도 심장 한구석엔 이런 생각이 꾸물거리는 것은 왜 일까? 예로부터 관직을 가문의 영광으로 삼아 태어날 자손의 출생일에도 관운이 들어있기를 기원했던 조상의 집념이 어쩌면 우리의 유전자 곳곳에 박혀있는 것은 아닐런지. 하긴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미국에서조차 작은 직책의 공무원시험 합격으로도 파티를 여는 걸 보면 우리의 의식을 탓할 것은 없다. 그럼 박봉을 저축하며 성실하게 살아가는 나를 비롯한 대부분의 시민들이여! 이번 주말에 독한 마음을 먹고 관운을 잡으러 마니산을 찾아보자.
인천시 강화군에 위치한 마니산은 수도권과 가까워 산악인이 아니라도 주말이면 많은 연인과 가족들의 발길이 이어진다. 마니산의 주요 산행코스는 북쪽인 상방리와 남쪽의 정수사와 함허동천이다. 468m의 낮은 높이지만 등산로를 포함한 주능선들이 바위로 이루어져 험난한 등반을 맛보려는 이들에겐 즐거움을 안겨 준다. 보통 참성단이 가까운 북쪽 상방리에서 산행을 시작하는 것이 일반적인데 이쪽이 국민관광지역으로 정비되어 각종 시설이 많기 때문이다. 끝없어 보이는 계단로를 거쳐야 하는 상방리 산행과 달리 정수사 산행과 함허동천 산행은 가파른 바위로 이루어져 초보자나 여자들에게는 고단한 등산이 될 수 도있다. 손까지 써가며 기어 올라간 정상은 하늘과 바
다가 하나로 이루어진 자연의 장엄함에 힘겨운 산행은 일순간에 씻겨져 나간다. 아름다움을 넘어선 황홀한 일출과 일몰까지 감상할 기회를 가진다면 잠시 신의 영역을 침범한 착각마저 들게 된다
이렇듯 마니산의 정상에 서면 초보자가 보기에도 단군께서 하늘에 제천의식을 봉행한 참성단을 마니산에 마련하신 것이 이해가 된다. 마니산은 단군께서 제를 지내신 것을 시작으로 삼국시대, 조선시대까지 계속되어 왔다는 기록이 남아있고 지금은 개천절과 전국체전에 봉화를 채화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이처럼 마니산은 예로부터 내려오는 신성한 행사가 증명하듯 하늘의 기와 바다의 기가 화산처럼 뿜어져 나오는 길지이다.
과거의 제왕들이 자신의 장수가 아닌 백성을 풍요롭고 편안하게 통치할 수 있도록 기원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마니산은 나라의 관운과 재운을 움직이는 힘을 가지고 있다. 국운을 위한 제왕들의 기도처였던 마니산은 현대에 와서도 많은 이들이 기를 얻기 위해 찾는데 높은 관직, 고시합격을 위한 곳은 아니다. 마니산은 직장에서의 능력발휘, 원만한 대인관계 즉 자신이 처해 있는 위치에서 좀더 유능하고 능력있는 위치로 인정받는 기운을 얻을 수는 곳이다.
2) 서울법원종합청사(서울가정법원)
겨울잠에서 깨어난 동물들이 앞다투어 짝을 찾는 걸 보면 봄은 사랑의 계절이다. 겨울동안 움츠렸던 사람들도 화사한 옷차림과 함께 꽃 길을 산책할 연인을 물색한다. 오랜 만남을 가졌던 연인들은 계절의 여왕 봄에 결혼하려는 계획을 세운다. 꽃과 새들, 사람들까지 사랑을 노래하는 봄에 조금만 주변을 돌아보면 이별과 이혼의 아픔을 겪는 분들을 접할 수 있다. 하긴 5쌍의 부부 중 1쌍은 이혼한다는 극한 말까지 흘러 나오는 요즘이다. 그렇다고 결혼을 앞둔 딸에게 별거의 괘가 나오면 떠돌이 총각을 보쌈하여 극비혼례를 올렸다는 조선시대의 악습을 따를 수도 없는 노릇이다.
다만 누구나 피해갈 수 없는 미래의 이혼을 조금이라도 막을 방법이 있다면 작은 위안이 되지 안을까? "초혼과 더불어 재혼도 당당해진 요즘, 결혼에 대해 그렇게까지 신중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런 중얼거림이 이곳저곳에서 들릴 수 있지만 사랑과 결혼에 들이는 정성이라면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겠다. "심심풀이로 찾아가도 우리부부의 언쟁이 액땜으로 되고 행복한 결혼의 기(氣)를 받는 곳이 있단 말입니까" "아니지요.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혼유지인데 심심풀이로 되겠습니까 서로 다른 남녀가 함께 사는 결혼이니 집중해서 기를 받아도 잘 된다는 보장이 없지요"
보통 길지는 물과 산의 기운, 바람의 세기, 일조량으로 결정되는데 서울법원종합청사는 풍수지리에 입각하여 길지(吉地)에 해당된다. 서초구에 위치한 서울법원종합청사자가 길지인 것을 설명하자면 조선시대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헌인능, 태봉, 효령대군묘로 알 수 있듯이 조선시대 서초구에는 왕실과 사대부의 묘지가 많았다. 서초구는 낮은 산과 한강의 조화로 길지의 조건을 갖추었고 무엇보다 한양과 가까워 묘를 쓰는데 적지였다. 그러나 청계천과 중랑천에서 토해내는(뚝섬지점) 강력한 실운(失運)의 역풍으로 터가 드센 것이 결점이 있었다. 다행히 드센 터는 방풍림으로 융화시킬 수 있어 잠원동에 뽕나무단지를 조성하여 결점을 보완하였다. 조성된 뽕나무단지엔
누에를 키워 왕실에 비단을 공급하는 효과까지 거둘 수 있었다. 잠원동의 뽕나무단지는 현대에 와서는 주거단지로 변모하여 청계천과 중랑천의 기운은 서초구에 직접적으로 들이닥치게 된다. 그런 지역은 주거지로는 부적절하지만 소송이라는 복잡한 절차를 다루는 법원이 들어서서 나쁜 기운을 융화시켜 길지가 되었다는 것이 풍수의 정설이다. 또한 반포동의 고속터미널도 청계천과 중랑천의 나쁜 기운을 걸러 주고 있다. 풍수이론을 접더라도 법원은 법에 관계되는 최고의 인재들이 모이는 곳이기에 관운이 넘치고, 다툼 범죄를 다루기에 살운(殺運, 失運)도 넘친다. 가정법원 또한 이혼하려면 필수적으로 들르는 곳이기에 이혼의 기운이 가득할 것 같다. 이처럼 법원(가정법원)은 관운과 살운이 넘친다는 두 의견이 모두 옳고 그러기에 모든 부부들이 살아가며 한번씩 경험할 이혼운을 털어 내는 적합한 장소이다. 즉 풍수설명처럼 청계천과 중랑천의 나쁜 기운을 법원이 융화시키듯 미래의 이혼기운도 법원에서 털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이번 주말에는 결혼할 예비부부, 결혼생활이 40년을 넘은 부부도 다정히 손잡고 법원으로 신비여행을 떠나 보자. 한 해를 시작하는 1월과 2월이 가장 좋고 3월(음력)까지는 액땜할 수 있다. 이왕이면 발렌타인데이나 화이트데이를 이용하면 낭만적이겠다. 법원을 산책하며 절대 현재의 사랑이 변치 안음을 다짐하며 서로에게 있는 부부다툼이나 이혼의 액운을 훌훌 털고 오자. 초콜렛이나 사탕을 법원에서 봉사하는 분들에게 드리고 오면 더욱 좋을 듯싶다.
행복을 찾는 신비여행(3) 대능원
3) 성수대교, 동호대교, 한남대교 - 잠원동 한강시민공원
요즘 젊은이들의 만남은 몇 마디의 질문과 영화관람을 끝으로 헤어진다고 한다. 많은 헤어짐을 반복해도 남녀의 만남은 항상 새로운 법이라고 연애도사들은 말한다. 싱그러운 4월! 피어나는 꽃들만큼이나 아름다운 청춘남녀의 만남이 도심의 빌딩 곳곳에 봄을 뿌릴 것이다. 색다른 데이트코스를 물색하는 연인들에게 마지막 남은 겨울을 만끽할 수 있는 장소를 추천해본다.
그런데 지금 추천하는 데이트코스는 모든 분들에게 권할 곳은 아니다. 그러니까... 새로운 만남이 부러운 분들을 위한 코스라고나 할까... 뭐 현재 사귀고 있는 연인과 거리를 두고 싶을 때 찾는 장소... 확 털어놓자면 현재 사귀고 있는 상대와 헤어지기 위해 떠나는 신비여행이다. 현재의 상대와 지속적인 만남을 가지고 싶다면 절대 이곳으로 데이트코스를 잡지 말아야 한다. 혹시 사귀고 있는 상대와 완벽한 사랑을 장담하여 호기심으로 찾겠다면 누가 말리겠는가. 물론 완벽한 사랑과 헤어져도 절대 신비여행에서는 책임지지 않는다.
요즘도 강물에 쓰레기를 투기하는 얌체 족이 있듯이 조선시대에도 청계천과 중랑천에 많은 쓰레기를 버렸다. 그러기에 조선시대에는 청계천과 중랑천의 쓰레기가 쏟아지는 뚝섬지역의 맞은편 한강을 터부시했다. 풍수지리에서도 물(한강)과 물(청계천과 중랑천)이 만나는 맞은편지역은 좋은 터라 여기지 않았다. 그럼 청계천과 중랑천이 토해내는 나쁜 기운을 직접적으로 맞는 곳은 어디일까? 성수대교, 동호대교, 한남대교, 반포대교이다. 그럼 따사로운 봄 햇살을 맞으며 성수대교, 동호대교, 한남대교로 데이트를 떠나 보자! 아마도 한강바람은 겨울처럼 시리지만 마음에 들지 않는 상대와 자연스럽게 헤어질 수 있다면 그깟 찬 바람이 무슨 문제이랴!
일단 버스나 택시를 이용하여 성수대교, 동호대교, 한남대교 중 하나를 선택하여 다리 전까지 가자. 그리고 강북을 등지고 강남을 향해 성수대교, 동호대교, 한남대교를 건너자. 한강바람이 무척 차겠지만 걷고 있는 상대의 손을 잡거나 어깨를 감싸면 안 된다. 아마 차안의 사람들이 다리 위를 걷고 있는 당신들을 보며 황당하다고 웃을 것이다.
그러나 새로운 상대와 분위기 있는 찻집에서 행복한 데이트를 즐기는 자신을 상상하면 남들의 비웃음은 위안이 될 것이다. 다리는 꼭 걸어서 건너야 한다. 혹여 차를 타고 건너거나 자전거를 이용한다면 소용이 없다. 천천히 걸으며 청계천과 중랑천에서 불어오는 이별의 바람을 몸 천체에 맞아야 한다. 다리를 건너면 곧 바로 택시나 버스를 타고 잠원동 한강시민공원으로 가야 한다.
도중에 배가 고프더라도 절대 음식점으로 들어가면 안 된다. 잠원동 한강시민공원으로 가서 한강에서 부는 드센 바람을 온몸 구석구석 쇠야 한다. 명심할 것은 바람은 30분 이상 맞아야 한다.
유의사항
중간에 배가 고플지 모르니 소화가 잘되는 음식과 물, 추운 날씨에 체 할지 모르니 소화제준비. 너무나 강한 한강바람으로 상대방의 건강이 우려되므로 비상연락망 핸드폰 준비.
추신
헤어지고 싶은 사람과 위의 장소를 9번을 찾았는데도 이별할 기미가 없다면 두 분은 천생연분이니 지겹더라도 계속 만나세요 아니면 조만간 더 강력한 이별의 신비여행을 추천할 때까지 참고 기다리세요.
4) 대능원
대통령 탄핵, 독도문제, 이라크사태 등 나라안 밖에서 사건들이 터질 때면 소주소비가 증가한다.
그런데 떠들썩한 소식들에도 삶이 무미건조(無味乾燥)하게 느껴지는 분들에게 신선한 신비여행을 추천해본다. 양주, 명품, 물 좋은 나이트크럽에 신물이 난 분들에게도 3번쯤은 권하고 싶은 신비여행이다. 이번 신비여행은 혼자 떠나야만 진가를 체험할 수 있는데 동행이 있다면 서로가 남인 것처럼 행동해야 한다. 떠나려는 결심이 섰다면 자신이 세상을 구원할 도인이나 사상을 깨우친 철학자로 최면을 건 후 최소한의 여비, 교통비, 식비, 숙박비만 가지고 떠나야 한다. 목적지는 경북 경주시 황남동에 있는 황남리고분군인 대능원이다. 대릉원은 신라천년의 고분 23기가 산재해 있는 고분공원으로 그 중 천마총은 구조와 출토유물을 직접 들여다 볼 수 있도록 내부를 전시공개하
고 있다.
"불국사, 보문단지, 첨성대 등 볼거리가 널려 있는 경주에 하필 무덤들로 즐비한 대능원인가?"
이런 의문을 가진 분들에게 저의 젊은 시절 이야기가 설명이 될지 모르겠다.
"부적이 정말 행운을 가져다 줄까, 장희빈이 썼던 부적의 방술이 사람의 목숨을 끊을 수 있었을까,
사행심을 부추길 수 있는 부적이 예술로서 새롭게 탄생할 수 있을까"
저는 한 때 잠자는 시간도 아까워하며 부적에 대해 고민했다. 그러던 중 300년 이상된 왕이나 장군의 무덤에서 기(氣)를 받으면 심오한 부적을 만들 수 있다는 것을 오래된 책에서 읽게 되었다.
한이 서린 생을 마감한 견훤왕묘, 사도세자묘 등을 떠올리며 오래된 무덤을 물색하던 중 오랜 역사에 이왕이면 왕을 모신 신라의 능으로 결정하고 경주의 대능원으로 갔다. 수학여행의 단골장소였던 대능원은 처음 방문이 아니였음에도 그날 따라 왠지 즐비한 무덤들이 장엄하게 느껴졌다.
대능원에 온 목적이 기(氣)였기에 이왕이면 확실하게 받기 위해 능의 정상에 올라가야 했지만 남들눈에 띌 것 같아 구석진 능 옆에 앉아 기를 받았다. 그때는 6월이었고 새벽부터 달려온 덥고 피곤
한 몸이 불어오는 바람에 졸음이 밀려왔다. 나는 기 받는 자세야 앉으나 눕거나 별반 다를 게 없을 것 같아 무덤을 배게 삼아 누워 버렸다. 천년을 넘은 능이라 그런지 풍수지리가 뛰어난 곳이라 그런지 금새 잠이 밀려왔다.
대능원에 누우면 눈앞에 펼쳐지는 하늘만큼이나 모든 세상이 당신의 가슴으로 밀려온다. 직장, 시험, 돈이 머리에서 뛰쳐나가면 투명해진 몸에는 신라천년의 강한 에너지가 물이 고이듯 스며든다. 하늘의 기, 땅의 기운, 바람의 흐름이 눈에 잡힘과 동시에 톱니바퀴처럼 정확히 움직이는 우주의 진동이 온 몸에 울려 퍼진다. 죽음의 문턱에 들어선 듯한 최면과 환각이 느껴짐과 동시에 당신을 졸라 메었던 물질적 정신적 현실의 욕망이 먼지가 되어 손에 잡힌다. 운 좋게 대능원에서 밤을 세운다면 천년신라의 황금빛 영혼들을 여러분의 눈앞에서 감상할 수 있으리라. 문득 동방의 문화를 주도한 신라의 힘이 가득 차있는 당신의 모습이 서울로 올라가는 차창에 비쳐질 것이다.
주의: 대능원의 모든 능은 출입금지이다. 능에 들어갔다가 관리인에게 들키면 벌금을 물고 심하면 구속될 수 있다. 심약한 사람은 빙의로 정신착란을 일으킬 수 있으니 노약자나 임신부들은 이번 신비여행을 자제하길 바란다.
행복을 찾는 신비여행(4) 한강, 두륜산
5) 한강
예전엔 수출물건을 만들기 위해 공장들이 쉴 틈이 없었기에 낮에는 거리가 한산했었다. 그런데 요즘의 도심은 인파로 넘쳐 나지만 많은 분들의 어깨는 처졌고 얼굴에는 웃음이 사라졌다. 어두운
겨울터널을 지나면 희망이 보일 줄 알았는데 나라안 밖의 어수선한 사건사고가 방송과 지면을 채우고 있다. 그리고 많은 분들은 작년보다 더 심한 경제적 고통으로 힘겨워 하고 있다. 어려운 시기일 수록 독자분들이 활력을 찾길 바라며 재운, 관운, 예술운, 변동운을 품고 있는 한강으로 신비여행을 떠나 본다. "에베레스트나 나야가라 같은 높은 산과 장엄한 폭포가 없는 민족이기에 국토에 관운, 재운을 집어 넣으며 망상을 하겠지"
막상 바람부는 한강으로 신비여행을 떠나자니 불현듯 이런 생각이 밀려 올 수도 있겠다. 역사적으로 볼 때 우리는 한반도의 작은 국토에 살면서도 독자적인 문화와 세계를 누빈 상권을 만들어 냈다. 그것은 과거부터 현재까지 지속된 지나친 교육열, 끝장을 보는 민족성, 남다른 손재주를 가졌기에 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교육, 손재주, 끝장들은 마음 깊숙이 깔려 있는 우리민족의 특별함에 기인된 것이 아닐까? "웅녀, 구미호, 산신호랑이, 귀신을 쫓는 삽살개, 한 주인만 섬기는 진돗개가 사는 특별하고 신령스러운 우리의 산하(山河)! 이렇듯 동물들까지 영험함이 심어지는 국토인데 그곳에서 사는 국민들은 정신적으로 육체적으로 얼마나 뛰어나고 강인할까"
이런 자부심과 아집이 좁은 국토에 살면서도 세계와 겨루어야 직성이 풀리는 배포의 힘이었을 것이다. 현실적으로도 세계최초 줄기세포배양, 스포츠, 예술 등에서 세계를 놀라게 하는 걸 보면 땅과 하늘에 심은 우리의 신성함이 자아도취는 아니다. 그럼 이제 확신을 가지고 재운, 관운, 예술운, 변동운을 품고 있는 한강으로 떠나 보자. 폭, 길이만으로도 한강은 인류 4대문명의 발생지인 유프라테스강, 나일강, 인더스강, 황하와 비교하여 손색이 없다. 한강에 남아있는 선사시대 유물은 문명의 역사로도 중요성이 입증되고 교역 또한 긴 역사와 방대함을 자랑한다. 삼국시대이전부터 외국과 교역한 물품들이 한강을 통해 내륙으로 들어왔고 조선시대에는 도읍인 한양으로 인해 한강의 상권비중은 더욱 활발해졌다. 이제는 선진 물류산업에 밀려 한강은 상수원, 홍수 조절기능, 공원으로 전락하고 말았지만 과거한강에서 이루어졌던 외국과의 활발한 교역은 강력한 기운(氣運)으로 한강 곳곳에 남아있다. 한강은 역사가 증명하듯 풍성한 재운, 권력의 기반, 넓은 세계로 뻗기 위한 에너지가 강하게 존재하는 곳이다. 한강에 산재해 있는 강력한 에너지는 직장인들보다는 외국과의 교역, 상업하는 분들에게 현실적인 도움으로 변화되는 길한 곳이다. 오랜 역사 동안 성행했던 한강의 강한 상권이 한강을 찾는 이들에게 변동을 실어 주어 정체된 사업을 움직일 수있는 힘을 줄 것이다. 시작은 아차산성에서 강변대로를 따라 광진(광나루)-동빙고-이태원터-토정터-광흥장터-양화진-행주산성을 돌아보고 오는 것이다. 교통편은 걷기가 으뜸이지만 거리가 만만치 않기에 자동차를 이용해도 무방하다. 건강이 허락한다면 자전거를 이용하라 권하고 싶다. 자전거를 타며 재운과 관운이 실린 한강의 변동운을 어깨에 가슴에 맞으며 달리다 보면 현재의 답답한 기운이 확확 날아갈 것이다. 주의사항은 한강은 관운, 재운, 예술운을 가지고 있지만 한강 하나로는 그런 운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교역을 하려면 물건과 대상, 교통이 함께 있어야 하는데 한강은 교역할 교통이며 운이 들오기 위한 통로일 뿐이다. 그러므로 한강의 신비여행은 관운, 재운, 예술운이 쉽게 들어오기위한 통로이다.
6) 두륜산- 땅끝
세상에는 따뜻함과 차가움, 전쟁과 평화, 탄생과 죽음 같은 양과 음이 존재한다. 양과 음은 창과 방패처럼 대립하며 부딪치지만 균형을 이루며 수세기 동안 공존하고 있다. 그런데 음의 영역인 전쟁, 질병, 재난이 접근하지 못하는 산이 있다. 음의 영역이 비껴가는 산이라 하여 기암절벽의 구비치는 긴 계곡을 품은 산을 기대한다면 실망할 것이다. 비록 낮은 암봉을 거느린 남쪽 끝 해남의 도립공원에 지나지 않지만 양의 기운이 풍만한 곳, 두륜산이다. 해남의 두륜산은 산악인들에게는 등반의 재미가 있는 알려진 산이지만 일반인들에게는 좀 생소한 산이다. 더욱이 서울, 경기, 강원지역의 주민들에게는 다소 거리가 먼 해남의 두륜산까지 다녀오라는 것이 죄송스럽다. 그럼에도 돈과 시간이 솔솔 소요되는 곳으로 신비여행을 권하는 것은 두륜산이 지닌 방패의 힘 때문이다.
'바다와 산이 둘러싸 지키는 만세토록 불훼(不毁)의 땅, 자연의 삼재인 화재(火災) 수재(水災) 풍재(風災)가 들지 않는 산' 입적하기 전 대둔사에 자신의 의발을 전하도록 유언했던 서산대사와 여러 고승들이 두륜산에 대한 찬사였다. 서산대사와 고승들의 예언대로 두륜산이 지닌 방패의 힘은 임진왜란과 6.25 때 진가를 나타냈다. 두 전란 중에도 두륜산의 삼림과 두륜산이 품고 있는 절 대둔사는 화를 입지 않았다. 두륜산은 전라남도 해남군 삼산면 구림리 산8-1에 위치해 있다. 해남군의 도립공원으로 넓지 않은 산세를 지녔음에도 여덟 개의 높고 낮은 연봉과 울창한 숲, 계곡을 갖춘 제법 규모있는 산이다
두륜산은 정상의 가련봉(703m), 대가람 대흥사가 있고 두륜산이란 이름을 따온 두륜봉(630m), 고계봉(638m), 노승봉(능허대 685m), 도솔봉(672m), 혈망봉(379m), 향로봉(469m), 연화봉(613m)의 8개 연꽃 봉우리가 능선을 이루며 남쪽 바다를 향하고 있다. 낮은 높이의 완만한 봉우리들로 이루어진 두륜산은 몇개의 등산코스가 있다지만 숲이 울창하고 좁은 등반길로 인해 일반인들은 대둔사를 거쳐 오르는 두륜봉 코스를 많이 이용한다.
하늘은 가리는 노송들, 동백나무숲, 계곡물 소리를 들으며 올라가는 대흥사 코스는 남녀노소 누구나 오를 수 있는 적당한 산책로이다. 두륜산 등산의 백미는 남해바다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전망이다. 그러나 이 코스조차도 번거로운 분들은 두륜산에 있는 케이블카를 이용하면 된다. 케이블카를 타고 도달한 정상은 등반으로 오른 정상보다 시원한 느낌은 아니지만 두륜산의 일품인 남해바다를 쉽게 볼 수 있다. 두륜산 정상에서는 날씨가 맑을 때는 제주도까지 보인다는 말이 있다.
등반할 때는 물론이고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갈 때도 이 말이 과장처럼 느껴지지만 정상에 오르면 실감하게 된다. 사방으로 시야가 탁 트인 전망은 해남군일대를 돌아볼 수 있고 푸른바다가 손에 잡힐 듯하다. 바다 쪽으로 다이빙을 하면 바로 남해바다로 풍덩 빠질 것 같은 가까운 거리는 정말 눈이 좋은 사람에겐 제주도가 보일 거란 생각이 든다.
뜨거운 삼복의 햇살에도 정상의 산바람은 시원함을 넘어 차가운 느낌마저 든다. 불훼나 삼재를 모르는 보통의 사람들도 이 순간만큼은 모든 나쁜 기운이 날아가고 바다의 기운과 두륜산 기운이 몸을 휘감는 기분이 든다. 두륜산의 등반은 삼재가 드는 사람들에게 권할 신비여행이다.
보통 삼재가 드는 해에는 '입삼재'라 하여 이사, 먼 거리의 여행을 삼가 한다. 그러나 보통 삼재가 드는 전해의 11월부터 입춘 전까지는 '삼재막이'라 하여 이사, 여행이 가능하다. 이때를 이용하여 두륜산으로 삼재를 터는 신비형을 떠나 보자. 또한 한해에 관재, 소송이 들어오는 분들에게도 두륜산의 신비여행이 필요하다. 삼재가 들지 않는 분들은 새로운 사업의 시작, 변동운을 받기 위해 권하고 싶다.
두륜산 등반이 끝나면 전라남도 해남군 송지면(松旨面) 송호리(松湖里) 한반도의 최남단 마을 땅끝으로 향한다. 땅끝으로 향하는 도로는 해안을 끼고 달려간다. 넘실거리는 청정바다, 해풍에 익어가는 농작물, 산자락의 녹음에 취하는 아름다운 드라이브 코스이다. 평평한 도로가 갑자기 언덕길로 바뀌면 푸른 바다가 앞을 덮치며 우뚝 솟은 돌 이정표가 나타난다. "한반도 최남단 땅끝"이라 쓰여진 돌은 눈부시도록 청정한 푸른 바다를 뒤로 하며 서있다. 달리던 차들이 멈추고 탄성을 머금은 사람들이 쏟아져 나오며 국토의 최남단 이정표 앞에 기념사진을 찍어 댄다. 기념사진을 찍던 사람들의 일부는 갈두산으로 가고 일부는 땅끝과 가까운 섬을 둘러보기 위해 갈두리 선착장으
로 향한다. 갈두산(일명 사자봉 122m)은 해남군의 최남단에 위치한 산으로 정상에는 봉화대와 전망대가 있다. 전망대에 올라서면 땅끝의 앞바다와 섬들이 동화처럼 펼쳐지며 함께 한 모든 사람들에게 은빛가루를 뿌려 댄다. 손에 잡힐 듯 떠있는 섬, 반짝이는 바다는 몰려드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세상으로 나가는 희망을 선사해준다.
땅끝은 새로운 운을 받아들이기 위한 신비여행이다. 쉽게 말해 두륜산의 신비여행에서 관재, 시비, 구설의 나쁜 운을 털고 땅끝에서 새로운을 받기 위한 주머니를 받으러 간다고 생각하면 된다. 앞으로 다가올 관운, 재운, 예술운을 받기 위해 몸 구석구석 주머니를 만들기 위해 땅끝으로 신비여행을 떠나는 것이다.
행복을 찾는 신비여행(5)
*쉼터의자에서 휴식을 가지며
처음 신비여행을 택한 계기가 호기심이든, 기운을 변화시키려는 진지함이든 대부분의 독자분들은신비여행이 생소하겠다. 그래도 '관운의 마니산, 애정운의 서울법원종합청사, 이별운의 한강다리,마음을 비우는 대능원, 변동운의 한강'까지 읽으며 자연의 또 다른 힘을 느끼길 기대해본다. 생태학적으로 사람을 포함한 모든 생물들에게 자연의 힘은 절대적이지만 아무 설명없이 이산, 저강, 무덤까지 들먹이며 관운, 애정운, 변동운 같은 뜬구름 소리는 쉽게 받아들일 수 없으리라!
그런 분들을 위해 시원한 답은 아니지만 약간의 변명을 적어본다.
원래 도를 닦든, 사업을 시작하든, 하다못해 명당의 기를 받더라도 일의 시작에는 마음 비우는 것이 첫째다. 그리 보면 신비행의 첫째는 일상을 벗어 던지는 대능원으로 시작해야했다.
그럼에도 신비여행을 마니산으로 시작한 이유는 단군께서 웅녀와 결혼하여 맨몸으로 나라를 일군한반도의 정신적 성산이 마니산이기 때문이다. 과학으로 무장한 현대에 그깟 정신적 신화쯤으로 치부할 수 있지만 세계 모든 나라들이 민족의 우월성을 위해 비슷한 설화를 쓰고 있는 걸 보면 가볍게 취급할 것은 아니다. 한반도 민족은 하늘의 아들인 단군에 후손으로 우리(국민)가 하늘이라는 큰 사상은 과학이 아닌 마니산에 깃 들어있기 때문이다. 마니산의 신비행에는 단군처럼 나라를
세우는 큰 뜻은 아니더라도 하늘의 후손인 우리가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작은 의미가 들어있다. 수도권과 가깝고 높이도 적당한 마니산은 하루나 이틀 동안 충분히 돌아볼 수 있지만 거한 외식과 화려한 볼거리로 주말을 채웠던 분들에겐 귀찮은 대상이 될 수 있다. 더욱이 눈에 잡히지도 않는 관운의 등산은 더욱 웃기는 권유였으리라. 이렇듯 첫 신비여행의 마니산은 등산을 즐기는 이들에
겐 정신적 의미를 부여하였고 도심에 익숙한 분들에겐 고행을 주기 위한 코스였다.
매주 한달 동안 마니산을 찾아서 관운을 얻었다 해도 가정이 불편하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좋은 명당을 찾아 관운, 예술운을 넘치게 받아도 가정이 불편하면 남자나 여자나 똑같이 사회에서 능력을 펼치기 어렵다. 가정의 불편한 감정이 직장출근과 동시에 차단되는 분명한 성격의 소유자도 참다 보면 건강을 해치기 마련이다. 부모 형제사이의 불화라면 피붙이 운운하며 넘어갈 수 있고 이해가 어려우면 빨리 독립하면 그만 이라지만 부부사이는 전혀 다르다. 사소한 신경전과 불편함으로도 일상이 짜증나고 심하면 우울증까지 오는 게 부부사이다. 깨끗하게 갈라서면 된
다지만 그렇다고 이혼이 쉽지 안음을 부부가 되어보면 알 것이다. 배우자가 이혼하기엔 아깝고노력을 들여 살아 보고 싶은 분들을 위해 법원종합청사를 신비여행의 두 번째로 택한 이유였다.
가정이 평온해야 신비여행도 효력이 발생하는 법이다.
남자나 여자나 헤어지고 싶은 상대가 있으면 마음이 심란한 게 사실이지만 그래도 이별의 신비여행은 쉬어 가는 코너였다. 해어지고 싶은 상대와 심심풀이로 이별의 신비여행을 경험하는 건 좋지만 혼자서 또는 사랑하는 이와 재미로 실천해보는 것은 금해주길 바란다. 마니산으로 신비여행을 실천해보고 애정운으로 가정이 안정되었다면 이제부터는 편안한 마음으로 좋은 기운(氣運)을 받아 보자. 좋은 기운을 얻는 것은 얼마나 마음을 비우느냐에 따라 달라진다. 마음을 비우고 좋은 기운을 얻기 위해 떠나는 신비여행이 대능원이었다. 대능원의 신비여행에서 마음이 비워졌으면 관운, 재운, 예술운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야 한다.
여건이란 집(관운, 재운, 예술운)을 짓기 위해서는 대지를 다지고(마음을 비우는 작업), 집 지을 재료를 준비(변동운)하는 것과 같다. 한강의 변동운은 좋은 기운을 만들기 전의 준비운동과 같은 의미다. 재료의 준비 또는 준비운동과 같은 한강의 변동운까지 받았다면 두륜산의 복주머니를 차고 본격적으로 좋은 기운을 받으러 신비여행을 떠나 보자.
1. 관운의 신비여행
예로부터 평민이 돈 벌면 가장 먼저 양반문서부터 사고, 아무리 좋은 소리도 열 번을 들으면 질리지만 권력욕심은 끝이 없다고 했다. 하긴 신분의 귀천이 없다는 현재도 재산을 모으면 정치에 끼려 안달이고 고시도전도 마약과 같아서 한번 시작하면 끊기가 어렵다고 하지 않던가! 대통령의 아들이 또다시 대통령이 되고 불미스러운 일로 곤욕을 치른 전직 대통령부인이 상원의원을 하는 미국을 보더라도 권력은 세계적인 욕심인가보다. 이렇듯 세계적으로 역사적으로 끝없는 소유욕을 발동시키는 관운을 마니산 신비여행에 이어 다시 한번 언급하겠다.
관운은 높은 관직, 공무원시험합격 등으로 알려져 있지만 넓은 의미로는 직장과 명성을 뜻한다.
남녀 모두 주어진 환경에서 능력을 발휘하고 명성을 얻으려면 절제된 관운이 필요하다. 즉, 의사, 회사원, 교육자, 심지어 관직과 거리가 먼 서비스종사자까지 능력을 인정받으려면 관운의 힘이 필요하다. 성실하면 능력을 인정 받는 건 당연한데 뜬금없이 미신같은 관운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우습기도 하겠다. 그러나 우리는 사회생활을 하며 특별하게 누가 성실하고 어떤 사람이 불성실한지 구분할 수 없다. 대부분이 주어진 일에는 성실하고 노력하고 최선을 다하지 뒤에서 게으
름을 피우는 경우는 극히 드물다. 그럼에도 누구는 상관의 눈에 띄고 어떤 동료는 한 번의 보고서로 능력을 인정받는 경우가 열거하지 못할 정도로 허다하다. 자신이 남보다 열심히 일했는데 능력을 인정받지 못할 때는 분을 삭이며 술잔을 기울이지 말고 본인의 부족한 관운을 탓하고 웃어야 한다. 또한 관운은 직장과 명성 외에 남녀 모두에게 어질고 총명한 자식이며 여자에게는 능력있는 남편을 얻는 힘이다. 이렇듯 관운은 일상생활에서 가장 넓은 의미로 쓰이고 가장 많은 곳에서 필요로 하는 기운(氣運)이다. 그러나 실생활 곳곳에 요구되는 관운도 지나치면 자식을 해(害)하고 재운을 파(破)하며 소송, 구속, 피살까지 간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소송, 구속, 피살이 동반되는 지나친(渫氣) 관운을 높은 관료, 대기업 사장들에게 국한되는 것으로 오인하는데 절대 기필코 그렇지 않다. 생활에서 흔히 벌어지는 소소한 싸움, 사소한 의심도 관운에서 시작되는데 과도해지면 소송, 사기, 횡령, 감금, 실종, 자살, 외도, 불구, 중형, 이혼으로까지 이어진다. 이렇듯 관운은 선택된 몇몇 귀한 분들에게 있는 기운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이 일생을 끼고 사는 생활도구와 같은 것이다. 즉 칼이나 가위처럼 요리, 장식, 수술을 위해서는 꼭 필요한 존재지만 조금만 방심하면 목숨을 앗아 가는 무기가 되는 것이 관운이다. 다만 지나친(渫氣) 관운이 도움이 되는 직업은 검사, 경찰관. 사형집행관, 군인, 세계를 누비는 무역업자, 수술을 많이 하는 의사와 간호원에게는 인명을 구하고 원칙을 지키는 강인함으로 나타난다. 이유는 독은 독으로 푼다는 옛말이 있는데 형벌, 전투, 지나친 외유, 중병 등은 어쩌면 인생의 독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행복을 찾는 싱비여행(6) 태백산
1) 태백산
사람들에게 산은 단순한 등산의 대상, 병을 치료해준 고마운 존재, 송이버섯이나 산나물 채취같은경제적 공간으로 자리잡고 있다. 나에게 산은 정신세계를 연마하는 스승이며 고단할 때 찾아가는 위안처이다. 그 중 태백산은 내가 썼던 소설에 소재를 제공해 준 특별한 존재이다. 울진의 불영사를 오가며 스쳐 가던 태백산은 긴 여운의 메아리로 나를 붙잡으며 자신의 아픈 사랑을 쏟아 냈다.
나는 산과 인간의 슬픈 사랑을 듣기 위해 태백산을 자주 찾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이선생님의 사무실을 들르곤 했다. 1994년 겨울, 절친한 친구의 결혼운명을 상담하는 계기로 이선생님과 나와의 첫 대면은 시작되었다. 다음 날부터 나는 이선생님의 사무실을 자주 찾았고 60을 바라 보는 이선생님과는 삶을 고민하는 친구가 되었다. 내가 이선생님을 친구로 삼은 것은 그분의 정직함, 검소함, 평범한 결혼생활, 과거의 공직생활이 초등학교 교장선생님을 연상시켰기 때문이었다. 이선생님은 영문과를 나와 젊은 시절 강원도 원주에서 공무원생활을 하셨고 한 때는 출판사를 경영하기도 했다. 출판사사장이라는 전력 때문인지 이선생님은 문학을 좋아하고 언젠가는 자신의 시집을 출판하려는 포부도 가지고 있다.
"일제 때 아버님께서는 시골의 교장선생님이셨는데 어느 날 태극기를 달다가 순사에게 딱 걸려 버렸지 뭐요. 아버님께서는 주변의 간곡한 권유로 순사에게 '무심코 태극기를 달았다'고 빌었기에 감옥 행은 면했지만 파직은 피할 수 없었지요. 아버님의 행동으로 식구들은 주변의 놀림감이 되었고 파직당한 아버님께서도 일자리를 구할 수 없었다오. 어쩔 수없이 아버님은 식구들의 생계를 위해 틈틈이 익혔던 풍수지리로 묘 자리를 보는 지관을 시작하셨지요. 해방이 되자 일본어를 가르쳤던 교장들이 친일로 수난을 당할 때 우리가족은 무사했지만 아버님의 태극기 파직은 보상받을 수 없었다오. 아버님께서 학교복직은 어렵더라도 다른 일자리는 충분히 구할 수 있었을 덴데 무슨
연유에서인지 지관을 돌아가시기 전까지 하셨지요. 그런 연유에서인지 나도 아버님의 업을 받아이렇게 늦은 나이에 사람들의 운명상담을 하게 되었소. 그런데 나는 아직까지 왜 아버님께서 서슬 퍼런 일제시대에 태극기를 달았는지 알 수가 없어요. 아버님께서는 임종을 하시면서도 그 일에 대해서는 일절 해명이 없으셨지. 과연 아버님의 행동은 실수인가 용기였을까? 그리고 왜 하필 그 때 순사에게 발각되었을까요? 그것은 재수가 나쁜 것이요 좋은 것이요?"
이선생님은 자신과 역학(易學)의 인연이 궁금하거나 아버지가 그리울 때면 가끔씩 나에게 묻곤 했다. 범상(凡常)치 안은 가계(家系)와 다양한 직업을 경험하신 이선생님은 태백산을 정신적 지주로 모셨다. 이선생님은 내가 태백산을 다녀오면 어린아이처럼 기뻐하며 태백산의 근황을 일일이
묻곤 했다. "누구를 막론하고 백두산-태백산-계룡산-지리산-한라산을 하루만에 모두 오르면 천하를 호령하고, 백두산-태백산-지리산을 하루만에 오르면 한반도 제왕의 자리에 앉을 수 있다는 하늘의 계시를 알고 있으세요?" 나는 태백산을 다니며 알게 된 새로운 자연의 지식을 이선생님에게 확인했다."아이구 그 동안 은선생이 태백산을 열심히 다니더니 드디어 하늘이 내린 태백산의 계시를 들었군요. 어떤 사람이 알고 지내는 대선후보에게 이런 말을 했답니다. 백두산은 북에 있으니 가기가
어렵고 지리산은 관운이 좀 부족하니 관운이 많은 태백산을 등반하라 권했지. 혼자서 해가 뜨기 전에 태백산 천제단에 올라 소원을 말하면 큰 뜻을 이루리라 했지. 대권후보는 등산객들과 만남을 가지고 마음도 다질 겸 비서진을 대동하고 태백산을 올랐어요. 그런데 대통령에 떨어졌지요.
나중에 대권후보는 '그의 말대로 혼자서 태백산을 찾을걸' 하며 아쉬워했다는 거예요. 이 이야기
가 사실인지는 모르지만 혼자서 해가 뜨기 전, 태백산의 천제단을 찾으면 권력의 힘을 받을 수 있
다는 거지. 은선생이야 권력과는 거리가 먼 사람이지만 그래도 태백산을 찾으면 정상까지 올라
야 지요. 다음에 태백산을 찾으면 꼭 천제단까지 올라갔다 와요."
이선생님은 태백산 중턱에서 사랑이야기나 듣고 오는 나에게 천제단에 다녀오길 당부했다. 이선
생님의 권유를 차일피일 미루던 중 나는 큰 수술을 받게 되었다. 나는 퇴원하고 겨우 걸음을 뗄
수 있는 상태에서 이선생님의 사무실을 찾았다.
"이번엔 독한 마음먹고 태백산 정상까지 올라갔다 오슈. 태백산의 관운에는 수술의 액을 떨쳐 버
리는 강력한 힘이 있다는 것을 은선생도 잘 알지 않소?"
"예, 저도 잘 알죠. 부와 안정을 가진 계룡산은 파산의 액을 떨칠 수 있고, 관운을 가진 마니산은
수옥(收獄)운을 떨칠 수 있고, 태백산은 병액을 떨칠 수 있는 강한 관운을 가졌지요. 그런데 수술하고 겨우 두 달이 지났는데 어떻게 태백산 정상까지 올라가요. 올라가다 수술한 곳 터지겠어요"
"절대 그런 일없으니 염려 꼭 붙들어 매슈. 은선생이 수술했지만 기가 살아 있고 무엇보다 태백산
기운이 은선생을 보살펴 줄 테니 꼭 가 보도록 해요." 이렇게 이선생님의 집요한 강요로 나는 수술한지 3개월만에 태백산의 산행을 감행했다.
태백산의 일반적인 산행코스로는 당골-문수봉-천제단, 당골-천제단-장군봉 코스이고 백단사-천
제단 코스, 유일사-장군봉-천제단 코스는 약간의 경사가 있다. 당골, 백단사, 유일사로 시작되는
모든 코스의 산행은 태백시에 위치한 태백산국립공원에서 시작되며 주말에는 전국에서 밀려드는
사람들로 붐비고 있다. 이선생님으로부터 비교적 오르기 쉽고 사람들이 많이 찾는 당골-천제단 코스를 추천 받았지만 나는 오래 전부터 마음이 끌렸던 유일사-장군봉 코스로가 첫 등반을 잡았다. 나는 중간지점부터 바위를 오르는 유일사-장군봉 코스가 다른 등반코스보다 어렵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수술한지 3개월이 되었다지만 수술한 부위는 걸을 때마다 통증이 있었다. 가을 문턱의 9월초라지만 햇살은 여름의 따가움이 넘쳐났기에 현기증이 느껴졌다. 등산시작부터 얼굴이 창백해지고 식은 땀을 흘리는 나를 보고 등산객들이 연유를 물어왔다. 나는 그들이 나의 수술상태를 들으면 말릴 거라 여겼는데 이구동성으로 '몸이 빨리 회복된다'며 등반을 재촉했다. 등산객들의 격려에도 나는 어지러움과 통증으로 쓰러질 것 같았지만 30분이 지나자 신기하게도 몸이 가벼워지기 시작했다. 뒤에서 밀어 주는 기운이 있는 듯 가파른 바위도 가뿐히 오르며 장군봉까지 무사히 도착할 수 있었다. 그 후 장군봉 등산 덕분이었는지 몸이 빠르게 회복되었고 당골-문수봉-천제단 코스, 경사로가 심한 백단사-천제단-문수봉 코스로도 등반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한반도의 척추라 불리는 태백산은 경상북도 봉화군 석포면 대현리, 강원도 태백시 문곡소도동, 영
월군 상동면 천평리와 접경을 이루는 산이다. 천제단이 있는 영봉을 중심으로 북쪽 300미터 지점
이 태백산의 가장 놓은 봉우리인 장군봉(1567m), 남동쪽으로 능선을 타고 가면 수 만개의 바위로
이루어진 문수봉(1,517m), 영봉과 문수봉사이의 부쇠봉(1,546m)으로 이루어져 있다. 금강산, 설
악산, 오대산, 두타산이 대부분 기암과 협곡을 거느린 명산의 수려함을 가지고 있는 반면 태백산
은 거대한 능선과 봉우리로 이루어진 산이다. 탄광지역, 강원도 깊숙한 곳이라는 명성으로 태백
산이 험난한 산세를 지녔다고 생각하면 오산이다.
태백산은 겉보기엔 고산다운 웅장함이 있지만 나같이 약한 사람도 충분히 정상을 발을 수 있는 부
드러운 산이다. 일반적인 등산코스인 당골-문수봉, 당골-천제단으로 올라가는 길은 여름철엔 짙
푸른 낙엽송이 이국적인 분위기를 연출하며 더위를 잊게 한다. 완만한 오름세의 울창한 숲길을
따라 올라가면 시원한 물소리의 개울을 만난다. 태백산에는 높은 봉우리들이 많지만 산세(山勢)
는 험준하지 안기에 긴장을 풀고 오를 수 있다.
정상에는 고산식물이 자생하고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이라 불리는 주목 군락지를 볼 수 있다. 고사
목으로 보이는 회색의 나무들이 다른 방향으로는 싱싱하게 뻗는 가지를 보노라면 주목의 강인한
생명력과 더불어 다양한 예술적형상을 감상할 수있다. 이렇듯 죽음이라는 상상을 초월한 생존법
으로 삶을 영위해 가는 주목의 특성 때문인지 사람들에게 주목은 신성한 대상이며 착취의 표적이
기도 하다. 예로부터 주목은 회화나무와 함께 액을 털어 내고 귀신을 쫒는 수목으로 유명하다.
그러기에 전국에 있는 주목은 갈취의 대상이었고 특히 태백산의 영험함을 안고 있는 주목은 더욱
사람들의 표적이 되고있다. 주목의 효험을 믿는 분들을 위해 굳이 값비싼 주목가구나 주목장식장
을 살 필요없이 액을 털어 내는 비법을 공개하겠다.
주목을 끌어안거나 또는 주목에 등을 기대고 앉은 채 "살아 천년 죽어 천년인 신비스런 태백산 주
목이여, 홍길동(이름)의 액운을 모두 가져가라"고 3번을 외치고 뒤를 돌아보지 않고 산을 내려온
다. 혹시 뒤를 돌아보면 모든 것이 허사다. 이 비법은 새벽에 올라가서 해가 뜨기 전에 행하는 것이 좋으며 주목을 가져오는 것보다 몇 백배 효험있다. 주목의 효능이 사람들이 떨어트린 액운을
정화시키는 것인데 굳이 그런 물건을 가구로 만들어 집으로 끌어들일 필요가 있겠는가?
태백산은 예로부터 신라의 북악으로 하늘에 제사를 올리던 명산 (동국여지승람 기록)이었고 전국
12대명산으로 꼽히기도 한다. 이렇듯 민족의 성산에 걸맞게 태백산 정상에는 20평 남짓한 천제단
이 마련되어있다. 자연석 규암으로 쌓은 천제단(天祭壇: 중요민속자료 228)은 사각형의 돌 제단으
로 예로부터 하늘에 제사를 지냈던 장소로서 현재는 매년 개천절에 천제를 지내고 있다.
장군봉은 백두산의 병사봉과 같은 의미의 봉우리로 하늘장군에게 제사를 지내는 장군단이 있기
에 장군봉이라 한다. 또 다른 전하는 말로는 일제 때 일부 주민들이 쌓은 후 대한독립기원제를 지
냈다고도 한다. 망경대(望景臺)의 태백산사(太白山祠)에서도 봄·가을로 제사를 올리며, 단군성전
(檀君聖殿)에서는 개천절에 단군제를 지내고 있다. 이렇듯 태백산에는 천제단, 장군단, 태백산사,
단군성전과 같은 유서 깊은 사찰· 사적지 등이 많지만 토속신앙의 성지로도 유명하다. 태백산 곳
곳에는 소망을 던져 놓기 위해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로 분비고 있다.
태백산의 관운은 병액을 쫒는 것은 물론 사업시작, 승진기원, 아이디어창출, 사업확장의 기운을
받는데도 도움이 된다. 태백산의 신비스런 힘에 관해서는 태백산을 등반하는 분들을 만나 직접
들어보면 확실할 것이다. 그럼 본인이 만나고 들어본 이야기를 짧게 적어본다.
*처음 유일사-장군봉을 등반할 때는 몸이 아파서 주위를 돌아볼 수없었다. 두번째 등반부터는 사
람들을 관찰하기 시작했고 나보다 더 심한 환자가 많다는 것을 알았다. 혈압이 높아 가족들에게
부축을 받으며 간신히 올라간 아줌머니는 천제단을 밟은 후 혼자서 내려왔다. 비가 내리는 미끄
러운 등산길에 무거워 보이는 지팡이, 흰 고무신, 남루한 치마저고리, 비녀를 꼽은 백발의 할머니
가 나보다 더 빠른 걸음으로 올라왔다. 호기심 어린 나의 질문에 문수봉에서 산다는 할머니는 혹
시 현신한 문수보살??? 90도로 굽은 허리에 주름진 얼굴을 한 할머니는 내가 따를 수없을 정도로
빠른 걸음으로 가파른 산길을 오르더니 갑자기 사라졌다.
*나는 석탄박물관 위쪽에 있는 단군성전을 둘러 본 후 이선생님의 사무실을 찾았다.
"단군성전은 엄청난 명당으로 대단한 기가 솟구치고 있어요. 단군성전을 짓기위해 일부러 명당을
골랐을까요 아니면 평범한 땅이 단군을 모심으로써 명당이 되었을까요?"
"단군성전이니 처음부터 좋은 위치로 정했겠지만 사람을 살릴 수있는 명당이 된 것은 태백산의 기
운과 단군성조님의 위대한 힘이겠지요." "하긴 아무리 명당이라도 그곳에 모셔지는 시신이나 영혼에 따라 땅이 변하지요. 즉 땅은 사람들의 잣대가 아니라 자연의 법칙으로 변화를 거듭하지요."
"그럼요. 아무리 능통한 지관이 고른 명당에다 매장해도 땅이 거부하면 물이 차고 벌레들이 꼬이
기 마련이지. 가끔 신라시대나 조선시대의 썩지 않은 시신이 발견됐다고 떠드는데 역사 유물적으
로는 좋을지 모르지만 시신의 영혼이나 자손에게는 나쁜 것이지요. 시신은 뼈만 남기고 깨끗이
썩는 것이 자연의 법칙이지. 살아 생전에 죄를 짓지 안은 육체와 영혼만이 명당에 들어갈 수있어
요. 그런데 살면서 어떻게 깨끗하게만 지낼 수있단 말이요. 본의 아니게 거짓말도 하게 되고 남에
게 상처를 주게 되는 게 인생이지 않소. 그러고 보면 깨끗한 화장을 놔두고 후손이나 시신의 영혼
에게 위험이 따르는 매장을 고집하는 걸 보면 답답하다오." "그러게 말입니다. 그런데 단군성전에서 왜 머리 아픈 매장까지 갔죠?" "명당을 설명하다보니 그렇게 됐지요. 내가 잘 아는 아주머니와 단군성전 이야기를 하나 하죠. 평소 그 아주머니는 살이 많이 찐 게 고민일 뿐 돈 잘 버는 남편과 자식을 가진 강남의 부러울 것 없는 중년 여자라오.
어느날 아주머니에게서 전화가 왔는데 갑자기 몸이 아파서 병원을 찾았는데 모든 검사를 다해봐
도 정상이라는 거야. 몸에는 이상이 없다는 병원진단에도 아주머니는 아픈 것이 심해져서 외출도
못 한다며 자신이 이대로 죽을 운명인지를 묻더군요. 나는 병액을 쫒는 비법을 모두 설명해주었
지요. 몇달 후 아주머니에게서 다시 전화가 왔는데 비법을 열심히 썼는데도 일어나지 못하고 남
편이 죽을 먹여 준다며 울지 뭐요. 나는 마지막 방법으로 태백산 단군성전에서 3일 동안 안정을
취하면 나을 지도 모르겠다고 했지. 사실 나는 아주머니가 아픈 몸을 이끌고 초행(初行) 길인 단
군성전에 갈지 의문스러웠고 간다해도 완치는 어렵고 앉아서 밥이나 먹을 정도가 되길 바랬지.
그런데 몇일 후 아주머니와 남편이 내 사무실에 왔어요. 놀라는 나에게 부부가 고맙다고 연신 고
개를 숙이는 거야. 연유를 물어보니, 아주머니는 나에게 단군성전이라는 말을 듣는 순간 이대로
죽을 수없다는 오기와 함께 단군성전에 가고 싶다는 욕구가 생기더라는 거야. 아주머니는 남편에
게 당장 단군성전에 가자고 말했지. 뚱뚱한 당신 메고 가다 내가 죽겠다며 남편은 일언지하에 거
절했다는 군요. 아주머니가 울며 가야된다고 하니까 남편도 어쩔 수없이 승낙을 했다오.
집에서 태백산까지는 남편이 차를 몰고 가면 되지만 아파서 몸이 축축 늘어지는 뚱뚱한 아주머니
를 방에서 차까지 옮기는 것과 태백산 주차장에서 단군성전까지 옮기는 것은 전쟁이었다 더군.
여러 사람들의 도움을 받으며 우여곡절 끝에 아주머니를 단군성전에 떨어트려 놓은 남편은 근처
모텔에서 세상 모르고 잠을 잤대요. 얼마나 잤을까 남편은 갑자기 누군가가 자신을 툭툭 건드리
더랍니다. 겨우 눈을 뜬 남편 앞에는 단군성전에 놓고 온 부인이 서있더랍니다. 피곤한 남편은
'꿈결에 헛것이 보이는구나'며 중얼거리는데 '여보 아래에 택시 세워 났으니 빨리 돈 주고 저녁 먹
으러 갑시다' 라는 소리에 정신이 들었답니다. '밥 먹으러 가자' 며 연신 소리지르는 부인을 확인
한 남편은 심장 떨어지는 줄 알았대요.
단군성전에 있던 아주머니는 삼일이 걸리던 열흘이 걸리던 병이 나을 때까지 있자. 관리인이 내쫓으면 차라리 단군성전에서 죽자는 심정이었는데 갑자기 몸의 통증이 없어지더랍니다.
그러더니 손발이 움직여지고 몸을 일으켜 앉을 수있게 되더랍니다. 너무나 기쁘고 놀라 한참을
멍하니 있는데 갑자기 배에서 허기가 느껴지더랍니다. 아픈 것만 나으면 다행이다 싶었는데 배가
고프다고 바로 단군성전을 나가면 너무 이기적이란 생각에 아주머니는 이를 악물고 참았답니다.
그러나 현기증까지 생긴 아주머니는 어쩔 수없이 일어났고 발걸음을 떼는 자신을 발견했답니다.
너무나 놀란 아주머니는 기쁨에 넘쳐 한발 한발 조심스럽게 발을 떼며 단군성전을 나와 택시를
타고 남편이 있는 모텔까지 왔다는 거죠.
나는 부부의 이야기를 듣고 그렇게 빨리 회복될 수있는지 무척이나 놀랐지요. 아주머니와 남편
이 고맙다며 떠들고 간 후에도 정신이 멍했지요. 나도 평소 단군성전이 대단한 기운을 가지고 있
는 명당이라 생각했지만 그정도 인지는 몰랐다오." 아직도 그 일을 믿을 수없다는 듯 이선생님은 흥분을 감추지 못하며 긴 이야기를 한번에 쏟아 냈다.
"충분이 그럴 수있어요. 단군성전의 기운이 엄청나긴 하지만 일단 아주머니의 몸이 정상이라는
병원진단이 나왔잖아요. 아마도 아주머니는 병원에서 진단할 수없고 자신도 모르는 마음의 병이
나 스트레스가 있었나 보죠. 나도 아파트에서 글만 쓰다보면 좋아서 하는 일인데도 밥을 못 먹겠
고 온 몸이 아플 때가 있어요. 병원에 가면 신경성 위염이라며 약을 지어주지만 먹어도 효과가 없
을 때가 더 많아요. 그럴 때 가족의 부축을 받으며 명산의 바위에 누워 소나무 향기를 맡으면 이
상하게 통증이 없어지고 배가 고파지면서 음식을 먹을 수있게 되요."
행복을 찾는 신비여행(7) 건원릉
2) 건원릉
"영혼은 존재하는가"
영혼과 자연이 작품주제인 나에게 이런 질문은 흔하게 쏟아진다. 내가 영혼과 자연을 작품주제로
삼게 된 계기는 대학원 시절 존경하던 지도교수님의 권유 때문이었다. 제자들과 격의없는 술자리
를 즐기셨던 교수님께서는 그날도 변함없이 '삶은 예술이어야한다'며 열변을 토로하셨다.
"자네의 삶과 바꿀 수있는 예술세계는 무엇인가"
예술가로 평생을 살겠다고 호언하던 나에게 교수님께서 질문하셨다. 그당시 나에게는 나만의 예
술세계가 없었고 그저 서구적이고 첨단적인 작품세계를 가질 거란 생각이었다.
"첨단적인 예술세계는 백남준화백이 다 보여 주었다. 미국과 유럽에서 추구하는 서구적인 예술은
백남준화백에 의해서 모두 소진 되었어. 이제 지구상에 남아있는 것은 동양적인 예술세계인데 특
히 한국의 예술은 아직도 미지의 세계로 남아있다. 한국적인 것, 영혼이 담긴 우리의 예술이 앞으
로 세계를 지배할 것이며 지구의 미래가 될 것이다. 영혼이 들어있는 한국적인 것을 자네 삶의 예
술세계로 삼았으면 하네"
나에게는 무척이나 감동이었던 교수님의 권유내용은 정작 당사자인 교수님께서는 약주로 인해
그날의 열변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날 이후로 나는 영혼이 담긴 한국적인 예술세계를 갖
기 위해 고심했고 그러던 중 한국불화(佛畵)를 디자인적으로 표현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호
남의 미술교사가 불화를 서양화기법으로 표현하여 프랑스 화단(畵壇)의 주목을 받는다는 기사를
읽게 되었다. 불화에 대한 디자인적 표현은 서양화기법의 그녀와는 다른 방식이기에 나의 생각
을 밀고 나가려 했지만 포기했다. 교사생활 틈틈이 불화를 주제로 정하고 서양화기법으로 새롭게
다듬었을 그녀만의 영역을 존중해주고 싶었다.
나는 새로운 마음으로 작품주제에 대해 골몰했고 그러던 어느 날 무속인의 화려한 색이 훌륭한 예
술이 되겠다는 생각을 했다. 무속인의 화려한 색, 생동감 넘치는 율동, 그들의 영혼세계는 예술로
승화시킬 수있는 화려한 영역이지만 나에게는 문제가 있었다. 초등학생시절부터 관상, 손금, 별
자리 서적을 섭렵(涉獵)했고 대학시절엔 주역을 읽으며 친구 손에 이끌려 무속인 집에게도 가 봤
었다. 대학원시절부터는 당산나무, 당산석, 부적과 같은 '소원을 기원하던 대상'에 대해 흥미를
보였던 나였는데 이상하게 굿을 무서워했다. 나에게 무슨 귀신이 붙은 건지 어려서부터 TV방송
의 굿도 무서워했고 특히 굿판의 꽹과리, 장구소리는 머리가 아플 정도였다.
그렇게 예술과 두려움 사이에서 갈등하던 중 유명했던 가수가 '한국무속인의 색체'로 프랑스 미술
박사학위를 받았다는 기사를 접하게 되었다. 나는 한국의 무속을 프랑스에서 예술로 승화시켜준
그녀가 자랑스러웠고 편안한 마음으로 무속인의 색체를 단념하기로 했다. 아무리 예술이고 작품
주제 라지만 평생을 옆에 끼고 살아가려면 내가 편안하고 좋아하는 것으로 삼아야 한다는 당연한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나는 평소에 편안하고 관심을 가졌던 "자연물에 대한 기원의 마음"을 예술세계로 삼고 '영
혼과 자연'을 작품주제로 결정했다. 평소 풍수지리에 흥미가 있어 여행을 많이 다니던 나는 자연
은 자신이 있었는데 영혼은 걸림돌이었다. 어려서부터 무서움이 많았던 나는 어두운 밤을 싫어했
고 벌레를 무서워했으며 방송되는 귀신도 두려워했다. 나는 예술을 위해 두려움을 극복하기로
하고 친구들과 심야 나이트클럽을 전전했고 영혼을 만나러 전국의 폐가를 찾아다녔다. 나이트클
럽에도 전국의 폐가에서도 영혼은 고사하고 귀신의 옷자락도 발견하지 못했던 나는 밤길의 방황
을 포기하기로 했다. 혹여 소란스런 나이트클럽이나 지저분한 폐가에서 영혼이 산다해도 조용하
고 깨끗한 곳을 좋아하는 나와는 취향이 다르기에 그들과는 교감할 수없을 거라 확신했다.
나는 깨끗하고 조용한 곳에 사는 영혼을 작품주제로 삼기로 하고 소원을 기원하는 자연물인 나무,
돌, 바다, 산과 심산유곡의 무덤을 뒤져보기로 했다. 나는 썬크림도 바르지 않고 산, 바다가, 무덤에서 혼자 잠을 자며 영혼을 기다려 봤지만 얼굴에 기미와 검버섯만 남겨졌다. 나는 '세상에 영혼이란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과거와 현재까지 자연물에 소원을 기원하는 마음'만 예술로 표현하
기로 했다.
흔히 자연물에 소원을 기원하려면 간절한 마음이 전부인데 가끔은 물 한 바가지, 탁주 한 사발, 동
전 한입, 부적 한장을 놓고 오는 경우도 있었다. 물, 탁주, 동전에 숨어 있는 간절한 마음은 나의
예술적 감각으로 얼마든지 표현할 수있었는데 부적은 달랐다. 내가 도를 닦은 도인이나 그렇다고
신내림을 받은 무속인도 아니고 역학 조금 알고 무덤에서 잠을 잔 경력으로 부적을 그리는 것은
자만이었다. 비록 현대의 부적이 무속인의 전유물이 되었지만 과거엔 학자층에서 폭넓게 작성되
었고 새해가 되면 평민들도 학식 높은 원로에게 부탁했던 소망의 증표였다. 그렇듯 부적은 자신
의 의지를 알리고 소망을 위해 노력하는 마음의 서약서인데 내가 그림 좀 그린다고 어설프게 흉내
만 낼 수는 없었다. 나는 부적에 대한 여러 자료를 섭렵하던 중 명당의 무덤에서 기(氣)를 받으면
강력한 부적을 만들 수있다는 정보를 알게 됐다. 그런데 기를 받을 수있는 명당의 무덤은 생전에
왕, 장군, 학자의 것이야 하며 필히 300년은 넘어야 한다고 했다. 그동안 나는 여러 무덤을 돌아다닌 결과 학자보다는 장군이면서 왕이었던 능에서 많은 기운이 넘친다는 것을 깨닫고 있었다.
"조선 초기의 왕릉은 300년이 훨씬 넘었고 서울을 중심으로 모여있는데 굳이 지방까지 내려갈 필
요가 있겠는가?"
심산유곡의 무덤도 모자라 이순신장군, 김유신장군, 문무대왕 수중능이 잠자는 장소로 보일 만큼
오만해진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며 서울근교의 왕릉을 찾기로 했다. 삼국시대의 왕들은 대부분 군
사를 이끌고 전쟁터를 누볐지만 조선의 제왕들 중에 장군 출신인 분은 태조 이성계, 태종 이방원
뿐이었다. 국방을 증강시킨 분은 세종, 세조, 효종이 대표적인데 세종은 병약한 몸, 세조는 왕위
찬탈, 효종은 이장(移葬), 태종은 원경왕후와의 불화가 흠이라고 생각했다. 나는 장군이며 조선
을 건국한 왕이면서도 왕비없이 홀로 묻힌 태조 이성계의 능을 택했다. 무속인들 사이에서 이성
계대왕님과 최영장군님의 영혼은 신령스런 존재였고 무덤은 예지력을 증가시키는 장소였다.
그러나 나는 왕이나 장군무덤에서 나오는 기운이 예술부적을 그리는데 도움이 될지 모른다는 막
연한 기대를 가졌을 뿐 영혼의 존재는 믿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단순한 생각과 편안한 마음으로
태조의 능을 선택했다. 나는 오전12시 이전의 강한 기를 받기위해 일찍 일어났고 돗자리 대용으로 신문과 물, 빵을 챙겼다. 집에서 건원릉까지는 버스를 여러 번 갈아타야 하기에 서둘러 출발했다. 자주 있다는 버스는기다리는 시간이 길었고 마치 나의 건원릉 접근을 막는 무엇인가가 작용하는 듯했다. 오후1시가 넘어서야 동구릉 입구에 도착했고 허기와 짜증으로 채워진 몸을 이끌며 겨우 표를 끊을 수있다. 건원릉을 향해 힘없이 걸어가는 나의 뒤를 검표원 아저씨가 일정한 거리를 두고 따라왔다. 나는 순찰 중 일거라 편하게 여기면서도 조금 전 나를 포함하여 표를 건네는 사람들의 얼굴을 유심히 관찰하던 아저씨의 모습이 떠올랐다. 마치 범인을 식별하는 아저씨의 조금 전 태도가 이상했지만 관심을 두지 않고 건원릉에 도착했다.
건원릉은 짧은 풍수지식을 가진 내가 척 보기에도 가히 강력한 관운을 품은 명당임이 느껴졌다.
그러나 내리 쬐는 햇볕, 허기, 피곤함이 겹친 나는 건원릉의 관운이나 명당 따위보다는 능에 앉
아 물이나 마시고 싶은 마음 뿐이었다. 가뿐하게 건원릉으로 올라가려는 순간 강력한 무언가가
나의 뒤를 때렸고 무의식적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팔짱을 끼고 서서 나를 주시하고있는 남자, 그
는 계속해서 나를 쫒아 온 매표원 아저씨였다. 나는 흠짓 놀랐지만 아저씨가 혼자 온 여자가 이상
하여 관찰한다고 생각하며 건원릉을 구경하는 척 돌아다녔다. 그런데 아저씨는 내가 움직일 때마
다 일정한 간격으로 쫒아 다녔고 지쳐 버린 나는 그가 돌아가길 기다리기로 했다. 내가 그늘을 찾
아 신문을 깔고 앉자 아저씨도 땡볕아래 땅바닥에 주저앉았다.
"아저씨는 왜 나를 감시하는 것인가? 기미 낀 얼굴, 후줄근한 옷차림의 내 모습에 호감은 아닐 것
이다" 계속해서 나를 주시하는 아저씨 모습이 기가 막히면서도 왜 저런 행동을 하는지 생각해보았다. "매표원을 오래 하다보니 능에 올라갈 사람이 구별되나? 그것은 아니겠지. 능에 올라 노는 아이들도 많고 심지어 능에서 술을 마시는 아저씨도 있는데 하필 나를 감시한단 말인가"
한 시간을 꼬박 햇볕에 앉아 나를 감시하는 아저씨도 나름대로 나의 어떤 점이 미웠을 것이다.
"그런데..., 아저씨는 정문에서 표를 건네는 사람들을 유심히 쳐다보며 마치 누구를 찾는 듯했다.
그러다 나를 본 아저씨는 아침부터 기다린 사람처럼...., 마치 나를 감시하는 임무를 이성계대왕님
에게 계시를 받은 듯...., 에이 설마"
나는 태조 이성계를 무심코 이성계대왕님이라 칭하고 있었다.
"어찌 되었건 나를 감시하는 아저씨가 있으니 그냥 능 앞에서 기를 받아야겠다."
나는 빵을 먹으며 중얼거렸고 결국 건원릉에 올라가는 걸 포기했다. 그러자 갑자기 아저씨가 일
어났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오던 길을 되돌아가려 했다. 나는 놀라움과 충격에 휩싸이기 시작했
다.
"아니 조금 전까지 범죄자를 쫒는 탐정처럼 나를 감시하더니 왜 싱겁게 돌아가지. 그렇다면 건원
릉에 올라가도 된단 말인가"
이런 생각이 머리를 스치는 동시에 아저씨가 뒤를 돌아보며 나를 노려 보았다. 공포영화에서 처
럼 밝은 햇살에 주위의 모든 것이 사라지며 마른 체격의 아저씨의 모습만 푸른 색으로 변해갔다.
시체처럼 푸른 빛으로 변해가는 아저씨의 모리 위에 알 수없는 검은 물체가 또아리를 틀고 앉아
있었다. 나는 아저씨와 검은 물체의 모습에 너무 놀라 주저앉을 뻔했다. 아저씨는 다시 한번 나
를 주시하는 것으로 경고표시를 하고 뒤돌아서 가 버렸다. 동시에 검은 물체도 햇볕 속으로 서서
히 사라져 갔다. 나는 검은 물체를 주시했고 햇볕으로 돌아가는 검은 물체는 황금빛으로 변한 후
분명히 건원릉 속으로 사라졌다. 나는 눈을 의심하며 건원릉을 경외스럽게 바라볼 수 밖에 없었
다.
"이럴 수가, 빵을 먹고 물도 마시며 한 시간 넘게 앉아 쉬었으니 피곤은 다 풀렸는데..., 분명 헛것을 본 게 아닌데..., 그렇다면 이성계..., 아니 이성계대왕님의 영혼이란 말인가..., 저 아저씨는 우연히 심심해서 나를 따라 온 것이 아니란 말인가..., 그렇다면 천마총, 김유신장군 등의 무덤에서 잠이나 잤던 나의 무례한 행동을 이성계대왕님 영혼이 알았단 말인가"
그럴지도 모르겠다. 왕자의 난으로 신덕왕후의 소생 방번·방석 형제가 죽고 태종 이방원이 등극하자 울분을 삼키며 함흥으로 떠났던 태조, 무학대사의 권유로 어쩔 수없이 한양으로 돌아오게 되자 방원을 향해 활을 쏘고 쇠 방망이를 휘둘렀던 이성계, 그의 몸에 비수로 꽂혔던 생전의 골육은 조선과 함께 땅에 묻히며 역사로 사라졌을 것이다. 그러나 살아생전 신덕왕후를 향한 그의 사랑은 영혼이란 이름으로 남아 이 세상을 떠돌지도 모를 일이다. 아직도 그는 아침마다 정릉을 오가며 신덕왕후를 위해 정성을 기울이지 않을까? 어쩌면 이성계대왕의 영혼은 신덕왕후를 향한 사랑과 구국(救國)의 명당이라는 후손의 염원 사이에서 자신을 채찍질 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그의 능에 올라가 방이나 먹고 물이나 마시려 했던 나를 영혼인들 용인할 수있었을까? 지나
간 시간 동안 오만한 자세로 명당을 기웃거린 나의 모습은 사진으로 찍히듯 허공에 남아 모든 영
혼들이 공유하고 있었나 보다. 육체의 존재만으로, 보이는 것만으로 '영혼이 있다 없다' 를 결정
지었던 좁은 마음의 나를 반성했다. 그리고 이성계대왕님 능 앞에 무릎 꿇고 그동안 영혼들에게
저지른 나의 잘못을 진심으로 사죄했다.
태조 이성계의 능인 건원릉은 동구릉 안에 있다. 서울과 경기도의 경계를 지으며 구리시 동구동
산14번 검안산 기슭 총면적 191만 5891㎡에 숲으로 조성된 "동구릉(사적 제193호: 1970년5월26
일 지정)"은 조선왕조의 능묘 중 가장 규모가 크다. 동구릉에는 가장 깊숙한 곳에 위치한 건원릉
(健元陵)을 비롯하여 현릉(顯陵: 5대 문종과 그의 비 현덕왕후), 목릉(穆陵 : 14대 선조와 그의
비 의인왕후, 계비 인목왕후), 휘릉(徽陵 : 16대 인조의 계비 장렬왕후), 숭릉(崇陵 : 18대 현종과
그의 비 명성왕후), 혜릉(惠陵 : 20대 경종의 비 단의왕후), 원릉(元陵 : 21대 영조와 그의 계비 정순왕후), 수릉(綏陵 : 23대 순조의 세자인 추존왕 익종과 그의 비 신정왕후), 경릉(景陵 : 24대 헌종과 그의 비 효현왕후, 계비 효정왕후) 등 모두 아홉 개의 능이 조정되어 있다.
태조 이성계는 새 왕조를 개국하고 17년 뒤인, 태종 8년(1408년) 5월 24일 승하하여 그 해 9월 9일
에 이곳에 묻혔다. 동구릉의 조성은 조선왕조 전 시기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동구릉이라고 부른 것
은 추존왕인 익종의 능인 수릉(綏陵)이 아홉번째로 조성되던 1855년(철종 6) 이후의 일이며, 그 이
전에는 동오릉(東五陵), 동칠릉(東七陵)이라고 불렀다.
조선 왕릉의 지침이 되었던 건원릉 지세의 풍수지리에는 그에 걸 맞는 일화가 전해져 온다. 아버
지 이성계를 향한 광기의 효성을 품었던 이방원, 조선왕실의 영원을 위해 피를 뿌렸던 태종에게
조선을 건국한 태조의 능자리는 하늘이 내린 최고의 명당이어야 했다. 태종의 명에 따라 한양과
가까운 파주, 고양 등지에서 좋은 능자리를 물색하던 중 당시 검교참찬 의정부사를 지내던 김인귀
(金仁貴)가 건원릉 자리를 영의정부사 하륜에게 추천하였다. 하륜은 김인귀의 건의에 따라 직접
건원릉 자리를 돌아보고 와서 태종에게 보고하여 결정되었다. 당시 풍수지리에 큰 명성이 없었던
의정부사 김인귀의 추천만으로 하륜이 지세를 확인하기엔 설득력이 부족하다. 일설에는 생전에
유연히 동구능 자리를 둘러보았던 무학대사가 "이곳은 하늘이 내린 최고의 길지"라고 극찬했었던
것을 김인귀의 측근이 들었다. 그러던 중 태종이 태조의 능자리를 물색한다는 소식을 듣고 김인귀
는 과거 무학대사가 극찬했던 자리를 하륜에게 전했다고 한다. 하륜은 직접 건원릉 자리를 돌아
본 후 무학대사의 지적이 정확했음을 확인하고 태종에게 보고했다. 태종은 학문과 풍수지리를 겸
비한 조선 최고의 고승과 학자인 무학대사와 하륜이 추천한 자리이기에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건원릉은 조선왕조 중 유일하게 떼가 아닌 억새풀을 심었기에 신비로움 또한 크다. 생전에 이성계
는 고향 함흥의 억새풀를 무척이나 좋아했다고 한다. 태종은 억새풀이 아버지의 마지막 옷이라 하
여 함흥에서 건원릉까지 일렬로 릴레이해서 가져올 정도로 정성을 기울였다고 한다.
조선 초 풍수지리를 통달했던 무학대사와 하륜의 천거에 의해 조성된 건원릉의 기는 더 이상의 설
명이 필요없을 것 같다. 무릇 혹자는 조선의 임진왜란, 한일합방 같은 어려움을 거론하며 건원릉
을 비하하지만 그래도 태종의 염원이었던 조선왕실의 1000년은 못되어도 500년은 가지 않았는가?
(물론 조선왕실의 500년은 민초들의 땀과 여인들이 인내로 가능했던 것이다. 그리고 임진왜란, 한
일합방은 무학대사나 하륜이 도읍을 정할 때 이미 예견했었다)
건원릉의 기에는 강력한 관운을 품고 있다. 즉 여자에게 남편운을 좋게 해주는 관운, 남녀모두에
게 자손운을 높여 주는 관운과 직장에서 능력을 펼칠 수있는 관운이다. 건원릉에 있는 관운을 받
으려면 될 수있으면 혼자 가는 것이 좋고 혹여 연인이나 남편과 가는 것은 무방하다. 그러나 건원
릉의 관운에는 고시합격, 승진, 대권과 같은 선거승리의 관운은 희박하다. 또한 병을 치료하는 관
운도 약한데 가끔 무속에서 병자를 치료한다고 능에서 굿을 했다는 소식을 접하면 답답하기 그지
없다. 영혼의 존재를 일깨워 주었던 건원릉과 나와의 특별한 인연 때문이었을까? 건원릉은 나에게 신비한 사건들을 많이 안겨 주었는데 그중 두 가지를 더 적어본다.
+첫번째
나는 가끔 친구들에게 건원릉의 관운에 대해 이야기하는데 어느날 가까운 친구가 건원릉에 가겠
다고 했다. 미혼인 친구는 부족한 결혼관운을 보충하기위해 산보 삼아 가겠다고 했다. 나는 '출
발부터 이성계대왕능에서 부족한 결혼관운을 얻겠다' 고 마음으로 다짐하라고 일러주었다. 나의
다짐을 약속한 친구는 갑자기 아픈 엄마를 데리고 가겠다고 우겼다. 나는 건원릉이 병을 치료하
는 곳도 아니고 건강운도 적은 곳이기에 강력히 반대했다.
친구는 나의 반대와 우려를 무시하고 엄마를 데리고 가겠다는 결정을 내렸다. 혹시라도 '다른 능
으로 빠지지 말라'는 나의 염려에 친구는 '꼭 건원릉을 다녀오겠다'며 진지한 태도를 보였다.
몇일 지나서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동구릉이 육사 옆에 있는 것 맞지. 이상하게 그날은 너무도 더웠어. 어쩌면 내가 덥게 느껴졌는
지 모르겠지만 차도 막히고 무척 오랜 시간 운전한 것 같았어. 그래서 이정도면 나올 시간이 됐다
고 생각했어. 육사가 보이다가 바로 옆에 릉이라는 간판이 있기에 들어갔지. 네 말대로 능이 하
나였고 너무 피곤해서 그런지 건원릉이 아니라도 조선시대 능이면 되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어.
그곳에서 엄마와 좋은 기운을 많이 마셨어"
나는 아무리 힘들어도 건원릉과 태릉을 구별 못하는 친구가 기가 막혔기에 아무 말도 하지 않다.
태릉은 조선의 역사에서 가장 철권을 휘둘렀고, 남편과 합장하기를 원했지만 끝내 홀로 묻힌 문정
왕후의 능이었다. 능력을 마음껏 펼쳤던 문정왕후의 힘이 도움이 되었던지 친구는 직장생활을 멋
지게 펼치며 우아한 싱글로 지내고 있다.
+둘째
2004년1월 설날을 앞두고 알고 지내는 기자동생과 건원릉에 갔다. 동생은 미혼이었고 건원릉에
결혼관운이 많다는 나의 유혹에 끌려 동행을 결정했다.
"동구능 입구에서 건원릉까지는 무척 길고 춥게 느껴질 테니 옷을 두껍게 입고 올 것. 건원릉에 도
착 할 때까지 다른 능으로 가고 싶은 충동이 느껴져도 절대 가지 말 것. 건원릉에 도착하여 추운
곳에서 기를 받으며 더 추울 것 같지만 기를 받고 나면 온기가 느껴짐"
"동구릉에서 건원릉까지 15분 정도 걸린다는데 그렇게까지 춥게 느껴질까요? 건원릉 앞에서 바람
을 맞으며 기를 받으니까 상식적으로 나올 때 춥지 않을까요? 건원릉이라는 팻말이 있을 텐데 내
가 왜 아무 곳이나 들어가고 싶겠어요"
나의 주의에 동생은 직업에 걸맞게 정색하며 조목조목 반박했다. 의문이 많고 장담을 찍던 동생
은 동구능 입구에 도착하여 표를 끊고부터는 달라지기 시작했다.
"15분은 훨씬 더 걸은 것 같은 데 아직 멀었느냐? 건원릉을 가기 전에 얼어죽을 것 같다. (급기야
어떤 능을 가리키며) 이곳이 건원릉이죠. 우리 이곳에서 기를 받아요. 발이 떨어지지 안아서 더
이상 못 갈 것 같으니 그냥 이곳에서 기를 받죠"
우기는 동생을 겨우 달래서 건원릉에 도착했고 '건원릉' 팻말을 보자 미안해 했다. 나의 걱정대
로 유난히 바람이 세게 불어 더욱 춥게 느껴지는 상태에서 우리는 기를 받겠다고 10분쯤 서있었
다. 그런 후 우리는 출발했고 나는 동생에게 추운지를 물었다.
"추운데 서서 있었는데 이상하게 덥게 느껴지네요. 아까 내가 들어가려던 능이네요. 분명 팻말이
적혀 있는데 나는 왜 이곳이 건원릉이라 느꼈죠. 이곳에서 나를 부른다는 이상한 느낌이 들었어
요. 어, 건원릉과 동구릉입구가 가까운 거리네요. 그런데 건원릉으로 갈 때는 왜 멀게만 느껴졌는
지 정말 이상하네" 동생은 건원릉 갈 때와 나올 때가 왜 다른지 의아해 했다.
"누구나 부족한 것을 받으러 갈 때는 당연히 심리적으로 혼란스럽고 어렵다고 느끼지요. 나도 처
음 갈 때는 덥고 힘들어서 웃옷을 벗고 갔는데 주위를 돌아보니 혼자서 반팔을 입고 있더라고요"
나는 웃으며 대답했다.
행복을 찾는 신비여행(8)
3) 인왕산
북한산, 남산, 인왕산, 덕수궁, 비원, 한강..... 빌딩과 인파 그리고 자동차로 북적대는 서울에도
세계가 인정하는 자연의 명소가 많다. 멀티미디어 영화관, 댄스클럽의 화려한 열광에 비한다면
자연명소는 중압감을 일으키는 보존의 짐쯤으로 여겨질 수있다. 한 평 공간이 아쉬운 서울에 자
연명소 따위는 자리를 차지하는 공터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천만이 넘는 서울시민의 정신적 육체
적 위안처이다. 현실적으로도 버스나 전철을 이용해 쉽게 닫을 수있는 위안처에는 생각보다 많
은 이들의 발길이어지고 있다. 고른 연령층의 방문자들은 각별한 애정을 가지고 정기적으로 위안
처를 찾는 걸 알게 되면 조금은 놀라게 된다.
새롭고 첨단적인 것이 미래를 보장하는 시대에 자연명소가 밀어 버려야 할 대상으로 전락하지 않
았던 건 애정을 가진 그들이 있었기에 가능했다. 개발논리가 팽배해지면 자연명소나 위안처는 소
리없이 사라질 위태로운 처지지만 아직도 그들은 예전의 위용을 간직하고있다. 세상에 영원한 것
은 없다지만 조선왕조에 의해 깨지지 않는 불멸의 명산으로 대접받았던 인왕산으로 신비여행을
떠나 본다.
인왕산은 조선개국시절 한양으로 도읍을 정할 때 주산(主山)의 북악산, 안산(案山)의 남산, 좌청
룡(左靑龍)의 낙산(駱山)과 함께 우백호(右白虎)의 반열에 오른 명산이었다. 조선왕실에서 단단
한 힘과 지혜를 상징하는 금강역사(金剛力士), 인왕역사(仁王力士)에서 이름을 따온 인왕산은 조
선시대동안 그 값을 치루며 지냈다. 산 전체를 물들이는 연분홍 진달래, 풍부한 약수, 누대(樓臺)
가 있었던 인왕산은 조선시대 화가들과 문장가들에게 산수화와 시문의 단골 주제가 되었다.
화사한 봄, 그림, 시의 배경이었던 인왕산의 아름다운 모습과는 달리 내면에는 조선8도에서 가장
힘있던 호랑이의 은신처라는 두려움이 숨어 있었다. 경복궁 내정과 창덕궁 후원에 내려와 난동
을 부리고 수백명의 백성에게까지 피해를 입혔던 인왕산 호랑이는 조정에서 군대를 출동시켰을
정도로 명성이 자자했다. 인왕산 호랑이는 일제식민지시절까지 이어져 가죽과 사냥을 즐기려는
일본인들에게 표적이 되어 멸종으로 이어졌다.
그러나 호랑이의 은신처, 산수와의 주제로 힘과 아름다움을 함께 지녔던 인왕산의 화려함을 마음
이 아닌 현대적 시각으로 확인하려 든다면 실망을 맛보게 된다. 혹여 라도 남아 있을 조선시대의
명성흔적이라도 발견하려 찾아간 인왕산은 서울특별시 종로구와 서대문구 홍제동 경계의 틈에서
초라한 명맥을 유지하는 언덕 배기 산이었다. 관악산이나 북한산에 비해 찾는 이들이 적은 인왕
산은 338m의 낮은 높이와 빽빽이 들어선 콘크리트 건물에 가려져 근저주민들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인왕산으로 들어가는 길은 7~9개의 방법이 있지만 경복궁역, 독립문역, 무악재역이 가장
많이 이용되는 코스이다. 유심히 찾아도 지나치기 일쑤인 팻말을 따라가면 산 전체를 에워 싼 건
물 틈에서 겨우 모습을 드러낸 인왕산의 모습이란 초라하기 이를 데없다.
독립문 역에서 시작하는 인왕산 선바위 입구는 가파른 언덕을 따라 이어지는 사당인지 절인지 분
간하기 어려운 밀집된 건물이 더해져 산란스럽기까지 하다. 기도 처라 불리는 산란스러운 건물
때문인지 별로 길지도 않는 언덕과 계단은 이상하게 숨이 차고 마땅히 앉아 쉴 곳도 없다. 한 겨
울에도 땀이 날만큼 헉헉대며 오른 중턱엔 뜸금없이 한옥 한동이 덩그러니 놓여 있다. 오방 천 자
락이 날리고 솥단지가 걸려 있는 스산한 주변과 한옥에서 울리는 피리, 장구, 무속인의 구슬픈 굿
소리가 더해지면 섬뜩한 기운마저 느껴진다. 한옥은 태조 이성계와 신덕왕후, 무학대사, 나옹, 단
군 등 여러 호신신장(護身神將)을 그린 무신도 28점이 걸려 있는 인왕산 국사당이다.
원래 국사당은 목멱신사(木覓神祠)라 불리던 조선왕실의 기원 처로 남산에 있었는데 일제시대 때
강제로 인왕산으로 옮겨져 왔다. 지금은 일반에게 개방되어 누구든 들어갈 수있고 원한다면 굿
도 할 수있는 곳으로 중요민속자료로 지정되어있다. 한옥의 유래를 알고 나면 대단하지도 으스
스 한 장소도 아닌데 인왕산을 오르다 굿소리가 들리면 항상 발걸음이 빨라진다.
국사당을 뒤로 하고 계단을 오르면 이번에는 굿소리보다 더한 소름 돋는 형상의 물체에 기겁을 하
게 된다. 대충 반죽하다 굳어버린 콘크리트가 유령이나 해골처럼 보이는 두 덩어리에는 비둘기들
의 배설물이 잔뜩 묻어 있다. 촛불과 향이 피어오르는 덩어리 앞에서면 어디선가 흡혈귀가 튀어
나올 듯한 분위기에 저승사자라도 도망갈 것 같다. 초보자가 보기에도 범상 치 않은 분위기를 가
진 기묘한 덩어리는 서울특별시 민속자료 제4호로 지정된 '선바위'이다. 스님이 장삼을 입고 수행
하는 것처럼 보인다 해서 선자(禪字)가 붙여진 선바위는 간혹 석불님, 관세음보살이라 부르는 이
들도 있다. 선바위가 유명해진 데에는 한양도읍이 500년 국운 밖에 이끌어 내지 못하리라는 것을 예지한 무학대사가 선바위에서 천일기도를 한후 1000년 조선국운의 비법을 계시받았기 때문이라 한다. 한양도읍의 가장 큰 문제점인 관악산의 화기를 선바위의 강력한 힘으로 제압하면 1000년 조선국운이 이어지는 비법이었다. 무학대사는 이 비법을 실행하기 위해 태조 이성계에게 선바위를 도성 안으로 넣자고 주장했으나 정도전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이후 조선이 519년을 끝으로 일본에게 종속되자 무학대사의 예지력과 선바위에 대한 능력이 주목받게 되었다. 선바위에 대한 무학대사의 주장이 받아들여졌다면 국운이 성하여 정조개혁, 인조반정실패가 실현되어 한반도에 신진문물이 빨리 유입될 수있었을까? 원래 성사되지 못한 것에는 과장이 난무한다지만 조선 1000년 국운의 힘이 실려 있다는 선바위는 기묘한 형태만큼이나 특별한 능력을 지니고 있다.
수려하고 기품있는 바위로 이루어진 인왕산에서 선바위는 피뢰침과 같은 존재이다. 하늘과 땅에
서 끝임 없이 발생되는 기운 중에는 지나친 강성의 기운도 만들어지는데 문제점은 강성의 기운이
빠른 쇠락(衰落)을 불러들이는 것이다. 선바위는 번개처럼 순식간에 일어나 서울전역에 쇠락을
퍼트리는 강성 기운을 모아 중화시키는 역할을 하고있다. 선바위에 의해 중화된 강성 기운은 인
왕산 곳곳에 퍼져 안정된 기운으로 만들어진 후 인왕산의 모든 바위를 통해 배출된다. 중화되고
안정된 기운이 모아져서인지 선바위 뒤를 따라 이어지는 인왕산 바위에는 중후한 품격이 배어있
다. 입이 딱 벌어지는 커다란 크기의 바위가 지닌 투박스러움은 인왕산 어디에서도 찾을 수없고
아름답게 승화된 용맹스러움이 빛날 뿐이다.
인왕산 정상에서면 서울시내가 한눈에 내려다 바라보이고 남산과 한강이 코앞에 놓이는 광경은
정녕 우백호의 등에 타고 있는 착각에 빠진다. 당장이라도 포효를 터트리며 남산을 밟고 한강을
뛰어 넘을 것 같은 꿈틀거림이 느껴지는 인왕산 바위들은 우백호의 칭호가 허상이 아님을 실감하
게 된다. 인도, 중국, 한국 등지에서 공통적으로 귀하게 여기는 호랑이는 힘, 성공같은 권(權)으
로 상징되는데 특히 백호는 더욱 존귀한 대상이다. 선바위가 끌어들인 중화와 안정의 기운이 우
백호의 기상과 어우러진 인왕산 바위에는 권기(權氣)가 배어 나오고 있다. 권기가 왕성한 인왕산
은 예로부터 대표적인 관운의 산으로 왕권과 직결된다고 여겼고 그외 승진, 학업성취, 사업달성
의 기운이 강하다고 확신했다. 인왕산의 권기, 관운의 기운은 바위에 앉아 마음을 비우고 평온
을 유지하는 휴식으로도 얻을 수있다고 믿었다.
선바위에 대한 속설은 임신기원, 정력보강, 학업성취, 승진에 도움이 된다지만 가장 큰 힘은 신들
림, 우울증의 예방과 치료일 것이다. 물론 치료는 정신과 진료와 병행해야하고 보호자를 동반한
등반이어야하는데 일년을 꾸준히 찾다 보면 선바위의 강력한 기운이 심신의 불안을 씻어 준다.
신비여행을 목적으로 선바위를 찾는다면 참배객처럼 절을 할 필요는 없고 선바위 앞에서 앉거나
서서 기를 받으면 된다.
행복을 찾는 신비여행(9) 청와대
4) 청와대
조선시대에는 경복궁의 후원, 일제시대에는 총독관저, 미군정시절에는 관저가 있었던 곳이 지금
의 청와대 터다. 1990년 춘추관과 대통령 관저가 신축되고 1993년 김영삼대통령의 지시로 일본총
독이 기거하였던 구관이 철거되긴 했다.
"장자(長子)가 쇠하고 차남이 왕좌를 이을 터, 여자에 의해 권좌가 좌우될 터, 관악산의 화기를 막
지 못해 나라 곳곳에 화마(火魔)와 기근을 불러들일 터"
경복궁에 대한 부정적 의견은 태조 이성계가 천도를 위한 궁궐 터를 잡을 때부터 거론되며 조선시
대동안 푸대접을 받는 장소가 되었다. 대한민국 정부수립 후 경복궁 일부가 대통령의 관저가 되
었지만 사연 많은 여러 대통령을 거치며 청와대는 여전히 터에 대한 회의론이 일고있다.
역사적으로 볼 때 500년 조선은 많은 시련을 겪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조선과 동시대의 세계
사를 비교해보면 그때는 격동의 시대였다. 침략, 전쟁, 종교분쟁, 전염병, 신분적 불평등과 같은
어려움이 세계 곳곳에 퍼져있었기에 굳이 조선을 시련의 국가라고 볼 수는 없다. 다만 무학대사
나 하륜이 주장한 조선의 궁궐 터를 신촌일대로 잡았다면 좀더 일찍 세계와 교류하여 자유민주주
의를 빨리 정착시켰을까 하는 의문점이 들긴 한다.
그런 아쉬움을 배제한다면 조선은 동시대의 세계 여러나라들과 비교해 볼 때 나름대로 규율과 법
률에 의해 통치된 사회였음을 대부분의 학자들이 인정하고 있다. 그럼에도 조선의 대표적 권력기
관이었던 장소가 비록 풍수적 논리이기는 하지만 부정적 느낌으로 더 많이 작용되는 것은 왜 일
까? 대를 이어 세습하는 권좌, 여자를 배제하고 특별한 계층에게만 허용되는 관직, 태어날 때부터
결정되는 신분 등으로 구성 되어진 조선시대에는 땅의 지기(地氣)가 중요했을 수도 있다. 후사(後
嗣)의 논란, 사랑이 아닌 세력에 의한 왕비선택, 몸의 염증에도 칼을 쓸 수없는 조선의 왕좌에서
궁궐 터는 생명과 밀접했을 것이다.
조선초기 왕자의 난, 양영대군과 문종의 세자폐위와 단명 등을 거쳐 조선말기 경복궁복원화제까
지 세인들에게 경복궁은 풍수지리적으로 부정적인 면이 각인되었다. 조선 500년의 부정적 각인은
일제시대, 미군정의 암울한 시기를 거치며 확실함으로 정착되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하찮은 종기
로 목숨을 잃고, 후궁에게 농락당하며, 왕위를 찬탈당했던 조선시대의 군왕을 떠올리며 우리는 역
대 대통령의 실정이 청와대 터에서 비롯됐을 거라 의심한다. 수많은 사화로 죽어갔던 영혼과 궁
녀들 내시들의 한으로 채워진 청와대 터로 인해 국운이 쇠 할거라 우려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
은 기우(杞憂)이고 엄청난 옛말이다.
지금의 대통령직은 장자나 계파에 상관없이 노력, 후원자, 배짱이 있으면 누구나 출마할 수있다.
또한 자식이 없고 이혼을 했어도 국민의 선택을 받는다면 청와대의 주인이 될수있다. 청와대의
주인은 아프면 수술받고, 후궁을 둘 수없으며, IMF를 몰고 와도 대통령직을 보장받는다. 이제는
국민들의 생각과 신념과 착각에 의해 대통령이 뽑혀지고 청와대에서 5년간 살 수있는 권한이 부여
된다. 결코 터가 군왕을 불러들이거나 땅의 기운에 의해 대통령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폭군과
당파싸움에 속절없이 세월을 보냈던 조선의 민초들은 경복궁 터가 이렇게 변한 줄 상상이나 했겠
는가?
국왕의 선택권에서 제외되었던 조선의 백성들과는 반대로 우리는 청와대 터의 주인을 고를 수있
다. 우리는 조선시대의 민초들과 달리 우리 손으로 가슴으로 청와대 터의 주인을 뽑았다. 그러기
에 우리는 경복궁 터를 탓할 수없고 청와대 터의 풍수지리를 논할 수없다. 구천을 떠도는 역대군
왕의 영혼, 유림들의 넋, 궁녀와 내시의 한이 조선시대의 경복궁 터에서는 맹위를 떨쳤을지 모른
다. 그러나 영혼, 넋, 한이 깊어도 국민의 손과 마음에 의해 결정 되어진 청와대 터의 주인에게 그들이 무슨 명목으로 참견할 수있겠는가? 이제 대통령의 실정이나 국가의 기운은 전적으로 국민과 국회의 책임, 참견, 의견제시 속에 이루지는 것이지 청와대 터나 풍수지리와는 거리가 멀다.
참고로 경복궁 터를 고집한 이는 정도전이었다. 정도전은 저서 <조선경국전>에서 '백성이 국가
의 근본이며 군주의 하늘이다'라고 했다. 백성이 국가의 근본이며 군주의 하늘이기를 원했던 정도
전의 사상과 조선시대의 경복궁 터는 일치하지 않았을 것이다. 군주제였던 조선시대에는 경복궁
터가 흉지(凶地)였을지 모르지만 백성이 근본이고 군주의 하늘이 된 지금의 청와대 터는 분명 길
지(吉地)이다. 그러나 국가의 근본이며 군주의 하늘인 백성이 정신을 바짝 차릴 때 길지에 상주하
는 군주가 바른 정책을 펴는 것은 명백한 진리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