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천년의 축소판 경주시 인왕동 반월성 동쪽에 위치한 국립경주박물관은 천년 신라의 문화를 한눈에 살펴볼 수 있는 곳으로 성덕대왕신종을 비롯한 10만여 점의 유물을소장하고 3,000여 점의 유물을 상설 전시 하고 있다.
* 관람시간 : 09:00 ~ 18:00 * 휴관 : 매주 월요일 * 전화 : (054)772-5193 * 홈페이지 : gyeongju.museum.go.kr
성덕대왕 신종 신라 35대 경덕왕이 부왕인 성덕왕의 명복을 빌기 위해 만들기 시작했으며 다음 왕인 혜공왕대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이전에도 없고 이후에도 없고 오직 하나 에밀레종이 있을 뿐이다’ 하는 격찬을 받을 만큼 그 소리나 외형에 있어 세계에서 가장 우수한 동종이다.
기마인물형토기 삼국시대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되는 말을 타고 있는 사람의 모습을 한 높이 23.2㎝, 폭 14.7㎝, 밑 지름 9.2㎝의 인물형 토기이다.
은제합,은제완,금제완 3종류의 용기류로서 북쪽 무덤에서 발견된 것으로 은제합은 높이 8㎝, 아가리 지름 10㎝이고, 은제완은 높이 5.5㎝, 아가리 지름 10.5㎝이고, 금제완은 높이 4.5㎝, 아가리 지름 11㎝이다.
시내권문화재
◀ 대릉원 대릉원은 신라천년의 영혼을 묻은 고분 23기가 산재해 있는 고분공원이며, 특히 천마총은 그 구조와 출토유물을 직접 들여다 볼 수 있도록 내부를 전시공개하고 있어 그 당시 신라인의 빼어난 문화적 수준을 짐작하게 한다.
◀ 천마총
안압지 ▶ 신라의 궁궐 반월성 근처의 안압지는 삼국사기에 ”문무왕 14년(374년) 2월 궁안에 못을 파고 화초와 새를 길렀다” 는 기록이 있으며 삼국통일 후 신라의 위세를 읽게 해준다.
◀ 황룡사지 신라삼보의 하나인 황룡사는 9층목탑과 솔거의 벽화가 유명하다. 지금은 초석만이 남아 있지만 76년 발굴조사에서 동양최대의 사찰임이 입증되었으며, 국립경주 박물관에 발굴유적과 함께 신라 제일의 사세를 담은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분황사 모전석탑 ▶ 안산암을 벽돌모양으로 다듬어 쌓아올린 석탑으로 문설주에 새겨진 금강역사상은 신라 불교조각의 걸작으로 꼽힌다.
◀ 오릉 오릉은 신라 시조 박혁거세왕과 제2대 남해왕, 제3대 유리왕, 제5대 파사왕등 신라 초기 네 박씨 임금과 박혁거세왕의 왕후인 알영왕비의 능으로 담암사 북쪽에 있다고 옛 문헌에 전하고 있다.
계림 ▶ 경주 김씨의 시조 김알지의 탄생설화가 얽힌 곳으로 사적 제 19호로 지정되어 있다.
◀ 첨성대 선덕여왕 때 축조된 현존하는 동양 최고의 천문대로 절묘한 구조와 기막힌 상징성을 지니고 있다.
2. 경주 불국사권
불국사권
세계적인 문화유산불국사와석굴암(세계10대관광지)
불국사와 석굴암으로 유명한 토함산은 신라인의 염원이 담긴 성스러운 불국토이며 신라왕이
된 탈해와 관련이 깊은 곳으로 옛부터 동쪽을 지키는 군사적 요충지였으며, 1995년 12월 6일
유네스코에 의해 우리민족의 문화유산인 불국사와 석굴암이 세계적으로 공인받은 관광명소이다
1,불국사
◀ 불국사경내 토함산 서남쪽에 자리잡은 불국사는 세련된 전통미의 조화를 보여주는 천년신라문화의 정수로 대웅전, 무설전, 극락전, 비로전, 관음전, 화려하고 기발하게 다듬어 조형예술의 극치를 보여주는 다보탑, 석가탑, 청운교, 백운교, 연화교, 칠보교가 있어 신라인의 섬세한 예술혼을 잘 보여주고 있다.
다보탑 ▶ 견고한 화강암을 자유자재로 다뤄 조형예술의 극치를 보여주고 있는 세계에서 유래가 없는 석탑이다.
◀ 석가탑 안정감과 우아함을 지니고 있어 신라 석탑의 정형을 이룩한 대표적인 탑이다.
청운교, 백운교 ▶ 푸른 구름, 흰 구름을 의미하는 청운,백운교를 밟아 오르면 자하문 너머 대웅전이 보인다. 대웅전은 불국사의 중심 전각으로 석가모니불을 모시고 있다. 연꽃이 새겨진 연화, 칠보교를 밟아 오르면 안양문 너머 극락전이 나타난다. 극락전은 착한 이가 죽으면 간다는 서방극락정토를 상징하는 곳으로 금동아미타여래좌상이 모셔져 있다.
2,석굴암
◀ 석굴암 보존불 자연석을 다듬어 돔을 쌓은 위에 흙을 덮어 굴처럼 보이게 한 석굴암은 신라 경덕왕 10년 김대성이 전생의 부모를 위해 창건하였다. 한국 불교조각을 대표하는 동시에 세계적인 명작으로 유네스코에 의해 세계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다. 이 석굴암은 통일신라시대에 심오한 종교적 열정과 고도의 예술성, 과학의 힘이 만들어낸 걸작품이다.
석굴암전경
석굴암 모형도
3,낭산
◀ 능지탑 능지탑은 '삼국사기' 기록에 문무왕이 '임종후 10일 이내로 고문 밖 뜰에서 화장하라' 했다는 기록으로 보아 문무대왕의 화장지로 추정할 수 있다.
사천왕사터 ▶ 부처의 힘으로 당의 세력을 막으려 했던 신라인의 강한 호국의지가 깃들어 있는 사천왕사터
◀ 선덕여왕릉 찬란한 신라문화를 꽃피우고 삼국통일의 기초를 닦은 선덕여왕의 능이다.
구황리 삼층석탑 ▶ 2층 기단 위에 세워진 전형적인 3층 석탑이며,국보 제37호로 지정되어 있는 귀중한 문화재이다.
4,외동읍
◀ 괘릉 신라 원성왕의 능으로 본래 이곳에 있던 작은 연못에 왕의 유해를 수면상 걸어 안장하였다고 괘릉이라 한다.
원원사지 ▶ 모화리 봉서산 기슭에 있는 원원사지는 수수한 모습의 돌계단과 2기의 삼층석탑이 소나무를 벗삼아 나란히 서 있다
.
◀ 구정동 방형분 무덤 안 석실을 들여다 볼 수 있게 한 네모난 형태의 고분
5,경주민속공예촌
◀ 경주민속공예촌 옛 선현들의 얼과 멋스러운 솜씨를 이어받아 후세에 길이 남기고자 토함산 기슭의 2만평 부지에 조성한 경주민속공예촌은 도자기, 금속, 목공, 보석, 자수, 토기 등의 제조과정을 공개하여 산교육장으로 활용되고, 직판 가격의 쇼핑도 즐길 수 있다.
토기
금관
6,신라역사과학관
◀ 신라역사과학관 이 과학관은 신라인의 위대한 문화유산과 여기에 깃든 과학정신을 오늘에 되살리고자 하는 정성이 여기에 살아 있으며, 석굴암과 첨성대 등의 신비와 과학을 밝히는 역사교육의 현장이 되고 있다.
석굴암 모형 ▶ 지하 전시실에는 석굴암의 내부 구조를 볼 수 있도록 다양한 모형이 제작되어 있으며 각종 문헌, 사진자료, 설계도 등을 갖춰 석굴암의 신비를 풀어주고 있다.
◀ 첨성대 모형 1층 전시실에는 신라시대 경주의 별자리인 천정천문도와 신라왕경도, 첨성대의 축소 모형이, 2층 전시실에는 신라와 조선시대의 유물 모형이 전시되어 있다.
3. 보문관광단지권
보문관광단지권
경주답사의편안한쉼터,보문관광단지
보문관광단지는 보문호의 수려한 자연경관을 배경으로 242만평 드넓은 부지에 초현대적 호텔,
콘도, 골프장, 야외공연장, 자동차야외극장, 경주월드 등 각종 문화, 레저시설을 두루 갖춘
국제적 관광단지로 경주를 ?O는 관광객에게 문화유적 답사와 레져, 가족단위 휴양지로서의
즐거움까지 선사한다.
1,경주월드
◀ 경주월드 보문관광단지의 각광받는 명소의 하나인 경주월드는 8만평의 대지에서 다양한 이벤트행사, 신나는 놀이시설, 수영장, 눈썰매장, 물보라썰매장 등이 펼쳐지는 시민의 휴식공간으로 온 가족이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내기에 더없이 좋은 공간이다.
방갈로타운 ▶ 1만여평의 대지위에 1,000명을 동시에 수용할 수 있는 방갈로 타운은 대학생MT, 신입생.유치원생의 캠프 등 각종행사에 적합한 대규모 숙소단지 이다.
◀ 눈썰매장 영남 최대규모 를 자랑하는 눈썰매장은 여러분에게 뜻 깊은겨울을 남겨드릴 것입니다.
수영장 ▶ 7천여평의 수영장엔 국제규격의 정규풀, 초보자를 위한 우수풀, 어린이 전용의 키디풀, 슬라이드풀이 있습니다. 3,300명을 수용할 수 있고 수영조 정원은 1,000여명으로 국제규모의 수영장입니다.
2,보문관광단지내 편의시설
◀ 물레방아 휴게소 보문단지 관광을 더욱 운치 있게 하는 동양최대규모의 물레방아 주변의 경관은 계절의 변화에 따라 한폭의 그림 같은 풍경을 자아낸다.
보문야외공연장 ▶ 1.200명의 관객을 수용할 수 있는 야외공연장은 우리나라의 전통적인 무용과 국악 등을 매일 공연하며관람료는 무료이다.
◀ 자전거 대여장 자전거 전용도로를 이용한 하이킹이 가능하다.
3,레저&스포츠
◀ 보문호 보문관광단지를 따라 아늑하게 펼쳐진 보문호에서는 유람선, 모터, 보트, 노보트, 페달보트 등 다양한 수상레저를 즐길 수 있다.
온천욕
골프장
4. 경주 남산권
남산권
신라문화재의노천박물관,남산
가는 곳마다 신라 유적이 산재해 있는 경주에서 압권은 역시 남산이다.
신라인 모두의 절이요,
신앙이었던 남산은 자연의 아름다움에다 신라인의 오랜 역사, 신라인의 미의식과 종교의식이 예술로서 승화된 곳으로 그 자체가 문화재라는 찬사를 받고 있다.
남산이야기/전설과실화
1,피리소녀의 사랑이야기가 깃든 상사바위
경주 동남산 어느 마을에 할아버지가 외로이 살면서 이웃집의 피리라는 소녀를 무척 귀여워 했다. 어느덧 피리는 꽃다운 처녀가 되었지만 피리가 이사를 가게되자 할아버지는 몹시 쓸쓸해 했다. 그 후 어느 날 피리처녀가 할아버지의 방문을 열며 들어오고 있었다. 할아버지는 너무나 반가워하며 "피리야!"하고 외쳤지만 그것은 환상이었다. "안돼! 안될 일이지" 할아버지는 피리소녀를 그리워하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머리를 저으며 잊으려고 무척 애를 썼다. 꿈속에까지 피리소녀를 그리워하던 할아버지는 피리를 잊으려고 무척 애를 쓰며 고민하다가 끝내 남산의 어느 골짜기 나무에 목을 매 죽게 되었다. 할아버지의 혼은 골짜기 위에 큰 바위가 되어 피리가 사는 마을을 늘 바라보고 있었다. 그 후부터 피리는 큰 뱀이 몸을 휘감고 덤벼드는 악몽에 시달렸다. 하루는 피리의 꿈속에서 뱀이 할아버지로 변해 울먹이며 이렇게 말했다. "아무리 너를 잊으려해도 잊을 수 없구나. 그래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단다. " 피리는 그제야 할아버지의 죽음을 헤아리고 무척 슬퍼했다. "할아버지! 이제 나이를 먹지 않는 바위가 되어 소원을 풀어드리겠어요." 피리는 할아버지를 따라 가기로 작정하고 바위에 올라 뛰어 내렸다. 피리소녀의 영혼은 작은 바위가 되어 할아버지바위 곁에 나란히 서게 되었다. 그 후 사람들은 이 바위를 상사바위라 불렀다. 상사바위는 동남산 국사골 정상에 우뚝 솟아있다.
2,부처의 세계로 가는 열반골
옛날 신라의 고관집 외동딸이 꽃다운 나이에 이르자 뭇남자들이 돈과 권력으로 그녀를 유혹하며 성가시게 굴었다. 마침내 처녀는 아무도 모르게 삭발한 채 속세를 떠나 부처님 세계인 열반에 살 것을 결심했다. 갱의암에 이르러 처녀가 화려한 옷을 벗고 잿빛 먹물옷으로 갈아입자 산짐승들이 길을 막고 살쾡이가 등을 구부린 채 위협했다. 간사스런 여우, 심술궂은 산돼지, 무서운 귀신들이 연이어 나타났다. 그러나 이들을 모두 물리친 처녀는 계곡 암자에 이르러 정진에열중했다. 계곡에서 처녀가 목욕을 하자 이무기가 덮칠 듯 산 위에서 위협했다. 그러나 큰곰이 부처님을 동경하여 수도하는 처녀를 보살펴 주었다. 거북이도 눈을 부릅뜬 채 엎드려 처녀 곁을지키고 있었다. 드디어 수도를 마친 처녀가 부처님 세계로 향하는 산등성이로 올라서자 똥무더기가 처녀를 가로막았지만 진리의 마음을 깨친 처녀는 더러움도 포용한 채 열반의 세계로 향했다. 멀리 산마루에서 할머니가 성도한 처녀를 반가이 맞이하고 있었다. 처녀는 할머니를 따라 열반의 세계인 수미산으로 들어갔다. 이 골은 이 같은 전설이 깃든 열반골로 불린다. 이 골엔 인공 조각품이 하나도 없다. 하늘이 만든 갖가지 조형물이 너무나기묘해 감히 손을 대지 못했다고 한다. 바위에 열반의 신앙을 조화시킨 신라인의 지혜가 걸작이다.
3,신라판 노아의 홍수 일천 바위
옛날 동남산 부근에 한 마을이 있었다. 사람들은 서로 화합하며 열심히 일했다. 어느 날 평화를 시기한 마군들이 쳐들어왔다. 백성들은 마을 산꼭대기 바위에 올라가 한울에 도움을 간청하며 기도했다. 그러자 폭우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주변 들판은 온통 물바다를 이루어 산봉우리 바위만 겨우 남기고 모두 물에 잠겼다. 마군들은 계속 되는 홍수에 모두 떠내려가고 바위 위에 올라온 1천여 백성만 살아남았다. 백성들은 홍수가 휩쓸고 간 벌판에 다시 마을을 세워 평화로운 모습을 되찾았다. 그 후 사람들은 이 바위를 일천 바위라 불렀다. 이 바위는 마왕바위다. 홍수에 떠내려가던 마왕의 머리라고 전해온다. 일천 바위는 높이가 10m로 동남산 허리 산꼭대기에 우뚝 솟아 있다. 이곳에 오르면 시야가 탁 트여 가슴이 후련해진다. 신라인들은 이곳을 전망대로 애용한 듯하다.
4,부엉골엔 아직도 부엉이가...
옛날부터 사람들은 이 골을 부엉골이라 불러왔다. 골이 너무 깊어 낮에도 부엉새가 운다해서 이름이 붙여졌다. 실제로 이곳은 마치 밀림처럼 숲이 우거져 있다. 골이 깊어 포석정으로 뻗은 계곡은 남산 8경중 하나로 꼽힌다. 부엉골엔 천연기념물 제 324호인 수리부엉이가 살고 있다. 70cm 정도 되어 보이는 큰 몸체다. 머리위로 우각이 솟아있다. 카메라 셔터소리에 부엉이가 날아오르며 날개를 편 길이는 150cm는 족히 넘어 보인다. 거대한 날개짓에 바람소리가 계곡을 가른다. 아득한 옛날 신라인들과 함께 살아온 부엉이가 대대손손 이 부엉골을 지키며 살아가고 있다.
5,칠형제의 어머니 사랑 효불효교
서라벌 남천 부근에 홀어머니와 아들 칠형제가 의좋게 살고 있었다. 홀어머니는 밤이면 아들 몰래 남천 개울을 건너 옆마을 사내를 만나곤 했다. 추운 겨울 어느 날 밤 어머니는몰래 옆마을을 향했다. 일곱 형제는 몰래 따라가 치마를 걷은 채 뼛속까지 시린 찬 개울을건너 옆마을 사내 집으로 가는 어머니를 보았다. 홀어머니가 행여 다칠세라 일곱 형제는 걱정이 앞섰다. "돌아가신 아버님께는 큰 불효를 짓는 일이지만 살아 계신 어머님을 위해 다리를 놓아 드리자." 형제들은 의기 투합해 아무도 모르게 다리를 놓았으며 나중에서야 일곱 아들이 다리를 놓게된 사실을 안 어머니는 대성통곡하며 크게 뉘우쳤다. 이 다리는 살아 계신 어머니에겐 효도를, 돌아가신 아버지에겐 불효를 한 다리라 해서 효불효교라 불렀다. 일곱 형제가 놓았다해서 칠자교라 부르기도 했다. 효불효교는 다 헐어져 당시의 석재만이 그 자리에 어지럽게 널려있다.
6,고려의 첩자 풍수쟁이의 계략
고려의 첩자인 풍수쟁이가 신라 임금에게 이렇게 말했다. "신라의 서울은 봉황새의 둥지형상입니다. 이제 때가 되어 봉황새들은 집을 버리고 날아가려 합니다. 장안에 봉황의 알을 많이 만들어야 합니다. 그러면 봉황새는 알을 두고 떠나지 못할것입니다." 풍수쟁이의 말에 임금은 서라벌 곳곳에 산더미 같은 알, 즉 봉황대를 수없이 만들었다. 그러나 신라는 쇠락해 멸망하고 말았다. 사실 서라벌 땅은 전진하는 배의 형상으로 수많은 고분의 무게를 못 이겨 침몰한 것이다. 고려의 첩자 풍수쟁이의 계략에 넘어가 신라가 멸망했다는 일화다. 도심에 산재한 많은 왕릉을 두고 후대 사람들이 그럴듯하게 지어낸 전설이다. 하지만 이곳 지형은 실제로 전진하는 배의 형상을 하고 있다. 남산 끝자락 도당산은 그 모습이 배의 돛대 같다고 해서 일명 장두산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7,김유신과 천관여인
김유신이 청년시절 천관이라는 기생을 알게 되었다. 어머니는 어느 날 아들을 불러 "이 어미의 소원이 있다면 네 할아버지와 아버지처럼 공을 세워 나라를 지키는 대들보가 되어주길 바랄 뿐이다. 그런데 너는 지금 무엇을 하고 있느냐. 술집에 드나들며 천한 여자들과 허송세월만 보내고 있으니 장래에 무엇이 되겠느냐." 하고 꾸짖었다. 김유신은 그 후 천관의 집에 발길을 끊고 심신 수련에 몰두했다. 어느 날 유신은 친구의초대를 받아 술을 마시고 거나하게 취한 채 말을 타고 오다 그만 잠이 들어 버렸다. 말은 저 혼자서 집으로 향했다. 바로 천관의 집이었다. 천관은 너무도 반가이 맞이했다. 그러나 잠에서 깬 유신은 맹세를 저버린 기막힌 사태를 깨달아 단숨에 칼을 뽑아 사랑하는애마의 목을 내리쳤다. 그 후 오랫동안 천관은 유신의 모습을 볼 수 없었다. 천관은 그리움에 사무쳐 고민하다가 끝내 목숨을 끊었다. 김유신은 18살에 검술이 통하여 국선이 되었다. 660년에 백제의 항복을 받고 668년에는 고구려의 항복을 받아내 삼국통일의위업을 달성하게 되었다. 백발이 성성한 태대각간 김유신은 그제서야 사랑하던 천관의 넋을기리고자 천관사라는 절을 지어 천관의 극락왕생을 빌었다. 신라 최고의 화랑 김유신에게도이런 사랑 이야기가 천관사터에 전해온다. 그러나 최근 천관여인은 기생이 아니라 국사에 참여한 신분이 높은 여자라는 논쟁이 제기되고 있다. 일부 석탑재가 지금까지 그대로 방치돼 왔지만 최근 들어 국립 경주 문화재 연구소에서 천관사터 발굴작업을 시작해 그 실체가 기대 되고 있다. 김유신의 집터가 있던 곳엔 당시의 우물터인 재매정이 남아있다. 김유신은 전장에서 잠시 돌아왔을 때 이 물을 마시며“물맛이 아직도 그대로구나”하며 전의를 다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화강석으로 네모나게 쌓은 건축기법은 첨성대 상단의 모습과 비슷해 학계의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우물 안엔 아직도 물이 고여있다.
삼국유사와남산
1,신라건국 설화가 깃든 나정과 양산재
신라건국 이전 서라벌 일대에는 진한시대로서 6부 촌장이 지배했다. 양산촌, 고허촌, 진지촌, 대수촌, 가리촌, 고야촌등을 일러 진한 6부라 했다. 어느 날 북쪽에서 무서운 세력이 서라벌을 위협했다. 6부 촌장들은 양산촌에 모여 회의를 열고 여섯 마을을 하나로 뭉치기로 했다. 그러나 누구를 임금으로 추대할지 난감해 했다. 이때 고허촌장 소벌도리공이 말했다. "삼십년 전의 일입니다. 나정 하늘에서 이상한 기운이 땅을 비추고 있었습니다. 거기엔 흰말이 절을 하고는 하늘로 올라가는 것이었습니다." "그곳엔 붉은 알이있었습니다. 알속에서 잘생긴 사내아이가 나왔습니다. 목욕을 시키자 몸에서 광채가 나고 새와 짐승이 모여들어 춤을 추었습니다. 지금 그 아이는 열 세살인데 총명하고 슬기롭기 이를 데 없습니다. 하늘이 주신 그분을 임금으로 추대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6부촌 사람들은 만장일치로 그를 임금으로 추대하고 국호를 서라벌로 정했다. 이름은 박혁거세. 박이란 밝음을 뜻하며 혁거세는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박혁거세가 태어난 나정은 남산 기슭에 있다 . 조선시대 순조 2년 1802년에는 박혁거세의 탄생 설화를기록한 비문을 세웠다. 나정 인근엔 진한시대 6부촌장 위패를 모신 양산재가 있다. 나정과 양산재는 박혁거세왕의탄생과 서라벌국 역사의 시작을 알리는 설화가 깃든 곳이다. 신라는 바로 6부촌 사람들의 화합과 만장일치라는 민주주의 정신을 기초로 시작된다.
2,서출지:,"거문고 갑을 쏘아라"
신라 21대 소지왕이 서기 488년 정월 보름날 행차에 나설 때다. 까마귀와 쥐가 와서 울더니쥐가 말했다. "이 까마귀 가는 곳을 살피십시오" 왕은 장수를 시켜 따라가게 했다. 동남산 양피촌 못가에 이르러 장수는 그만 까마귀를 놓쳐 버렸다. 이때 갑자기 못 가운데서풀옷을 입은 한 노인이 봉투를 들고 나타났다. "장수께서는 이 글을 왕에게 전하시오" 노인은 글이 써진 봉투를 건넨 뒤 물 속으로 사라졌다. 왕이 봉투를 받아보자 '열어보면 두사람이 죽고 보지 않으면 한사람이 죽는다' 라고 적혀있었다. 이를 본 신하가 말했다. "두사람은 평민이고 한사람은 왕을 가리킴이오니 열어보시는 것이 어떨까 하옵니다." 왕은 신하의 조언에 따라 봉투를 뜯었다. '사금갑(射琴匣)' 즉 '거문고 갑을 쏘아라' 라고 적혀있었다. 대궐로 간 왕은 왕비의 침실에 세워둔 거문고 갑을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 거문고갑 속에는 왕실에서 불공을 보살피는 승려가 죽어있었다. 승려는 왕비와 짜고 소지왕을 해치려한 것이었다. 왕비는 곧 사형되었으며 왕은 노인이 건네준 봉투 덕분에 죽음을 면하게 되었다. 이 연못은 글이 적힌 봉투가 나온 곳이라 해서 서출지라 부른다. 소지왕 10년은 신라에 불교가 공인되기 40년 전이다. 신라 눌지왕 시대에 묵호자가 불교를 전하러 왔으나 펴지 못했다. 소지왕 시대 아도 스님 역시 불교전파에 실패했다. 법흥왕 15년 이차돈의 순교로 비로소 신라에 불교가 공인된 것이다. 당시 신라귀족들은 민속신앙 특히 조상을 섬기는 신앙이 강해 쉽게 불교를 인정하지 않았다. 서출지의 전설은 전통적 민속신앙 속에 새로운 불교문화가 전래되는 과정에 빚어지는 갈등의 한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
3,수도방위 사령부 남산 신성
신라 진평왕은 591년에 반월성을 마주한 남산에 성을 쌓았다. 축성작업에는 기술자들이 전국 각지에서 동원 됐다. 성을 쌓은 후 책임자들은 서약서를 적은 비를 세웠다. 남산신성 제 1비에는 이렇게 적혀있다." 3월 26일 우리들은 남산 신성을 쌓는 일을 맡았다.법대로 어김없이 쌓을 것을 맹세한다. 3년안에 성이 무너졌을 때는 벌을 달게 받겠다" 또 총 15명의 관직과 성명을 기록했다. 신라판 건축실명제인 셈이다. 신성비는 지금까지 10개가 발견됐다. 성벽은 길이 60cm, 높이 30cm정도의 돌로 견고하게 쌓았다. 지금은 대부분 헐어졌으나 웅장했던 성벽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다. 성을 쌓은 지 약 60년후 문무왕은 신성 안에 곡식과 무기를 보관하는 장창을 세군데 설치했다. 가운데는 식량창고였는데 길이가 99m로 거대한 건물이었다. 건물 주춧돌과 와편이 지금도그 자리에 남아 당시의 모습을 짐작케 한다. 남산신성의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신성에서는 반월성이 한눈에 내려다 보여 왕성 수호로서는 최적지다. 이곳에서 병사들은 명활 산성과 선도 산성 등에서 전해오는 정보를 종합해 반월성의 왕에게 전달했을 것이다.또한 왕의 명을 받아 전국으로 하달하는 중심역할을 했을 것이다. 적군이 침입할 때 왕은 평지성인 반월성 대신 방어가 효과적인 신성으로 대피해 안전을 확보하는 역할도 담당했을것이다. 남산신성은 곧 신라의 청와대 반월성을 수호하는 수도방위 사령부역할을 했던 것이다.
4,비파골로 들어간 진신석가
신라 32대 효소왕이 서기 697년 어느 날 망덕사라는 절의 낙성식에 참석할 때의 일이다. 낙성식장에 온 누추한 한 노승이 왕에게 말했다. "이 노승도 제에 참석할까 하옵니다." 효소왕은 기분이 언짢았지만 말석에서 참석하라고 했다. 제가 끝나자 왕은 노승을 불러 희롱조로 말했다. "비구는 어디서 사는가?" "예 남산 비파암에 삽니다." 효소왕은 노승에게"돌아가거든 다른 사람들에게 국왕이 친히 제에 참석했다고 하지 마시오." 하며 비웃듯 말했다. 그러자 노승은 웃으며 "폐하께서도 돌아가시거든 진신석가를 공양했다고 말씀하지 마십시오."라고 말했다. 인사를 끝내자 노승은 몸을 솟구쳐 구름을 타고 남산 비파골로 날아가는 것이었다. 노승은 진신석가였던 것이다. 왕은 무척 부끄러워 남산을 향해 수없이절을 하고는 신하를 보내 진신석가를 모셔오도록 했다. 신하들이 비파골을 찾았으나 진신석가 부처는 지팡이와 바리때만 남겨둔 채 바위 속으로 숨어버렸다. 효소왕은 자신의 무례함을 깊이 사죄하며 이곳에 석가사라는 절을 지었다. 또 부처가 숨은 바위 위에 불무사라는 절을 지어 부처님을 공양했다. 97년에 큰 산불이 난 비파골은 서서히 예전의 모습을 되찾고있다. 이 바위는 당나라 악기 비파를 닮아 비파암으로 불린다. 그래서 이 골짜기를 비파골로 부르고있다. 바위 위의 불무사터엔 기와조각이 널려있다. 석가사터는 당시의 축대가 남아 있는데 천년세월을 못 이겨 흔적만 겨우 남아있다. 이 설화는 바위를 영험의 대상으로 본 토속신앙과 불교가 융화될 무렵에 나온 것으로 보인다. 임금도 사람을 함부로 업신여길 수 없다는 것과 부처는 자연 속에서 갖가지 화신으로 인간 앞에 나타난다는 뜻도 담겨있다.
5,고위산정의 호국사찰 천룡사
7세기 말 남산의 최고봉인 고위산에 큰 사찰이 들어섰다. 토론삼한집 에서는 '계림에는 두줄기의 하천과 역으로 흐르는 물줄기가 있는데 그 근원이 천재를 진압하지 못하면 이 가람이 뒤집혀 가라앉는다.'는 기록이 있다. 당나라 사신 악붕귀는 이 사찰을 보고 '이 절이 헐어지면 나라가 망할 것이다 '라고 말했다.그런 이유에서일까 절은 신라말기에 이르러 헐어지니 신라도 곧 멸망했다. 폐허가 된 절은고려 정종 17년 최제안에 의해 다시 세워졌다. 그리고 절 이름을 천룡사라 지었다. 당시 최제안은 천녀 용녀라는 두 딸의 이름을 따서 천룡사라 했다고도 한다. 천룡사는 신라 고려를 거쳐오면서 나라를 지키는 호국 사찰로 이름을 떨쳤다. 그러나 이 절은 또 허물어져 내리니 고려도 멸망했다한다. 고위산 아래 천룡사터는 97년 경주 신라문화연구소의 발굴작업으로 인해 천년 흥망의 역사가 조금씩 드러나기 시작했다. 법당, 회랑, 주방, 창고등 대가람의 규모가 확인되고 유물도 수습됐다. 신라, 고려 유적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 기와조각도 상당수 발견됐다. 쓰러졌던 천룡탑은 도문스님의 발원으로 1991년에 이 자리에 다시 복원 됐다. 돌탑에 깃든 생명은 참으로 끈질겨 천년전의 모습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6,월정교에 깃든 원효와 요석공주의 사랑
원효라는 고승이 어느 날 거리에서 이런 노래를 부르고 다녔다. "어느 누가 자루 없는 도끼를 내게 빌려 주려는가. 나는 하늘을 떠받칠 기둥을 찍으리라." 태종 무열왕은 "이 스님은 귀부인을 얻어 귀한 아들을 낳으려 하는구나"하며 크게 감탄해 과부 공주가 지내고 있는요석궁으로 맞아들이도록 했다. 내심 요석공주를 짝사랑해오던 원효대사는 기지를 발휘해 일부러 월정교에서 뛰어내려 옷을 다 적셨다. 원효대사는 요석궁에서 옷을 말리며 공주와 꿈같은 하룻밤을 묵게 됐다. 그 후 과연 공주는 아들을 낳았는데 그는 신라 10현중의 한사람인 설총이었다. 원효대사와 요석공주의 러브스토리가 깃든 월정교는 신라 35대 경덕왕 19년인 760년에 건축됐다. 조사결과 길이가 63m 폭이 9m 교각 기둥사이가 13m 로국내에서 가장 크고 오래된 석교로 확인됐다. 육중한 교각 주춧돌이 그 자리를 지키고 있다. 다리 복원을 위해 흩어진 석재들을 부근에 모아두고 있다.
7,아! 포석정
포석정에 대한 역사기록은 신라 제 49대 헌강왕 때부터 시작된다. 이 시기 신라엔 전국 곳곳에서 풍악과 노랫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포석정은 왕이 풍류를
즐기는 별궁 역할을 했다. 하루는 헌강왕이 포석정에 이르자 남산신이 나타나 춤과 노래를불렀다. 왕도 흥에 겨워 신을 따라 춤을 추었다. 산신들의 노래와 춤은 신라멸망을 암시하는것이었으나 왕과 신하들이 깨닫지 못했다고 한다. 견훤의 후백제와 왕건이 세력을 확장하던경애왕에 이르러 신라는 비운의 종말을 맞는다. 경애왕이 포석정에서 잔치를 베풀 때였다. 이때 견훤이 포석정으로 쳐들어 왔다. 견훤은 경애왕을 잡아 스스로 죽게 하고 재물을 약탈하며 우수한 인재들을 종으로 잡아갔다. 견훤은 경순왕을 왕위에 올려 그의 아우 효렴과 영경을 인질로 잡아가 결국 신라는 멸망하고 말았다. 포석정은 신라의 멸망을 지켜본 비운의 역사현장으로 기록돼 있지만 우리 조상의 우수한 유상곡수 문화가 깃든곳이다. 포석정은 어떻게 사용된 것일까. 신라인들은 포석정에 연중 물을 공급하기 위해 인공저수지를 만들었다. 당시에 만들어 졌다는 이 연못은 배성못으로 불리는데 지금도 물이맑고 차다. 이 물은 굵은 대나무로 물길을 만들어 아래 포석정으로 흐르게 했다. 물은 거북이 입을 통해 포석정으로 떨어졌다. 이 물은 구불구불한 돌 홈을 따라 일정한 속도로 흐르게 했다. 이곳에 술잔을 띄워 천천히 물을 따라 돌게 만든 것이다. 신라왕과 귀족들은 유유히 흐르는 술잔을 돌려가며 풍류를 즐겼다. 술잔이 오는 동안 시를 짓지 못하면 벌주를 마셨다고 한다. 최근 들어 포석정은 제사를 지내던 사당이었다는 새로운 설이 제기되고 있다. 진위 논쟁이 한창인 화랑세기 필사본에는 포석정이 포석사(鮑石祀), 혹은 포사(鮑祀)라고 기록돼 있다. 핵심은 포석사의 '사'자가 제사 시설인 사당 사(祀) 자로 표기된 것이다. 이는 포석정이 연회장이 아니라 신성한 사당 터였음을 입증한다는 주장이다. 또한 최근 국립경주문화재연구소가 포석정 일대를 발굴한 결과도 이를 뒷받침한다. 포석이란 글이 새겨진 와편과 상당수의 기와조각들이 발굴됐는데 이들이 삼국시대의 와편일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이같은 연구결과가 사실이라면 포석정은 삼국유사 또는 삼국사기에 등장하는 신라말기 왕의 별궁이라는 막연한 이야기보다 훨씬 앞선 7세기이전 삼국시대에 왕이 제사를 지내오던 신성한 장소였음이 입증될 것이다. 포석정은 돌홈이 전복껍질처럼 생겼다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국내 사적 제 1호로 귀중한 유적지다.
남산의 문화재
보물
경주배리석불입상 종 목 : 보물 제63호 분 류 : 건축물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산 65-1 시 대 : 삼국시대
경주 남산리 삼층석탑 종 목 : 보물 제124호 분 류 : 석탑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227-2 시 대 : 통일신라시대
경주 남산 미륵곡 석불좌상 종 목 : 보물 제136호 분 류 : 기타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산 66-1 시 대 : 통일신라시대
경주 남산 용장사곡 삼층석탑 종 목 : 보물 제186호 분 류 : 석탑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용장리 산 1 시 대 : 신라시대
경주 남산 용장사곡 석불좌상 종 목 : 보물 제187호 분 류 : 기타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용장리 산 1-1 시 대 : 통일신라시대
경주 남산 불곡 석불좌상 종 목 : 보물 제198호 분 류 : 기타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산 56 시 대 : 삼국시대신라
경주 남산 신선암 마애보살반가상 종 목 : 보물 제199호 분 류 : 기타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산 36 시 대 : 통일신라시대
경주 남산 칠불암 마애석불 종 목 : 보물 제200호 분 류 : 기타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산 36 시 대 : 통일신라시대
경주 남산 탑곡 마애조상군 종 목 : 보물 제201호 분 류 : 기타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산 69 시 대 : 통일신라시대
경주삼릉계곡석불좌상 종 목 : 보물 제666호 분 류 : 기타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산 71 시 대 : 신라시대
남간사지당간지주 종 목 : 보물 제909호 분 류 : 기타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탑동 858-6 시 대 : 신라시대
용장사지마애여래좌상 종 목 : 보물 제913호 분 류 : 기타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용장리 산 1-1 시 대 : 신라시대
천용사지삼층석탑 종 목 : 보물 제1188호 분 류 : 석탑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용장리 875-2 시 대 : 통일신라시대
사적
경주 포석정지 종 목 : 사적 제1호 분 류 : 기타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454 시 대 : 통일신라시대
경주 남산성 종 목 : 사적 제22호 분 류 : 기타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산 56 시 대 : 신라진평왕
서출지 종 목 : 사적 제138호 분 류 : 기타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973-974 시 대 : 신라 소지왕
신라오릉 종 목 : 사적 제172호 분 류 : 기타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탑동 67-1 시 대 : 고신라
신라 일성왕릉 종 목 : 사적 제173호 분 류 : 기타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탑동 산 23 시 대 : 신라 일성왕
신라 정강왕릉 종 목 : 사적 제186호 분 류 : 기타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산 53 시 대 : 서기887년경
신라 헌강왕릉 종 목 : 사적 제187호 분 류 : 고분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산 55 시 대 : 1969-08-27
배리삼릉 종 목 : 사적 제219호 분 류 : 기타 소재지 : 경북 경주시 배동 73-1 시 대 : 서기183년916년923년
지마왕릉 종 목 : 사적 제221호 분 류 : 기타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30 시 대 : 서기 133년경
신라 경애왕릉 종 목 : 사적 제222호 분 류 : 기타 소재지 : 경북 경주시 배동 산73-1 시 대 : 서기926년경
경주 나정 종 목 : 사적 제245호 분 류 : 기타 소재지 : 경북 경주시 탑동 700-1 시 대 : 신라건국 이전
경주남산일원 종 목 : 사적 제311호 분 류 : 기타 소재지 : 경북 경주시 인왕동 외 4개동 시 대 : 신라시대
천관사지 종 목 : 사적 제340호 분 류 : 기타 소재지 : 경북 경주시 교동 244 시 대 : 신라시대
중요민속자료
경주 탑동 김헌용 고가옥 종 목 : 중요민속자료 제34호 분 류 : 기타 소재지 : 경주시 탑동 633 시 대 : 조선시대
유형문화재
삼릉계곡마애관음보살상 종 목 : 유형문화재 제19호 분 류 : 기타 소재지 : 경상북도 배동 산 72-1 시 대 : 통일신라시대
삼릉계곡선각육존불 종 목 : 유형문화재 제21호 분 류 : 기타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산 72-6 시 대 : 통일신라시대
경주남산입곡석불두 종 목 : 유형문화재 제94호 분 류 : 기타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산 86-3 시 대 : 통일신라시대
경주침식곡석불좌상 종 목 : 유형문화재 제112호 분 류 : 기타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노곡리 산 125-1 시 대 : 조선시대
경주열암곡석불좌상 종 목 : 유형문화재 제113호 분 류 : 기타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노곡리 산 123 시 대 : 신라시대
경주약수계곡마애불입상 종 목 : 유형문화재 제114호 분 류 : 기타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용장리 산 1의1 시 대 : 신라시대
삼릉계곡마애석가여래좌상 종 목 : 유형문화재 제158호 분 류 : 기타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산 72-6 시 대 : 고려시대
삼릉계곡선각여래좌상 종 목 : 유형문화재 제159호 분 류 : 기타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72-6 시 대 : 통일신라시대
보리사마애석불 종 목 : 유형문화재 제193호 분 류 : 기타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배반동 산 66-1 시 대 : 통일신라시대
경주배리윤을곡마애불좌상 종 목 : 유형문화재 제195호 분 류 : 기타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배동 산 72-1 시 대 : 신라시대
백운대마애불입상 종 목 : 유형문화재 제206호 분 류 : 기타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내남면 명계리 산161-2 시 대 : 신라시대
기념물
효불효교지 종 목 : 기념물 제35호 분 류 : 기타 소재지 : 경주시 인왕동 354 시 대 : 신라시대
상서장 종 목 : 기념물 제46호 분 류 : 기타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274 시 대 : 신라말기
문화재자료
경주 남산동 석조감실 종 목 : 문화재자료 제6호 분 류 : 기타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남산동 산 58 시 대 : 미상
남간사지석정 종 목 : 문화재자료 제13호 분 류 : 기타 소재지 : 경북 경주시 탑동 902 시 대 : 미상
인용사지 종 목 : 문화재자료 제240호 분 류 : 기타 소재지 : 경상북도 경주시 인왕동 341-3 시 대 : 미상
남산팔경
1,냉골암봉
봉우리 위에 올라서면 넓은 너럭바위가 나타난다. 바둑바위이다. 이곳은 오랜 옛날부터 신선이 내려와서 바둑두던 곳이고, 그 옆에는 봉황이 춤을 추던 금송정이 있었다고 전해져 오고있다. 냉골암봉은 바로 옆에 있는 상사바위와 어우러져 남산 제일 절경을 이루고 있다.
남산 서쪽, 금오산 정상에서 북서쪽으로내리 뻗은 산맥이 우뚝 멈춘 곳. 그 곳이바로 냉골 암봉이다. 한여름에도 시원한바람이 찾는 이의 가슴까지 씻어주는 골짜기라 하여 냉골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요즘은 삼릉골로 더 많이 불리고 있다. 남산에서 가장 많은 불상과 마애불을 품고 있어 찾는 사람 또한 가장 많은 골짜기이다. 가파른 골짜기를 오르노라면 소나무 옆 바위틈에서 나타나는 불보살상,마지막 오르막을 힘차게 올라서면 나타나는 마애여래대좌불, 지금 막 바위 속에서 나타나 근엄하면서도 후덕한 모습으로 망산과 벽도산, 삿갓봉을 지긋이 굽어보고 계신다.
2,칠불암과 신선암
고위산에서 동으로 뻗은 산맥이 다시 한번 용솟음 치는 곳에 봉화대가 있고, 그 아래 천길 절벽 아래에 칠불암과 신선암이 자리잡고 있다. 동해 대왕암에서 솟아오른 태양이 석굴암대불을 비추고 다시 솟아오른 태양이 가장 먼저 비추는 곳, 도솔천에서 내려오신 미륵보살이 유유히 노니시는 곳,불국정토 남산을 장엄하고 있는 일곱 분의 불보살이 천사백년을 지키고 계신 곳. 이곳을 우리는 남산의 또한 절경으로 꼽는다.
3,천룡고원
하늘 위에 병풍을 두른 평원이 있고, 하늘 위에서는 천룡이 용트림하는 곳. 이곳이 바로 남산의 세 번째 절경이다. 천녀와 용녀의 전설이 살아있고, 열반의 염원이 용솟음 치는 곳.이 곳은 옛 신라시대부터 '고사'라는 절이 있었고, 고려 때는 최재안이 성수천장과 국태민안을 위하여 중창한 천룡사가 자리한 곳이었다.
4,용장계곡
긴 노루목은 맑은 물을 돌 사이로 흘러내리고 매월당의 사랑가와 기개는 돌이며 나무며 구르는 흙에조차 배어있다. 산은 탑을 이고 하늘을 열었는데 한 여인은 열반길로 향하네. 고개를 들면 용장사 탑이 아득한 수미산 위에 걸쳐져있고, 너른 바위 반석 위를 돌아가는 물에 다 쉬어 놓고 보면, 그대로가 자연이 되어 계곡이 되고, 맑은 물이 되고, 바위와 탑이 되어 버린다. 용장계곡은 남산에서 가장 긴 계곡이며, 사철 맑은 물이 마르지 않고 흘러 내린다.
용장계곡은 다시 열반골, 은적골, 법당골, 절골, 탑상골, 연화대골, 이영재골, 못골 등으로 갈라지며, 이골에는 용장사지를 비롯하여 22곳의 절터와 6구의 불상과 11기의 탑이 있다.
5,황금대
금오산이 북서쪽으로 뻗어 냉골암봉을 이루고, 다시 북으로 내리 달려 포석암반이 이루어진곳에 바위 절벽을 이루었으니 황금대이다. 석양이 온 바위를 금빛으로 물들이는 곳. 너르고완만한 골짜기가 불현듯 솟아 봉우리를 세우니 온통 기암과 괴석을 주변에 데려다 놓았다. 한 사람이 서면 탑이 하나 솟은 듯하고, 두 사람이 서면 쌍 탑인 듯, 여러 사람이 서면 기러기 행렬 같은 탑 모둠이 된다. 경주시내가 그를 높여보고 좌우 능선들은 협시보살이 되었다.
6,남산부석
이 골짜기 가장 높은 곳 사자봉 바로 아래에는 하늘에 떠있는 바위가 있다. 옛날 두 사람이명주실을 마주잡고 돌았는데 끊어지지 않고 빠져 나왔다 한다. 어찌 보면 부처님 머리 같고,어찌 보면 버선 같아 불두바위, 버선바위라 불리기도한다. 신라 삼기팔괴중 하나이다.
남산은 온통 하늘이라 버선발로 춤을 춘다. 동남산 어디에서든 하늘 춤을 추며 덩실 떠있는 부석은 과연 신의 조화다. 어찌 보면 절을 하는 듯, 어찌 보면 흥겨운 고개 춤을 추는 듯하다. 상사바위와 친분이 많은 듯하고 아슬아슬한 자신 앞에 제법 너른 터도 마련해 바람과 행인이 함께 쉬어가게한다. 간혹 피리 부는 누군가가 하늘의 여흥을 더해준다. 남산에서도 국사골은 바위와 깊은 계곡이 어우러진 절경이다.
7,늠비봉
그리 높지 않은 봉우리, 거기에 단아하게 하늘을 이고 오층탑이 섰다. 별 치장도 없고 큰 몸짓도 없이 그 모습 그대로다. 어쩌면 몸이야 다소 어색할지도 모르지만 마음은 그대로다. 소담한 봉우리에 단아한 탑 하나. 바위산을 하층기단으로 삼고 불쑥 솟은 오층탑. 그 주위로 산 능선이 나비처럼 날개를 펼치고 있다. 금오산이 북동쪽으로 뻗어 내려 불쑥 솟은 곳에 금오정이 있고, 그 곳에서 다시 서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달리다 바위 봉우리를 이루었으니 늠비봉이다. 포석계곡의 중앙을 지키면서 부엉더미와 황금대, 냉골 암봉, 금오봉, 해목령 등에 둘러싸여 서라벌을 굽어보는 위치가 가히 절경이다.
8,삼릉 송림
늘 푸른 소나무 숲 터널. 붉은 몸으로 하늘 향해 뻗은 모습과 아름드리 빽빽한 기상이 오가는 이 모두의 피로를 씻어준다. 뭇 사람과 인사를 나누듯 구불하기도 하고 쏴한 바람소리는 가슴을 후련히도 씻어준다. 삼릉숲은 신라 8대 아달라왕, 53대 신덕왕, 54대 경명왕릉과 개울건너 55대 경애왕릉이 있는 송림이며, 일찍이왕릉으로 비정되어 보호되어 왔기에, 솔숲 또한 150여년 남산을 지켜오고 있다.
통일전
조성경위 및 현황
조성경위
역사상 민족과 국토를 최초로 통일한 신라의 삼국통일 성업과태종 무열왕, 문무왕, 김유신장군의 위대한 업적을 길이 찬양하고 분단된 조국통일의 현실을 다짐하는 엄숙한 서원전당으로 조성
왕은 금관(金冠)을 쓰고 요대(腰帶), 요패(腰佩)도 금제(金製)이며 옷은 자색의 비단으로 만든 신라 옷이다.(60세때의 상) - 김기창화백 작품-
문무대왕 영정
왕은 금관(金冠)을 쓰고 요대(腰帶), 요패(腰佩)도 금제(金製)이며 옷은 자색의 비단으로 만든 신라 옷이다.(40세때의 상) - 김기창화백 작품-
김유신장군 영정
김유신장군은 은관(銀冠)을 쓰고 요대(腰帶), 요패(腰佩)도 은제(銀製)인데 삼국사기 기록에 의하면 왕(흥덕왕때 흥무왕으로 추존)이 아니기 때문이다.(74세 때의 상) - 장우성화백 작품-
기록화
김유신장군 단석산 수련도
서기로 611년 삼국통일의 웅지(雄志)를 품고 단석산에 들어가 석굴속에서 심신을 닦고 하늘에 맹세하였다. 이에 한 신선이 나타나 비법을 가르쳐 주며 정의만을 위해서 사용하라당부하였다. 후일 김유신장군은 이 기원을 달성하여 삼국통일을 이룩하고 정도를 행하여 살았다.
김유신장군 출전도
김유신장군이 나라를 위해 개인의 사욕(沙浴)을 버리고 헌신한 보국정신(輔國精神)을 보여준다. 서기 664년 김유신장군은 백제의 7개의 성을 공벌한데 이어 645년 신라 매리포성을 침공해온 백제 대군을 격파한다. 그해 3월, 서라벌로 돌아오나 또 다시 백제군이 침공하자 장군은 하인에게 집에 있는 재매정(財買井)의 물을 떠오게 해 마신후 “우리집물맛은 옛날 그대로 이구나”하며 다시 출정하였다.
김유신장군과 천관녀도
김유신장군이 젊었을 때 천관(天官)이란 어여쁜 여인과 사랑을나누게 되었다. 이를 안 어머니 만명(萬明)부인이 학문과 무예에만 힘쓰도록 천관녀를 만나지 못하게 훈계하였다. 어느날 말이 깊은 명상에 잠긴 장군을 태우고 천관녀의 집으로 가자, 장군은 말의 목을 베어버렸다. 그후 천관녀는 김유신장군을 사모하여 일생을 마쳤으며. 장군은 후일 그 집터에 천관사를 세우고 명복을 빌었다.
무열왕 남천정 출전도
서기 660년6월 18일 무열왕은 김유신장군, 진주(眞珠)장군, 천존(天存)장군 등 장병을 거느리고 남천정(지금의 이천)에 이르러 백제 공격을 직접 지휘하였다. 이는 지도자와 용장(勇將), 양졸(良卒)이 한몸 한뜻이 되어 통일의 전역(戰疫)에 임한 모습이다.
남산성 축성도
삼국통일은 민족과 국토가 통일되는 성전(聖戰)으로 한시라도 국방에 소홀히 할 수 없는 전황 속에서 신라인은 총력을 기울였다. 삼국통일의 영주(英主) 문무대왕은 서정북토(西往北討) 일선의 국방은 물론 신라 왕도(경주)를 사수할 국방 요새를 튼튼히 구축했다. 문무왕 3년(663년)에 경주 남산신성에 군량과 무기를 비축하고 부산성(富山城)을 축조했으며문무왕 13년(673년)에는 서형산성(西兄山城)을 증축하였다. 삼국통일 후에도 문무대왕은 남산성을 다시 증축해 유비무환의 국방강화에 힘썼다.
강수 외교문서 작성도
유학자 강수(彈首)는 뛰어난 문장가로 외교문서 작성을 통해 신라의 삼국통일에 크게 기여한 분이다. 그는 무열왕대에 발탁된 후 신문왕대에 이르기까지 대부분의 외교문서를 작성했고 신라의 대당외교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강수의 어머니는 꿈에 뿔이 돋은 사람을 보고 임신하였는데, 태어날 때 머리위에 높은 뼈가 있는 특이한 모습이었다고 전해진다.
황룡사 9층석탑 조영도
신라 제27대 선덕여왕 12년(643년)에 자장법사가 신인(神人)의 영감을 받아 선덕왕에게 황룡사에 9층탑을 건립하면 나라가 길이 태평할 것이라 건의하였다. 이로 인하여 백제의 공장 아비지(阿非知)가 와서 기술 지도하고 이간용춘(伊千龍春)의 감독하에 200여명의 소장(小底)을 거느리고 3년만인 서기 645년 (선덕여왕 14년)에 높이 225척(尺)의 거대한 9층 목탑을 완성하였다. 이 탑의 건립은 신라 지배층의 호국불교와 통일 염원에 대한 합의된 의지 표명이었고, 국민들의 민족통일 의지를 모으는 구심점이 되기도 했다. 그후 신라인들은 이 탑의 건립과 삼국통일을 연관 지으면서 신라 삼보(三寶)중의 으뜸가는 호국의 보배로 신성시 했다.
원광법사 세속오계 교화도
원광법사(圓光法師)가 귀산과 취항 두 사람에게 세속에서 그들이 지켜야 할 계명을 교화하는 장면이다. 원광법사는 지금 세속에 알맞는 오계(五戒)가 있으니 임금을 섬김에 충성으로써 하고(事君以忠), 어버이를 섬김에 효도로써 하고(事親以孝), 벗을 사귐에 신의가 있어야 하고(交友以信), 전쟁에 나아가서는 물러남이 없게 하고(臨戰無退), 산 것을 죽임에는 가림이 있으라(殺生有擇) 하는 것이니 그대들은 이를 실행함에 소홀함이 없도록 하라고 가르쳤다. 원광법사의 세속오계로 일컬어진 이 다섯가지 계명은 신라 화랑의 행동지침이 되었다.
삼국통일 영광도
민족과국토수호의 일선에서 용전분투하였던 호국의 용사들이 개선하였다. 민족의 총력전에 패전하여 전의(戰意)를 상실한 당나라는 문무왕 17년(677년) 그들의 한반도 경략 근거지였던 요동(還東)의 안동도호부를 만주 신성으로 퇴각시킴으로써 9년간에 걸친 전쟁은 종식되고 사실상의 삼국통일이 이룩되었다. 한반도에 분화되어 있던 민족과 국토를 하나로 뭉쳐지게 한 이 삼국통일의 영광은 대당투쟁(對廣閔爭)에서 우리 민족이 혼연 일체가 되어 싸워 이김으로써 달성된 것이다. 당초 당나라가 신라를 도와 여제(麗濟)정벌에 참전할 때부터 그들의 궁극적인 야욕은 신라까지 그들의 예속 하에 두어 한반도를 완전히 장악하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삼국통일의 전역(戰役)은 나당연합군과 고구려, 백제와의 투쟁이 아니라 우리 민족과 당나라와의 투쟁이었고 우리 민족의 생존 보전을 위한 성전(聖戰)이었다. 이 전쟁에서 신라는 고구려와 백제의 유민을 융합하여 민족 총력전을 전개하여 당군을 물리침으로써 비로소 삼국통일의 영광을 쟁취하였던 것이다.
문무왕 호국 해룡도
서기 681년 음력 7월 1일은 삼국통일의 영주(英主)이신 문무대왕이 승하하신 날이다. 문무대왕은 평상시에 지의대사(智義大師)에게 항상 이르기를 내가 죽은 후에 호국대룡(護國大龍)이 되어 불법(佛法)을 숭상하고 나라를 수호하겠다고 말해 왔다. 신라인들은 문무대왕의 유언에 따라 동해 대왕암에 유택을 마련하고 가까운 곳에 감은사를 건립하였다. 그리고 문무왕의 호국해룡이 보위하는 만파식적의 이적을 보았다.
원효 군사 자문도
문무왕 2년(662년) 2월에 신라의 장군 김유신 등이 수많은 군사를 이끌고 평양을 포위하고당군에게 수송하고 돌아왔다. 그후 신라에서는 당군과 합세하기 위해, 김유신은 연기(然起),병천(兵川) 등을 보내어 화합할 것을 물었다. 이때 소정방(蘇定方)은 난새와 송아지를 그려보냈다. 아무도 그 뜻을 몰랐으나 원효는 “군사를 급히 돌이키라”는 뜻으로 그 암호를 해독하였다 이에 김유신장군은 모든 군사를 급히 패강(浪江)을 건너게 해 고구려의 공격을 피할수 있었다.
평양성 함락도
나 ·당 연합군에 의한 고구려의 평양성 총공격은 서기 668년 6월경부터 시작되었고 평양성은 포위된지 1개월만인 9월 하순에 완전히 함락되었다. 이에 앞서 보장왕과 남산등은 백기를 들고 항복했고, 최후로 군사권을 넘겨 받았던 승 신성(信誠)마저 성문을 열어 항복하자나 ·당연합군은 성을 점령 불을 질렀다. 고구려의 운명은 연개소문의 장기 독재정치와 계속된 집권층의 내분, 그리고 사상적인 분열 등이 결정적 원인으로 보장왕 27년 서기 668년 9월21일 건국 이래 28왕 서기 705년을 누리고 종말을 고했다.
화랑관창 용전도
서기 660년 7월 9일 황산벌에서 대장군 김유신과 품일, 흠춘장군이 지휘하는 신라 5만군이백제 계백장군이 지휘하는 5천의 결사대에게 네번을 패하자 흠춘장군은 아들 반굴(盤屈)을단기(單劇)로 적진에 보내 용전하다 전사케 하였다. 품일장군은 16세인 아들 화랑 관창(官昌)을 홀로 적진에 뛰어들게 하였는데 백제군에 사로 잡혔으나 계백장군은 너무나 어리고 용감함에 감탄하여 다시 돌려보냈다. 관창은 다시 적진에 뛰어들어 용감히 싸우다가 잡히니 백제군은 관창의 목을 베어 말에 달아 보냈다. 이를 본 신라 5만군은 결사의 결의로 싸워 백제군을 격파하였다.
기벌포 대첩도
대당투쟁(對唐鬪爭) 9년간의 긴 전역(戰役)을 끝맺는 마지막 대전이 기벌포(장항) 해전이다. 문무왕 16년(676년) 11월 신라의 시득(施得)장군은 서해를 통하여 기벌포에 쳐들어온 설인귀가 지휘하는 당나라 대군과 싸워 대소 22회의 대접전 끝에 당군을 격멸하고 4000여명의적목을 베는 대승전을 이룩하였다. 이 기벌포 대첩으로 신라는 제해권(制海權)을 완전히 장악하게 되었으며 이후 당나라는 전의를 상실해 비로소 삼국통일이 이룩되었던 것이다.
황산벌 혈전도
서기 660년 7월 9일 김유신장군과 품일, 흠춘 장군이 거느린 신라 5만 정병(精兵)은 백제계백장군이 거느린 5천의 결사대와 황산벌에서 싸워 네번을 패하였다. 그러나 화랑 관창(官昌)과 반굴(盤屈)의 용감한 희생이 신라 5만군의 결사의결의가 되어 이 결전을 승리로 이끌었다.
사천왕사 호국불사도
서기669년 당은 신라를 정벌할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의상법사(義湘法師)는 당에 갇혀있던 김인문(金仁聞), 김양도(金良圖)를 직접 접견하여 이를 확인하고 서기 670년 신라에 돌아와 문무대왕에게 보고하였다. 왕은 명랑법사(明郞法師)에게 이 위급함을 구할 방도를 물음에 법사는 낭산 남쪽 신유림에서 비법을 행하니 드디어 신라를 침공해 오던 5만 당군이 서해에서 풍랑을 만나 배가 모두 침몰하였다.
매초성 당군 격멸도
신라 삼국통일의 자주성을 보여주는 대당 투쟁도이다. 675년 9월 신라 문훈장군은 설인귀가 거느린 당군을 천성(泉城)에서 격파하였으며, 그해 9월 29일 이근행이 거느린 20만 당군을 매초성(買肖城)에서 괴멸시켰다. 신라군은 또다른 여러 성에서 18회나 당군을 쳐서 대승하고 6천 47면의 목을 베고 전마 2백필을 얻었다. 드디어 676년 2월 당군은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요동(遼東)의 고군성으로 옮겨감으로써 신라 삼국통일의 자주적 완성을 보게 되었다.
5. 서악권
신라화랑정신이깃든서악권
서악동에서 건천쪽으로 나가면 화랑의 자취를 찿아볼수 있는 유적지가 많다.
태종무열왕릉, 선도산 마애불, 두 대리 마애불 등을 찿아볼수 있으며 단석산은 화랑들의
수련장으로 잘 알려져 있다.
서악권문화재
◀ 태종무열왕릉 삼국통일의 기틀을 다진 무열왕릉은 선도산 아래의 송림속에 자리잡고 있다. 무열왕릉 남쪽에는 무열왕의 비석인 돌거북(귀부)과 이수가 남아있으며, 조각이 무척 씩씩하고 아름다워 우리나라 최고의 비석조각으로 꼽히는 자랑거리이다.
◀ 태종무열왕릉비
김유신 장군묘 ▶ 삼국통일의 위업을 달성한 김유신 장군의 묘. 묘 둘레에는 십이지신상이 새겨진 호석과 돌난간이 둘러져 있으며, 울창한 숲이 조성되어 호국의 성지를 보듬고 있다.
김인문 묘
법흥왕릉
◀ 금척리 고분군 금척리 고분군에는 크고 작은 고분 40여기가 모여 있으며, 죽은 사람도 살아난다는 신통한 금자가 이곳 어느 고분인가에 묻혀 있다는 전설이 전해진다.
두대리 마애석불입상 ▶ 서방의 극락정토를 향해 당당하게 서 있는 삼존불로 예술성이 짙은 불상이다.
◀ 효현동 삼층석탑 화강암에 세부가 가늘고 약하게 조각된 이 석탑은 통일신라시대의 것으로 추정된다.
단석산 신선사 마애불상군 ▶ 건천읍에 우뚝 솟아있는 단석산은 옛 신라의 중악이라 불리웠으며, 김유신은 15세에 화랑이 된 뒤 17세에 삼국통일의 포부를 안고 입산하여 신술로 큰 바위를 단칼에 자른뒤부터 단석산이라 이름 붙여졌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 여근곡 신라의 선덕여왕 5년(636년)에 백제병사들이 이 계곡에 숨어 있다가 몰살 당했다는 이야기가 삼국유사와 삼국사기에 전해오고, 옛 문헌에는 여근곡이 옥문곡이라 쓰여있다. 이 여근곡은 산지형이 흡사 여성의 음부와 비슷하다하여 여근곡이라 전해진다.
6, 북부권
유교문화의전통이흐르는북부문화권
경주시내를 벗어나 북쪽으로 올라가면 유교, 불교, 천도교의 성지를 차례로 만날 수 있다.
이차돈의 순교 후 불교의 성지가 된 소금강산, 수운 최재우가 동학을 창시하고 만민평등
사상을 설파한 용담정, 조선조 유교문화가 고스란히 살아있는 양동 민속마을 등 각기 다른
문화가 어울려 독특한 문화권을 형성하고 있다.
북부문화재
◀ 옥산서원 옥산서원은 우리나라 도학의 종장이 된 문원공 회재 이언적 선생의 뜻을 기리는 곳으로 편액의 앞면은 추사 김정희의 글씨가, 뒷면에는 이산해의 글씨가 새겨져 있다.
나원리 5층석탑 나원리 5층석탑은 신라8괴의 하나로 신라석탑으로는 보기 드물게 규모가 크며 순백의 색깔을 변함없이 간직하고 있어 백탑이라고도 부른다.
정혜사지 13층석탑 정혜사지 13층 석탑은 신라의 탑으로 보기드문 13층이며특수한 구조에 기하학적 곡선미를 지니고 있다.
독락당 ▶ 옥산서원 내에 있는 독락당은 이언적 선생이 낙향하여학문에 몰입하던 곳으로 수려한 정자와 계곡이어우러져 운치를 더하는 곳이다.
◀ 양동민속마을 전경 고색창연한 골기와집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양동마을은15~16세기에 형성된 전형적인 민속마을이다. 경주의 문화유산이 대부분 신라시대에 조성된 것에 반해,양동민속마을은 조선시 대 유교문화를 보여주는 곳이다.
백율사 ▶ 백율사는 527년(법흥왕 14년) 불교의 공인을 위해 순교한 이차돈의 목이 떨어진 곳에 지은 절이다.
◀ 굴불사터 사면석불 백율사 오르는 길목에서 굴불사지 사면석불을 만날 수 있다. 신라 35대 경덕왕이 산을 오르는 도중 스님의 경 읽는 소리가 들려 땅을 파 보니 바로 이 사면석불이 나왔다고 한다.
탈해왕릉 ▶ 탈해왕은 신라 최초의 석(昔)씨 왕이다. 탈해왕릉은 아무런 장식이 없는 간소한 무덤이며, 능 서편에는 왕을 제향하는 숭신전이 지어져 있다.
◀ 용담정 용담정은 최제우가 포교활동을 벌이고 인간 절대평등의 가르침을 담은 용담유사를 저술한 곳이다. 용담정에서 조금 떨어진 현곡면 나원리에는 신라 8괴(八怪)의 하나로 알려진 나원리 오층석탑이 있다.
7, 동해안권
추령고개넘어장엄한동해안권
추령고개를 넘어 동해바다로 나서면 하늘끝과 맞닿은 수평선이 펼쳐지고 문무대왕릉,
감은사터, 이견대가 위치하고 있어 호국의 성지를 이루고 옛 신라인들의 장엄한 기운이
가슴벅찬 감동으로 다가온다.
동해안권문화재
문무대왕릉 죽어서도 용이 되어 동해바다를 지키겠다던 유언에 따라 문무왕을 수장한 세계 유일의 해중릉으로 숭고한 호국정신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문무대왕릉 근경
감은사지 ▶ 문무대왕릉을 바라보는 양북면 용당산 기슭에는 감은사지가 자리잡고 있다. 마주보고 서 있는 삼층석탑 2기는 안정감과 상승감을 동시에 표현한 걸작으로 손꼽힌다.
◀ 기림사 전경 함월산 기슭의 울창한 숲속에 자리잡은 고찰로 대적광전을 비롯한 약사전, 응진전 등의 웅장한 당우들과 매월당영당, 박물관 등이 있는 고즈넉하고 평온한 절이다.
천수천안 관세음 보살상
오백나한상
골굴사 마애여래좌상 ▶ 석회암 절벽을 깎아 만든 석굴사원으로 뚜렷한 얼굴에 단호한 의지가 서린 신라 말기의 대표적인 불상이다.
8, 경주인근해수욕장
1,전촌해수욕장
청정 바다와 해양 레저, 연접한 전촌 숲의 송림, 인근 감포항과 많은 활어 횟집들, 그리고 남측으로 5분 거리에는 동해의 바닷물을 이용한 온천 해수탕 등 피서지의 여건을 고루 갖추고 있으며, 또한 도심을 훌쩍 떠나 쉽게 피서지에 닿을 수 있는 대중 교통의 이용이 편리하고, 볼거리, 먹거리, 즐길거리를 함께 할 수 있는 곳이다.
백 사 장 : 길이 0.8㎞, 폭 30 ∼ 60m 개장기간 : 7. 10 ∼ 8. 20 ................ (개·폐장일은 약간 변경될 수 있음)
◎교통안내 <대중교통> 경주 ↔감포 시내버스(20분 간격, 1시간 소요) ☞ 전촌삼거리 하차 도보 포항 ↔감포 시내버스(45분 간격, 1시간 소요) ☞ 감포터미널에서 버스 , 택시 울산 ↔감포 시외버스(25분 간격, 1시간 20분 소요) ☞ 해수욕장(전촌삼거리) ☎ 경주버스터미널 054)743-5599, 감포버스터미널 054)744-3561,
금아교통 : 054)742-2690
승용차 소요시간 : 경주 50분, 포항 1시간10분, 울산 1시간 정도 소요
◎찾아가는길 경주 시내에서 보문 관광단지를 지나 감포 방향으로 40분 정도 달려 기림사의 표지판을 지나면 곧 어일 검문소에 이른다. 좌측 방향으로 5분 정도 가면 감포읍 전촌 삼거리(전촌숲)에 닿는다. 여기서 우(남쪽)회전하여 송림을 지날 쯤 바로 좌측이 전촌 해수욕장이다.경주, 울산, 포항에서 감포로 운행하는 버스를 이용할 수 있으며, 울산 포항 방면에서 승용차로 갈 경우는 동해안 31번 국도를 이용하면 바로 닿을 수 있다.
2,오류해수욕장
동해의 청정 바다와 고운 자갈돌, 어우러진 송림은 찾는이의 마음을 달랜다. 주변에는 각종 편의시설이 있어 쉽게 이용할 수 있으며, 또한 모터보트, 바나나 보트 등의 체험은 수상 레저의 짜릿함을 만끽할 수 있다.
백 사 장 : 길이 0.9㎞, 폭 30 ∼ 70m 개장기간 : 7. 10 ∼ 8. 20 ................ (개·폐장일은 약간 변경될 수 있음)
◎교통안내 <대중교통> 경주 ↔ 감포 시내버스(20분 간격, 1시간 소요) ☞ 개장 시 연장운행 1시간 간격 포항 ↔ 감포 시내버스(45분 간격, 1시간 소요) ☞ 포항 시내 일부 경유 울산 ↔ 감포 시외버스(25분 간격, 1시간 20분 소요)▷감포⇒오류해수욕장 : 10분 소요 ☎ 경주버스터미널 054)743-5599, 감포버스터미널 054)744-3561,
금아교통 : 054) 742-2690
승용차 소요시간 : 경주 1시간 , 포항 1시간, 울산 1시간 10 정도 소요
◎찾아가는길 경주 시내에서 보문 관광단지를 지나 감포 방향(4번국도)으로 30분 정도 가면 추령터널을지나면서 곧 어일 검문소에 이른다. 이 곳 삼거리에서 좌측 방향으로 10㎞ 정도 가면 포항방면과 울산방면으로 갈라지는 전촌삼거리(전촌숲)에 닿는다. 좌측 포항 방면(31번국도)으로 10분 정도 계속 직진하여 고개를 넘으면 우측에 바다가 보이며 오류해수욕장에 이른다.경주, 울산에서 감포 터미널에 하차하여 포항행 시내버스로 이동하거나, 피서철에는 경주에서 오류해수욕장까지 1시간 간격으로 연장 운행하는 버스를 이용하고, 울산 포항 방면에서 승용차로 갈 경우는 동해안 31번 국도를 따라 이동한다.
3,봉길해수욕장
문무대왕수중릉(대왕암)과 동해로 흐르는 대종천의 하구에 자리한 이 곳은 개장 시 평균 수온이 섭씨 22도 내외로 해수욕과 하천에서의 피서를 함께 할 수 있으며, 연중 대왕암을 찾는 관광객의 발길이 이어지는 곳으로, 동해안 역사 문화유적 관광을 겸한 피서지로 각광을 받는다.
백 사 장 : 길이 0.8㎞, 폭 20 ∼ 60m 개장기간 : 7. 10 ∼ 8. 20 ................ (개·폐장일은 약간 변경될 수 있음)
◎교통안내 <대중교통> 경주 ↔ 양남 시내버스(1시간 간격, 1시간 소요) ☞ 봉길(대왕암) 하차 포항 ↔ 감포 시내버스(45분 간격, 1시간 소요) ☞ 감포에서 울산행 버스 이용 울산 ↔ 감포 시외버스(25분 간격, 1시간 소요) ☞ 봉길(대왕암) 하차 ☎ 경주버스터미널 054)743-5599, 감포버스터미널 054)744-3561,
금아교통 : 054) 742-2690
승용차 소요시간 : 경주 50분 , 포항 1시간 30분, 울산 1시간 정도 소요
◎찾아가는길 경주 시내에서 보문 관광단지를 지나 감포 방향으로 40분 정도 달려 기림사의 표지판을 지나면 곧 어일 검문소에 이르고, 우측 방향으로 넓은 들판을 따라 10분 정도 가면 동해안 국도와 만나는 삼거리에 닿는다. 여기서 우측(남쪽)으로 교량을 지나면 5분 이내에 동해의 대왕암과 봉길해수욕장이 좌측으로 시원히 내려다 보인다.경주, 울산, 포항에서 감포와 양남을 운행하는 버스를 이용할 수 있으며, 울산, 포항 방면에서 승용차로 갈 경우는 동해안 31번 국도를 따라 이동하면 편리하게 닿을 수 있다.
4,나정해수욕장
넓은 백사장의 잔잔한 모래와 동해의 청정해역, 여유 있는 주변 공간과 인근의 갖은 편의시설이 있고, 동해의 바닷물을 이용하여 온천을 즐길 수 있는 해수탕이 있어 새로운 체험을 할 수 있고, 해수탕 옆은 주차공간과 송림이 개방 되어있다. 또한 모터보트, 바나나 보트 등 수상 레저를 즐길 수 있다.
백 사 장 : 길이 0.5㎞, 폭 40 ∼ 90m 개장기간 : 7. 10 ∼ 8. 20 ................ (개·폐장일은 약간 변경될 수 있음)
◎ 주차장정보 [주차대수] : 280대 ※ 주차비는 무료입니다.
◎교통안내 <대중교통> 경주 ↔ 감포 시내버스(20분 간격, 1시간 소요) ☞ 전촌 하차 ☞ 도보 10분, 택시이용 포항 ↔ 감포 시내버스(45분 간격, 1시간 소요) ☞ 감포터미널에서 버스, 택시 이용 울산 ↔ 감포 시외버스(25분 간격, 1시간 20분 소요) ☞ 나정해수욕장 하차 ☎ 경주버스터미널 054)743-5599, 감포버스터미널 054)744-3561,
금아교통 : 054) 742-2690
승용차 소요시간 : 경주 50분 , 포항 1시간 10분 , 울산 1시간 정도 소요
◎찾아가는길 경주 시내에서 보문 관광단지를 지나 감포 방향으로 40분 정도 달려 기림사의 표지판을 지나면 곧 어일 검문소에 닿는다. 좌측 방향으로 5분 정도 가면 감포읍 전촌 삼거리(전촌숲)에 이르며, 여기서 우(남쪽)회전하여 송림숲을 지나 교량을 건너면 좌측이 나정해수욕장이다. 경주, 울산, 포항에서 감포 방향으로 운행하는 버스를 이용할 수 있으며, 울산, 포항 방면에서 승용차로 갈 경우는 동해안 31번 국도를 따라 이동하면 편리하다.
5,관성해수욕장
이 곳은 맑고 푸른 청정해역으로 이미 인정 받은 바 있으며, 송림과 해안이 어우러져 반원형을 그리고 있다. 인근 양남면 신대리에는 코오롱 골프장이 있어, 해양 레저와 함께 여가를 즐길 수 있다.
백사장 : 길이 1.3㎞, 폭 30 ∼ 70m 개장기간 : 7. 10 ∼ 8. 20 ................ (개·폐장일은 약간 변경될 수 있음)
◎교통안내 <대중교통> 경주 ↔ 양남 시내버스(1시간 간격, 1시간 20분 소요) 포항 ↔ 감포 시내버스(45분 간격, 1시간 소요) ☞ 감포에서 울산행 버스 이용 울산 ↔ 감포 시외버스(25분 간격, 1시간 소요) ☞ 수렴2리 관성해수욕장 하차 ☎ 경주버스터미널 054)743-5599, 감포버스터미널 054)744-3561,
금아교통 : 054) 742-2690
승용차 소요시간 : 경주 1시간 10분, 포항 1시간 40분, 울산 50분 정도 소요
◎찾아가는길 경주에서 감포 방향으로 40분 정도 달리면 추령터널을 지나 양북면 소재 어일 검문소에 이르며, 우측 방향으로 넓은 들판을 따라 10분 정도 달리면 동해안 31번 국도와 만나는삼거리에 닿는다. 여기서 우측(남쪽)으로 교량을 지나 10분 정도 달려 월성원전 앞에서 우측으로 산 허리를 돌아, 해안 구 도로와 교차하는 양남면사무소 앞에서 좌회전하여 구 국도를 5분 정도 달리면 좌측으로 수렴리 소재 해수욕장에 닿는다. 경주, 울산, 포항에서 감포와 양남을 운행하는 버스를 이용할 수 있으며, 울산, 포항방면에서 승용차로 갈 경우는 동해안 국도를 이용하면 바로 닿을 수 있다.
9, 토함산자연휴양림
토함산 자연휴양림은 명산 토함산 기슭에 자리잡고 있다. 이곳은 불국사, 석굴암, 보문관광단지, 무열왕릉 등 신라 고적관광과 함께 대자연 속에서 조용히 쉬면서 생각할 수 있는 최적의 산림 내 휴식공간이다. ☎ 054)772-1254
◎찾아가는길 경주 -- 불국사: 시내버스 이용 불국사 -- 휴양림: 택시나 자가용 이용 경주 -- 장항리: 시내버스 이용 장항리 -- 휴양림: 도보 또는 자가용 이용 96년도 도로개통 이후에는 대중교통수단이용 가능 경주---12km---불국사, 석굴암---8km---휴양림 경주---4.0km---보문단지---11km---장항리---11.5km---감포(동해안)
10, 공원
1,황성공원
황성공원(隍城公園)은 314천평의 대지에 울창한 수목과 함께 2만 여명을 수용할 수 있는 시민운동장, 씨름장, 국궁장, 게이트볼장 등 시민을 위한 휴식공간이 마련되어 있고, 이 곳에 김유신(金庾信) 장군의 동상이 있다. 황성공원 옛 숲을 고양수, 논호수, 고성수라고 칭하며 「조선의 임수」기록에 의하면 "고양수는 경주군 북천면 황성리 소재의 면적이 약 80,000평으로 국내 최대의 규모이다. 경주 읍내의 북쪽 1.6km에 위치하며 토양은 자갈을 포함한 사양토이다. 사각형의 하천변 평탄지로서 동쪽에독산이 있다.
그리고 동쪽 일부는 임정수로부터 구릉지까지 연속되어 있다고 한다. 그리고 수림 상태는흉고 직경 100cm 전후의 참느릅나무, 느티나무, 회화나무와 소경의 소나무 등 노령수가 분산되어 있다. 남쪽은 상수리, 북쪽은 소나무의 장령수가 울창하였다. 거목들이 바람에절단되거나, 파손되어 점차 사라지고 있다. 옻나무와 벚나무 등이 특용수나 관상수로 식재되었다"고 하며, 또한 "대정 2년 11월 농공상공부장관 결의로 삼림 산야를 국유와 사유로 구분하는「특수임야조」에 논호수는 수병비, 수방, 방풍 및 풍치 등의 목적으로 설치된 평지림이며 도읍의 전후부근 하안 등에 존재한다. 경주의 논호수와 광주의 유림수등은 유명하다. 논호수는 평지에 있는 숲으로 대표적인 것으로 후에 수해 방비 보안림으로 편입하고 국유공원 확장계획의 일환으로 경주읍에 이관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렇듯 방대한 면적의 숲은 조수번식에 적합한 곳이었으며 신라시대 왕들의 훌륭한 사냥터가 되었다.「경국대전」의 「법문」에서도 “비보장소의 숲 안에 나무를 벌목하거나 밭을 경작하면 장 80에 처한다”고 기록되어 있으며, 한편 고양수는 북천의 범람에 대비한 것이며 하안 붕괴방지 및 숲 뒤의 황성리 옥전을 보호하기 위함이란 기록과 고양수는 임정수와 수렵림 내지 조수보호림으로 충분하였다. 그리고 보안 위주의 수해 방비림, 풍해 방비림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더욱이 「동경잡기」, 「경주시지」, 「풍물지리지」에 기록된 내용에서 황성공원의 고양수와 임정수는 연결되어 신라시대에는 수렵과 강무(사냥하며 무예를 익힘) 그리고 각종 놀이가 행해지던 곳이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문헌상의 기록으로 볼 때, 고양수는 인공적으로 조성되었으며 조성 초기에 있어서뚜렷한 의미, 목적과 기능을 갖추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즉 국방 전략상의 숲으로서 수병비, 북천의 범람에 대비하여 하안 붕괴 방지 및 숲의 북측에 위치한 옛 황성리 일대의 농경지를 보호하기 위한 수방비림, 신라왕경도시의 기온을 온화하게 하기 위해 북풍의 세찬 바람을 막기 위한 방풍림, 푸르른 숲의 경관에서 많은 사람들의 정서순화 및 경관적ㆍ시각적 효과를 도모할 수 있는 풍치림, 각종 날짐승과 길짐승이 서식함에 따라 수렵림내지 조수보호림 그리고 신라시대에는 사냥하며 무예를 익히는 군사훈련장 그리고 각종 놀이가 행해진 레크리에이션 활동 기능 등이 그것이다. 고양수는 신라시대에는 수렵지로활용되었음을 볼 때 주변에 조성된 숲들과 상호 연결되었음을 쉽게 추측할 수 있다. 즉, 동으로는 임정수와 소금강산으로 연결되고, 서로는 유림, 지북림 그리고 서천 건너편의 서부림과 연결되는 동서녹지축의 중심부에 입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주변의 산과 강을 이용하여 가장 효과적인 open space system을 형성하고 있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황성공원 내 독산은 신라 도읍의 북쪽이 허하다고 하여 인공적으로 조성한 조산이며 신라시대에는 독산 주변에 숲이 조성되었다. 이것은 「삼국유사」에 원성왕(785~798)때 고성숲 서남쪽에 창건한 호원사 전설에 기록되어있는데, 여기에 "독산 기슭의 숲속"이란 기록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이와 같이 조산 주변에 숲을 조성하여 체계적관리를 해왔음을 볼 때 풍수적 개념인 비보(풍수상의 흠이나 부족한 점을 인위적 조작으로 보완한다는 개념)의 역할을 강화시켰음을 알 수 있다. 조성의 배경에 따른 조성의 순위를 추정하면, 중심부에 비보개념의 고양수를 우선적으로 결정하고 동의 소금강산과 서의 형산강을연계시키는 방법으로 임정수와 유림숲의 공간을 조성한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 제26대 진평왕이 즐겨 찾던 사냥터였다던 울창한 숲이 이 일대에 형성되어 있었으며, 다양한 기능을 갖춘 역사적 공간임을 알 수 있다.
◎ 찾아가는길 경주역에서 포항방면으로 가다보면 왼쪽에 황성공원이 보인다. 승용차로 5분도 채 걸리지않는 거리에 있다.
2,경주세계문화엑스포공원
2001년 3월 30일부터 문화테마공원으로 상시개장하고 있는 경주세계문화엑스포공원에서는 최고의 하이라이트로 자랑하고 있는 사이버영상관의 콘텐츠를 2000년 행사 후 계속 향상시켜 기존의 내용과 완전히 변화된 모습으로 새롭게 제작 상영하여 관람객으로부터 놀라운 영상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경주세계문화엑스포 조직위원회와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이 공동으로 제작한 이 영상은 '서라벌의 숨결 속으로'란 제목으로 2000년 경주세계문화엑스포 행사시 관람객에게 최고의 인기를 받았던 작품으로 내용과 정밀도를 한층 보완하여 이번에 새로운 모습으로 거듭나는 개가를 거두었다.
경주세계문화엑스포공원의 사이버영상관은 651명이 동시에 관람할 수 있는 세계최대, 한국최고의 가상현실 전용극장으로 최첨단영상기법인 가상현실(Virtual Reality) 영상을 입체로 감상할 수 있다. 새롭게 태어난 '서라벌의 숨결 속으로'는 VR기법을 활용, 1천여 년 전 신라문화의 숨결을 생생하게 느끼면서 체험할 수 있는 작품으로 실시간(Real Time) 3차원 컴퓨터영상과 입체적인 음향 외에 꽃향기, 솔 향기 등 후각과 의자가 저주파에 의해 흔들리는 공간감각,화면의 입체감 및 몰입감을 느낄 수 있어 인간의 오감 중 네 가지 감각을 느낄 수 있도록되어 있다.
이 주제영상은 경주세계문화엑스포 조직위원회가 21세기 지식·정보시대를 맞아 새로운 문화창달의 기치를 내걸고 한국과학기술연구원(KIST)과 함께 개발한 회심의 역작으로 기획과 컨텐츠 구성에서 제작까지 장비를 제외한 모든 과정이 국내에서 이루어졌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번 영상은 기존의 남산과 신라왕국이었던 월성, 왕경대로, 안압지, 황룡사 9층탑, 첨성대, 석굴암 등의 내용에서 전체적으로 컨텐츠의 정밀도를 높이는 것은 물론, 남산과 서라벌 시가지, 칠불암, 동해일출 등의 새로운 컨텐츠가 추가되었으며 시가지 하늘에 새떼가 날아가고 연꽃 위의 개구리가 뛰어가는 등 동적인 영상을 넣어서 흥미를 끌 수 있도록 제작되었다. 상영시간도 15분에서 약 20분으로 늘어났다.'천년의 미소전'에서는 삼국시대의 시대별 기와문양(와당)을 눈으로 보는 전시만이 아닌 서양기법보다 간편하고, 간결하여 관객의 참여가 쉬운 고(古) 인쇄방법을 통하여 관람객들이 좀더 능동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여러가지 '체험의 장'을 마련하였다. 동방문화관': 품격과 깊이를 더하는 역사관 찬란한 신라역사를 재조명하고, 우리 문화유산과 신라인의 창조적 삶을 보여주는 동방문화관은 21세기형 역사문화체험장으로 조성되었다.
◎ 찾아가는길 경주역에서 보문단지 방향의 도로를 따라가다 천군삼거리에서 다리(보문관광단지 입구방향) 맞은편의 불국사 방향의 도로를2분여 따라가다 보면 우측에 엑스포공원이있다. - 시내버스 10, 11, 100, 150번
11, 해돋이명소
문무대왕릉해돋이
이 곳은 문무대왕릉이 죽어서도 용이 되어 동해바다를 지키겠다던 유언에 따라 문무왕을 수장한 세계유일의 수중왕릉으로, 숭고한 호국정신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 바다 한 가운데의 수중릉 위로 붉게 떠오르는 태양의 모습에서 문무왕의 숭고한 정신이 언제나 살아있는 듯하다. 일출을 보고 있노라면, 푸른 바다와 붉은 해의 정열적인 조화가 가슴깊이 새겨지며 새로운 다짐을 하게 한다. 물든 파도의 일렁이는 모습에 마음속 일상의 근심이 하나 둘 사라져 자연과 하나가 되는 느낌이다. 여름, 겨울 할 것 없이 일출의 모습은 장관이다.
또한 이 곳에서는 신성한 문무왕릉이 있어 무속신앙인 굿이 많이 행해지며, 방생도 이루어지고 있어 또 하나의 볼거리가 된다.
◎ 찾아가는길 경주시 양북면 용당리에 있다. 양북면 소재지인 어일리에서 929번 지방도를 따라 양남 쪽으로 7km가면 삼거리가 나온다. 여기서 우회전해 대종천 다리를 건너면 봉길리 해수욕장이 왼쪽으로 보이는데, 문무대왕릉은 그 앞바다에 있다.
12, 경주명물
1,두산명주
경주역에서 동쪽 방면으로 35km쯤
떨어진 양북면 두산리에 이 마을 주민(노인) 30여 명이 누에고치를 매입해 실뽑기, 실잦기, 꾸리 만들기 등의 공동작업으로 명주베를 짜서 수의(壽衣)용으로 판매, 연간 200필 정도를 짜서 약 7천만원의 소득을 올리고 있다. 옛날에 이런 명주로 부모의 수의를 만들때에는 효를 다하기 위해, 윤달 가운데 택하여 팔자 좋고 장수한 노인들이 모여앉아 중간에 실을 잇지 않게 바느질을 하였는데, 이것은 저승갈 때 걸리지 않고 편안히 가기를염원한 것이라고 한다. 가격은 한 필당 (40자 = 12m) 35만원선으로 수의 한 벌 지으려면 120만원 정도가 든다.
2,서라벌향수
서라벌 향수는 찬란했던 신라의 옛 문화를 상기시키고 천년고도 신라의 향기가 서려있는 경주의 독특한 향수를 개발하여 전통성 있는 관광기념품으로 육성시켜 국내외 관광객에게 관광경주만의 향기를 심어주기 위하여 경주시에서 연구 개발한 향수입니다. 경주만의 향기를 간직하십시오. 향수는 크게 두가지로
성인용과 쥬니어용이 있어요. 향수의 향기는 대략 성인용은 경주의 벚꽃향, 쥬니어용은 시원한 한국에서 나는 솔향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향기는 끝내줘요.
* 문의안내 - 경주시 관광진흥과, 054-749-0101/779-6396
3,넥타이
이 넥타이는 경주지역에서 출토된 유물을 문양으로 경주시와 파울로 구찌사가 관광기념품으로 개발하여 판매하고 있으며, 좋은 품질의 원단을 사용하여 신라천년의 모습을 담고 있습니다. 경주의 여러 유적에서 출토된 다양한 신라의 모습을 담아 고풍스럽지만 아주 감각있고 현대적인 디자인으로 만들었습니다. 신라천년의 모습을 가슴에 담아보세요. 특히, 부모님, 은사님들께 드릴 정성스런 선물로써 아주 좋습니다.
* 제품정보 넥타이 : 23,000원(개당)
* 문양 종류 1.금관 2.석조여래좌상 3.금귀걸이 4.청동거울 5.얼굴무늬 수막새
* 안내전화 경주시 관광진흥과, 054-749-0101/779-6396
경주공예품
1,신라토기
신라토기는 경주지방을 중심으로 기원전 1세기경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하여 무려 천년 동안이나 사용되어 왔다. 이 토기는 경주지방에 다량으로 매장되어 있는 점토를 원료로 하여 섭씨1000도 이상의 고열로 소성된 것으로 색채는 회청색이 보통이지만 소성시 솔잎재로 인하여 생긴 자연유로 덮인것도 있다. 형태는 용도에 따라 일상 생활용품인 장경호, 고배, 각배, 영배 등도 있고 사자를 위한 골호. 그리고 명기인 신구형토기, 차형토기, 기마인물토기 등 수십종에 달한다.
이러한 토기들은 천마총, 황남대총, 금관총 등이 신라고분에서 수천점 출토된 바 있어 경주지방에 산재하여 있는 고분들은 신라토기의 보고와도 같다. 신라토기의 제조기술은 신라인의 독창적인 것이며, 이러한 신라인의 기술은 5세기중엽 일본으로 전파되어 스혜키라고 불리는 같은 종류의 토기를 출현시키게 되었다. 이러한 신라토기를 여러 공예품 제조업체에서 재현하고 있다.
* 문의사항 : 경주민속공예촌 (054) 746 - 7207
2,모조금관
천마총(155고분)에서 출토된 높이 32.5cm, 장식길이 25.5cm, 지름 20cm인 금관(국보188호)은 다른 금관에 비해 금판이 두터우며 출자형 입식의 가지가 4단으로 되어있다.피장자가 착용한 채로 발견된 이 금관은 원형대로 전반부에 세줄기 출자형 입식과 후반부에 두줄기 녹각형 장식을 세운 전형적인 신라식 금관이다. 모조금관은 이 신라식 금관의 모형을 실제와 유사하게 만든 금관이다.
제 작 처 : 삼선방(T.054-746-7538) * 재 질:속 재질 적동, 겉 재질 순금도금 * 종 류:실물크기,실물의 3분의 2,실물의 2분의1 * 교통편:승용차 -20분거리, 시내버스(11,101,12,102) 민속공예촌 입구(25분)
3,기마인물토기
넓은 토판에 말을 세우고 그 위에 따로 만든 인물을 얹어 놓은 것으로 말의 궁둥이 위에는 안으로 구멍이 뚫린 배구(杯口)가 있고 가슴에는 긴 주구(主口)가 붙어 있어 배구(杯口)로 물을 부으면 주구(主口)로 나오도록 되어 있다. 말은 네다리가 굵고 짧아 어색하지만 머리는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다.혁구(革具)나 큰 불엽, 안장 밑의 장니(障泥), 등자 등이 충실히 표현되어 있으며, 인물은 삼각모를 쓰고 사슴가죽을 바지에 덮은 신라의 귀족이다. 또 하나는 긴 오른손에 목탁을 들었으며, 주인 앞에서 길을 안내하는 종임이 분명하다.
장난감이라고 생각할지 모르나, 속이 비어있는 몸, 컵 모양의 수구(受口)는 동물형 토기의 공식을 지키고 있으며 피장자(被葬者)의 승천을 상징하는 역술적 기능의 의기(儀器)일 것이다. 동물형 토기는 가야지방에서 먼저 일어난것 같으나 이 기마인물 토기는 신라에서 고안된 신라식 토기라고 하겠다. 이러한 기마인물상 토기를 공예촌을 중심으로 여러 업체에서 재현하고 있다
문의전화 : 민속공예촌 (054) 746 - 7207
4,모조은잔
신라 5-6세기의 적석목각분인 황남대총(북분)에서 출토된 귀갑이수문은잔(보물 627호)의 귀갑형 구획 내에서 새 봉황, 사람 등의 문양을 그릇 안쪽에서 밖으로 타출(打出)하여 부각시킨 것을 본떠서 만든 모조 은잔이다. 진품은 국립 경주 박물관에 소장(순은으로 주물 복제 한 것 임)되어 있다. * 제 작 처 : 삼선방(T.054-746-7538) * 재 질 : 순은 99.9% * 종 류 : 1개당 무게 100 - 120g(25 - 30돈)
특산품
1,교동법주
경주시 교동에서 56년간 교동법주를 빚어 온 배영신 할머니가 있다. 콧속으로 감겨 뻗치는 교동법주의 감미로운 향취와 맛은 배 할머니댁의 뜰에 있는 샘물로만 술을 빚어야만 제 맛이 난다고 한다. 배 할머니는 주요 무형문화재로 지정된 교동법주의 기능 보유자이다. 1939년 최씨 집안에 시집온 배 할머니는 시어머니로부터 술빚기를 배우면서 밤을 새우기가 일쑤였으며 교동법주는 찹쌀과 밀로 만든 누룩 그리고 뜰 샘물로 만든다. 알코올 도수는 19도를 넘는데 지난 90년 알코올도수를 15도 정도로 낮추는 비법을 창안해 국세청으로부터 면허를 받게 되었다.
법주 제조장의 장독대 우물 옆에는 구기자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는데 족히 100년은 넘을
것이라고 한다. 이 구기자 뿌리가 샘에 닿아 물맛이 좋다고 하여 소중히 다루고 있다.
* 구입방법 : 경주시 교동 69 배영신(교동법주) * 기타 문의사항 : (054) 772 - 5994
황남빵
경주시 황남동에다 처음 문을 열었다 하여 황남빵이라 이름 붙여진 자그마한 팥빵이다. 황남빵은 1939년에 최초로 만들어졌다고 한다. 경주 토박이인 최영화 할아버지가 처음 만들기 시작해서 지금은 아들 최상은 씨에게 대물림 하였다. 이 황남빵의 비밀은 반죽의 농도에 있는데 손저울을 사용하고 물과 밀가루의 비율을 엄격히 지켜 알맞은 반죽을 하여 팥소를 넣은 둥글 납작한 반죽덩어리 위에 빗살무늬 도장을 꾹 눌러 찍어 멋을 낸다. 인공 감미료나 방부제가 전혀 안 들어가 부드럽고 고풍스러운 맛이 난다. 하루에 1만개의 빵을 내는데 1개에 500원 꼴이다. 요즘도 이 빵을 먹기 위해서는 줄을 서야 할 정도이다.
버섯은 독특한 향과 맛, 영양가치 때문에 누구에게나 친근하게 널리 상용되는 식품으로 여러 종류의 버섯에서 항암 효과도 있다는 연구보고가 있어 식용가치뿐만 아니라 약용 가치로도 널리 인정받고 있다. 경주의 으뜸 농산물로 자리잡아가고 있는 "경주버섯"은 건천읍을 중심으로 재배되고 있는데 전국생산량의 24.6%, 도내생산량의 98%를 차지하고 있다. 양송이 버섯을 비롯
하여 다양하게 생산되는 버섯들은 농약을 전혀사용하지 않은 청정 친환경 농산물로 인증을 받고 있다. 특히 신령버섯인 아가리쿠스는 엑기스, 차 술, 일반음식으로도 사용되며 고혈압, 당뇨, 동맥경화, 변비, 알레르기, 식욕감퇴에도 탁월한 효능이 있다.
경주배는 한방약재로 쓰이고 있는 감초, 당귀에 칼슘, 유산균,천혜녹즙(아카시아꽃,쑥,미나리),목초액 미생물을 충분히 넣은 발효 퇴비를 사용하는 친환경 농법으로 재배되고 있는데, 당도와 맛이 뛰어나 국내시장뿐 아니라 일본 등 해외 수출시장에도 많이 알려져 있다. 과일 중에서도 배는 사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 배를 세계적으로 알아주고 있는데, 기침, 해소, 소화, 이뇨작용, 변비에 좋고 숙취 및 땀흘린 뒤 해갈에 좋다고 동의보감에 기록되어 있다. 쇠고기의 질긴 조직을 부드럽게 만들어주고 콜레스테롤을 용해시키기 때문에 불고기를 잴때에는 항상 쓰이고 있다.
경주안강단감은 동해안의 해풍과 어래산의 청정한 자연환경이 있어 풍부하고 맑은 수질과 큰일교차로 재배조건이 양호하여 당도가 아주 높아서 최고품질로 인정받고 있다. 2000년부터 동남아지역에 수출 등으로 지역 최고의 특산물로 자리잡고 있다. 대내외적으로 브랜드 이미지 홍보와 경쟁력 강화를 위해서 매년 10월달에 단감축제와 단감품평회를 개최하여 품질향상에 힘쓰고
있다. 타지역과 차별화하기 위해서 저농약 재배로 품질의 안전성을 높이고 있으며, 상품의 철저한 등급화와 균일화로 최고의 단감을 생산하고 있다.
구입방법 : 054)761-3333 안강단감작목회
4,토마토
찰토마토는 3월부터 5월까지 출하되며 충분한 일조량과 깨끗한 수질, 재배에 알맞은 토양을 갖춘 자연적 요건에다 산풀퇴비의 시비라는 독특한 유기농법이 이루어낸 훌륭한 우리 농산물이다. 육질이 단단하고 저장성이 뛰어나 신선도가 오래가며 꽉 찬 속살에서 배어나오는 단맛과 상큼한 향은 타지방의 토마토에서는 느낄 수 없는 안강 찰토마토 만의 특징이 있다. 생산된 토마토는 전량 서울을 비롯한 전국 대도시에 농협을 통한 계통출하를 하여 값 싸고 신선하게 식탁에 배달되어 더욱 인기를 끌고 있다.
구입방법 : (054) 761- 8097
5, 멸치젓
동해(감포)바다 청정해역에서 잡은 신선하고 깨끗한 멸치를 사용하여 육젓은 10개월 이상 자연발효 시키고 액젓은 1년 - 1년6개월 이상 자연발효 시킨다. 우리 몸 속에 필요한 각종 아미노산과 호박산이 고루 함유되어있는 감포 멸치젓의 육젓은 각종 김치류의 양념용으로 쓰기도 하고 젓갈 자체를 무쳐 먹기도 한다.액젓은 김치류, 나물무침 간장대용으로 사용할 수 있어 화학조미료를 쓰지 않고 자연스러운 맛을 내는데 많이 사용된다.
경주세계문화엑스포는 다가오는 꿈과 감성의 세기를 위한 문화적 비전을 제시하고 문화를 통해 세계평화와 인류의 이상을 추구하는 지구촌 문화축제이자 문화산업의 무궁한 가능성을 모색하는 문화박람회입니다. 3년마다 개최하는 경주세계문화엑스포는 첨단기술을 접목한 특화 프로그램에서 천년 고도(古都) 정취 가득한 유적지 야외행사까지, 잊지 못할 감동으로 여러분을 초대합니다. * 기간 : 3년마다 개최(8월~11월) * 장소 : 보문단지내 엑스포공원
전통의 맛, 멋, 흥, 참여와 체험이 하나되는 축제! 한국의 술과 떡잔치는 우리 민족의 전통음식인 술과 떡의 우수성과 다양성을국내.외에 널리 알리고, 전통먹거리를 관광 상품화 하여 시음, 시식, 체험과함께 다양한 볼거리 등 전통축제로 정착된 동북아시아 3개국이 참여하는정부지정 문화관광 축제이다. * 기간 : 매년 3월말 ~ 4월초 * 장소 : 경주보문관광단지내
신라의 찬란했던 문화를 재현하는 신라문화제는 삼국을 통일한 선조들의웅혼한 의지와 정신을 기리기 위한 축제로, 전통과 현대를 접목시킨 다채롭고풍성한 볼거리가 펼쳐진다. * 기간 : 매년 10월 8~10일(3일간) * 장소 : 경주시일원
이 곳은 문무대왕릉이 죽어서도 용이 되어 동해바다를 지키겠다던 유언에 따라 문무왕을 수장한 세계유일의 수중왕릉으로, 숭고한 호국정신이 깃들어 있는 곳이다.일출을 보고 있노라면, 푸른 바다와 붉은 해의 정열적인 조화가 가슴깊이 새겨지며 새로운 다짐을 하게 한다. 물든 파도의 일렁이는 모습에 마음속 일상의 근심이 하나 둘 사라져 자연과 하나가 되는 느낌이다. 여름, 겨울 할 것 없이 일출의 모습은 장관이다.
새해가 되면 불국사에서는 이 곳에서 사부대중을 모신 가운데 대동한마당 형식의 기원 대축제를 가진다. 한 해의 마지막 날 오후 10시를 시작으로 다채로운 행사가 펼쳐지며 12시를 기해 조계종 종정 법어와 총무원장 메시지를 포함한 타종식 행사, 새해 오전 5시부터 희망과 기원의 새해맞이 대동한마당을 함께 한다.
14, 경주의교통/숙박/음식정보
경주시내 순회 관광버스
정기운행 일정
터미널 ▶ 보문관광단지(경유) ▶ (불국사) ▶ 민속공예촌(신라역사과학관) ▶ 분황사 ▶ 김유신장군묘 ▶ (중식) ▶ 포석정 ▶ 박물관 ▶ 안압지 ▶ 첨성대▶ 천마총 ▶ 터미널
경주시내 곳곳에 음식점들이 산재해 있어 언제 어느때 어디에서든 마음에 드는 음식점과 전문 요리집들을 찾을수 있다. 이중 가볼만한 불고기 단지는 아래와 같다.
산내 불고기 단지
순수한 한우를 신선한 사료로 사육하여 담백하고 쫄깃한 한우 고유의 맛이 일품이다.
* 이용시기 : 연중 * 위치 : 산내면 의곡리, 대현리 * 업소수 : 38개소(의곡리21개소, 대현리17개소) * 문의 : 산내면사무소 (054)751-5301
외동모화불고기단지
우리의 순수한 한우를 신선한 사료로 사육하여 담백하고 쫄깃한 한우 고유의 맛이 일품이다.
* 이용시기 : 연중 * 위치 : 외동읍 모화1리 원원사 입구 * 업소수 : 12개소 * 문의 : 외동읍사무소 (054)751-5301
화산불고기단지
‘93년도 화산불고기단지 조성후 현재 19개업소가 불고기단지번영 회원으로 가입하여 영업중이며 금년 2월말 10주년기념 제1회 “화산한우불고기축제” 개최로 대구, 울산, 포항 등 찾는 손님이 많으며 국내.외적으로 몇 차례 치러진 경주세계문화엑스포, 동아마라톤 등대내외적으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순수 한우로 신선하고 감칠맛 나는 육질 고기와 청결과 몸에 배어진 친절서비스며 신선한 무공해 야채(상치, 파, 무 등)로 만든 알찬 밑반찬 을 제공하고 있다.
교통이 편리하여 인근 경주보문관광단지와 포항은 승용차편으로 15분거리며 낚시터로는 성지지, 등산로 로는 1시간코스, 2시간코스의 동대봉산, 사진전시회, 미술전시회 등의 예술공간으로는 겔러리 꽂뫼와 옛 화당초등학교 분교장내의 염색, 도자기 생활체험을 통한 학생예술체험장이 있으며 연접지 강동면 왕신지의 수상스키장과 안동권씨 운곡서원이 유명하며, 단지내의 여름, 가을철 용사골의 아름다운 경치 또한 절경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