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출처: 성민 알이랑 민족 회복운동 원문보기 글쓴이: 셈의장막재건자
3분박이란?
우리 가락으로 드리는 예배
손해석 목사
거룩한 성전 작곡자
셈의 장막 대표
3분박의 비밀
지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찬송가” 중 94%가 서양음악 작곡가에 의해 4분박 개념으로 작곡되었습니다. 그 중 우리 작곡가의 손으로 작곡되어진 나머지 곡이 3분박 개념으로 작곡되어진 곡입니다. 이러한 기독예배문화의 현실을 안타깝게 생각하며, 우리 민족이 잃어버린 3분박, 박물관 문화로 전락해버린 3분박, 천박한 기생문화로 전락해버린 3분박의 비밀을 알립니다.
3분박은 3박자와 다릅니다. 쉽게 말해서 “박자”는 한마디 안에 이루어지는 비트(beat:박자)를 말하지만 “분박(分拍)”은 1비트 안에 쪼개(split)지는 기본단위를 말합니다. 따라서 3분박은 1비트 안에 쪼갤 수 있는 기본리듬이 3개라는 것입니다(우리의 3분박은 인위적 리듬인 세잇단음-3triple-과 개념이 다르다). 그런데 독특하게도 이 3분박이 주변국 중국, 일본, 몽골, 러시아 등에서 사용하는 분박과는 전혀 다르게 하나님께서 우리민족에게만 주셨다는 점입니다. 이것이 바로 신비인 것입니다.
서양 음악의 리듬 패턴은 주로 4분박에 의해 형성됩니다. 1비트 안에 쪼갤 수 있는 최소의 기본리듬이 4개로 쪼개어 지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이 4개의 쪼개어진 리듬이 2;2로 분리되면 에이스리듬(Ace Rhythm ; ?), 3:1로 분리되면 샤플리듬(Shuffle Rhythm ; 부점이 있는 리듬)이 됩니다. 2분박은 주로 동양음악 안에 많이 찾아볼 수 있습니다. 전자에 언급했던 우리의 주변곡 민족음악 역시 2분박 리듬이 근간을 이룹니다.
그런데 왜 하나님께서는 우리민족에게 독특한 3분박 리듬을 주셨는가? 2002년 10월 세계 예배문화축제에서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은 예상했던 대로 3분박 안에는 2분박과 4분박을 보듬고, 화합할 수 있는 놀라운 기능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 점에 있어서 3분박은 우리 한민족에게 부여하신 귀한 보물인 것입니다.
이미 알려진 사실이지만 몇 년 전 세계 리듬 콘테스트에서 우리의 사물놀이가 최고인 영예의 1등상을 탔습니다. 사물놀이의 현란한 3분박 리듬과 변화무쌍한 리듬패턴의 경이로움에 세계 내로라하는 타악주자(Percussionist)들을 당당히 물리치고 심사 위원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습니다. 또한 2003년 세계작곡가들 모임에서는 세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민요로 우리의 3분박 민요 “아리랑”이 선정되었습니다. 이러한 사실만 보아도 우리의 정서가 세계인들에게 얼마나 큰 감동을 주고 있는가를 입증한 것입니다.
이러한 독특하고 경이로운 3분박의 리듬패턴이 우리 민족의 반만년 역사동안에 면면히 흘러왔다는 사실을 우리는 얼마나 알고 있습니까?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이 리듬이 일제의 우리 문화말살정책에 의해 순식간에 박물관 문화의 천박한 문화로 전락해버렸다는 사실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대표적 2분박 리듬인 엔카음악의 아류인 “뽕짝”이 대한민국의 대중음악의 주인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불과 그들이 36년 동안에 이루어버린 업적(?)인 것입니다. 반만년의 역사를 뒤집어버린 것입니다.
이제는 이 3분박을 회복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예배의 고착화를 더 이상 방치할 수 없고, 더 나아가 세계 예배음악의 흐름인 월드 뮤직 패턴으로 변환해가는 예배의 양식의 대열에 우리 음악의 3분박 리듬의 특성을 살린 월드뮤직으로서 버젓이 한 장르를 차지하게 하도록 하는 것입니다. 이제 또 하나의 새 역사 창조를 위해 오늘도 기꺼이 광야의 길을 갈 것입니다.
계면조의 비밀
몇 년 전에 새 찬송가의 보급을 위해 대대적으로 곡을 모집하여 작년에 드디어 새찬송가가 보급되게 되었습니다. 그러는 과정에서 교회음악박사 한 분은 “이번 새찬송가에는 단조(Minor)곡이 많아 찬송가로서는 부적격하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대부분 현 음악학자들의 학문적 지식은 서양음악이 바탕이 된 음악적 세계관의 시각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그런 우를 범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새찬송가에 수록되어 있는 곡 중에 60여 곡이 국악곡들입니다. 국악에는 평조와 계면조가 있는데 굳이 말하자면 전자는 서양음악의 장조, 후자는 단조라고 표현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단순비교가 바로 “우리음악(국악)”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게 하는 원인이 됩니다. 우리 음악에는 평조에 비해 계면조가 훨씬 많습니다. 새찬송가에 수록된 국악스타일의 곡을 보고 그 교회음악박사는 단조가 많다고 지적한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음악의 “계면조”는 서양음악의 단조와는 어떻게 다른가?
우리 음악의 계면조는 서양음악의 단조보다 훨씬 넓고 깊은 의미가 있습니다. 일단 단조는 슬프고, 여성적이라고 정의하지만 계면조는 이러한 느낌을 포함하여 장조가 가질 수 있는 남성적인 매력까지 포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장조보다 훨씬 역동성이 넘쳐납니다.
쉬운 예를 들어보면, 누구나 다 하는 “진도아리랑”은 “계면조”입니다. 임권택 감독의 영화 “서편제”를 보신 분들은 기억하실 것입니다. 세 주인공이 떠돌이 생활을 하다가 어느 시골의 한적한 길을 걸어오다가 이 노래와 장단에 맞춰 춤을 덩실덩실 추면서 걸어오는 장면이지요. 곡의 분위기와 내용의 전개에 있어서 작품이 갖는 서정성과 역동성을 함께 그린 장면으로, “진도아리랑”이 갖는 노래의 특성을 매우 회화적으로 표현한 명장면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서양의 “단조”의 예를 들어보면, “러브 스토리(Love Story:영화음악 주제가)”는 단조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이 곡을 어떻게 역동적으로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그냥 청자로 하여금 아름다운 사랑으로서 비극적 운명의 사랑에 대한 슬픔이 잔뜩 묻어나오는 곡으로서의 영역만을 감상하기에 충분한 곡입니다.
더 쉬운 예로 서양의 단조는 젓가락을 가지고 두들기면서 부를 수 있는 역동성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계면조는 젓가락을 가지고 두들기면서 모까지 흔들어가면서 부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노래를 부르며 내 속에 응어리진 것들을 다 토해낼 수 있습니다.
바로 히브리 민족들의 노래들이 그랬습니다. 그들의 민속찬양들을 보십시오. 소위 단조의 조성을 가진 민속 찬양들이 우리음악의 계면조와 같은 감성을 지녔다는 것입니다. 히브리인들의 음악의 양식인 단성적 양식, 헤테로포닉 양식, 단조의 특성 등 어떤 면에서는 우리의 것이 훨씬 성경적입니다.
“중보예배”의 훌륭한 재료 삼분박 찬송
하나님께서는 우리 민족에게 독특한 3분박의 리듬을 주셨습니다. 그러나 대한민국은 근대사 이후 일본 엔카 음악의 아류인 2분박의 리듬(일명 뽕작리듬)에 의해 굴복당하고, 현대에 이르러서는 각종 서양 리듬의 4분박 리듬이 마치 우리의 정서인양 탈바꿈해 버렸습니다. 불과 50여 년 동안 하나님께서 우리 민족에게 비전으로 주신 오천년의 숨결이 깃든 “3분박의 리듬”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 땅에 예배문화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던 70년대 후반에 보급된 “경배와 찬양”의 예배 문화는 주로 서양 음악의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4분박 리듬이 근간이 되어있습니다. 이러한 경배와 찬양의 예배문화는 80년대 후반에 절정에 이르렀고 예수전도단 화요찬양, 온누리 목요찬양을 비롯하여 전국의 교회들이 경배와 찬양의 물결에 휩싸였습니다.
그러나 경배와 찬양의 예배문화가 매너리즘에 빠지기 시작했던 90년대에 이르러, 정확히 말해서 90년대 중반에 이르러 이러한 열화와 같은 경배와 찬양의 열기가 식어가기 시작했고 교회, 지역마다 부흥했던 경배와 찬양의 모임에 참여자가 줄어들기 시작하고, 급기야는 그 연합찬양모임 자체가 사라지거나 힘을 잃기 시작했습니다.
전문가들이나 영적지도자들은 이러한 원인에 대한 분석을 여러 가지로 고심하고 연구하였으나 정확한 그 원인진단을 하지 못한 상태에서 그 영적 빈 공간을 현란한 사운드와 화려한 악기로 포장하기까지 이르렀습니다. 더군다나 경배와 찬양의 예배문화가 70년대 이전의 “죄고백”중심의 찬양을 탈피하여 하나님의 성품을 직접 경배하며 찬양하는 예배문화가 젊은이들에게 엄청난 도전을 주었으며, 한국교회의 경직된 예배문화에 새패러다임을 제시하는 놀라운 “순기능”의 역할을 하였지만 한 가지 “역기능”을 지적한다면 결정적으로 젊은이 예배문화와 어른 예배문화의 단절이 한층 더 심화되었다는 점입니다. 이점에 있어서 일선 목회자들은 이구동성으로 공감하고 있는 문제인 것입니다. 더군다나 현재의 경배와 찬양의 문화는 “호산나 인터그리티”가 주도했던 예배의 재료에서 “빈야드” 쪽이 가세하면서 예배곡들이 매우 어려워지고, 가사의 내용이 굉장히 시적이긴 하나 길어진 가사, 강화된 싱코페이션의 리듬, 코드화성도 매우 어려워지기 시작함으로써 장년들은 더더욱 적응하기 어려워지게 되었습니다.
계 7:9의지구상의 모든 민족(24,000여 족속)이 하나님 앞에 나와 찬양할 때, 우리는 어떤 찬양의 재료로 하나님께 드릴까 생각해봅시다. 모든 백성들, 심지어는 아프리카, 동남아의 백성들까지도 자신의 문화적 정서로 하나님께 예배드리는데 우리는 무엇으로 드릴까 생각해 보았습니다. 우리는 미국 사람들이 드리는 경배와 찬양처럼 어린아이들, 청년, 어른 심지어는 할아버지까지 전 세대(All Generation)가 함께 예배드릴 수 는 없을까? 해외의 많은 교포들이 제게 와서 호소하였습니다. 외국 사람들이 우리의 예배를 보고 싶어 요청할 때 너무 당혹스러웠다고 합니다. 오직 “예수님이 좋은 걸 어떡합니까”외에는 드릴 것이 없었다고 합니다. 이 땅에 많은 국악선교회가 태동하면서 새로운 국악 찬양곡들이 많이 생기고는 있습니다. 문제는 이러한 곡들이 대부분 애창(대중화)되지 못했다는 점입니다. 이 분야의 문화생산자들은 이 문제를 “정체성(Identity)”하나의 문제만 해결하면 될 줄 알았습니다. 엄격히 말해서 이미 매너리즘에 빠져버린 서구적인 경배와 찬양의 문화에 21세기에 이르러 또 하나의 새패러다임을 제시하기에는 역부족이었습니다.
다행히 저에게 보여주신 비전들은 우리 민족의 정서들을 “보편성(Familiarty:친밀감-대중성)”과 “현대화(Contemporary)‘의 옷을 입히도록 아이디어를 주셨습니다. 따라서 바른 문화구속(Redeeming Culture)이 없는 상태의 국악풍의 찬양과 국악기들의 사용은 젊은이들과 제도권 안의 성도들에게는 여전히 진부함과 비거룩한 음악(국악은 사단적인 것이라는 인식)으로서의 선입견을 불식시키기에는 역부족이라는 사실을 보게 하셨습니다. 이 문제에 있어서 개인적으로 80년대 후반에 이르러 21세기의 새로운 예배패러다임에 대비하라는 사명을 갖은 이후로 15년간 절치부심 연구해왔던 21세기 예배의 새로운 패러다임 제시를 위한 “3분박 예배곡”의 연구를 통하여 놀라운 열매들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지금 우리 동포들인 조선족들이 많이 거주하는 동북삼성 선교지에서 “연길”지역에 거주하면서 연구하며 보급하는 “3분박 찬송”들은 제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큰 반응과 더불어 빠르게 전파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더욱이 이 “3분박 찬송”은 “중보기도”와 연합하였을 때 놀라운 기름 부으심이 있음이 증명되었고, “중보찬양”으로서의 훌륭한 예배의 재료가 되고 있다는 점을 말씀드립니다.
그동안 이 3분박 찬송의 예배적용을 통하여 성령께서 역사하셨던 “회복(Restore)”, “치유(Healing)”, “하나됨(Unity)”의 열매들이 한국교회와 선교지 안에서 실증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놀라운 예배가 될 것을 확신합니다.
첫댓글 셈의 장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