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호화 청사처럼 시민생활의 질도 향상되나
삼거리 이후 한동안은 영남대로 대부분이 42번 국도로 변한다.
용인시 다운 타운에 들어서는데 한 건물군(建物群)이 늙은 이를
휘둥그레지게 했다.
<용인시문화복지행정타운>이라는 긴 이름의 대형 고층(16층?)
건물과 도열해 있는 위성건물들이다.
1천620억원(건축당시:부지매입비제외)을 퍼부어 7만9천여평의
부지에 세운 2만4천여평(연면적)에는 시청을 비롯해 여러 유관
기관이 들어있단다.
기초자치단체 청사로는 전국 최대 규모란다.
그뿐 아니라 서울 세종로의 정부종합청사 본관(연면적 2만3천
6백여평) 보다도 크다.
그래서, 70만 인구의 청사로는 초호화판이라는 비판이 있단다.
그래도, 국내외 지자체들의 견학 코스로 부상하고 있으며 청사
신축을 계획중인 단체들의 벤치 마킹(bench-marking) 대상이
되고 있다고 자부심을 갖는가?
생거진천 사거용인(生居鎭川死居龍仁)은 옛말이 됐고 이지음엔
생거도 용인이라는데 그토록 살만한 곳인가?
용인이 부시(富市)임은 곳곳에서 감지된다.
부티를 내느라 안간힘을 쓰는 것 같다.
그러니까, 자기 돈 가지고 그러는데 흥청망청 하건말건 보태주는
것 없으면서 무슨 댓소리냐 하면 할 말 없다.
다만, 문화인 행세하려고 돈을 마구 써가며 온갖 폼을 잡아보나
왠지 어설프고 엉성한 졸부가 연상되게 하는 느낌인 걸 어쩌랴.
언밸런스(unbalance)!
초화화 청사만 가지면<세계최고의선진용인>이 되고 시민생활의
질도 그만큼 향상되는가.
그렇다면 맨하탄(Manhathan)인들 못옮겨 오겠는가.
가는 날이 장날?
마침, 5, 10일장이 서는 김량장(金良場) 장날이었다.
비가 내리는데도 오랜 역사를 가진 장답게 북적거렸다.
정확한 위치는 확인되지 않으나 옛 김령장(金嶺驛)이 있었다.
경안천을 끼고 있는 김량장은 김령장의 변음이라는 설과 이곳에
처음 장을 세운 '김량'의 이름을 땄다는 구전이 맞서는데 전자가
맞을 듯 싶다.
용인시 당국자에 의하면 이조 영조때의 <읍지>에 김량장이라는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니까.
그런데, 6. 25동란때 용인지역의 피해가 막심했단다.
특히 중공군의 참전으로 야기된 1.4후퇴때, 여기 김량장 전투는
터키군을 세계에 알리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
UN군에 편성된 5천여 터키군이 용인초교 뒤 151고지에 집결해
있던 중공-북한공산군과 싸운 처절한 백병전이 UPI통신기자에
의해 전 세계에 타전됨으로서.(용인시민신문)
온 국민이 초토에 재기의 꽃을 피웠지만 천혜의 자연을 잘 활용
하여 부자가 된 용인시민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떠나야겠다.
자룡이 헌 창 쓰듯 마구 써대는 사람들은 빼놓고.
양푼비빔밥 먹는 날
<술먹는 날> <양푼냉면 비빔밥 먹는 날>
김량장, 경안천에서 얼마 가지 않아 이 간판에 끌려 들어갔다.
초췌한 몰골로 인해 문전박대 당하기 한 두번 아닌 탓도 있지만
나그네에게 안성맞춤인 집이니까.
우유는 두어번 마셨으나 점심때가 지났으니 아무리 불식(不食)
체질이라 해도 시장할 때가 되었으니까.
양푼비빔밥집
드럼통 식탁 위에 찌그러진 양푼 비빔밥이 나왔다.
맥주 1병을 곁들여 걸신들린 듯 먹고 있는데 젊은 주인여(女)의
지인인 듯한 한쌍이 커다란 쇼핑백을 들고 들어왔다.
꺼내 놓은 것은 비오는 날에 제격인 파전과 서울막걸리 몇병.
서울이 지근인 수도권이라 하나 타관이다.
집 떠난지 겨우 이틀 지났지만 나그네다.
고향 막걸리를 보고 어찌 반갑지 않겠는가.
그 새에 말문이 트여 스스럼이 없어진 주인이 내게도 배분했다.
(실은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가을비 내리는 객지에서 객수(客愁)를 달래주는 고향 막걸리!
이 막걸리가 길손임을 까마득히 잊고 그들과 노닥거리게 했다.
급기야, 자기네 호화판 시청 건물도 조상육(俎上肉)이 됐다.
자부심은 커녕 비판이 자자하단다.
가렴주구(苛斂誅求)해서 고작 그딴 짓이나 하고 지들끼리 흥청
거리는 지자체 폐기론(무용론)까지 들고 나왔다.
그러면 그렇지!
비단이 한 끼인 서민들의 생각이야 당연히 그럴 수 밖에.
부산까지 먼 길 갈 나그네가 본분을 망각하고 이 무슨 짓?
그들의 축수를 뒤로 하고 양지(陽智)를 향해 걸음을 돋우었다.
비가 그쳐준데다 양지 10리길이니까 초조할 건 없지만.
양지면 가기 전에 있다는 동부동의 새술막은 어디에 숨었나.
새로이 생긴 주막이라 새술막이고, 신점(新店)은 그 한자 이름
이라는데 물어도 아는 이가 없다.
해결사는 항상 노인정(경로당)에 모여 있는데 그 노인정마저
모른다니 여기는 모르쇠 공동체?
세 박씨가 살았다는 삼박곡과 신평을 지나 양지면에 들어섰다.
송문리 이후로는 변화 없는 넓은 길이 한가로웠다.
버스정류장에서 다음 정류장 이름을 확인하는 것 외에는 아무
생각도 하고싶지 않았다.
피로(권태?)를 느껴 양지 찜질방으로 빨리 가고 싶었을 뿐.
이 때, 퍼뜩 정신이 들게 하는 건(件)이 나타났다.
연륜의 차를 금방 확인하게 하는, 양지천에 놓인 세개의 다리다.
신기했다기 보다 방만한 토목공사의 실증에 화가 치민 것이다.
혈세를 이렇게 낭비해도 되는가.
42번국도에서 양지 옛길로 옮겼다.
예전에, 서울을 버리고 진천으로 간 K집에 다니던 길이다.
뻔한 길을 걷고 있다
그런데, 양지의 사정이 달라졌다.
용인에서 몇번이나 확인했건만 찜질방이 문을 닫았단다.
허가 없이 영업하다가 들켜서 그리 됐다니 기가 찰 일이다.
비할 상대가 없는 초호화 건물에 자부심을 가지는 <세계최고의
선진용인>의 행정력이 이 정도라니 더욱 어이가 없었다.
결국, 용인시내로 돌아가야 했다.
이같은 경우는 정맥들에서 이미 다반사로 겪어서 익숙해졌다.
대중교통망이 열악한 곳에서는 편승(便乘:hitch-hike)을 해야
했는데 여기는 버스가 연락부절이라 걱정될 일이 아니었다.
<술먹는 날>집의 도움을 청하려 했으나 전화를 받지 않았다.
낮부터 술독에 빠지더니 곯아 떨어졌나.
묻고 물어 낮에 북적거리던 김량장동으로 갔다.
파장 흔적만 남았을 뿐 고요했다.
<골드벌24시>는 이름과 달리 브론즈(bronze)도 못되는 집.
그 집에 그 손님, 그 식당.
낮에도 말했지만 언밸런스(unbalance)의 단면이다.
하룻밤 보낼 뿐인 그 한 밤이 빨리 가기만 바랐다.
새벽 첫 버스편으로 양지에 도착했다.
양지는 현(縣)이었으며 한 때는 군(郡)의 위상을 가졌던 곳이다.
어둑해질 무렵과 이른 아침에 당도했기 때문에 잠시나마 제대로
살피지 못하고 지나치게 되어 유감이었다.
당연히 있었던 관아 등은 멸실됐고 향교(경기문화재자료 23)는
남아 있다는데.
영남대로 양지에서 원삼~백암~죽산까지는 극히 일부분을 제외
하고 17번국도가 흡수해 버렸다.
국도 대부분은 다시 자동차전용도로가 되었다.
전용도로 이전에는 친숙한 길이었는데.
붙박이 낯익은 간판, 이정표들이 더욱 그랬다.
백두대간과 9정맥은 물론, 8도 산들의 들머리까지와 귀로 등의
왕복 여로에는 각종 도로를 이용해야 한다.
그러다 보니 절로 길도사(道道士)가 되었다.
그러니까 뻔한 길을 지금 걷고 있는 것이다.
단지 "영남대로 옛길 걷기"라는 이유로.
왜 좌찬고개인가
간밤에 쉴 곳으로 믿었다가 낭패당한 그 무허가 찜질방을 지난
후 자동차전용구간이 된 국도를 버리고 구 도로를 택했다.
가끔 지나가는 자가용과 정기 버스, 마을 경운기 외에는 차량도
없는 한가한 아스팔트 길이다.
흙길이면 더 좋았을 텐데.(말타니까 경마까지 잡히고 싶은가)
격세지감(隔世之感)은 꽤 긴 세월의 간극을 느끼게 하는 단어다.
그러나 이즈음엔 한 해만 지나도 그런 느낌일 경우가 흔하다.
양지, 원삼 일대도 그렇다.
정맥 종주때만 해도 곳곳에서 골프장 만드느라 산을 망가뜨리는
일에만 열중하였을 뿐 별무 관심의 농촌이었다.
이제는 이 무관심의 땅에 소위 전원주택들이 우후죽순처럼 들어
서고 편리해진 교통망은 대형 물류창고들을 유인하고 있다.
양지면과 원삼면의 경계인 좌찬고개(佐贊峙)에 올라서 청소하는
영감에게 지역 사정을 물었다.
공교롭게도 그는 월남출신으로 이 길손보다 더 백판(白板)이다.
좌찬고개 이름에는 특별한 실명(實名)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이조 개국초기의 무신(武臣) 박포(朴苞)가 1차 왕자의 난 평정에
공을 세웠으나 논공 행상(論功行賞)에 불만을 품고 비방한 죄로
죽주(竹州:당시에는遠三面佐恒里가竹州땅.)에 정배되었다.
박포에게 제수된 벼슬은 좌찬성(左贊成)이었는데 좌찬성이 넘은
고개라 해서 좌찬고개가 되었다고.
아랫마을 좌항리(좌전마을)는 좌찬역(佐贊驛)이 있던 지역이다.
그런데 간과할 수 없는 점은 좌찬의 한자가 다른 점도 있지만 그
보다도 좌찬성은 종1품으로 서열 2번의 높은 품계다.
이조(吏曹)와 병조(兵曹)를 지휘하는 요직인데 불만이라니?
무신이 정승이라도 기대했던가?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실은, 그에게 내린 상(賞)은 품계(品階)가 종2품일뿐 유명무실한
한직인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였다.
그러니까, 좌찬고개와 그의 정배(定配)와는 전혀 무관함이 확연
한데 품계를 높이면서까지 그리 한 까닭이 무엇일까.
그는 결국 이른 바, 개자추(介子推) 콤플렉스(complex)에 걸려
2차 왕자의 난에 가담했다가 실패후 참형을 당했다.
좌찬고개에는 이곳, 양지면 평창리(坪倉) 출신으로 일제의 강제
병합에 항거한 의병장 옥여 임경재상(玉汝任景宰償)이 있다.
3.1독립만세운동이 원삼면 지역에서는 "좌전고개의 3.21만세"로
이어졌고 이후 용인 전역으로 확산되었단다.
창작극 <좌전고개3.21>로 재현될 만큼 좌전고개는 알려진 고개
인데 마치 상거가 먼 두 고개처럼 인식돼 정리를 해야겠다.
의병장 玉汝 任景宰 像
양지면 평창리와 원삼면 좌항리, 맹리(孟里) 사이의 309m태봉산
(台峰)동남쪽은 원삼벌이고 서쪽 자락은 고개(峙)다.
신작로(17번국도)가 나기전 영남대로는 양지에서 평창리 용구리
고개(길가 도랑이 용굴이라 용굴고개 - 용구리고개)로 해서 좌찬
고개에 오르게 된다.
고개에서 서전농원(現在)입구를 지나는 내리막을 타면 좌전마을
(좌항리)에 도착한다.
신작로를 낼 때 지형적 여건 때문에 옛길을 둔 채 좌찬고개에서
태봉산쪽으로 약간 치우쳐 좌전리-가재울-백암으로 간 듯 하다.
좌전리에서는 신작로를 따라 고개 마루에 오르니까 자연스럽게
좌전고개라 부르게 된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17번 국도상의 고개는 좌전고개가 되고 영남대로 옛길의
분기점은 좌찬고개로 남아 있는 것이 아닐까. <계속>
* 용인까지 오는 동안 꽤 폼 잡았는데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여전히 디카 조작 미숙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