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의 미륵 신앙과 민속 신앙의 습합
1. 후백제
견훤에 의해 892년에 건국된 후백제는 신라 하대 혼란을 틈타 옛 백제의 부흥을 꾀하며 생기게 된다. 통일신라 하대는 귀족 연립적인 방향을 걸으면서도 귀족들의 끊임없는 대립과 항쟁은 계속되었다. 귀족들은 정권 탈취를 위하여 개인적 재산을 이용하여서 사병을 양성하였다. 사병은 자기들이 소유하던 노예나 유랑민을 모집하여 무장시킨 것이다. 이리하여 왕위 계승은 혈통에 의한 것이 아니라 정치적 실력과 무력의 우위로 결정되었다. 그러므로 흥덕왕, 희강왕, 민애왕, 신무왕으로 이어지는 왕위에의 즉위와 희생의 쟁탈전은 하대의 신라가 얼마나 혼란한 사회였는가를 입증해주는 사실들이다.
신라 하대의 혼란한 틈을 이용하여 등장한 후백제는 892년에 견훤에 의해 건국 되었다. 견훤은 서남해 쪽을 방수하는 데 공을 세워 비장이 되었다. 여러 곳에서 일어난 반란을 타고 그도 군사를 일으켜 인솔하고, 지금의 광주 지방을 점령하고 다시 전주지방으로 진군하여 그 활동무대를 삼았다. 전라도 지방에서 그의 군사 활동에 대항할 수 있는 강적은 거의 없었다. 전라남북도 전체와 금강유역까지 장악하게 됨으로써 자칭 신라 서면 도통 지휘병장 운운하더니 나중에는 효공왕 4(900)년에 이르러 후백제 국왕이라 일컫게 된다.
견훤에게는 10여 명의 자식이 있는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이들 가운데 특히 4번째 아들인 금강에 대한 편애로 이찬 능환이 사람을 강주와 무주에 보내 양검 등과 모의했다. 청태 2(935)년 이른 봄 3월 영순과 함께 신검에게 권유하여 견훤을 금산사(전라북도 김제군 수류면 무악산에 있는 절)의 절에 가두었다. 견훤의 재위 기간은 43년에 이른다. 이 기간 특별한 신앙 체제는 발견할 수 없다. 다만 금산사에서 유배 되었다는 사실로 상층부의 신앙 형태를 추정할 수 있다.
2. 후고구려(태봉국)
고구려의 부흥을 기치를 내걸고 나타난 것이 궁예이다. 삼국사기의 기록에 따르면 신라의 왕자이다. 왕자(王子)의 지위에서 물러난 궁예는 신라에 대한 적개심이 강하였다. 철원에 도읍을 정한 다음 태봉이라 국호까지 만들고는 자신을 미륵불이라 불렀다. 패왕(覇王)의 권위를 상징하기 위하여는 어느 칭호보다도 미륵불이 민심을 끌 수 있다는 생각이 작용했을 것이다.
이를 적극적으로 나타낸 것이 머리에 금책을 쓰고 몸에 방포를 감고, 그 아들은 청광보살, 작은 아들은 신광보살이라 부르며, 외출할 때에는 백마를 타고 비단으로 말의 머리와 꼬리를 장식한 다음, 동남과 동녀에게 번개와 향화를 들고 앞세운 궁예적 미륵불의 권위가 일부에는 긍정적인 반응을 일으켰을런지 모른다. 더구나 그 행렬 뒤에는 2백명의 승려가 범패를 부르며 따르게 하였다니 더욱 가관이었을 줄 안다. 그는 또 자신이 미륵불임을 증거하기 위하여 불경 20여 권을 저술했다. 불교 특히 미륵신앙을 통해 전륜성왕과 같은 이상적인 불국토 건설을 염원한 일면도 보인다. 궁예는 정치적인 오욕을 안고 역사의 뒤안길에 사라져간 불행한 군왕인지도 모른다.
3. 고려와 조선시대의 미륵 신앙
삼국을 통일한 신라는 번영을 누리면서 이 땅에 이상적인 불국토 건설을 염원하였다. 전 시대를 통해 가장 아름다운 불교문화의 꽃을 피운 신라는 하대 골품제의 모순으로 빚어진 각종 병폐들이 사회를 병들게 하였다. 이와 함께 전개되는 하대의 왕위 쟁탈전은 결국 내부적인 결속을 와해(瓦害)시키며 이와 같은 사회적인 불안요인에 편승한 지방 호족들이 서서히 등장하기 시작했다.
후백제, 후고구려와 함께 신 삼국시대는 이후 고구려를 계승했다는 고려에 의해 제2차 삼국 통일을 이루었다. 고려를 개국한 왕건은 전 시대에 걸쳐 이 땅 민중들에게 뿌리깊게 남아있던 불교 신앙을 왕권의 강화를 이루기 위한 방편으로 호국 불교를 표방하고 그의 통치이념으로 삼았다.
왕건 이후에 미륵신앙을 알게 하는 기록을 찾아보기 쉽지 않다. 다만 고려사의 기록에 따르면 개태사 창건 당시 조성된 미륵삼존석불에 대한 미륵 신앙적 요소도 오랜 전통을 가지고 있어 개태사는 화엄도장인 동시에 미륵 도장의 구실을 함께 하였음을 살필 수 있게 된다.
광종대에는 논산에 관촉사를 창건하는 바 반야산 기슭에서 대석이 용출하자 국자에서 백관회의를 열고 승 혜명으로 하여금 대석에 미륵불을 조성하였다는 기록을 통해 백제와 신라의 옛 땅에 미륵신앙을 통해 통일을 염원했던 지역적 정서를 끌어안는 왕권 강화와 국민의 대통합을 염원했음을 알 수 있다.
조선사회에 있어 미륵신앙은 일찍이 고려시대부터 민중신앙화하기 시작했으나 조선조에 이르면 더욱 민중적 속성을 지니게 되어 억압받고 고통받는 민중의 입장에 서서 이상세계의 도래를 기원하면서 당래불(當來佛, 마땅히 미래 세계에 출현하여 이 세상의 모든 중생을 제도할 부처, 미래불)로서의 미륵신앙이 민중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조선조의 개창은 여말 권신과 사원 세력의 기반을 박탈하면서 가능했다고 볼 수 있다. 이들 권신과 사원 세력은 국가 정치와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발전되었다.
이와 같은 사원 세력의 외적 팽창과 권문들의 정치적, 경제적 세력의 확충으로 고려 사회가 혼란에 빠졌다고 생각한 조선의 개국 주체 세력들은 개국 직후부터 숭유억불 정책을 실시한다. 조선 초기의 불교 정책은 불교의 사상적 배척이기보다 중앙집권적 국가체제를 확립하는 과정에서 많은 사전과 인정을 확보하고 측면에서 제재조치로 볼 수 있다.
억불 정책하의 불교 대중화 시책이 불교를 민중으로 연결시키게 됨에 따라 국민 심층에 깊이 뿌리 내린 미륵 신앙의 맥락은 강하게 흐르게 되었고, 임진왜란, 병자호란 등의 병화와 제도적 모순 등에 대한 정치적 사회적 혼란의 과정에서 이러한 말법을 구제할 당래불로서의 미륵 하생 출현을 고대하는 미륵 신앙이 민중을 중심으로 전개되었다.
영조나 정조가 탕평책을 쓰고 있는 동안 정계는 대체로 안정되어갔다. 그후 숙종이 갑자기 죽고 순조가 겨우 11세의 어린 나이로 즉위하면서 외척 세력에 의한 세도정치가 시작되었다. 세도 정치에 의한 권력의 집중은 정치의 문란을 가져왔다. 이로 인한 피해는 재정수입원인 전정(田政)·군정(軍丁)·환곡(還穀) 등 소위 삼정의 문란을 야기했다.
조선 후기에 민중들의 경제력 향상과 신분 해방에 따른 정치적, 사회적 신분 상승은 억눌림과 수탈의 질곡에서 살아온 고난의 역사에서 탈피하여 민중 중심의 새로운 세상 건설에 대한 강렬한 욕구가 다방면으로 분출되어 갔던 것이다. 대체로 17세기 이후 사회 변동 과정에서 사회 변혁을 희구하던 민중 계층에 새로운 민간신앙의 중심으로 등장하는 신앙이 미륵 신앙이었다. 이러한 민중적 미륵 신앙의 성행은 민중의 주체적 평등 의지를 향상시켰을 뿐만 아니라 미륵신앙이 지닌 평등적, 민중적, 집단적 성향 때문에 민중들이 적극 수용하였으며 민중들을 혁신세력으로 성장시키는 정신적 원동력이었다고 할 수 있다.
지배 계층의 분열은 상대적으로 민중의식을 성장시키는 기회였으며, 민중 주체의 이상적인 평등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자구적 수단으로서 혁신적인 미륵신앙은 민중들에게 가장 호응을 받았던 신앙 형태였던 것이다. 미륵신앙뿐만 아니라 이 시기에는 혹세무민하는 민간 신앙류인 풍수지리, 도참, 비기, 무속 등 다양한 주술적 민간 신앙들이 부상하게 된다. 그래서 참담한 현실에서 절망과 실의에 빠지지 않고 살아가려는 농민들은 미륵 신앙을 유일한 민중 구원 신앙으로 삼고 주술적 민간신앙 의례의 대상으로 미륵불을 섬겼던 것이다.
미륵불이라는 것은 불교의 별종이다. 옛말에 소진이 수 놓은 부처 앞에 오래도록 재를 올렸다고 한 것이 곧 이것이며, 우리나라의 곳곳에 돌을 깎아 놓은 것이 모두 이것이다. 수나라의 송자현은 스스로 미륵이라 칭했다. 송나라의 왕칙은 『오룡적누경』을 익히고는 석가가 쇠하여 물러나면 미륵불이 세상에 나올 것이라고 했다. 스스로 동평군왕이라 하며 패주성을 근거로 반란을 일으켰는데, 문언박이 하북선위를 시켜 평정하였다.
해서의 요녀들이 스스로 미륵이라고 칭하면서 석가와 원수가 되었다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며, 미륵신앙을 엄격하게 처벌할 것을 주장했다. 뒤에 이런 일을 이어서 일으키는 자들이 분명히 있을 것이니 마땅히 이처럼 처단해야 할 것이다. 곳곳에 있는 석상 또한 부수어 백성들에게 보여서 미혹되는 일이 없도록 하는 것이 좋다. 성호 이익의 미륵관은 중국에서 혁명의 도화선이 된 것으로 인식하고 파괴를 제안하고 있다. 집권 세력에게 미륵은 잠재적 반 혁명 의식이 남아있다. <정경태 박사>
출처 : 통불교신문(http://www.tongbulgyo.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