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돈의 세계/우은문
벌써 열달 넘게 장편소설 하나에 메달렸다.
오후 2시 15분 도어가 띠릭 소리를 내며 열리고 아내가 모자를 쓰고 들어왔다. 아내가 다니는 유치원에서 일을 끝내고 돌아온
것이다. 아내가 들어 온 것을 확인 했으니 된 것이다. 나는 다시 소설 속으로 빠져들었다.
"저, 나 좀 봐요."
아내가 보라니 쳐다 본 것 뿐인데 진행되고 있는 내 소설 속 여자 주인공과 닮아도 너무 닮아 있어서 깜짝 놀랐다.
"지금 내가 누군 줄 아세요?"
나는 깜짝 놀라 아내를 찬찬히 살피려는 듯 고개를 흔들어 정신을 차렸다.
"나, 이 길로 나가면 당신과는 영원히 빠이빠이예요."
어쩜 저렇게 닮았을까? 말투까지 다르지 않으니, 소설 속 여자는 '경숙'이인데 지금 내게 말을 걸고 있는 아내는'영미'가
아닌가? 그런데 어째서 두 여자가 동일 인물로 보일까?
"아셨지요? 나 지금 나가요. 우린 이제 아무 관계 없는 남남이란 말에요."
분명히 이 말은 내 소설 속에서 경숙이가 작가인 남편 정욱이를 떠나며 하는 마지막 말이다. 그런데 현실 속의 내 여자가
내게 말하고 있지 않은가?
"그 무슨 말을 그렇게 하오?"
드디어 내가 소설 밖의 아내인 영미한테 말했다. 소설과는 다른 현실을 말 한 것이다.
"당신이 지난 겨울에 신춘문예에서 받은 상금 오늘 다 찾았어요. 이백 만원이 남았더라고요. 그래서 그것 내가 갖고 나간다고요."
그렇게 되면 나는 어쩌란 말인가? 아내가 집을 영원히 나간다면 내게 밥은 누가 해 주고 빨래는 어떻게 하라고 저렇게 들어왔던
문을 그냥 돌아서 나가겠다는 것인지.
"안 돼! 여보, 나는 당신 없이 살 수가 없는 걸."
"그 소설 속의 여자 있잖아요? 그 여자가 장편소설 끝날 때쯤이면 한 천 만원 만들어 준다면서요."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나는 신춘문예에 당선 된 적도 없고 이 소설을 다 쓴다고 해서 누가 내게 천만 원을 준단 말인가?
"여보, 날 버리면 안 돼! 난 당신 없인 아무 일도 할 수가 없는 사람이란 것 잘 알면서 왜 그래?"
번쩍 정신을 차리고 아내를 쳐다보며 애원을 했다. 그렇지만 아내는 문을 쾅 닫고 나가 버렸다. 평소에는 내가 집중하고 쓰는
소설이 흩어질까봐 소리 없이 나다니는 아내였다. 그러고 보니 아내한테 '밥은 먹었소?'라고 묻지도 않았다. 아니다. 아내는
유치원에서 어린이들한테 점심을 차려준 뒤 잠깐 동안 자기도 함께 먹는다고 했다. 그렇다면 내가 밥을 먹지 않은 거다. 화장실로
가서 부시시한 머릴 물을 발라 다듬었다. 벽에 걸린 수건을 두르고 의자 뒤에 걸린 빨간 점퍼를 입었다. 등산화를 신고 아내가
나간 문을 열고 나간다.
밖으로 나오니 눈이 부셨다. 쫓기다시피 퇴직을 한 게 언제쯤이더라. 아내가 나간 게 몇 시쯤이더라? 휴대전화를 꺼내들고
시간을 보려는데 아들이 텔레그렘으로 보낸 메시지가 떴다.
'아버지, 엄마 붙잡으세요. 지금 놓치면 다신 엄마 못 보세요.'
뒷산 체육공원에 있을 거다. 걱정 마라 아들아. 내 소설속에 내가 그렇게 설정해 뒀단다. 나는 경숙인지 영미인지 확실하지
않은 여잘 찾아 뒷산 기슭을 뛰었다. 눈에 별이 몇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