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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하나이다
황 금 찬
네가 오늘
찾는 것이 무엇이냐고
바다라고
했다.
그 바다가
어디에 있느냐고
내 발이 멎은 곳에
있을 거라고
네가 찾는 바다는
바로 네 가슴 속에 있는 거라고
그대의 바다도
그대의 가슴 안에
있는 거라고
바다는 둘이 아니고
절대 하나인데
두 마음 안에 있을 뿐이라고
다시 바다에
황 금 찬
찾아갔었지
잊어버린 대화의 꽃바구니를
찾아서
동해 강릉 정동진
기차는 떠나고
싸늘한 모래밭
파도가 울고
몇 사람의
가을 나그네가
구름과 낙엽의 이야기를
허공에 뿌리고 있었다.
모든 물새들은 현악기를 연주하고
나는 바다를 거닐며
추억의 꽃바구니를 찾고 있다.
무얼 일러주랴
최 은 하
무엇을 일러줄거나.
그 무엇을 일러줄거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나며 즈려 밟던 발길소리
주인 잃은 성(城) 밖의 아우성이고
긴긴 그림자는 내개
떨구어 덮고 가는 너에게
내 어떻다 일러주랴.
무슨 말을 일러주랴.
가다가 제대로 맺힘이거나
다시금 훨훨 풀리거들랑
그 땐, 주저 말고 돌아오려므나.
그 자리 내 얼핏 보이지 않더라도
깊디 깊은 사슬로 얼싸안으리라
얼싸안아 싸안고 있느니라.
속으로 다지고 다져
그 말 밖에
내 무얼 일러주랴.
네게 무얼 일러주랴.
홀로 남아 비좁기만 한
이 메마른 허공 한가운데서
이제 와서
최 은 하
꽃이 지는데
잎이 지는데
무얼 달래주란 말이냐.
어찌 달래주란 말이냐.
저렇듯 꽃과 잎이 지는 건
잠깐 자췰 감출 뿐
다시 불어올 바람 속이면
시방처럼 제 모습 환히
가득 뵈이는 그대로다.
정녕 그대로다.
돌아 서서 가는 사람
굽은 등허리는 보지 말 일이다.
숙여뜨린 머리
사라질 때까지 보진 말일이다.
이제 와서
무얼 탓하느니 보다는
그냥 잠잠하여라
눈 감아 볼 참이다.
바람이 소리 내어 불어제치는데
며칠 째고 봄비가 그치질 않는데
그래, 무얼 어쩌란 말이냐.
이제, 이제 와서
무제(無題)
황 송 문
신동춘 시인은 서정주 시인의 시를 은혜하고
서정주 시인은 신동춘 시인의 맥주거품을 즐겼다.
서정주 시인의 시는 상상의 감주지만
신동춘 시인의 맥주거품은 현실의 부활이었다.
맥주의 거품은 혀로 핥지만
그 이후의 이야기는 아는 이가 없다.
본인들도 잘 모를 뿐만 아니라
천지신명께서도 잘 모른다.
아득한 옛날 옛적 호랑이 담배 피우던 시절
아스라한 지평선상에 피어 흐르는
실연기같이 아슴푸레한 이야기이므로.
앙 금
황 송 문
떠날 때는 말이 없어도
가슴엔 물굽이 굽이굽이
싸아하니 빠져 달아나는
울둘목의 썰물 소리……
그렇게
보내고 나면
마음 깊은 곳에서는 앙금이 쌓여
비단 같은 무늬를 이루다가……
노을이 환장하게 타오를 때면
그 앙금이 그리움이 되어
밀물로 밀물로 밀려와서는
뚫린 상처를 재우다가……
숙 명
김 년 균
속세의 길목에 반질거리던 얼음판 깨어지고
잠겨진 문틈으로 따스한 바람 솔솔 스며들 무렵,
몸 가릴 잎새 하나 없이 울퉁불퉁 몸뚱이에 돋은
가지마다 소름이 끼치도록 주먹을 불끈 쥐고,
남의 귀에 안 들리게 큰소리치며
목련꽃, 한 그루 활짝 피었다.
남보다 일찍 일어나 새벽부터 몸 씻고 화장하고
그렁그렁 눈물 같은 이슬 머금은 꽃잎들,
마주친 사람마다 감격하여 가슴이 휑하게 뚫린다.
그러나 쏜살같이 날으는 세월의 잣대로 보면
한 치도 안 되는 몹쓸 자투리, 그 한 자락 붙잡고
무엇을 얻으려고, 하늘땅 무너지고 재앙이 들끓는
이곳에서 무엇을 꿈꾸려고, 서둘러 나섰다가,
오가는 세월의 틈새, 혹은 그늘진 뜨락에 가엾이
떨어져 누워, 눈감고 가슴속에 꿈을 묻는다.
가는 이여 짓밟아라, 오는 이여 팽개쳐버려라,
내일엔 흔적도 없이 사라지리니.
나는 죽었다.
너는 죽었다.
한라산 안개
김 년 균
한라산 자락에 안개가 떴다.
이웃사촌 정든 얼굴도 몰라보게,
옆집 미운 아가씨 코빼기도 안 보이게
안개가 겹겹이 떴다.
세상은 원래 이런 것일까.
저 건너 육지에서 일어난 거친 바람,
칼바람이나 돌개바람이 몰려온 것일까.
중상모략 시기 질투 모두 다 거느리고
여기까지 쳐들어 온 것일까.
이제 더는 갈 곳이 없어,
마지막 한라산 산자락 붙들고
질펀히 주저앉아 행패라도 부리는 것일까.
하늘도 지친 듯이 흐느적거린다.
아무리 불을 켜고 소리 질러도
아무리 손뼉 치며 깨우쳐 봐도
물러서지 않고, 돌아서지 않는
안개, 한라산 안개.
바람 부는 날ㆍ3
- 가로수에 기대어
이 동 백
오늘도 눅눅해진 일상을
표지판 위에 부려놓고
다시금 내일을 기다린다.
가로수 너머로 노을이 타는지
잎새 검붉게 흔들리다 흔들리다 지면
하늘은 온통 아늑한 어둠에 잠기고
끝내 사위지 않는 꿈은
한 무더기 별로 떠오른다.
헐벗은 가로수의 생채기는 따스하다.
휘어진 등어리에 몸을 기대면
별빛 두엇 내려와 어깨를 감싸고
어느덧 발굽 가득 차오르며
내 어둠의 강물도 눈을 뜬다.
어느샌가 지내온 하루는
한 줌 바람에 실려
유성으로 사라져 가고
이 밤의 계단에서
나도 따라 흐르며
한줄기 바람으로 남아
차마 잠들지 못한다.
바람 부는 날ㆍ4
-겨울 강가에서
이 동 백
자, 그대도 한 잔 하지.
강가에 나앉아
바람과 함께 잔을 기울이면
강물은 노을빛으로 피어오르고
내 여윈 가슴에도
꿈결인 양 강물 흐르네.
어찌 흘러가는 강물만이 아름다우랴.
강둑에서 하염없이 흔들리며
흐르던 그녀의 여린 손사래
그 갈꽃 너머 흩뿌려지던
그리움 한 다발
지금도 내 가슴 속에 흐르는 것을
바람과 마주 앉아 잔을 기울이면
강둑 위엔 어둠이
어느새 시린 달빛 밝히고
목이 야윈 나무들도
발목 적시며 강을 건너네.
하염없이 흔들리는 바람과 함께
어느덧 어둠도
강을 따라 먼 길을 나서고
밤 하늘엔 설핏
별빛 몇이 떠오르네.
붉은 비감(悲感)
최 창 일
차라리
세상이 얼어붙어
시간의 빈터에 고요히 잠들어라
차라리
무엇에라도 눈빛을 주면
활활 타올라 맨발의 모세 시내산이라도 되어라
차라리
일어서서 지구의 장심을 향하여
던질 돌멩이가 내 손에 쥐어져라.
저 새가
날아가는 이유가 있다면
누군가의 가슴에 머리 박고,
태양의 심지에 차게 부딪히고 싶어라
햇살이 그늘을 깔고 앉듯
가슴에 짓누른 오욕과 펄럭이는
분노의 핏자국이
산산이 조각되어
저 하늘에 뿌리고 싶어라.
차라리
지금 비어져 가는 포도주 병에
사랑 앞에 다가오는
들끓는 비감을 담아서
더 멀리 푸른 바다
윤심덕과 팔짱끼고 뛰어 내려라.
그냥 이대로
최 창 일
나를 나대로 그냥 버려두오
그 여름 숨겨 놓았던
마음의 불씨가 타오른다면
내가 나를 잡아당길 수가 없오
내 하얀 얼굴이 꼬챙이 되어
말라 가드라도
그냥 이대로 버려두오.
당신속의 당신을 피하지 못하는 가슴
당신은 당신속의 당신을
돌려보내도
난 당신의 팽팽한 눈빛이
내 연약한 가슴에 부딪히면
난 불꽃 되어
피하지 못할 거요.
깊이 껴안는 믿음이
훈련되지 못한 나에겐
사랑하는 당신을 바라보는 순간
불꽃이 되고 말 것이오.
꽃의 단상(斷想)ㆍ21
-망초꽃
이 오 장
우리는 이방인
아무도 반겨주지 않는 떠돌이
달리고 달려라
텅 빈 들판이다.
산등성이 바위 틈
논밭을 가르는 두렁이나
발 디딜 곳 없는 묵정밭
잡초 무성한 언덕에도
너와 내가 차지하면 우리 땅
바다 건너오며 멈춘 숨결
몰아 쉬어 바람 일으키자.
뿌리째 뽑혀 나뒹글고
모가지 꺾여 시든다 해도
넓혀진 자리 좁아지지 않으리.
남의 땅 차지하고
이름 바뀐 날부터
커지고 커진 꿈이다.
달려라 달려
하나하나는 잊어버리자.
어디에 뿌리 내린다 하여도
우리는 이방인
돌담에 갇힌 싯귀
-영랑생가에서
이 오 장
모란은 떨어져 자유롭고
이름 남긴 시인은
돌담에 갇혔는가.
솟을대문 드나든 발길에
닳고 닳은 문턱 번질거려도
헛기침 소리 울린다.
뚜껑 덮인 새암 위에
풋살구 하나
두레박질 기다리며 말라가고
장독대 빈 항아리
누이의 부끄러움 남아
햇살이 눈부시게 장막 둘렀다.
대숲에 일어난 실바람
마루를 쓸어내며 방문 두드려도
녹슨 문고리 벗겨질 줄 모르고
지저귀는 텃새 따라
돌판에 씌인 싯귀 읊어보다가
비단 하늘에 모란꽃 한 송이 피워 올린다.
넝쿨장미
유 회 숙
10분째, 우두커니
빨간 신호등 파란 신호등이 켜지고
우체통이 보인다.
넝쿨장미 꽃잎 떨어지는 소리에
뺨 붉게 물든 여자 아이 몇몇
하얗게 웃는다.
초여름 창밖을 보다
수북하게 쌓인 편지
추억을 접어 편지함에 넣는다.
와와
용수철처럼 튕겨 오르는
첫사랑,
마당에서 아버지가 성냥불을 긋고
그 먼 날들이
유월엔
활활 꽃불을 지른다.
제부도 바닷길
유 회 숙
흘러가는 것은 아름답다* 사랑하는 사람들의 만남과 헤어짐도 이만큼 진실했으면 싶으리. 물을 따라 길을 걸으며 하루에 한 번은 넘게 서로를 바라보고 일상의 안부 궁금해 하며 굽이굽이 가슴복판으로 길을 열어두리라.
폐선처럼 낡은 버스를 보거든 하루에도 몇 번씩 제부도** 오가는 까닭이야 묻지 않아도 좋으리. 섬과 섬 사이에 머무는 마음, 사진을 찍듯 오려낼 수 없는 일, 붉은 노을 너머 바닷새 날아오르리.
물 위에 찍힌 발자국 지워질리 있으랴. 서로에게 스미어 이렇듯 혼곤하게 하나가 되리. 흘러가는 시간을 돌아보며 물의 노래를 부르리. 흘러가는 것은 자유롭고 당당해야 하느니, 우리 언젠가 떠나야 할 때 이별을 목전에 두고 조금은 쓸쓸한 생각에 잠겨도 좋으리.
* : 박기동 시인의 시집 제목
** :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에 있으며 바닷길은 하루에 2번 열린다.
유채꽃 사랑
정 희
기억 끝에서
한바탕 바람이 불면
까실한 이파리 속에 꽃무더기로 피어
해를 바라고
달을 바라고
그 모습
노란 기다림으로 피어
목이 섧게 차온다.
어느 늦봄
내 마음 돌아보면
아프게 자꾸만
이제 지쳤다고 소리조차 없다.
더 많은 시간을
나에게 물어야 하는가보다.
지난 계절
긴 기다림으로 유채꽃 핀다.
남평역
정 희
늦가을. 경전선을 탄 여인 낙조가 드러누운 갈대밭을 지나
넓은 평야를 안고 인적 드문 간이역에 도착했다.
첫사랑 기다리던 남평역,
불혹이 된 나를 덥석 안아준다.
꽃향기에 취한 벌만 꽃 사이 오가며
꿀 모으기에 바쁘기만 하고
그 소년,
내 귓가에 들리는
맥박 수, 진향처럼 묻어난다.
크로바 꽃잎 따서 꽃시계 차고
질갱이 풀로 신발 만들어 신고
진달래 연분홍 손가락 걸었던
첫사랑,
꽃봉오리처럼 봉긋봉긋하다.
바우덕이 (1)
- 바우덕이* 노래
오 정 수
지난 밤 꿈에
하얀 나비 한 마리
들꽃 핀 들녘 날아가네.
풀섶엔 이슬 맺히고
불어오는 바람
꽃향기 가득하네.
개울 건너던 나비 간 곳 없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노래 소리
다가선 바우덕이 무덤가
자운영 꽃 흐드러지고
그녀를 기리는 남사당 패인가
무덤가 맴도는 하얀 나비 떼
초여름 맑은 하늘
아직도 들려오는 바우덕이 노래
* 바우덕이 : 조선 말엽에 안성지방을 중심으로 성행하던 남사당패의 여자 패두(꼭두쇠)로서, 신비한 목소리와 아름다운 외모였다고 전해온다. 경복궁 중건 때 공로가 있어 당상관 정삼품을 제수하였으나, 폐결핵으로 젊은 나이에 요절하였다고 한다. 안성부근에 그녀의 가묘가 있으며, 해마다 “바우덕이 축제”가 열린다.
바우덕이 (2)
- 그녀의 죽음
오 정 수
깊은 밤
가물거리던 별 하나
유성 되어 흘러가네.
지난 날 짓밟히고 천한 몸
사당패 두령 되어
조선팔도 누볐으나
병들고 지친 스물셋*
불당골* 절간에 몸을 부렸네.
밤은 깊어가고
어디선가 들려오는 사당패 노래소리
저문 달 아래 바우덕이
밤이슬에 옷자락 젖어들고
꼭두쇠* 여인 어깨도 가냘퍼라.
법당 앞 오동잎 지고
바우덕이 서린 한도
앞강에 흘러가네.
* 불당골 절간 : 청룡사 안성 서운산 기슭에 위치한 사찰로서 1900년대 남사당패의 근거지였다.
* 병 : 폐결핵으로 알려지고 23세에 생을 마감했다.
* 꼭두쇠 : 사당패의 패두(두령)를 일컬음
불임깻잎 ․ 2
송 선 애
열여덟 복사꽃 필 때였지라. 고향엔 모다 서울로 떠나뿌리고 나도 오늘밤처럼 뿌옇게 떠오른 보름달 꿈을 안고 집을 떠났지라 이십년도 넘은 야그구먼요. 기차역에서 그 남자만 만나지 않았드라도 팔자가 요로코롬 되어뿌리지는 않았을 것이어라. 아매도 나가 집을 나온 처녀같이 보였던가. 난중에 안 일이지만 처녀인줄만 알았어도 여그에 나를 팔아 뿌리지는 않았을거이라고 하드라만서도 그기 이제와 무신 소용이 있것소. 날쌔게 가로채 물어다가 후미진 뒷골목에 내팽개친 남정네에게 첫 순정 모다 줘뿌린 내 청춘이 서럽고 서럽웠지라. 내 몸뚱어리 짓밟힌 꽃값 받아들고 빈 하늘 보며 하염없이 하염없이 울었지라. 나도 늙었는지 고향 들판에 흐드러지게 핀 자운영 꽃빛에 서러워지고 복사꽃이 환하게 반기는 꿈을 꾸지라. 어릴 적 친구 순자, 영숙이, 정순이… 우리 엄니가 보이는구만요. 썩어 문드러진 이 몸이 무신 낯짝으로 고향산천에 얼굴을 돌리것소. 여그에 들어와 한 번도 나가뿌지 못허고 인연 끊고 산지가 수십 년이 되니께 인자는 나를 찾아오는 손님이 그렇게 반갑고 고맙지라. 썩은 몸뚱어리 탐허는 손님을 보면 피붙이 같아 허한 가심 안아주고 싶어라우. 연극이야기 같은 그기 가당키나 헌 소리 것소. 그란디 이상허요 허망한 세상 말라붙은 가심에 차마 떠올리기도 아까운, 손 한 번도 잡아뿌지 못헌, 생각만혀도 삐비꽃물이 달착지근허게 입안에 고이는 그 사람이 보고싶구만이라. 그 오살놈 말고, 내 첫사랑, 손 한 번도 못 잡아뿌고 가심만 뛰던 기태 말이지라! 그 손 한번만 잡아보고 죽어도 원이 없것구만이라우!
연 꽃
송 선 애
세속에서
꽃봉오리를 피어 올린다.
하늘을 활짝 열면서
일용할 양식을 준비한다.
하늘이 파랗게 열리면
합장한 꽃잎에 향기를 재워
極樂淨土로 보낸다.
풍경에 매달린 물고기는
염불소리에 흔들리는 바람에
연잎누리로 유영한다.
이 뭐꼬*
박 기 동
거울 속에 비친
저를 찾으려 합니다.
어디로 가야 합니까
- 니 발길 가자는 대로 가라, 와
그럼 발길을 어디로 놓을까요
- 마음 일어나는 곳이 거기다, 와
마음은 어디서 일어납니까
- 니 마음 속에 이미 들어가 있잖은가
* 성철 스님은 생전에 "이 뭐꼬?" 라는 화두를 자주 던지셨다. "이 뭐꼬?" 라고
스스로에게 묻는 것은 자기 마음의 거울을 닦는 일이다.
별, 그대에게
- 포천 금주리 호수가 있는 집에서
박 기 동
그대 아십니까
문 닫힌 교회당 앞마당
우뚝 선 은행나무를 껴안고
화석처럼 굳은 눈빛을
점점이 핀 찔레꽃
무명천에 수놓으며, 호수 속
밤하늘이
막 잠들려고 하는 나를 깨웁니다.
별 하나로 집을 짓고
별 둘로 물푸레나무를 심고
별 셋을 헤며 먹바위 얼굴 그리는
이대로 정지된 순간만 있어 달라고
이대로 정지된 순간만 있어 달라고
그대 아십니까
무심히 풀꽃이 된 네잎 클로버
젖은 눈빛에 맺힌
이슬
호수가 되고
시가 되고
가슴에 안기는 기다림
그 막막한 설렘을 그대 아십니까.
허공의 길
이 병 훈
하고 싶은 말들이
목에 뚫린 구멍으로
안타깝게 다 새어 나가고
눈물만 글썽거린다.
가까스로 반신만 되찾아
한쪽 팔을 침대에 묶인 채
기억의 실마리를 더듬다가
내 손을 뜨겁게 붙잡고
반가움을 놓지 못한다.
다섯 남매 키우느라
논밭으로 불이 나던 다리는
누운 소금쟁이가 되어
구부렸다가, 폈다가……
정 많던 그녀는
허공에 길을 내고 계신다.
고향으로 가는 길을,
가느다란 호스로
生을 연장 시켜가며……
사골을 끓이며
이 병 훈
군살 다 발라낸 뼈를
쥐어짜듯 끓이고 있다
오래전에 히트 친 노래를
티브이가 구성지게 부르는데
솥뚜껑이 박자를 맞춘다.
네댓 번 우려냈는데도
한우라서 국물이 진하다며
큰 그릇에 옮겨 담으며
촉각을 곤두세웠던 그녀도
콧노래를 부른다.
뼛속에서 우러나오는
어머니 젖빛 같은 진국
잃었던 입맛 되살려주는
토종 한우 사골 같은
구수한 시를 쓰고 싶다.
달달 끓이고 볶아도
노린내만 진동하는
아득한 수입 사골처럼
맛보자마자 멀미나는
헛갈릴 생각은 추려내고,
장미가지 흔들리며
최 연 숙
달빛 기울어진 강가에 모여 앉아
낡은 수첩 꺼내어
관솔개비 태우던 날의 이야기
물 깊숙이 내려온 산도 듣는다.
마주 앉아 잔을 기울여도
저마다 섬이 되고
산 너머 바람 불어와
장미가지 흔드니
마른 꽃잎 떨어져
탁자 위에 뒹군다.
타다 남은 불씨마저 사위어 갈 때
아프로디테*의 장난은
깊이 패인 얼굴의 주름살
강물에 빠뜨려 버렸다.
멀리서 뻐꾸기 울음소리에
유월의 녹음이 짙어오고 있었다.
* 아프로디테 :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미와 사랑의 여신
고향집 복숭아 밭
최 연 숙
하루의 얼룩 씻으려
올려다 보는 하늘에
솜털구름이 함박꽃으로 피어나
그대 얼굴인가 싶다.
나 홀로 걸어온 자갈밭
탱탱히 발목 부어올라도
하늘빛은 사뭇 파랗기만 하구나.
점점 다가서는 발걸음
손 놓는가 싶으면
대답할 수 없는 물음이
무릎 꿇어 손 모으게 하더니
좁은 길 일러준다.
누군가를 그리워하며
선뜻 완행열차 타고서
고향마을 찾아들어
노을빛 번지는 복숭아밭 사이
꿈길을 거닌다.
서울의 봄
이 동 훈
남산도 북악산도
그 옛날 그대로
한강은 흐르는데
그날 밤 취한 그 곳에는
고향 까마귀 만나서
잃어버린 기억을 찾는다.
칠흑 같은 그림자를 드리우고
궂은 세상에 천둥소리
쾅쾅거리는 암흑의 밤에
봄철 물들이는
노랑 개나리
굳게 입 다문
서울의 봄은
산수유도
진달래도
하얀 목련도
서울의 봄소식을 힘겹게 전하고 있다.
해 탈
이 동 훈
한 잔의
술을 마시고
어디로 가는가.
취해서
취해서
또, 한 잔의 술
다시 한 잔
또, 한 잔
비틀비틀 비틀걸음
꾸불꾸불 사족이 간다.
또, 어디로 가는가.
술이 해탈 하면
물이 된다는 데
술꾼이 해탈 하면
뭐가 될꼬.
오늘은 그대가 그립기만 합니다
김 일 녀
오늘은 그대가
무척이나 그리운 날입니다.
아무 까닭없이
아주 조그마한 슬픔 한 방울로
온 가슴을 헤집고
오래도록 접어두었던 그리움들이
빛깔마다 아프게 흔들리기만 합니다.
기대고 싶은 보고픔으로 다가와
차마 눈물이 앞섰다는 말도 하지 못한 채
스쳐 지나가는 바람으로나
한 켠에 비켜 있으려
그대를 그리나 봅니다.
호올로 슬픔에 머무는 것이
익숙해져 그리다 지치더라도
언젠가 그대 품에서
깊이 잠든 꿈결에 머물고파
눈물에 담긴 그대가
무척이나 그리운 오늘 입니다.
꽃잎 지던 날
김 일 녀
긴 여운의 새벽 종소릿결-
바람 속에 홀로 서서
처음으로 꽃을 피우던 날
그 설렘 추스리며추스리며
사랑이 남겨지길 고이 기도 올렸는데
그대 그대로 사려있고
꽃잎 바람에 떨어져
슬픈 기억에 젖어 사는 나날
내 눈물은 여전히
시들은 기다림으로
또 다시 꽃 지는 날
서럽게 울겠지.
꽃잎 지는 그 어느 날처럼
다시 돌아올 수 없더라도
가슴 후볐던 흔적들이 지워지더라도
기다림 안은 가슴으로
우리 이야기만은 오래도록 남겨지기를
첫댓글 많은 분들이 보리수 카페 1주년을 축하해 주셨습니다. 대단히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