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07 봄 마가복음 24 강
• 말씀 마가복음 11:1-33
• 요절 마가복음 11:9,10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지르되,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더라.“
오늘 말씀에서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때는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시기 닷새 전 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입성하면서부터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때까지의 그 5일간을 특히 ‘수난주간’이라 부르는데, 저자 마가는 이 기간에 일어난 일들을 그의 복음서 전체 16장 중 무려 다섯 장(11-15장)에 걸쳐 상세하게 기록합니다. 수난주간에 일어난 일들은 하나 하나가 그만큼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오늘 말씀은 그 첫째 날에 대한 기록입니다.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들어가실 때 무리들은 예수님 앞에서 가기도 하고 뒤에서 따르기도 하며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면서 소리지릅니다. 한마디로 그들은 예수님을 왕으로 영접합니다. 예수님은 왕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후에는 성전의 장사치들과 환전상들을 내쫓는 등 성전을 깨끗케 하십니다. 이 시간 그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입성하셔서, 우리를 다스려 주시고 깨끗하게 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1.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1-11):
1절을 보면 예수님 일행은 예루살렘 가까이에 와서 감람산 벳바게와 베다니에 이르렀습니다. 감람산(Mount of Olive)은 예루살렘 남쪽에 있는 해발 800미터 높이의 산입니다. 수원시 장안구로 말하자면 광교산 같은 곳이어서, 거기서는 예루살렘 시가지가 다 내려다보입니다. 예수님은 감람산에서 예루살렘 시가지를 내려다보며 입성을 준비하셨습니다. 2절을 보면 예수님은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면서 명령하십니다.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곧 아직 아무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라.”
그런데 생각해 보면 이 말씀은 참 황당한 명령입니다. 먼저 예수님이 맞은 편 마을에 가보시지 않았는데 어떻게 거기에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것을 아실까, 만일 거기에 나귀가 없으면 제자들만 바보가 될 것이었습니다. 또 설령 나귀 새끼가 있다 하더라도 그것을 풀어 끌고 오면 나귀의 주인이 가만히 있지 않을 터인데, 파출소에라도 끌려가면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파출소에 끌려가는 일은 없다하더라도, 스승께서 어떻게 제자들에게 남의 것을 끌고 오라는 명령을 내릴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만일 누가 너희에게 왜 이리 하느냐 묻거든 주가 쓰시겠다 하라. 그리하면 즉시 이리로 보내리라.”(3)
그런데 4절을 봅시다. 제자들이 맞은 편 마을로 가보니 어떤 집 문 앞 길가에 정말로 나귀 새끼가 매여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제자들은 “거 참 신기하다” 하면서 나귀를 풀었습니다. 그러자 거기 있는 사람들이 “나귀를 왜 풀어 가는 거요?” 하고 물었습니다. 제자들은 예수님이 시키신 대로 “주께서 쓰시겠다 하셨소.” 하고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또 신기하게도 그들은 더 이상 묻지 않고 허락하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천지 만물의 주님이시기에 보지 않고도 모든 것을 아셨고 또 필요한 것은 어느 때에든지 사용하실 수 있었습니다.
사실 나귀를 구하는 일이 엄청난 일은 아닙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나귀를 구하는 것과 같은 작은 일을 통해서 예수님의 ‘주’되심을 배우도록 도우십니다. 태헌목자가 학생이던 때, 주일성수를 위해 진도에서 올라오려는데 기차표가 매진되었습니다. 예배를 드리겠다며 방금 아버지와 싸우고 나왔는데 표가 없어 다시 집으로 돌아간다면 태헌목자 체면은 물론이거니와 예수님의 주되심도 드러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런데 갑자기 어떤 아저씨가 성큼 성큼 다가와서는 서울 가는 표를 내밀면서 사라고 했답니다. 태헌목자 이마에 ‘저 지금 서울 가는 기차표가 없어요’라고 써 두지도 않았는데 그가 어떻게 알고 서울 가는 표를 주었단 말입니까? 그때 태헌목자는 예수님이 모든 것을 아시는 분이요 만물을 주관하신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민권목자와 수희목자의 결혼준비기간이 짧았습니다. 때문에 부모님께 인사하는 문제부터 결혼식 준비, 신혼여행준비, 집구하는 문제 등 소소한 문제들이 많았고 항상 꼼꼼하게 일을 챙기는 두 분에게 부담이 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시간이 많이 걸려야 겨우 해결될 수 있을 것처럼 보이던 일들이 순조롭게 이루어졌습니다. 그 과정에서 결혼 준비를 사람이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주관하신다는 것을 배웠습니다. 결혼식 전날 비가 와서 걱정했는데 당일에는 청명하고도 맑은 날씨를 주심으로 ‘아, 주님이 날씨까지 주관하시는 주님이로구나!’하며 감탄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우리 삶의 작은 사건들을 통해서 바로 예수님이 천지만물과 생명을 창조하신 창조주 하나님이시오, 만유를 주관하시는 ‘주(主; the Lord)’이심을 나타내십니다. 이 예수님은 우리 각자의 인생을 섭리하시고,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십니다. 우리가 가진 것은 다 주님의 것입니다. 내가 땀 흘려 벌었다고 내 돈이라 주장할 수 없습니다. 돈뿐만 아니라 생명과 재능과 머리에 든 지식까지도 다 하나님이 잠시 우리에게 맡겨주신 것이며, 우리는 그 청지기일 뿐입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돕고 있는 양도 다 주님의 양들이요, 복음 역사도 주님 것입니다. 그러므로 언제든지 ‘주가 쓰시겠다’하면 내어드릴 수 있어야 합니다.
제 선배 중 한 분이 혈혈단신으로 부산대를 개척했습니다. 그는 외롭게 투쟁하다가 귀한 동역자 몇 사람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결혼문제를 돕기 위해 한 분은 선교지로 또 한분은 다른 센타로 보냈습니다. 저는 그분에게 ‘주가 쓰시겠다’하면 언제든지 내어줄 수 있는 믿음이 있는 것을 보았고 또 하나님이 그를 축복하셔서 지금은 10명이 넘는 동역자들과 예배 드리고 있는 것을 보았습니다. ‘주가 쓰시겠다’할 때 내어드리면 주님은 또 우리에게 필요한 것들을 내어 주십니다. 이를 믿고 사는 삶은 얼마나 자유롭고 풍요롭습니까?
예수님은 제자들로 하여금 다시 한 번 예수님이 주님이신 것을 알게 하고자 하셨고, 예수님이 주님으로서 예루살렘에 입성하려 하신다는 것을 알게 하고자 하셨습니다. 이를 위해 예수님은 제자들로 맞은 편 마을에 가서 나귀 새끼를 끌고 오는 훈련을 시키셨습니다. 과연 7절을 봅시다. 제자들은 나귀를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벗어 그 위에 얹었습니다. 그들은 구약 시대 때 왕을 추대하면서 왕이 탈 나귀의 등에 겉옷 얹는 것을 기억했고, 거기에 예수님이 타셔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7절 하반을 보면 예수님은 제자들이 끌고 온 나귀 새끼를 타시고 예루살렘에 입성하십니다. 8절을 보면 제자들뿐만 아니라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겉옷을 예수님 가시는 길에 깔고, 밭에서 나뭇가지를 베어 와서 길에 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예수님 앞에서 가고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소리 질렀습니다. 앞서 가는 자들이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하고 소리 지르면, 뒤에서 따르는 자들이 그들의 소리를 받아 “ 찬송하리로다,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가장 높은 곳에서 호산나!” 하고 소리질렀습니다.
예수님은 이제까지 문둥이를 깨끗하게 하시고, 눈먼 자, 귀먹은 자, 벙어리 된 자, 귀신들린 자들을 도우셨는데, 그때마다 그들을 낫게 해 주었다는 말을 퍼뜨리지 말라고 경계하셨습니다(1:44, 3:12, 5:43, 7:36). 또 베드로가 예수님을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하고 고백했을 때에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경계하셨습니다(8:30, 9:9). 그런데 이제까지와는 달리 무리들이 예수님을 향하여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하고 외쳐도 그들을 만류하지 않으셨습니다. 누가복음을 보면 예수님을 열광적으로 환영하는 인파를 보면서 바리새인들이 이를 비난했는데, 이때 예수님은 만일 그들이 소리 지르지 않는다면 돌들이 소리 지를 것이라고 말씀하시기까지 하셨습니다(누가 19:40).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당신이 그리스도요 왕이신 것을 선포하십니다. 닷새 후면 예수님은 십자가에 못 박혀 돌아가실 것이지만, 그로부터 사흘 후에는 다시 살아나십니다. 다시 사신 예수님은 심판주로 다시 오셔서 온 세상을 심판하시고, 온 우주를 영원히 다스리실 것입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면서 자신이 만왕의 왕이요, 영원한 왕이신 것을 제자들에게 뿐만 아니라 모든 백성들에게 선포하셨습니다.
그런데, 그 예수님이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당시 왕들은 화려한 면류관을 쓰고, 수많은 호위병을 거느리고, 높고 잘 생긴 백마 위에 앉아, 엄청난 위엄을 떨치며 입성하곤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리스도요 만왕의 왕이신데도 나귀, 그것도 새끼 나귀를 타고 입성하셨습니다. 당시의 왕들이 벤츠 차를 타고 입성했다면, 예수님은 티코도 아닌 자전거를 타고 입성하신 격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왜 이렇게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셨습니까? 선지자 스가랴는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슥 9:9)
스가랴는 메시야가 예루살렘에 입성하실 때에는 나귀 새끼를 타고 입성하실 터인데, 그것은 그가 겸손하시기 때문이라고 예언했습니다. 당시 왕들이 입성할 때면 백성들은 엎드려 절해야 했으며, 왕이 지나갈 때까지는 얼굴도 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에게는 전혀 공포가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입성하실 때 백성들은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만세를 불렀고, 낮은 나귀 새끼 등에 타셨으므로 예수님과 어깨동무도 할 수 있었고, 예수님과 악수도 할 수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왕이시지만 백성들 위에 군림하시기 보다 겸손하게 백성들과 함께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백성들을 다스리시되 무력으로 위협하지 않으십니다. 백성들을 다스리시되 사랑과 평화로 다스리십니다. 예수님은 차디찬 율법을 강요하거나, 엄격하게 도 닦을 것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다만 우리가 그를 영접하기를 원하시며, 그를 영접하기만 하면 은혜를 베푸십니다. 그러므로 예수님께서 우리의 왕이 되실 때, 우리 마음에는 구원의 은혜가 임하고, 사랑과 평화가 임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이 예수님을 왕으로 모시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첫째, 교만한 마음과 세상적인 가치관을 버려야 합니다. 교만한 사람들은 나귀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을 무시하여 왕으로 인정할 수 없습니다. 세상적인 가치관을 가진 사람들은 나귀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이 보잘 것 없어 왕으로 영접할 수 없습니다. 이렇게 마음이 교만하고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오염된 사람들은 그 겸손하신 예수님의 삶이 얼마나 고귀한가를 알 수 없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처럼 사는 것을 부끄러워하고, 예수님께 드리는 물질을 낭비로 생각하고, 주님을 위해 드리는 시간을 아까워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결코 예수님의 다스리심을 받을 수 없고, 예수님의 다스리심으로 말미암는 구원의 은혜를 맛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이 다스리심으로 말미암는 고귀한 성품을 지닐 수 없고, 예수님의 다스리심으로 말미암는 사랑과 평화를 품을 수 없습니다. 예수님의 다스리심을 받으려면 교만을 회개하고, 세상적인 가치관으로 오염된 마음을 깨끗하게 해야 합니다.
둘째,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영접해야 합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왕으로 환영한 예루살렘 백성들을 생각해 봅시다. 그들은 예수님 가시는 길에 겉옷을 깔고, 나뭇가지를 깔았습니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하면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을 고백했습니다. 또 만세를 부르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예수님을 앞서기도 하고 뒤따르기도 하며 좋아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영접하는 데 있어서 그렇게 극성스러웠습니다. 적극적이었고 정열적이었습니다. 예수님을 영접하는 데에는 이런 적극성이 있어야 마음이 열리고, 그 열린 마음으로 예수님이 들어오셔서 다스리실 수 있습니다. 두꺼비 같이 눈만 껌벅이고 있는 사람에게는 예수님이 임하시지 않고 졸음이 옵니다. 주님께서는 계시록에서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내가 네 행위를 아노니 네가 차지도 아니하고 뜨겁지도 아니하도다. 네가 차든지 뜨겁든지 하기를 원하노라. 네가 이같이 미지근하여 뜨겁지도 아니하고 차지도 아니하니, 내 입에서 너를 토하여 버리리라.”(계시록 3:15,16)
바리새인들처럼 예수님을 환영하는 무리들이 너무 극성맞고 감정적이라고 매도해서는 안됩니다(누가 19:39). 사람을 움직이는 것은 지(知) 정(情) 의(意)의 세 가지 요소인데, 이 중에서도 감정 또는 정열이 80% 이상 작용한다고 합니다. 그런데 정열이 없이 어떻게 예수님을 영접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가 다른 데는 몰라도 예수님을 영접하는 데 있어서는 ‘오버’할 필요가 있습니다.
올해 여름수양회에서는 모든 목자들이 메시지를 준비했습니다. 소감 한편 쓰는 것에 비하자면 메시지 한편 쓰는 일에는 몇 배의 노력과 열정이 필요했습니다. 현경목자는 97년 이래로 처음 이틀 밤을 새었습니다. 그렇게 고생을 했기 때문에 앞으로 메시지 훈련 이야기를 꺼내기 어려울 것 같았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열성적으로 준비한 우리 내면에 예수님이 의 말씀이 임했습니다. 또 예수님의 다스림을 받을 때 누리는 은혜와 평강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수양회 후에는 목자들이 메시지 훈련을 자청했습니다. 게다가 우리는 지금 성경통독까지 하려하고 있습니다. 그러다보니 조금 무리가 되고 부담이 되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적극적으로 성경을 읽고 또 하나님의 일을 할 때 예수님이 우리 마음에 들어오셔서 우리의 왕이 되시고 우리를 사랑과 평화로 다스리시며, 공평과 정의의 길로 가도록 인도해 주실 것을 믿습니다.
2. 성전을 깨끗케 하신 예수님(12-19):
예루살렘 백성들은 예수님을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로 영접했고, ‘오는 우리 조상 다윗의 나라여!’ 하고 소리질렀습니다. 그들은 그 옛날 다윗 임금이 그러했듯이, 예수님께서 주위의 모든 원수들을 물리치고 이스라엘이 세계를 지배하게 될 것을 기대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11절을 봅시다. 예루살렘에 입성하신 예수님은 로마 총독부나 헤롯 궁으로 쳐들어가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예루살렘에 입성하시는 길로 성전에 들어가셨습니다. 예수님은 백성들이 생각하는 정치적인 메시야가 아니었습니다. 성경은 정치적인 메시야를 가르치지 않습니다. 다만 이스라엘 백성들이 오랫동안 외세에 시달리면서 그런 잘못된 메시야관을 갖게 된 것이었습니다. 또 이스라엘이 생각하는 것처럼 정치적으로 인간의 문제가 해결되는 것도 아닙니다. 인간의 문제는 근본적으로 영적인 문제요, 예수님은 세상에 영적인 왕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정치적인 문제보다 영적인 데 관심을 가지셨고, 그래서 이스라엘의 영적 생활의 중심지인 성전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것은 말하자면 영적인 왕으로 오신 예수님의 초도 순시였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보신 성전의 모습이 어떠했습니까? 15절을 보면 성전에는 매매하는 자들, 돈 바꾸는 자들, 비둘기 파는 자들도 가득 차 있었습니다. 또 성전을 둘러가기가 싫어서 성전 마당을 지름길로 이용하여 지나가는 자들도 있었습니다(16). 성전은 더 이상 성전이 아니라 시장 바닥이었고 길바닥이었습니다. 이를 보시는 예수님의 분노는 참으로 컸습니다. 예수님은 장사꾼들을 내어쫓고, 돈 바꾸는 자들의 상과 비둘기 파는 자들의 의자를 모두 둘러엎으시고, 성전에 농기구 같은 물건을 가지고 다니지 못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리고 그들을 향하여 책망하셨습니다. “기록된 바 내 집은 만민이 기도하는 집이라 칭함을 받으리라고 하지 아니하였느냐? 너희는 강도의 소굴을 만들었도다.”(17)
그러면 왜 기도하는 집이어야 할 성전이 강도의 소굴이 되고 말았습니까? 성전이 있는 감람산 주위에는 몇 군데의 야시장이 있었습니다. 이 야시장에서는 외국이나 먼 지방에서 오는 참배객들에게 제사로 드릴 짐승을 팔았습니다. 또 성전에 헌금하는 돈은 이스라엘 돈인 ‘세겔’로만 드리게 되어 있었기 때문에 외국에서 오는 사람들은 돈을 바꾸지 않으면 안되었고, 그래서 야시장에는 환전상들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무래도 성전 가까운 자리가 장사가 잘 되었기 때문에 장사꾼들은 점점 성전 가까이로 오게 되었고, 마침내는 성전 안에까지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대제사장들은 이들을 쫓아내지 않고 오히려 이들에게 자릿세를 받고 성전에서 장사하는 것을 허용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제사장들은 제사에 드릴 짐승을 검사해서 흠이 있는 것은 제사로 드리지 못하게 하는 권한이 있었는데, 이들은 시골에서 가지고 온 짐승은 무조건 흠을 잡아 불합격 시켰습니다. 그래서 백성들은 자기가 가져온 짐승들을 헐값으로 팔고 장사꾼들로부터 비싼 값을 주고 제물을 사서 제사를 드리지 않으면 안되었습니다. 이렇게 되니까 나중에는 백성들도 정성을 드려 짐승을 준비해 오기 보다 아예 지갑만 들고 와서 성전 장사꾼들에게서 짐승을 사서 제사 드렸고, 제사장들은 장사꾼들에게 장사시켜준 대신 뒷돈을 받았습니다. 그 뿐 아니라 그들은 백성들로부터 불합격품이라 하여 헐값으로 사들인 짐승을 합격품으로 둔갑시켜 장사꾼들에게 팔아서 또 돈을 챙겼습니다. 이리하여 대제사장 안나스와 가야바는 막대한 돈을 벌었고, ‘안나스와 가야바는 도둑놈’이라는 말이 공공연히 나돌았습니다. 그러니 성전에 장사꾼들이 득시글거리는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그들이 드리는 제사나 예배가 얼마나 형식적이고 위선적이었겠습니까?
성전은 이스라엘의 영적 중심지입니다. 이스라엘의 영적 상태와 도덕적 상태를 한 눈에 알 수 있는 곳입니다. 그런데 성전이 시장 바닥이 되고, 길바닥이 되고, 강도의 소굴이 되어 버렸으니, 어찌 이스라엘에게서 희망을 찾을 수 있겠습니까? 영적인 왕으로 오신 예수님께서는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결국 성전을 강도의 소굴로 만든 것은 물질주의와 편의주의입니다. 그런데 우리나라의 교회에도 많은 이권이 개입되어 있다는 말이 들립니다. 또 이스라엘 백성들이 성전을 둘러가기가 싫어서 성전의 뜰을 지름길로 이용했듯이, 교회를 결혼 상대를 찾는 수단으로, 사업을 도모하는 곳으로, 국회 의원에 당선되는 지름길로 이용하는 사람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고 합니다. 뿐만 아니라 마음과 힘과 정성을 다 해 하나님을 예배하기 보다 편의에 따라 예배드리고, 편하게 신앙 생활을 하려는 풍조가 만연된 것도 오래 되었습니다. 어떤 교회에서는 직장인들에게 휴일을 돌려준다는 목자의 심정(?)으로 교인들이 놀러 가는 휴양지에 가서 예배를 인도해 준다고 합니다. 쉬는 것을 뒤로 미루고 힘과 정성을 다 해서 예배를 드려야지, 놀러간다고 하더라도 예배드린 다음에 놀러가도록 도와야지, 그렇게 편리한 대로 예배를 드려서 어찌 영성을 회복할 수 있겠습니까? 이렇게 가다가는 우리나라 교회도 이스라엘 성전처럼 장바닥, 길바닥, 강도의 소굴이 되지 않을까 걱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교회가 영성과 도덕성을 잃어버릴 때, 우리나라의 영성과 도덕성이 어떻게 될 것인지 상한 심정으로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 모임은 어떠한지요? 또 우리 마음은 어떠한지요? 지난 여름수양회를 통해 우리 마음이 많이 깨끗해졌음을 느낍니다. 그러나 마음처럼 더러워지기 쉬운 게 또 어디 있겠습니까? 우리가 영적인 생활에 늘 힘씀으로써 우리 주님께서 늘 우리의 왕이 되시게 해야 합니다. 이 시간 왕 되신 예수님께서 우리 마음에 있는 물질을 사랑하는 마음과 안일을 사랑하는 마음으로부터 지켜주시기를 기도합니다. 우리 마음이 왕 되신 예수님을 모실만한 거룩한 성전이 되고, 우리 모임이 기도하는 모임이요 세상에 대해 좋은 영향을 끼치는 모임이 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