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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이버의병 원문보기 글쓴이: 달콩사탕
아래글은 제가 자료들을 보며 정리한 것입니다.
출처는 저에게 있으며, 아직 보완할 점이 많은 것으로 알지만, 기본은 최태영 박사님과 윤내현교수님의 자료를 인용한것으로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또한, 각주가 첨부되어있었으나, 옮겨오는 과정에서 그 처리가 되지 않은점 알려드리고.
보기가 힘드시면, 한글파일로 옮겨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덧붙여야할 자료가 있으면 답글의 형식으로 계속 붙여주시면 정말 감사하겠습니다.!!
ⅰ. 고조선의 건국
환웅까지의 신시라는 지역국가시대의 긴 세월을 지내고서, 고조선이라는 큰 나라를 세운 최초의 제왕(제1대 단군)이 인민의 추대를 받아 임금의 자리에 올라, 조선이라는 강대한 광역국가를 창건함으로써 큰 나라의 제정(帝政, 단군왕조의 군주정)이 시작되었다.
삼국유사의 기록에는 환웅이 무리 삼천과 천부삼인을 가지고 땅으로 내려왔고, 환웅과 웅녀가 낳은 아이가 단군이라 되어있다. 이것은 천손과 지손의 결합을 의미하며, 이전의 신시는 아직 고조선국이 아닌 소국가 사회였으나 단군이 고조선을 세운 때부터는 강대한 광역국가인 조선의, 신화나 전설이 아닌 실존 인간인 단군 왕검에 의한 단군왕조의 역사가 시작된 것이다.
ⅱ. 고조선의 체재
단군은 정치적으로는 최고 통치자요, 종교적으로는 최고 지도자요, 교육적으로는 신하들과 백성들의 큰 스승이었다. 그러므로 단군은 신정(神政)을 베풀어 선계(仙界)를 지향하였으며, 동시에 지상에 그것을 구현하기 위해 그 목적에 적합한 조직체계를 갖추었다.
단군조선의 통치체제는 1단군(檀君), 3한(韓), 5가(加), 64족(族), 3사(1白 2師), 6사(事) 체재로 이루어져 있었다.
3한(韓)은 진한(辰韓), 마한(馬韓), 번한(繁閑)이며, 광대한 땅을 셋으로 나누어 진한은 단군의 직할통치 지역이었고, 나머지 마한, 번한은 비왕들을 두어 간접 통치했다.
또한 재위의 계승과 같은 중대한 국사(國事)에 대한 의결기관으로는 3한(韓)3가(加)로 구성되는 화백회의(和白會議)다 있었는데, 한국 배달국 이래의 전통이었다. 최고 통치자인 단군의 제위(帝位)는 대체적으로 단군의 장자(長子)를 통하여 계승되어 왔으며, 장자에게 문제가 있거나 특별히 뛰어난 인물이 있을 때는 화백회의에서 그를 추대하여 단군의 제위를 계승하였다. <단군세기>의 기록을 검토해보면, 모두 47세를 전하면서 태자가 제위를 이은 것은 30차례였고, 양가(羊家)에서 두 차례, 우가(牛加)에서 일곱 차례, 우현왕과 욕살과 대장군이 각각 한차례였으며, 명확하지 않은 것이 네 차례였다. 이는 제위를 이을 태자가 없었거나 혹은 나라를 이끌만한 마땅한 현명한 태자가 없었을 때 오가와 상의하여 선출한 것으로 보이며, 이러한 제도는 신라시대까지 남아 있었다.
ⅲ. 고조선의 체계 및 사회 신분
단군조선을 중심·주류로 하고 단군왕검을 최고의 대제왕으로 삼아, 다수의 대소 분봉(分封)제후국가들이 그 밑에서 나라를 나누어 소왕·부왕·제후들이 통치하는 연합체였다고 할 수 있다. 연맹을 형성한 거수국은 거수가 통치하였는데 따라서 거수국의 여러 마을 가운데는 거수가 거주하는 마을이 있었다. 이 마을을 국읍이라 불렀다. 국읍 이외의 일반 마을들은 읍(邑)또는 읍락(邑落)이라 불렀다.
고조선의 중앙에는 단군의 직할국이 있었다. 그곳에는 고조선 전체의 통치자인 단군이 거주하는 도읍 즉 아사달이 있었고 도읍의 주위에는 일반 마을인 읍 또는 읍락들이 있었다. 고조선에서 도읍보다 중요한 곳이 있었는데 이곳은 종교적 성지로 정신석 중심지인 신시(神市)이다. 선인(仙人)들이 거주하고 단군이 주제하는 종교의식이 행해졌다.
신시의 거주민 · 단군씨족 · 거수씨족은 지배 귀족 신분이었고 일반 읍의 거주민들은 피지배 씨족이었다. 고조선은 농업사회로서 각지에 널리 분포되어 있었던 마을들의 거주민들은 대부분이 농사를 짓고 살았으므로 일반 읍은 농업마을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고조선의 국가 경제는 하호와 노비들의 노동에서 뒷받침 되어 졌을 것이다. 그런데 고조선의 사회 구조로 보아 하호의 인구가 가장 많은 비율을 차지하고 있었을 것이므로 고조선의 주된 생산 담당자는 하호였을 것이며 노비들은 보완적인 위치에 있었을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는 생산을 담당했던 노예의 인구가 일반 시민의 인구보다 훨씬 많았다. 그래서 이 시대를 노예제 사회라 부른다. 그러나 고조선은 노비의 인구가 하호보다 적었으므로, 노예제 요소가 일부 있기는 하였지만, 고대 그리스와 같은 노예제 사회라고는 할 수 없을 것이다.
하호는 고대사회에서 노비를 제외하고는 가장 낮은 신분이었다. 이들은 귀족에게 종속되어 농사를 짓던 종속농민이었는데 다음의 예를 보면 고조선 사회는 신분에 따른 차별을 하지 않으려는 노력이 사회 전반에 깔려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한(韓) 사람들은 옷을 입고 모자를 쓰기를 좋아하는데, 하호(下戶)들도 일이 있어 군(郡)에 갈 적에 는 모두 옷과 모자를 빌려서 착용한다.
이 예는 고조선이 붕괴된 후의 한(韓)의 풍속을 말한 것이다. 하호가 군에 일이 있어 갈 적에는, 옷과 모자를 빌려서 착용하고 갔다는 것이다. 이들이 빌려 입은 옷은 이들보다 신분이 높은 사람들의 것이었을 것이다. 하호보다 신분이 높은 사람들이 착용하는 옷과 모자를 하호들이 빌려서 착용할 수 있었다면, 이것은 신분에 대한 차별이 매우 적었음을 알게 해주는 것이다.
한은 원래 단군조선의 거수국 이었으므로 단군조선에서는 이보다 훨씬 차별이 적었을 것이다. 이것은 홍익인간 이화세계의 이념이 사회주도 사상으로 작용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1)다.
ⅳ. 고조선의 경제
『삼국유사』에 기록된 바에 따르면 단군 왕검이 고조선을 건국하기 훨씬 전부터 농업을 매우 중요시했다. 환웅이 지상으로 내려올때 풍백, 우사, 운사를 데려왔는데 이는 농업국가에서 가장 중요한 기후조건이다. 이것은 환웅시대에 가장 중요한 일이 농사짓는 것이었음을 알게 해 준다.
고조선의 농업이 발달 할수록 조세제도가 확립되었다. 『시경』「한혁」편에는 고조선이 농토를 정리하여 세금을 매겼다는 기록이 있다. 또한 『맹자』에는 보다 구체적인 기록이 있는데 「고자(告子)」편에는 고조선에서는 수확의 20분의 1을 세금으로 징수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수확의 20분의 1은 매우 낮은 세율이라고 한다.
고조선에서 이렇게 낮은 세금을 거두어들이면서도 유지가 가능했던 것은 규모가 큰 사원이나 궁궐 · 능묘 등을 건조하지 않고 관직도 많이 설치하지 않으며 지배귀족이 검소한 생활을 하기 때문이라고 맹가(맹자)는 말하고 있다. 고조선에서는 발달된 농업을 바탕으로 하여 목축업도 성행하였다. 한편 고조선은 수공업도 발달 해 있었다. 고조선의 대표적인 수공업 제품은 역시 청동기와 철기였다. 그러나 청동기는 지배층의 독점물로서 농구로는 사용된 예가 드물기 때문에 이것들이 직접 서민들의 생활을 향상시켰을 것으로는 보기 어렵다. 대신 청동기로 칼과 무기, 공구를 만들어 사용하였으므로 청동기는 목기나 골기 · 각기 등을 가공하는데 이용되었다. 이러한 가공 공구의 출현은 그것이 비록 일반화되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이전 시대의 가공 기술에 그것이 추가됨으로써 수공업 발달에 큰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청동기를 사용하기 시작했다고 하는 것은 청동기의 출현이라는 의미에서 뿐만 아니라 그 사회의 전반적인 문화수준이 그 만큼 고도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런 농업과 수공업등의 발달은 상업의 발달을 가져왔다. 청동무기나 청동의기 등은 통치권력의 발달을 가져왔다. 청동무기나 청동의기 등은 통치권력의 유지를 위해 사용되었기 때문에 상품화될 수 없었다. 그러나 다른 잉여 생산품들은 그 일부가 상품화 되어 상업의 발달을 가져왔다. 고조선은 중국과 많은 무역을 했는데 고조선의 화살 · 돌화살촉을 중국인들이 매우 귀하게 여겼음은 『국어(國語)』라는 책의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고조선은 중국에 동물의 가죽도 수출했다. 『시경(詩經)』「한혁(韓奕)」편에는 고조선의 단군이 서주를 방문하면서 예물로 비휴(豼貅) 가죽 · 표범 가죽 · 말곰 가죽 등을 가지고 갔던 것으로 기록되어있다. 이러한 특수한 동물 가죽들은 고조선의 특산물이었고 중국인들이 좋아한 물품이었을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물품들이 중국에 수출될 수 있었다.
이러한 수출을 통하여 고조선은 막대한 외화를 보유한 국가가 될 수 있었다. 중국의 전국시대에 고조선과 국경을 접하고 있었던 연(燕)나라의 명도전과 포전 · 반량전등의 중국 화폐가 자강도 운송리 유역과 평안남도 청송로 동자구 유적등에서 많이 출토되었다. 이러한 출토량은 엄청난 것으로 고조선이 국제무역을 통해서 많은 외화를 벌어들였음을 알게 해준다.
ⅴ. 고조선의 풍속
기자가 고조선으로 망명했을 때, 당시 고조선의 풍속에 관한 내용이 실려있었다.
“고조선의 부인들은 행실이 단정하고 신의가 있으며, 음탕하지 않다.”2)
최치원의 난랑비문에는 고조선 사회윤리의 가장 기본이 되는 덕목 세 가지를 전한다.
첫째. 집안에 들어와서는 부모에 효도하고, 밖에 가서는 나라에 충성한다.
둘째. 처신을 하는데 일을 억지로 만들어 하지 않고, 행동을 하되 말을 앞세우지 않는다.
셋째. 선한 일을 받들어 행하고, 악한 일은 저지르지 않는다.
유가, 도가, 불가가 우리 나라에 들어오기 전에 우리 민족의 기본사상으로 이미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후에 유가, 도가, 불가가 그러한 사상을 가지고 우리 나라에 들어오자, 그것이 우리 민족의 정서에 맞았기 때문에 쉽게 수용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유, 불, 도교의 사상들의 원형을 외래적인 것이 아니다.3)
풍류도에는 유, 불, 선 삼교가 이미 다 포함되어 있다고 최치원은 전한다.
고조선에는 8조금법이 있었는데 그중 세 가지만 전해진다.
범금팔조 가운데 3개 조는 고조선의 법률이 아닌 낙랑조선의 법률을 반고가 정리한 것이다.4) ‘범금팔조’에 나오는 50만 금은 반고가 한 대의 화폐 가치로 환산한 것이고, 그 문장에는 반고의 생각이 작용하고 있음도 고려할 필요가 있겠다. 이병도는 3개조 가운데 50만의 벌금을 내야 된다는 조항은 8조 본래의 모습이 아니라 낙랑시대 중국법의 영향이라고 보았다. 또한 범금팔조 자체를 공동체 간의 또는 공동체 내의 관계를 규정하는 것으로 파악한 견해도 있는데 범금팔조는 노비제의 발전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적 규제라는 범주에서 고찰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고조선의 신분에서 밝혔듯이 고조선의 사회는 신분체제의 엄격함이 다른 나라보다 덜 하다. 뿐만 아니라 조세제도에서도 민에 대한 배려와 지도자층의 검소함은 범금팔조로 인해 귀족의 재산을 지키기에 적합한 것이며, 노예제 사회를 정당화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없다.
범금팔조의 내용은 당시 사람들에게 법으로써 규율을 강조하기 위함이었지, 그것이 얼마나 많은 사람들에게 적용되었고 또한 그 법률이 적용되었던 대상에 대해서는 나와있지 않다. 그러므로 고조선의 풍속을 살펴볼때 지배층이 자신들의 이익을 대변하기 위해 법을 만들고 집행하지는 않았다고 보여진다. 무리하게 노예제 사회를 운운할 필요성은 보여지지 않는다.
2. 고조선의 건국이념
ⅰ. 홍익인간의 이념
고조선에 대한 학계의 혼란에도 불구하고 고조선의 건국이념인 ‘홍익인간(弘益人間)’에 관한 해석만큼은 학계에서의 의견 일치를 보인다. 그것은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한다’라고 하는 해석으로 현재까지 아무런 이설이 없다. 이것은 우리의 교육법에도 명시되어 있고 교육이념역시 ‘홍익인간 이념’에 근거한다는 것을 분명히 밝히고 있다.
홍익인간이란 말은 원래 '홍익인간 이화세계'라는 말에서 나왔다. '홍익인간 이화세계'는 '널리 인간을 이롭게 하고, 이치로써 세상을 다스린다'는 뜻이다.
환웅이 땅으로 내려올 때 환인이 준 천부인에는 홍익인간 정신이 깃들여 있다.
천부인 중 하나인 거울은 태양을 가리키는데, 왕이 항상 거울에 자신을 비추어 반성하며 백성을 다스리라는 의미이다. 또 둥근 모양처럼 둥글고 어진 성품으로 백성을 다스리라는 의미도 담겨 있다.
칼은 힘의 근원으로 외적으로부터 백성을 지키는 데 써야 하는 것이다. 하지만 함부로 휘둘러서는 안되며 꼭 필요한 때만 써야 한다.
마지막 방울은 그 소리가 왕이 하는 말과 같다. 왕의 말이 천하에 울리는 소리인데 그 소리가 백성을 감동시킬 수 있는 훌륭한 소리여야 한다는 것이다.
환인은 자신이 이런 홍익인간 정신으로 하늘 세계를 다스리듯이 환웅 또한 땅에 내려가 홍익인간 정신으로 인간을 다스리기를 바란 것이다.
1) 홍익인간의 인(人)이란?
앞서 고조선의 사회에 대해 두루 살펴 보았다. 홍익인간사상은 고조선 사회에 건국이념이고 철학이다. 그렇기 때문에 홍익인간 이화세계는 개인의 이익만을 대변하기 위한 이념이 아니다. 5)
홍익인간은 인(人)이 아닌 인간(人間)이다. 나 하나의 개체로서의 존재가 아니다. 인간세를 말한다. 사람과 사람 사이, 곧 인연이라는 관계로 형성되는 세상이다. 이 인간의 세상을 이롭게 하겠다는 것이다. 또한 인간만을 위하는 것이 아니다. 하늘과 땅, 모든 자연과 ‘사이 ’좋게 지내는 자연관과 보편주의적 사랑이 담겨져 있다.
홍익은 하늘, 땅, 사람을 윤리적 배려와 고려의 대상으로 여기는 마음씨다. 윤리적이라는 것은 남이 원하는 대로 행하는 것이다. 남이 싫어하는 것을 하지 않는 마음이다.6) ‘역지사지(易地思之)’, ‘남의 입장에서 생각하는 마음가짐’이다. 상대의 슬픔과 아픔, 기쁨과 행복을 생각하는 것이 윤리적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홍익은 물질적으로 이롭다는 것만은 아니다. 가진 것이 없는 사람은 홍익할 길이 없다는 서운함도 든다. 하지만 ‘역지사지’하는 마음씨는 지위고하, 빈부를 떠나 할 수 있는 삶이다. 하늘과 땅, 사람 사이도 예외는 아니다. 홍익의 마음이 숱한 외침의 고통에도 남의 나라를 침략해 고통을 안겨주지 않은 것이 단군정신, 홍익인간 때문이다.
ⅱ. 단군 건국이념과 그 이어진 맥(脈)
고조선의 단군조는 2천여 년 동안 계속되었다. 근본이념은 홍익인간이라는 넓고 큰 뜻이고, 경천승조하는 보본사상이다. 따라서 충효사상은 실로 단군이 개국하기 이전의 신시시대로부터 이어받은 두드러진 것이다.
고조선의 개조(開祖) 제 1대 단군은 위의 사상을 이어 받고, 그 위에 제 1대 단군자신이 조종이 된 국선(國仙)의 집단적 수련, 실천의 사신전의(捨身全義)의 국풍, 즉 조선 고유의 현묘지도를 기반으로 하는 조의국선의 국풍이 부여의 구서와 삼한의 5계 (효, 충, 신, 용, 인)와 후일 고구려의 조의국선의 정신 및 다물(多勿)의 이념과 신라 화랑도의 세속5계로 이러져서 단군의 건국이념이 구현되어 내려왔다. 단재 신채호 이래로 단군이 제왕의 조상이된 한인(韓人)고유의 도(道)를 실천하는 집단의 선비를 중국 도교(道敎)의 신선과 구별하기 위하여 낭도(郎徒)또는 국선(國仙)이라고 부른다.
부여의 구서의 내용은 대체로 삼한의 5계와 화랑도의 세속오계의 내용을 종합한 것이었다.
원광의 화랑에 대한 세속오계 ① 사군이충(事君以忠) ② 사친이효(事親以孝), ③ 교우이신(交友以信), ④ 임전무퇴(臨戰無退), ⑤ 살생유택(殺生有擇)이라는 지도이념이다.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과 동천 임금과 명재상 을파소와 명장 을지문덕과 을밀선인과, 막리지 연개소문 등도 모두 단군 이례의 국선 정신의 해설 · 실천자였다.
단군 이래의 조의국선의 정신은 고구려의 다물이념에서도 잘 나타나고 있다. 다물이란 본래 고구려의 시조 고주몽의 연호(年號)인데, “회복”을 뜻하는 고구려의 정치이념을 다물이념이라고 한다.
고구려와 고려의 조의선인들과 신라의 화랑도 뿐만 아니라, 고구려의 광개토왕비가 보여주는 도(道)로써 다스리는 것과 중국 사기가 증명하는 삼한의 소도(蘇塗) 고속의 유지와 봉암사 지증대사 적조탑비가 말해주는 백제가 소도의식의 옛 습속을 버리지 않은 것, 신라 진흥왕 순수비가 보여주는 사해를 덮는 부드럽고 온화한 은덕, 그리고 독창적인 원효의 사상이 대표하는 호국불교와, 문무왕의 유언에 나타난 호국혼과 변법사상, 고려 이지백, 최항, 서희, 윤관 등의 민족정신 복고사상과, 고려 말과 조선시대에 신유한의 절의(節義) 의리파(義理派)가 비합법적 폭력집권자에 대해 죽음으로써 맞선 항쟁, 그리고 성리학 대가들의 위민 민본사상과, 예로부터 지금까지 한 수 당 몽고 청 일 등 허다한 외적에 끈질기게 항거한 국민정신의 그 어느 하나라도 단군 이래의 위대한 이념에 힘입지 아니함이 없는 것이다. 한족이 통일신라의 명백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도 조의국선의 다시 흥하게 된 것으로 화랑도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며, 발해대국의 꽃이 핀 것도 고구려의 조의국선의 정신을 계승했기 때문이고, 고려가 긴 세월에 걸쳐 강대국의 침략과 공격을 받으면서도 그 명맥을 보존할 수 있었던 것도 단군 개조를 받들고 단결하여 끈질기게 항쟁하였기 때문이며, 근대조선과 대한민국이 여러 환난 속에서도 살아남은 것도 단군 이래로 민족정신의 연백이 끊이지 않은 때문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여러 번 말한 바이지만 단군의 건국이념은 “홍인인간”이다. 글자 그대로 “널리 모든 사람을 이익되게 하는 것이다.” 더 넓고 더 클 수 없는 최대한의 이익이다. 전 인류 사회의 평화와 행복은 전 세계 인류의 영원한 이념이다. 그것은 “인격존엄”, “인본”, “위민”사상이다. 다스리는 자와 다스림을 받는 자, 개인과 국가가 하나(일체)가 되어 하늘을 공경하고 조상을 숭배하는 천인합일의 사상인 것이다. 이렇듯 폭넓고 광대한 이념은 처음부터 밝은 정치라는 정치이념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단군의 조상, 조상신의 환이 환하게 밝힌다는 의미로 “환”이라 한것과, 고구려의 시조는 태양이 비치어서 수태하였다하여 그 이름을 동명이라고 한 것과, 신라의 시조를 박혁거세라고 이름한 것(세상을 밝게 다스리는 것)도 그런 뜻이고, 태백산, 장백산, 백두산의 “백”과 배달민족이 즐겨서 입었던 흰 옷빛도 그러하고, 조선이라는 나라 이름도 신선한 아침해의 “밝음”을 뜻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환, 한이 모두 대를 의미하는데, 만, 몽어의 한, 간은 “한과 동음이요, 대와 같은 뜻이므로 상고시대에 한자의 한, 대, 고로 성씨를 번역한 것도 크다는 뜻과 밝다는 뜻이 있으면서 음이 같은 것을 택한것이다”라고 이병도 박사는 설명하고 있다.
우리의 조상들은 그 근본 이념을 실제로 드러내기 위하여 오랜 역사를 통해 자유와 평화를 실현하려고 모든 장애를 헤치면서 진퇴를 되풀이해 온 것이다. 긴 세월에 걸쳐 어떤 바탕 위에 어떤 외래의 사상들을 어떻게 비판하여 우리에게 알맞게 소화하여 자신의 사상을 더욱 깊게 하고 체계를 세워 조화시키면서 독창적인 사상과 특색있는 철학으로 발전시켜 그 내용을 풍부하게 해서 올바른 전통을 만들고, 이상사회를 실현하기 위해 어떻게 노력해왔는지를 알아보는 것이 우리의 과제이다. 우리에게 그만큼 폭넓고 고유한 철학과 사상적 기반(바탕)이 여러 천 년전부터 있었기 때문에 그 모든 것을 조화시킬 수 있었다는 것을 지적한 이는 일찍이 천여 년 전 <난랑비서>에 통일신라 말기 3교의 설을 섭렵한 당대 최고의 지식인이었던 최치원이다. 우리는 최치원에게서 우리의 신시시대와 고조선이래의 고유한 전통적 사상의 뿌리에 대한 암시를 받게 되었다. 최치원은 “나라에 현묘한 도가 있으니, 그 이름을 풍류라고 한다. 그 교를 창설한 연원을 선사에 상세히 실려있다. 그 실은 3교를 포함하여 많은 백성을 하나로 묶는 것이다. 이를테면 들어오면 집에서 효도하고 나가면 나라에 충성하는 것은 공자의 뜻과 같은 것이 요, 무위로 일을 처리하고 말없이 교를 행함은 노자의 종교의 도리와 같은 것이요, 모든 악한 일을 행하지 말고 모든 착한 일을 받들어 행하는 것은 석가의 교리와 같은 것이다.”라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신채호 선생은 선사(仙史)는 화랑의 연원사이니, 고대의 기록인 《선사》와 《화랑세기》는 멸종된 화랑의 역사이고, 화랑이 고구려의 조의선인 선비의 이어 내려온 갈래 이며, 단군 이래의 소도 무사에 연원 함이 선사에 기록 되었던 것이라고 하고 있다. 또 북애의 《규원사화》에 의하면 고대의 임금이 그 지위를 계승하면 먼저 하느님 및 단군을 섬겼다. 그 관직으로는 대선 · 국선 · 조의라는 것이 있었다고 한다.
이병도 박사는 “선사는 화랑의 역사로 김대문의 《화랑세기》를 이름한 것인지도 모르며, 이는 화랑도의 생활양식과 수양 방법이 유 · 불 · 선 3교와 공명하는 점이 있다는 것을 너무 과장하여 설명했기 때문에, 자칫 잘못하면 화랑도가 3교의 영향으로 성립된 것과 같이 오해하기 쉽다. 물론 화랑도의 정신이 후일 3교의 영향으로 일층 더 발전을 보게 된 것은 사실 인 듯하다”고 말하고 있다.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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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사이버의병 원문보기 글쓴이: 달콩사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