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5월 31일 경주박물관대학의 토요일 수업에서 특별한 만남의 기회가 있었다. 문화유산에 대한 뒤늦은 관심으로 모든 수업이 소중하고, 조상이 남긴 문화유산 어느 것 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이 없겠지만, 이날 수업에서 만난 백제금동대향로는 그 의미와 가치에서 실로 특별한 것이었다. 현 국립민속박물관장으로 재직 중인 신광섭 관장이 발굴 책임자로 있을 당시에 발견한 백제금동대향로는 무령왕릉이 후손에게 알져진 후로 그에 비견될만한 백제유산의 발굴이 없었던 터라 1993년 12월에 발굴된 백제금동대향로는 학계의 비상한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로부터 15년이 흐르고 발굴현장 책임자에게 듣는 출토에 얽힌 사연과 백제금동대향로에 대한 이야기는 박물관대학생들에게도 관심을 넘어서 경외심까지 들게 하기에 충분하였다.
경주박물관대학생들이 바쁘게 진행되는 경주 인근 유산답사 중간에 굳이 백제유산 답사 길에 오른 것도 백제금동대향로 때문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백제의 문화와 백제 장인의 숨결이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백제금동대향로는 그 가치도 이동이 가능한 문화유산 가운데에는 최고라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문화유산의 가치를 돈으로 따질 수는 없겠지만, 백제금동대향로가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다른 곳에 전시되기 위해 이동을 할 때는 보험금만도 400억 원에 이른다니 무지몽매한 후손들에게는 이러저러한 설명보다도 그 엄청난 보험금만으로도 그 가치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백제금동대향로가 출토된 부여 능산리 절터는 국립부여박물관에 의하여 조사되었으며 백제시대 절터로 사비도성의 외곽을 둘러싼 나성과 능산리고분관 사이에 형성된 협소한 계곡 내에 위치하고 있다. 절터는 일탑일금당식의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목탑은 금당과 함께 이중기단위에 세워졌으며, 목탑 터에서는 사리감이 발견되었다. 이 사리감에는 모두 20자의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건물터의 성격을 규명하는데 결정적인 자료가 되었다. 이 절터에는 공방 시설이 두 군데에서 발견되었는데 제 3,4 건물터이다. 이곳은 금속류, 칠기제품, 유리제품 등을 만들던 곳인데, 특히 제 3건물터의 중앙방 장방형 목관수조 안에서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견되었다. 사리감의 명문 내용으로 보아 이 절은 백제 왕실에서 발원한 기원사찰 또는 능사로서 567년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백제 멸망과 함께 폐허화 된 것으로 추측되는데, 백제금동대향로의 규모나 섬세한 제작기법으로 볼 때 그 당시로서도 굉장한 가치를 가졌던 향로로 누군가가 위기상황에서 훼손될것을 우려해 이 공방 목곽수조에 숨긴 후 묻은 것으로 추정된다.
발굴작업이 들어가기 전에 부여군은 이 곳에 주차장을 만들려 하였는데, 발굴단이 혹시 있을지 모를 유구(遺構·옛 건축물의 자취)를 확인하기 위해 시굴 조사를 했고 그 결과 유구뿐만 아니라 위대한 유산인 백제금동대향로까지 출토된 것이다. 하마터면 위대한 문화유산이 콘크리트 바닥에 묻힐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백제금동대향로를 기능적으로 보면, 봉래산 모양의 뚜껑 곳곳에 10개, 그리고 봉황의 턱 밑 가슴까지 이어지는 2개 등 총 12개의 구멍을 뚫어 놓아 향로 안에서 피어오른 향연기가 봉우리 곳곳을 감싸며 마침내 봉황의 가슴에서 솟아오르도록 되어 있어 신선세계를 표현하는 최고의 연출기술을 보이고 있으며, 용모양 받침과 연꽃모양의 몸체가 서로 분리돼 재를 버리고 또한 향을 새로 담기에 편리하게 돼 있어서 기능적인 면에서도 완벽하다고 할 수 있다.
이 향로는 중국 한나라에서 유행한 박산향로의 영향을 받은 듯 하지만, 중국과 달리 산들이 독립적이고 입체적이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창의성과 조형성이 뛰어나고 불교와 도교가 혼합된 종교와 사상적 복합성까지 보이고 있어 백제시대의 공예와 미술문화, 종교와 사상, 제조기술까지도 파악하게 해주는 귀중한 작품이다.
한편, 지난해 10월 부여 왕흥사지에서 출토된 사리용기가 일반에 공개됐는데, 그 가운데 청동제 사리 합이 6세기경 백제의 자체 기술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그 수준 또한 대단히 높다는 것을 고려할 때 출토 이후로 외국의 사학자들의 시기심으로, 중국에서 제작된 것을 수입했다는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됐던 백제금동대향로가 백제 장인들에 의해 제작된 것임을 새삼 확인시켜주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 찾아가는 길
경부고속도로 - 천안IC - 천안.논산고속도로 - 서논산IC - 4번국도 - 부여에 들어가서 군청방향으로 진행.
능산리고분군(백제왕릉원)은 정림사지박물관에서 정림사지 5층석탑을 답사한 후 찾아가면 좋다. 소요시간은 박물관에서 약 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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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금동대향로의 상단부에 장식된 봉황. 수컷은 봉(鳳), 암컷은 황(凰)이라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봉황으로 부르고 있다. 성인(聖人)의 탄생에 맞추어 세상에 나타나는 새로 알려져 있다. 향로의 봉황은 비상하려는 듯 활짝 펼친 날개와 긴 꼬리, 벼슬, 부리, 깃털 등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매서운 눈매가 근엄한 느낌까지 준다. 턱 아래에는 작은 여의주를 끼고 있으며, 이 여의주 바로 아래쪽에는 2개의 연기 구멍이 가로로 나란히 뚫려 있다.
▲백제금동대향로의 뚜껑에는 다섯 악사를 비롯해 상상의 동물과 현실세계에 실재하는 호랑이, 코끼리, 원숭이 등 42마리의 동물과 17명의 인물이 74곳의 봉우리와 그 사이사이에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다. 이밖에도 6종류의 식물, 20군데의 바위, 산 중턱을 가르며 난 길, 산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 입체적으로 돌출돼 낙하하는 폭포 등도 보인다. 이러한 다양한 형태의 인물과 짐승들은 거의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진행되는 고대 스토리 전개의 구성원리를 따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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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12월 충남 부여 능산리절터에서 백제금동대향로가 출토될 당시의 모습. 이 사진은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절의 공방으로 추정되는 장소의 웅덩이에서 발견됐는데, 현 국립민속박물관장으로 재직중인 신광섭 관장이 능산리절터 발굴 책임자로 있으면서 12월 엄동설한의 추위도 잊은채 향로를 품에 안고 옆으로 굴러서 웅덩이에서 꺼냈다고 한다. /국립부여박물관 전시사진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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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동감 넘치는 용이 받치고 있는 백제금동대향로의 몸체. 반원형의 대접 모양을 한 몸체는 3단의 연꽃잎으로 구성되어있다. 층을 이룬 연꽃잎은 윗단이 가장 폭이 넓고 아래로 가면서 점차 줄어드는데, 맨 아랫단의 연꽃잎에는 2줄의 음각선이 복엽(複葉)으로 묘사되었다. 윗단과 그 아랫단 연꽃잎 외면 및 윗단의 연꽃잎 사이의 여백에는 27마리(먹이로 잡혀 먹히는 두 마리까지 포함)의 짐승과 2명의 사람이 돋을새김 되어 있다. 각 연꽃잎은 그 끝이 살짝 반전되었으며 잎의 끝부분을 사선문으로 음각하여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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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박물관대학생들이 바쁘게 진행되는 경주 인근 유산답사 중간에 굳이 백제유산 답사 길에 오른 것도 백제금동대향로 때문이라해도 과언이 아니다. 백제의 문화와 백제 장인의 숨결이 생생하게 살아 숨 쉬는 백제금동대향로는 그 가치도 이동이 가능한 문화유산 가운데에는 최고라해도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문화유산의 가치를 돈으로 따질 수는 없겠지만, 백제금동대향로가 국립부여박물관에서 다른 곳에 전시되기 위해 이동을 할 때는 보험금만도 400억 원에 이른다니 무지몽매한 후손들에게는 이러저러한 설명보다도 그 엄청난 보험금만으로도 그 가치를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백제금동대향로가 출토된 부여 능산리 절터는 국립부여박물관에 의하여 조사되었으며 백제시대 절터로 사비도성의 외곽을 둘러싼 나성과 능산리고분관 사이에 형성된 협소한 계곡 내에 위치하고 있다. 절터는 일탑일금당식의 가람배치를 하고 있다. 목탑은 금당과 함께 이중기단위에 세워졌으며, 목탑 터에서는 사리감이 발견되었다. 이 사리감에는 모두 20자의 글씨가 새겨져 있는데, 건물터의 성격을 규명하는데 결정적인 자료가 되었다. 이 절터에는 공방 시설이 두 군데에서 발견되었는데 제 3,4 건물터이다. 이곳은 금속류, 칠기제품, 유리제품 등을 만들던 곳인데, 특히 제 3건물터의 중앙방 장방형 목관수조 안에서 백제금동대향로가 발견되었다. 사리감의 명문 내용으로 보아 이 절은 백제 왕실에서 발원한 기원사찰 또는 능사로서 567년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백제 멸망과 함께 폐허화 된 것으로 추측되는데, 백제금동대향로의 규모나 섬세한 제작기법으로 볼 때 그 당시로서도 굉장한 가치를 가졌던 향로로 누군가가 위기상황에서 훼손될것을 우려해 이 공방 목곽수조에 숨긴 후 묻은 것으로 추정된다.
발굴작업이 들어가기 전에 부여군은 이 곳에 주차장을 만들려 하였는데, 발굴단이 혹시 있을지 모를 유구(遺構·옛 건축물의 자취)를 확인하기 위해 시굴 조사를 했고 그 결과 유구뿐만 아니라 위대한 유산인 백제금동대향로까지 출토된 것이다. 하마터면 위대한 문화유산이 콘크리트 바닥에 묻힐 뻔한 아찔한 순간이었다.
백제금동대향로를 기능적으로 보면, 봉래산 모양의 뚜껑 곳곳에 10개, 그리고 봉황의 턱 밑 가슴까지 이어지는 2개 등 총 12개의 구멍을 뚫어 놓아 향로 안에서 피어오른 향연기가 봉우리 곳곳을 감싸며 마침내 봉황의 가슴에서 솟아오르도록 되어 있어 신선세계를 표현하는 최고의 연출기술을 보이고 있으며, 용모양 받침과 연꽃모양의 몸체가 서로 분리돼 재를 버리고 또한 향을 새로 담기에 편리하게 돼 있어서 기능적인 면에서도 완벽하다고 할 수 있다.
이 향로는 중국 한나라에서 유행한 박산향로의 영향을 받은 듯 하지만, 중국과 달리 산들이 독립적이고 입체적이며 사실적으로 표현되었다. 창의성과 조형성이 뛰어나고 불교와 도교가 혼합된 종교와 사상적 복합성까지 보이고 있어 백제시대의 공예와 미술문화, 종교와 사상, 제조기술까지도 파악하게 해주는 귀중한 작품이다.
한편, 지난해 10월 부여 왕흥사지에서 출토된 사리용기가 일반에 공개됐는데, 그 가운데 청동제 사리 합이 6세기경 백제의 자체 기술로 제작된 것으로 추정되고, 그 수준 또한 대단히 높다는 것을 고려할 때 출토 이후로 외국의 사학자들의 시기심으로, 중국에서 제작된 것을 수입했다는 의혹이 끊임없이 제기됐던 백제금동대향로가 백제 장인들에 의해 제작된 것임을 새삼 확인시켜주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이용선기자 photokid@kbmaeil.com
※ 찾아가는 길
경부고속도로 - 천안IC - 천안.논산고속도로 - 서논산IC - 4번국도 - 부여에 들어가서 군청방향으로 진행.
능산리고분군(백제왕릉원)은 정림사지박물관에서 정림사지 5층석탑을 답사한 후 찾아가면 좋다. 소요시간은 박물관에서 약 1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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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금동대향로의 상단부에 장식된 봉황. 수컷은 봉(鳳), 암컷은 황(凰)이라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봉황으로 부르고 있다. 성인(聖人)의 탄생에 맞추어 세상에 나타나는 새로 알려져 있다. 향로의 봉황은 비상하려는 듯 활짝 펼친 날개와 긴 꼬리, 벼슬, 부리, 깃털 등이 사실적으로 표현되어 있으며, 매서운 눈매가 근엄한 느낌까지 준다. 턱 아래에는 작은 여의주를 끼고 있으며, 이 여의주 바로 아래쪽에는 2개의 연기 구멍이 가로로 나란히 뚫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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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금동대향로의 뚜껑에는 다섯 악사를 비롯해 상상의 동물과 현실세계에 실재하는 호랑이, 코끼리, 원숭이 등 42마리의 동물과 17명의 인물이 74곳의 봉우리와 그 사이사이에 돋을새김으로 새겨져 있다. 이밖에도 6종류의 식물, 20군데의 바위, 산 중턱을 가르며 난 길, 산 사이로 흐르는 시냇물, 입체적으로 돌출돼 낙하하는 폭포 등도 보인다. 이러한 다양한 형태의 인물과 짐승들은 거의가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진행되는 고대 스토리 전개의 구성원리를 따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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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3년 12월 충남 부여 능산리절터에서 백제금동대향로가 출토될 당시의 모습. 이 사진은 현재 국립부여박물관에 전시돼 있다. 절의 공방으로 추정되는 장소의 웅덩이에서 발견됐는데, 현 국립민속박물관장으로 재직중인 신광섭 관장이 능산리절터 발굴 책임자로 있으면서 12월 엄동설한의 추위도 잊은채 향로를 품에 안고 옆으로 굴러서 웅덩이에서 꺼냈다고 한다. /국립부여박물관 전시사진 촬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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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동감 넘치는 용이 받치고 있는 백제금동대향로의 몸체. 반원형의 대접 모양을 한 몸체는 3단의 연꽃잎으로 구성되어있다. 층을 이룬 연꽃잎은 윗단이 가장 폭이 넓고 아래로 가면서 점차 줄어드는데, 맨 아랫단의 연꽃잎에는 2줄의 음각선이 복엽(複葉)으로 묘사되었다. 윗단과 그 아랫단 연꽃잎 외면 및 윗단의 연꽃잎 사이의 여백에는 27마리(먹이로 잡혀 먹히는 두 마리까지 포함)의 짐승과 2명의 사람이 돋을새김 되어 있다. 각 연꽃잎은 그 끝이 살짝 반전되었으며 잎의 끝부분을 사선문으로 음각하여 사실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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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금동대향로의 몸체를 받치고 있는 받침으로 제작된 용. 한쪽 발을 치켜 들고 있는 모습이며, 나머지 세 다리와 꼬리로 둥근 원을 형성하여 안정되게 만들었다. 승천하는 듯한 역동적인 자세로 굴곡진 몸체의 뒤와 그 곳에서 뻗어 나온 구름 모양의 갈기가 조각되어 있다.
경북매일신문 2008-08-08 문화유산답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