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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항주에서 절강대학 2학년을 마치고 2009년 8월 12일날 신병으로 입대하는 아들애때문에 한국에 오랫만에 가게 되었다.
평소에 따뜻한 말한마디 해주지 않는 성격인 나로서는 막상 군대 간다고 하니마음이 그래도 짠하다.
한국에 갈까말까 망설이다가 그전날 결정을 해서 8월 10일날 한국에 가게 되었다.
군에 입대하는 아들놈은 나한테 아빠! 어디 아는 빽없어?
내가 이놈아 ! 빽은 무슨빽, 가서 빡빡기고 와라 햇다. 요즘은 군대가 옛날 같지 않아서 편하다고 한다.
하지만 우리 기준으로는 편하다고 하지만 요즘 크는 애들은 그래도 힘이 들고 부담이 가는가 보다.
가기전 항주에서 아는 친구들하고 술한잔 하는데 어떤 친구가 말한다. 군에 있을때 아버지가 한번도 면회를 오지 않았던게
나이를 먹어서도 생각이 나고 조금한 섭섭한 생각이 잇다고 한다.
아들애 한테 머퉁이(표준말이 맞는지 모르겟다)만하고 살가운 이야기를 잘하지 않은 성격이기 때문에 군에 가는데 한번
바래다 주었으면 해서 한국에 귀국을 하게 되엇다.
8월12일날 춘천 102보충대 에 가니 옛날에는 애들만 훈련소 정문에서 들여 보내놓고 나왔는데
요즘은 같이 들어가서 약 1시간 30분동안 같이 부모님들 그리고 지인들이 같이 강당에서 입소식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입소식이라는것이 그렇잖아도 아들들과 헤어져야 하는 마당에 가슴이 뭉클한데 더욱 가슴을 아프게 만든다.
한참 입소식이 진행되는데 아들애가 안보이는것이다. 딸아이한테 " 관엽(아들애 이름)이 어디 있냐?"
"아빠 관엽이 저 뒤에서 울고 잇어요" 한다. 누구보다도 강하게 키운다고 키웠는데 지애비를 닮지 않아서
약해 빠져서 울고 있다.
심양에서 고등학교 1학년 다닐때 중국에 온지 약 6개월정도 되었을때다. 그당시 나는 항주에 잇엇고 ,,,,
심양에서 항주로 전학하고자 할때 아들애 한테 기차타고 항주로 오라고 했다. 기차로 36시간 걸린다.
꼬박 2일밤을 기차에서 지내야 한다.
아들애가 하는말 " 우리 아빠 맞아?" 한다. 중국말도 제대로 못하는데 어떻게 혼자 항주까지 가냐는 것이다.
그래서 "이놈아! 첫번이 어렵지 2번째는 쉽다. 너 올수 잇다, 걱정하지 말고 와라. 항주 기차역에 내가 마중나가마"
다음다음날 아침에 항주역에서 기다리는데 아들애가 안보이는것이다. 슬그머니 걱정이 된다. 애 어디로 잘못간것 아니야?
중국말만 잘하면 걱정을 하지 않겠는데 이러다 잘못되는것 아니야"
그러던차에 나는 보지 못했는데 "아빠" 하면서 달려오는것을 보니 안도의 숨이 쉬어진다.
6개월동안 머리를 길러서 내가 알아보지 못했던것이다.
"거봐. 할수 잇잖아" 지금은 중국이 아니라 어디를 가더래도 혼자 다닐수 있는 자신감이 생겼다.
그러던 애가 벌써 군대를 간다고 하니.... .
군대에 보내놓고 2일후에 세섭이 한테 전화를 햇더니 한번 만나서 소주한잔 하자고 한다. 그럼 좋지 하면서 14일날 교대역
보쌈집에서 저녁에 만나서 소주 한잔을 하였다
갑작스러운 만남이라서 많은 3-6반 친구들이 모이지는 않앗지만 오랫만에 가져보는 즐거운 시간이었다.
세섭이하고 근식이는 마시라는 소주는 마시지 않고 무슨 심각한 이야기? 표정들이 진지하다.
세섭이는 항상 친화력이 있고 대인관계가 좋고 말도 부드럽게 잘하는 성격이라서 사관학교 출신같지 않다,
담배를 끊어서 그런지 살이 많이 붙어잇다.
그리고 근식이는 20년전이나 지금이나 그냥 그대로의 보기좋은 모습을을 가지고 있다.
항상모임이 있으면 참석하는사회성이 강하고 분위기 메이커이며 가정에 충실함을 이친구를 볼때마다 느낄수 있다.
예전에 3-6회 하면서 산이야 들이야 혹은 스키장 혹은 바닷가로 많이들 가족등반으로 놀러다닌 기억이 새롭다.
오랫만에 만나는 얼굴들이라서 술도 술술술 잘도 넘어간다.
재경 24회 동창회장인 종윤이는 무엇을 그리 입에 넣었는지 볼때기가 터질려고 한다.
항상 빈틈없고 정확한 그런 생활이 지금현재의 종윤이 위치를 만들엇는지 모른다.
해병대를 제대했고 항상 논리적인 화술은 상대방을 충분히 설득하고도 남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카리스마도 있고 또 리더쉽도 있는 종윤이 담배좀 줄이시지? 그리고 옆에 잇는 규석이도 살이 좀 많이 붙어 잇다,
규석이야 원래 고등학교 다닐때부터 담배를 피어서 별명이"맴생이"다. 규석이은 전북 김제시 종덕리로서 우리 동네 들판 맞은편 동네다. 인정이 넘치고 꾸밈이 없고 순박한 친구다.
지금현재 재경 동창회 총무를 역임하고 잇서 종윤이하고 규석이가 동창회를 위해서 많은 고생을 하고 잇다.
규석이의 요즘 신세대 같은 제스처!!! 규석이 너 아냐? 3학년때 점심시간,
내가 교실뒤에 있는 거울로 이리여고로 했빛을 받아서 보낼때 내가 안된다고 햇지?
너도 한번 해보자고 해서 주었더니
갑자기 오종록 교감선생님이 와서 니 싸대기 때리던 기억,,
이리여고에서 우리 학교로 신고가 들어왔나보다.
그때 니 싸대기 맞을때 내가 했다고 나서지 못하고 저쪽에서 웃기만 했을까?
지금도 항상 너한테 미안한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까 내가 그랬잖아. 하지말라고 했잖아....
지금와서 밝히지만 그때 나는 이리여고생한테 짝사랑의 열병을 앓고 잇을때거든.
미안하다 규석아!! 잊어버리거라 잉?
세섭이 !!! 종윤이!!! 근식이!!! 규석이!!! 같이 좋은 시간을 할애 해주어서 고맙다.
마침 그주에 김제에 계시는 어머님 77회 생신이라서 고향집에 내려가게 되었다;
십수년전에 아버님께서 돌아가시고 혼자 시골에 계시는것을 보니 참으로 안타깝다.
혼자 계시니 외롭기도 하시겠지만 있는 논이라서 혹은 밭이라서 아직도 농사일을 하고 계시니
자식된 입장으로서는 마음이 아프다.
다행스럽게도 아직도 비교적 건강하시니 나한테는 큰 복이다.
성격상 전화도 자주 드리지 못하고 마음만 잇지 실행이 잘안되니 이고질병을 어떻게 고쳐야만 할른지...
중국에 있다는 이유로 오랫만에 고행집을 방문햇다. 그래서 구글어쓰를 당겨보니 시골 우리집이 나타난다.
상공 1000미터에서 바라본 우리 시골동네이고 화살표로 표시된곳이 내가살던 시골집이다.
여기저기 불X 친구들하고 뛰놀던 골목길들이 생생하게 자세히도 나타나 잇다.
구글어쓰에서 화살표로 꾹 찍은 시골 고향 우리집이다. 벌써 30년정도 된집이다.
처음에는 초가집이었다가 새마을 운동때 스레트 집으로 지붕개량 되었다가 80년에 신축을 햇다.
옛날같으면 자동차가 마을 입구에 들어서자마자 개짖는소리,닭들이 이리저리 날개를 파닥이며 왓다갔다 하고
어린아이들이 정신없이 뛰노는 그런모습은 보이지 않고 적막감마저 감돈다.
우리 농촌 마을이 왜이리 되었는지 산업화가 되면서 어쩔수 없는 현상이라 하지만 참으로 아쉽다.
지금 우리 마을에도 제일 나이적은 사람이 65세정도이니
앞으로 10년후면 아무도 살지 않는 마을이 되지 않을까 한다.
지붕넘어로 보이는 저 뒷산은 우리들의 놀이터요,자연 학습장이며 꿈을 키우던 곳인데....
저녁만 먹으면 그당시는 텔레비젼도 없고 라디오(스피커는 잇었음,
옆동네에서 전선으로 연결해서 중계하던 시스템. 그런것을 스피카 라고 했음)도 없던 시절이라서 뒷산에 가서
숨박꼭질도 하고 학교 갔다 와서는 풀밭에 누어서 하늘을 보면서 파란하늘에 비행운을 끌고가는 비행기를 보면서
장차 우주 비행사가 반드시 될거다 라는 꿈도 키우던 그런곳이 잡초만 무성한 곳이 되어버렸다.
모종(모정)만 혼자 덩그라니 우리동네를 지키고 그리고 들판을 지키고 잇다.
항상 이맘때쯤이면 할아버지부터 아버지 그리고 애들까지 북적이던 모정이다,
모정도 나이별로 자리가 잇어서 할아버지들이 하얀 모시적삼을 입으시고 또 아버지뻘 되는 아저씨들이 논일을 마치시고
점심때는 항상 여기에서 낮잠을 주무시던 모습들.
날이 더우니까 삼베판쓰 혹은 모시 판쓰를 입고 아무것도 모르시고 주무시는 아저씨들 다리사이로 보이는
그런것들을 보고 키득키득 하고 웃던 날들의 기억이 정말 새롭다.
아저씨들이 낮잠을 주무시고 다시 논일을 나가고 나면은 나이드신 할아버지 몇분이서 긴곰밤대로
""이놈들 시끄럽다"" 하던 그분들이 하나도 보이시지 않고 어찌된거야....
여름방학때는 아침일찍 샛별을 보면서 졸린눈 비벼가면서 빗자루를 질질 끌고 오던 기억들.
일단 모정에서 모여서 인원점검하고 동네 골목마다 청소를 하고 또 청소가 끝나면 릴레이 달리기도 하고
그런 모습들이 아스라하게 기억을 스친다.
저모정도 머리모양을 몇번이나 고쳤다. 초가지붕부터 해서 스레트로 그리고 나서
현재 모습으로 저기나무로 된 받침대 등등
모든것은 우리들의 침이 발라져서 반짝반짝 빛나고 있었는데. 나무기둥 올라간다고 손바닥에
그리고 발바닥에 침을 발라서 어지간하게도 못ㄹ게 굴엇던 기억들이 잇다, 우리들의 전설이다.
우리동네로 들어가는 신작로, 신작로 하면 그냥 포장안된 흙길이어야만 운치가 잇는데 이길을 따라서
초등학교 때 검은 고무신신고 열심히 학교를 다녔던 기억이 잇다, 지금은도로도 넓어지고 포장이 돼서
조금은 삭막한 느낌이 들어간다.
양쪽으로는 보리밭이 있어서 문둥이 나온다고 무서워서 여럿이 모여서 하교를 했던 기억들도 잇고
그러다가 조마조마 할때 어떤 친구가 조그만 소리로 저게 뭐야?
하면서 보리밭을 가르키면 걸음아 날 살려라고 뛰던 기억들도 새롭다.
그러다 보면 어깨에 매달린 책보(책가방에서는 변토(양은 도시락) 안에 반찬통이 딸가닥 딸가닥 하는 통에
더 죽자살자 달리는 일들..........
가을에는 길가에 허리긴 코스모스가 하늘하늘 인사를 하고 꼿을 따서 사이사이 꽃칲을 따내고 나서 하늘로 던지면
파란 가을하늘을 배경으로 코스모스 꽃들이 프로펠러 처럼 하늘에서 떨어지던 가을의 추억들
또 겨울에는 김제 부안 지방은 눈이 많이 온다 눈이 많이 온날 요소비료부대를
지푸라기로 묶어서 설매 타던 바로 그신작로다,
그런 일들이 이 신작로에 아무도 모르게 살아 잇는것이다. 그런 신작로가 이런 모슴으로 변하리라고는 생각지 못햇는데.....
저멀리 들판 넘어 이스라히 보이는 산이 김제 원평에 잇는 "구성산" 이다. 그뒤로 금산사가 있고 바로 뒤로는
모악산이 잇다. 모악산 넘어로는 전주시가 있고,....
김제(金堤)는 글 자 그대로 금제방이다. 옛날부터 모악산 저줄기부터 사금들이 많이 나왓다. 나는 금밭(김제) 에서
사는데 너는 어디 살아? 이런 말들이 잇다. 또 원평부근에는 "금구(金口)" 라고 잇는데 금이 나오기 시작하는
입구라는 말도 있고, 우리 중학교 때만 해도 여기저기서 금캐는 곳이 많이 잇었다.
농지정리가 끝나고 난 이후에는 수로 둑이 이런 모습으로 변했다. 시멘트 포장이 돼 잇어서 트럭이 다니고
트랙터가 다니고 승용차가 다니고 편리는 해졌지만 이전의 논길, 수로길 이리저리 꼬부랑길처럼 낭만도 적고
어린날들의 추억을 만들기에는 무뭔가 부족하다.
모내기 철이면 엄마, 아빠 모내기 가시면 점심 얻어먹으러 간다고 어린 동생들 하고 같이 숟가락 하나씩 들고
마른새우 넣은 아욱국에 완두콩밥에 먹는 그맛은 누가 알수있으며 어떻게 표현할수가 잇을건가?
동네 사람 전체가 거기에다가 아이들까지 한바탕 잔치가 아닐수 아닐수 없다 .
점심을 다 먹나서는 가지고 간 숟가락에 갈치토막 하나씩 엊어주던 그런 시골인심 과 그런 순수한 정들을
어찌 잊을수가 잇으리요.
그런 모든 옛날의 모습들과 그시대에 보이던 사람들이 어디를 가셨는지 보이지가 않는구나.
7월 8월의 따사한 햇살을 밭고 논에 있는 벼들은 이제 모가지를 길게 빼놓고 새상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이제 9월이
오고 시월이 되면 누런 황금색들판으로 변할것이다.
이번에 가보니 올여름에 많은 비가 내렸다고는 하지만 비교적 풍년의 조짐이 보인다.
하지만 풍년이 들어도 농부의 마음은 아프기만 하다.
1년내내 죽자살자 고생해서 농사를 지어도 인건비도 빠지지 않는다.
하지만 잇는 전답을 넣고 그냥 쳐다만 볼수도 없는 일이다,
마을 뒤에는 아담한 뒷산이 잇고 앞에는 그 넓은 들판이 잇는 약 45호정도 되는 정겨운 마을이엇다.
하지만 산업화가 진행되면서 서울로... 도시로 빠져 나가는 통에 이제는 이런 폐가가 여기 저기 널려 잇고
호박넝쿨 혹은 담쟁이 넝쿨이 뒤엉켜 널려 있는 현재의 모습이다.
어머님 생신이라고 마누라하고 어머님께서 음식을 장만하신다.
내가 중국에 잇어서 동생들은 미리 몇칠을 앞당겨서 어머님 생신을 맞이해서 모두 왔다갓다,
나만 정확한 어머님 생신일에 집사람하고 둘이소 고향집을 방문하게 되엇다,
사진을 찍으면서 어머님의 뒷 모습을 보니 마음이 무거워진다,
그리고 결혼한지 25년 됐는데 집사람도 이제는 나 듣기 좋으라고 하는소리인지는 모르지만 친정보다도
시집이 마음이 더 편하다고 한다.
갓 시집올때는 어쩌고 저쩌고 비교적 사이는 좋앗지만 그렇다 해도 고부간의 그런 야릇한 감정은 있는데
지금은 친딸처럼 저리 잘지내니 고맙기만 하다.
시골 고향 마을이 온통 록색으로 뒤덮여 잇어서 보기 좋은 한폭의 풍경화 같다.
다만 아쉬운것은 그 옛날처럼 아기들 웃음소리 울음소리, 강아지들이 뛰노는소리 ,
여기저기 푸다닥거리며 뛰어노는 닭들, 그리고 움메 하고 울어대는 송아지들의 소리들이 있으면 더욱이나 좋으련만
다시는 이런 모습들을 볼수 없을것 같아서 마음이 무겁다.
이런 모습들이 영원히 오지 않고 10년후 혹은 20년후면 완전히 사라져갈 운명에 놓인 농촌 모습들이
비단 우리 시골마을의 경우만 아닐것이다.
사람은 흙에서 태어나서 흙으로 돌아간다고 한다.언제인가는 내가 태어나고 자란 고향마을에 돌아오고 싶은데
같이 뛰놀던 친구들도 같이 와서 그때 그시절처럼 같이 살수는 없을까?
여기저기 흩어진 불X 친구들!!! 현재는 주어진 환경에 열심히들 잘살고 건강해서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거든
모두 고향으로 돌아 와서 예전 그때처럼 한번 살아볼수가 없을까?
모두 행복하고 건강하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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