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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39 강 - 懺悔品- 2
衆이 胡跪어늘 師- 曰, 一은 戒香이니 卽自心中에 無非, 無惡, 無嫉妬, 無貪嗔, 無劫害가 名戒香이요,
二는 定香이니 卽覩諸善惡境相이라도 自心不亂함이 名定香이요,
三은 慧香이니 自心이 無碍하야 常以智慧로 觀照自性하야 不造諸惡하며 雖修衆善이라도 心不執着하고 敬上念下하며 矜恤孤貧함이 名慧香이요,
四는 解脫香이니 卽自心에 無所攀緣하야 不思善不思惡하야 自在無碍함이 名解脫香이요,
五는 解脫知見香이니 自心에 旣無所攀緣善惡하되 不可沉空守寂하고 卽修廣學多聞하야 識自本心하며 達諸佛理하야 和光接物하되 無我無人하야 直至菩提의 眞性不易함이 名解脫知見香이니라
善知識아 此香은 各自內薰이요 莫向外覓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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衆(중)이 胡跪(호궤)어늘→ 큰스님이 그렇게 하니까 대중들이 호궤하고 떡 일어섰다 이것이지요. 그런데 솔직하게 우리나라 법당에서 호궤하기는 아주 어려워요. 중국법당에서 호궤하기는 너무 쉽습니다.
중국법당에 가면 동그랗게 높이가 요정도 되게 방석을 만들어 놨어요.
나무를 이렇게 하고 그 위에다 동그란 방석을 딱 얹어놨어요. (바닥은 전부 박스를 깔아 놨거든요.) 그러면 신을 신은 채 무릎만 거기다 딱 대요.
조금만 구부리면 무릎이 거기에 딱 닿습니다. 그래 가지고 절을 하는데 절하기도 쉬워요. 중국식 절은... 그렇게 하니까 사실은 우리나라에서 하는 호궤하고 영 다르고, 아주 쉽습니다. 우리는 땅바닥에서 호궤하면 아주 힘이 드는데 중국식은 선 채로 무릎댈 자리가 요만치 높은데 거기다 살짝 구부려서 무릎만 딱 대 버리니까 쉬워요. 나중에 중국 가시거든 중국법당에가 보시면 기억나실 겁니다. 그런데 예불이 무려 두 시간 합니다.
아~ 혼났어요. 혼났어 저는...
예불을 하는데 무려 두 시간을 그렇게 해요. 우리는 두 시간 안 걸리지 않습니까? 뭐 종치고 뭣하고 할 때 앉아서 참선 실컷 하고, 정작 예불할 때 지심귀명례하고 발원문까지 다 하고나봐야 30분박에 안 걸린다고요.
2, 30분 걸리는데, 거기는 胡跪하기는 쉬우나 시간이 그렇게 걸리니까 또 그만치 힘이 듭니다. 어쨌든 대중들이 다 호궤하고 꿇어앉았어요.
꿇어앉을 궤자입니다.
師 曰(사왈)→ 스님이 말씀 하시기를
一은 戒香(계향)이다→ 계의 향이다. 왜 香자를 붙였느냐?
戒(계) · 定(정) · 慧(혜) · 解脫(해탈) · 解脫知見(해탈지견). 이것이 우리 예불에도 있는 말이지요. 제일 서두에 있는 것인데, 이것이 부처님의 모든 정신이 그 五分法身香(오분법신향)에 다 들어있습니다. 오분법신향속에.
그 다섯 개의 낱말 속에 불교의 모든 것이 사실은 다 들어있어요.
그래서 예불할 때도 그 위에다 올려놓고, 그리고 나서 至心歸命禮(지심귀명례) 들어가지 않습니까? 戒香· 定香 · 慧香 · 解脫香 · 解脫知見香.
그렇게 하고 그 다음에 지심귀명례 들어가는데, 그 다섯 마디가 사실은 불교의 모든 것입니다. 그것을 몸에 배도록. 또 상기 하도록 자꾸 아침저녁으로 읊조리는 걸로 예불을 만들어 놨지요.
그래 香이라고 붙인 것은, 향은 세상에서 또 옛날에는 향이 어떤 보물보다도 값진 것이었고, 아주 소중한 것이고, 또 비싼 것이었고, 그랬습니다. 지금도 역시 향은 비싼 것이지요.
화장품 중에 항수가 제일 비싸지요? 그렇고 또 음식도 마찬가지입니다.
음식도 그렇고 술도 그렇고, 꽃도 그렇고 향기가 좋아야 그것이 좋은 음식이고 좋은 꽃이고 하듯이, 그래서 그런 여러 가지 의미에서 이것은 불교의 아주 “아름다운 향기와 같은 것이다.” “불교의 꽃이다.”라고 하는 말보다 “계화. 정화. 혜화. 해탈화. 해탈지견화.” 라고 하는 말보다는,
우리말은 “불교의 꽃이다.” 이렇게 말하면 근사한 표현이지만, “불교의 향기다.”라고 이렇게 표현하고 있어요. “계. 정. 혜. 해탈향. 해탈지견향.”이요.
우리가 지금생각 하는 것하고, 그 당시 생각하는 것하고 그만치 香에 대한 관렴이 달라서 그런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예불할 때 꽂는 향도 이 의의입니다. 오분향의 향이예요. 향 한 개피를 꽂으므로 해서 오분향을 상기하고, 또 오분향을 상기해서 오분향을 실천하자고 하는 것이지, 그 외에 다른 것은 아닙니다. 뭐 그리 냄새가 많이 나서 냄새를 제거 한다고 향을 꽂는 것도 아니고요. 부처님 앞에 향 꽂는다고 그것이 무슨 인사도 아니고요.
그것이 공덕이 될 리도 없어요. 요컨대 그 향을 통해서, 물질적인 향을 통해서 오분법신향을 몸에 익히고, 또 그것을 실천하자고 하는 그 뜻입니다.
그 향 자꾸 많이 꽂을 필요 없어요. 그것 자꾸 연기가 나서 공기만 오염되고 안에 있는 사람들, 비염 있는 사람들 재채기만 나지 좋은 것 없어요.
향기는 하나만 꽂았을 때 향기가 좋지, 둘 이상 꽂으면 그 때부터는 향기가 그냥 안 좋아요. 독해요. 향은 그렇고 어쨌든 戒香이다. 계향이란 뭐냐?
戒香하면 우리가 일반적으로 뭐지요?
먼저 우리가 보통 상식적인 불교에서는 뭐지요?
계라고 하는 것은 해야 할 것과 하지 말아야할 것을 분명히 분별해서 우리가 그것을 지켜 나가야 하는데, 기본적으로 5계가 있고 10계가 있고, 8계가 있고 또 48계가 있고, 10중대계 48계 250계 348계, 이렇게 지켜야할 사항들, 이런 것들을 우리가 우선 떠올립니다. 그런데 그것과 전혀 성질이 다른 것은 아니지만, 육조스님의 해석은 이래요.
卽自心中(즉자심중)에→ 우리들 마음속에
無非無惡(무비무악)→ 아주 잘못됨이 없는 것. 그를 非자지요?
잘못됨이 없는 것. 惡함이 없는 것.
無嫉妬(무질투)→ 질투가 없는 것.
無貪嗔(무탐진)→ 탐진이 없는 것. 탐욕과 嗔심이 없는 것.
無劫害(무겁해)→ 劫害가 없는 것. 劫害라고 하는 것은 남을 해치는 거예요. 겁 이라고 하는 劫자지만, 이 劫자가 겁탈한다고 하는 그 劫자하고 불교에서는 막 통해요. 劫害라고 하는 것은, “해친다.” 해침이 없는 것.
名戒香(명계향)이다→ 이것의 이름이 戒香이다.
무슨 “살생하지마라.” “도적질하지마라.” “뭐 하지마라.” “뭐 하지마라.” “뭐 하지마라.” 이런 것이 아니고 우리 마음 가운데는 본래로, 본래로 잘못이 없어요. 본래로 악이 없어요. 본래로 질투도 없어요. 본래로 탐욕과 嗔心(진심)도 없어요. 본래로 남을 해칠 일도 본래 없는 것이 우리마음의 됨됨이다 이겁니다. 우리마음의 본모습이 그래요.
저 뒤에 가면 “心地無非自性戒(심지무비자성계)” 그런 말 나오지요.
마음에 아무 잘못도 없는 것. 마음자리에 아무 잘못도 없는 이것이야말로 자성의 계다. 진정한 戒行이다. 이런 표현을 합니다.
뒤에 만날 거예요 아마, 戒의 설명이 다르지요?
누가 저 한테 “스님 계라는 것이 무엇입니까?” 라고 물으면, 저도 이렇게 설명 못할 겁니다아마. 보통 상식적인 그런 계에 대한 설명이 아니잖아요? 여기 계신 분들도 불자니까 계에 대해서 다 아시겠지요? 누가, 비불자가 “불교에 그 계라는 것이 뭐야? 기독교에는 10계라고 하는 10계명이 있는데 불교에도 그런 것이 있느냐?”고 하면 당장에 걸려들어 가지고 “아, 불교에 계가 많다.”고 하면서 온갖, “살생하지마라.” “뭐 하지마라.” “뭐 하지마라.” 이것을 아마 늘어놓을 겁니다. 너 나 할 것 없이 그럴 것인데, 여기서 그런 차원으로 우리가 공부하자는 것이 아니고, 또 육조스님도 그런 차원으로 설명하자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하면 육조가 아니지요. 그러니까 우리 마음자리에,
우리 마음자리에 무슨 잘못이 본래 있느냐 이겁니다. 물론 현실은 잘못도 있고, 탐욕도 있고 진심도 있고, 남을 해치는 마음도 있고 시기 질투도 있고, 온갖 악한 것도 있지만, 그러나 그것은 겉의 보자기다. 그런 것으로 장식이 되어 있어서 그렇지, 그 내용물. 다시 말해서 우리의 마음자리!
自心中(자심중)! 우리의 그 순수한 一心(일심)자리는 그런 것이 아예 없다. 그 아예 없는 일심을 드러내서 그것이 “나다.”라고, “나의 참 생명이다.”라고 하는 것을 확신하고, 그것을 확철히 깨닫는 것. 이것이 불교이고 이것이 대승계의 本領(본령)입니다.
그런데 보살계는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어요. 보살계도 10중대계 48계가, 계의 조목은 “뭐 하지마라.” “뭐 하면 큰 허물이 되고” “뭐 하면 작은 허물이 되고” 이런 표현이 있지만, 보살계는 원래 화엄경에서 나온 것이기 때문에, 보살계의 본래의 취지는 깨끗한 자성자리를 드러내는데 있습니다.
보살계를 설명하는 많은 글에 보면, 거의 깨끗한 우리 자성자리를 드러내는 그런 방법으로 해석이 되어 있어요.
대승불교. 또는 선불교가 사실 편안하고 좋은 거예요. 오히려 우리 인간에게 더 가깝다고요. 더 가까워요.
“뭐 하지마라.” “뭐 하지마라.” 그런 250계를 어떻게 지킵니까? 못 지켜요. 세상에 그거 지킬 수 있는 사람 없어요. 그리고 또 경우가 다 다르고요.
인도에서 제정 된 것인데 우리나라에 안 맞는 것 있고, 중국에 안 맞는 것도 있고...
그러니까 선불교에서 말하는 어떤 계라라든지 이런 것이 참 제대로 꿰뚫어 본 것이라고 생각이 드는 것이, 우리 자성자리에 아무 허물이 없고 아주 위대하다고 하는 이것이야말로, 영원한 생명이라고 하는 것을 드러내는 그런 것이 진정한 계다. 우리의 마음자리에는 無非 無惡 無嫉妬 無貪嗔 無劫害다. 그것이 계향이다. 그래야 향기가 나지요.
그 다음에 二는. 두 번째는 定香(정향)인데→ 선정의 향기다.
선정도 우리 상식으로는 어떻습니까? 아, 이것은 마음을 한 곳에 집중시켜가지고 흔들림이 없는 것. 안정할 定자니까요. 안정되다 할 定자니까 흔들림이 없는 것. 물로 치면 못에 물이 딱 채워져서, 바람도 불지 않고, 출렁거리지도 않고 누가 구정물도 안 일으키고 해서 물이 딱 안정되고, 안정 되어서 구정물이 가라앉고, 바람도 안 불어서 그 물위에 온갖 산천초목의 그림자가 환히 비치는 그런 상태를 定香이라고 한다. 우리마음이 그렇게 됐을 때라고 설명하겠지요. 그러나 육조스님은
卽覩諸善惡境相(즉도제선악경상)이라도→ 곧 모든 善과 惡의 경계를 보더라도 自心不亂(자심불란)함이 名定香(명정향)이다→ 내 마음에 아무런 혼란이 없는 것. 아무런 흔들림이 없는 것. 내 마음은 어지럽지 아니한 것. 그것이 定香이다 이겁니다.
하~! 기가 막히네요. 저는 어제 그저께 얼마나 가슴이 떨렸는지 하루 종일... 수련대회에 가서 있었는데, 하루 종일 마음이 무겁고 떨리고, 어제 그저께부터 이틀간 그랬어요. 이틀간... 오늘도 조금 흥분이 되어있는 상태지만 그래 여러번 말하다 보니까... 여기 自心不亂 하려면 아직도 멀었어요.
善惡경계의 모습을 보더라도 자신이 어지럽지 아니하는 것이. 이것이 定香이다. 참 명괘해요. 천하의 선지식들이 이런 말씀을 보고 그냥 입을 벌린 채 다물지 못하는 거예요. 얼마나 명쾌하고 정확하고, 누가 혀 댈 수 없는 그런 설명입니다. 손은 어떻게 하고 다리는 어떻게 하고, 허리를 딱~ 곧추 세우서 한 곳에다 정신을 집중하고 어쩌고, 그런 차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되겠지요. 그 다음에
三은 慧香(혜향)→ 지혜의 향기다. 이겁니다. 지혜는 뭐가 지혜냐?
그것이 향기로울 때. 다른 사람에게 향기롭게 비출 때. 그것은 어느 정도가 되어야 혜향이냐?
自心(자심)이 無碍(무애)하야→ 자신의 마음에 걸림이 없어서
常以智慧(상이지혜)로→ 항상 지혜로서
觀照自性(관조자성)이라→ 내 마음을 환히 볼 수 있어야 돼요. 그래서
不造諸惡(부조제악)이예요→ 모든 악을 짓지를 아니하고,
雖修衆善(수수중선)이라도→ 비록 여러 가지 선행을 닦는다 하더라도,
心不執着(심불집착)이라→ 내가 선행을 닦는 그 일에 하나도 마음이 없어요. 마음이 전혀 집착되어 있지 않아요. 우리는 걸핏하면, 좀 좋은 일 하면. ‘좋은 일했다.’고 그저 ‘누가 좀 알아주지 않나?’ 하고, 그렇게 생각하기가 바쁘지요. 그거 지혜롭지 못한 거예요. 자기가 그렇게 자랑하지 않고 생색 안 내도, 남이 다 알아줘요. 어리석은 사람들이 생색내려고 하는 것이지요.
心不執着하고 敬上念下(경상염하)하며→ 이것이 육조스님의 금강경 해석에도 보면 이런 말이 자주 나와요. 정말 인간적이고 또 수행이 됐다고 할 때, 그 사람의 일거수일투족. 그리고 마음씀씀이가 도대체 어떻게 나타나야 되느냐? 그런 문제를 가지고 봤을 때, 그런 데에 대해서 육조스님의 정확한 모습을, 참 바람직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요. 그것이 敬上念下입니다.
윗사람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을 늘 보살피고, 아랫사람을 배려하는 것이지요. 敬上念下. 하~! 글자도 많지도 않아요 그냥...
敬上念下. 윗사람 공경하고 아랫사람 배려하고, 그리고
矜恤孤貧(긍휼고빈)이라→ 이것이 제가 어릴 때 많이 쓰던 소린데 어떻게 여기 와 있네요. 禪門(선문)에 이런 좋은 말이 있는데, 성경을 갖다가 중국 사람이 먼저 번역하고, 나중에 일본사람들이 번역하고, 그거 흉내내다 보니까 ‘힘들고 외로운 양을 긍휼히 여기소서.’ 이런 말을 따다 쓰게 된 거라고요.
육조단경에 있는 말 아닙니까? 이것이...
그러니까 중국 사람이나 일본사람들은 이 불교에 깊이 젖어놓으니까, 이런 말을 써야 아주 적절하거든요. 저는 어릴 때 처음에 “긍휼히 여기라.”
도대체 발음도 잘 안 돌아가고, 무슨 소린지 잘 모르겠어요 솔직하게...
“불쌍히 여기라.”고 하면 될 텐데, 뭘 “긍휼히 여기라.”고...
지금도 아마 그렇게 되어있나 모르겠어요. 요즘 새 번역에는 아마 고쳐졌을 것 같아요.
矜恤孤貧이라.→ 외롭고 가난한 사람을 긍휼히 여기는 것. 이것이 지혜다. 이겁니다. 지 혼자 지혜 잔뜩 있으면 뭐 하느냐 이것이지요.
敬上念下해서 矜恤孤貧이라. 외롭고 가난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길 줄 아는 것. 그리고 윗 사람을 공경하고 아랫사람을 배려해 주는 것. 이것이 지혜지, 뭐가 지혜겠냐? 이겁니다.
아~! 지혜를 몸으로 나타내 보이는 모습이나 실천해 보이는 것.
육조스님의 그 안목이라고 하는 것이 투철해요. 정말 이런걸 보면...
누구도 慧香에 대해서 이렇게 설명한 사람이 없습니다. 다시 보면 자신이 걸림이 없어, 어디에 집착이 없다는 것이지요. 어디에 걸림이 없다는 말은, 어떤 線(선)을 딱 두고, 자기의 어떤 한계나 아니면 어떤 그 자기 규칙에 매어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자기 집착이 없다는 것이지요.
그래서 항상 智慧로서 觀照自性(관조자성)이라→ 내 마음을 떠나면 안 되니까 언제든지 내 마음에 중심을 두고, 관조자성. 내 마음에다 중심을 두고, 不造諸惡(부조제악)이예요. 여러 가지 악을 짓지 말고, 설사 선행을 닦는다 하더라도 마음에 ‘내가 선행한다.’ 하고 “집착하지 마라.” 그리고 敬上念下하고 矜恤孤貧이라. 외롭고 가난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라.
名慧香(명혜향)이요→ 이것이 지혜다.
四는 解脫香(해탈향)이니→ 이것이 앞에서: (38강) 제가 말한 此事는할 때, “이 일”이라고 하는 것. 불교에서는 “이 일”하면 의례히 해탈. 生死解脫 根源(근원)적인 自己改革 자기혁신. 이런 것인데 그것을 解脫香 이라고 말할 수도 있어요. 그러나 육조스님은
卽自心(즉자심)에 無所攀緣(무소반연)하야→ 자기마음에 반연하는 바가 없어, 뭐 이 생각 저 생각. 생각하게 하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 이것이지요. 뭐 생각해야할 꺼리도 없고요.
無所攀緣이라. 攀緣이라는 말. 불교에서 잘 써요. 이 攀자는 산에서 미끄러질 때, 나뭇가지나 무엇을 붙잡는 것을 “반” 이라고 그러는데 그런 것을 붙잡다. 나뭇가지를 붙잡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 붙잡고 있잖아요.
안 잡고 있으면 뭔가 허전하고 뭐 외롭고 사람 사는 것 같지 않고, 그렇다고요 중생은... 그 攀緣이 없는 것이 좋은 것인데, 攀緣이 없으면 우리 중생들은 그만 病(병)이 들어가지고 무슨 설거지 다 하고나서 ‘오늘은 뭐 할까?’ ‘혹시 전화 안 오는가?’ 그 반연을 기다리는 겁니다.
이 육조단경에서 無所攀緣을 이렇게 이야기해 놨는데... 그래서
不思善不思惡(불사선불사악)이라→ 善도 생각하지 않고 惡도 생각하지 아니해요.
自在無碍(자재무애)라→ 어디에도 걸리지 아니해요. 自由自在(자유자재).
自在라고 하는 말이 글자대로 해석하면 스스로 있다 이겁니다. 내 혼자 있다. 스스로 있다. 남에 의해서 있는 것이 아니고, 내 스스로 여기 있고 싶어서 있는 거예요. 뭐 집지키라고 해서 집지키는 것이 아니라, 내가 여기 있고 싶어서 있는 것. 그것이 자재입니다.
불교에서 쓰는 말 중에, 자유자재. 이 자유니 하는 말이 요즘도 쓰지만, 불교에서는 아주 오래전부터 자유라는 말을 써요. 그것을 구체적으로 표현하면 自由自在. 自由= “스스로 말미암다.”는 말입니다. 남에 의해서 내가 행동하는 것이 아니고, 내 스스로 하고 싶어서 행동하는 것. 自在= “내가있고 싶어서 있다.” 이것입니다. 이 모습으로 “여기에 이렇게 있다.” 이 시간. 이 모습으로. 여기에. 그거 전부가 내가 하고 싶어서 自在다. 이겁니다.
내가 하고 싶어서 그렇게 있는 것. 얼마나 좋은 낱말입니까?
자유자재. 그래서 걸림이 없는 것이지요. 남에 의해서 내가 여기에 이렇게 있으면 걸릴 것이 있지요. “가라” 하면 가야되고 할텐데, 그래서 無碍라는 것입니다. 이것이 해탈이지요. 그것이 名解脫(명해탈)이다.
自心의 無所攀緣. 攀緣하는 바가 아무것도 없어요. 걸릴 것이 아무것이 없어요. 내가 뭘 더위잡을 것도 없고 연결고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리고 善도 생각하지 않고 惡도 생각하지 않고요. 善이니 惡이니 다 떠나 있어요. 自在無碍예요. 이것이
名解脫香(명해탈향)이다.→ 이름이 解脫香이다.
참선하는 스님들. 우리 선방에 다닐 때, 아직 깨닫지 못한 사람들로서 자기 이상적인 시간을 표현할 때 ‘심심하다.’ ‘심심하다.’ 그래요. 그것이 보통 세속에서 말하는 심심해서 ‘뭐 할이 없는가?’ 이런 것이 아니고요.
여기 無所攀緣입니다. 어디 반연할 것도 없고 그렇다고 다른 일을 꾸미려고 하지도 않고, 그냥 “심심한 것.” 참 그 맛은 아주, 맛없는 맛인데 또 괜찮아요. 아주 괜찮아요.
어떻게 보면 상당히 고독하기도 하고. 상당히 외롭기도 하고. 그렇다고 무엇을 攀緣을 구하려고 나서지도 않고, 반연이 있으면 오히려 싫지요.
그러면서 스스로 어떤 그 심심함과 외로움을 즐기는 뭐 그런 상태라고나 할까? 그거는 깨닫지 못한 사람들로서의 그런대로 괜찮은 시간이라고 할 수 있지만, 여기 깨달은 사람은 無所攀緣. 不思善不思惡. 自在無碍. 이것이 解脫香이다. 그 다음
五는→ 다섯 번째는 解脫知見香(해탈지견향)→ 知見 이라고 하는 말은, 所見(소견). 불교에서는 소견이라는 말도 잘 쓰고, 知見이라는 말도 잘 쓰고, 見解(견해)라는 말도 잘 쓰고, 또는 見處(견처)라는 말도 잘 써요. 見處. “견처 = 견해 = 지견 = 소견.” 다 같은 뜻이지요.
解脫知見香이니, 해탈에 대한 소견. 해탈에 대한 견해. 이런 말이지요.
自心(자심)에 旣無所攀緣善惡(기무소반연선악)하되→ 이미 자기마음에 반연하는 바거나 善이나 惡이 없기는 없되, 그러면 아무것도 없으면 어떻해요? 멍멍해가지고 가만히 있는 거냐? 그건 아니다.
不可沉空守寂(불가침공수적)이예요.→ 沉空守寂이 멍하니 가만히 있는 거예요. 沉空 = 空에 잠겨있다. 守寂 = 고요함을 지키고 있다.
그냥 고요함만 즐기는 것이 아니고, 텅 빈 것만 즐기는 것이 아니다 이겁니다. 거기는 지혜가 아주 빛을 발하는 그런 상태지요. 반연하는 바도 없지만, 不可沉空守寂이라. 空에 잠기거나 고요함을 지키는 것이 아니고,
卽修廣學多聞(즉수광학다문)이라→ 열심히 공부한다이겁니다. 곧 모름지기 廣學多聞이예요. 널리 배우고 많이 들어서,
識自本心(식자본심)하며→ 자신의 本心을 알고,
達諸佛理(달제불리)라→ 모든 부처님의 이치! 부처님께서 설해놓은 여러 가지 이치를 통달해서,
和光接物(화광접물)하되→ 和光接物. 이 和光같은 말은, 老子(노자)에 나오는 말이지요. 和光接物. 빛을 同和(동화)시켜요. 빛은 자기의 깨달음입니다. 빛을 동화시켜서 사물을 접하되, 중생들을, 사람들을, 여기서 物은 사람을 말합니다. 사람들을 제접한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깨달았다고 해서 높은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고, 중생과 더불어 완전히 하나가 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和光接物. 또는 和光同塵(화광동진) 이라는 말도 써요.
和光同塵= 자기의 깨달은 빛을 동화시켜서 塵世(진세)와 함께한다.
중생의 세상과 더불어 함께하는 것. 이것이 和光同塵. = 和光接物. 같은 뜻으로 씁니다.
이것이 육조스님의 일생과 연관시켜서 우리가 잠간 생각해 보면, 그 분은 깨달았지요? 깨달아가지고 어땠습니까? 그 험한 사냥꾼들 틈바구니에 15년이라는 세월을 지내면서, 온갖 공부를 많이 했어요. 廣學多聞이예요.
널리 공부하고 경전을 구해서 보고, 많은 공부를 했다고 그렇게 봅니다.
그래서 중생을 제도 하는 데는 그 나름의 무슨 중생들의 근기와 중생들의 어떤 사정을 잘 맞춰야 된다고요.
그러려면 뭘 알아야지요. 혼자 마음만 훤히 밝아가지고 되는 일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達諸佛理(달제불리)라→ 모든 부처님의 가르침에 대한 이치를 통달해서, 그래야 거기에 맞춰가지고 중생 제도하지요. 그래서 육조스님이 깨닫기 까지는 무식 했지만, 깨닫고 나서는 경전 안 본 것이 없어요.
금강경을 해석한 글에 보면, 많은 경전의 제목이 거기에 등장합니다.
그만치 육조스님이 경을 많이 봤다는 이야기예요. 그런 분입니다. 덮어놓고 무식해야만 된다는 그런 생각은 정말 잘못이지요. 자고로 불교에서 뛰어난 선지식들은 다 학문도 뛰어나고, 지식이 아주 대단했습니다. 깨닫고 나서 지식을 쌓았든지, 깨닫기 전에 쌓았든지 간에, 어쨌든 모든 분야에 있어서 최고의 선지식! 최고의 지도자가 되는데 있어서 그 조건이 지식이 문제가 되어서는 안 되지요.
절대 그건 문제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그런 것은 아예 문제가 되지 않을 정도로 되어 있어야지요. 그래서 여기도 보면 자기본심을 안 뒤에 達諸佛理 했다. 이것은 많은 경전을 보았다. 그리고 그런 어떤 지식을 통해서 和光接物했다. 그러되
無我無人(무아무인)이라→ 我도 없고 人도 없고, 나니 남이니 하는,
중생을 제도하기는 하되, 나다 남이다 하는 그런 어떤 분별이라든지 어떤 한계. 이런 것을 꼭 세워서 하지는 않는다. 그래서
直至菩提(직지보리)의 眞性不易(진성불역)함이→ 바로 菩提.
깨달음이지요. 菩提= 깨달음의 眞性= 우리의 참 성품에서 하나도 바뀌어지지 않는. 본래의 그 참 성품 그대로 거기에 이르는 것. 菩提의 眞性不易!
바꿀 역자로 봐야지요.
우리 菩提의 참 성품에서 하나도 옮겨지지 않고 변함이 없는 그 자리에 곧 이르는 것이
名解脫知見香(명해탈지견향)이다→ 이름이 해탈지견향이다. 그래서 여기에도 그런 뜻이 충분히 담겨 있는데, 해탈은 자기해탈 이예요. 그 다음에
해탈지견은 뭐냐? 중생들이 그 해탈지견을 나누어 갖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도 해탈할 수 있도록 하는 것. 達諸佛理하여 和光接物한다고 여기에 그대로 나와 있지요?
和光接物이 중생 제도지요. 딴 사람도 해탈하게 하는 것이 해탈지견입니다. 그것 그렇게 알면 제일 간단해요. 대개 해탈지견 설명하라면 제대로 설명하는 것을 못 봅니다. 그것이 어렵습니다. 해탈지견은 뭐냐? 해탈한 사람의 소견은 뭐겠는가? 당연히 다른 사람도 해탈하게 중생 제도하는 일이겠지요. 그야 뭐 뻔한 겁니다. 바로 그거예요. 그래서 딴 사람도 해탈하게 하는 것이 해탈지견이다 이겁니다. 그렇게 알면 됩니다.
계. 정. 혜. 계정혜 삼학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해탈이 목표고, 해탈은 해탈지견이 또 목표입니다. 다른 사람을 해탈하게 하는 것이 내 해탈의 목표지, 내 혼자만 해탈하고 나는 그 이상은 모르겠다하면 그건 해탈하나 마나고, 그런 해탈은 필요 없는 것이지요. 지 혼자 해탈 할 바에야...
다른 사람하고는 아무 상관없는 해탈, 중생하고는 아무 상관없는 해탈은 하나 마나한 해탈입니다. 그렇게 보는 것이지요.
善知識아 此香(차향)은→ 이 향은. 이것이 참 향기로운 것이고, 이 세상에서 이 다섯 가지가 정말 향기로운 것이지요. 이 향은,
各自內薰(각자내훈)이요 莫向外覓(막향외멱)이니라→ 각각 스스로 안에서 그것을 풍겨내는 것이다. 이겁니다. 자기 속에서 그것을 풍겨내는 것입니다. 밖을 향해서 찾는 것이 아니다. 이겁니다. 자기 속에서 만들어내고 개발해내고, 그것이 또 밖으로 향해서 향기를 풍기고 그런 것이지, 절대 밖에서 찾는 것이 아니다. 여기까지 왔으니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지만, 결국은 여기까지 온다고 그것이 될 일이 아니고, 전부 여러분 자신의 일이다. 그런 얘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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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마하 반야 바라밀, 마하 반야 바라밀, 마하 반야 바라밀, _()_()_()_
敬上念下 矜恤孤貧_()()()_
卽覩諸善惡境相)이라도 自心不亂함이 名定香이다.~모든선과악의 경계를 보더라도 자신의 마음에 흔들림이 없는 것이 정향이다...고맙습니다._()()()_
此香은 各自內薰이요 莫向外覓이니라... 이 향은 각각 스스로 안에서 그것을 풍겨내는 것이지 밖을 향해서 찾는것이 아니다... 대원성님! 감사드립니다...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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各自內薰(각자내훈)이요 莫向外覓(막향외멱)이니라.....대원성님, 감사드립니다. 마하 반야 바라밀_()()()_
此香은 各自內薰이요 莫向外覓이니라...이향은 각각 스스로 안에서 풍겨 내는 것이지 밖을 향해 찾는 것이 아니다...고맙습니다. _()()()_
自心이 無碍하야 常以智慧로서 觀照自性이라....자신의 마음에 걸림이 없어서 항상 지혜로써 내 마음을 환히 볼 수 있어야 함이라...대원성님 수고하셨습니다.._()()()_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_()()()_
善知識아 此香은 各自內薰이요 莫向外覓이니라 _()()()_
無所攀緣....! 감사합니다._()()()_
마하반야바라밀()()()
감사합니다 _()()()_
항상 智慧로서 觀照自性(관조자성)이라→ 내 마음을 떠나면 안 되니까 언제든지 내 마음에 중심을 두고....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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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배 올립니다
三은 慧香이니 自心이 無碍하야 常以智慧로 觀照自性하야 不造諸惡하며 雖修衆善이라도 心不執着하고 敬上念下하며 矜恤孤貧함이 名慧香이요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_()()()_
敬上念下. 矜恤孤貧........
마하반야바라밀_()()()_
此香 各自內薰 莫向外覓 ... _()_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삼배 올립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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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戒 ... _()_
고맙습니다 _()()()_
고맙습니다 _()()()-
감사합니다.()
和光接物 자기의 깨달은 바를 동화시켜 중생과 더불어 함께한다. 고맙습니다. _()()()_
無所攀緣 _()_ _()_ _()_
無非 無惡 無嫉妬 無貪嗔 無劫害(무비 무악 무질투 무탐진 무겁해)
그것이 계향이다. 그래야 향기가 나지요.
卽覩諸善惡境相(즉도제선악경상)이라도→
곧 모든 善과 惡의 경계를 보더라도 自心不亂(자심불란)함이 名定香(명정향)이다→
내 마음에 아무런 혼란이 없는 것. 아무런 흔들림이 없는 것.
내 마음은 어지럽지 아니한 것. 그것이 定香이다 이겁니다.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
自心(자심)이 無碍(무애)하야→ 자신의 마음에 걸림이 없어서 常以智慧(상이지혜)로→ 항상 지혜로서
觀照自性(관조자성)이라→ 내 마음을 환히 볼 수 있어야 돼요. 그래서
不造諸惡(부조제악)이예요→ 모든 악을 짓지를 아니하고, 雖修衆善(수수중선)이라도→
비록 여러 가지 선행을 닦는다 하더라도, 心不執着(심불집착)이라
내가 선행을 닦는 그 일에 하나도 마음이 없어요. 마음이 전혀 집착되어 있지 않아요.
敬上念下(경상염하)하고 矜恤孤貧(긍휼고빈)이라.
윗사람 공경하고 아랫사람 배려하고,“외롭고 가난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라.” 名慧香(명혜향)이요→ 이것이 지혜다.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자유자재. 그래서 걸림이 없는 것이지요.
남에 의해서 내가 여기에 있으면 걸릴 것이 있지요.
“가라” 하면 가야되고 텐데, 그래서 無碍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해탈이라는 것이지요. 그것이 名解脫(명해탈)이다.
自心의 無所攀緣. 攀緣하는 바가 아무것도 없어요.
걸릴 것이 아무것이 없어요. 내가 뭘 더 자고 매달릴 것도 없고
연결고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요. 그리고 善도 생각하지 않고 惡도 생각하지 아니해요.
善이니 惡이니 다 떠나 있어요. 自在無碍예요. 이것이 名解脫香(명해탈향)이다.→ 이름이 解脫香이다.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
卽修廣學多聞(즉수광학다문)이라→ 열심히 공부한다이겁니다. 곧 모름지기 廣學多聞이예요. 널리 배우고 많이 들어서,
識自本心(식자본심)하며→ 자신의 本心을 알고,
達諸佛理(달제불리)라→ 모든 부처님의 이치! 부처님께서 설해놓은 여러 가지 이치를 통달해서,
和光接物(화광접물)하되→ 和光接物. 빛을 同和(동화)시켜요.
빛은 자기의 깨달음입니다. 빛을 동화시켜서 사물을 접하되, 중생들을,
사람들을, 여기서 物은 사람을 말합니다. 사람들을 제접한다 이겁니다.
그러니까 자기가 깨달았다고 해서 높은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고,
중생과 더불어 완전히 그 깨달음의 길에 들게 한다.
이것이 해탈지견향이다.
我도 없고 人도 없고, 나니 남이니 하는,
중생을 제도하기는 하되, 나다 남이다 하는 그런 어떤 분별이라든지 어떤 한계.
이런 것을 꼭 세워서 하지는 않는다.
우리 菩提의 참 성품에서 하나도 옮겨지지 않고 변함이 없는 그 자리에 곧 이르는 것이
名解脫知見香(명해탈지견향)이다→ 이름이 해탈지견향이다.
그래서 여기에도 그런 뜻이 충분히 담겨 있는데, 해탈은 자기해탈 이예요.
그 다음에 해탈지견은 뭐냐? 중생들과 그 해탈지견을 나누어 갖는 것입니다.
다른 사람도 해탈할 수 있도록 하는 것. 여기에 그대로 나와 있지요?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
善知識(선지식)아 此香(차향)은→ 이 향은. 이것이 참 향기로운 것이고,
이 세상에서 이 다섯 가지가 정말 향기로운 것이지요. 이 향은,
各自內薰(각자내훈)이요 莫向外覓(막향외멱)이니라→
각각 스스로 안에서 그것을 풍겨내는 것이다. 이겁니다.
자기 속에서 그것을 풍겨내는 것입니다. 밖을 향해서 찾는 것이 아니다. 이겁니다.
자기 속에서 만들어내고 개발해내고, 그것이 또 밖으로 향해서 향기를 풍기고,
절대 밖에서 찾는 것이 아니다.
여기까지 왔으니 내가 이런 이야기를 하지만,
결국은 여기까지 온다고 그것이 될 일이 아니고,
전부 여러분들 자신의 일이다. 그런 내용입니다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 _()_ _()_ _()_
摩訶般若波羅蜜 摩訶般若波羅蜜 摩訶般若波羅蜜 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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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_()_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_()()()_
감사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