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離相寂滅分 第 十四
何以故(하이고)오 須菩提(수보리)야 如我昔爲歌利王(여아석위가리왕)에
割截身體(할절신체)하야 我於爾時(아어이시)에 無我相(무아상)하며 無人相(무인상)하며 無衆生相(무중생상)하며 無壽者相(무수자상)이니라
何以故(하이고)오 我於往昔節節支解時(아어왕석절절지해시)에 若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약유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면 應生嗔恨(응생진한)일러니라
須菩提(수보리)야 又念過去於五百世(유념과거어오백세)에 作忍辱仙人(작인욕선인)하야 於爾所世(어이소세)에 無我相(무아상)하며 無人相(무인상)하며
無衆生相(무중생상)하며 無壽者相(무수자상)이니라
是故(시고)로 須菩提(수보리)야 菩薩(보살)은 應離一切相(응리일체상)하고
發阿뇩多羅三먁三菩提心(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이니
不應住色生心(불응주색생심)하며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이요 應生無所住心(응생무소주심)이니라
若心有住(약심유주)면 卽爲非住(즉위비주)니 是故(시고)로 佛說菩薩(불설보살)은
心不應住色布施(심불응주색보시)라하니라
須菩提(수보리)야 菩薩(보살)이 爲利益一切衆生(위이익일체중생)하야
應如是布施(응여시보시)니라
如來(여래)가 說一切諸相(설일체제상)이 卽是非相(즉시비상)이며
又說一切衆生(우설일체중생)이 則非衆生(즉비중생)이니라
須菩提(수보리)야 如來(여래)는 是眞語者(시진어자)며 實語者(실어자)며
如語者(여어자)며 不誑語者(불광어자)며 不異語者(불이어자)니라
須菩提(수보리)야 如來所得法(여래소득법)은 此法(차법)이 無實無虛(무실무허)하니라
須菩提(수보리)야 若菩薩(약보살)이 心住於法(심주어법)하야 而行布施(이행보시)하면 如人(여인)이 入暗(입암)에 則無所見(즉무소견)이요 若菩薩(약보살)이 心不住法(심부주법)하야 而行布施(이행보시)하면 如人(여인)이 有目(유목)하야 日光明照(일광명조)에 見種種色(견종종색)이니라
須菩提(수보리)야 當來之世(당래지세)에 若有善男子善女人(약유선남자선녀인)이
能於此經(능어차경)에 受持讀誦(수지독송)하면 則爲如來(즉위여래)가 以佛智慧(이불지혜)로 悉知是人(실지시인)하며 悉見是人(실견시인)하야 皆得成就無量無邊功德(개득성취무량무변공덕)하리라
반갑습니다.오늘 6월 8일 염화실 인터넷방송법문시작하겠습니다.
금강경 14분 離相寂滅分 어제는 중간까지 했고
오늘은 그다음부터 할 차례인데 어제한 것이
수보야 여래가 第一波羅蜜(제일바라밀)을 설한 것이 第一波羅蜜(제일바라밀)이 아닐세. 이 이름 第一波羅蜜(제일바라밀)이니라, 수보리야 忍辱波羅蜜(인욕바라밀)도 여래가 설하기를 忍辱波羅蜜(인욕바라밀)이 아닐세. 이 이름이 忍辱波羅蜜(인욕바라밀)이니라. 이렇게 두 가지 波羅蜜(바라밀)을 이야기했습니다.
물론 六波羅蜜(육바라밀)내지 화엄경에서 말하는 十波羅蜜(10바라밀)이라고 하더라도 다 空性으로 봐야한다.
이건 이제 여러 가지를 전부 無相(무상)은 다시 말해서 空性(공성)이거든요. 空이라는 뜻인데,
空이 그냥 空이 아니라 참으로 空하므로 묘하게 있는, 또 묘하게 있으면서 또 참으로 空한 그런 中道性을 우리가 이해를 하고 無相을 설명하고 空을 설명해야 되죠.
그래서 뭐 온갖 부처님의 세계든지, 衆生의 세계든지, 衆生의 여러 가지 相이라든지, 못난 모습 잘난 모습, 또 이 세상의 근원이라고 할 수 있는 먼지, 또 세계전체, 뭐 하여튼 눈에 보이는 것, 귀 들리는 것, 우리가 인식할 수 있는 모든 그 유정무정의 세계들, 또 衆生세계 또는 지정각세계라 해서 깨달은 분들의 세계까지도 모두 無相이다. 空性이다.
그러나 아주 없는 것은 물론 아니고요. 있으면서 없는 위치를 우리가 볼 줄 아는 것 이걸 이제 여기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波羅蜜(바라밀)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불교에서 불자가 실천해야 할 덕목을 波羅蜜(바라밀)이라고 이렇게 이야기를 하죠.
흔히 말하는 것이 六波羅蜜(육바라밀)을 말하는 것이고, 여기서 第一波羅蜜(제일바라밀)은 보시바라밀이다 이렇게 말할 수 있고, 辱波羅蜜(인욕바라밀)은 第二波羅蜜(제이바라밀)이 되겠습니다.
忍辱波羅蜜(인욕바라밀)을 굳이 여기에서 집고 넘어가는 것은 참~ 아주 깊은 뜻이 있습니다.
왠고하니 부처님의 생애 중에서 참으로 불행했던 그런 일이 있습니다.
우리의 생애도 부처님처럼 그렇게 불행한 것은 사실은 없다고 할 정도로 부처님은 그렇게 불행한 입장도 아주 남다르다 이렇게 볼 수가 있습니다.
그것을 여기서 집고 넘어가는 그런 대목이에요. 이게 이제 그런 것을 역사적인 사실을 뚜렷하게 우리가 역사를 기록하듯이 그렇게 기록은 안돼 있습니다만 그러나 여기서 말하는 말의 의미가 바로 그것입니다 우선 격문을 보죠.
何以故(하이고)오 須菩提(수보리)야 如我昔爲歌利王(여아석위가리왕)에
割截身體(할절신체)하야 我於爾時(아어이시)에 我相(무아상)하며 無人相(무인상)하며 無衆生相(무중생상)하며 無壽者相(무수자상)이니라
何以故(하이고)오 我於往昔節節支解時(아어왕석절절지해시)에 若有我相人相衆生相壽者相(약유아상인상중생상수자상)이면 應生嗔恨(응생진한)일러니라
何以故 須菩提야 예컨대 내가 옛날 가리왕에게 割截身體(할절신체)라
신체를 割截(할절)당했다. 베였다 이 말이에요. 칼로 베였다.
그랬는데 내가 그때에 我相도 없고, 人相도 없고, 衆生相도 없고, 壽者相 없었느니라.
하이고 내가 왕석 옛날에 節節支解詩(절절지해시)에 마디마디 支解(지해)분해됐다.
그 칼로 오려내는듯 잘려내듯이 그렇게 했을 때에
만약에 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이 있어다면
應生瞋恨(응생진한)일러니라 응당히 분노를 내었을 것이니라. 이렇게 했습니다.
이 이야기를 가지고 이제 忍辱仙人(인욕선인)으로써 忍辱(인욕)을 닦을 때 어떤왕이 나들이를 나왔다가 궁녀들이 忍辱仙人(인욕선인)에게 와서 참배를 하고 있는 사이에 그 참 왕이 잠자는 사이, 낮잠을 자는 사이에 궁녀들은 忍辱仙人에게 와서 참배를 했고, 나중에 찾아보니 忍辱仙人에게 와 있어서 그래서 이제 왕이 화가 나서 너는 누구냐? 忍辱을 닦는 사람입니다.
그래 참으로 忍辱을 할 줄 아느냐? 그렇다 해가지고 이제 낱낱이 팔 다리를 잘랐다. 그래서 忍辱을 실험했다. 이런 이야기가 있는데, 그건 이젠 뒷이야기가 그 이야기이죠.
수보리야 또 기억하건데 과거 오백세하는 것은 이건 이젠 과거 전생 오백세 동안 忍辱仙人을 수행하고 있었는데 하는 그 이야기고 그이야기는 나중에 다시 조금 다시 거론하기로 하고요
如我昔爲歌利王(여아석위가리왕)에 내가 옛날 가리 왕에게
割截身體했고 그때 내 자신이 節節支解 往昔에 節節支解라고 마다마다 잘려나갔는 듯 잘려나갔다. 여기는 그렇게 돼있어요.
그랬을 때 我相, 人相, 衆生相, 壽者相이 없었다.
있었서면 應生瞋恨(응생진한) 분노를 일으켜 설 것이다.
이건 이제 부처님 당시 인도라는 나라가 아주 양육강식이 뭐 아주 성한 그런 시대입니다.
아주 소도시국가들이 참 많았고요.
그 도시국가들이 수시로 싸워서 그 어느 한나라가 점령을 하고 그러면 생겼던 나라는 없어져버리고 또 새로운 나라가 생기고 그랬어요.
그래서 뭐 그 당시 대개 16개의 나라가 있었다. 그래요 16개의 나라가 전쟁을 해서 강한 나라가 네 개의 아주 강한 나라로 병합이 되어 버리는 그런 시대에 부처님이 계셨습니다.
그래서 부처님이 탄생하신 나라가 카빌라성인데 소도시국가에요.
양반이 살았고, 귀족이 살고, 백성은 상당히 괜찮은 백성이지만은 무력으로 또는 재력으로 또 국토로 모두 열세였었다.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카빌라성이 부처님이 태어난 조국인데도 부처님 살아생전에 그게 없어져버렸습니다.
그래 이제 사대 큰 나라로 4개의 큰 나라로 병합이 되어버리죠.
16개 나라가 4개의 나라로 병합이 되어버리는 그런 시대였었기 때문에
부처님은 살아생전에 번히 눈을 뜨고 당신의 종족이 멸망을 당하고 당신이 탄생한 가비라국이 사라지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렇게 한 왕이 누군고 하니? 유리왕이죠. 유리왕.
코살라국의 유리왕인데 여기는 인제 묘하게도 금강경에서는 유리왕이라고 직접 하지를 않고 가리 왕이라고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옛날에 가리왕이 이렇게 했어요. 500년 뒤에 편집을 했었니까?
아무리 부처님 당시라고 하더라고 옛날처럼 아득하게 생각이 들죠.
그래서 석자를 넣고 왕석이라는 그런 표현을 하게 된 것이 바로 그런 이유입니다.
이것은 부처님 살아생전에 직접 칼로 베이지는 않았지만 자기나라가 없어지고 자기 동족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짓밟히고 이웃나라에게 베임을 당하고 하는 것을 보았을 때,
부처님 같은 분이 그 느낌이 어떻했겠습까?
정말 이것은 割截身體(할절신체)라 칼로 몸을 오려내는 듯한 그런 아픔이고,
節節支解(절절지해)야 마디마디 칼로 산산이 잘라내는 듯한 그런 아픔을 부처님은 느껴다. 하는 것입니다.
아함부 경전에 자주 등장하고 불교에 좀 자주 드나드는 오래된 신도님들은 여러 번 들었설줄 압니다.
유리왕이 카필라 성을 성을 쳐들어가는 길목에 부처님이 그런 사실을 알고 길목에 제자들을 데리고 서있었죠.
서있는데 아주 무성한 나무가 있는 그런 숲 밑에 있어도 될 텐데, 아주 바싹 마른 나무 밑에 서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유리왕이 군사를 이끌고 쳐들어가다가 멀리 한때의 수행자들이 있는데 가만히 보니까 부처님이고 부처님의 제자들이라 말이라 아무리 가비라 성을 쳐들어가는 그런 왕이지만은 그 당시 정치 상황이라든지 뭐 이런 걸로 봐서 그렇게 되었지만은
부처님을 보고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인사를 올립니다. 인사를 올리면서 이런 걸 물어요.
부처님이시여 저 옆에 아주 무성한 나무 그늘도 많은데 왜 이렇게 바싹 마른 나무 밑에 이렇게 서있습니까? 이렇게 하니까
그대가 나의 조국 카빌라성을 쳐들어가고 나의 민족을 무찌르고 가는데 내 마음이 오죽하겠는가?
내 마음은 마치 저 타들어가는 나뭇잎과 같다 바싹 마른 나뭇잎과 같다. 이렇게 표현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유리왕이 그 말을 듣고 감동해가지고 자기의 욕심을 일단은 접죠. 접고 군사를 회군시켜서 되돌아갑니다.
그러다가 또 얼마 있다가 다시 유리왕이 욕심이 나고 과거에 원결관계라 할까 이런 것들 때문에 또 이제 카빌라성을 쳐들어가요.
그 당시 뭐 나라가 언제든지 다 그렇고 옛날 우리 중국, 한국에도 역시 그랬지만은 혼인으로써 결혼으로써 이제 얽히고 섥혀있고, 또 결혼을 통해서 힘이 약한 나라는 이제 겨우 나라를 유지하고 당분간이지만은 나라를 유지하고 하는 그런 상황 이었습니다.
그래서 부처님 당시때 카빌라성도 역시 유리왕과 결혼관계가 묘하게 꼬여가지고 그만 유리왕이 원한을 품고 기어이 카필라 성을 없애야 되겠다고 이렇게 생각을 하고 쳐들어간 그런 상황이죠.
두 번째도 부처님이 그 길목에 이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어떻게 하더라도 물론 인과관계라고 손 치더라고 어떻게 하더라도 이 사람이 마음을 돌려서 풀어버리면은 그 순간 우리는 인과가 풀리는 거거든요.
마음으로부터 원한을 갚게 다고 하는 것을 풀어버리고 慾心을 제거하면은 그 순간 다 풀어집니다. 그런 관계는 악연은 다 그렇게 풀어지거든요.
그래서 어떻게 하더라도 풀어 보려고 그렇게 했는데.....
두번째 또 쳐들어오는데 역시 지난번과 같이 그렇게 길목에 서서 바싹 마른 나무 밑에 서서 기다리고 있어서 앞서 한 봐와 같이 꼭 같이 그렇게 해서 유리왕을 되돌려 세우는데 성공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런 일이 세번째 또 있었어요.
유리왕은 어떻게 하더라도 어떤 원한을 풀고 또 가비라성을 쳐들어가서 자기욕심을 채우려고 하는 그런 마음을 부처님의 한때 법력으로는 도저히 어떻게 할 수가 없거든요. 할 수가 없어서 그래서 이제 세번째 또 쳐들어가는데 그때는 부처님은 피해버립니다. 그 주변에서 떠나버려요.
세번째까지 이제 부처님이 그런 모습을 보인다고 해서 유리왕이 쳐들어가지 않을 사람도 아니고, 또 쳐들어간다. 면은 부처님의 체면도 말이 아니고 서로 상하게만 되는 거죠. 서로 관계만 상하게 됩니다.
유리왕은 자기의 뜻을 관철시킬 것이고, 부처님은 또 얼마나 상심하시겠습니까?
그래서 그런 사실을 알고는 부처님이 자리를 피해버립니다.
이제는 틀렸다하고 자리를 피해버려.
그래설때 얼마나 가슴이 아파겠습니까?
그야말로 그것을 뒷사람들이 그 심정을 표현한 것이 割截身體라고 했고, 節節支解라고 했습니다.
정말 칼로 가슴을 오려내는 듯한 그런 아픔이었죠. 얼마나 아파겠습니까?
뭐 전하는 이야기에 의하면 그래서 유리왕이 쳐들어가서
그 당시 카빌라국의 왕이 무력으로 어떻게 감당을 못하고, 왕이 먼저 나가 가지고 잠깐 내 소원 좀 들어달고 하면서 내가 이 물속에 들어가 가지고 나올 때까지만 내 백성들을 도망갈 수 있게 좀 해달라고 그랬어요.
그러니까 유리왕이 그건 들어줄 수 있다고 그랬습니다.
물에 들어가서 얼마나 있겠어요. 한 시간을 있겠어요. 두 시간을 있겠어요.
그래서 들어주겠다고 하고 말하자면 그 왕은 물속에 들어갔습니다.
들어가고 백성들은 그 순간 도망을 가고요.
내가 나올때 까지만 도망갈 수 있도록 해달라고 했으니까?
그래서 왕이 물속에 들어갔는데 아무리 기다려도 안나오는 거예요.
나중에 병사를 시켜서 물속에 들어가 보라고 하니까
물속에 잠수를 해가지고 거기에다 도포자락을 가지고 끈을 묶어서 바위에 몸 묶어서 거기서 자결을 한거죠.
물속에서 스스로 죽었죠. 그러니까 몸이 안 떠오르니까?
그동안 시간을 많이 벌었을 것이고 그 시간 동안 백성들 멀리까지 다른 나라로 도망 갈수 있었다 하는 그런 처절한 역사가 있습니다.
그러니까 참 부처님은 알고 보면 정말 가슴 아픈고 불행한 분이에요
태어나자마자 7일 만에 어머니가 돌아가셨죠.
정말 교화의 열기가 인도 전역을 전부 거의 덮을 그런 시기에 자기의 조국이 멸망을 당했죠. 자기의 종족 온갖 친척과 종족들이 전부 살해당하고 해서 뿔뿔이 흩어져서 없어져 버렸지요
그러니 이런 상황을 부처님생애에 겪었는데 이걸 어떻게 우리 부처님 제자들이 이해를 해야 할 것인가?
이건 누군가 경전을 결집하면서 집고 넘어가야할 일이라 이게
확실하게 이건 밝히고 넘어가야할 그런 상황이죠.
그래서 금강경에서 여기에 忍辱波羅蜜(인욕바라밀)을 제일바라밀을 이야기하고 그 다음 忍辱波羅蜜(인욕바라밀)도 또 이야기를 슬쩍 이야기 하면서 부처님의 忍辱行,
가장 가슴아파든 그런 상황에서 어떻게 忍辱했는가.
그것은 금강경에서 바로 들러내고자 하는 無我相(무아상), 無人相(무인상), 無衆生相(무중생상), 無壽者相(무수자상) 정말 철저히 나는 텅 비워노라. 하는 그런 표현을 하고 그 설명을 하는데 부처님의 과거에 가슴아파든 그런 이야기를 여기서 이끌어 오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이런 대목에 우리가 또 한 가지 이야기해야 할 것은 부처님의 제자가 많습니다. 신도도 많고요.
예를 들어서 우리 사명대사나 서산스님 같으면 어떠했겠습니까?
자기조국 자기민족을 지키기 위해서 승병을 동원해가지고 맞서 싸워설 것 아니겠습니까? 사명대사나 서선대사 식이라 면은
그런데 부처님은 그렇게 하지 않았어요.
부처님도 그렇게 하다가 장렬하게 죽을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것이 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종교적인 해결책이 아니고
그것이 부처님의 해결방법이 아니라는 거죠.
그래서 서산, 사명이 아주 위대한분이긴 하지만은 어떻게 보면 사실 민족주의자지
철저한 부처님의 마음에 개합하는 그런 삶을 살았다고는 하기가 곤란하죠.
이런 것들이 금강경의 가르침이나 부처님의 생애에서 비쳐보면은 알 수 있는 거죠.
진정한 불자라면 부처님의 생애하고 같아 되죠.
똑같이 살수는 없지만은 그런 어떤 문제에 봉착했을 때, 부처님 마음으로 부처님이 해결했듯이 그렇게 해결해야 되는 것입니다.
그 사람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고, 그 사람의 마음을 풀지 못 하면은 자리에서 떠나는 거죠. 피하는 것이 그것이 부처님의 마음입니다.
이게 뭐 우리 신도님들이나 우리 불자들 어떤 마음에 들든지 안 들든지 그거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부처님은 그런 분이었습니다.
결코 제자들에게 칼을 들고 창을 들고 우리 맞서 싸우자 이렇게 하지 안했습니다.
또 자기의 석가족 권속들 동원해가지고 저들과 우리 죽을 때가지 싸우자 이런 일 한 적이 없었어요.
많은 생명을 많은 백성과 많은 생명을 똑같이 당신의 적자로 그렇게 보았기 때문에
죽는 사람도 죽이는 사람도 다 부처님의 아들이지
누구는 뭐 죽는 사람 죽는 석가족만 당신 아들이고, 죽이는 코살라국의 유리왕의 군사들은 아들이 아니라 하는 그런 분별은 없다는 것입니다.
이런 대목에서 불교의 진정한 사상을 알아야 되는 거죠.
그 다음에 이젠 그런 금생에 이야기를 여기까지 하고,
須菩提(수보리)야 又念過去於五百世(유념과거어오백세)에 作忍辱仙人(작인욕선인)하야 於爾所世(어이소세)에 無我相(무아상)하며 無人相(무인상)하며
無衆生相(무중생상)하며 無壽者相(무수자상)이니라
須菩提야 又念過去於五百世에 作忍辱仙人하야
수보리야 우념과거오백세에 작인욕선인
그 다음 過去生에 五百世, 過去五百世 또 기억하건데 又念(우념)
過去五百世라고 하는 것은 이 世(세)자는 일년 이년 하는 世가 아니고, 한생을 뜻할 때,
이 世자를 써요. 그래서 쉽게 이해하면 生이나 똑같습니다.
五百世 동안에 忍辱仙人이 되었었다.
忍辱仙人이 되었을 때 그때 아까 이제 이야기한 왕이 궁녀들을 데리고 사냥을 나왔다가 낮잠을 자는데 궁녀들이 전부 忍辱仙人들에게 와서 예배를 들이더라.
나중에 낮잠에서 깨워보니까 궁녀들이 그러고 있어서 왕이 화가 나서 忍辱仙人을 실험을 했는데 칼로 그를 베었다.
나중에 뭐 천둥이 치고 흙비가 솟아지면서 말하자면 왕은 뭐 어떻게 되고, 잘랐던 팔은 다 도로 붙었다. 이런 전설적인 그런 설화도 있습니다.
이게 이제 그 설화를 여기다 갖다 붙이면 그게 가능해 지죠.
앞에 이야기한 節節支解(절절지해), 割截身體(할절신체)
석가족이 그렇게 침해를 당했을 때 부처님의 마음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다는 사실 이걸 이제 정확하게 아셔야 되요 .
於爾所世에 無我相하며 無人相하며 無衆生相하며 無壽者相이니라
어이소세 무아상 무인상 무중생상 무수자상
今生(금생)의 일이나 過去生(과거생)에나 역시 이제 我相도 없었고, 人相도 없었고, 衆生相도 없었고, 壽者相도 없었다.
어떤 경우라도 이 四相이 없다는 말은 줄기차게 저 앞에서부터 계속해왔습니다 만은
그러면 今生만 없어나 過去生에도 없었다.
그냥 마음이 편안할 때만 없느냐 아니 면은 당신의 종족이 살해를 당하고 나라를 빼앗길 때도 그때도 없었느냐 이런 이야기 에요.
그래서 저 앞에서는 보통 평소 이야기이고 여기에서는 극한상황에서도 四相이 없었다.
그리고 過去에서도 四相이 없었다.
이런 이야기를 하기 위해서 이런 것을 등장 시킨 것입니다.
是故로 須菩提야 菩薩은 應離一切相하고 發阿뇩多羅三먁三菩提心이니
시고 수보리 보살 응리일체상 발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
是故로 須菩提야 菩薩은 應離一切相하고 응당히 일체상을 떠나고
아뇩다라삼먁삼보리심을 발해야 하느라. 菩提心(보리심)을 발해야 한다.
菩提心은 연민심이라고 그랬죠. 깨달음에 의한 마음
진정한 깨달음의 마음은 말하자면은 衆生들을 연민하는 그런 연민심입니다.
그게 일체상을 떠나야 그게 가능한 것이지 상을 떠나지 안이 하면은
왜 우리민족을 짖발느냐 해서 무슨 창과 칼을 들고 승군을 동원해서 싸울 수밖에 없죠.
그건 일체상을 떠나지 못한 상황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應離一切相하고하고 菩提心을 발해야 하느니,
不應住色生心하며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이요 應生無所住心이니라
불응주색생심 불응주성향미촉법생심 응생무소주심
不應住色生心하며 응당히 어떤 사물에도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낼 것이며
不應住聲香味觸法生心이요 응당히 聲香味觸法(성향미촉법)에도 머물지 말고 마음을 낼 것이요
應生無所住心이니라 응당히 머무는바 없이 마음을 낼지니라.
應無所住而生其心(응무소주이생기심)의 줄임말이죠. 똑같습니다. 뜻이
應生無所住心이나 應無所住而生其心 똑 같죠.
生자 있고, 心자있고, 無所住가 있고, 應자가 있고요
應生無所住心(응생무소주심)이니라 응당히 머무는바 없는 마음을 낼지니라.
그렇게 어디에 매여 버리면은 거기에 편협하게 되는 것이고, 치우치는 것이고, 中道가 아니고 그렇다는 것이죠.
若心有住면 卽爲非住니
약심유주 즉위비주
若心有住면 卽爲非住니 만약 마음이 머묾이 있으면은 곧 머묾지 않음이 됨이니,
여기 이제 非住(비주)라고 하는 것도 잘못 머묾이 됨이니, 이렇게 이제 해석할 수 있게 되는데, 여기는 머물지 않음이 된다.
머물지 않으면은 좋은 것 같지만은 여기서는 이제 그게 아니에요.
머물때는 머물고 머물지 않을 때는 머물지 않고 역시 中道를 뜻하는 것입니다.
즉위비주니 시명준이라 그렇게 또 되겠죠.
마음이 머묾이 있을 것 같을 것 같으면 은 이것은 곧 머묾는 일이 안이 함이 되고 이 이름이 머묾는 것이니라. 뭐 이렇게 설명할 수 있겠죠.
是故로 佛說菩薩은 心不應住色布施라하니라
시고 불설보살 심불응주색보시
그러기 때문에 궁극적으로 모든 종교인은 특히 불교를 믿는 사람들은 선행을 행하는데 선행은 布施(보시)를 제일 첫째로 친다. 그 중에서도 法布施를 제일 우선으로 하는데,
心不應住色布施 法布施가 되었든, 物質布施가 되었든, 어떤 布施가 되었든지 간에 마음은 어떤 사물에도 머물지 말고 布施시를 하라 라고 이렇게 가르친다.
불설 부처님은 그렇게 가르친다.
須菩提야 菩薩이 爲利益一切衆生하야 應如是布施니라
수보리 보살 위이익일체중생 응여시보시
菩薩은 一切衆生을 이익하게 하기 위해서 모든 중생의 이익과 행복을 위해서 응당히 이와 같이 보시한다.
布施를 하되 이렇게 相에 머물지 말고 어떤 격식이나 틀이나 어떤 조건이나 자기 나름의 어떤 선이나 기준이나 이런 걸 정해놓고 거기에 布施를 하는 게 아니라, 이렇게 어디에도 머물지 않고 하는 布施
이걸 이제 진정 일체중생을 위해서 하는 布施다 그런 이야기입니다.
如來가 說一切諸相이 卽是非相이며 又說一切衆生이 則非衆生이니라
여래 설일체제상 즉시비상 우설일체중생 즉비중생
如來가 說一切諸相이 卽是非相이며
일체모든상 여러 相을 이야기 하죠. 그런데 相이라고 하는 것도 사실은 相이 아니라는 거죠
卽是非相(즉시비상)이다 이 이름이 相이다. 이거죠.
그러니까 여기까지 유주의 無相 머무는 것이 있는데 대한 無相이고,
여기는 一切相에 대한 無相
그다음 又說一切衆生이 則非衆生이니라
또 말하건대 一切衆生이 곧 衆生이 아니다 그럼 뭐죠. 시명중생이다 이거죠
사실 衆生, 衆生 누가 언제 중생이라고 이름을 붙혀습니까?
부처님이 괜히 당신이 깨달음을 이야기하려고 편의상 그렇게 이름을 붙인 거지, 왜 우리가 중생입니까 중생도 아니고, 중생 아님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고, 부처님도 아님도 아니고, 부처이면서 중생이고, 중생이면서 부처고, 이름 붙이기에 달렸죠.
뭐 예를 들어서 어떤 50대쯤 되는 신도님을 두고 이야기를 한다면
누구의 딸도 되고, 할머니도 되고, 아내도 되고, 어머니도 되고, 뭐 학교 선생이라면 선생님도 될 수가 있고, 여러 가지 명칭이 붙을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명칭이 그것이 어디 고정불변한 것이라고 할 수가 없는 것이죠.
又說一切衆生이 則非衆生이니라 - 이 이름이 중생이니라.
須菩提야 如來는 是眞語者며 實語者며 如語者며 不광語者며 不異語者니라
수보리 여래 시진어자 실어자 여어자 불광어자 불이어자.
須菩提야 如來는 是眞語者며
참~ 이런 혼란스러운 어떻게 보면 굉장히 헷갈리고 혼란스러운 이야기고
또 전혀 불교에 대한 이해가 없는 사람이 들으면은 얼토당토 않는 것 같이 들리지만은 이것을 잘 이해하면은 이것이야 말로 참 진리다. 그래서
須菩提야 如來는 是眞語者며 實語者며 如語者며 不誑語者며 不異語者니라
다섯 번이나 당신의 말씀은 진실하다고 이렇게 스스로 말씀하고 있습니다.
眞語者 - 참다운 말만하는 하는 사람
實語者 - 실다운 소리만 하는 사람
如語者 - 똑같은 말만 하는 사람
不誑語者 - 거짓말을 전혀 하지 않는 사람, 거짓말 아닌 것만 하는 사람.
不異語者 - 사실과 다른 것은 전혀 말하지 않는다. 사실과 다르지 않게만 말하는 것
사실그대로 말한다. 이거죠.
이런 표현도 다른 경전에는 못 받었요.
眞語者, 實語者, 如語者, 不誑語者, 不異語者이니라
우리가 금강경 금강경 해서 참 얼른 이해가 가는 부분도 있고, 또 이해가 전혀 안가는 부분도 있고 그렇습니다. 그러나 이건 우리의 수준의 문제이지 부처님은 이렇게 당신의 깨달음에 의한 가르침의 진실을 이렇게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須菩提야 如來所得法은 此法이 無實無虛하니라
수보리 여래소득법 차법 무실무허
참 ~ 이 말이 건사하죠. 또
如來所得法(여래소득법)은 여래가 얻은 봐 법, 그러니까 뭐라고 하죠. 6년 고행 끝에 큰 도를 이루었다.
견명성오도다 밝은 별을 보고서 큰 도를 깨달았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얻었다.
뭐 별별 표현을 다합니다.
그런데 그 얻은 봐 법은 此法이 無實無虛니라
실다운 것도 없고, 고정불변한 어떤 실다운 것도 없고, 그렇다고 헛된 것도 아이다.
아주 유명한 말이죠.
如來所得法은 此法이 無實無虛다. 그래 中道죠.
어떻게 부처님의 6년 고행하고 나서 깨달음을 우리가 깨달음이 없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또 깨달음이 있다라고 하면은 그게 또 실질적으로 뭐겠습니까? 야~ 참 곤란하죠.
짐작은 가지만 이것이라고 내놓을 것은 아무것도 없죠. 그렇다고 부정하려니까?
부처님이 그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태자의 지위를 버렸죠. 6년간 고행을 했죠.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얻은 그 깨달음은 뭐입니까?
그래서 無實無虛(무실무허)라고 하는 것입니다. 실지로 그렇고요.
뭐 부처님의 깨달음만 그렇겠습니까?
得法無相이다 법을 얻은데 대한 무상을 이렇게 이제 표현한 거죠.
저 앞에도 무득무설분 하는 것이 있었죠. 거기도 역시 같은 뜻입니다.
그 다음 이제 내가 금강경에서 제일 저는 교훈이라고 생각하는 구절인데요.
須菩提야 若菩薩이 心住於法하야 而行布施하면 如人이 入暗에 則無所見이요
수보리 약보살 심주어법 이행보시 여인 입암 즉무소견
마음이 어떤 법에 머물러서 布施를 행할 것 같으면은, 선행을 한다.
법이라고 하는 것은 저 앞에서 色, 聲, 香, 味, 觸, 法 했던 그 모든 것과 또 그 나름의 자기 기준과 ,자기 선과, 자기 틀과, 자기 조건 그래요.
에이 이렇게 하니까 나는 보시 안해, 보시하려고 했다가 이렇게 하니까 보시를 안해. 뭐 이런 것이 있어요. 그런 예들이 많아요.
참 웃지 못 할 일 옛날 여기 범어사에 소임을 살고 있던 스님이 지금 뭐 어느 회사라고 하고 다 알 수 있는 회사데, 그 회사의 어머니 되는 보살님이 참 보시를 많이 했어요.
내가 짐작컨대 우리 불교계에다 수백억을 보시한 걸로 그렇게 짐작을 하는데,
그 분이 오천만원이라고 하는가 뭐 얼마를 소임 자에게 그때 한창 그 스님 수고하고, 잘하고 그래서 줘답니다. 줘는데 나중에 누구에게 들으니까? 그 스님이 이런 비행도 있고 저런 비행도 있다고 했어 그 소리를 듣고는 와서 나중에 도로 찾아갔다는 이야기가 있어요. 그걸 또 자기가 하더래요.
그걸 저는 참 하도 신기한 이야기라서 듣고 참 몇 번 내가 남의 이야기지만 몇 번이야기 한 적이 있는데, 그런 것 들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한번 마음에 새겨봐야 할 그런 일이 아니겠는가.
그런 게 이제 나름대로 心住於法입니다. 법에 마음이 어느 법에 머물렀다,
기준, 어떤 선, 조건, 자기 마음에 든다, 안 든다. 자기 나름대로 기준이 있는 거죠.
그래서 이제 도로 찾아갔다는 말을 듣고는 부처님이 이런 말을 한때는 그만한 이유가 있구나? 하는 것도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 이야기 이런데 에서 안하면 또 할 기회가 없죠.
그렇게 선회를 딱 정해놓고 보시를 행할 것 같으면
如人이 入暗에 則無所見이요, 어떤 사람이 캄캄한데 들어가서 아무것도 보지 못한 것과 같다.
캄캄한 동물에 돌도 많이 있고, 금은보화도 잔뜩 있는데, 빛이 없어가지고 한 짐 지고 나온다게 돌덩이만 한 짐 지고 나왔다 이거에요. 그랬을 때 그 상황이 어떻겠습니까? 얼마나 가슴 아픈 일이겠어요.
그리고 캄캄한 길은 정말 아무것도 안 보이는 먼 길을 가게 되면 은 나무에 부딪칠지, 돌부리에 체일지, 낭떠러지에 떨어져서 상처투성이, 피투성이가 되고 심지어 목숨까지 잃을지 알 수가 없는 것에요. 캄캄하면 은
智慧가 없으면 이제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智慧가 없다는 것은 기준, 틀과 조건을 딱 설정해놓고
다시 말해서 相을 딱 내세워 버리면은 그때는 벌써 相이 생겨버려요.
相이 생겨버리는 그만 안보여,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고요.
그 보살님이 자기가 보시하는데 대한 기준을 딱 설정해놓으니까?
그 스님의 좋은점도 안 보이는 거야, 안 좋은점 설명을 들었지만 좋은점까지 안 보이는 거야.
옛날에 줄때는 좋은점이 보여서 주었는데, 도로 빼었을 때는 안좋은 점만 보여서 빼었거죠.
그러니까 이게 참~ 표현이 기가 막혀서 금강경에서 제일 좋아하는 구절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어떤 사람이 캄캄한데 들어가면 아무것도 보지 못하는 것과 같다.
이건 우리가 길을 가는데도 그렇고 동굴 속에 들어갔을 때도 금은보화가 있어 매도 불구하고 빛이 없어서 돌덩이 흙덩이만 한 짐을 지고 나왔을 때 그 애석하고 분통하고 아픈 마음을 오죽하겠습니까? 우리 사는 게 그와 같다는 거죠.
우리는 어리석어가지고 자기선과 자기기준에 딱 이렇게 매여가지고서 더 이상 보지 못하는 것이 캄캄하다 이거죠.
그런데 그 다음 말이
若菩薩이 心不住法하야 而行布施하면 如人이 有目하야 日光明照에 見種種色이니라
약보살 심부주법 이행보시 여인 유목 일광명조 견종종색
마음이 만약에 어디 법이 머물지 않고 不住法
법이라는 하는 것은 어떤 틀, 기준, 조건 이런 것입니다.
거기에 머물지 아니하고 보시를 행한다.
그냥 하는 거예요. 그냥 아무 조건 없이, 아무 이유 없이
뭐 스님이니까 하고, 거지니까 안하고, 돈이 있으니까 하고, 돈이 없으니까 하고
그전에 우리 걸망지고 다닐 때 제일 아주 듣기 싫은 소리가 주지스님이 객인데 차비 있느냐? 하고 묻는 것 참 듣기 싫어요.
자기가 주고 싶으면 있든 없던 주는 것 이지,
있으면 주고, 없으면 안주고, 없으면 주고, 있으면 주고 언제 객들 주머니사정 주지가 생각했는가? 주지가
주는 데는 조건이 없습니다. 주고 싶으면 그냥 주고 줄 마음이 안 나면 안주면 그뿐 인거에요.
누가 달라고 합니까? 주게 되어있습니까? 받게 되어있습니까? 아무 그런 것 없어요.
법적 제한이 아무것도 없다고요. 마음이 내켜서 주면 그냥 주는 거지
그걸 이제 어떤 기준을 떡 이렇게 정해놓고 그러니까 참 어리석은 중생의 솥이죠.
그래서 우리가 心不住法 布施
마음이 법에 머물지 아니하고 보시를 행하면 어떤 사람이 눈도 잃고
日光明照라 햇빛도 환하게 밝아, 그래서 종종사물을 환히 다 볼 수 있는 거와 같다.
아무리 오솔길도요 환히 밝으면 잘다 닐 수 있습니다. 뭐 위험한 길도 하나도 다치지 않고 갈수가 있어요. 동굴 속에 환히 불이 밝다면 금은보화를 한 짐 지고 나올 수 있겠죠.
이런 것들을 여러 가지로 연관시켜서 생각해서 참으로 금강경의 지혜를 우리의 삶에 잘 받아들여서 수용한다면 대단한 가르침이다. 그런 생각이 늘 금강경을 읽을때 마다 들어요.
그래서 이것은 불자 비불자 관계없이 사람이 세상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최고의 어떤 교과서가 아닐까 저 나름대로 생각합니다.
얼마나 근사합니까? 참 비유가 멋지죠.
어둠과 밝음의 관계를 다각도 여러 가지방향에서 우리가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뭐 저가 저 나름대로 설명을 하지만은 경전이 담고 있는 심오하고 광범위한 의미를 뭐 100분의 일인들 어떻게 제가 설명을 할 수 있겠습니까?
그저 제 감량대로 나에게서 생각나는 거만치 그리고 과거분들이 금강경을 해석한 것에 대해서 또 내가 공감하는 것 이런 것을 이끌어다가 그것 해석하는 것이고, 설명하는 것이지.
여러 불자님들은 불자님들대로 경험이 있고, 지식이 있고, 그 나름대로 안목이 있고, 시각이고 그럴 거라 말이에요
그런 자신의 경험과 시각과 자신의 어떤 지혜를 다 동원해서 이 심오함 금강경의 가르침의 더 폭넓게 더 깊이 있게 더 생활에 적적하게 해설을 한다면 아주 건사할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경전을 수지, 독송, 서사, 위인, 해설, 이 오종법사의 어떤 실천덕목을 잘 이제 수행해야겠죠.
금강경을 공부하는 동안 금강행자라. 내가 그렇게 이야기하죠.
화엄경을 공부할 때 화엄행자,
법화경을 공부할 때는 법화행자
특히 자기가 이제 화엄경을 평생 좋아한다, 아니면 법화경을 좋아한다, 금강경을 좋아한다.
그러면은 금강경을 좋아한다 하면 금강행자라고 이렇게 불일 수 있습니다.
금강경을 실천 수행하는 사람을 금강행자,
법화경을 실천 수행하는 사람을 법화행자, 이렇게 옛날부터 불려왔습니다.
우리 금강행자들은 이런 가르침을 자신들의 어떤 경험과 지식과 이런 것 들을 잘 활용을 해서 제가 설명한 것 이상으로 아주 건사하게 참으로 생활에 더 적절하게 알맞은 멋진 해설을 기대합니다.
須菩提야 當來之世에 若有善男子善女人이 能於此經에 受持讀誦하면 則爲如來가
수보리 당래지세 약유선남자선여인 능어차경 수지독송 즉위여래
以佛智慧로 悉知是人하며 悉見是人하야 皆得成就無量無邊功德하리라
이불지혜 실지시인 실견시인 개득성취무량무변공덕
須菩提야 當來之世에 앞으로 올 세상에
若有善男子善女人이 能於此經에 능히 이 경전에
受持讀誦하면 則爲如來 수지독송하면은 곧 여래께서
以佛智慧로 부처의 지혜로써, 보통사람의 지혜가 아니라 부처의 지혜로써
悉知是人하며 悉見是人하여
다 이사람에 대해서 안다. 그리고 다 이사람에 대해서 본다. 이거야
왜냐 금강경을 제대로 수지 독송 할 것 같으면 바로 부처님하고 도가 같으니까 서로 통하다 이거죠. 그러니까 다 안다는 뜻이죠.
皆得成就無量無邊功德하리라
이들은 한량없고 가이없는 공덕을 성취하리라 그랬습니다.
無量無邊功德(무량무변공덕)이 내가 늘 이제 종지를 항상 놓치지 않고 말씀을 드리는 취지가 있죠.
바로 사람 개개인에게 내재해있는 이미 갖추어져있는 본래로 갖추어져있는 그런 無量無邊功德(무량무변공덕)을 뜻하는 것입니다.
뭐 그것을 성취한다고 표현을 그렇게 했습니다만 없었던 것을 새로 만든 것은 아니죠.
이미 내재해 있는 것을 우리가 확인하고 그걸 한 것 누리는 것 이게 이제 무량무변공덕을 성취하는 것이다 그랬습니다.
아주 참 14분까지를 금강경의 상권이라 그렇게 표현을 하는데
금강경의 이름이 나왔고 부처님께서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다 여기에 등장을 했습니다. 뭐 별별 분야의 衆生세계의 無相, 깨달은사람들의 無相, 忍辱, 布施 온갖 관계의 無相을 이야기를 했습니다.
결국 無相은 空性인데 空性은 곧 相이 없다는 것을 여기서 표현을 하고
본래 존재가 空性이고 無相이므로 우리가 그것을 그대로 이해를 하고 수용을 하면은 정말 無量無邊(무량무변)의 功德이 들어나는 거죠. 그것이 내 살림살이가 되는 거죠.
뭐 간단하게 정리해드리면 이제 그렇게 말씀드릴 수가 있습니다.
金剛般若波羅密 상권종이고 오늘 공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벌써 내일이 금요일이고 토요일, 일요일이네요.
좋은 주말되시길 바랍니다. _()()()_
첫댓글 주말에 조금 바빠서 이제야 겨우 녹취해서 올립니다. 틀린부분 있어면 이야기 해주세요 _()()()_
자혜성님은 갱상도 분이세요? 왜인고 하니 굳이 꼬투리를 잡자면 "있으면"을 "있어면"하시니까요. 그거나 저거나 뜻은 하나인데 괜히, 제가 웃자고... 개안쵸?
자혜성님! 수고하셨습니다. 감사합니다._()_
어떻게 그 깊은 뜻을 아셨나요, 네 경상도 맞아요 ㅋㅋㅋ 대원성님 고맙습니다
如來所得法은 此法이 無實無虛하니라...中道....자혜성님, 고맙습니다. _()_
갱상도?ㅋㅋ 경상도~ㅋㅋ 재밌네요......갱상도에서는 있어면~이라고 하나요?ㅋㅋㅋ
사투리가 좀 심하죠. 평소에는 잘모르는데 ㅋㅋㅋㅋ
자혜성님! 수고가 많으십니다. 감사드립니다. _()()()_
진정한 깨달음의 마음은 衆生들을 연민하는 연민심이다. 그것은 일체상을 떠나야 가능한 것... 자혜성님! 고맙습니다... _()()()_
자혜성님! 수고하셨습니다. 성불하십시요 _()_
자혜성님, 감사합니다. 수고하셨네요~_()()()_
고맙습니다 _()()()_
본래 존재가 空性이고 無相이므로 그대로 이해하고 수용하면 無量無邊(무량무변)의 功德이...자혜성님 고맙습니다._()_
자혜성님! 감사합니다... _()()()_
감사합니다,,,()()()
사극보다 더 잼있어요..아하.. 이런게 배우는 맛인가봅니다.. 혼자서 싱글벙글 기쁨을 또 누려봅니다. 감사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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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_()()()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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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은 부처님입니다................................................... 금강행자 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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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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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사람의 마음을 돌리지 못하고, 그 사람의 마음을 풀지 못 하면은 자리에서 떠나는 거죠. 피하는 것이 그것이 부처님의 마음입니다.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나무마하반야바라밀 나무마하반야바라밀
空이 그냥 空이 아니라 참으로 空하므로 묘하게 있는, 또 묘하게 있으면서 또 참으로 空한 그런 中道性을 우리가 이해를 하고 無相을 설명하고 空을 설명해야 ... 나무금강반야바라밀 나무금강반야바라밀 나무금강반야바라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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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금강반야바라밀경 나무금강반야바라밀경 나무금강반야바라밀경 _()()()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