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래기, 칼바람 맞고 야들야들… 잃었던 입맛도 싹∼ 돌아와요
최대산지 강원 양구 ‘펀치볼 마을’ 가보니…
강원 양구군 해안면 시래기덕장에서 시래기용으로 재배한 부드럽고 연한 무청을 바람이 통하는 그늘에서 말리고 있다.
무의 뿌리부분을 잘라내고 무청을 건조시킨 시래기는 전통적으로 겨울철 식단의 주요 식재료다. 처마 끝에 무청이 얼기설기 매달려 있는 겨울 풍경에서 어린 시절과 고향을 추억하는 중장년층도 적지 않다. 된장을 풀어 끓인 시래깃국부터 시래기밥, 시래기나물 등 시래기로 만든 음식은 신선한 푸른 채소가 귀하던 그때 그 시절 별미 영양식이었다. 그러나 이즈음 시래기 음식은 겨울철 별미일뿐더러 다이어트와 ‘웰빙 푸드’로 그 위상이 업그레이드되고 있다.
시래기의 국내 최대 산지는 강원 양구군 해안면의 ‘펀치볼마을’이다. 해발 1100m 산으로 둘러싸인 펀치볼마을은 타원형 분지로 도솔산전투, 가칠봉전투 등 한국전쟁 당시의 격전지였다. 당시 이곳을 찾은 외국 종군기자들이 가칠봉에서 내려다본 모습이 화채그릇(Punch Bowl) 같다며 ‘펀치볼’이란 이국적인 이름을 붙였다.
강원 최전방인 펀치볼마을은 산간마을로는 이례적으로 농경지가 넓은 편이다. 남북 11.95㎞ 동서 6.6㎞ 길이인 해발 400~500m의 분지마을은 고랭지채소 재배지로 유명하다. 하절기엔 콩, 고추, 브로콜리나 쌈야채를 재배하며 늦가을부터 겨우내 시래기덕장이 들어선다.
1월29일 펀치볼마을을 찾았을 때 시래기덕장마다 막대나 줄에 널린 30㎝ 안팎의 무청들이 영하의 칼바람 속에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면서 안쪽으로 연초록빛을 드러냈다.
이 지역에서는 30농가가 대규모 시래기덕장을 운영하는 통일고랭지영농조합법인 외에 펀치볼 환경농업 작목반의 친환경펀치볼시래기 등 유기농 무의 무청을 건조시켜 생산 유통하는 소규모 시래기 전문 브랜드들이 새롭게 각광을 받고 있다.
“무청 시래기는 바람이 통하는 밝은 그늘에서 겨우내 말려야 영양 손실도 적고 맛도 좋습니다.”
15농가로 구성된 친환경펀치볼시래기 이호균 총무는 “무를 잘라낸 무청을 11월부터 음력 정월 보름 정도까지 말린다”며 “2월 초부터 걷어내는 건조식품인 시래기는 연중 보관이 가능한 사계절 식품”이라고 말했다. 유기농산물을 취급하다가 환자용 다이어트식으로 시래기를 찾는 수요가 많아 2004년부터 시래기를 생산해 왔다는 친환경펀치볼시래기의 경우, 친환경농산물유통회사와 백화점 및 택배주문을 통해 유통시키는 시래기가 연간 7~8t 정도다. 가격은 1㎏ 1만3000원 선.
이 총무는 “이전엔 시래기가 무를 베어낸 뒤 남은 무청을 말려서 먹는 부수적인 2차식품이었으나 요즘은 시래기용 무를 별도로 재배할 만큼 수요가 많다”고 소개했다. 일반 가정에선 처마 밑에서 말린 시래기를 요리하려면 무청이 질겨 물에 푹 삶은 뒤 껍질을 벗겨내지만 요즘 시래기는 껍질째 먹어도 될 만큼 부드럽다.
맛과 감촉이 연하도록 시래기용 무를 재배하는 데다 무의 생육 및 건조과정에서 무청을 부드럽게 관리했기 때문이다. 김장 담그는 단단하고 여문 가을무 종자를 심은 뒤 무청이 질기고 억세지지 않도록 파종 후 50일 내에 무를 뽑아, 무는 잘라 땅에 파묻고 무청만 사용해 시래기를 만든다. 무는 파종 후 70일 정도 자라야 크고 실하지만 무청까지 웃자라기 때문에 시래기용으로 적당하지 않다. 따라서 시래기용으론 무가 덜 자라게 생육기간을 단축시킨다. 또한 무청이 크지 않도록 일반무의 절반 정도인 12~13㎝ 간격으로 빽빽하게 밀식(密植)한다.
시래기의 짙은 초록빛을 유지하기 위해 직사광선을 피하는 것이 시래기 말리기의 노하우다. 대규모 노천덕장에선 덕장의 상단에 햇볕가리개를 덮어씌우지만, 일부 농가는 아예 비닐하우스를 시래기덕장으로 활용한다. 여름내 쌈야채를 재배하는 비닐하우스의 양옆 문을 트고 천장에 차양막을 드리우면, 덕장 내 통풍이 원활하면서도 햇볕을 막아 무청의 초록빛이 짙어지며 부드럽게 맛이 좋아지기 때문이다.
시래기의 최대 산지 해안면에선 해마다 11월이면 마을 통일관 앞에서 시래기축제가 열린다. 지난해에는 신종 인플루엔자A(H1N1·신종 플루)로 중단됐지만 축제기간이면 시래기 음식 시식회를 비롯해 무껍질 길게 깎기 대회, 고랭지 농산물 경매 등 다양한 체험행사가 펼쳐진다. 양구=신세미 2010-02-03
어떻게 먹을까
들기름과 찰떡궁합… 고등어 조림에 넣어도 좋아
자연 그늘에서 겨우내 건조한 무청 시래기는 장기간 보관이 가능한 사계절 식품이다.
“해마다 정월 대보름 무렵 나오는 그해 시래기를 그대로 혹은 삶은 뒤 냉동시켜 사계절 즐겨 먹습니다.” ‘펀치마을’ 주부 임미숙(강원 양구군 해안면 오유리)씨는 “말린 시래기는 물에 30분 정도 삶은 뒤 손으로 주물주물 만져주면 훨씬 부드러워지고 다시 하루 정도 물에 담갔다 헹구면 보다 연하게 음식 맛이 산다”고 조언했다.
임씨가 펀치마을에서 대대로 살아온 시어머니를 비롯한 ‘시래기 요리의 달인’들로부터 전수받은 시래기 요리의 맛내기 비법은 들기름이다. 시래기밥은 간장양념에 비벼 먹기도 하지만 시래기를 넣고 졸인 강된장을 넣고 비벼 먹는다.
시래기밥의 경우 쌀 위에 잘게 썬 시래기를 얹은 뒤 소금 외에 들기름을 한두 숟가락 더하면 밥맛이 고소하면서 시래기도 한결 부드러워진다는 것. 시래기나물도 볶을 때 참기름 대신 들기름을 사용하며 소금과 간장을 넣어 조물조물 간을 맞춘다. 고등어조림이나 김치찌개에도 시래기를 추가하면 씹는 맛이 더해지면서 소화도 한결 수월해진다고 시래기 전문가들은 조언한다. /신세미 2010-02-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