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서) 위키피디아 영문판 (번역) 크메르의 세계 ※ 사진자료는 "크메르의 세계"가 추가한 것임.
시소왓 시릭 마딱 왕자
Sisowath Sirik Matak

1967년 1월 9일에 촬영된 시소왓 시릭 마딱 왕자의 모습. (사진출처: ancestry.com) |
시소왓 시릭 마딱(Sisowath Sirik Matak: 1914.1.22-1975.4.21) 왕자는 캄보디아 와르만 왕조(Varman dynasty)의 종친(왕족)이었다. 그는 캄보디아 정치에 깊숙히 개입했는데, 특히 자신의 사촌인 노로돔 시하누크(Norodom Sihanouk)를 축출했던 1970년의 쿱테타(쿠테타)에 깊숙히 관련되었다. 이 쿱테타 후 시릭 마딱 왕자는 론 놀(Lon Nol)과 함께 "크메르공화국"(Khmer Republic) 수립에 참여했다.
1. 캄보디아 정치에의 개입
시소왓 시릭 마딱 왕자는 시소왓(Sisowath) 국왕의 증손자로 프놈펜에서 출생했다. 그는 1930년부터 프랑스 식민당국의 공무원으로 근무했다. 프랑스 식민당국의 헌법에 따르면, 노로돔(Norodom) 국왕이나 시소왓 국왕의 자손들 모두 국왕으로 선출될 수 있었기 때문에, 시릭 마딱 역시 캄보디아 왕위에 대한 권리를 가지고 있었다. 1941년 시소왓 모니웡(Sisowath Monivong) 국왕이 서거하자, 프랑스 당국은 시릭 마딱 왕자의 사촌인 노로돔 시하누크 왕자를 국왕으로 선택했다. 프랑스가 보기엔 시하누크가 유순해보였기 때문이다. 훗날 시하누크는 시릭 마딱 왕자가 자신에 대한 분노를 숨기고 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나를 미워했다. 왜냐하면 자신의 숙부인 시소왓 모니웡 국왕이 내 대신 자기에게 왕위를 물려줘야만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자신이 왕위를 물려받는 것이 마땅하다고까지 생각하고 있다."(주1)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난 후부터 시릭 마딱 왕자는 캄보디아 정치에 점점 더 개입하게 된다. 론 놀이 이끌던 우파 정당 "크메르혁신"(Khmer Renovation) 당에 가담한 그는 1947년 총선에 참가했지만, 크메르혁신 당은 단 한 석도 얻지 못했다.(주2) 1952년에는 총리로 행세하던 시하누크가 그에게 국방 업무를 담당시켰고,(주3) 1954년 독립 직후에 정식으로 국방부 장관에 임명했다. 1955년 총선을 앞두고 시하누크가 새롭게 조직한 "성꿈 리어스 니욤"(Sangkum Reastr Niyum: 대중사회주의 공동체) 운동이 "크메르혁신" 당을 흡수했고, 이후 총선에서 대승하였다.
시하누크의 "성꿈"이 대부분의 우파를 흡수하긴 했지만, 그럼에도 시릭 마딱 왕자는 영원한 시하누크의 반대파로 남아 있었는데, 특히 시하누크가 북-베트남 군대의 캄보디아 영토 내 주둔에 대해 방관하는 것을 못마땅해 했다. 1960년대 내내 시하누크는 그를 중국, 필리핀, 일본 등지의 대사로 파견함으로써, 캄보디아 국내 정치에 대한 시릭 마딱의 영향력을 최소화하는 데 성공했다.
(주1) Norodom Sihanouk, My War with the CIA, Pantheon, 1972, p.27.
(주2) Dommen, A. The Indochinese experience of the French and the Americans, Indiana University Press, 2001, p.196.
(주3) Dommen, 위의 책, p.210. |
2. 1970년의 쿱테타
1969년 론 놀이 총리로 취임한 후 시릭 마딱의 영향력은 실질적으로 증대했다. 론 놀 내각의 부총리를 맡은 그는, 수출입과 금융업, 제약과 주류생산을 국유화했던 시하누크의 이전 정책들과 반대로, 일련의 경제적 분권화와 규제완화를 진행해나갔다.(주4) 1970년 3월 18일 시하누크가 외유 중일 때, 시릭 마딱은 시하누크를 국가수반에서 해임하는 국회 투표를 주도한 론 롤을 지원했다. 이미 이 사건 이전에 북-베트남 대사관 앞에서 --- 총리와 부총리가 배후에서 조정했을 가능성이 있는 --- 여러 차례의 반-베트남 폭동이 발생해 구실을 축적해둔 상태였다. 외국 언론들은 새로운 정부에서도 계속해서 부총리를 맡은 시릭 마딱 왕자가 이 쿱테타의 실질적인 조직자일 것으로 추측했다.(주5) 시릭 마딱이 론 놀에게 확신을 주기위해, 귀국 후 자신과 론 놀 두 사람을 처형한다는 시하누크의 파리 기자회견 녹음테이프를 들려줬다는 주장도 있다.(주6) 그런가 하면 시릭 마딱이 시하누크 실각에 동참하라고 론 놀에게 권총을 겨누며 위협했다는 설도 있다.(주7)

(사진) 쿱테타 다음날 모습을 비춘 론 놀(우측)과 시릭 마딱 왕자(좌측). 이 장면은 원래 론 놀을 중심으로 시릭 마딱과 인 땀이 좌우에 배석한 것이지만 이 사진에서는 우측의 인 땀의 모습이 배제된 장면이다.
시하누크 또한 자신의 사촌인 시릭 마딱을 이 쿱테타의 주동자로 여겼다. 시하누크는 시릭 마딱이 "미국중앙정보부"(CIA)의 지원을 받고 있으며 오랜 기간 자신의 정적인 손 웟 탄(Son Ngoc Thanh)과 접촉해왔다면서, 이미 1969년에 론 놀에게 이러한 계획을 제안한 바 있다고 주장했다.(주8) 시하누크의 이러한 주장은, 론 놀 내각의 장관 중 한 사람이었던 쁘롬 토(Prom Thos)가 뒤에 역사학자인 벤 키어난(Ben Kiernan)에게, 1969년 3월 경 시릭 마딱이 시하누크가 암살되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에 대해 론 놀이 그러한 계획은 "범죄적 광기"(criminal insanity)라고 하여 거절했다고 증언한 사실에 토대를 두고 있었다.(주9)
쿱테타에 뒤이어 "크메르공화국" 수립을 선포한 후, 시릭 마딱은 스스로 왕실의 모든 작위를 던져버렸다. 하지만 그는 초창기에 또다른 시소왓 왕가의 인물인 자신의 아들을 왕위에 등극시키려고도 비밀리에 계획하기도 했었다.(주10)
론 놀 정권은 출범 초창기 수천명의 베트남계 주민들을 학살하는 배후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하지만 시릭 마딱이 개인적으로 이러한 학살을 막으려 노력했다는 증거도 존재한다.
(주4) Norodom Sihanouk, 위의 책, p.41.
(주5) TIME, The Man Behind the Symbol, 1971-05-17.
(주6) Marlay, R. and Neher, C. Patriots and tyrants, Rowman & Littlefield, 1999, p.165.
(주7) Tucker, S. Encyclopedia of the Vietnam War: a political, social, and military history, ABC-CLIO, 1998, p.389.
(주8) Norodom Sihanouk, 위의 책, pp.36-38.
(주9) Kiernan, Ben. How Pol Pot came to power, Yale UP, 2004, p.301.
(주10) Sorpong Peou, Intervention & change in Cambodia, Palgrave Macmillan, p.49. |
3. 크메르공화국 정부
크메르공화국 첫 해에는 론 놀의 건강이 좋지 않았으므로, 총리 대행이었던 시릭 마딱이 정부 내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했다. 시릭 마딱은 언제나 육군 소장의 제복 차림에 지휘봉을 든 모습으로 대중 앞에 나타났기 때문에 대단히 군사적 이미지를 갖고 있었다.(주11) 론 놀은 특히 캄보디아 도시지역의 반-시하누크 성향의 학생들에게 인기가 있었고, 시릭 마딱은 서구지향의 도시 "엘리트들"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 하지만 시골지역의 캄보디아인들은 친-시하누크적 성향으로 남아 있었다.(주12) 시릭 마딱은 캄보디아 정치 조직들에서 인적 조력을 상대적으로 많이 받지 못했고, 점차로 론 놀의 형제인 론 논(Lon Non)에게 권력기반을 상실해가기 시작했다. 결국 론 논이 시릭 마딱을 반대하는 시위를 여러 차례 조직하면서 그는 1972년에 사임했다.(주13)
시릭 마딱의 강력한 지지세력이었던 미국이 상당한 압력을 행사했지만, 론 놀은 시릭 마딱을 사실상의 가택연금에 처했고, 그는 서서히 크메르공화국 정권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높이기 시작했다. 1973년 4월 론 놀은 동생인 론 논을 해임하고, 국회의 임기를 연장한 후 "고위정치위원회"(High Political Council)를 조직했는데, 여기에는 론 놀 자신을 포함하여 시릭 마딱과 쩽 헹(Cheng Heng), 그리고 인 땀(In Tam)이 포함됐다.(주14) 하지만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시릭 마딱은 자신의 대중적 지지율을 높이고자 시하누크의 귀국을 허용하자는 입장을 보였다.
(주11) Kamm, H. Cambodia: report from a stricken land, Arcade, 1998, p.61.
(주12) Sorpong Peou, p.91.
(주13) Kamm, pp.110-112.
(주14) Leifer, M. Selected Works on Southeast Asia, Institute of Southeast Asian Studies, 2005, p.420. |
4. 프놈펜의 함락
1975년 1월 1일, 크메르루즈(Khmer Rouge) 공산반군은 포위된 수도 프놈펜에 대해 건기 공세를 개시했다. 4월 1일 론 놀 대통령이 사임한 후 하와이로 망명을 떠났다. 크메르루즈는 론 놀의 이름을 선두로 한 "살생부"를 발표했고, 그들의 군대는 프놈펜을 포위하고 있었다.
4월 12일, 주캄 미국대사 존 군터 딘(John Gunther Dean)은 크메르공화국 고위 공직자들에 대해 미국의로의 망명처 제공을 제의했다. 롱 보렛(Long Boret)과 시릭 마딱의 경우 크메르루즈 살생부에서 처형 대상 "7인의 반역자"에 이름이 올라 있었지만, 이들과 론 놀 대통령 동생 론 논을 포함한 많은 공직자들이 이 제안을 거절했다.(주15) 시릭 마딱은 미국대사 앞으로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다.
"아아, 저는 그런 비겁한 모습으로는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귀하가 자유를 선택한 국민들을 포기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미국과 귀하를 믿은 것이 저의 실수였습니다."
프랑소와 비조(Francois Bizot)에 따르면, 시릭 마딱 왕자는 이 편지의 사본들을 만들어 프놈펜 시내에 배포했다고 한다.
시릭 마딱 및 그를 따라 잔류했던 관료들은 아마도 1975년 4월 21일 크메르루즈에 의해 처형된 것으로 보인다. 프랑스대사관의 전통문에 따르면, 이들이 처음에 프랑스대사관으로 대피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며칠 후 일군의 군인들이 들이닥쳐 이들을 끌고 나갔다. 프랑소와 비조에 따르면, 군인들이 사람들에게 다가와 만일 자발적으로 동행하지 않을 경우 강제로 연행했다고 한다. 시릭 마딱의 정확한 사망경위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시하누크는 시릭 마딱이 4월 21일 프놈펜 스포츠구락부(Cercle Sportif )에서 간단한 형식으로 총살됐다는 보고를 받았다고 한다. 하지만 또 다른 이들은 참수형을 당했다고도 전한다. 한편 헨리 키신저(Henry Kissinger)와 그 외의 연구자들은 시릭 마딱이 복부에 총상을 입은 후 치료를 받지 못해 3일 후에 숨졌다는 보고에 주목하였다.(주16)
시릭 마딱은 노로돔 껫니어리(Norodom Kethneari) 공주와 결혼했었다. 그들의 아들 시소왓 시리랏(Sisowath Sirirath: 1946- ) 왕자는 현재 연립여당이었던 푼신펙당(FUNCINPEC)의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자리하고 있다.
(주15) 크메르루즈가 발표한 "7인의 박역자"는 시릭 마딱, 론 놀, 손 웟 탄, 인 땀, 롱 보렛, 쩽 헹, 그리고 소테나 페르난데스(Sosthene Fernandez)였다.
(주16) Kissinger, H. Ending the Vietnam War, Touchstone, 2003, p.530. |
5. 시릭 마딱 왕자 어록
-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하는 정권을 지원하는 일은, 곧 공산주의를 돕는 길이다."
- 주캄 미국대사 존 군터 딘에게 보낸 편지 : "저의 친구이신 대사님께. 저에게 자유를 향한 피난처를 제공해주신다고 한 귀하의 편지에 대해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아아, 하지만 저는 그런 비겁한 모습으로는 떠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귀하께서, 그리고 귀하의 위대한 조국이 자유를 선택한 국민들을 포기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당신들은 우리를 보호하는 일을 포기했고, 그 과정에서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안녕히 가시고, 귀하와 귀하의 조국이 이 하늘 아래에서 행복하시길 기원합니다. 하지만 내가 사랑한 조국, 바로 이 땅에서 내가 죽어야만 한다면, 그다지 나쁠 것은 없습니다. 우리는 모두 태어났다는 이유로 언젠가는 죽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제가 귀하와 미국인들을 믿었던 것은 저의 실수였습니다. 저의 친구이신 대사님, 부디 저의 이 허심탄회하고 우정어린 마음을 받아주시길 바랍니다. 시릭 마딱 왕자 드림"(각주)
(각주) 딘 대사에게 보낸 시릭 마딱 왕자의 편지는 <Autrefois, Maison Privée>에 삽입되어 출판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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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마지막 주캄 미국대사에게 보낸 편지는 조국을 사랑하는 마음과 사나이 대장부 답습니다. 하지만 스스로의 힘 없이 남에게 의지해서 일을 행했을 때의 불행이라 씁쓸합니다.
아주 중요한 지적이시네요. 스스로의 힘, 특히 21세기는 더욱 그러한 것 같습니다. 하여간 캄보디아 근대사에 굵직한 인물들이 참 많네요. 문제는 지금도 그러한 인적 인프라가 있을 것으로 추정됩니다. 캄보디아 관료들이나 사업 파트너들을 만만하게 봐서는 안 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크메르공화국" 시대를 읽다 보면, 시릭 마딱 등 고위관료들이 이렇게라도 최후를 맞이해서 그나마 이 정권에 대해서 한 가닥 동점심을 갖게 만드네여. 만일 이런 최후의 모습마저 없었다면 캄보디아 역사에서 크메르공화국을 뭐라고 해야 할지.... 참....
캄보디아를 우습게 보는 한국인이 저를 포함하여 너무 많습니다, 무식의 소치로 알고있습니다, 슬픈역사와,많은인물들이 있엇다는것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좋은자료와 글에 항상 감사하고 있습니다,
꼬르 님과 록카에 님은 항상 겸허하신 것 같습니다. 캄보디아에 대해서는 두 분 회원님들이 대선배님들이시니 행여 실수가 있으면 따끔하게 지적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