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양은 없다>-그래도 태양은 있다
"내일은 내일의 태양이 뜬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스칼렛은 이렇게 내일의 희망을 정의한다.
여기, 태양을 잃어버린 스물 다섯 대책 없는 청춘들의 가슴 벅찬 이야기가 있다.
쉴 새 없이 고동치는 푸른 맥박이 이미 오래 전 청춘을 넘겨버린 내 심장을 다시금 두근거리게 만든다.
델마와 루이스의 절망을 따라 그들이 다다른 곳.
그러나 그 곳에서 질주를 멈추기엔 그들은 너무 젊다.
일탈의 장소에서 맞이하는 태양은 눈부시게 아름답지만 굳게 발 디딘 일상에서의 일출은 가슴 시리게 눈물겹다.
무명 복서 도철(정우성 분)은 한때 신인왕에 빛나는 유망주였으나 부상 후유증으로 자주 코피를 쏟고 정신을 잃는다.
까마득한 후배도 이젠 거대한 산으로 다가온다.
인생의 전부였던 권투가 그의 발목을 잡는 덫이 된 것일까.
후배와의 다툼 끝에 체육관을 나온 뒤 관장(양형호 분)의 소개로 찾아간 흥신소에서 도철은 허우대 멀쩡한 건달 홍기(이정재 분)를 만난다.
홍기는 말 그대로 폼생폼사, 깡패에게 맞아도 얼굴부터 걱정하고 빚에 쪼들리면서도 양복 주름만큼은 칼 같이 각을 잡아야 직성이 풀리는 천생 건달.
걸핏하면 재혼한 어머니를 찾아가 돈을 뜯어내고 입만 열면 협박에 허풍, 그러나 그에게도 복병은 있다.
바로 깡패 사채업자 병국(이범수 분)의 존재가 그것이다.
(이범수가 연기한 깡패 병국은 비주얼이 강한 두 주연배우들에 가리지 않고 독특한 존재감을 드러낸다. 후에 한층 진화한 <짝패>의 조폭 '장필호'라는 그로테스크한 이미지의 전신으로 보여진다. 단발머리의 괴상망측한 이 사채업자는 홍기의 천적으로서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게 된다)
어느덧 한 쌍의 바퀴벌레처럼(?) 죽이 잘 맞게 된 도철과 홍기.
흥신소 문 사장(이기열 분)의 까다로운 오더도 척척 해결하는 환상의 커플이 되어간다.
챔피언 홍수환을 영웅으로 생각하는 도철과 말끝마다 영화의 한 장면을 인용하는 자칭 배우 매니저 홍기의 다소 언밸런스하면서도 나름 유쾌한 조화.
어느 날 홍기로부터 영화배우 지망생이자 내레이터 모델인 미미(한고은 분)를 소개받은 도철은 첫눈에 사랑에 빠지고 만다.
삼류 복서와 무명 여배우의 사랑.
어쩐지 우울한 분위기를 풍기는 설정 때문일까, 이 영화에선 유독 비가 많이 온다.
그들이 처음 데이트 하는 신에서도 소나기가 온다.
도철이 빗속을 달려 구해온 파란 우산을 들고 활짝 웃으며 돌아서는 미미.
그 때 흘러나오는 올드 팝 'love potion no.9'은 오히려 일말의 불안감을 줄 정도로 밝고 경쾌하다.
같은 시각 홍기는 병국에게 납치당해 폭행과 협박을 당하고 다급해진 홍기의 공금횡령으로 덩달아 흥신소를 나오게 된 도철, 이제 두 사람 다 완전 실업자다.
도철과 홍기에게 꿈이 있듯 미미에게도 간절한 소망이 있다.
배우가 되기 위해 그녀는 유능한 조력자 차 사장(김정수 분)을 따라나서지만 아직 행운의 여신은 그녀의 편이 아닌 듯하다.
감독들이 많이 모인다는 한 파티에서 미미는 가까스로 오디션을 볼 기회를 얻지만 질투에 사로잡힌 도철이 난동을 부리는 바람에 판이 깨지고 만다.
화가 나서 뛰쳐나가는 미미, 그녀를 따라 나가는 도철과 홍기.
그런 도철의 뒤통수를 맥주병으로 내려치는 차 사장.
그 와중에도 차 사장에게서 받은 합의금을 몰래 빼돌리려다 들키는 홍기는 이미 친구가 아니라 웬수다.
(여기서 잠깐, 숨은그림찾기! 야단법석 파티에서 이 영화의 특별출연배우 다섯 사람이 나온다. <바람난 가족>의 임상수 감독, <봄날은 간다>의 허진호 감독, <주노명 베이커리>의 박헌수 감독, <시월애> 이현승 감독, <여고괴담> 박기형 감독...어디어디 숨었을까?)
얼마 후 퇴원한 도철은 홍기의 집으로 가지만 무늬만 친구인 홍기는 도철의 통장을 들고 잠적해 버렸다.
몇 날 며칠을 찾아 헤매다 사기행각을 벌이는 현장을 잡은 도철, 두 사람은 'let's twist again'의 발랄한 템포에 맞춰 쫓고 쫓기는 질주를 시작한다.
도망친 홍기는 경마로 돈을 다 날리고, 그래도 친구랍시고 경찰서에서 다시 체육관으로 돌아간 도철에게 도움을 청한다.
유치장에서 풀려난 홍기 앞에 또다시 나타난 병국 일당.
이제 그 잘난 우정 때문에 도철까지 냅다 도망쳐야 하는 신세가 된다.
그런데도 뻔뻔한 홍기, 도철에게 빈대붙어서는 연습중인 도철의 카세트 레코더를 차지하고 'wooly bully'의 리듬에 맞춰 신나게 춤을 춘다.
결코 미워할 수 없는, 참으로 대책없는 청춘이다.
이제 두 사람에게 다른 길은 없어 보인다.
병국은 점점 더 홍기의 목을 죄어오고 도철의 병은 나날이 증세가 심해진다.
파란 우산을 쓰고 걸어오던 미미가 지갑을 두고 왔다며 되돌아간 사이 그녀의 빨간 승용차 위에서 코피를 쏟으며 쓰러지는 도철.
블루와 레드의 극명한 대비는 안정과는 거리가 먼 그들의 불길한 미래를 떠올리게 한다.
병국과의 문제를 잘 조율해준다는 조건으로 다시 문 사장의 일을 맡은 홍기와 도철.
그러나 가난이 죄인 사람들을 때리고 협박하는 데 소질이 부족한 그들은 이제 막다른 길로 치닫게 된다.
다시 홍기 앞에 나타난 병국은 더 이상 인내심을 발휘할 뜻이 없어 보인다.
"잘 숨어있어라, 지금 걸리면 아주 죽는다."
철망 바닥에 끌리는 쇠파이프의 마찰음은 그것이 단순한 협박이 아님을 말해준다.
죽음의 공포를 느낀 홍기는 충동적으로 보석상을 털다 걸리고 친구를 말리던 도철과 함께 델마와 루이스가 되어 바다로 간다.
칠흑 같은 바다, 그보다 더 암울한 현실.
그러나 바닷가에서 일출을 본 두 사람은 다시 그들의 자리로 돌아간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시합을 위해 링에 오르는 도철.
병국을 화분으로 내리치고 도망쳐 나온 홍기.
또다시 패배자가 된 도철이 어깨를 들먹이며 흐느낄 때 홍기는 나란히 등을 보이며 앉아 친구의 곁을 지킨다.
굳게 닫힌 미미의 옥탑방 앞에서 쭈그린 채 밤을 지샌 그들 앞에 붉게 떠오르는 태양.
또 하루어치의 삶을 겨우 살아냈지만 그들에게도 아침은 온다.
비록 절망뿐인 현실이지만 그래도 태양은 있다.
글/배성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