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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양선교회의 창립자들에 관한 연구
박명수(서울신학대학교 교수)
* 원문 PDF 화일은 첨부합니다. --> 동양선교회의_창립자들에_관한_연구-hso7004.pdf
들어가는 말
역사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제도나 사상이 아니라 사람이다. 사람이 결국 제도도
사상도 만들어 내기 때문이다. 따라서 역사에 대한 연구도 근본적으로 사람에 대한 연구에서 출
발해야 한다. 이것은 동양선교회의 역사에 대한 연구에서도 마찬가지이다. 즉 동양선교회를 바로
이해하려면 어떤 사람들이 이 단체를 만들었는가를 살펴 보아야 할 것이다. 본 논문에서 필자는
동양선교회의 창립자들을 살펴 봄으로 동양선교회의 뿌리와 그 성격을 정리하여 보고자 한다.
우리 한국에서는 동양선교회의 창설자로서 카우만과 길보른을 들고 있다. 이명직목사의
약사에는 동양선교회는 카우만과 길보른의 노력으로 만들어 졌다고 소개되고 있다.1) 그러나 미
국측의 자료와 일본측의 자료는 좀 다르다. 미국의 동양선교회 총재를 지낸 어니(Edward
Erney)는 그의 책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에서 동양선교회의 창립자들의 이야기를 쓰고 있는
데 여기에는 카우만붑와 나까다 쥬지, 길보른 네사람을 기록하고 있다. 즉 카우만 부인과 나까다
쥬지를 더 넣은 것이다.2) 하지만 최근 훌러신학교선교대학원의 선교학박사논문으로 제출된 논문
“일본동양선교회성결교회: 1901-1983”에서 동양선교회의 일본선교사 머윈(John Merwin)은 위
의 네사람에 사사오 데쓰사브로를 덧 붙이고 있다.3)
이 세책은 각각 그 지역의 입장을 대변해 주고 있다고 본다. 한국성결교회는 일본과 오
랫동안 좋은 관계를 가질수 없었다. 왜냐하면 한국은 일본의 지배를 받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동
양선교회의 초기 지도자들 가운데 일본인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의도적으로 배제하였다
고 생각된다. 그러나 미국의 동양선교회는 카우만을 일본으로 초청하고, 지금도 일본성결교회의
창립자로 일컬어 오는 나까다 쥬지는 포함시켰다. 하지만 사사오 데쓰사브로는 포함시키지 않았
다. 그러나 사사오 데쓰사브로는 초기 동경성서학원의 원장으로서 많은 사람들이 그의 영향을 받
았다. 일본성결교회는 그도 창립자로 포함시키고 있다.
누가 동양선교회의 창립자인가 하는 것은 동양선교회의 역사가 밝혀 주어야 한다. 비록
1901년 부터 카우만과 나까다가 일본에서 선교를 시작했지만 처음에는 특별한 명칭이 없었다.
공식적으로 동양선교회라는 말을 사용한 것은 1905년 11월이다. 동경성서학원에 일본인 외에도
한국인과 중국인이 공부하게 되고, 따라서 선교의 비젼이 아시아로 확대됨에 따라 이 선교회의
공식명칭을 동양선교회라고 정하고 조직을 정비하였다. 여기에서 동양선교회의 회장에는 나까다
쥬지, 성서학원의 원장에는 사사오 데쓰사브로, 전도에는 나까다 쥬지, 재정과 섭외에는 카우만
부부와 길보른이 맡았다.4) 그리고 이 다섯 사람이 동양선교회의 창립자로 되어있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이 다섯 사람을 다 동양선교회의 창립자로 보려고 한다.
본 논문에서 이 다섯 사람을 다 다루려는 것은 단지 이런 법적인 것 때문만은 아니다.
1). 이명직, [조선예수교동양선교회성결교회약사] (경성: 성결교회이사회, 1929),
5-10.
2). Edward & Esther Erney, No Guarantee But God: The Story of the Founders
of Oriental Missionary Society, Charles Cowman, Juji Nakada, E. A.
Kilbourne, Lettie Cowman (Greenwood, ID: OMS International, 1969).
3). John Merwin, "The Oriental Missionary Society Holiness Church in Japan
1901-1983" (D. Miss. diss., Fuller Theological Seminary School of World
Mission, 1983).
4). “동양선교회란 무엇인가?” [焰의 舌] 144호 (1905년 11월).
이 다섯 사람이 모두 한국성결교회의 형성에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다. 카우만과 길보른에 대해서
는 이명직목사가 이미 언급하였기 때문에 당연하다. 그러나 카우만 부인도 포함시키는 것이 중요
하다. 카우만 부인은 매우 활동적인 인물로 동양선교회의 발전에 큰 공헌을 하였기 때문이다. 나
까다는 사실상 동양선교회를 시작한 사람이며, 한국인들도 그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한국성결교
회는 동경성서학원에서 공부한 사람들로 시작되었다. 이들이 가장 큰 영향을 받은 사람이 사사오
데쓰사브로이다. 따라서 동양선교회의 초기 역사와 한국성결교회의 뿌리를 알기 위하여 이 다섯
사람을 다 살펴 보는 것이 좋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본 논문은 이 다섯 사람이 구체적으로 동양선교회를 시작하기 이전까지만 다루려고 한
다. 다시 말하면 각 창립자들의 출생과 상장, 그리고 동양선교회에 가담하기 까지의 역사로 제한
한다는 것이다. 그 뒤의 역사는 동양선교회의 역사에 속하게 될 것이다.
I. 카우만 부부(Charles E. and Lettie B. Cowman)
카우만(Charles E. Cowman)은 1868년 3월 13일 일리노이주 툴론(Toulon)의 전통
적인 감리교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감리교의 속장이었고, 그의 집은 종종 감리교의
순회전도자들이 머물곤 했다. 21살 되던 1889년에 카우만은 어맀을 때부터의 친구인 레티 버드
(Lettie Burd)와 결혼을 하였다. 레티는 1870년 3월 3일생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은행가로서
성공하여 레티는 어렸을 때부터 예술적인 가정에서 비교적 풍요하게 살았다. 결혼 후에 카우만은
1892년까지 세속적인 삶을 즐겼다.
1892년 크리스마스 직전에 레티는 시카고 은혜감리교회에서 열린 부흥집회에 참석하였
다. 이 집회에는 유명한 오페라 가수생활을 버리고 복음송을 부르는 가수가 노래를 부른다는 것
이었다. 평소에 음악에 관심이 있었던 레티는 이집회에 참석하여 은혜를 받았다. 세속적인 음악
에서는 찾을 수 없는 평안을 얻었다. 이 집회에서 레티는 회개하고 예수를 영접하였다. 예수를
영접한 레티는 자기 남편을 교회로 인도하였다. 카우만은 여기에서 자기의 삶을 돌이켜 보고 새
로운 삶을 살기로 결심하였다. 이 부부는 새로운 자세로 살아가기 시작했고, 은혜감리교회의 열
심있는 신자가 되었다.5)
이런 회심의 체험을 한 다음에 카우만은 은혜감리교회의 신실한 신자인 시미스터
(George Simister)로 부터 온전한 성화에 대해서 듣게 되었다. 시미스터는 카우만에게 회개한
다음에도 여전히 죄악의 “옛 사람”이 인간의 마음 속에 남아 있으며, 이것은 그리스도의 보혈로만
완전히 씻어 질 수 있다고 말해 주었다. 시미스터의 이 말에 자극을 받은 카우만은 회개 이후에
오는 제 2의 축복인 성결의 은혜를 추구하였다. 그 결과 그는 이 두번째 은혜를 체험하게 된 것
이다. 카우만은 “나는 나 자신과 나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겼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것을 받아
주셨다. 그러므로 이후부터의 삶은 이전과는 결코 같을 수 없다”고 말했다.6)
카우만이 온전한 성화, 즉 성결을 체험한 뒤에 그는 열심히 여러 신앙집회에 참석하게
되었다. 마침 그때 전국 엡윗연맹대회 (Epworth League Convention)가 테네시 챠타누가
(Chattanooga)에서 열리게 되었고, 여기에 카우만은 은혜감리교회의 대표로서 참석하게 되었
다. 엡윗연맹의 중요한 강조점의 하나가 선교였다. 이 대회의 강사였던 조이스 감독(Bishop
Joyce)은 열열한 성결운동의 지도자로서 세계선교에 대해서 강조했다. 이 조이스 감독의 설교는
카우만에게 선교의 열정을 불러 일으켰다. 이것이 카우만의 첫번째 선교각성이었다.7)
5). Lettie B. Cowman, Missionary Warrior: Charles E. Cowman (N.P.: Cowman
Publication, Inc., 1929), 34.
6). Cowman, Missionary Warror, 71-72.
7). Cowman, Missionary Warrior, 84. 조이스 감독은 1901년 시카고에서 열린 제
2회 성결총회(General Holiness Assembly)의 발기인이었다. 이 성결총회는 성렬
운동가들의 모임이었다. S. B. Show, Echoes of the Ceneral Holiness Assembly
(Chicago: S. B. Show, 1901), 12.
카우만의 선교에 대한 관심은 그후 계속되었다. 시카고의 무디교회에서는 심프슨(A.
B. Simpson)을 강사로 대 선교집회가 열리게 되었다. 카우만도 여기에 참석하게 되었다. 카우
만은 심프슨이 아내와 어린 자녀를 데리고 오직 믿음만으로 모든 필요를 하나님께 맡기고 아프리
카의 오지에 들어가서 선교한 젊은 사업가에 대해서 말하는 것을 듣고 큰 감명을 받았다. 카우만
은 그의 일기에 “나는 하나님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갔다”고 기록하였다.8)
카우만은 여러 신앙집회에 참석하면서 동시에 선교잡지들을 읽기 시작했다. 카우만은 선
교잡지를 통하여 인도선교에 대해서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는 아내의 건강 때문에 인
도에 갈수 없었다. 카우만이 낙심하고 있을 때 당시네 복음주의 선교운동의 지도자인 피어슨
(Arthur T. Pierson)을 만나게 되었다. 피어슨은 카우만에게 조급하게 서둘지 말라고 권고하면
서 “기다려요. 젊은이. 하나님의 시간을 기다려요”라고 말했다. 카우만 부인은 그 남편에 대한 전
기에서 “그[카우만]는 친구인 아더 피어선 박사를 매우 사랑했고, 그의 책을 열심히 읽었을 뿐만
아니라, 특별히 외국 선교에 관하여 피어슨을 글을 자주 인용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9)
여기에서 우리는 카우만의 선교관에 대해서 살펴 보아야 할 것 같다. 카우만은 심프슨과
피어슨의 영향을 받았다. 이 두사람은 다같이 소위 “신앙선교”운동의 주창자들이다. 신앙선교란
선교에 필요한 인적자원과 물적 자원을 인간적인 기구나 단체에 의존하지 않고, 단순히 하나님께
기도함으로서 해결하는 선교방식을 말한다. 이런 원칙에 대해서 심프슨과 피어선은 다같이 동의
하면서도 구체적인 문제에서는 서로 의견이 달랐다. 심프슨은 철저하게 인간적인 방법을 배재하
였는데 결과적으로 오지선교에서 많은 인명피해를 가져오게 되었다. 여기에 대해서 피어슨은 심
프슨의 극단적인 태도의 위험을 지적하면서 어느정도의 제도적인 뒷밭침은 필요하다고 보았다.
필자의 의견으로는 카우만은 심프슨의 극단적인 방법 보다는 피어슨의 온건한 방법을 따른 것 같
다.10)
회심 직후부터 카우만은 시카고 복음화에 나섰다. 카우만은 “작은 지옥”이라고 불리우는
시카고 슬럼지역의 전도관에 자원 봉사자로서 참여하여 전도활동을 하였다. 이 슬럼지역에는 “친
구도 없고, 집도 없고, 돈도 한푼 없는”(friendless, homeless, and penniless) 버림받은 인생
들이 살고 있었다. 카우만은 이들에게 들어가서 성결의 복음을 외쳤다. 그리하여 노름판과 술판
에 메인 사람들을 그리스도의 제단 앞으로 인도하여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하였다. 카우만에게 있
어서 이 “작은 지옥”은 전도훈련학교였다. 후에 카우만이 일본에서 선교할 때 이 슬럼지역의 “비
천하고, 버림받은 사람들”(down-and-outs)은 정성을 다해 카우만을 도와 주었다.11)
필자는 시카고의 “작은 지옥”의 전도관 사역이 시카고에 근거를 두고 도시선교에 힘쓴 성
결단체인 “메트로폴리탄 교회 연합”(Metropolitan Church Association)과 관련된 단체라고
생각한다. 이 단체는 1894년 메트로폴리탄 감리교회에서 일어난 대 부흥의 결과로 생겼는데 주
로 “불 타는 숲”(Burning Bush)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워졌다. 또한 이 단체는 다른 한편으로 냎
(Martin W. Knapp)과 리스(Seth C. Rees)가 세운 만국사도성결연맹(International
Apostolic Holiness Association)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다. 만국사도적성결연맹의 지도
자들은 이 단체외에도 많은 도시선교단체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여기에서 우리는 성결운동
이 도시의 슬럼선교운동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12)
8). Cowman, Missionary Warrior, 84.
9). Cowman, Missionary Warrior, 84, 246.
10). Dana L. Robert, "Arthur Tappan Pierson and Forward Movements of
Late-Nineteenth-Century Evangelicalism," (Ph.D. diss., Yale University,
1984), 259-280.
11). Cowman, Missionary Warrior, 67-69.
12). Elmer T. Clark, The Small Sects in America (New York: Abingdon Press,
1945), 78; Susie Cunningham Stanley, "Alma White: Holiness Preacher with a
Feminist Message," (Ph.D. diss., Iliff School of Theology and the
University of Denver, 1987), 71-72.
카우만은 한편으로는 도시선교에 힘쓰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직장선교에 힘을 썼다. 카우
만은 시카고에서 전신회사에 다녔고, 여기에서 부서의 책임자로서 일했다. 이곳에서 카우만은 열
심히 전도했다. 그의 전도의 첫 열매는 그의 평생의 친구이자 동역자인 길보른(Earnest A.
Kilbourne)이었다. 카우만은 길보른과 함께 이 회사에서 전신선교단(Telegraph's Mission
Band)를 조직했다. 이들은 한달에 한번씩 주일 오후에 모여 기도하며, 선교를 위해 헌금도 하였
다. 이 단체는 카우만과 길보른의 선교에 많은 도움을 주었다. 후에 카우만과 길보른은 일본에서
이와 유사한 전신선교단을 설립하기도 하였다.
카우만이 하나님의 일을 계속함에 따라 그는 성서지식이 부족함을 느꼈다. 그래서 그는
애반스톤(Evanston)에 있는 개렛복음주의신학교의 특별과정에서 공부하였다. 카우만은 감리교
인이었으므로 감리교계통인 이학교에 들어가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러나 직장을 다니면
서 이 과정을 공부하기에는 힘이 들었다. 직장시간과 공부시간에 서로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당시에 카우만의 직장시간이 오후 5시부터 밤 12시까지이기 때문에 그는 무디성서학원
(Moody Bible Institute)의 오전반에 등록할 수 있었다. 이 학교는 카우만의 집에서 세 블럭
떨어진 곳에 자리잡고 있었다. 카우만은 이 학교에서 1900년까지 6년동안 열심히 공부했다.
무디성서학원은 19세기 후반에 기존의 신학교육이 당시의 교회의 요구에 부응하지 못하
고 있다는 판단아래 시작된 성서학원운동의 하나이다. 즉 이론적인 신학교육보다는 실천적인 훈
련을 강조하며, 자유주의적인 고등비평보다는 성서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고 숙달하게 하고, 평
신도들을 훈련시켜 각각 맡은자리에서 최선의 봉사를 하게 하였다. 이런 성서학원의 정신은 카우
만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이곳에서 카우만은 성서학원의 원장인 토레이(R. A. Torrey)박사와
성서교수였던 그레이(James Gray)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특별히 그레이의 “성경의 종합적인
연구” 방법은 그의 성서연구에 큰 영향을 미쳤다. 이런 무디성서학원의 여러 특징들은 후에 동양
선교회가 아시아의 여러나라에서 성서학원을 세울 때 본받은 하나의 기준을 제시했다.
그리나 우리는 카우만과 동양선교회에 미친 무디성서학원의 영향력을 과대평가하지 말아
야 한다. 왜냐하면 무디성서학원의 성서강조와 평신도사역자 양성등은 동양선교회에 큰 영향을
미쳤지만 특별히 교리적인 측면에서는 동양선교회와 무디성서학원은 다른 길을 걸었다. 이 중에
서 지적해야 할 것은 성결에 관한 것이다.
웨슬레안 성결운동과 무디성서학원은 성결론에 있어서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웨슬
레안은 성결은 중생이후에 성령의 능력으로서 인간의 부패성에서 온전하게 벗어나는 것으로 부고
있다. 즉 온전히 죄에서 벋어나는 것을 성령의 제 2의 축복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여기에
비해서 토레이는 죄에서 온전히 벗어나는 그런 의미의 성결은 이세상에 존재하지 않으며, 성령의
역사도 근본적으로 성결이 아니라 능력이라고 보았다. 토레이는 공공연하게 웨슬레안 성결론을
공격하였다.13) 여기에 대해서 카우만은 자기는 분명히 무디성서학원과 토레이의 입장과 다르다
는 것을 밝혔다. 카우만은 토레이가 우리를 위하여 그리스도가 하신 일(What Christ did FOR
US)만 강조 할 뿐, 우리 안에서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의 세례(the Sanctifying Baptism of
the Holy Spirit of The Holy Ghost IN US)를 무시한다고 비판한다.14)
토레이는 신유운동에 대해서도 반대하였다. 하지만 이외의 문제에 있어서는 거의 같은
입장을 가지고 있다.
13). R. A. Torrey, The Baptism with the Holy Spirit (New York: Fleming H.
Revell Co., 1895), 12; 15. 토레이의 성령세례관에 대해서는 필자의 논문,
“Concepts of Holiness in American Evangelicalism: 1835-1915," (Ph.D. diss.,
Boston University, 1992), 218-221을 참조하시오.
14). Chas[Charles] E. Cowman, "Our Old Man" or God's Prescription for Our
Sanctification (Los Angeles, CA: N. P., 1921), 27-28. 무디성서학원과 카우만
의 성결론에 대한 자세한 비교는 본인의 논문, “Roots of the Korea Evangelical
Holiness Church with Special Reference to the Doctrine of Holiness” (STM
thesis, Boston University School of Theology, 1992), 82-89를 참고하시오.
카우만이 본격적으로 선교사를 지망했을 때, 그는 당연히 감리교 선교부의 문을 두드렸
다. 이것은 물론 그가 어려서 부터 감리교에서 자라기도 했지만 카우만은 무디성서학원에서 일본
인 나까다 쥬지를 만났다는 점도 작용했다. 나까다는 일본의 감리교의 전도자로서 카우만에게 일
본에 와서 선교할 것을 권했다. 그러나 정작 감리교선교부 당국은 카우만의 지원에 대해서 적극
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뒤에 감리교선교부는 카우만부부에게 일본에서 선교사로 일할 수 있
는 자리를 제공했지만 이미 카우만 부부가 교단 선교에 대해서 마음이 떠난 뒤였다.
카우만은 이 당시에 신시내티에 있는 냎(Martin W. Knapp)을 찾아가고 있었다. 카우
만은 오래 전부터 냎이 발행하는 신앙잡지인 [부흥사](Revivalist)를 구독하고 있었다. 카우만
은 냎과 자신의 선교에 대해서 상의하는 가운데 냎으로 부터 교단선교부를 의지하지 말고, 오직
하나님만 의지하고 선교지로 떠나는 것이 보다 신앙의 길이라는 말을 듣고, 더 이상 교단 선교부
에 미련을 두지 않고, 선교를 하기로 작정하였다. 카우만은 냎이 조직한 신앙단체인 만국사도적
성결연맹에 의해서 안수를 받고 1901년 1월에 미국을 떠나 일본을 향하였다. 이 안수식에서 카
우만부인도 함께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만국성결연맹의 안수받은 교역자의 명단에 기록되어있
다. 카우만부인은 동양선교회의 3대 총재로서 동양선교회의 발전에 중요한 역활을 하였다.15)
II. 나까다 쥬지(中田重治)
카우만은 1901년 2월 22일 일본에 도착해서 오랜 친구인 나까다 쥬지를 만났다. 나까다
쥬지는 이미 1898년 9월 일본으로 돌아와서 열심히 전도활동을 벌이고 있었다. 카우만을 일본으
로 초청한 것은 나까다 쥬지였으며, 카우만은 일본에 와서 나까다 쥬지와 협력하여 선교활동을
전개했다. 따라서 동양선교회의 두기둥은 카우만과 나까다 쥬지라고 말할 수 있다.
나까다 쥬지는 1870년 10월 27일에 아오모리현(靑森縣) 히로사케시(弘前市)에서 하급
사무라이의 세째 아들로서 태어났다.16) 나까다 쥬지의 아버지는 그가 어렸을 때 세상을 떠났다.
그런데 이 히로사케시에 나까다 쥬지의 장래에 큰 영향을 미칠 감리교 목사가 있었다. 그는 혼다
요이찌(本多庸一)이었다. 혼다목사는 히로사케에서 열심히 전도하여 이 교회에서만 70명이상의
목회자를 배출하였다. 이미 혼다는 나까다 쥬지의 두 형을 그리스도에게로 인도하였다. 그러나
나까다 쥬지는 계속 말썽꾸러기였다. 혼다는 그러나 불교신자인 나까다 쥬지의 어머니에게 예수
가 아들을 변화시켜 줄 것이라고 위로하였다. 결국 나까다 쥬지는 혼다의 전도의 결과로 예수를
믿게 되었다. 말썽꾸러기 나까다 쥬지는 기독교인이 된 뒤에 당장 자기 어머니를 전도하였다. 많
은 사람들이 그의 어머니를 말렸다. 이때 나까다 쥬지의 어머니는 “나의 아들들에게 그렇게 좋은
일을 한 종교가 나에게 나쁘게 할리가 없다”고 하면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였다. 나까다 쥬지의
어머니는 그가 전도한 수많은 사람들 가운데 첫번째 사람이다. 또한 나까다 쥬지는 이때부터 평
생 혼다를 정신적인 지주로 삼고 살았다. 혼다는 그 뒤에 일본감리교의 감독이 되었다.17)
나까다 쥬지는 어렸을때 부터 혼다목사가 교장으로 있던 도오기쿠구(東奧義熟)에 다녔
다. 그런데 나까다 쥬지가 18살이 되었을 때 혼다목사는 동경의 에이와(英化)학교의 교장이 되었
다. 영화학교는 후에 청산학원대학으로 발전하였다. 혼다목사는 이곳으로 나까다 쥬지를 불러서
입학시켰다. 나까다 쥬지는 이곳에서 처음에는 영문학을 공부하였으나, 뒤에 사명을 느껴 신학으
15). Cowman, Missionary Warrior, 112. 카우만부인은 만국성결연맹의요람의 안
수받은 교역자의 명단에 계속해서 나오고 있다.
16). 나까다 쥬지에 대한 연구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米田 勇, [中田重治
傳] (東京: 福音宣敎會, 1979); Edward & Esther Erney, No Guarantee But God;
The Story of the Founders of the Oriental Missionary Society, 25-46; John
Merwin, "The History of the Oriental Missionary Society Holiness Church in
Japan," 37-47; Ernest A. Kilbourne, The Story of a Mission in Japan (Tokyo:
Cowman and Kilbourne, [1907]).
17). Edward & Esther Erney, No Guarantee But God, 26-27.
로 전공을 바꿨다. 그러나 정작 신학으로 전공을 바꾸고 보니 그이 마음에 걸리는 것이 있었다.
그것은 고등비평이었다. 당시 일본에는 벌써 독일의 자유주의신학이 들어 오고 있었다. 그래서
나까다는 실망하여 신학공부에 취미를 잃게 되었다. 결국 나까다는 부진한 성적 때문에 학교를
졸업하지 못하고 중퇴해야만 했다.
에이와학교에서 나까다 쥬지는 신학공부 대신 유도와 웅변에 열중하였다. 그리고 열심히
전도에 힘썼다. 당시 그의 형은 감리교의 목사였는데 나까다쥬지는 주말이면 그의 형의 교회에
가서 열심히 전도하며 봉사하였다. 나까다 쥬지가 에이와학교를 그만 두어야 했을 때 혼다교장은
그를 불러서 학교는 나쁜 성적 때문에 다닐 수 없지만 감리교전도자로 일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
하면서 지시마(八雲)에 전도자로 갈 생각이 없냐고 물었다. 지시마는 북해도와 러시아 사이에 있
는 섬으로서 섬 전체에 신자가 두명밖에 없었다. 이곳은 일본에서 가장 어려운 오지였지만 나까
다 쥬지는 하나님의 명령으로 알고 순종했다. 1892년의 일이었다. 전도자로서의 나까다의 활약
은 눈부셨다. 그는 가는 곳 마다 큰 부흥을 이루었고, 이런 공로가 인정되어 1894년 나인드
(William X. Ninde)감독으로부터 감리교 목사로 안수 받게 되었다. 그리고 동시에 감리교의
여전도사였던 카추코와 결혼도 하였다.
나까다 쥬지의 목회는 겉으로는 매우 성공적인 것처럼 보였지만 내면으로는 위기였다.
그는 성령충만이 없이는 목회를 할 수 없다고 생각을 하고, 이것을 위하여 미국으로 유학을 가서
무디성서학원에서 공부하고 싶었다. 그리해서 그는 무디에게 편지를 보내 입학허가를 받았다.
1896년 말 나까다 쥬지는 미국으로 향하였다. 혼다의 전송을 받으면서 배에 오른 나까다 쥬지는
배에서 전에 일본의 선교사였으며 당시에는 미국의 태평양 연안에서 일본인들을 위해서 목회하는
해리스(Merriman C. Harris)를 만나게 되었다. 해리스는 열렬한 성결운동가로서 후에 감독이
되어 일본과 한국교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해리스는 나까다 쥬지에게 자기와 함께 일하자고 권
했지만 나까다 쥬지는 무디성서학원이 있는 시카고로 향했다.18)
나까다 쥬지가 무디성서학원에서 배우기를 기대했던 것은 전도의 방법과 성령의 능력이
었다. 무디성서학원은 이론교육 보다는 실질적인 사역을 위한 훈련을 강조하였다. 동시에 이런
전도가 성령의 능력을 힘입어야 가능하다고 믿고, 성령충만을 강조하였다. 나까다 쥬지가 무디성
서학원에 도착하였을 때에 이 학원의 교장이던 토레이박사는 “당신은 성령으로 세례를 받았습니
까?”라고 질문하였다. 나까다는 이 학교의 강조점과 같이 기독교의 사역을 위한 능력을 간구하였
다. 때때로 그런 경험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다시금 원점으로 돌아가는 것을 경험하였다.
이렇게 낙심하고 있을 때 그는 무디성서학원 내에서 같은 감리교도들을 발견하게 되었
다. 그가 바로 카우만이었다. 카우만은 전신선교단과 함께 나까다 쥬지의 학비를 대 주었다. 또
한 카우만은 나까다 쥬지를 자기 교회에 인도하였고, 이곳에서 나까다 쥬지는 유명한 의사이며,
성결운동의 지도자인 보인톤(Boynton)의 성경공부반에 참석하게 되었다. 이곳에서 공부하면서
나까다 쥬지는 또한 많은 성결책자를 읽기 시작하였다. 그는 카라다인(Beverly Caradine)의
[옛 사람]이라는 책과 힐스(A. M. Hills)의 [성결과 능력], 그리고 웨슬레의 [기독자의 완전]을
열심히 공부하였다. 특별히 힐스는 무디성서학원의 교장이던 토레이 박사의 친구로서 이 학교에
특별강사로 초청되었다. 힐스는 무디성서학원에 온 일본인 나까다 쥬지에게 자기의 책 [성결과
능력]을 선물로 주고, 웨슬레안의 입장을 분명하게 가르쳐 주었다. 비록 힐스는 토레이의 친구이
지만 성결과 성령에 대해서는 이 두사람은 다른 입장을 가지고 있었다.
나까다 쥬지가 여러 사람과 책자를 통하여 배운 것이 웨슬레안의 성결운동의 멧시지였
다. 웨슬레안은 신자가 해결해야할 가장 중요한 문제는 능력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 내면에 있는
죄악의 쓴 뿌리 즉 옛 사람을 몰아내는 일이라고 가르쳤다. 나까다 쥬지는 “그러나 내가 진정으
로 필요로 하는 것은 능력(Power)이 아니라 죄 씻음(Cleansing)이다. 나는 전에 때때로 능력
을 받았다. 그러나 내 본성 안에 잘못된 무엇이 있음을 느꼈다. 그러나 나는 문제의 촛점을 알지
못하였다”고 말했다. 그가 발견한 문제의 근원은 바로 인간 내면의 부패성, 곧 죄악의 쓴 뿌리였
18). Merwin, "The Oriental Missionary Society Holiness Church in Japan,"
41-42.
다.19)
그러나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이론이 아니라 체험이다. 1897년 11월 22일 무디성서
학원에 인도인 데이비드(V. A. David)가 와서 집회를 인도하게 되었다. 설교가 끝났고, 많은
사람들이 앞으로 나와서 간증을 하였다. 그러나 나까다는 아무런 은혜의 체험을 하지 못하였다.
그는 자기의 방으로 돌아와서 울며 기도했다. 침대가 제단이었고, 그 제단 앞에 자기의 몸과 마
음과 가족과 위대한 설교자가 되려는 야망까지도 다 드렸다. 이때 그의 마음 속에 정결함을 받았
다는 확신이 들었으며, 한없는 평화가 가득함을 느꼈다. 여기에서 그의 인생은 달라졌고, 성결운
동가로서 그의 새로운 인생이 시작되게 되었다.20)
이렇게 성결의 은혜를 체험한 나까다 쥬지는 더 이상 미국에 머물 이유를 찾지 못하였
다. 왜냐하면 그는 이 세상에서 가증 귀한 것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는 원래 무디성서학원을 마
치고, 계속 공부하고 싶었다. 그러나 이제 은혜를 체험한 그는 빨리 고국에 돌아가서 죽어가는
심령을 구원하고 싶었다. 그리해서 다음해 4월 그는 학기가 끝나자마자 다시 일본으로 귀국하기
로 작정하고 영국을 거쳐서 일본으로 돌아왔다. 그가 미국에서 머문 것은 1년 10개월이었으며,
일본에 돌아 온 것은 1898년 9월이었다.
나까다 쥬지는 무디성서학원에서 공부하는 동안 성결파 사람들과의 깊은 관계를 가졌다.
그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은 카우만과 그의 전신선교단과의 관계이다. 카우만의 전신선교단은 그
후에도 계속 나까다 쥬지를 도왔고, 나까다 쥬지는 일본에서 전신선교단의 지원으로 선교활동을
계속하였다.21)
나까다 쥬지는 미국에서 오순절동맹(Pentecostal League)과 관계를 맺고, 그 회원이
되었다. 오순절동맹은 영국의 해리스(Reader Harris)에 의해서 시작된 웨슬레안 성결단체로서
미국에도 지부를 갖고 있었다. 나까다 쥬지는 이 단체의 미국책임자인 칼킨스(Calkins)의 추천
으로 런던의 오순절동맹 본부에 들러 해리스를 만났고, 이들로 부터 따뜻한 환영을 받았다.22) 나
까다 쥬지는 후에도 이 단체와 깊은 관계를 맺었으며, 경제적인 후원도 받았다. 나까다 쥬지가
일본으로 돌아와서 만든 잡지인 [불의 혀](火 焰)는 사실 이 오순절동맹의 잡지 이름과 같다. 그
후에도 나까다 쥬지는 이 동맹의 지도자이며, 경건서적 가운데 베스트 셀러인 [가장 높으신 분을
향한 나의 최선](My Utmost for His Highest)의 저자인 챔버스(Oswald Chambers)를 하
나님의 성서학교에 소개하기도 하였고, 일본에도 초청하여 함께 세계전도 여행에 나서기도 하였
다.23)
나까다 쥬지는 영국에서 또한 웨슬레의 무덤을 방문하였고, 일본에 이미와서 선교활동을
하고 있던 벅스톤(Barclay Buxton)의 집을 방문하였다. 벅스톤은 당시에 일본에 있었기 때문
에 만나지 못하였지만 나까다 쥬지가 일본에 돌아오자마자 벅스톤을 찾아가 그와 깊은 교제를 나
누게 되었다. 일본에 돌아와서 그는 일본 내에 이미 활동하고 있던 벅스톤을 비롯한 성결운동의
지도자들과 함께 성결친우회를 조직하여 열심히 성결운동을 전개하였다. 이런 성결운동의 중심은
나까다 쥬지가 1899년 7월에 시작한 성결잡지 [불의 혀]였다. 이 잡지는 나까다 쥬지를 중심으
로 성결운동을 널리 소개하였고, 따라서 나까다 쥬지는 전국적으로 순회전도자로 활동하게 되었
다. 처음에 나까다 쥬지가 일본에 도착하였을 때에 그는 감리교 당국은 그를 순회전도자로 임명
했으나 얼마후 나까다 쥬지는 독자적으로 활동하게 되었다.24) 이렇게 독자적으로 활동하다가 카
19). Kilbourne, The Story of a Mission in Japan, 5-6.
20). Merwin, "The Oriental Missionary Society Holiness Church in Japan,"
44-45.
21). Cowman, Missionary Warrior, 89-90.
22). Kilbourne, The Story of a Mission in Japan, 9-10.
23). Merwin, "The Oriental Missionary Society Holiness Church in Japan,"
102-103; Mrs. Chambers, Oswald Chambers: His Life and Work (London and
Edinburgh: Marshal, Morgan, and Scott, 1959), 82.
24). 米田 勇, [中田重治傳], 91-102.
우만을 일본으로 초청하여 함께 일하게 된 것이다.
III. 사사오 데쓰사브로(笹尾鐵三郞)
카우만과 나까다 쥬지는 일본에 도착하여 6주만에 성서학원을 시작하였다. 이 성서학원
을 위하여 나까다 쥬지는 사사오 데쓰사브로를 초청하였다. 사사오 데쓰사브로는 성서학원의 교
장으로서 초기 동양선교회의 지도자들을 길러내는데 결정적인 역활을 하였다.
사사오 데쓰사브로는 1868년 8월 일본 미에현(三重縣) 츄시(律市)에서 이또가(伊勢家)
의 막내로서 태어났다. 어렸을 때 부터 불교를 독실하게 믿는 어머니에 이끌리어 불교를 믿게 되
었다. 시골에서 학교를 졸업한 후에 사사오 데쓰사브로는 동경에 가서 게이오의숙(慶應義熟)에서
공부를 하고, 해군에 입대하려 하였으나 신체검사에 불합격하여 목적을 이루지 못하였다. 그리하
여 뜻을 바꾸어 그는 미국으로가서 상업을 공부하여 무역업을 하려고 하였다.
사사오 데쓰사브로는 1887년 5월 미국 캘리포니아주 산호세에 있는 산호세상업대학
(San Jose Commercial College)에 입학하게 되었다. 그리고 많은 일본인 학생들을 보살펴 주
고 있는 닷지목사의 집에서 하숙하게 되었다. 특별히 닷지목사의 나이먹은 어머니는 사사오 데쓰
사브로의 구원을 위하여 매일 기도하며, 전도하였다. 이 할머니의 전도에 감몀을 받은 그는
1887년 12월에 자기의 죄를 회개하고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였다. 일본의 불교도가 기독교로 개
종한 것이다.
이당시에 미국의 샌프란시스코에서는 해리스목사의 영향력으로 일본인들 사이에서 놀라
운 부흥운동이 일어났다. 1874년 하코다테에 첫번째 선교사로 갔던 해리스는 1886년 부터는 태
평양연안의 일본인들을 복음화 시키는 책임을 맡았다.25) 그는 열심히 복음을 전하는 부흥사였을
뿐만이 아니라 성결의 복음에 철저했던 사람이다. 이제 막 복음을 받아들인 사사오 데쓰사브로는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해리스의 교회를 찾아가 그의 집회에 참석하고 여기에서 성결의 은혜를 체
험하였다. 오랫동안 불교의 가르침을 받아 왔던 사사오 데쓰사브로는 불교에서 사죄의 확신을 찾
을 수 없었다. 또한 그는 마음을 청결하게 하려고 노력했으나 그런 노력들은 헛 되었다. 사사오
는 이때 “그러나 성령의 불이 떨어져 나의 옛 사람을 태워 버렸다. 이제 보혜사가 내 마음에 들
어 오셨고, 그 때부터 계속 내 마음에 거하셨다”고 간증한다. 이렇게 사사오 데쓰사브로가 성결의
은혜를 받은 것은 그가 회심한지 2년후의 일이었다.26)
이렇게 은혜를 체험한 사사오 데쓰사브로는 다니던 대학을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전도활
동에 나섰다. 당시의 태평양 연안에는 해리스의 사역의 결과로 많은 일본인들이 복음을 받아 들
였고, 그중에는 동료 일본인들의 전도를 위하여 본격적으로 나선 사람도 있었다. 그중의 대표적
인 사람들이 가와베(河邊貞吉)로서 후에 자유감리교도로서 순회전도자가 되었다. 사사오 데쓰사
브로는 가와베와 함께 샌프란시스코 지역에 살고 있는 일본인 전도에 나섰다. 그러다가 1892년
사사오 데쓰사브로는 워싱톤주 시애틀에 초청을 받아 사역을 하였고, 또한 가와베는 포틀랜드주
오레곤에서 목회를 하였다. 시애틀에서 사사오 데쓰사브로는 축산을 공부하러 왔던 아끼야마(秋
山由五郞)를 전도하였는데 그는 후에 동양선교회의 순회전도자가 되었다.27)
미국의 서부지방에서 전도를 하던 가와베와 사사오 데쓰사브로 일행은 일본으로 돌아가
서 같은 동포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894년 3월 말에 일
본 요꼬하마에 도착하였고, 곧 동경에 가서 긴좌감리교회에 출석하게 되었다. 이들이 원래 해리
25). Wade C. Barclay, History of Methodist Missions, 6 vols (New York: The
Board of Missions of the Methodist Church, 1957), Volume 6, Methodist
Episcopal Church 1845-1939, 292-296; 681; 701.
26). 사사오 데쓰사브로의 간증은 “Out of Darkness into His Marvelous Gift,"
Way of Holiness, vols 3, no. 3 (July 1911)에 실려 있다.
27). Merwin, "The Oriental Missionary Society Holiness Church in Japan,"
59-61.
스의 영향을 받은 사실을 생각하면 이들이 감리교회에 나가게 되것은 자연스러운 것이다. 가와베
와 사사오 데쓰사브로 일행은 긴좌감리교회의 열성있는 멤버와 같이 “작은 양떼”(Little Flock)
라는 전도단체를 만들어 열심히 전도활동을 하였다.
이 단체는 일본에서 헵시바신앙선교회(Hephzibah Faith Missionary Association)
과 관련을 맺었다. 이 선교회는 1892년 아이오와주 그린우드(Greenwood)에서 조직된 단체로서
불기둥(Pillar of Fire)이나 “타는 떨기나무”(Burning Bush)같은 웨슬레안 성결단체와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28) 이들은 사사오 데쓰사브로 일행이 일본에 도착한 1894년에 일본에서 선
교활동을 시작했다. “작은 양떼들”은 헵시바선교회로 부터 경제적인 도움을 받았다. 사사오 데쓰
사브로는 그후 계속해서 이 단체와 관계를 맺어왔으며, 이 단체의 잡지인 [하나님의 보냄](Sent
of God)에 자기의 사역을 보고하기도 하였다.29) 일본에서 이 단체와 후에 도착한 동양선교회는
좋은 관계를 유지하였고, 나중에 헵시바선교회가 해채되게 되자 이 단체는 동양선교회에 흡수되
게 되었다.30)
일본에서 “작은 양떼들”에게 가장 큰 영향력을 미친 것은 벅스톤이다. 사사오 데쓰사브로
는 이미 미국에서 벅스톤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일본에 와서 헵시바선교회의 안내로
벅스톤을 만나 그의 제자로서 약 4년동안 성경과 신학을 공부하였다. 벅스톤은 영국의 캠브리지
대학교르 졸업한 성공회 목사로서 성결운동의 지도자였다. 그는 일본에 와서 산골도시인 마쯔에
(松江)에 조그마한 집을 짓고, 일본전역에서 젊은이들을 불러 모아 성경과 신학을 가르쳤던 것이
다. 이곳에 “작은 양떼들”이 모여 미래의 전도자가 되기 위한 공부를 한 것이다. 벅스톤은 이들을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했다: “어떤 일본인들은 이미 성서의 대가여서 때때로 그들이 나에게 무릎
을 꿇고 배우는 것 보다 내가 그들에게 배우는 것이 나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곤 했다.”31) 이곳에
서 공부한 사람들 가운데에는 나중에 자유감리교회, 웨슬레안감리교회, 구세군, 동양선교회등의
지도자가 되었다. 이렇게 되자 이 “작은 양떼들”은 자연적으로 해채되게 되었다. 과장이 없이 벅
스톤이야말로 일본의 성결운동의 대부라고 말할 수 있다. 벅스톤은 나중에 윌케스(Paget
Wilkes)와 함께 일본전도대(Japan Evangelistic Band)를 조직하여 열심히 전도활동을 하였
다.
앞에서 언급한대로 나까다 쥬지는 일본에 와서 벅스톤과 만나 깊은 교제를 나누었다. 아
직 사사오 데쓰사브로가 벅스톤 밑에서 공부하고 있을 때, 벅스톤은 나까다를 초청하여 성결집회
를 가졌다. 벅스톤은 이미 이런 종류의 집회를 여러번 개최하였다. 자연히 나까다 쥬지는 이곳에
서 공부하고 있던 사사오 데쓰사브로와 교제를 나누게 되었다. 그리고 카우만과 함께 성서학원을
세웠을 때 나까다 쥬지는 그를 교장으로 초청하게 되었다. 이런 이야기를 들은 벅스톤은 사사오
데쓰사브로에게 나까다 쥬지의 초청에 응하도록 권고 하였다. 그 뒤에도 나까다와 카우만은 벅스
톤의 다른 제자들을 초청하여 같이 일하였다. 사실 동양선교회의 초기의 지도자들은 거의가 벅스
톤의 밑에서 공부하였던 사람들이다.
사사오 데쓰사브로는 그 뒤에도 계속 벅스톤과의 교제를 유지했으며, 벅스톤의 사역을
28). Paul W. Worcester, The Master Key: The Story of the Hephzibah Faith Missionary Association
(Kansas City: Nazarene Publishing House, 1966), 36-39; Charles E. Jones, Perfectionist Persuasion:
Holiness Movement and American methodism 1867-1936 (Metuchen, NJ: The Scarecrow Press, 1974),
66-67; Merwin, "The Oriental Missionary Society Holiness Church in japan," 62.
29). Sent of God (Feb. 20, 1896): 3; (Nov. 17, 1910): 3.
30). Robert D. Wood, In These Mortal Hands: The Story of the Oriental Missionary Society, The First 50
Years (Greenwood, IN: OMS Internationl, 1983), 49.
31). B. Godfrey Buxton, The Reward of faith in the Life of Barclay Fowell
Buxton 1860-1946 (London: Lutterworth Press, 1949), 110. 고드프리 벅스톤은
나까다 쥬지와 사사오 데쓰사브로를 “영국에 있는 어떤 사람만큼 성서지식에 있
어서나 영적 자질과 능력에 있어서나 훌륭하다”고 말하면서 이들은 일본의 여러
지역에서 전도활동을 하고 있고, 외국 선교사들도 기꺼이 그들의 리더쉽아래 일
하고 있다“고 말했다.
헵시바선교회의 잡지에 기고하기도 하였다. 그는 1910년에는 벅스톤과 함께 미국에서 집회를 인
도하기도 하였고, 이 집회가 끝난 다음에는 벅스톤의 동역자인 윌케스와 함께 영국으로 가서 많
은 성결집회에서 간증과 설교를 하였다. 영국에서 사사오 데쓰사브로는 스타 홀선교회(Star
Hall Mission)와도 교분을 나누었다.32) 이렇게 보면 사사오는 19세기말과 20세기 초의 전세계
적인 성결운동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다고 말 할 수 있을 것이다.33)
벅스톤의 사역은 동양선교회에 큰 영향을 미쳤다. 동양선교회는 자국민을 훈련시켜 그들
로 하여금 선교한다는 선교전략을 가지고 있었다. 이런 선교전략은 한편으로는 평신도를 훈련시
켜 직접 전도에 나서게 한다는 19세기 후반의 성서학원운동의 정신에 기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벅스톤의 선교에서 직접 배운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벅스톤은 자기가 직접선교하기 보다
는 일본인을 훈련시켜서 전도하는 것이 효과적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많은 일본의 젊은이들을
훈련시켜서 일본의 복음화에 공헌하였다. 카우만도 사실을 나까다 쥬지와 사사오 데쓰사브로에게
서 구체적으로 확인했다. 여기에서 동양선교회는 그들의 선교의 촛점을 자국민 훈련에 둔 것이
다.34)
IV. 길보른(Ernest A. Kilbourne)
사사오 데쓰사브로외에 1902년에 카우만과 나까다의 사역에 동참한 사람이 있다. 그는
카우만의 오랜 친구인 길보른이다. 길보른은 1902년 8월 일본 요꼬하마항에 내려 동양선교의 첫
발을 내 딪뎠다. 이후 부터 길보른은 동양의 복음화를 위하여 평생을 바쳤다.
길보른은 1685년 3월 13일 카나다 온타리오의 나이아가라에서 태어났다. 길보른은 동양
선교회 창립자중에 제일 늦게 참여하였지만 나이는 제일 많았다. 카우만과 사사오 데쓰사브로 보
다는 세살, 나까다 쥬지 보다는 5살 위였다. 그러나 항상 조용한 성격이었던 그는 결코 자기를
드러내는 일이 없이 묵묵히 자기의 일을 감당하였다. 하지만 한번 옳다고 믿고 결정된 일이면 끝
까지 밀고 나가는 추진력도 가지고 있었다.
길보른의 가정은 원래 신앙적인 집안이었다. 따라서 그는 어려서 부터 동래의 감리교회
에 출석하기 시작했다. 그는 성장하자 전신회사에 취직하게 되었다. 그러나 보다 넓은 기회를 갖
기 위하여 카나다에서 미국으로 직장을 옮겼다. 이 때 그의 꿈은 기자가 되는 것이었다. 그래서
어느날 직장을 그만두고 세계일주에 나섰다. 그는 21살에 뉴욕을 떠나 유럽과 남아프리카의 케이
프 타운을 돌아 오스트레일리아와 뉴질랜드, 그리고 하와이를 거쳐 샌프란시스코에 돌아왔다. 샌
프란시스코에서 서부의 활기찬 모습을 보고 충격을 받았다. 그는 다시 네바다주의 버지니아에서
전에 일하던 전신회사의 직원으로 다시금 취직하였다. 이 당시 길보른은 신앙과는 먼 생활을 하
였다.
길보른은 그러나 네바다에 오래 머물지 않았다. 이곳에서 당시에 가장 발전된 도시인 시
카고로 전근을 하였다. 이곳에서 카우만을 만나게 되었고, 이 두사람은 성공적인 직장생활을 하
였다. 이 둘은 같은 부서에서 일했는데 이들 밑에는 약 1,000명 정도의 직원이 있었다.35) 카우
만과의 만남은 길보른의 일생을 바꾸어 놓았다. 어느날 회심의 체험을 한 카우만은 자기의 직장
동료인 길보른을 전도하기 시작했다. 카우만의 전도를 받은 길보른은 깊은 고민 끝에 예수를 믿
기로 작정하였다. 그 다음 길보른의 신앙행로는 전형적인 성결운동가의 그것이다. 길보른은 중생
의 경험 뒤에 온전한 성결의 체험을 추구하였고, 하나님께서는 약속하신 은혜를 부어 주셨다. 길
보른은 다음과 같이 간증한다: “나는 하나님께서 나에게 거룩한 성령과 불세례를 주심에 대해서
감사한다. 이 세례로 나는 유전죄에서 깨끗함을 받았고, 나의 마음은 성령으로 충만해 졌다.”36)
32). Way of Holiness, vol. 3, no. 3 (July 1911): 3.
33). Buxton, The Reward of Faith, 110.
34). Cf. Edward & Esther Erney, No Guarantee But God, 36.
35). Edward & Esther, No Guarantee But God, 49.
36). Mrs. Knapp, ed., Electric Shocks No. IV, 90; Paul Westphal and Paul William Thomas, The Days of
길보른은 평생 이 성결의 복음을 전하기에 힘썼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다음 길보른의 삶은 카우만이 걸어 간 길과 비슷하다. 길보른은
카우만이 다니는 은혜감리교회에 등록하여 신앙생활을 하였다. 이때 길보른은 역시 카우만과 같
이 심프슨의 선교대회에 참석하여 선교에 대한 비젼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전신회사에서 전신선
교단을 만들어 카우만과 함께 직장선교에도 힘을 썼다. 이 전신선교단은 카우만과 길보른의 초기
사역에 큰 힘이 되어 주었다. 직장생활을 하면서 보다 자기의 부족을 느끼게 되었다. 그리해서
길보른은 성경을 제대로 배우기 위하여 무디 성서학원에 등록하여 공부를 시작했다.
이러는 가운데 그의 동요였던 카우만이 1901년 초에 먼저 일본으로 선교를 떠났다. 길
보른도 카우만을 따라 일본으로 가고 싶었다. 그러나 그에게는 해결해야 할 문제가 하나있었다.
그것은 전의 직장에서 직장의 무료권을 남용하여 직장에 손해를 끼쳤는데 이것을 먼저 해결한 다
음에 선교사로 가겠다고 하나님께 약속을 하였다. 길보른은 열심을 다해 돈을 모아 그것을 배상
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였다.
그가 선교사로 가는 길도 카우만과 비슷하였다. 길보른은 먼저 신시내티를 방문하여 하
나님의 성서학원에 등록하여 공부하였다. 그리고 만국성결연맹에 의하여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일본으로 향한 것이다. 원래 어떤 교회가 그에게 일본에서의 선교활동을 지원해주기로 약속하였
는데 그가 샌프란시스코에서 막 떠나려고 하는 순간에 전보를 보내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하겠다고
알려 왔다. 길보른은 여기에 낙심하지 않고, 모든 필요를 하나님께 맡긴다는 신앙선교의 원칙을
따라 담대하게 일본을 향해 출발한 것이다. 여기에는 냎을 비롯한 하나님의 성서학원의 영향력도
작용했으리라고 본다.
길보른은 일본에 가서 선교를 하면서 이 만국성결연맹과 또 하나님의 성서학원, 그리고
이들이 발행하는 신앙잡지 [부흥사]와 깊은 관계를 유지하였다. 길보른은 자신들의 사역이 주로
이들에 의해서 도움을 받고 있으며, 또한 이들을 통하여 세계성결운동과 관계를 맺고 있다고 밝
혔다. 그러나 이것을 너무나 강조해서는 안된다. 왜냐하면 동양선교회는 처음부터 독립선교단체
이기 때문이다. 비록 재정적인 지원이 있었고, 주요 멤버들이 만국성결교회의 회원이었지만 그들
이 직접 동양선교회의 사역에 간섭하지는 않았다.37)
길보른은 일찌기 동양의 선교에 대한 특별한 계시를 받았다. 그가 선교에 대한 분명한
소명을 가진 후 어느날 태평양에서 일본으로 이어지는 큰 다리를 보았다. 그리고 이 다리는 일본
에서 한국으로, 또한 한국에서 중국으로 이어져 있었다. 중국에서는 거대한 고속도로가 직접 하
늘까지 연결되는 것을 보았다. 후에 길보른은 이것이 구체적으로 이루어진 것을 간증하였다.38)
일본의 선교를 위해서 출발한 이들은 그후 일본에서 한국으로 그리고 중국으로 선교의 영역을 확
대하였다. 이것은 길보른의 비젼에 뿌리를 두고 있었던 것이다.
길보른은 일본에 도착하여 빨리 일본어를 배우려고 일본인과 함께 살았다. 이런 길보른
의 태도는 많은 일본인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그 주위에 많은 젊은이들이 모여 들게 되었고,
그들 중에는 일본성결교회의 지도자들이 많이 나왔다. 그중의 대표적인 사람이 구루마다이다. 그
는 전후의 일본성결교회의 대표적인 인물이 되었다. 길보른은 일본사람들과 같이 지내면서 일본
선교의 지름길은 서양선교사들을 늘리는 것이 아니라 일본인들을 훈련시켜 그들로 하여금 선교하
게 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하는 것이 경제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유익하다고 판단했
다. 이것은 카우만도 나까다 쥬지도 사사오 데쓰사브로도 동의하는 것이었으며, 성서학원을 세워
토착민을 훈련시키는 것은 동양선교회의 가장 중요한 선교정책이 되었다.
Our Pilgrimage: The History of the Pilgrim Holiness Church (Marion, ID: The Wesley Press, 1976), 38
에서 재인용.
37). Paul Westphal and Paul William Thomas, The Days of Our Pilgrimage, 38. 여기에 대한 자세한 논의
는 본인의 미발표 논문, “만국성결연맹, 동양선교회, 그리고 한국성결교회” (1995년 서울신학대학교 웨슬
레 회심기념강좌)를 참고하라.
38). Edward & Esther Erny, No Gaurantee But God, 50.
나오는 말
우리는 이상에서 동양선교회의 창립자들에 대해서 살펴 보았다. 이상의 결과를 근거로
동양선교회의 성격을 다음 몇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동양선교회는 미국인과 일본인이 함께 만든 선교단체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한국
인들에게 알려진 것과는 달리 동양선교회는 미국인 선교사와 일본인 교역자가 함께 세운 단체이
다. 이런점에서 동양선교회는 초기에 선교사중심의 단체가 아니라 선교사와 본토인이 서로 협력
하여 세운 단체라고 말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관계는 뒤에는 갈등관계로 발전하였다. (여기에
대해서는 다른 기회에 다루도록 하겠다.) 하지만 동양선교회의 창립은 선교의 역사상 매우 유래
를 찾아 보기 힘든 것이다.
둘째, 동양선교회의 창립자들은 웨슬레안 성결운동에 속한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창립자
들은 거의 모두가 분명한 회심의 체험과 성결의 체험을 하였으며, 이것을 기회가 있을 때마다 간
증하였다. 그리고 동양선교회의 목적은 바로 이 웨슬레안 성결의 복음을 전하기 위함에 있었다.
이들은 모두 웨슬레안 성결론의 특징을 분명하게 파악하고 있었으며, 다른 파의 견해와의 차이점
도 잘알고 있었다. 이들의 초기 사역에서 신유와 재림에 대한 강조는 성결에 대한 강조와 비교하
여 볼 때 별로 크지 않았다.
세째, 동양선교회의 창립자들은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의 세계적인 웨슬레안 성결운동
단체들과 폭 넓은 교제를 나누고 있었다. 이 중에서 제일 중요한 것은 만국성결연맹이다. 카우만
부부, 길보른 그리고 나까다 주지도 이 단체와 관계를 맺고 잇다. 그리고 이 단체로부터 많은 재
정적인 지원과 인적 지원도 받은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동양선교회의 창립자들은 다른 단체들과
도 관계를 맺고 있었다. 영국의 오순절동맹, 만국성결선교회, 스타홀선교회와 관계를 맺고 있었
고, 또한 미국에서는 헵시바선교회, 전신선교단과 관계가 있었다. 또한 일본에서는 무엇보다도
벅스톤의 일본전도대와 깊은 관계를 갖고 있었다. 따라서 동양선교회가 만국성결연맹과 관계가
가장 깊다고 할찌라도 동양선교회의 창립자들은 독자적으로 많은 다른 단체들과도 관계를 유지했
다.
네째, 동양선교회는 처음부터 자국민을 훈련시켜 전도에 종사하도록 했다. 동양선교회는
처음부터 전도는 자국민이 하는 것이 효과적이며, 선교지의 지도자들의 리더쉽을 인정했다. 그래
서 많은 선교사를 데려와 선교에 종사하게 하기 보다는 그 지역의 전도자들을 양성하여 그들로
하여금 자기 동족들의 선교에 나서도록 하였다. 이렇게 하는 것이 경제적으로도 시간적으로도 효
과적이라고 생각했다. 이렇게 볼 때, 동양선교회는 처음부터 자전(自傳)의 전도방법을 사용했다
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선교방법의 핵심에는 성서학원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전도자를
양성하여 직접 전도에 나서게 하는 성서학원이야말로 동양선교회의 선교의 핵심인 것이다. 그러
나 이것이 어떻게 자립과 자치로 이어지느냐하는 것은 앞으로 동양선교회의 역사속에서 고민해야
할 문제로 남는다.
[출처] 동양선교회의 창립자들에 관한 연구|작성자 금강초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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