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붉은 악마(Red Devils)의 상징 치우천황(蚩尤天王) | |
환호와 열광의 월드컵의 무대가 드디어 2002년 5월31일 서울 상암경기장에서 역사적인 개막이 사작됩니다. 이번 월드컵경기는 우리나라가 월드컵 본선에 연속 5회 출전이라는 크다란 의미도 있습니다. 또한 그 어느 때보다도 16강 아니 그 너머 8강에 꼭 진출하리라는 열망이 온 국민의 가슴을 뜨겁게 달아 오르게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열기에 더욱더 큰 기운을 불어 주는 것이 바로 '붉은 악마'라는 축구동호회의 헌신적인 응원과 붉은 악마의 깃발의 상징인 도깨비 형상 무늬입니다. 즉 이 '붉은 악마'의 공식 깃발인 도깨비형상인데, 이것은 바로 그 옛날 우리민족의 배달국시대의 18세의 황웅천황중에 14번째 천황인 치우천황을 상징하는 표상인 것입니다. 한서(漢書)지리지에 보면 치우천황의 능은 산동성 동평군(東平郡)수장현(壽長懸) 관향성(關鄕城) 가운데 있다고 하며, 높이가 7척으로 진나라와 한(漢)나라 때 주민들은 10월이면 늘 여기에 제사를 올렸다고 한다. 이때에는 반드시 붉은 깃발과 같은 기운이 길게 하늘에 뻗었는데 이를 치우의 깃발이라고 한다. 그의 영걸스러운 혼백과 대장부다운 기백은 스스로 보통사람과는 매우 달라서 천년의 세월이 지나도 오히려 없어지지 않는 듯합니다. 또한 안그라픽스사에서 발간한 한국전통문양집 3권인 도깨비편에서는 도깨비의 기원중 하나로 치우천황 기원설을 설명하며, 전설속의 인물인 치우 천황은 본래 동이(東夷)계의 군왕으로 중국 황제에 대항하였다하여 후세에 제(濟)나라의 군신(軍神)으로 숭앙되었다하며, 병주(兵主)의 신이라 불리워 온 도깨비의 상징이기도 하다'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처럼 치우천황은 전신, 군신으로서 그 자체로 승리를 상징하는 인물입니다. 우리가 흔히 도깨비상이라고 잘못 알고있던 치우천황의 모습이 다양한 형태로 고구려, 백제, 신라를 비롯한 역대 왕릉 등에 조각되어있던 이유는 그가 바로 국가를 수호하는 군신이었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민담 등에서 알고있는 도깨비는 바로 치우천황의 변형일 뿐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존엄한 황제의 능에 일개 잡신이 새겨질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연유로 해서 일본이 삼족오(야타가라스)라는 건국 신화의 상징을 일본 축구를 상징하는 표식으로 만든 것처럼, 한국 축구대표팀과 그를 서포팅하는 붉은악마, 그리고 그 자체로 한국 축구를 상징하는 이미지로서 치우천왕의 상은 바로 한국 축구의 승리를 상징하는 결연한 표상이 된다고 할 것입니다. 한마디로 세계로 뻗어나가는 한국 축구의 빛나는 승리를 지켜주는 치우천왕기(蚩尤天王旗)인 셈입니다. 이렇게 붉은 악마가 공식적으로 우리나라 축구의 응원단의 상징으로 자리잡게 된 것은 1997년 초 PC통신의 축구관련 동호회에서 '98 프랑스 월드컵 아시아 예선을 앞두고 국가대표팀에게 조직적인 응원이 필요하다는 의견이 개진되면서 탄생의 효시가 되었습니다. 이후 가칭 '그레이트 한국 서포터스 클럽(Great Hankuk Supporters Club)'이 태동하여 1차 예선전부터 조직적 응원을 시작했고, 이와 동시에 통신 게시판을 통해 정식 명칭을 공모하기 시작하였습니다. 1997년 8월 마침내 '붉은악마'로 정식명칭을 확정하였습니다. 붉은악마 이름의 유래는 1983년 멕시코 세계 청소년 축구대회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우리 대표팀은 아무도 예상치 못한 4강에 올라 세계를 경악케 했고 당시 외국 언론들은 우리 대표팀을 붉은악령(Red Furies) 등으로 호칭하며 놀라움을 표시했습니다. 이 표현이 국내에 번역되는 과정에서 '붉은악마'로 표기되었으며, 영문으로도 보다 일반적인 단어인 'Red Devils'로 나타내게 된 것입니다. 붉은악마라는 이름 속에는 83년 청소년 대회 때 세계를 경악케 한 것처럼 대표팀이 세계 축구 정상의 반열에 오르길 염원하는 뜻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치우천황(蚩尤天皇)은 환인이 다스리던 환국의 뒤를 이어 환웅천황이 건국했다고 하는 배달국(倍達國)의 제14대 천황으로서, <한단고기(桓檀古記)> 삼성기편에 의하면 BC 2707년에 즉위하여 109년간 나라를 통치했던 왕이라고 합니다. 다른 이름으로 자오지(慈烏支)환웅천황이라고도 합니다. 신처럼 용맹이 뛰어났고 구리로 된 머리와 쇠로 된 이마를 하고, 큰 안개를 일으키며 세상을 다스렸다고 전해집니다. 광석을 캐어 철을 주조하는 병기 제작술이 뛰어나 세상사람들은 치우천황이라 불렀습니다. 치우란 세속의 말로 우레와 비를 크게 만들어 산과 강을 바꾼다는 뜻입니다. 한단고기에 의하면 당시에 염제유망은 신농씨 나라의 마지막 8대 임금이었다. 그 나라가 쇠퇴하는 것을 보고 치우천황은 웅도(雄圖)의 대망을 품고 서방으로 출정하여 모든 제후들을 차례로 정벌해 나간 뒤에 마침내 유망의 수도인 공상(空桑 : 하남성 진류)을 함락하였다. 이 때 대패한 유망이 탁록(K鹿 : 하북성 탁록)으로 달아나자 치우천황은 다시 진격하여 일거에 정벌하였다. 이 때 치우천황의 공상 입성소식을 듣고 천자인 치우천황의 일개 제후였던 헌원황제가 동방 배달의 천자문화권으로 부터 독자적인 ‘천자의 뜻’을 나타내며 대군을 일으켜 치우천황에게 대항해 왔다. 황제헌원(黃帝軒轅, 서기전 2692~서기전 2593)은 중국 한족이 그들 역사의 시조로 받들고 있는 인물이다. 성은 공손(公孫). 이름은 헌원(軒轅). 희수(姬水)에서 성장하여 성을 희(姬)로 고쳤다. 신농씨의 아버지 소전에서 갈려 나간 별파(別派)에 공손씨(公孫氏)가 있었는데 헌원은 바로 그의 후손이다. 이리하여 동방 고대사에서 그 유명한 탁록의 대결전이 전개된다. 이 때 10년 동안 73회의 전투가 벌어졌는데 치우천황은 일찍이 갈노산 쇠를 캐어 투구, 칼등을 만들었으며(『管子』 「地數」), 머리에 최초로 철두갑을 만들어 써서 “동두철액(銅頭鐵額 : 구리머리에 무쇠이마)”이라는 별명이 붙게 되었다. 또 이 전투에서 도술로 큰 안개를 지어 헌원군을 혼란에 빠뜨려 대승을 거두었다. 탁록의 대격전 끝에 마침내 치우천황이 승리하여 헌원을 사로잡아 신하로 삼았다. 그런데 이 전투 중에 치우천황의 장수 치우비(蚩尤飛)가 헌원군에게 성급히 공격을 시도하다 진중이 몰살당해 죽었다. 이를 사마천은 『사기』에서 “금살치우(擒殺蚩尤)”, 즉 ‘헌원이 치우천황을 사로잡아 살해했다.’고 사실을 완전히 거꾸로 뒤집어 왜곡함으로써 동방고대사의 최대의 역사적 사건을 은폐 조작시켜 놓았다. 그러나 옛 천자(古天子) 곧 배달국의 치우천황이 수천 년동안 동방의 조선족은 물론 한고조 유방과 진(秦)시대의 중국 백성들에게까지 위력적인 숭배와 추앙의 대상이 되어 왔다는 사실에서 한사군(漢四郡)을 왜곡 조작한 한무제 때의 인물인 사마천의 역사조작 음모가 더욱 자명하게 드러나는 것이다. 동방의 천자 치우천황의 위용은 배달조선족과 한(漢)족 백성들 가슴속에 살아 남아, 중국 진(秦), 한(漢) 때의 백성들은 해마다 10월이 되면 산동성 동평군에 있는 높이 7장(丈)의 치우릉(陵)에 제사를 지냈다. 이 때 붉은 기운(赤氣)이 반드시 뻗치므로 이를 “치우기(蚩尤旗)”라고 불렀다.(『사기』, 『한서』) 이처럼 치우천황(B.C 2,707년)은 우리 배달국의 14세 환웅천황으로 신시(神市)의 전통을 이어 역사상 처음으로 동방을 대통일하여 신교(神敎)문화권으로 통치하였다. 그는 동방 무신(武神)의 원조이며 우리 민족 불세출의 대성웅이다. 그 옛날 당시 중국 한족의 헌원황제를 철기무기로 가비얍게 제압하던 전쟁의 신으로서 치우천황이, 오늘날 도깨비문양으로 형상화된 붉은 악마의 상징으로서 다시 부활하여, 지금 대한의 젊은이들이 월드컵의 열기를 타고 세계만방에 알리고 있다고 느껴집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