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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 같은 신앙 (시110:1~7) ……..2005. 6.19.
누구에게 물어봐도 자기 인생의 황금 같은 시간은 청년기라고 말할 것입니다. 육신의 때에 청년기가 있듯이, 영적인 때도 청년기가 있습니다. 청년의 때는 독수리가 창공을 차고 올라가는 건강이 있고, 호랑이도 겁내지 않고 잡을 수 있는 왕성한 힘이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해보고 싶은 도전정신이 있고 할 수 있는 자신감이 있습니다. 꿈과 비전의 시기 입니다. 에너지가 넘치는 시기입니다. 그 때는 실패가 거의 없고, 실패가 두렵지 않은 시기입니다. 비판정신이 강하여 분명하게 NO 할 수 있는 시기이며, 수용능력도 가장 분명하여 YES가 정확한 시기입니다. 한마디로 색깔이 분명한 시기입니다. 그래서 청년의 시기는 누구에게나 매력이 있고 행복한 시간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청년의 때는 그렇지 못합니다.
오늘 본문은 청년들을 표현하기를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 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새벽은 하루를 여는 첫 시간입니다. 역사가 열리는 시간입니다. 그래서 중요한 성경의 역사는 새벽에 일어났습니다. 새벽은 가장 깨끗하고 정직한 시간입니다. 영적으로 보면 가장 중요한 황금시간대요, 은총의 시간입니다. 요즘 아침형 인간이라는 책이 시중에 인기가 있습니다. 그러나 기독교인의 시간은 세상의 시간보다 훨씬 빠르고 부지런합니다. 기독교 베스트셀러 작품 중에 새벽형 인간이라는 책이 오래 전부터 있습니다. 새벽에 찾아온 가장 귀한 손님이 이슬입니다. 이슬은 깨끗하고 투명합니다. 이슬은 하늘의 보물입니다. 이슬은 하나님의 은혜를 상징합니다. 그러므로 새벽이슬 같은 말은 은총 중에 은총이요 은혜 위에 은혜이며, 축복 중에 축복입니다. 이렇게 복된 시기가 청년의 때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날 청년들 중에 과연 새벽이슬 같은 청년들을 찾아보기가 쉬울까요? 모두가 밤안개와 같아요. 청년들에게 새벽시간은 없어진지 오래됐어요. 모두가 올빼미형인간들이지요. 저녁내내 컴퓨터와 씨름하다가 새벽에 잠을 잡니다. 그리고 오전내내 잠을 자다가 정오쯤 눈비비고 일어나서 점심겸 아침을 먹습니다. 한마디로 신체리듬이 완전히 부서진거에요. 낮에는 눈동자에 힘이 없어요. 밤이 되면 먹이를 사냥하는 올빼미처럼 빛이 납니다. 이것이 오늘날 청년들의 문화에요.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완전 역행하는 일이에요. 그러면 되는 일이 없어요.
불과 5-6년전만 하더라도 우리나라에 벤처기업 붐이 일어났습니다. 강남역 사거리 테헤란로의 벤처타운, 영등포의 벤처밸리가 일어나 얼마나 유명세를 탔는 줄 아세요. 그들은 저녁내내 대낮같이 불을 밝히고 일하다가 새벽이 되고 오전 시간에는 잠을 자느라고 거의 폐점상태가 되는 겁니다. 지금은 벤쳐기업들이 살아남아 버티지 못하고 벤처라는 단어조차 생소하게 들릴 겁니다.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역행하면 안돼요.
요즘은 웰빙이라는 단어가 유행처럼 번지고 있어요. 웰빙족들도 생기고요. 시대마다 흐름이 있어요. 일종의 유행 같은 것이지요. 그러나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창조질서에 역행하면 얻어 맞습니다. 청년의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은 신체나 나이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육체적인 측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신앙적인 측면을 말하는 것입니다. 영적인 시기를 말하는 것이지요.
사랑하는 여러분! 지금 여러분의 영적인 나이를 측정해 보세요. 어렸을 때는 몰라서 못해요. 나이가 들면 힘이 없고 의욕이 없어서 못해요. 그러나 우리의 신앙적인 나이가 젊으면 건강하게 일할 수 있어요.
그러므로 청년 같은 신앙을 소유한 사람들의 특징을 살펴보면,
1. 때를 분별합니다.(3절상 “주의 권능의 날”)
청년의 때를 놓쳐버리고 안타깝게 하소연하고 후회하는 사람들의 대다수는 때를 분별하지 못했다는 겁니다. 아이들의 때가 있고, 청년들의 때가 있으며, 노인의 때가 있습니다. 육신적인 때가 있듯이 영적인 때가 있습니다. 영적인 사람은 영적인 때를 잘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때를 분별하는 사람은 복을 받습니다. 영적으로도 청년의 때는 가장 영이 밝고 맑은 시기입니다. 영적으로 가장 민감한 시기입니다. 작은 것에도 쉽게 은혜를 받고 회개도 빠르고 감동도 뜨겁게 받습니다. 오늘날 인생의 성공과 실패의 가장 큰 분기점은 때를 분별하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돈을 벌 수 있는 때(기회), 건강할 수 있는 때, 화해할 수 있는 때, 효도할 수 있는 때, 충성할 수 있는 때, 봉사할 수 있는 때를 포착한 자는 성공하지만 때를 놓쳐버린 자는 실패할 수 밖에 없습니다. 영적인 것도 마찬가지입니다. 은혜 받을 수 있는 때, 은사 받을 수 있는 때, 축복 받을 수 있는 때를 잡으면 승리하지만, 놓치면 패배의 쓴 잔을 마실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오늘 “새벽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의 권능의 날”에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성경은 분명히 말씀합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구원의 날이로다.”
사람은 누구에게든지 때가 있습니다. 모든 일이나 행사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주님의 일에도 때가 있습니다. 바로 그것이 주님의 날입니다. 특별히 “새벽이슬 같은 청년의 때”에 황금 같은 영적인 시기에 부르시는 주님의 날은 그저 평범한 날이 아니라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본문 3절에 보면, “주의 권능의 날” 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주님만 갖고 계시는 권능을 행사하시는 날을 말합니다. 그 날은 5절에 나오는 “노하시는 날”을 말합니다. 물론 이 말씀은 종말론적 심판의 때를 말하는 것이지만, 오늘날 우리시대를 상징하는 날이기도 합니다. 종말에는 개인적 종말과 우주적인 종말의 두가지가 있습니다. 개인적으로 보면, 누구나 지금이 바로 주님의 권능의 날이 되는 것입니다. 주님의 권능이 역사하는 이 시기에 저와 여러분을 부르신 것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가끔씩 주님의 권능의 날에 부르심을 노골적으로 거부할 때가 많습니다.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회피합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시간개념이 희박한 사람은 성공하지 못합니다. 때를 분별하지 못하면 실패합니다. 어린아이 때는 시간개념이 없습니다. 노인의 때에도 깜박깜박 잊어버립니다. 그러나 청년의 시기는 건강한 정신이 있습니다. 때를 분명하게 분별할 줄 아는 시기입니다. 지금 당신의 나이가(영적나이) 어느 때인지를 분별하십시오. 지금 나를 부르시는 주님의 때를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청년 같은 신앙을 소유한 사람은 때를 분별하는 영적인 감각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지체없이 주님께 나아옵니다.
청년 같은 신앙을 소유한 자들의 두번째 특징은
2. 만반의 준비를 갖춥니다. (3절 중 “거룩한 옷을 입고”)
옷은 사람의 마음자세일 뿐 아니라 신분을 상징합니다. 법관이나 의사, 목사의 가운, 군인이나 경찰, 학생들의 제복은 신분을 나타냄과 동시에 마음의 자세를 표현하는 상징입니다. 세상에서 인간들이 입는 옷이 제아무리 값이 비싸고 화려하고 고귀하다고 할찌라도 거룩한 옷이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거룩한 옷은 주님의 옷을 말합니다. 이 옷은 돈으로 사는 옷이 아닙니다. 매매할 수 없으며, 사람이 만든 옷이 아니므로, 아무나 입는 것도 아닙니다. 제사장만 입는 옷입니다. 4절에 보면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 되신 예수님께서 입으신 옷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를 믿는 모든 사람은 누구든지 입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왕 같은 제사장이기 때문입니다. (벧전2:9), 또한 로마서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면 마땅히 세상의 옷을 벗어버리고 그리스도의 옷을 입어야만 합니다. 옷을 입는다는 것은 만반의 준비를 갖춘다는 뜻입니다. 학생이 등교하기 위해 교복을 입고, 군인이 훈련에 나가기 위해 전투복을 입으며 판사는 재판정에 나갈 때 법복을 입고, 목사는 설교단에 오르기 위해 가운을 입습니다. 이것이 준비입니다. 그러나 의식이 없는 사람은 준비하지 못하고 허둥댑니다. 내일 아침에 학교에 입고 갈 학생이 교복을 아무 곳에나 처박아 놓고, 아침에 학교 갈려고 난동이 벌어집니다. 구겨진 옷을 대충 입고 등교하는 그 학생은 보나마나 뻔합니다. 사람들은 나름대로 의복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도 옷에 대단히 신경을 씁니다. 영적인 사람에게도 영적인 옷이 있습니다. 더러우면 세탁을 하고, 구겨졌으면 다림줄을 해서 준비하고 입어야 합니다. 영적인 옷이라 해서 목사의 가운만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 안에 보면, 장로, 권사, 집사, 성도의 옷이 있습니다. 이 옷을 항상 빨고 다려서 입어야 합니다. 이 옷은 성도의 옳은 행실입니다. 우리가 이 옷을 입고 세상으로 나가면 사람들은 우리를 아주 유심히 관찰합니다. 아니 감시 당합니다. 혹시, 점과 흠과 티가 있나 없나 주의해서 보고 있습니다.
그래서 시편 29:2 “여호와의 이름에 합당한 영광을 돌리며, 거룩한 옷을 입고 여호와께 경배할지어다” 라고 말씀합니다. 그러므로 성도는 항상 거룩한 옷을 입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다녀야 합니다. 주름 잡힌 것은 다리고, 묻은 먼지는 털어야 합니다. 거룩한 옷을 입고, 죄악된 곳을 갈 수는 없습니다 .목사가 가운을 입고 일상 생활을 한다면 얼마나 거룩해지겠습니까? 하지만 굳이 외형적인 옷이 아니라도 성도라는 직분자체가 의복이라는 사실을 잊지 마시기 바랍니다. 때문에 성도는 걸어 다니는 성경책입니다. 움직이는 십자가입니다. 이동식 교회입니다. 작은 예수입니다. 특히 청년의 신앙을 소유한 자가 거룩한 옷을 입는다는 것은 자기의 신분을 당당하게 나타내는 표시입니다. 한마디로 준비된 신앙을 말합니다.
어떤 회사 잡지에 기고된 글에 보면, 망하는 기업의 특징을 말하는데 보통 화장실이 지저분하다. 그리고 사내가 지저분하다. 정리정돈이 엉망이고 깨진 유리창은 그대로 방치하며, 회의가 길고, 불친절하며, 임원교체가 잦으며, 사장은 거의 외출 중이라는 것입니다. 우리 신앙도 마찬가지라고 생각됩니다. 내 안과 밖이 청결하게 소제되어 있지 않으면 영적으로 부도가 납니다. 철저하게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영적으로 파산하게 됩니다. 청년의 때 신앙을 소유한 자는 항상 거룩한 옷을 입어야 합니다. 어린아이 때는 무슨 옷을 입을지, 깨끗한 지 더러운 지 구분이 안됩니다. 나이가 들면 옷을 입어도 멋이 안 나옵니다. 입으려 해도 자기 스스로 안됩니다. 하지만 청년의 때는 감각에 맞는 옷을 맵시있게 입을 줄 알고, 항상 준비합니다. 센스가 있습니다.
3. 즐거이 헌신합니다. (3절 중 “즐거이 헌신하니”)
거룩한 옷만 입으면 뭐합니까? 주님을 위해 일하기 위해 거룩한 옷을 입는 것이에요. 거룩한 옷을 입고 술집으로 후미진 골목으로 다니면 안됩니다. 주님을 위해 헌신하기 위해 이 옷을 입어야 합니다. 그런데 헌신도 힘이 있고, 능력이 있어야 합니다. 힘도 능력도 없으면 하고 싶어도 못합니다. 헌신하기에 가장 좋은 시기가 청년의 때라는 것이에요. 청년의 때는 죽으면 죽으리라는 뜨거움과 열정이 있습니다. 몸을 사리지 않습니다. 물불을 가리지 않습니다. 계산하지도 않습니다. 억지로 하지 않습니다. 누가 시켜서 하지 않습니다. 스스로 자원해서 즐거이 헌신합니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기뻐하시고, 주님의 능력이 아주 강하게 나타납니다. 역사가 강하게 일어납니다. 비록 그들의 시기에는 가진 게 없어도 몸을 드리는 헌신이 있습니다.
옛날 시골에 경제적으로 어려워 드릴게 없을 때는 날연보 라는 게 있습니다. 일주일에 하루이틀 교회와서 청소하고 수리하고 가꾸는 헌신입니다. 주님은 우리의 어떠한 헌신이라도 가장 귀하게 받으십니다. 고후
이것이 청년의 신앙입니다. 영적으로 어리면 헌신의 의미도 모릅니다. 또한 나이가 들어 어두워지면 헌신에 대한 감각이 없어지고 무뎌집니다. 청년의 때는 헌신에 대한 감동이 있고, 감격이 있으며, 정열이 있습니다. 해도해도 재미나고 아쉽습니다.
어떤 마을에 교회와 사찰이 이웃해서 있었답니다. 그런데 교회가 큰 소리로 찬양하고, 통성으로 기도하니까 너무 시끄러워 스님들이 염불이 안됩니다. 그래서 회의를 열어서 누가 교회가서 조용히 하라고 전할까라고 물어봐도 아무도 반응이 없다가, 뒤에 앉아 있던 젊은 스님이 손을 번쩍 들고, “제가 십자가를 지겠습니다.” 그러더랍니다.
헌신은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지기는 지되 즐겁게 지면 전혀 힘들지 않습니다. 영적인 에너지가 왕성하여 넘치는 청년의 때에 내가 주님께 헌신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합니까? 특히, 지금 나에게 그래도 건강이 있을 때, 힘이 있을 때, 재물이 있을 때, 재능이 있을 때, 내가 헌신의 도구가 된 것만으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전도서
사랑하는 여러분! 젊을 때 나를 부르심에 감사하십시오.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우리는 후패해집니다. 어떤 청년에게 노인이 복음을 전합니다. 청년은 나중에 믿겠다고 거절하다가 교통사고로 다리가 부러져 입원했습니다. 노인은 병문안을 가는데 쓰레기 통을 뒤져서 남이 버린 시든 꽃을 신문지에 싸서 갖다줬습니다. 청년은 질겁을 하면서 “할아버지, 누가 오라고 하셨나요? 누구를 놀리시는 겁니까? 왜 시들고 망가진 꽃을 주시나요. 나가세요” 그 때 할아버지 왈 “이봐 청년, 자네도 시든 꽃을 불쾌하게 여기듯이, 우리 하나님도 자네의 시든 영혼을 싫어하신다네” 맞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눈먼 것, 병든 것, 저는 것, 상한 것을 싫어하십니다. 내 인생의 가장 황금 같은 시간을 드리십시오. 세상의 정욕과 욕망에 다 써버리고 쓰다 남은 몽땅연필처럼, 고장난 시계처럼, 방전된 밧데리처럼 드리려고 하지 마십시오. 더 이상 나중에 드린다고 미루지 마시고 지금 드리십시오. 지금이 내 인생의 가장 젊고 싱싱한 청년의 때임을 잊지 마시고 바로 즉시 드리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다 같이 본문 3절을 읽어 보십시다. 청년이라는 단어를 빼고 자기의 직분을 넣고 읽어보십시다. 할렐루야!
첫댓글 좋은 게시물이네요. 스크랩 해갈게요~^^